<47. 초대>
베로니카가 라카-둠을 보며 물었다.
“기밀이라는데 이런 거 다 말하셔도 되는 건가요?”
“뭐… 이 정도쯤이야. 애초에 대법도회 정도의 조직에서 비밀 프로젝트 한두 개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단지 거기에 쓰인 기술이나 참여 인물, 위치 정도만 말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무슨 기밀이라고 들어가면 몽땅 감금되고 나올 때 모조리 죽여서 나오는 줄 알아?”
“…하긴…….”
“그렇게 하면 기밀 프로젝트 하나 할 때마다 수백 명씩 죽어나갈 텐데… 그 정도 프로젝트에 들어갈 정도의 인재는 그렇게 소모품으로 쓸 수 없는 인재라고. 내가 그 이적 때문에 지금 저 베로니카라는 아이의 동생 이름은 말하지 못하고 있잖아.”
아까부터 베로니카의 동생 이름을 말하지 못 하는 것이 답답했던지 라카-둠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후… 동생은 잘 지내고 있는 건가요?”
“뭐… 내가 볼 때는 조금 불나방 같기는 했지만… 잘 지내고 있지.”
전혀 잘 지내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기에 베로니카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그 녀석, 무리하고 있더라고. 어차피 혈연도 없고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상태라 그런지 프로젝트 완성에만 매진하고 있었어. 하루에 한… 한두 시간 정도 자던가? 삼 년 전 이야기니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
담담하게 말하던 라카-둠을 보며 베로니카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어딘지 가르쳐 주세요!”
“아는데… 아까 말 했지 않나? 위치는 말할 수 없다고. 이적에 걸려. 그리고 찾아가서 뭐하게? 거기 방비가 장난이 아니야. 무단으로 침입하려고 하면 벌집이 될걸.”
기밀 유지 이적도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 그 강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이런 종류의 이적은 거는 것보다 푸는 것이 훨씬 어렵다. 그리고 라카-둠의 기밀 유지 이적은 1급 법도사가 실행했다. 이 말은 대륙에 이 이적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과 동일하다.
라카-둠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기에 베로니카는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동생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은 알려야 한다. 혈연이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아이의 행동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명을 태워가며 연구에 매진하진 않을 것이니.
“베로니카…….”
리안이 자신의 아내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베로니카가 일어섰다.
“안 되겠어요. 동생을 찾아가겠어요.”
“도대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가겠단 겁니까?”
리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베로니카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제 이능으로 어떻게든 해결될 거예요.”
“찾아서 들어가는 건 어떻게 하려고?”
“그건…….”
서로가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고 있을 때 시안이 옆에서 멍하니 서있다가 툭 하고 내뱉었다.
“음… 그러니까 동생분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으신 거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위치도 모르고 접근할 방법도 없으니 문제인 것이고요. 위치야 형수님의 능력으로 찾으면 될 테지만 뚫을 수 없을 테니.”
“맞습니다.”
시안은 묘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뭐하러 저런 어려운 방법을 쓴다는 말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베로니카를 보며 시안은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거 그냥 나라샤 아저씨한테 편지 한 통만 써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음?”
“아니 뭐… 특급 보안 인물이라 아예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고 해도 이렇게 명확하게 알고 달려들면 편지 하나 전해주는 정도야 못 하겠습니까? 나라샤 아저씨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생각지도 못한 간단한 방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확실하지 않을 때야 법도회 쪽에서 리마이누를 감추고 있어도 강하게 추궁할 수 없었지만 확실하다면 편지 한 통 넣어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법도회가 초국가적 기관이라고 할지라도 국왕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면 더 그렇다.
“뭐… 사실 될지 안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샤 그 아저씨라면 잘 아시겠지요.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마차 타고 오면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 그때 물어보세요.”
“음? 시안,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리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에게야 참석하고 연락이 왔다지만 시안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기에 모를 터인데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니 이상했던 것이다.
“라-샤르-로아에서 나오는 걸 느꼈거든. 일 다 끝났으면 저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흐흐.”
자신까지 나서지 않게 된 것에 만족한 시안은 몸을 돌려 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라-샤르-로아가 혹시 여기 앞마당에도 하나 있냐?”
라카-둠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장인어른이 타고 오셨을 그게 이 근방 유일한 라-샤르-로아입니다…….”
“마차로 열흘 걸리는 거기 맞지?”
“…네.”
“허허… 거참…….”
라카-둠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 ☆
“흐음… 알겠네. 그 정도라면 될 것 같군. 한번 보내보도록 하지. 하지만 내가 법도회의 자세한 사정까지야 모르니 확신할 수는 없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라샤 국왕은 별문제 없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뭘,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시안 저 아이가 튀어나온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문제지…….’
원래 자신은 이런 연회까지 참석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샤르-로아를 통해 시안이 튀어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 나왔다.
사람이라는 게 쉽게 바뀌지는 않지만 쉽게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시안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면 자신은 이제까지 세우고 있던 계획들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시안 그 아이는 어디 있나?”
“음…….”
민망한 듯 얼굴을 돌리는 리안을 보고 나라샤는 괜찮다는 듯 말을 재촉했다.
“괜찮으니 말해보게.”
“내성의 해먹 위에… 누워있을 겁니다.”
“좋군, 아주 좋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나라샤 국왕 폐하의 말이 이해가 안 간 리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라샤 국왕은 진심이었다.
‘아주 좋군. 여전히 게으르다니.’
아예 속세를 떠나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가족을 버리고 그럴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기에 나라샤는 이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누가 들으면 자신보고 치사하다고 하겠지만 나라샤 국왕은 진심이었다. 시안이 돌아다니며 터트린 사고를 본 나라샤 국왕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비록 그게 시안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실제로 시안이 없던 5년은 너무 평화로웠다. 하리쟌 때문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5년간 발생한 피해액을 다 합쳐도 시안이 여행 다닌 한 달간 발생한 피해액의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나라샤는 그 하리쟌의 침입도 시안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5년간 점점 하리쟌의 침입 빈도가 늘어나더니 최근, 정확히는 시안이 깨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온 다음부터 더 심해지고 있었다. 성벽을 모조리 가이라로 둘러놓지 않았으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아주 죽이 척척 잘 맞는군. 재앙의 여신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나라샤는 5년 전 자신을 협박하러 나타났던 스탄탈 1세를 떠올리며 속으로 투덜거리다 자신을 바라보는 리안과 베로니카의 눈길을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리안 경을 위해 내가 그 정도도 못 해주겠는가. 나가서 연회를 즐기도록 하게. 동생이 돌아왔는데 형이 빠지면 되나.”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사람들은 주인공인 시안은 쏙 빠진 기묘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무시당했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법도회 쪽에서 그런 사람은 정말 찾을 수 없다고 하는군요.”
리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샤 국왕은 리마이누란 자의 혈연이 나타났으니 연락을 하게 해 달라고 여러 방향으로 손을 썼다.
하지만 법도회 측에서는 완강하게 그 사실을 부인했다. 자신들은 그런 자를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리마이누라는 법도사는 5년 전 엑자일 대법도회를 탈퇴하였다고 했고, 그 뒤로는 자신들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편지 한 통 전해주는 게 힘들 리 없을 터인데 너무 과한 대처.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요?”
베로니카가 울먹였고 옆에서 쿠크락샤와 코라-둠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우선… 좀 더 방법을 알아봅시다.”
진행이 막혔지만 아직 확실한 건 없었기에 리안은 다른 방법을 알아보자고 베로니카를 설득했고 베로니카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직접 사람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베로니카 양 되십니까?”
“…누구십니까?”
“하하. 저희를 애타게 찾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르는데요.”
찾은 적도 없는 수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들을 방문해서 사랑 구애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 누구나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없는 야밤에 창문을 넘어 찾아온 자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자신의 이능 <운명의 길>이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아도 될 것이다.
“음… 그러면 베로니카 양이 아니라 리미니아 양을 찾아왔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
“그것참, 리마이누 군도 그렇고 이름이 어려우시군요.”
“…동생이 보내서 오셨습니까?”
자신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동생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든 동생과 연관이 있어서 찾아온 자들일 터. 그렇기에 베로니카는 이 수상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쫓아낼 수 없었다.
“음… 동생분이 보내서 왔다기보다는 사내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저희가 방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군요. 하하.”
“…….”
“그리고 그렇게 정식 회선으로 저희를 찾으시면 곤란합니다. 리마이누 군은 대법도회 소속이 아니라 저희 소속이기 때문에 소용도 없다고요. 덕분에 찾아오기는 했지만요.”
“…저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정정당당하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기에 베로니카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베로니카의 말에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동생분은 지금 사정이 있어서 일하신 곳에서 나오실 수 없습니다만… 만약 못 만나게 하면 계속해서 찾고 들쑤시실 거죠?”
“…….”
“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국왕까지 동원해서 쑤시면 조금 귀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바로 끌려가는 건가요?”
이렇게 수상한 자가 아내의 방까지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의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이 방으로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방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곳에 있는데 말이다.
그 말은 이자가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상상도 못 할 수단을 가졌거나,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되었건 좋은 것은 아니다.
“하하. 저를 너무 야만적으로 보시는 것 아닙니까?”
“…….”
야밤중에 혼자 있는 여성의 방에 쳐들어온 남자가 할 말은 전혀 아니었기에 베로니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 남자가 뻘쭘했는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사실 뭐… 저희 입장에서도 야만적으로 처리하는 게 훨씬 편하긴 합니다. 겨우 백작가 며느리 하나 죽어 나자빠졌다고 큰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
대놓고 로만가를 무시하는 남자의 말에도 베로니카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용한 베로니카를 보며 남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진짜 야만적인 사람이 저희를 쫓을 것 같아서요. 그건 매우 큰일이거든요.”
“설마 그 야만적인 사람이 저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갑작스레 창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베로니카가 놀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창틀을 부여잡고 창 바깥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 도련님이 있었다.
야심한 밤, 라빌란 내성의 응접실에는 로만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로만 백작, 리안, 코라-둠, 쿠크락샤, 베로니카, 그리고 시안까지…….
어찌 보면 평소와 별 차이 없는 평범한 모임. 야심한 밤이긴 하지만 그렇게 이상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사람 하나가 끼어 있다는 것이 평소와 달랐다.
응접실에 앉아 홀짝이며 차를 들이켜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
그것까진 괜찮았지만 그가 가져온 정체불명의 제안이 큰 문제였다.
“흠… 차가 꽤나 맛있군요. 어느 지역 차이지요?”
“로탄 지방 특산품이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해주시오.”
로만 백작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불청객에게 하는 말투치고는 너무나 정중했지만 로만 백작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초인은 천 년 이래 열둘 아니었나? 아니지… 그 그라나인족까지 하면 열넷에 아들까지 하면 열다섯. 그래도 너무 흔하게 보는군.’
“흠, 그러지요. 그러니까… 며느리 되시는 베로니카 양이 동생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데려다주겠다, 이 뜻입니다. 아, 그런데 저 반말하면 안 됩니까? 나이도 제가 훨씬 더 많을 텐데.”
“존대가 좋을 듯한데요.”
시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주먹도 까딱거리면서.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뭐, 알겠습니다. 말투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현재 리마이누 군은 바깥으로 나오기 조금 곤란한 상황입니다. 아, 오해하지는 마시고요. 신상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지금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아주 중요한 단계에 들어섰기에 바빠서 그런 것이니까요. 리마이누 군은 우리에게도 매우 소중한 인재거든요. 함부로 대할 수 없지요.”
“음…….”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가만 놓아두면 베로니카 양이 가슴 아파할 테니 사내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저희의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 만나게 해 드리기로. 리마이누 군도 혈육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굉장히 기뻐하겠지요. 하하.”
“뭔가 조건은 없습니까?”
강대한 자가 와서 하는 제안치고는 너무나 관대하다. 그렇기에 리안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사실 이곳에는 겸사겸사 온 것입니다. 저희가 볼일이 있는 사람은 저기 서 있는 시안 씨거든요.”
“……?”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시안이 표정에 이채를 띠었다.
“저한테 볼일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오 년 전부터 관심이 많았는데 갑자기 훌쩍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연회까지 열며 거창하게 등장하시니 저희가 찾아오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하! 사실 이런 일에 제가 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제가 얼마나 공사다망한데. 다 시안 씨 정도 되니까 이렇게 찾아온 것이지요.”
‘오라는 스틸 양은 안 오고 웬 오징어 같은 녀석이…….’
이게 운명이라느니 하늘의 안배라느니 떠들고 있는 사내를 보며 시안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다.
“동생에게 볼일이라니… 무슨 볼일이오?”
리안이 되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입니다. 할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후후, 저랑 같이 가시면서 알게 될 겁니다.”
“…….”
“어차피 베로니카 양만 저희와 같이 보내기엔 너무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이 따라와 봤자 방해만 될 거고요. 차라리 시안 씨와 베로니카 양, 딱 둘이 저와 함께 간다면 아주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가슴을 콕콕 쑤시는 한 마디 한 마디였지만 로만 백작과 리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을 따라가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도련님이 위험할 수도 있지 않나요?”
코라-둠은 남자의 내면을 보고 그 말이 모두 진실임을 알았지만 걱정이 앞섰기에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남자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하하하하하! 누가 누구를요?”
“…….”
그 반응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시안이 강대하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눈앞의 초인이나 리마이누가 속한 조직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당장 초인이 자신들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든지 시안도 위험해질 수 있을 것 같기에 걱정이 앞섰는데 남자가 웃는 걸 보니 무언가 자신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본 남자가 너무 웃은 나머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 미치겠네. 이래서 인간들은 참…….”
“…….”
“원래 부연설명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이해시켜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스러운 가족을 보내는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죠.”
“…….”
“여러분들이 볼 때는 저랑 시안 씨랑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보이지요? 뭐, 이해합니다. 땅에서 하늘 보면 어디가 높은지 보이겠습니까. 거기서 거기지.”
“음…….”
존대는 하지만 무시하는 투가 팍팍 묻어나오는 그 말에도 사람들은 대꾸하지 못 했다. 기세에 눌렸다기보다는 그제야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시안 씨는 여러분 입장에서 초인인 제가 봐도 거의 초인이에요. 그래서 시안 씨에게 제안을 들고 온 거고요. 그런데 누가 누굴 죽이겠습니까? 하하! 그럴 생각 전혀 없어요.”
사람들은 그 말에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시안은 그 시선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저랑 베로니카 형수님이랑 같이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요.”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저 남자는 꽤나 자신에 대해 상세하게 아는 것처럼 보였기에 시안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곳에 형수를 혼자 보내는 것도 찝찝했기에 시안은 다녀오기로 했다.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지…….’
“시안…….”
“걱정 말고 여기 계십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가족들에게 웃어 보인 시안은 남자의 앞에 가서 섰다.
“뭐… 시간 끌 거 없으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아니, 그런데…….”
말을 흐리는 남자를 보며 시안이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자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준비됐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베로니카 양은 준비 안 해도 됩니까?”
남자가 웃으며 시안의 뒤를 가리키자 베로니카 양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어서 준비해 올 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우리도 도와주마.”
그러고서는 위로 올라간 가족들은 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
“보셨습니까? 후후. 여성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요. 이런 걸 모르다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시안이 되물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듣자 하니 시안 씨가 모태솔로라는……. 저는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하하하하하… 켁!”
빠각!
“헉?”
시안은 갑자기 옆의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턱이 돌아가자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먹을 쥐고 남자의 턱주가리를 돌려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무의식이 저지른 참상에 당황한 시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자를 살그머니 소파 위에 눕혀놓았다.
“후… 급하게 준비하느라 이것밖에 준비 못 해서 불안하긴 하지만… 잘 다녀와요, 동생. 무슨 일이 생기면 도련님한테 붙고.”
“네, 언니. 고마워요.”
“그나저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게 아닌가 걱정되는군요.”
“보아하니 그 남자는 도련님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는데 괜찮지 않을까요?”
위층에서 준비하고 인사를 하느라 두 시간은 족히 걸린 가족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시안!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뭐 레이디의 준비가 오래 걸리는 것은 기본 아닙니까.”
수상한 남자가 보이지 않자 리안은 의문을 가지고 시안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남자는 어디 갔니?”
“아, 그 사람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 시안은 소파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본 리안은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남자의 무신경함에.
다른 하나는 이렇게 눈앞에 누워있는데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의 경지에.
‘역시… 초인이구나. 그런데…….’
“시안.”
“음?”
“…무슨 짓을 한 거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그래, 형.”
하지만 리안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곳을 바라본 시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리안이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턱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헉…….’
“…어서 깨우려무나.”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로만 백작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사실 아까 전부터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는 있었다.
정체 모를 초인은 시안은 지극히 존중해 주었지만 자신들은 거의 개미 취급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시안의 가족이니 어느 정도 대접을 해 주긴 하지만 그 이상 바라지 말라는 기운을 팍팍 풍기면서.
애초에 다른 초인들도 그러니 이상할 건 별로 없었다. 스탄탈 1세도 그런 기운을 풍기고 있었고. 저 남자보다는 훨씬 예의를 차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안이 특이한 초인이란 걸 남자는 간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안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까불거리는 자를 곱게 두고 볼 정도로 성격이 좋지는 못 하다. 자신은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선을 넘어가는 자에게는 즉시 손이 먼저 뻗어나갔다.
남자를 발로 툭툭 차서 깨우는 시안을 보며 로만 백작은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저 아이라면 베로니카를 잘 지켜 줄 것이다.
“시안 씨에 대한 제 판단을 수정해야겠군요.”
“…….”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야성미가 넘치는군요. 세상에, 원시시대가 생각납니다. 그냥 말도 없이 턱을 돌려버리다니.”
“…그만 놀리십시오. 그리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잘난 척하라고 했습니까. 인과응보입니다.”
“그거 저니까 멍만 들고 끝난 거지, 일반인이었으면 아마 아래턱이 통째로 날아갔을 겁니다.”
“…….”
“베로니카 양도 조심하십시오. 시안 씨는 초면인 저에게도 이럴 정도인데…….”
자신을 라가오페라고 소개한 남자는 응접실에서 발생한 가벼운 해프닝을 별문제가 아니라고 하며 넘어가는 듯했지만 기묘한 이동수단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내내 집요하게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한 번 더 돌릴까…….’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시안을 본 라가오페는 말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도착했군요. 다들 내리시지요.”
라가오페와 함께 내린 곳은 셀라인 백작령의 라-샤르-로아 근처였다.
“…설마 이곳 지하에 비밀기지가 있다거나 그런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그렇게 조그만 크기가 아닙니다. 베로니카 양 때문에 여기까지는 이동수단을 타고 왔지만 이제부터는 라-샤르-로아를 타고 갈 겁니다.”
그러고는 라가오페는 라-샤르-로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 본 베로니카가 소곤거렸다.
“이상하군요.”
“무엇이요, 형수님?”
“라-샤르-로아가 연결된 곳 근처는 다 대도시예요. 라가오페라는 자가 말한 대로라면 그 크기가 상당할 텐데… 그런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지만 고민해 보았자 해결되는 문제는 없었기에 시안과 베로니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라가오페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