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운명의 길>
“형수님, 그런데 그 운명의 길이라는 건 어떤 식으로 효과가 나타납니까? 막 이쪽으로… 이 정도 거리를 가면 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지요?”
라-샤르-로아로 걸어가던 중 궁금해진 시안이 물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간절하게 소망하면 찾을 수 있는 이능이라니. 형수님이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시안이 계속 자신이 지은 이름을 부르자 민망했는지 시안을 보며 말했다.
“도련님, 그냥 능력이라고 불러주세요. 음… 저도 제 능력에 대해 완벽하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이능이라는 것들이 워낙 불확실한 것들이 많아서… 그날 컨디션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요.”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도련님이 물어보신 것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을 듯하네요. 우선 강하게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제가 무슨 행동을 해야 될 것인지 느낌이 와요.”
“아하!”
시안은 형수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예전, 자신이 벽에 막히기 전에도 그런 느낌이 계속 왔었으니까.
어떻게 움직이면 강해질 수 있는지, 무엇을 하면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가 보이던 시절.
자신의 경우 이능은 아니었지만 형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라면… 바로 그 사람에게 향하는 게 아니에요.”
“음,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중간 중간 단계를 거쳐 간다고 해야 하나?”
“음…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해가 가지 않은 시안이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예를 들어 설명드리면 만약 제가 A라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고 저와 접점이 없다면 그 사람의 행방을 알고 있을 만한 B라는 사람을 찾아가게 되는 거지요. 만약 제가 B라는 사람도 모른다면 B의 행방을 아는 C라는 사람을 향해 가게 되고요… 그런 식으로 해서 제가 당장 하루 안에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방향으로 우선 가게 되는 거지요. 만약 제가 24시간 안에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몇 사람을 더 거쳐야 하는 거고요.”
이 정보는 베로니카가 자신의 이능을 여러 번 실험해 본 결과 끝에 나온 결과였다. 하지만 예외의 결과도 나온 적이 몇 번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말에 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면 저나 동생분을 못 찾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들어보니 그런 식으로 건너가면 연결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한데요.”
“제약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뛰어 찾아갈 때 제 능력으로 무리겠다 싶으면 바로 막혀요. 이러면 엄청나게 돌아가게 되지요. 도련님이나 동생 같은 경우는 제 인맥이나 능력으로는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못 찾은 듯하고요.”
“이런.”
“그리고 너무 많은 단계를 돌아가야 하면 못 찾는 경우도 있어요. 보통 은둔하고 있거나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 이런 경우가 있지요.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이 단계가 대폭 줄어들어요.”
“엄청 편리한 능력이지만… 제약이 상당하군요.”
“자잘한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제약은 방금의 세 가지예요. 그래서 사실 좀 의문이에요. 도련님에게 능력을 쓰겠다고 할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도련님이나 라가오페라는 자가 찾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면… 제 능력으로는 무리이거나 엄청나게 돌아가야 할 테니.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쓰면 서너 단계를 넘기도 힘들어요. 즉, 세 가지 제약 모두에 걸린다는 건데 이렇게 느낌이 강하게 온다니…….”
그 말을 들은 시안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나 스틸 양의 행방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초인의 행방을 아는 자가 그리 많을 리 없으니.
하지만 형수님은 찾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듯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시안은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형수님, 형이 보고 싶으면 그냥 말하고 오셔도 되는데…….”
“오해하지 마세요.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느낌이 와서 그런 거예요.”
“…….”
기운차게 출발했던 시안과 베로니카는 라빌란의 내성 앞에 서있었다.
베로니카는 도착해서도 막힘이 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사람의 앞에 섰다.
“음? 벌써 다녀오셨나요, 베로니카 양?”
“…셀린 경이 첫 번째이신 겁니까?”
“네.”
마음에 떨리는 기묘한 울림을 느끼며 제대로 찾아왔음을 느낀 베로니카가 대답했다.
“셀린 경, 혹시 남편에게 전해줄 수 있나요? 어디 좀 금방 다녀오겠다고.”
“그러지요.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시안이 따라갔지만 걱정이 되었던 터라 셀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살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네. 생각 이상으로 잘 해결되었어요. 남편에게는 도련님이랑 어디 금방 다녀오겠다고 전해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시안이랑요?”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셀린을 보며 베로니카가 셀린 경에게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희 남편이 훨씬 멋있어요.”
“그건 그렇지요.”
‘다 들리는데요.’
시안이 뒤에서 투덜거렸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셀린 경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시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끝난 건가요?”
“네. 어서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야 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찾아간 사람에게 다음 사람의 행방을 물어본다거나… 그런 건 필요 없나요?”
그 말에 베로니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그건 아니고 다음 사람을 향한 느낌이 와요. 마치 그 사람을 만나면 정보가 갱신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바로 오는 경우도 있고, 무언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요. 이 느낌을 쭉 따라가면 될 듯한데… 아마 많은 단계를 거치지는 않을 거예요. 어서 가보지요.”
그러고는 다시 라-샤르-로아로 발걸음을 옮기는 베로니카를 보며 시안 역시 그 뒤를 따랐다.
☆ ☆ ☆
“여기는…….”
시안은 라-샤르-로아로 로아-티안으로 이동한 후 육로로 이동해 도착한 곳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인물은 이곳에 있는 모양이군요.”
“이 도시 이름이… <칸쿤>이라고 했던가요? 흐음…….”
시안은 도시 칸쿤 앞에 펼쳐져 있는 쿠라단 협곡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쿠라단 협곡.
콘과 티안을 가로막는 콘-티안 산맥을 가로지르는 협곡.
400년 전 전란의 시대에 태어난 라-반더, 쿠라단은 초인의 경지에 오른 후 무얼 해 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 산맥을 넘어 다니기가 너무 짜증 났던 기억을 떠올리고 갑작스럽게 결심을 한다.
<심심한데 저거나 한번 뚫어보자.>
그대로 자신의 독문병기인 케루탄을 꼬나들고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콘-티안 산맥 자락으로 향한 그는 무작정 산맥을 때려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단 반년 만에 콘 왕국과 티안 왕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협곡이 콘-티안 산맥을 가로질러 생기게 된다. 한 초인의 심심풀이로 인해 생기게 된 이 협곡에는 그의 이름을 따 ‘쿠라단 협곡’이란 이름이 생기게 되고, 이 협곡을 통해 콘과 티안의 물류 이동이 활성화됨에 따라 대륙 왕국의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가오포라가 키라안과 브로샨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면, 쿠라단 협곡은 우샤란과 티안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리고 칸쿤은 그런 쿠라단 협곡의 티안 쪽 입구에 위치한 무역도시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콘 왕국과의, 이제는 우샤란과의 모든 무역이 이 칸쿤을 통해 이루어지고, 또 이곳을 통해 침략할 수밖에 없기에 이곳은 거대한 요새가 건설되어 모든 상인 및 물류의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초인들에 대해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엄청나군요. 어떻게 반년 만에 이런 협곡을…….”
베로니카가 경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초인, 초인, 그러지만 잘 와 닿지 않았는데 눈앞에 생겨있는 이 거대한, 그러면서 끝도 보이지 않는 협곡을 보니 그 무게가 새삼 와 닿았다. 자신이 살던 차원에서도 반년 만에 이런 거대한 협곡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초인이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시안을 살짝 쳐다보며 물었다.
“도련님도 반년 만에 이런 협곡을 팔 수 있으신가요?”
“아… 뭐… 가능합니다.”
반년이면 이 콘-티안 산맥 전체를 지워버리는 게 가능했지만 그건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시안은 그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후후. 저도 언젠가 그런 광경을 직접 보고 싶어요. 동생은 한번 봤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초인이 힘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베로니카는 잘 모르고 있었기에 나라샤 국왕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정지하십시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흠… 그러고 보니…….”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아무 곳이나 돌아다닐 수 없다.
‘아니지, 나라샤 아저씨를 믿는다.’
시안은 이제 슬슬 나라샤 그 아저씨가 얼마나 치밀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신분패를 내밀었다. 굳이 붉은 사자가 붙은 신분패가 아니더라도 강렬한 효과가 나올 것이다.
“들어갑니다?”
“헉…….”
병사는 신분패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시안의 얼굴을 보며 통과시켰고, 이런 과정이 몇 차례 더 지나서야 베로니카와 시안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분이군요.”
베로니카는 처음 보았겠지만 시안은 눈앞의 인물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쿤타리안의 몸을 빌려 되살아난, 칼-굴의 후예 칼라굴.
그가 시안과 베로니카의 앞에 서 있었다.
“흠… 칼라굴 경? 오랜만이군요.”
시안은 가볍게 인사를 했지만 칼라굴은 엄청나게 놀란 표정이었다.
“뭐지? 왜 여기 있는 건가. 분명 로만가에서 귀환 축하 연회가 열리고 있는 것 아니었나?”
칼라굴도 티안의 고위층이기에 초청장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뭐, 그랬었지요. 하지만 일이 있어서요. 어쨌건 반갑습니다. 형수님, 그다음은 어디로 가면 됩니까?”
“음… 저번에 제가 무슨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죠?”
“네?”
“느낌이 끊겼어요. 이러면… 여기서 뭔가 해야 한다는 건데… 뭘 해야 할지 느낌이 안 와요…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이런…….”
시안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했다. 형수님만 믿고 있었는데 이러면 큰일이다.
시안과 베로니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칼라굴이 말을 걸었다.
“저기… 별일 없으면 나는 가 봐도 되겠나?”
“아, 뭐… 가셔도 됩니다.”
“그래.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 보도록.”
시안은 별 생각 없이 대답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짜려고 했지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칼라굴 경, 거기 서 보실까요? 형수님은 잠깐 나가 계시지요.”
자신은 눈치가 없지만 단 한 종류의 촉이 기가 막히게 좋다.
예전의 허물 사태도 그렇고, 라그랑 지방에서 드잡이질 하기 전에도 이 촉이 왔다.
누구를 털어야 하는지.
지금 이 촉이 눈앞의 칼라굴을 향해 맹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흐음…….”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왜 처음에 아무 말도 안하고 도망가려고 하셨습니까?”
“…….”
“제가 평소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마음이 조금 급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안은 자신의 촉이 틀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족쳐야 할 놈을 족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다. 아마 지금도 라가오페가 준 막대를 사용하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안면도 있는 칼라굴에게 그러기는 찝찝했기에 적당히 사실을 토해내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칼라굴은 마음을 정했다. 사실 비밀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 단지 엮여들기 싫어서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을 뿐.
하지만 눈앞의 시안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이 조급해보였다. 저기 까딱거리는 막대기가 휘둘러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신상에 별로 유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놓는 칼라굴 입장에서는 더는 버티기 힘들었기에 시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 ☆ ☆
칼라굴은 시안이 여행을 시작할 무렵 국왕으로부터 우샤란 쪽으로 향하는 쿠라단 협곡의 칸쿤 요새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곳은 좁기 때문에 그랑-반더 하나만 배치해 놓아도 시간 벌기 및 방어가 충분하기에 칼라굴을 보고 부탁한 것이다.
칼라굴은 이제 의지할 동족이 없기에 인간과 융화되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국왕과 마찰을 빚어 좋을 것은 없기에 그 요청을 수락했다. 제 멋대로 살 수 있는 권리는 초인에게만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칼라굴이 칸쿤에 머무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 그론-필라 옆의 하늘산맥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흐음… 이것 때문에 멀어지고 싶었던 건가…….>
신경 쓰이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자신에게 별로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 그는 수련을 하다가 혼을 자극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으음?>
불길하진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친숙한 느낌.
그리고 혼이 자극받는 그 느낌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다. 종족이 인간이 아니었으니.
<수십 년 전에는 분명 너 같은 동족의 혼은 느끼지 못 하였는데… 어떻게 살아 있느냐? 하급전사야. 혼을 보아하니 전쟁 중에 죽은 녀석 같은데.>
<대전사님…….>
혼의 연결이 느껴지지 않아 멸망한 줄 알았던 자신의 종족 칼-굴.
종족을 대표했던 가장 강력한 자.
칼라굴은 자신이 죽은 이후, 종족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을 줄 알았던 대전사, <네크라>의 얼굴을 400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마주하게 되었다.
☆ ☆ ☆
“흠… 칼라굴 경, 제가 분명 사실을 말해 달라고 했는데요. 소설이 아니라.”
“소설이 아니다.”
“사백 년을 넘게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 우리가 심장으로 힘을 계속 넘겨받는다고 하여도 목숨까지 넘겨받는 것은 아니니까. 수명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런데 무슨…….”
시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하려 할 때 칼라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전사 네크라만 제외하고 말이지. 하긴… 전쟁 중이라고 하여도 대전사가 죽는 건 상상이 잘 안되는군.”
“……?”
“그는 칼-굴 중에서도 정말 특별하니까. 초인의 경지에 오른 것도 모자라 종족에 전해지는 세 분파의 대주술을 모조리 섭렵했다. 그런 자는 언제부터 시작된 지 모른 칼-굴의 역사 속에서도 처음이었지.”
그리고 칼라굴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 ☆ ☆
강대한 종족, 칼-굴.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던 제국과 당당히 맞서 싸운 것도 모자라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마지막에 제국이 시전한 대이적이 아니었다면 현재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칼-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능력을 가졌기에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갈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제국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 비밀에 대해 칼라굴은 설명을 해 주었다.
칼-굴이 본신 무력의 강대함만 믿고 싸우려고 했다면 제국의 다양한 무기와 대이적에 휩쓸려 멸망을 피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종족, 칼-굴이 제국과 맞서 싸우고, 또 압도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장과 무기를 통해 계승되는 힘.
다른 하나는 개개인이 익히고 있는 대주술 <소르마>.
이 두 가지 요소는 안 그래도 강대한 칼-굴 개개인을 괴물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고, 제국의 수천만 인구에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한 숫자로 제국을 밀어붙이고 또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소르마는 세상이 세 가지의 본질, 시간과 공간,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칼-굴의 믿음에 따라 세 가지를 다루는 분파로 나누어진다.
시간을 다루는 <타마라>
공간을 다루는 <스파마>
생명을 다루는 <소마린>
엑사르를 사역하여 구현되는 소르마는 오로지 칼-굴족만, 그것도 타고난 계열만 익힐 수 있기에 이능에 가깝고, 또 배우고 연구할 수 있기에 이적의 성격도 지닌다.
각 종족은 힘과 기억을 선대로부터 이어받는 동시에 무력과 자신의 육체에 맞는 소르마를 수련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대전사 네크라는 달랐다.
세 종류의 소르마를 모두 다룰 수 있었고 그도 모자라 각 소르마를 궁극까지 갈고닦아야 사용할 수 있는 세 종류의 비술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초인이 되는 칼-굴은 부지기수였지만 한 분파의 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칼-굴은 손에 꼽았다.
그렇게 힘든 걸 세 가지 모두 성취해 낸, 게다가 초인인 네크라가 대전사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세 분파를 다루는 초인, 네크라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했으니까.
그리고 생명을 다루는 분파 소마린을 궁극까지 수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비술. 이제껏 타마라와 스파마를 대성한 자는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전투에 도움이 덜 되는 소마린을 대성한 자는 네크라뿐이었다.
비술의 이름은 분파의 이름과 같다. 소마린. 소마린 분파를 대표하는 궁극의 비술.
소마린은 그들의 말로 ‘불로불사’를 뜻한다.
☆ ☆ ☆
“그렇기에 대전사는 죽지 않는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종족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을 때도 항상 같은 모습이었지.”
“허… 그거 인간은 못 익힙니까?”
“아까 말했듯이… 인간의 몸으로는 아예 소르마 자체가 사용이 불가능하다. 필요한 기관이 없으니까. 나 같은 경우도 소마린 분파를 익히고 있었는데… 이 몸으로는 주술을 사용하지 못 한다.”
“…….”
시안은 듣다 보니 이 네크라라는 자의 특징이 어디서 많이 듣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가오페가 말한 미친 사냥꾼이라는 녀석.
<어휴… 말도 마십시오. 인간의 초인이란 초인은 몽땅 죽이려고 든다니까요.>
<게다가 죽지도 않아요. 나타날 때마다 그냥 똑같은 녀석이 옵니다.>
<강하기는 어찌나 강한지… 못 이깁니다. 죽지도 않는 놈이 강하기까지 하니… 동면이라도 안 했으면 정말 위험했을걸요.>
‘라가오페 씨… 안 깨어났다고 하더니…….’
무언가 슬슬 그림이 그려진다.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 조직에도 안 들어간 스틸 양.
예정과는 다르게 빨리 깨어난 초인 사냥꾼.
게다가 자신은 스틸 양을 찾고 있는데 운명의 길은 대전사를 만난 칼라굴에게 자신을 안내했다.
“…….”
시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칼라굴은 빠르게 변명했다. 여차하면 정말 죽게 생겼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난 진짜 아무 관계 없다! 진짜!”
“…….”
“대전사는 나를 살펴보고는 바로 사라졌다! 인간의 몸에 들어있는 혼은 동족이 아니라면서! 그 이후로는 나도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왜 아까는 모른 척하고 빨리 내보내려고 하셨습니까?”
“…너랑 엮이기 싫으니까, 솔직히.”
칼라굴은 시안이 돌아다니던 곳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조리 전달받았다. 이곳 칸쿤에 조용히 있으면 엮일 일이 없을 줄 알고 온 건데 이곳까지 쫓아오다니… 칼라굴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추궁할 건덕지도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이게 다다.”
“대전사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까?”
“그걸 내 수준으로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은가?”
“흐음…….”
시안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조급한 마음이 드는데 아무런 방법이 없다. 게다가 자신을 향해 울리던 찝찝한 느낌이 지금은 사라져 있었다. 칼라굴을 털어서 나올 건 이게 다라는 뜻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도련님? 끝나셨나요?”
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끝났는데 문제가 있군요… 막막합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걱정 마세요, 도련님. 느낌이 돌아왔어요.”
“네? 정말입니까?”
“네. 도련님이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능이 다시 제대로 발동하길래 찾아온 거예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베로니카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시안을 안심시켜 주며 말했다.
아까는 무언가에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고 무엇을 할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시 그 느낌이 돌아왔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칼라굴 경도 고마웠습니다.”
“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
시안은 웃으며 돌아서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스틸 양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기다려라…….’
사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느낌이 시안의 추측일 수도 있다. 사냥꾼이라는 자가 ‘네크라’라는 자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시안은 자신의 추측이 틀리길 바랐다.
모든 것은 ‘운명의 길’ 위에 올라와 있는 ‘네크라’라는 자를 만나 보아야 명확해질 것이다.
시안은 조급한 마음을 다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파레온은 연회에 다녀온 뒤 피곤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이번에 라카-둠 님이 친 사고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파레온은 라카-둠 님도 자신처럼 될 것을 예상하였지만 다행히도 그 시안이라는 자의 형이 막아주었다.
아니었다면 아마 다진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 시안이라는 자는 그 정도로 열 받아 보였으니까.
‘하… 이래서 딸을 잘 두어야 해…….’
파레온은 쓸데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영주성 저 너머로 보이는 절벽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흉물스럽게 무너져 있는 절벽. 파레온은 저 절벽을 정비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세상에는 많은 강자가 있고 항상 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는 용도로 쓰기 위해서이다.
“후… 벌써 오 년도 넘게 지났군.”
예전에 보았던 시안이라는 자는 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절벽만 무너트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늘산맥의 산자락을 푹 파내어 버리다니.
농담 아니라 전력을 다하면 눈앞에 보이는 산맥이라도 박살 낼 수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후후… 설마 그건 아니겠지.’
파레온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처구니없는 그 상상에 실소를 흘렸다.
자신들, 로가디스 지방을 지켜주고 있는 콘-티안 산맥.
로가디스 지방뿐 아니라 티안의 남쪽을 우샤란과 완벽하게 차단하는 거대한 산맥.
예전에는 발전을 방해하는 저주스러운 산맥이었지만 지금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이다. 덕분에 로가디스 지방은 난폭한 타란이나 우샤란과 국경을 접하지 않고 티안 안쪽으로만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으니까.
흐뭇한 마음으로 콘-티안 산맥을 지켜보던 파레온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잡혔다.
‘저게 뭐지…….’
절벽 쪽이 들썩들썩하는 것처럼 보였다.
파레온은 자신이 잘못 보았나 싶어 ‘크랑가’를 사용하여 그쪽의 시야를 확대하려고 하였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절벽이 한 번 더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쿠르르르르릉!
다행히 큰 붕괴는 아니었지만 범상치 않은 일이 확실했다. 애초에 무너질 부분은 이미 다 무너졌기에 저렇게 큰 붕괴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파레온은 애초의 의도대로 크랑가를 작동시켰다. 곧이어 크랑가는 절벽 근처를 확대하여 파레온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눈앞으로 영상을 가져왔다.
그 즉시 파레온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안 경이 아닌가. 도대체 여기에 왜…….”
시안 경이 절벽 아래 서서 절벽 아래를 손으로 푹푹 퍼내고 있었다.
시안 경이 손짓을 할 때마다 절벽 구석구석이 무너지고 있었고 시안 경은 그런 식으로 통로를 만들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파레온은 그 광경을 엄청나게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절벽에서 이곳까지는 20킬로미터가 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이윽고 결연한 표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대영주인 그는 조사를 통해 시안 경이 돌아다녔던 도시를 모조리 알고 있었다.
케르발, 마르가란, 라그랑, 레노르바, 콩티앙.
이 중 멀쩡한 도시는 레노르바 하나뿐이다.
파레온은 20퍼센트의 확률에 자신의 영지민들의 운명을 걸 수 없었다.
“리안나! 리안나!”
파레온의 외침에 리안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파레온 님! 무슨 일이십니까?”
리안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런 리안나를 보며 파레온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즉시 모든 영지민들을 대피시키시오! 최대한 저 절벽 쪽에서 멀리! 시간이 없소.”
“…알겠습니다!”
리안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즉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의 영주이자 사랑하는 님인 파레온은 이제까지 허튼 판단을 내린 적이 거의 없으니.
리안나는 바깥으로 달려 나가며 사방으로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파레온은 그런 리안나를 보며 자신도 대피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후… 제발 이 대피명령이 나의 미친 짓이 됐으면 좋겠소이다, 시안 경.”
파레온은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 ☆
“흠… 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이시지요?”
“…….”
“형수님?”
“아! 네, 맞아요.”
“너무 멀리 안 떨어져 계셔도 됩니다. 제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있겠습니까?”
“하하…….”
무표정한 얼굴로 절벽을 퍽퍽 퍼내는 시안을 보며 베로니카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시안은 안심하라고 했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절벽을 퍽퍽 파내고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에는 베로니카는 너무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저걸 보니 칼에서 빛이 나고 사람을 썰어버리는 것은 양반이었다.
“형수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먼 거리까지 알아낼 수 있으신지…….”
시안은 정말로 신기했다. 형수님의 능력이 왜 이곳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혼자서의 능력으로는 절대 못 찾았을 것이다. 자신이 파묻어 버린 병기창의 안으로 가야 한다는 걸 자신이 어찌 알았겠는가?
시안은 마음이 급했지만 형수님을 겁줄 수는 없기에 최대한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절벽을 파내고 있었다.
형수님의 방향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절벽을 파내던 시안은 이윽고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자신이 예전 기계 장난감들과 싸우다가 저쪽 세계로 던져져 버렸던 장소.
하지만 이곳은 절벽에 파묻혔던 장소인지라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곳에 누가 있었다면 자신이 절벽 바깥에서도 알아챘을 것이다.
“형수님? 이곳이 맞습니까?”
“잠시만요… 여기 근처인데. 이상하다.”
베로니카는 빠르게 걸어가다가 어딘가를 뱅글뱅글 맴돌며 헤매고 있었다.
‘저긴…….’
기억난다. 예전에 아란칼이라는 녀석들이 허공에 구멍을 열었던 곳.
시안은 베로니카가 헤매고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예전 자신이 깨부수고 나왔던 허공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안 그래도 조급함으로 인해 굳어 있던 시안의 표정은 한층 더 딱딱하게 변했다.
시안은 형수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수님, 이제 되었습니다.”
“네?”
이해할 수 없는 시안의 말에 베로니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모시지요. 잠깐 눈을 감으십시오.”
“어… 어?”
시안은 형수님을 안고 절벽 바깥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형수님이 다칠까봐 일정 속도 이상을 낼 수는 없었지만 금방 도시 쪽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이상하네요. 도시가 왜 이렇게 조용하지요?”
“그렇군요…….”
도시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시안이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들 산맥에서 멀어지는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조금 불안했는데…….”
“으앗!”
시안은 다시 한 번 몸을 날렸고 이윽고 북쪽으로 향해 올라가고 있는 파레온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타닥!
가볍게 공중에서 뛰어내린 시안은 파레온을 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헉… 시안 경, 무슨 일이십니까. 볼일은 다 끝났습니까?”
파레온은 자신의 앞에 시안이 리안 경의 아내를 데리고 내리자 두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설마 금단의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가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가볍게 끝날 일이었으면 괜히 사람들을 대피시켰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레온의 생각은 5초도 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볼일은 이제부터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붉은 안광을 흩뿌리던 저번의 그 광경이 생각나 도저히 부탁을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파레온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형수님을 좀 부탁드립니다. 같이 좀 모시고 가 주시지요.”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서남북 중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별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그나저나 굉장히 판단력이 좋으시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안은 탁탁 뛰어가며 사람들과의 거리를 벌리더니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몸을 굽힌 후 무섭게 뛰어올랐다.
콰앙!
굉음과 함께 시안은 날아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치 유성과 같은 속도로 절벽 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고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던 파레온은 시안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미친! 짐도 다 버려라! 최대한 이곳에서 빠른 속도로 이탈한다! 기사단은 이탈자를 부축하여 더 속도를 내라! 짐마차에서도 짐을 버리고 사람을 태워라!”
웅성웅성!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모두가 짐을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한 뒤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파레온 영주님은 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이 가벼워진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파레온은 힘 빠진 표정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바라보았다.
“17퍼센트인가…….”
절망 섞인, 뜻 모를 소리를 내뱉은 파레온은 몸을 돌렸다. 시간이 없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 ☆ ☆
시안은 형수님이 어느 정도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형수님이 맴돌던, 그리고 자신이 지나쳤던 자리에서 자신의 촉이 강렬하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초능력이 아닌가…….’
세상에! 때려줘야 할 놈을 맞히는 이능이라니! 엑사르를 사용하는 것이기에 이능은 아니겠지만 시안은 이런 흉포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이 촉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듯했다.
마치 어서 어서 무력을 쓰라고 자신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 하지만 실제로 결과가 좋으니 뭐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뭐 이리 쓸 일이 많아…….’
때려줘야 할 놈이 많다는 건 좋은 게 아니다. 애초에 자신에게 맞을 짓을 했다는 것 아닌가. 젠틀한 자신이 폭력을 써야겠다고 결정할 정도면 큰 잘못을 했다는 뜻인데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게 좋을 리가 있겠는가.
“에휴…….”
시안은 한숨을 쉬며 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붉고 흰빛을 띤 갑옷이 자신의 몸을 기묘한 소리를 내며 타고 올라왔다. 예전에야 보여주기 위해 천천히 끌어올렸다지만 마음먹고 끌어올린다면 변신은 한순간이다.
순식간에 시안은 사라지고 중장갑의 무장만이 절벽 안의 터널에 남게 되었다.
이윽고 시안은 허공을 잡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까드드드드득!
허공이 강제로 벌어지고 으깨지며 익숙한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예전, 자신이 애먼 세계에 떨어졌을 때 났던 향기.
물론 순식간에 돌아오긴 했지만 아주 참신한 경험이었다. 반데르와 엑사르가 느껴지지 않는 세계는.
“자, 뭣 좀 물어봅……!”
쿠아아아아앙
스틸 양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 자신의 양손에 잡혀 벌어진 틈 사이를 보며 말을 걸던 시안은 안쪽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에 두드려 맞고 마치 예전, 자신이 스틸 양을 산맥에 처박았을 때처럼 맹렬한 속도로 튕겨나갔다.
시안이 튕겨나가 처박힌 자리가 무너져 내렸고, 시안이 벌린 틈새 사이로 무언가가 맹렬하게 튀어나와 그가 처박힌 자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