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흔적>
“대화는 즐겁게 나누셨습니까?”
라가오페는 내려와서 리마이누와 베로니카를 보며 물었다.
“아…….”
중요한 대화는 나눈 듯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은지 베로니카가 말끝을 흐렸다.
“뭐, 천천히 계속 나누십시오. 여기까지 오셨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누셔야지요.”
“고맙습니다.”
“뭘요. 후후.”
라가오페가 리마이누를 대하는 자세는 베로니카와는 사뭇 달랐다. 그 광경을 시안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십니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리마이누 씨는 대접을 잘 해주시는군요.”
차마 인간 취급은 해 준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 돌려 말했지만 라가오페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웃었다.
“하하. 저희는 능력 위주로 사람을 대우하니까요. 초인이 아니더라도 리마이누 군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뭐… 가끔 엄청 답답하긴 하지만요. 리마이누 군 같은 특이 케이스가 많지가 않아 다행입니다.”
한숨을 쉬며 말하는 라가오페를 보니 아직 완전히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저렇게 되려나…….’
이해는 갔지만 내키지는 않았기에 시안은 좀 더 노력하기로 했다.
“시간이 남으니 아래를 좀 돌아보고 오셔도 될 듯합니다. 좀 돌아보고 오시겠습니까? 안내해 드리지요.”
“음… 그래도 되겠습니까? 듣자하니 기밀이 상당히 중요하다던데…….”
“하하, 괜찮습니다. 어디 가서 말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어차피 봐도 모르실 거 아닙니까.’
라가오페는 이 말은 안으로 삼켰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대화 좀 더 나누고 계십시오. 혹시라도 필요하면 큰 소리로 이름 부르시면 됩니다.”
“……?”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베로니카를 보며 시안이 부가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제가 이 섬 안에만 있으면 여기서 나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으니 오겠다 이 뜻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못 믿겠다는 표정 하시면 상처 받습니다.”
대화를 하도록 둘을 내버려두고 내려오면서 라가오페가 작게 웃었다.
“그것참, 베로니카 씨는 아직 초인에 대한 개념이 잘 안 잡히신 모양이군요.”
“뭐…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실 테니까요.”
대단하다는 말만 들었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고 있으니 아까같이 말이 되냐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우선은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안 씨가 재미있어하실 만한 것들 위주로 보여드리지요.”
그러고는 아래층을 주욱 돌아보기 시작했다.
라가오페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라가오페를 꽤나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분들은 라가오페 씨가 라-반더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힘쓰는 것은 몇 번 보여 주었으니 알겠지요. 다들 머리가 좋으니까요.”
‘그래서 저렇게 겁먹고 있나…….’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지나쳤다.
라가오페의 설명은 매우 자세했다.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기에 잘 안다는 느낌이 아니라 애초에 박학다식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이 사람은 초인이 아니었어도 뭘 해도 성공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에휴… 칼이라도 잘 쓰는 게 어디야…….’
사람이 한 구멍만 파야 성공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라가오페의 설명을 듣던 시안은 이곳이 대충 뭐 하는 곳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곳은 병기창 같은 곳인지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곳 아마란의 경우는 무기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요.”
‘이곳……?’
뭔가 다른 곳도 있다는 뜻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무기는 칼이나 도, 창 같은 것이었고 좀 더 나아가도 대포가 한계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전혀 달랐다. 애당초 만들고 있는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흉흉하지 않다면 무기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상당히 특이하게 생긴 무기들이군요.”
“후후. 칼이나 대포 같은 것을 상상하셨나 보군요.”
“네. 하지만 여기서 만들어지는 것들을 보니 전혀 다르게 생겼군요.”
숭숭 구멍이 뚫려 있는 노란색의 구체부터 시작하여 이적을 빼곡히 새겨 넣은 네모난 판.
투명하게 생겨 안에 무언가 맹렬하게 울부짖고 있는 별 모양의 형상체에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작은 구슬들까지.
시안의 표정을 본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후후. 이곳에 있는 것들은 그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설계된 것뿐입니다.”
“본래 목적이라면…….”
“살상이지요. 모두가 파괴력과 명중력, 효율성, 내구성 등을 극대화시키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기다란 포신이나 날붙이가 없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흠…….”
이해가 가지 않는지 시안이 갸우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가오페가 한쪽으로 걸어갔다.
“백 마디 말보다 한번 보시는 것이 더 낫지요. 흠… 이거부터 써 볼까요.”
라가오페가 다가가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연구하고 있던 사람들이 쭈욱 갈라섰다.
그곳에는 자그맣게 생긴 막대기가 하나 있었다.
“후후. 뭔지 잘 모르시겠지요? 이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라가오페가 그 막대기를 쥐고 기운을 불어넣자 갑자기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오?”
평범한 막대기가 순식간에 빛나는 검으로 재탄생하였다.
“이건 리마이누 군의 아이디어를 실현해 본 작품입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전투 시에 발동시키면 검날이 생기는 것이지요. 위력도 쓸 만합니다. 한번 만져보시지요.”
그 말에 시안이 건네주는 막대기를 잡고 빛나는 부분을 손으로 쥐어보았다.
“헉……!”
주변 사람들이 기겁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안이 잡은 부분이 파지직거리며 맹렬하게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기하긴 한데…….”
시안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고 라가오페가 이해한다는 듯 말을 받았다.
“좀 약하지요? 후후. 애초에 이곳에 있는 것들은 다 시제품입니다. 완성돼서 쓸 만하겠다 싶은 것은 본진으로 옮겨서 추가적으로 강화 연구를 하지요. 다음 장소로 가실까요?”
그리고 라가오페는 시안에게서 받은 막대기를 다시 던져두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까 시안이 신기하게 본, 주위를 붕붕 날아다니던 구슬이었다.
구슬들은 허공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가운데에 푸른색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라가오페가 다가가자 이번에도 역시 연구하던 연구진들이 뒤로 쓱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간 라가오페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구슬들 사이로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그 푸른색의 무언가를 잡았다.
그 순간, 일렁거리는 무언가로부터 기괴한, 동시에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끼아아아아악!>
“이런, 아직 이거 수정 못 하였군요.”
“아직 코데란 계수 변경 연구 진행이… 으윽.”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말을 이었다.
“뭐, 상관은 없습니다. 시안 씨, 이쪽으로 오시죠.”
그러고는 시안에게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신기하지요? 자아가 있는 에너지 응집체입니다. 저 구슬들을 돌리고 있는 게 다 이 응집체의 의지이지요. 여기 있는 연구팀이 뭘 잘못 건드렸다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시안의 손에 쥐어져 있는 푸른 에너지체는 발악을 하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손안에서 얌전해진 상태였다. 구슬도 그 기분을 반영하는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던 구슬들은 비실비실 힘없이 시안의 손에 잡힌 에너지체를 중심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상당히 귀엽네요, 이 녀석.”
“후후. 그렇죠? 만약 연구가 진행되면 전투용으로 쓰지 못 하더라도 애완동물 정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아직 안 정해졌습니다. 최대한 귀여운 이름으로 붙여 볼 생각입니다.”
만들어지면 형한테 하나 선물해 볼까 했지만 형은 아마도 이 귀엽게 생겼지만 성격 더러운 녀석을 컨트롤하지 못 할 것 같았기에 포기했다.
지금 라가오페나 시안이니 손에 쥐락펴락하며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지 마스터 수준이라면 이 구체에 다가가는 순간 타 죽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맹렬하게 돌아다니던 구슬에 맞아 몸에 구멍이 송송 뚫리고 어디 한 군데가 부러졌을 것이니 다가가지도 못 하였을 것이다.
아마 초인들 정도는 되어야 이 녀석을 애완용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여유가 되면 시안 씨도 나중에 한 마리 분양해 드리지요. 보자… 이 녀석 분양이 얼마면 되지?”
라가오페가 옆의 연구원을 보며 물었다.
“6개월 정도 더 연구하면 안정적으로 고에너지 응집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원은 에너지체에게서 새어나오던 비명이 작아지자 여유가 생겼는지 숨을 작게 헐떡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다는군요. 나중에 전혼옥 재료 가지고 오실 때 한 마리 받아 가시면 되겠습니다. 하하!”
시안은 아까 그 귀여운 녀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자… 다음은… 이제까지는 시제품만 보셨으니 재료 구역도 한번 보시지요.”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자신들이 있던 건물을 벗어나 섬의 한구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구역은 섬의 구석에 있나 보군요.”
“네. 재료들 특성상 냉각용으로 물이 많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곳에서는 대륙 전역에서 모아온 재료 및 금속을 연구합니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들어간 건물은 아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대장간 같은 느낌이군요.”
“뭐… 드콘족들이 꼭 이런 분위기여야 한다고 주장해서… 좋은 시설 내버려두고 왜 이러는지 참…….”
기술이나 이적이 발달해도 재료나 금속을 다루는 솜씨는 드콘족을 따라가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이곳은 드콘족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 때문에 그들이 일하는 일부 구역이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 세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곳은 아까와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묘한 이질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중에는 제가 봐도 신기한 금속들이 많습니다. 이건 굉장히 신기한 금속인데… 드콘들이 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손에 들린 작은 금속 막대를 흔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기에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특징이 있습니까?”
“이 몽둥이는 타격 계수를 변화시켜 충격량을 변화시킵니다. 그것도 약한 쪽으로요.”
“……?”
그러면서 원리를 주절주절 설명해 주는데 시안은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때려도 상대는 아프기는 엄청나게 아프지만 죽지는 않는단 건가요?”
“그렇지요. 전심전력으로 휘두르면야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후후. 무기로서는 전혀 쓸모가 없지만… 이건 시안 씨 드리지요.”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시안에게 금속 막대를 건넸다.
“음?”
“다음부터는 이걸로 때리시지요, 주먹 말고.”
“…….”
“멍도 안 생깁니다.”
“쩝… 미안합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자신을 잘 챙겨주는 라가오페에게 상당히 호감이 생긴 터라 미안해진 시안은 사과를 했다.
“가장 쓸모없는 금속을 보여드렸으니 이번에는 최근에 구한 금속 중 가장 쓸모 있는 금속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바깥으로 나왔다.
“왜 바깥으로 나오신 거지요?”
“음… 이게 금속을 보관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건물 안에는 보관할 수가 없었거든요. 오시지요.”
바깥으로 라가오페를 따라갔더니 거대한 이적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이적법진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그 위로 검푸른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대한 법진이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검푸른 막의 안쪽이 잘 보이지가 않았기에 시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쪽을 보려고 했다.
“무슨 금속이길래 이런 법진까지…….”
“아, 그게… 쓸 만한 금속이긴 한데 너무 무거워서… 저희가 들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보관이 너무 힘들더군요. 계속 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평소에는 이렇게 아차원 무중력 공간을 강제로 형성하고 그 안에 보관하며 연구합니다.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옆의 법도사들을 가리키며 법진의 작동을 멈추라고 하였고, 법도사들은 법진을 이곳저곳 조작하였다.
서서히 법진이 가동을 멈추며 검푸른 막이 사라지자 라가오페가 잽싸게 안쪽으로 뛰어들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금속을 잡아챘다.
조금 부담스러운 무게였던지 두 손으로 휘청거리며 받아 낸 라가오페는 양손으로 끙끙거리며 작은 금속 조각을 들고 왔다.
“후우…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도 나름 라-반더인데 엄청 무겁습니다. 이게 대체 뭔지… 음? 시안 씨?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금속을 들며 시안을 바라보던 라가오페는 시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았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4년 전 우샤란 사막에 처박혀 있던 걸 들고 왔지요. 후… 커다란 소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 보았더니 녹아 붙은 사막 안에 이 조각 하나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더군요. 이게 뭔지 아시는지요?”
시안은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째서 크로나-폰 조각이…….’
라가오페가 들고 있던 건, 5년 전 시안이 스틸 양에게 부탁한, 금이 간 크로나-폰의 조각이었다.
☆ ☆ ☆
베로니카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 그래서 지금 생활에는 만족하고 있니?”
“음… 나는 마음에 들어, 누나. 이곳에는 새로운 것도 너무 많고 배울 것, 연구할 것도 많아.”
‘이런 아이였지…….’
예전 한국에 있을 때부터 천재로 자자하던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주목받고 신동이라고 불린 아이.
그렇기에 부모님은 아이를 위해 연구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자신의 부모님들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 결과 동생은 그 재능을 훌륭하게 꽃피워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누나 입장에서는 이 아이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보호와 연구에 대한 무서운 집중이 맞물려 빚어진 동생의 순수함.
힘든 일과 무서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세상이 책처럼 아름답고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이 아이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강대한 사람들을 만나 보호받는 것은 좋지만 이용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스러웠다.
그 표정을 본 리마이누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나는 지금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하는 연구들은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도 훨씬 대단해. 이곳의 이적이라는 것들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야.”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과학의 한계를 이적이라는 것들은 너무나 가볍게 넘어섰다.
마찬가지로 이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들 중 과학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것들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연구하면서 리마이누의 재능은 더욱 찬연하게 피어나고 있었고, 리마이누는 현재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설령 이용당한다고 하여도 전혀 상관없다. 자신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에도 바빴으니. 적어도 자신이 속한 조직, <헤란테르>는 자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신비 중 가장 믿어지지 않는 존재들.
<초인>
5년 전, 영상기기를 통해 전해져 온 모습을 본 리마이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인간의 몸으로 저 대법진이 필요한 에너지를 모조리 공급해내다니!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모두 마무리되면 초인에 대한 연구도 해 보고 싶었다.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말이다.
그 영상을 본 이후로 리마이누는 솔직히 초인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아까 누나가 라가오페에게 거침없이 질문을 던질 때에도 조마조마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리마이누는 아까는 누나를 만난 반가움에 물어보지 못 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 그런데 누나, 시안 경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음? 너 혹시 도련님을 아니?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케르발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 말에 리마이누는 살짝 놀랐다. 결혼한 것은 아까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시안 경이 도련님이라니.
“응. 그때 케르발에서 봤었지.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사이로.”
그 이후로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더 나누던 베로니카와 리마이누는 라가오페가 다시 들어오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
아쉬운 표정을 짓는 베로니카를 보며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뭐…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발언에 베로니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어차피 기밀 유지만 되고 프로젝트에 방해만 안 된다면 저희도 리마이누 군을 강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곳이 워낙 비밀스러운 느낌이라 한번 들어오면 평생 갇혀서 흑인노예처럼 일만 해야 될 것 같았는데 라가오페는 분명 저런 말을 했었다.
“뭐, 저희는 리마이누 군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의 창의성을 더 존중하니까요. 강제해봤자 의미가 없지요. 저희는 베로니카 양이 나타나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돌아가실까요?”
마지막이 아니란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베로니카는 리마이누를 보며 작별의 인사를 했고 라가오페는 베로니카를 데리고 라-샤르-로아로 향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가면서 올 때와의 차이점을 느꼈다.
“저기… 도련님은 어디 계시죠?”
도련님이 안 보이자 덜컥 겁이 난 베로니카가 불안감에 되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생각이 났다는 듯 대답했다.
“이런, 그걸 말씀 안 드렸군요. 시안 씨는 베로니카 양을 저에게 부탁하고 급한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네?”
그 말에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굉장히 급한 표정으로 떠나셨는데…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베로니카 양은 제가 로만가까지는 데리고 가 드리지요.”
굉장히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가오페를 보며 베로니카는 갑작스럽게 닥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 ☆
우샤란 왕국 북쪽, 아니 이제는 넓어진 영토 탓에 우샤란 왕국 서북쪽이라고 말해야 하는 지역에 위치한 <카리트> 대사막.
인간의 범접을 불허하는 대사막은 우샤란의 서북쪽에 위치한 동시에 타란의 남쪽 국경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즉, 지리적으로 타란과 우샤란을 나누는 사막이라는 뜻.
이 땅은 우샤란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도움도 되지 않지만 국경을 줄여준다는 입장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어떤 군대도 이곳을 넘어 상대의 국가로 쳐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 군대가 타란의 군대라고 해도.
이 사막 덕분에 우샤란은 현재 타란과의 분쟁 지역을 콘-티안 산맥과 카리트 사막의 사이에 위치한 <크로마타> 대평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모일수록 강대한 위력을 발휘하는 켈-루펀을 운용하는 우샤란 입장에서 이는 분명 득이 된다.
덕분에 여섯의 그랑-반더를 보유한, 아직도 이빨이 날카롭게 살아있는 타란 왕국이 우샤란을 쉽사리 넘어오지 못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강성한 왕국의 군대들조차 범접하지 못 하는 황량한 대사막 위를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크로마타 대평야에 위치한 라-샤르-로아를 통해 도착한 시안이었다.
‘라가오페 씨, 일단은… 고맙습니다.’
시안은 이곳으로 오기 전 라가오페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원래 우샤란 지역은 민간인의 라-샤르-로아 이용을 철저하게 금지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 시안 씨를 막으면 거길 통째로 날려버리실 거지요? 그 지역은 저희도 유용하게 쓰는 지역이라 그러시면 곤란하고… 이걸 가져가시지요.’
그러면서 아까 라-샤르-로아를 통과할 때 썼던 작은 아티팩트를 건네주었다.
‘이건…….’
‘별건 아니고, 이거 들고 타면 시비 걸릴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 들고 다니세요.’
‘어… 그런데…….’
‘하하!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작은 배려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뭔가 작은 파장이 느껴지는데… 혹시 이거 무슨 위치 추적이나… 이런 거 있는 것 아니지요?’
‘…오해이십니다. 그건 제가 혹시나 조난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있는 기능일 뿐이지요.’
‘…라가오페 씨가요?’
아마 지옥에 처넣어도 살아 돌아올 것 같은 라가오페를 위해 이런 기능을 탑재했다는 소리에 시안이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희도 시안 씨 위치 좀 궁금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분명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에휴… 이런 거라도 없으면 망나니 같은 조직원들 관리하기 너무 힘들다고요.’
‘믿겠습니다.’
만약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버리면 되기에 시안은 그냥 챙겨들었다. 그리고 왠지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했기에 시안은 라가오페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크로마타의 라-샤르-로아를 통해 이곳으로 나왔다.
과연 라가오페가 준 아티팩트 덕인지 갑작스레 튀어나와 달려 나가는 시안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뭐 막으려고 해도 막지는 못 하였겠지만.
‘스틸 양…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라가오페가 준 아티팩트에는 몇 가지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지도의 기능도 들어 있었다.
라가오페가 표시해준, 조각을 발견한 곳을 향해 달리던 시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큰일 났군…….’
시안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무언가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스틸 양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하여도 그 흔적을 살피면 그 뒤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이곳으로 달려왔는데 상황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산과 사막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자신이 싸운 라그랑이나 케르발에는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 흔적을 보면 상대의 강함이나 스타일 같은 게 짐작이 간다.
하지만 사막은 그런 것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만약 라가오페가 아티팩트로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찾을 수조차 없었을 정도로. 라가오페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전 사막을 모조리 헤집어도 이곳을 못 찾았을 것이다.
무언가 기세의 잔재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였지만 그 조각이 발견된 것이 4년도 더 되었다고 한다. 4년이면 아무리 대단한 전투라도 기운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좀 더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자 시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깜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하여 살펴보니 라가오페가 준 아티팩트였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이곳저곳을 눌러보니 갑자기 허공에 무언가 쭈욱 하고 나타났다.
“엥?”
뭔가 싶어 보니 아티팩트에서 뻗어 나온 초록색의 빛이 허공에 사람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라가오페 씨?”
<맞습니다, 시안 씨. 하하하!>
놀랍게도 그 아티팩트는 움직이는 라가오페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내고 있었다. 게다가 소리까지.
“영상 통신이라니… 이거 정말 별 기능이 다 있군요.”
<후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들고 다니면 편할 거라고. 그거 정말 잘 만든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안은 갑자기 라가오페가 연락한 이유를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시안 씨가 뭘 찾으러 그곳에 가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못 찾으셨지요?>
“정확하십니다.”
<사막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지요. 게다가 4년 전이라면. 그 아래를 몽땅 헤집는다면 모를까.>
“어? 그렇게 하면 찾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 시안이 자신의 발아래 사막을 빤히 쳐다보자 라가오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것도 하실 수 있습니까? 허어… 방금 한 말은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다. 눌어붙은 자국이야 찾을 수 있겠지만 별 의미 없겠지요. 애초에 저희가 4년 전에 갔을 때 그 근처 조사를 해 보았지만 별 흔적을 못 찾아서 돌아온 거였습니다.>
“아…….”
그렇다면 이곳에서 무얼 찾을 기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후후. 하지만 제가 도와드리지요. 보아하니 스탄탈 1세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발로 뛰어서 어느 세월에 찾겠습니까.>
“음? 방법이 있으십니까?”
<사실 생색이야 제가 내지만 제가 돕는 건 아닙니다. 항상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는 법이지요.>
알아듣지도 못 할 말을 하는 라가오페를 보며 시안은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크로마타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는 이미 라가오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을 데리고.
“…형수님은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까?”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분이 좀 기다려 보라고 하셔서…….”
당황한 표정의 베로니카를 보고 시안이 라가오페에게 물었다.
“형수님은 왜 여기 계신 건가요?”
“우선 다른 이야기부터 좀 하지요. 시안 씨, 저희는 원래부터 시안 씨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머.”
제반 사정을 듣지 못한 베로니카가 이상한 오해를 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거 아닙니다, 형수님. 그런데 저에 대해 어찌 알고?”
“5년 전 케르발을 날려버리실 때 저희 조직원 한 명이 보고 있었거든요. 리비아스 씨요.”
“아하…….”
그때 그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짐작이 갔다. 마르가란에서야 자신의 얼굴을 아무도 확인하지 못 하였을 테지만 초인이라면 먼 거리에서 자신에게 들키지 않고도 관찰할 수 있었으리라.
“그때부터 저희가 얼마나 시안 씨를 찾아다녔는지 모를 겁니다. 정말 반했습니다, 그때.”
“형수님, 계속 이상한 상상하지 마시고요. 계속하시지요, 라가오페 씨.”
“뭐… 시안 씨는 결국 못 찾았지만… 모종의 정보원을 통해 케르발의 괴인이 시안 씨라는 걸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입 제안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상대가 뭘 좋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취향을 파악해야 영입을 할 수 있는 법.
“신기하게도 시안 씨는 초인인데도 가족을 굉장히 아끼시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안 씨의 가족분들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십시오. 사생활까지는 조사를 안 했으니까요.”
“뭐, 괜찮습니다.”
그 조사 덕분에 자신의 가족들도 전혼옥을 제안 받았으니 시안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런데 조사를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가족이라고 해야 할 사람이 늘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참, 제가 인간이었다면 리안 씨가 부럽겠더군요. 진짜 무슨 소설 같은 인생을 살고 계시던데.”
“하하…….”
“부인이 드콘에, 수인에, 이계인에… 후후. 대단합니다. 어찌 되었건 저희는 리안 씨의 부인 되는 분들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하면서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그제야 시안은 왜 라가오페가 형수님을 돌려보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설마 셋째 형수님의 능력이 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까?”
“음… 아예 무슨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
생각해보니 셋째 형수는 무슨 이능을 사역하는지 들은 기억이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도련님? 제가 뭐… 도울 일이 있나요?”
아직 시안이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베로니카는 중간에 끼어 계속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베로니카 양의 능력이라면 분명 시안 씨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후후. 베로니카 양을 리안 경과 만나게 해준 ‘운명의 길’이라면요.”
라가오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 ☆ ☆
처음 베로니카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 베로니카는 상황 파악도 못한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분명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온데간데없고 듣도 보도 못한 어느 산자락에 떨어져 있었다. 차 옆에 있던 동생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지만 급격한 상황 변화에 베로니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복한,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온 베로니카가 가장 먼저 바란 것은 음식도, 물도, 안전도 아니었다.
<나를 지켜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 순간, 베로니카는 마음속에서 뭔가 기묘한 느낌이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로 걸어가야 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
하지만 베로니카는 육감이나 그런 걸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처음에는 이 기묘한 느낌이 자신의 공포로부터 비롯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고 무작정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갔다. 그곳이라면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가면 갈수록 가슴은 미칠 듯이 뛰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결국 베로니카는 그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산자락의 작은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흉가였지만 베로니카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고 그 문이 열리고 나온 사람을 보자마자 마음속의 기묘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웬 수더분하게 생긴 노인이 자신을 간호해 주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언어. 여덟 개의 국어를 자유자재로 쓰고 스물하나의 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그녀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우선 안전한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빠르게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즉시 언어를 배우고 상황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노인은 친절했고 자신을 친손녀같이 보살펴 주었다.
원래부터 언어에 재능이 탁월했던 그녀는 새로운 말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고 자신을 보살펴 준 할아버지와 어느 정도 무난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찾아가려던 불빛 방향에는 아주 무도한 양아치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더 주변 상황을 알아갈수록 더 당황하게 된다.
<다른 차원>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봤자 기억을 잃고 납치된 채 다른 곳에 버려진 것일 거라고 생각한 그녀조차도 예상하지 못 한 상황.
한동안 패닉에 빠졌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마자 그녀는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느 날, 자신과 같이 살던 노인이 길을 가다 용병 놈들에게 걸려 맞아 죽은 것을 계기로 그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까지 노인의 보호 속에 있었기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이 세상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알게 된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마음속에서 기묘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이 야만적인 세상에서 완벽하게 보호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런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조차도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 할, 그런 남자.>
그 순간, 예전에 느껴졌던 기묘한 느낌이 느껴졌다.
그때는 느낌을 무시했지만 이제는 믿는다. 이 세계는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고, 이능이라는 기묘한 능력이 존재하는 세계였으니.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느낌도 분명 이능의 한 종류일 것이다.
그렇게 베로니카는 자신의 느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느낌을 찾아갔을 때 처음 만난 자는 한 상인이었다. 이자는 분명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자신을 완벽하게 지켜줄 자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 마음속의 기묘한 느낌은 깜빡이긴 했지만 여전히 유지 중이었다.
<…이 사람은 중간 과정에 불과하구나.>
그 상인 밑에서 계산을 하고 경리 일을 하며 계속해서 기묘한 느낌을 따라 이동했다.
기묘한 느낌은 그녀를 때로는 여행자에게로, 때로는 행정관에게로, 때로는 무장에게로 안내했다.
베로니카는 비록 무력은 모자랐지만 영리하였기에 만난 자들을 돕고 도움을 받으며 계속해서 그 기묘한 여행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2년에 걸친 여행 끝에 지치고 말았다. 기묘한 느낌이 안내하는 대로 계속계속 건너가도 기묘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위험했다. 베로니카의 미모는 눈에 띄기 충분했고 이국적인 미모의 여성이 홀로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행위였다. 베로니카의 이능이 없었다면 험한 꼴을 당해도 몇 번은 당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목숨이 위험해질 때마다 그녀의 이능은 더 강해졌고 마음속의 기묘한 울림 역시 점점 더 강해졌다.
너무나 지쳐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어딘가에 정착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앞에는 리안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 기묘한 울림도 멈추었다.
그녀는 드디어 폭력이 지배하는 이 대륙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남자를 찾아낸 것이다.
강하게 마음속으로 바라는 자를 찾을 수 있는 그녀의 이능 ‘운명의 길’에 의해.
참고로 이능의 이름은 그녀 스스로 지었다.
☆ ☆ ☆
“흠… 형과 형수님의 만남에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시안은 어떻게 형이 형수님을 찾아냈나 궁금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형수님이 형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분명 시안 씨를 스틸 양에게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녀의 능력은 여행의 막바지쯤 분명 타인을 도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으니까요. 리안 씨도 몇 번 도운 적이 있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제약도 많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 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 저도 이 능력으로 시안 도련님이나 제 동생을 찾아보려고 했을 때는 실패했으니까요. 애초에 느낌조차 들지 않아요.”
“그래도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군요. 하필 이 능력을 가진 게 시안 씨의 형수님이라니.”
라가오페가 무언가를 기억해낸 듯 소리쳤다.
“형수님이면 더 좋은 거 아닙니까? 무슨 문제이지요? 설마 사용하면 수명이 깎인다거나…….”
“뭐,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단지…….”
그제야 베로니카는 라가오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급히 자신이 먼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늦고 말았다.
“이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면 키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래서 이제까지는 리안 경 말고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고…….”
“헉…….”
그렇다면 큰일이다.
시안은 이 어처구니없는 페널티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무리 엑서가 다양하다지만 무슨 그런 괴상한 제약이…….”
“저도 조사하면서 신기했는데… 이런 이능은 베로니카 씨에게 처음 나타난 것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끄응…….”
형수님의 능력을 듣고 실마리가 생긴 것 같아 좋아했는데 시작부터 막히고 말았다.
이때 시안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해입니다, 라가오페 씨. 그 능력은 한 번 더 개발되어 이제 그런 제약 없이도 사용할 수 있어요.”
“음, 그렇습니까? 흠… 자료의 업데이트가 조금 느렸나 보군요. 시안 씨, 잘 되었군요! 지금 당장 해보시지요.”
“형수님, 당장 가능하겠습니까?”
시안은 마음이 급했기에 베로니카에게 허락을 구했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도련님.”
그리고 시안이 의자에 앉자 베로니카가 시안의 뒤로 서서 이마를 시안의 뒤통수에 가져다 대고 양손으로 시안의 머리를 감쌌다.
“이제 강하게 떠올려 보세요, 시안 씨가 찾고 싶은 분을. 제가 흘려보내는 엑사르에 절대 거부하시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이윽고 베로니카의 심장에서 뻗어 나온 엑사르의 유동이 뇌와 손을 거쳐 시안에게 접촉했다. 시안은 혹시나 형수가 다칠까 봐 방어를 풀고 그 흐름을 거부 없이 받아들이며 스틸 양을 강하게 떠올렸다.
‘후… 사람 걱정시키는군요, 스틸 양. 그런데 이거… 뭔가 이상한데…….’
어느덧 흘러들어오던 엑사르의 유동이 약해져 갔다. 거의 끝나간다는 뜻.
운명의 길 발동이 끝나자 시안이 뒤를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어떻게… 찾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옵니다. 얼마나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느낌이 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어요.”
그 말에 시안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뭘요.”
그런데 시안은 궁금한 게 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수님, 그런데…….”
“잠깐만요. 그 이야기는 좀 이따 하도록 하지요. 우선 빠르게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단호한 베로니카 양의 말에 시안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형수님이 자신을 위해 서둘러 주는 것이 기분이 좋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라가오페 씨, 그러면 나중에 다시 뵙지요.”
“후후. 스틸 양을 꼭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스틸 양 같은 사람은 귀중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드린 건 가지고 계십시오. 가지고 있으면 각종 혜택이 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가오페는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사라졌고 그제야 시안은 입을 열었다.
“저희도 가 볼까요? 아, 그런데 형수님…….”
“네?”
베로니카가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까 하신 대로라면… 굳이 키스 안 하셔도 될 것 같았는데…….”
시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까 발현하는 방식을 보니 굳이 키스로 발현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뇌와 손을 통해 엑사르가 움직였는데 설령 지금보다 수준이 떨어졌다고 해도 입으로 발현할 필요는 전혀 없어보였기에 시안이 의아하여 물어본 것이다.
그 말에 베로니카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다.
“…세요.”
“네?”
“비밀 지켜주세요, 도련님.”
“……?”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정은 이랬다.
베로니카와 리안이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기, 베로니카는 가슴이 아팠다. 긴 여정 끝에 자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찾았는데 벌써 골키퍼가 둘이나 있었던 것. 아니, 어찌 보면 둘밖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리안은 자신이 봐도 정말 완벽한 남자였으니.
야릇한 분위기는 있었지만 적극적인 관계를 펼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베로니카에게 기회가 왔다.
<베로니카 양, 혹시 그 능력으로 동생을 찾을 수 있습니까?>
<동생이요?>
<네… 동생이 실종된 상태인데 꼭 찾아보고 싶습니다.>
베로니카는 이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가능하긴 한데… 이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려면 제약이 있어요.>
<제약이요? 무슨 제약입니까?>
그 뒤로는 예상한 대로이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일사천리인 법.
비록 시안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수많은 드라마와 연애 소설을 바탕으로 내공을 쌓은 베로니카는 수련밖에 모르던 리안을 어르고 달래어 이능의 제약 이후 단계를 팍팍 밟아나갔고 그대로 결혼에 골인했다.
‘세상에…….’
셋 중 가장 여려 보였던 셋째 형수님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니.
말하고 나자 오히려 속이 후련한지 베로니카는 시안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비밀인 것 아시죠? 제가 이렇게까지 도와드리는데 설마…….”
“후후. 무슨 소리십니까, 형수님. 저를 뭐로 보고. 거… 그보다… 혹시 저도 그런 걸 좀 배울 수 없을까요?”
“음? 뭘 말이에요, 도련님?”
“아 그… 방금 이야기에서 형한테 써 먹던 그런 거… 남자 버전은 없습니까?”
그러자 베로니카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후. 물론 있지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하게 웃으며 라-샤르-로아를 이용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