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51화 (52/81)

<51. 대전사>

<난 누구를 패 주는 일에는 항상 운이 좋았다. 문제는 거기에 내 모든 운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젠장…….>

-대검공, 승리의 비결 중에서

☆ ☆ ☆

쿠구구구구구구구!

“무슨 소리지?”

“영지 쪽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헉… 산맥이 터져 나갔다.”

“영주님은 이렇게 될 걸 알고 계셨던가… 하지만 대피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일반인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쿨란기사단을 비롯한 몇몇의 눈에는 영지 너머 절벽에서 일어나는 일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절벽 쪽을 보며 파레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작되었구나…….’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는 상황에 원망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웃음만이 나올 뿐이다. 지금 이런 자신의 감정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정상적이라면 생겨야 할 분노나 안타까움조차 생기지 않았다.

단지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쿨란 하나로 끝나라… 제발…….’

로가디스 지역 최대의 도시는 쿨란이 아니었다. 애초에 발전된 로가디스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에 쿨란은 지리적 위치나 수용 능력, 모든 면에서 모자랐다. 그래서 이미 쿨란 지역의 핵심 시설 상당부분이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로트펠 영지를 중심으로 이전을 진행 중이었다. 어차피 로가디스 지방은 모두 파레온의 아래에 있었기에 별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추억이 서린 영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게 생긴 게 괜찮은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이 사태가 그저 쿨란 하나로 마무리되길 바랄 뿐…….

파레온은 나라샤 국왕 폐하가 이제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절실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날아오는 것들을 비켜내고 튕겨내며 안일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스틸 양의 안부가 급했기에 우선 물어보고 시작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큰 잘못이었다. 녀석은 어찌 되었건 침묵하고 있는 스틸 양을 공격했을지도 모르는 용의자였다. 우선 다져놓고 시작했어야 옳다.

그리고 자신의 촉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욱 믿을 만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맞을 놈은 맞아야 한다. 세상에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놈들이 있고 그런 녀석들은 자신도 언제든지 대환영이다.

앞의 이 녀석처럼.

빠득.

이를 갈며 마음을 다진 시안은 이제 녀석을 다져 주기로 결심하고 이제 닫혀가는 구멍 속에서 튀어나온 녀석을 향해 맹렬하게 주먹을 휘둘러 갔다.

눈앞의 녀석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 주위에는 뭘 그렇게 휘감고 있는지 일렁거림 때문에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덩치는 어찌나 큰지 거의 3미터에 육박했다. 자신도 꽤나 골격이 크지만 눈앞의 괴인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습이 아니었다.

‘제기랄… 저 녀석 손에 들려 있는 건 뭐야’

시안은 주먹을 휘두르다 짜증을 내며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요상하게 생긴 칼을 피해냈다.

사실 저게 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생김새가 너무나 특이했으니까.

길이는 2미터가 넘었는데 손잡이가 길이의 삼분지 일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생김새.

손잡이 부분과 칼날 부분은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본래의 목적과 상반되는 기세를 이루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원래대로라면 살기는 칼의 날 부분에 어리고 손잡이 부분은 사용자의 기운과 동화되어야 옳다.

하지만 저 이상하게 생긴 칼은 전혀 반대였다. 손잡이 부분은 당장 상대를 찢어버리겠다는 광폭한 기세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칼의 날 부분은 흐릿한 게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게 실제인지 환상인지 헷갈릴 정도.

얼핏 보면 저번에 라가오페 씨가 보여준 기묘한 광선검과 비슷한 형태. 다른 점이라면 광선검은 날 부분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던 반면, 저 칼은 얼핏 보면 손잡이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크라로 추정되는 괴인은 그러한 칼을 오른손에 꼬나 쥔 채 맹렬하게 시안을 쫓으며 휘두르고 있었다.

스걱!

‘미친…….’

크로나-폰처럼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신의 창이나 그랑-라의 손처럼 강대한 파괴기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반투명한 칼날은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저 칼날에 한 대 맞느니 차라리 위의 것들로 하루 종일 두드려 맞는 것을 택할 것이다.

물론 칼이 지나가는 궤적은 지극히 고요했고 궤적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디까지 일반인들이 보면 말이다.

칼이 휘둘러진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모조리 느끼고 있던 시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간은 토막 나고 시간은 일그러진다. 게다가 아까 기습적으로 한 칼 맞았을 때 무언가 혼 한구석이 썩둑 베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회복되었지만 별로 계속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다.

다행히 자신이 얻은 붉은 비늘이 상쇄해주어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자신도 꽤나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할 만하다. 내가 더 강하다.’

만약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초인이 저런 칼을 들고 덤볐다면 자신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 하였을 것이다. 저기 저 칼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에 결코 뒤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공격력 하나만 놓고 보면 더 강력했다. 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녀석은 자신보다 약했다. 기습적으로 한 칼 날린 공격이었지만 맞을 만했고 전체적인 움직임이나 기세, 모두 자신이 우세했다.

그렇기에 시안은 급작스럽게 당했던 기습의 충격을 회복하고 괴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피해야 하는 공격은 피하고, 맞을 만한 공격은 맞는다. 그리고 빈틈은 그대로 두들겨 준다.

단순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기본 중의 기본. 그리고 시안이 가장 자신 있는 전투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안은 자신의 생각대로 전투가 흘러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스억.

‘또 빨라졌다…….’

따라잡을 만하면 갑작스레 빨라져 자신의 공격을 피했고, 분명 피할 수 있는 공격인데 시공을 모조리 무시하고 따라붙어 자신의 갑주를 후려쳤다.

분명 상대의 기본적인 무력은 아니다. 자신보다 강한 자가 상위의 수법을 쓰기에 자신이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랬다면 시안은 이미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상대편은 기묘한 방법을 쓰고 있다.

그랬기에 시안은 짐작만 하고 있던 상대의 정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주술… 저자가 대전사, 네크라라는 자가 확실하다.’

사실 칼라굴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공간을 다루고 어떤 식으로 시간을 지배하는지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칼라굴이 쓰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인간의 몸이라 그런지 사용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보니 시간과 공간, 생명을 사역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 사기 아니야, 이거…….’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이렇게 자신과 치고받고 있을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강대한 칼을 들고 있다고 해도 그런 건 자신에게도 있었거니와 무기의 위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결국 사용자의 수준이다. 물론 저 눈앞의 대전사라는 자는 강하기는 했지만 자신과 비교하기에는 무리였다.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두들겨 맞고 바닥에 누워있어야 하는 자가 이렇게 자신과 드잡이질을 할 수 있도록 끌어올려 주는 그 기묘한 이능에 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물론 주술, 소르마라는 것도 사용자의 수준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저자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저런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쑴풍쑴풍 뽑아내고 있었다.

‘저 정도면 분명 제약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또?’

시안은 자신이 뻗은 공격이 네크라의 앞에서 멈춰버리자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공격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쭈우우우웅!

자신의 주먹과 네크라의 얼굴 사이 공간이 한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방금의 일격이면 산의 정상까지도 박살 낼 수 있는 위력이었는데 그 강대한 위력이 구겨지고 늘어난 공간 사이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고 결국 네크라의 얼굴에는 생채기조차 남지 않았다.

아무리 소르마란 것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주변의 법칙을 마음대로 비틀고 시공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방금 방어에 쓴 소르마, 그중 공간을 다룬다는 스파마 한 번만 해도 예전에 본 폭축의 수십 배에 달하는 엑사르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필요했을 텐데 공격 한 번, 방어 한 번마다 자유자재로 가져다 쓰고 있었다.

시안이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네크라가 오른손을 맹렬하게 휘둘렀고 그의 손에 걸려있던 칼끝은 주위의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수십 배 빨라진 속도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허접한 가속 마법이 아니다. 시간 자체를 빨리 감아 돌리고 있었다. 아마 저게 칼라굴이 말한 타마라의 한 종류일 것이다.

‘아… 또 빨라지네, 이거.’

이 정도 속도면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게다가 저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자신의 주변 계수가 맹렬하게 변하며 자신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하압!”

쿠웅!

시안은 자신의 주먹에 힘을 담아 날아오는 칼은 휘둘러 쳤고, 기묘한 칼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힘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네크라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이 광경만 보아도 무력 자체는 시안이 월등함을 알 수 있었다.

치고받던 시안은 문득 이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스틸 양의 행방만 알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눈앞의 네크라와 싸울 필요가 없다. 형수님의 이능이 자신을 이쪽으로 인도했다는 뜻은 저자에게 해답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 싸웠으면 저 괴인도 슬슬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법 선방하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설령 저자가 쓰고 있는 소르마에 제약이 없다고 해도 본신의 무력 차이가 워낙 심했기에 결국에는 시안이 승리할 것이다. 제약이라는 것까지 걸리면 그 시간은 더욱 단축될 것이고.

그렇기에 시안은 대화를 시도했다.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선 틈을 타 시안은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급한데 눈앞의 괴인이 자신을 귀찮게 했기에, 게다가 선빵을 두들겨 맞은 상태였기에 썩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우선은 스틸 양의 행방이 너무나 궁금했다.

“잠깐!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대답만 잘 해주면 아마 걸어 돌아가실 수는 있을 겁니다.

<…….>

네크라는 시안이 말을 거는 동안 공격하지 않고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크라 입장에서도 숨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 혹시 요런 조각이랑 같은 검 들고 있는 여자 아시는지? 만약 잘 안내해주면 제 기분이 좋아져서 팔 한두 개만 부러지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

시안은 라가오페에게 양해를 구한 후 들고 온 크로나-폰의 조각을 들고 손짓 발짓을 이용해 물어보았고 그 말에 네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내포되어 있는 그 제스처에 시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하! 갑자기 당신이 마음에 조금 들려고 하는군요! 어디로 가면…….”

웃으며 말을 거는 시안을 무시하고 괴인은 옆의 공간을 향해 칼을 쭉 휘둘렀다. 그러자 궤적을 따라 공간이 쭉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툭 하고 가볍게 떨어졌지만 그 물체가 땅에 닿았을 때쯤에 나온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쿠와아아아앙!

굉장한 굉음과 함께 안 그래도 박살이 나 있던 절벽 아래가 모조리 무너졌다.

“…….”

그리고 떨어진 물체가 무엇인지를 본 시안의 표정을 무섭게 굳어졌다.

괴인은 표정이 굳어진 시안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금이 간 채로 떨어져 있는 크로나-폰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금이 가 있는 부분을 즈려 밟았다.

빠드득.

안 그래도 금이 가 있는 상태로 괴인의 힘을 견딜 수 없었는지 크로나-폰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났고, 괴인은 시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대답이 되었냐는 의미로.

그 광경을 본 시안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치고 올라왔다. 이제까지 이런 감정의 변화를 느낀 적이 없었기에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시안은 그 느낌에 몸을 맡긴 채로 이제까지 형수님이 휘말릴까 봐 누르고 있던 힘까지 모조리 풀어 헤치며 눈앞의 네크라를 후려쳤다.

☆ ☆ ☆

“빨리 달려라! 어서!”

리안나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칼에 갑옷까지 모조리 버린 채로 옆의 아이를 등에 업고 달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까까지만 해도 산자락이 무너지긴 했지만 멀리 떨어진 영지민들이 대피할 일까지는 아닌 듯했기에 영주님의 대피 명령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대피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저 멀리 보이는 콘-티안 산맥 상공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있었다. 허공이 찢어진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허공이 찢어진 것까지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며 사방을 쓸어버리고 있다는 점.

쿠우우우웅!

“으아아악!”

상공에 찢어진 틈을 통해 뿜어져 나온 강대한 에너지가 콘-티안 산맥 일부를 후려쳤고 산맥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본 영지민들은 오줌을 지리며 산맥과 최대한 멀어지는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산맥 위의 허공은 쉴 새 없이 갈라지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에너지들은 걸리는 족족 주변의 산맥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신이 산맥을 지워버리기 위해 지상으로 손을 뻗어 마구잡이로 내려치고 있는 듯한 광경. 자신의 영지가 수탈을 자행하는 영지였다면 분명 신의 분노가 내렸다는 소문이 돌았으리라.

‘갑자기 왜…….’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최대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 실제로 자신들의 영지 뒤에 위치하던 콘-티안 산맥이 통째로 가루가 되고 있었다. 저 파괴가 방향을 살짝 틀기만 해도 몰살이다.

리안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이끌고 더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뛰었다. 아까보다도 통솔은 편했다. 자신의 짐을 버리기 아까워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조리 짐을 내팽개치고 북쪽으로 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혀 좋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리안나는 공포에 질려있는 베로니카를 업고 아이는 품에 앉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자식… 스틸 양은 살아날 수도 없단 말이다!’

처음에 스틸 양이 전혼옥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조금 안심했다. 죽음이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최악은 아니니.

하지만 이어지는 라가오페의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스탄탈 1세는 살아나기 힘듭니다. 이건 후손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데… 스탄탈 1세의 경우는 결혼을 한 적도 없고 후손도 없습니다.’

‘무슨? 스탄탈 4세는요?’

‘그자는 아마 양자일 겁니다. 스탄탈 1세가 그랑-반더 시절에 들인…….’

자신이 조금만 빨랐다면… 붉은 비늘에서 조금만 빨리 나왔더라면 스틸 양이 살 수도 있었다.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후회, 그리고 절망은 모조리 분노로 바뀌어 눈앞의 녀석에게로 쏟아졌다.

꾸드드드득!

시안은 왼손을 쥐고 눈앞의 네크라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안의 주먹과 네크라의 몸 사이의 공간이 엄청나게 확장되기 시작한 것. 대주술 스파마가 발동하였다.

하지만 눈이 돌아가 주변 상황을 신경 쓰지 않게 된 시안의 일격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왔다.

꾸드드득.

주먹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확장된 공간째 그대로 밀고 뭉개며 다가온 것. 주술이고 공간이고 모조리 짓이기며 다가온 주먹이 순식간에 네크라의 몸 앞까지 도달했다.

그 공격을 본 네크라는 황급히 그다음 단계의 스파마를 펼쳤다.

그러자 시안과 네크라의 사이, 정확히 말하면 네크라의 앞으로 구멍이 생겨났다. 구멍 너머, 저 멀리로 웅대한 콘-티안 산맥이 보였다.

시안의 일격은 정확히 네크라의 앞에 생성된 구멍을 후려쳤고, 그 파괴력은 고스란히 구멍 너머로 보이는 애꿎은 산맥이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네크라도 무사하지 못 했다. 두 종류의 스파마를 펼쳐 공격을 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뭉개버린 시안의 일격이 그대로 네크라를 후려친 것.

네크라는 그대로 뒤로 튕겨 날아갔다.

얻어맞았다고 그대로 당황하며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또 다른 공격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있다가 저 공격들에 모조리 두들겨 맞으면 전신이 뒤틀릴 것이다.

네크라는 스파마를 더 강렬하게 발동시켰다.

쿠구구구궁!

자신에게 쏟아진 수많은 공격들을 약화시킨 후 그래도 다가온 수십 발의 공격들은 공간 저 너머 산맥으로 모조리 보내버렸다.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네크라는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타마라를 걸었다. 시안과 자신, 둘 다에게.

순식간에 시안 주변의 계수가 바뀌며 속도가 느려졌고 자신의 속도는 훨씬 더 빨라졌다. 이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 시안에게 빈틈이 생겼고 그 틈을 노리고 네크라의 칼이 막대한 에너지와 주술을 덕지덕지 휘감고 작렬했다.

소마린을 극한까지 건 이 일격을 받으면 파괴력이 아닌 주술만으로도 생명의 근원이 날아가고 혼이 뒤틀린다.

칼라굴은 소마린이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많은 칼라굴들이 이를 소홀히 하여 극한까지 성취하지 못 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소마린을 극한까지 수련하면 스파마나 타마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흉악한 파괴력이 나온다.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혼을 찢어버리고 생명력을 허공으로 흩뿌려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린 혼과 생명력은 고스란히 사용자에게로 옮겨와 힘을 보태어 준다. 애초에 네크라를 절대의 강자로 굳건하게 지켜준 것은 스파마나 타마라가 아닌, 소마린이었다.

쿠우웅!

하지만 네크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시안이 자세를 다잡고 날아든 자신의 칼 <카르나인>을 그대로 후려친 것. 그 탓에 네크라는 손에 굉장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칼에 걸려 있던 주술들은 일격에 모조리 박살이 났다. 덕분에 네크라는 다시 주술을 걸며 미친 듯 달려드는 상대방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네크라는 현재의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손에 들린 카르나인이 생각했던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었다. 다 저 인간이 입고 있는 이상한 갑옷 탓이다.

스치기만 해도 걸려든 공간과 시간, 생명을 모조리 베어내는, 수천 년을 자신과 함께 한 저주받은 마병 카르나인.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손잡이를 기반으로 생성된 기괴한 칼날은 물리적인 파괴력은 전혀 없다. 반투명하게 보이는 이유도 그 계수를 끊임없이 바꾸며 다른 차원과 시간에 머무르며 이 차원에 한 발짝 걸쳐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물리적인 물체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을 박살내는 카르나인의 칼날에 물리적인 파괴력 따위는 필요가 없다.

함께 한 이래로 이제까지 카르나인이 자신의 기대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데 저자가 입고 있는 갑옷은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네크라는 이것이 핑계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저자의 갑옷도 어마어마한 물건이긴 하지만 자신의 칼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몰린 근본적인 원인은 실력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타마라, 상대는 훨씬 느려지고 자신은 비할 데 없이 빨라진다.

스파마, 상대는 먼 거리를 돌아오고 자신은 그대로 질러간다.

소마린, 상대는 반병신이 되고 자신은 불사의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이게 대주술, 소르마의 위력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을 비틀어 자신의 지배하에 놓는, 절대의 권능. 이적과 비슷하지만 그 발동 속도가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기에 적어도 전투에서는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각 분파의 주술들이 궁극에 이르고 얻게 되는 비술은 이적 특유의 제약을 모조리 없애 준다.

타마라 분파의 비술, <타마라>

스파마 분파의 비술, <스파마>

소마린 분파의 비술, <소마린>

각 분파는 기술도 다르게 작동 방식도 다르고 걸리는 제약도 다르지만 궁극의 비술만큼은 공통점을 가진다.

<축적>

자신의 시간을 감아 저축한 후 필요할 때 풀어낸다.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을 축적하였다가 공간을 주무른다.

자신이 죽이고 갈취한 생명의 힘을 빌려 주술의 제물로 바친다.

이 방법으로 자신은 축적해 놓은 시간과 공간, 생명에 여유가 있는 한 이를 소모하여 대주술에 걸리는 수많은 제약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즉시즉시 펼쳐낼 수 있다.

게다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점점 더 강해지면서 축적은 했지만 사용한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금 자신에게 저장된 용량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최근, 이곳의 시간으로 4년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어져 있던 차원 사이의 틈에 머무르면서 시공을 더욱 감아놓았기에 그 용량은 더 증가했다. 차원 사이의 틈은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찾으면 이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시공을 감을 수 있으니. 생명이야 자신이 죽인 생명이 얼마인데…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밀린다. 자신이 축적해놓은 시간과 공간, 생명이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네크라는 이런 경험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 인간 이후로, 그리고 그 인간조차 죽은 이후로 이런 자를 볼 수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건 숫제 괴물이다.

하지만 네크라는 얼굴에 흉악한 미소를 띠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자신에게는 더욱 좋다.

지금까지는 완벽하다. 완전히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왔다. 눈앞의 인간에게 흔적을 흘려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온 것도, 자신의 기습 공격이 성공한 것도, 상대가 분노에 가득 차 이성을 잃고 달려든 것도.

하지만 모든 일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다.

네크라는 이 일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며 즐거운 미소를 띠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시안을 마주해 나갔다.

☆ ☆ ☆

우드드득!

시안은 네크라의 심장을 뽑아 낸 다음에야 녀석의 재생이 멈추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스파마와 타마라는 못 쓰게 된 지 오래였지만 이자가 익혔다던 소마린의 위력인지,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살아났다.

그때 예전 칼라굴에게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모든 칼-굴족은 심장과 무기를 그 근원으로 한다고.

그 말을 듣고 즉시 반항하던 녀석을 제압하여 심장을 뽑아냈다. 무기는 아까부터 스파마를 쓰게 되지 못한 순간 걷어차서 저 멀리 떨어트려놓은 지 오래였다. 녀석의 손에서 떨어진 칼은, 순식간에 날이 없어지더니 막대기만 남았고 저 멀리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심장은 기분 나쁘게 뽑혀 나온 다음에도 계속해서 박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생명력이 남아있는지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생명력에 여유가 남아있는 것은 심장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시안은 심장이 뽑혀 나온 상태로도 꿈틀거리고 있는 녀석을 보며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이렇게까지 상대를 짓이겨 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 이 정도 하면 자신 속의 분노가 사라지는 경우가 이제까지 대부분이었다. 자신은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노가 휘발성인 경우가 많았으니.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까지도 분노가 식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이렇게 쉽게 이 자식을 죽여주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를 정도로.

하지만 이미 끝났다. 무기와 심장을 잃은 녀석은 이제 자신이 마무리를 짓지 않아도 죽게 될 것이다. 느낌이 강하게 왔다.

녀석에게 다가간 시안은 녀석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고 있지?”

기분이 나빠진 시안이 녀석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녀석이 왕국어로 입을 열었다.

<고맙다. 크흐흐흐…….>

“……?”

시안이 예상치 못한 대사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자신이 들고 있던 심장에서 격렬하게 무언가가 시안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자의 기억인가…….>

시안은 눈앞으로 흘러가는 광경을 훑어보며 읊조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자신의 감을 믿었다.

심장에서 풀려 나오는 기묘한 엑사르의 흐름에 실려 있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호의.

그렇기에 시안은 심장에서 흘러들어온 주술을 거절하지 않았고 현재 이렇게 네크라라는 자의 기억을 훑어보고 있었다.

네크라.

대수림에 살고 있는 강대한 칼-굴족 내에서도 천재로 손꼽힌 전사.

흉폭한 하리쟌들이 득실거리는 드넓은 대수림에도 경계할 존재가 몇 되지 않고 그중에서 피해야 할 존재는 단 하나에 불과한, 강대한 칼-굴족의 전사로 태어난 네크라는 자신의 종족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의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로나>

대수림의 지배자.

강대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대수림에서도 그 정점을 거머쥔 존재.

하지만 네크라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녀석도 결국에는 여섯 뿔이 아닌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여섯 뿔의 하리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여섯 뿔의 하리쟌을 잡을 수 있는 강자는 종족 내에서도 차고 넘쳤다.

다른 여섯 뿔의 하리쟌들을 경계하기는 하지만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쓸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당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급 전사의 직위만 해도 여섯 뿔의 하리쟌 한 녀석을 때려잡고 얻은 것이었다.

네크라는 다른 상급전사들이 크로나를 피해 다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대한 칼-굴족의 천재 전사는 녀석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별 녀석이 아니면 직접 녀석의 목을 따 오기로. 실제로 하나도 제대로 수련하기 힘들다는 소르마를 세 종류나,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성취해 나가고 있던 그는 세 주술이 자신에게 선사한 강대한 힘에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크로나를 만난 네크라는 단번에 깨달았다.

여섯 뿔이라고 해도 다 같은 여섯 뿔이 아니고, 초월자라고 해도 다 같은 초월자가 아님을.

일곱 뿔이 되기 직전의 상태였던 크로나는 여섯 뿔이긴 하지만 결코 자신이 쳐다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초월자인 자신이 봐도 초월적인, 신과 같아 보이는 존재.

크로나는 자신의 눈앞에서 기가 질려 있는 네크라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놀랍게도 짐승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하리쟌의 의지가 자신들의 링크를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흠… 마침 잘 찾아왔군. 쓸 만한 녀석이 필요했는데.>

놀랍게도 괴수는 자신과 소통을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뭘 놀라고 그러나. 크후후. 그나저나… 보아하니 지금에 만족하지 못 하는군. 힘이 모자란가?>

<……!>

대수림에 사는 이들 중 강대한 힘을 원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네크라는 무의식적으로 이 생각을 떠올렸고 이는 그대로 크로나에게 흘러들어갔다.

크로나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전하며 말했다. 적어도 네크라에게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크히후하후…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힘을 주겠다. 하지만…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어차피 꼴을 보아하니 거절은 글렀다. 거절하는 즉시 자신은 찢겨 죽을 것이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저런 강대한 존재에게 파수꾼이 왜 필요한지.

하지만 미쳐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크로나는 자신을 덥석 삼켜버렸다.

<컥!>

<일어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크로나는 사라지고 자신만 남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네크라는 자신에게 세 가지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심장. 자신의 심장은 더 이상 칼-굴의 심장이 아니었다. 크로나가 가진, 여섯 개의 심장 중 하나. 그걸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힘에 네크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무기. 자신이 쓰던 무기는 어딘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크로나의 열여덟 송곳니 중 하나를 뽑아 압축해 낸 작달만한 봉이 있었다. 손에 쥐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무기가 자신과 평생을 같이할 무기라는 것을. ‘카르나인’이라고 이름 붙인 이 칼의 위력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세 번째 변화를 알게 된 순간 네크라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크로나의 근처에도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크로나가 왜 자신에게 이런 강대한 힘을 주었는지 깨달았다.

일곱 뿔이 되기 위해 드라고나가 탈피에 들어간 사이, 크로나 또한 출산에 들어갈 것이다. 이는 후손을 남겨야 하는 크로나의 본능이다.

크로나는 출산을 끝내는 즉시 일곱 뿔이 될 준비에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시에 일곱 뿔이 될 드라고나를 견제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때를 대비하여 크로나의 새끼를 지키라고 만들어진 파수꾼. 그것이 네크라 자신이었다.

자신은 이제 죽지도 못 한다. 크로나의 심장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기에.

자신은 끊임없이 강해질 것이다. 카르나인이 자신을 도울 것이기에.

그리고… 그 강해진 힘으로 평생, 죽지도 못하고 크로나의 새끼를 지켜야 한다.

이 모든 사실을 자신에게 일어난 세 번째 변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크로나와의 혼의 연결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넌 이제 파수꾼이다. 그리고 결코 나를 거역할 수 없다…….>

네크라는 절망하고 말았다. 자신은 강대한 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종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은 힘을 얻은 대가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군…….>

시안은 그 기억을 모조리 훑어보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아까 네크라가 보여준 불사의 권능은 칼-굴족의 권능이나 소마린의 권능이 아닌 모양이었다.

크로나의 심장을 기반으로 얻은 불사.

기억을 읽던 시안은 자신이 입고 있던 껍질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아까 그 기묘한 칼, 카르나인이 가진 강대한 힘의 비밀도 알 수 있었다. 비록 자신처럼 껍질을 통째로 얻은 것이 아닌, 열여덟 개의 송곳니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며 힘이 많이 빠진 자신의 껍질과 달리 생생할 때의 힘을 그대로 담아낸 송곳니였기에 그 정도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다.

<그나저나… 껍질의 주인이 드라고나였군. 게다가 크로나라…….>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에 시안은 놀랐지만 곧이어 자신과 엮일 일이 없을 것이기에 신경을 꺼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저런 녀석들이 대륙을 뒤집을 생각이었으면 이미 콧김 한 방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저런 존재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뜻은 이곳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

라-반더가 그랑-반더를 인간으로 안 보는 것처럼 저들도 그 아래 존재들에게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쁘겠지. 오히려 새끼를 신경 쓰는 것이 신기했다.

시안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그다음 흘러들어오는 기억에 집중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신은 처음 크로나를 만날 때에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그럴수록 느낀 것은 절망이었다.

<벽을… 뚫을 수가 없다.>

수백 년 전, 처음 벽에 도달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벽에 도달한 이후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수백 년을 세월을 수련해도 벽을 뚫지 못 하였으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한계인 동시에 종족의 한계라는 것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크로나의 파수꾼 역할이 크게 힘들지 않다는 것. 자신을 필두로 하여 칼-굴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졌기에 여섯 뿔의 하리쟌들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 하였고 그렇기에 네크라는 무난하게 크로나의 새끼가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사고가 터졌다.

<대전사님! 인간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정신이 나갔나 보군. 녀석들이…….>

네크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간들에 대한 소식은 자신도 들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제국이라는 곳도.

워낙 같잖아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쳐들어오다니.

<우리가 너무 조용하게 지냈나 보구나. 다 쓸어버려라.>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예전의 벌레 같던 그 녀석들이 아니었다.

상급 전사에 해당하는 녀석들도 꽤 있었고 특히 녀석들이 성취해 온 ‘이적’이라는 학문은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녀석들을 이끄는 제국의 황제. 건방지게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녀석.

<콘-라드>

그 녀석은 진짜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고작 300년을 살아온 녀석이 크로나의 힘까지 이어받은 자신과 박빙으로 싸우고 있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점은 초인이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점.

인간 놈들은 초월자가 되는 순간 동족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데 이렇게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점이 못내 이상했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신경 쓰기로 했다. 중요한 점은 녀석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니까.

자신의 발이 콘-라드라는 녀석에게 묶이자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던 학살은 중지되고 금방 밀어버릴 줄 알았던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전쟁터에서 콘-라드라는 녀석의 난입을 막기 위해 뒤에서 대기하던 네크라는 무언가 북쪽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기운의 응집을 느끼게 된다.

<이건…….>

네크라가 그 기운을 느끼고 당황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수천 킬로 너머의 대수림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거대한 보라색 섬광.

그 섬광을 본 것이 네크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반쯤 박살 난 상태로 재생되고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고, 그런 자신을 수천 년 전 자신을 파수꾼으로 삼고 떠난 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거대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노려보고 있었다.

<벌레 같은 녀석아, 내가 너에게 힘을 준 대가로 분명 내 새끼를 잘 지키라고 했을 텐데.>

<크로나…….>

그제야 네크라는 대수림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거대한 섬광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칼-굴과 제국이 싸우던 도중 싸움이 휘말려 다친 새끼에게 분노한 크로나가 무언가 손을 쓴 것이리라.

동시에 네크라는 공허한 머릿속에 당황했다.

자신과 한 몸처럼 움직이던, 수많은 동족들과의 연결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당황하던 네크라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분노에 찬 크로나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내 새끼를 다치게 한 벌레 같은 녀석들 몇 놈이 라이오나의 영역으로 달아났다! 나는 갈 수 없지만… 네 녀석까지 신경 쓰진 않겠지. 가서 녀석들을 잡아 죽여라! 그리고 그 녀석들을 다 죽이기 전까지는 결코 돌아오지 말아라!>

거역할 수 없는, 머리에 울려 퍼지는 명령에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 네크라는 걸어가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폐허와 폐허가 연속되는 광경. 찬연했던 제국의 영토는 모조리 박살이 났다. 하지만 박살 난 건 제국만이 아니었다.

<…모조리 죽었는가.>

네크라는 허탈한 표정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크로나가 저질러 놓은 참상에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로나가 분노에 차 내뱉은 섬광 한 방에 제국의 영토가 모조리 지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던 제국민과 자신의 동족들도.

범위 바깥의 소수 종족들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동족들은 멸망한 것이 확실했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소통되던 목소리들이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니.

이제 이 드넓은 대륙에 살아남은 칼-굴의 전사는 오로지 자신뿐이다. 모두 정신이 연결되어 있던, 가족이자 동료들. 그런 종족이 단 한 순간에 멸망했다. 그것도 구분해서 죽이기 귀찮다는 크로나의 입김 한 번에.

네크라는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탈함에 미쳐버릴 것 같았고 그와 동시에 이 분노의 대상인 크로나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자신의 운명이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개자식아, 일단 내려간다. 하지만… 순순히 개 노릇을 하진 않을 것이다.>

네크라는 이를 갈며 남쪽, 라이오나의 영역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아… 흥미진진하네.>

시안은 옆에 먹을 거라도 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이라 그런 걸 찾는 건 사치였지만.

세간에는 밀리던 제국이 칼-굴과 공멸을 택하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대이적으로 모조리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 싸우다가 재수 없게 새끼가 휩쓸려 다친 것에 열 받은 크로나가 날린 입김 한 방에 싸그리 다 날아간 것이다. 가로세로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영토가… 그리고 그 위에 살던 수 억, 수천 만 명의 인구가 한 방에.

그렇다면 이다음 기억은 제국이 멸망한 400년 전부터 현재에까지 이르는 기억일 것이다.

계속해서 떠돌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크로나가 말한 라이오나라는 녀석의 영역에 들어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명령이 갱신되는 일은 없었다.

<새끼에게 위협이 될 만한 녀석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돌아와라!>

이 명령을 바꿔 말한다면 위협이 될 만한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면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새끼에게 위협이 될 만한 기준은 초월자가 분명하다. 애초에 그 아래는 모조리 개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모두 죽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 명령에 저항할 수는 없었기에 도저히 명령에 저항할 수 없을 상황이 되면 하나씩만 죽이고 시공의 틈새로 동면에 들어갔다. 동면에 들어가서 힘을 모으다가 또 도저히 명령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면 나와서 다시 동면에 들고… 인간 녀석들은 재능이 없어서 그런지 초인이 굉장히 희귀했기 때문에 나올 때마다 둘씩 죽이면 금방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최대한 아껴 죽이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르마를 응용하면 강대한 혼을 찾는 것 정도는 매우 쉬웠다.

명령에 저항하는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발 누가 나를 좀 죽여 줬으면 좋겠다.>

너무나 힘들었다. 자신과 한 몸이나 같았던 동족들은 모조리 몰살당했고 돌아가면 또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예생활이 기다린다.

아무리 강하면 뭐하겠는가? 그래봤자 크로나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는 점. 크로나가 자신을 풀어주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초인 녀석들이 뭉쳐서 뭘 해보려고 하는 모양이던데 자신을 죽이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그렇기에 네크라는 시간을 벌면서도 인간의 초인 녀석들이 적당히 쌓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백, 수천 년을 기다리면 저 녀석들도 적당히 쌓일 것이고, 그때 그 안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 식으로 400년을 보내고 잠을 자고 있던 네크라는 갑자기 자신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을 느끼게 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시공의 틈에서 동면에 들어 있는 자신을 자극할 정도의 강대한 충격.

명령에 조금 더 저항할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느낌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네크라는 자신이 자고 있던 시공의 틈 사이를 박차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소르마를 사용하여 전 대륙을 훑은 네크라는 크게 실망했다. 자신을 자극한 강대한 기운이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 다시 한 번 탐색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 존재는 찾지 못 하였다. 그 대신 놀라운 것을 느꼈다.

자기 동족의 혼이 느껴진 것. 동면에서 나올 때마다 대륙을 훑었는데도 느껴지지 않았던 동족의 혼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쁨에 가득 차 달려간 네크라는 실망하고 만다. 인간의 몸을 빌려 전혼한 하급 전사에 불과했던 것. 칼-굴의 혼이라고 하여도 칼-굴의 육체에 담겨있지 않다면 반푼이일 뿐이다.

실망한 네크라는 나온 김에 초월자란 녀석을 하나 죽이고 동면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미 검색했던 위치에 머무르고 있던 초월자 하나를 찾아간다. 명령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좀 남았지만 실망감으로부터 발생된 분노를 풀 필요가 있었다.

마침 자신이 소르마로 검색해 놓은 인간 암컷 하나가 사막 쪽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 초월자는 이제껏 드라고나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굳이 찾아가지 않았었다. 괜히 싸우다가 밑의 허물을 건드리면 꽤나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학습능력이 없는 것인지 굳이 저 암컷 아니더라고 혼자 돌아다니는 녀석들은 항상 존재했다.

찾아간 인간 암컷은 꽤나 강한 편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정말 발톱의 때만큼도 위협이 가지 않는 존재였다.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검을 후려쳐 튕겨낸 후 간단히 제압하고 죽이려고 한 네크라는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 초월자의 기억 안에 내가 느낀 존재에 대한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소마린을 사용하여 기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초월자의 정신 방벽은 강대하기 그지없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 차이여야 막는 것이다. 벽에 막혀있고 소르마를 극한까지 수련한 자신과 이 초월자 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기억을 훑던 네크라는 전율했다.

이 암컷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시안이라는 자에 대한 기억을 보고.

드디어 찾은 것이다. 수천 년에 달한 저주받은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 줄,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

지금 이 존재는 붉은 껍질 안에 들어간 상태라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자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이성도 없는 붉은 껍질 따위에 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 껍질 안을 박차고 나와 한층 더 강대한 존재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에 본 저자의 수준은 자신과 박빙이었지만 껍질을 박차고 나온 저자는 자신조차 상대할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을 죽여 줄 강대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흥분에 가득 찬 네크라는 어떻게 하면 이자가 자신을 죽이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을 바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보자마자 자신을 죽이도록 달려들게 해야 한다.

첫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극한까지 연구한 비술, 타마라는 미래에 대한 짧은 예시도 가능하게 하니까. 타마라가 가르쳐 주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자는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운명이 저자를 자신에게 이끌 것이다. 너무나 막연한 감이었지만 자신 정도의 경지가 되면 감이 단순한 감이 아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알려주는 힌트이기에.

이렇게 되니 두 번째가 문제였다. 저자의 성격을 보니 쉽사리 자신을 죽여줄 것 같지 않았다. 저자가 가족을 아끼는 것을 보니 저자의 가족을 찢어 죽이면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인간 암컷을 자신이 죽였다고 알게 되면 저자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이렇게 모든 문제를 해결한 네크라는 마침 적당히 갈라져 있던 시공의 틈을 찾아 동면에 들어갔다. 언젠가 자신을 찾아올 시안이라는 자를 기다리며…….

곱게 죽어 줄 생각은 없다. 그건 그 자에게도 치욕일 테니.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저자에게 보여주고 죽으리라.

자신이 숨은 시공의 틈은 힘을 쌓기에 훌륭했다. 어쩌다 뚫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시공을 휘감기가 훨씬 편했기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축적된 시공간이 늘어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이 숨어있던 틈이 갈라졌다.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며 네크라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크로나여, 내가 너의 마지막 명령을 들어주마.>

자신의 새끼에게 위협이 될 존재를 지우라는 명령. 네크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로나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틈새를 들여다보는 시안을 후려치며 뛰쳐나갔다.

기억을 모두 읽은 시안은 땅에 떨어져 있는 카르나인을 주우러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구석에 떨어져 있던 카르나인을 들고 힘을 불어넣었다. 애초에 네크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는지, 시안이 힘을 불어넣자 네크라가 사용할 때보다 더 강대한 위력을 지닌 칼날이 솟아나왔다.

하지만 시안은 새로 얻은 칼을 보고 감탄하기 위해서 힘을 불어넣은 것이 아니었다.

시안은 네크라의 기억을 읽으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네크라의 기억에 따라 시안은 카르나인을 허공에 꽂고 열쇠를 돌리듯 손잡이를 한 바퀴 돌렸다.

파지지지직!

시안은 카르나인의 칼날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공간이 갈라지며 푸른빛을 내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틈이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큼 벌어지자 시안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그 틈을 강제로 벌리고 들어가 한 명을 안고 나왔다.

“하… 사람 걱정시키지 마십시오, 다음부터…….”

시안은 애잔함과 안도감이 섞인 눈으로 혼절한 상태로 품에 안겨 있는 스틸을 바라보았다.

네크라의 기억 속에서 본, 네크라가 시전한 소르마, <소마-즈란>

세 종류의 소르마를 모두 사용할 줄 알아야만 시전할 수 있는 이 기술은 대상의 시간과 공간, 생명을 모두 동결시킨 채로 가두어버린다. 그리고 사용자가 열쇠로 풀어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공간에서 나올 수 없다.

원래는 상대하기 벅찬 상대를 봉인하기 위해 네크라가 만들었지만 시동에 시간이 너무 걸리고 또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쓸 수가 없기에 죄인을 봉인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게 된 비운의 주술.

그 주술의 대상자가 된 스틸이 열쇠, 카르나인에 의해 풀려 나왔다.

시안은 네크라의 기억을 통해 그가 스틸을 죽이지 않는 것을 모두 지켜본 것이다. 단지 시안이 오해를 하도록 가두어 놓았다. 몇 년간 연락이 없으면 반드시 오해할 테니. 그리고 마지막에 크로나-폰을 부러트림으로써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후우…….”

스틸의 상태를 체크하고 별 이상이 없음을 깨달은 시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또 다른 의지가 흘러들어왔다.

<나의 은인이 될 그대를 생각하여 우선 죽이지는 않았다. 아직 명령에 저항할 시간이 몇 년 더 남았으니까. 그냥 죽일까 생각했지만… 이 암컷의 기억을 읽어보니 넌 짝이 없더군. 안쓰러워서 살려 뒀다.>

“허……?”

시안은 네크라까지 자신을 동정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려두고 턱을 몇 번 더 돌렸어야 하는데…….’

동시에 저주받은 운명에서 탈출할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네크라라는 자가 행한 필사적인 노력을 모조리 눈앞에서 지켜본 시안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습니까.”

손에 들린 심장은 시안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네크라가 저장해 놓은 의지만을 시안에게 전달했다.

<저것 가지고는 선물이라고 할 수 없지. 우선 카르나인을 가져가라. 그리고 손에 들린 심장도. 어차피 명령은 내 머릿속에 심어진 것이었으니 저걸 가지고 크로나의 영향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가져가려고 했는데…….’

시안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의지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릴 때 심장에서부터 마지막 의지가 흘러 나왔다.

<고맙다. 잘 살아라. 난 이제 동족들에게 간다. 너도 나중에 보자.>

‘…전 최대한 늦게 갈 겁니다만…….’

인사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는 한마디를 남긴 채 떠나간 네크라의 마지막 의지를 들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죽은 자의 기억인데 엄청나게 후련하게 떠나가는 네크라를 보니 느낌이 묘했다.

네크라가 떠난 자리에는 시안과 스틸, 그리고 칼 한 자루와 심장만이 남아 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니츠마탄에 칼과 심장을 넣고 스틸을 업고 갔겠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생겼다.

시안은 기억에 남아있던 대로 손에 들고 있던 카르나인을 왼 손바닥에 쑤욱 밀어 넣었다.

누가 보면 자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행동.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안의 손바닥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들어가던 카르나인은 시안의 손바닥 앞, 공간을 찢으며 쭈욱 밀려들어갔고 이윽고 길쭉한 손잡이까지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내친김에 그곳에 심장까지 밀어 넣었다.

‘거참… 남들은 이런 심장 하나 들고 있으면 엄청나게 강해지던데… 나는 어째…….’

심장을 먹으면 더 강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벽은 이런 심장 하나 가지고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다. 그리고 칼라굴 씨도 말하지 않았던가. 대주술, 소르마는 인간은 쓸 수 없다고. 차라리 나중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 좋다.

스틸을 등에 업은 시안은 잠들어 있는 스틸을 보며 웃었다. 크로나-폰을 스틸의 목에 걸려 있는 니츠마탄에 집어넣어 깔끔하게 마무리한 시안은 주변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음… 별일 없겠지… 재수 좋게 영지도 멀쩡하네.’

시안은 자신의 뒤쪽으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저 멀리 북쪽으로 향하고 있을 형수님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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