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52화 (53/81)

<52. 침공>

파레온은 영주성에서 영지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뒤집어지고 땅이 쪼개지던 대재앙이 벌어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도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격류는 영지 쪽으로는 향하지 않았기에 영지가 크게 파손된 부분은 없었고, 사람들은 지붕에 수북이 쌓인 흙먼지를 치우며 영지를 복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아래의 복구 상황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 파레온은 뒤이어 영주성 뒤에 있던 절벽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영지 뒤쪽에 있었던 콘-티안 산맥 방향을.

“후…….”

대재앙으로 인해 박살 난 산맥으로부터 나온, 떠다니던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보이기 시작한 광경.

휑하디 휑한, 녹아 붙은 흔적만이 남아있는,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평원.

분명 영지의 뒤에 위치하고 있던 콘-티안 산맥은 전설 속의 크로나가 베어 문 듯한 흔적만을 남기고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아니, 크로나라고 해도 한입에 저 정도 양을 먹어치우지는 못 했을 것이다. 아마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치워야겠지.

장엄하던 산세를 자랑하던, 로가디스 지방을 지켜주던 콘-티안 산맥은 그 산자락의 한 군데가 뻥 뚫린 채로, 마치 성문이 열린 성벽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레온은 저 멀리, 크랑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펴볼 수 있는 광경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우샤란이라…….”

저 멀리, 산맥 사이로 우샤란 왕국이 보이고 있었다.

파레온은 이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대륙의 정세가 어찌 변할지 걱정이 되었다.

이제까지 우샤란과 티안 왕국은 국경을 접하지 않았기에 크게 마찰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좁디좁은 쿠라단 협곡은 물류의 수송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침략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으니. 콘 왕국와 티안 왕국이 동맹을 맺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쿠라단 협곡은 동맹에게는 매우 유용하지만 적대국가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손을 잡고 함께 힘을 키우며 타란과 우샤란에게 대항하는 것이 낫지.

그리고 그건 우샤란이 콘 왕국을 먹어치운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콘-티안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한, 우샤란이 뻗어나갈 곳은 타란뿐이었고, 티안이 뻗어나갈 곳은 카란뿐이었으니.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쿠라단 협곡의 몇십, 몇백 배 넓이에 해당하는 이 새로 생긴 대평원은 상대방을 침략해 들어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리고 티안이 침략을 해 들어가건, 우샤란이 침략을 해 오던 간에 그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로가디스 지방은 굉장히 피곤해질 것이다.

로가디스 지방은 기회와 위기, 두 가지를 동시에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우샤란 지방을 먹어치울 기회.

혹은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위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무력 충돌, 혹은 대치는 피하기 힘들다. 비록 서로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조용하겠지만 얼마 가지는 못 할 것이다. 티안이 여유가 생기거나 우샤란이 여유가 생기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리라.

파레온은 한편의 구출극 때문에 벌어지게 된 대륙의 변화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시안 씨. 거하게 한판 하셨더군요. 쿠라단 씨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하하하.”

아무리 초인 간의 싸움을 찾기 힘들더라도 이 정도 해 놓으면 모를 수가 없다. 티안부터 우샤란까지를 뻥 뚫어놓다니. 이는 쿠라단이 뚫어 놓은 협곡과는 비교하기도 힘든 차이다.

라가오페는 감탄을 하며 시안을 쳐다보았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참… 사냥꾼을 잡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강한 녀석인데.”

“뭐, 강하긴 하더군요.”

자신의 손에 그렇게 오래 버텼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강자이다. 자신도 열일곱 살 시절에 만났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시안은 라가오페에게 자세한 사항은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사냥꾼이 스틸을 쫓던 것을 가로막고 죽였다는 것밖에는. 기억 속의 자세한 사항을 다 말하기는 너무 귀찮았고 죽은 자의 이야기를 해보았자 바뀌는 것은 없다.

라가오페도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냥꾼이 죽었다는 것, 하나였으니까.

그보다 라가오페가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스탄탈 씨는 어떻습니까?”

라가오페가 스탄탈의 안부를 물었다. 시안은 이 조직이 정말 초인의 안부 하나는 알뜰살뜰하게 챙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정신은 못 차린 상태인데… 조금 있으면 깨어날 듯합니다.”

주술의 여파인 듯, 체내 모든 기능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런 걸로 죽을 거면 초인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실제로 스틸의 체내 대사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맹렬한 속도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것참… 저희도 걱정 많이 했습니다. 설마 스틸 양의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냥 죽어도 전혼옥을 타란의 왕가 중에 먹이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라가오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직이라고 초인의 모든 행보를 일거수일투족 감찰할 수는 없다. 그건 시비를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게다가 타란 왕가에 스탄탈 4세가 버젓이 살아있길래 인간 시절에 후세를 봐 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하마터면 귀중한 재원을 잃을 뻔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생각보다 귀찮은 제약이군요. 후손이 있어야 한다니.”

시안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생각할수록 찝찝한 제약. 가족을 살릴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얼굴을 웃으며 말했다.

“하하. 시안 씨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저번에 말했지요? 대체품이라지만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아, 그러셨지요.”

“새로 만들어질 전혼옥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단점을 보완했지요. 후후. 앞으로를 생각하면 어서 개선해야 할 단점들이어서요. 시안 씨는 마음 편하게 재료만 구해 오시면 됩니다.”

어떤 식으로 개선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가오페의 호언장담에 시안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 그나저나 슬슬 구하러 가야겠군요. 그때는 자세한 사항을 못 들었던지라…….”

시안은 스틸 양을 구출하고 한결 더 마음이 편해졌기에 전혼옥의 재료에 대하여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스틸 양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지라 자세히 듣지 못 하였다. 단지 어떤 종족을 만나서 받아오면 된다는 내용밖에는.

하지만 라가오페의 이어지는 말에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종족이 대수림 깊숙한 곳에 사는 종족이란 말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하하. 저희에게는 사실 좀 부담스럽습니다. 여섯 뿔 한두 마리 정도는 괜찮지만 가는 도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또 지금 다들 바쁘거든요. 그런데 마침 시안 씨가 딱 와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산책 나가듯 가볍게 다녀오시면 되겠습니다.”

“음…….”

시안이 침음성을 삼키자 라가오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안 씨?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설마 위험하다고 생각하셔서……?”

“아니, 그건 아닌데…….”

예전에야 대북벽 너머를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섯 뿔 중 어떤 녀석이 온다고 해도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네크라의 기억으로 살펴본 대수림은 열일곱 시절의 자신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안이 고민하는 점은 다름 아닌 크로나였다. 일곱 뿔을 지닌, 대수림을 지배하는 대괴수.

분탕질을 치다가 크로나에게 걸리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이었다.

크로나에게 까불대러 갔다가 인생 거하게 말아먹은 네크라의 기억을 모조리 읽은 시안은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종족을 찾으려면 대수림을 모조리 헤집어야 할 텐데 크로나 정도의 강자가 자신을 ‘어이쿠! 제 영역을 잘 헤집고 다니시는군요. 볼일 보고 가십시오.’라고 배웅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이 새끼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평소라면 이런 고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확률이 있으면 시안은 가지 않으니.

하지만 반대쪽에 걸린 게 너무 컸다. 이번 한 번만 제대로 성공한다면 자신은 정말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시안이 고민하고 있자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깨달은 라가오페는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기묘한 기계음이 들렸다.

“음?”

시안은 자신의 아티팩트에서 나는 소리인가 하여 허리춤을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소리는 라가오페의 허리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그로인 씨의 연락이군요. 시안 씨,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라가오페가 시안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리춤에서 기계를 꺼내 만지작거리자 누군가의 녹색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그로인이라는 초인이리라. 시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엿듣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그쪽에 신경을 끄고 대수림 깊숙하게 들어가야 하는지 아닌지를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라가오페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영상을 종료한 라가오페는 웃으며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것참, 시안 씨는 운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네?”

갑작스런 라가오페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시안을 보며 라가오페는 입을 열었다.

☆ ☆ ☆

“허허… 허허허허…….”

나라샤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반 실성한 듯 웃고 있는 나라샤 국왕을 보며 탈린 자작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탈린 자작… 그러니까… 이게 며칠 전이라고?”

“삼 일 전의 일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시안 그 아이가 나온 지 정확히 일주일 만이구먼?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허허허… 허으흐아…….”

나라샤 국왕은 허탈하게 웃다가 결국에는 입에서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보고서에 쓰여 있는 내용은 길지 않았다.

<로가디스, 쿨란 백작령-우샤란, 전 콩티앙 지역 연결>

<콘-티안 산맥, 르볼 산봉우리부터 가르란 산봉우리까지 소멸>

<우샤란 무장병단 외 정규병력 전 콩티앙 지역에 집결 중>

“그러니까… 우리 시안… 이 친구가 산맥 하나를 가볍게 박살 내서 우리 국경을 친절하게 넓혀줬다, 이 뜻이지?”

“…네.”

“하아…….”

나라샤 국왕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를 바로하고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린다.

현재 티안은 국력이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병력의 질이나 무장상태, 국민의 생활수준은 현저히 올라갔지만 가장 중요한 무장의 무력수준과 숫자가 부족했다. 그론-필라에서 적극적으로 교육을 실천하고, 또 효과를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오 년은 더 있어야 한다.

만약 북쪽의 문제가 없었다면 이번 사태로 나라샤 국왕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넘치는 힘을 발산할 곳이 생긴 것이니. 단숨에 로가디스 지방을 통해 우샤란 왕국을 짓밟으러 갔을 것이다.

명분도 좋다. 동맹인 콘 왕국을 압제에서 구출한다. 듣기도 좋고 보기도 좋은 아주 아름다운 명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티안은 현재 북쪽을 틀어막느라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대북벽이 완성될 때까지는 빼낼 병력이 없다. 게다가 점점 북쪽의 공격이 거세어지고 있어 대북벽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병력을 빼낼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샤란이 미친 척하고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크게 곤란해진다. 물론 우샤란도 타란에 집중하느라 그렇게 여유가 있지는 않겠지만 세상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장 저렇게 콩티앙 지방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도 자신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빈틈이 보이면 쳐들어오겠다는 뜻이 아닌가.

나라샤 국왕은 복잡해지는 머리를 정리하고 탈린 자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만약 북쪽이 좀 안정화되고 있다면 그쪽의 병력을 빼어 집중하도록 하지. 우선 로가디스 지방에 남는 가이라 모조리 지원하고 방비를 강화하라고 하고.”

“저… 그게…….”

“무슨 일인가?”

탈린 자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본 나라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북쪽도 지금 이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영상기기로 보시지요.”

“…….”

나라샤 국왕은 탈린 자작이 들고 온 영상기기의 광경을 보고 무섭게 표정이 굳어졌다.

☆ ☆ ☆

북쪽을 지키는 수호무장, 칼-티안은 아래에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소음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인 자신의 청력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이렇게 들릴 정도라면 상당히 큰 소음이다.

엄중해야 할 경비시간에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이러면 민간인들이 불안해할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한동안 하리쟌의 침입이 없더니 녀석들이 군기가 빠진 것이라고 생각한 칼-티안은 소란이 일어난 장소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따끔하게 기합을 주면 앞으로 조용해질 것이리라.

마음을 굳힌 칼-티안은 내성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리며 성벽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굳은 표정으로 뛰어간 칼-티안은 성벽에 도착하여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그러자 병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성벽 저 멀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음?”

영지민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했기에 성벽 저 너머로 나타날 것들이라고는 하리쟌 녀석들밖에 없다.

하지만 병사들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기에 칼-티안은 안력을 돋우며 성벽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칼-티안 역시 병사들이 말한 정체불명의 무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엇인가.”

칼-티안이 보는 성벽 너머로, 이곳에서는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군대?’

군대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런 것을 지칭할 단어는 칼-티안의 머릿속에는 그것밖에 없었다.

정련되지 않은 진형.

통일되지 않은 무기.

절망에 가득 찬 표정과 힘 빠진 태도.

누가 보아도 군대의 특징이라고 할 것들을 갖추지 못한 무리들.

하지만 군대의 정의를 상대를 공포로 몰아넣고 폭력으로 찍어 누르기 위한 것으로 한다면 누가 봐도 저 수많은 무리들을 군대라고 하리라.

상대에게서는 왜인지 모를 기묘한 이질감이 느껴졌고, 그걸 바탕으로 묘한 공포감이 병사들 사이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바깥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칼-티안은 자신이 저 군대 안에서 무슨 이질감을 느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자세히 보니 군대도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종족들까지 섞여 있었다. 저런 군대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칼-티안은 자신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주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서 가이라 장전하고! 제 위치를 지켜라! 당장 수도로 저 영상을 녹화하여 보내고 키라인 검공과 국왕 폐하께 지원 요청을 보내라!”

지금 바깥에 서 있는 녀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그건 녀석들이 얌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기묘한 군대의 뒤로 새로운 군세가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저 군세가 일정 수 이상 합류하게 되면… 바로 달려들 것이다.

녀석들이 달려들기 전에 대비를 마쳐야 한다.

칼-티안은 절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각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 ☆ ☆

“그러니까… 이게 지금 북벽 쪽의 <크로티아> 요새에서 녹화되어 온 광경이라 이거지?”

나라샤 국왕은 도열해 있는 기묘한 군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이제까지 하리쟌과의 전투에서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크로티아 요새는 나라샤 국왕이 가장 신경 써서 방비를 한 요새이다.

티안의 북쪽은 하늘산맥에서 나오는 풍부한 광물을 바탕으로 성장한 도시들이 많다. 국경과 접해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위험이 없어 얻은 자금을 온전히 성장과 내실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하리쟌에게 뚫리면 대재앙이다. 만, 이만 단위의 인구 손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하리쟌 특유의 엄청난 번식력을 생각할 때 한 번이라도 뚫리면 위험하다.

크로티아 요새는 그런 의미에서 건설, 증축되었다.

대북벽과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크로티아 요새는 원래는 혹시 모를 카란 왕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부의 영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5년 전부터 하리쟌들이 하늘산맥을 넘어 침범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방벽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대수림과 가까웠기에 항상 더 강하고 많은 하리쟌들이 몰려왔고, 그렇기에 나라샤 국왕은 최신 병기와 마스터들을 아낌없이 이곳에 배치했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은 자신을 건드릴 여력이 없었기에.

심지어 근처 카란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키라인 검공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도록 연락수단과 이동수단까지 마련해 놓았다.

그렇기에 나라샤 국왕은 항상 자신이 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크로티아만큼은 뚫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영상을 보는 순간 나라샤 국왕은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저기 섞여 있는 저 녀석들이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욕망이 저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표정에는 절망만이 가득하다.

‘아니, 애초에 저런 녀석들로 전쟁을 치를 수가 있나?’

사기가 없는 군대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나라샤 국왕이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쉬운 군대는 사기가 없는 군대이다. 툭 치기만 해도 알아서 우르르 무너지니까.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개개인이 강해도 사기가 없이 절망만이 가득 차 있는 군대는 뭉쳐놓은 개미와 같다.

하지만 분명 그랑-반더의 육감이 저 녀석들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나라샤 국왕은 자신이 평생 믿어 온 이성과 무장으로서의 육감 중 무엇을 믿을지를 알고 있었다.

무장의 육감은 이성보다 위에 선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렇다. 나라샤는 자신의 육감을 보며 항상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랑-반더인 자신도 그런데 아마 초인쯤 되면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나라샤는 결정을 내렸다.

“강제 차출령을 내린다! 각 귀족가에서 병력을 뽑아내도록! 그리고 타란 국경에 배치한 무장 병단 중 드라고나를 제외한 모두를 크로티아 요새로 이동시키고 카란 국경의 키라인 검공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지원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아래 무장들은 나라샤 국왕 폐하의 명을 들으며 놀라고 말았다.

자신들은 영상으로 녹화되어 온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생 전투를 하고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백전연마의 무장들.

그렇기에 저렇게 절망에 빠진 군대 따위는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국왕폐하는 무언가 다른 판단을 내리신 듯하다. 그리고 이제까지 국왕 폐하의 판단은 틀린 적이 거의 없다.

게다가 강제 차출령이라니! 강제 차출령은 타란의 국경을 넘을 때도 발휘된 적이 없다. 각 귀족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티안에서는 이례적인 판단. 이것은… 이번 사태가 정말 티안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것이 대전에 모인 무장들을 긴장케 했다.

☆ ☆ ☆

“스틸 양, 언제 일어납니까. 그것참…….”

시안은 눈앞에 누워 있는 스틸 양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몸은 이미 다 나은 듯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항상 호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 것 없이 행동하던 스틸 양이 이렇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초인은 외부의 도움으로는 돕기도 힘들기에 시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시안은 스틸을 바라보며 며칠 전 라가오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시안 씨에게는 다행이군요, 이것 참. 저 녀석들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굳이 시안 씨에게 부탁 안 해도 되었을 텐데… 저희도 지금 다들 일이 생겨서 나가 있거든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요.’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지금 프로젝트의 막바지 단계라… 영 일손이 부족하네요. 그나저나 스틸 양이 일어나면 움직이신다고요?’

‘네. 그래도 일어나는 건 보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지극정성이시군요. 후후. 뭐… 그게 오히려 시간상 나을 수도 있겠군요. 저희도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도 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대화를 떠올리던 시안은 눈앞의 스틸 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시안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는 시간에 스틸 양 선물이나 만들자.’

그렇게 생각한 시안은 스틸 양 목에 걸려 있던 니츠마탄을 작동시켜 크로마탄을 꺼냈다.

라가오페의 조직이 주운 조각은 돌려줬지만 두 동강 난 크로나-폰은 그대로 니츠마탄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두 조각의 무게를 잰 시안은 양쪽 무게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이 좀 더 무거운데…….’

시안은 무거운 쪽의 조각을 똑 부러트려 다른 쪽에 대고 꾸욱 하고 눌렀다. 그러자 마치 점토가 붙듯 떼어낸 조각이 다른 조각으로 눌러 붙어 들어갔다.

양쪽의 무게를 재어 보고 비슷해진 것에 만족한 시안은 이윽고 크로나-폰 조각을 조물거리다가 예전 공방을 지나가다 본 장갑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크로톤 공방에서 만든 <24명의 여무장들이 선택한 올해의 건틀릿>의 디자인.

3,500탈란트에 절찬리에 판매 중인 그 건틀릿은 내구성도 내구성이지만 그 유려한 디자인과 사람을 후려쳐도 피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무장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안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손안에 들린 크로나-폰을 쭉쭉 빚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천 톤의 무게를 가진 조각들이 시안의 손이 지나가자 유려한 광택을 지닌 금속판으로 변해나갔다.

사람의 손으로 빚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쭉 뻗은 금속들.

이윽고 시안이 반죽을 끝냈을 때는 반토막 난 검조각들은 사라지고 유려한 디자인의 양손 건틀릿만이 남아 있었다.

양이 조금 모자란 듯하여 시판되고 있던 건틀릿의 디자인보다는 조금 얇게 만들었지만 금속이 금속이니만큼 별문제 없을 것이다.

시안은 만들어진 건틀릿을 흡족하게 바라본 후 니츠마탄을 가동시켜 그 안에 집어넣었다. 스틸 양이 보면 분명 만족하리라.

“스틸 양, 어서 일어나십시오. 저랑 같이 어서 놀러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샤 국왕이 들으면 기겁할 말을 읊조리며 시안은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스틸 양이 일어나면 그다음에 자신이 움직이리라.

☆ ☆ ☆

“포탄 더 가져와! 포탄!”

“남자들은 K-11 구역으로 모두 모여라! 식량을 날라야 한다!.”

“여성들은 회관으로 모여라! 천을 수선해야 한다!”

티안의 북방을 수호하는 크로티안 요새는 난리가 난 상태였다.

각 귀족가에서 차출된 병력들이 속속들이 합류했고 요새는 그들의 숙소를 마련하느라 민간 구역까지 강제로 확보하고 있었다.

민간인들 중 체력이 좋은 남성들도 강제로 차출되어 성벽을 보수하고 포탄을 나르는 등의 각종 노역에 참여하였고, 여성들은 병사들의 음식을 만드는 업무에 배정되었다. 다행히도 티안 왕국은 현재 최고로 부유한 시기였기에 성안에 식량의 비축분은 충분했고 음식이 모자라 사기가 떨어질 일은 없었다.

아무리 왕가의 집행이라고 하여도 이런 강제적인 의무 부여에 모두들 한 소리 할 법도 한데 모두가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 상관의 명을 따라 시킨바 일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뚫리게 된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니까. 자신들이라도 한 손 보태어야 저 바깥의 기괴한 군대를 막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진다.

차라리 인간의 군대였다면 이 공포가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깥의 군대가 자아내는 기묘한 풍경은 내성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렇게 속속들이 병력이 도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마음속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

왜냐하면… 바깥의 녀석들 숫자가 불어나는 숫자는 더욱 빨랐으니까.

바깥의 녀석들 숫자가 불어나는 광경을 직접 보고 있던 병사들의 공포는 내성의 사람들보다 더욱 심했다.

“젠장… 저 녀석들 대체 뭐야.”

음울한 표정으로 내성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성벽을 지키던 크롤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하리쟌 녀석들이라면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식욕, 파괴욕, 생존욕.

하지만 건너편에 보이는 녀석들은 달랐다. 생물체에게라면 기본적으로 존재해야 할 욕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지쳐 보이는 몸짓과 절망에 가득 찬 표정. 도저히 군대라고는 볼 수 없는 녀석들.

그렇지만 크롤은 저 녀석들이 두려웠다. 아마 지휘관도 마찬가지인 듯하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용맹한 티안의 군대가 이렇게 고작 성을 지키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니.

‘제발 움직이지 마라… 제발…….’

하지만 하늘은 크롤의 뜻을 저버렸다.

가만히 서 있던 녀석들이 순간 움찔했다. 보통 움찔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워야 하지만 수천, 수만 명의 무리가 동시에 움찔하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녀석들이 동시에 성벽을 바라보는 모습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행동에 비하면 앞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벽을 바라보던 녀석들은 절망에 가득 찬, 하지만 그 와중에 한 줄기의 희망이 깃든 표정으로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공격이다!”

크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경계종을 울렸고, 이윽고 성벽에 설치된 가이라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녀석들을 향해 불을 뿜으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 ☆ ☆

“폐하! 녀석들이 움직였습니다!”

“뭐? 벌써?”

직접 병력을 모아 올라가고 있던 나라샤 국왕은 짧은 신음을 토했다. 우선 근방의 귀족가 병력을 모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왕국 1, 2근위기사단을 비롯한 수도의 정예 병력들을 집결시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대처가 늦었는지 적군은 이미 공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니다. 크로티아라면… 버텨 줄 것이다.’

“어서 영상을 가져와라!”

전쟁에서 전장 영상 녹화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윽고 나라샤 국왕은 영상 아티팩트를 통해 크로티아 요새의 전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라샤 국왕은 영상을 집중하여 지켜보았고 표정은 갈수록 굳어만 갔다.

나라샤 국왕이 기가 질린 표정이 될 때쯤 옆의 무장이 국왕의 앞인 것도 잊고 신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하지만 나라샤 국왕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

영상기기 너머로 보이는 전장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 잔혹한 광경을 보며 나라샤는 이를 악물었고 이윽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더 빠른 속도로 진군해라! 시간이 없다!”

‘이대로 가면… 가기도 전에 다 죽는다. 키라인 검공, 버텨주시오.’

나라샤 국왕은 그곳을 지켜주는 키라인 검공이 잘 버텨주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 ☆ ☆

“끄아아악!”

크로티아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티안의 병사, 2급병 레펠은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의 구슬픈 비명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칼을 휘두르지 않고 그딴 짓을 했다가는 귀는 편할지 몰라도 자신의 입은 옆의 동료와 같은 비명 소리를 내뱉느라 고생하게 될 테니까.

레펠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대를 보며 칼을 휘둘렀다.

퍼걱!

고된 훈련이 헛되지 않았는지 자신의 칼은 정확히 상대의 왼팔에 틀어막혔다. 하지만 레펠은 안심하지 않고 몸을 숙였다. 옆의 동료도 한 칼 먹였다고 안심하다가 그대로 당했다. 심지어 저 친구는 목에 한 칼을 먹였는데도 상대는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겨우 팔에 한 칼 먹였다고 방심할 상황이 아니다.

예상대로 눈앞의 녀석은 왼팔에 칼을 맞았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바짝 붙기 위해서 한 팔에 칼을 맞는 것을 허용한 것 같았다.

‘미친…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건가?’

처음에는 녀석이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달려드는 녀석의 입에서는 신음과도 같은 비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끄으… 아파… 아파…….”

하지만 절망스러운 표정과 비명을 내뱉는 입과는 다르게 녀석의 칼질은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개자식아! 좀 죽어라, 죽어!”

비명처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서는 레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도… 그러고…….”

‘응?’

상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레펠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게 엄청난 실수였다.

콰득!

“크아아악!”

녀석은 그대로 칼을 날려 레펠의 심장에 꽂았고 레펠은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눈을 부릅뜨고 쓰러졌다.

승리했으니 분명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야 하지만 레펠을 쓰러트린 자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한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쓰러진 레펠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괴인은 이윽고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투의 흥분이 가시니 점차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으으…….”

남자는 너무나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갈팡질팡했지만 팔의 고통이 심해지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자신의 눈앞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레펠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앞의 레펠에게 얼굴을 묻은 채 레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남자는 처음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레펠을 거침없이 먹어치웠고, 그에 맞추어 팔의 상처가 점점 아물기 시작했다.

팔의 상처가 모조리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자 그제야 남자는 먹어치우는 행위를 그만두었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또다시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로티아 요새의 사방에서 이러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포격에 맞아도, 칼에 맞아도 죽지 않고 달려드는 군대는 계속해서 티안의 군대를 말 그대로 먹어치우며 몰아붙였다.

그랑-반더인 키라인 검공이 미친 듯이 분투했지만 놀랍게도 기괴한 군대 속에는 마스터가 셀 수 없이도 많았다. 게다가 그 마스터들이 죽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달려드니 키라인 검공이라고 해도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티안은 분투했지만 결국 달려드는 녀석들을 상대할 수 없었고 고위 무장들을 중심으로 뭉쳐 잔존세력을 데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했다.

이렇게 기괴한 군대와 티안의 1차 전투는 기괴한 군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키라인 검공, 괜찮소이까.”

허겁지겁 달려온 나라샤 국왕의 군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후퇴한 키라인 검공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폐하, 오셨습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전장의 영상은 모조리 지켜보았소이다. 키라인 검공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살려올 수 없었을 것이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병사들은 짐이 되었으면 되었지 전투는 불가능할 듯싶었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 심지어 어떤 병사는 땅을 보고 계속해서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런 자들은 군대에 포함시켜 보았자 사기만 저하시킨다. 게다가 수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라샤는 저들은 도울 병사 일부를 차출하여 신관이 머무르고 있는 후방으로 보냈다. 비록 전쟁신의 신관인지라 치유력은 조금 떨어져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대충 잔존병들을 추스른 나라샤는 굳은 표정으로 키라인 검공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영상기기로 보긴 했다만…….”

“보신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키라인은 자신이 본 군대의 특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멀리서 본 느낌과 직접 싸워본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키라인 검공이 죽 나열한 특징은 이랬다.

보통 인간과 다를 바는 없다. 저들도 칼에 맞으면 다치고 저주에 맞으면 느려지고 이적에 맞으면 그 효과를 그대로 받는다.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심지어 목이 달아나도 아등바등 움직인다. 상처가 엄청난 속도로 재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떨어진 시체를 충분히 섭취하면 원상태로 돌아온다. 잘려나간 팔의 경우는 제 위치에 다시 붙여 놓으면 얼마 안지나 붙는다.

가장 효과적인 제거방법은 머리를 으깨 놓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섭취를 할 수 없으니 재생이 불가능하고 머리를 붙이지도 못 한다. 하지만 계속 살아 움직이니 팔다리도 잘라 놓으면 더욱 좋다.

이적도 좋다. 칼과 달리 파괴범위가 넓기 때문에 죽지는 않아도 행동불능 상태를 쉽게 만들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고 싶어 환장한 녀석들처럼 계속 달려들었다. 절망한 표정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으니 더욱 기괴한 상황.

이 기괴한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라샤 국왕은 표정을 잔뜩 굳혔다.

죽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군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망자의 군대 같은 녀석들이군…….”

그 예전, 인간이 아직 국가를 형성하기도 전인 먼 옛날, 죽여도 죽여도 지옥에서 계속 기어 올라와 싸웠다는 무적의 군대. 키라인 검공이 말한 군대는 그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나라샤 국왕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다음 날 크로티아 도착해서는 그 표정이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키라인 검공, 무슨 일인가?”

키라인 검공이 저 멀리 보이는 크로티아 요새를 보며 침음성을 흘리자 나라샤 국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자신도 저 멀리 보이는 요새 안을 보았지만 어제와는 별다른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숫자가 늘었습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살아있던 녀석들이 이제 저 군대 안에 들어가 있군요.”

“무슨…….”

죽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들이 군대에 합류해 있다니?

상대가 어떤 이능이나 이적을 부려 저런 군대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식이라는 게 있다. 사람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라면 제약이 심할 것이다. 한데 저렇게 수천 명을 동시에 자신의 군대에 집어넣다니?

혹시 포로로 잡힌 것인가 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포로라면 칼을 꼬나 쥐게 해서 군대 사이에 섞어 놓지는 않았을 테니. 저 말은 이제 며칠 전까지 자신이 뜯어먹으려고 달려들던 녀석들을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뜻이다. 그 수단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라샤 국왕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장거리 통신 아티팩트로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통신병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하!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크로티아 요새뿐 아니라… 북쪽 도시 모두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

“거기다… 타란 왕국과 대북벽까지도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허…….”

보고되어 온 소식을 들은 나라샤 국왕은 표정을 굳혔다.

티안의 북쪽 요새, 크로티아뿐 아니라 북쪽의 모든 도시들이 하늘산맥을 넘어 온 저 망자의 군대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몇 곳은 이곳보다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타란과 대북벽까지라니. 대북벽은 원체 방비가 튼튼하니 그럭저럭 잘 막을 테지만 타란은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터이다. 아마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쯤 되면 티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의 문제이다. 차라리 강대한 군세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 상대가 강대해도 끊임없이 부딪치면 계속해서 그 군세가 깎여 나갈 것이니까.

하지만 저렇게 싸울 때마다 죽지 않고 그 수를 불려 나가는 군대라면 그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 군세를 계속해서 불려 나갈 것이다.

“미치겠군… 우선 대법도회에 지원을 요청해라. 그리고… 우선 후퇴한다.”

“알겠습니다!”

원래 나라샤의 계획은 이쪽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다른 지역의 병력을 모아 일거에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저 군대의 움직임은 그리 빠른 것 같지 않았고, 그렇기에 멀리서 견제만 하면서 충분한 화력이 모이면 녀석들의 사지를 일일이 떼어 놓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저런 녀석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영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순간 재앙이 일어난다. 저 기묘한 군대를 어디까지 늘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한계가 없다면 큰일이 난다. 일반인들도 저렇게 죽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서운 군대가 된다.

영지 하나의 인구가 수십만에 달하는 거대한 곳도 있는데 그런 곳이 통째로 상대에게 넘어가게 된다면… 티안은 그날로 끝장이다.

각 지역의 방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아서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기묘한 상황에 나라샤 국왕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모든 자료를 뒤져라! 저 기괴한 녀석들이 어떤 녀석인지 모조리 조사해라!”

우선은 상대에 대한 파악을 해야 한다. 공격은 그다음이다.

☆ ☆ ☆

전 대륙이 난리가 났다.

하늘산맥을 포함해 북쪽 전체에서 대륙을 압박하는 기묘한 군대.

비록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한 국가는 타란과 티안, 카란 세 나라였지만 다른 나라들도 군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심각함을 인지했다.

하리쟌과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하리쟌 녀석들은 여섯 뿔이 아닌 이상에야 결국에는 막힌다. 한 왕국의 저력이라는 것이 고작 뭉치지도 못하는 하리쟌 녀석들에게 어떻게 될 만큼 만만한 수준은 아니니까. 게다가 티안은 강국 중의 강국. 이제까지 다른 나라들이 뒤에서 지켜보기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뚫리지 않을 것을 아니까.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여섯 뿔도 대북벽의 수호자, 그로인이 죽여 버렸다.

하지만 저렇게 계속해서 숫자를 불리는 군대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우샤란이나 브로샨 같은 남쪽 왕국들로 밀려올 때쯤이면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저 녀석들은 여섯 뿔도 아니니 그로인이 나서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로인은 인간을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대북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냥감이 많으니 그곳에 머무르는 것뿐. 그로인은 동급의 존재 이하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그 때문에 북쪽을 타란과 티안, 대북벽이 틀어막으며 시간을 버는 동안 뒤쪽 국가들은 맹렬하게 회의를 진행하며 지원군을 꾸렸다.

다른 나라들은 이 기회에 타란과 티안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이득을 챙기고 싶었지만 녀석들이 밀고 들어오는 속도를 보고 기가 질려 그럴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다.

단 삼 일도 되지 않아 북쪽의 대부분의 요새가 무너졌다. 영지민들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피시켰지만 미처 대피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모두 저 기괴한 군대의 일원이 되었다.

녀석들이 발견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군대의 숫자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렇게 이적으로 태워죽였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마스터도 잡혀 들어간 것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했다.

더 이상 꾸물거릴 때가 아님을 깨달은 국가들은 황급히 병력을 모아 북쪽으로 지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모조리 통제하고 있던 나라샤 국왕은 머리를 싸맸다.

나라샤 국왕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래, 역시… 눈에는 눈이다.”

나라샤 국왕은 마음을 다잡았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다.

이번에 지워진 콘-티안 산맥을 본 나라샤 국왕은 시안이라는 패를 들고도 써먹을 생각을 하지 못 하였다. 이번 사태가 큰 위기임을 직감하였지만 시안 그 아이가 칠 사고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시안 그 아이의 인성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힘만 믿고 설치는 녀석들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좋았다. 힘을 휘두르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지만 그 힘으로 자신이 먼저 남을 찍어 누르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 해도 난폭한 무장들 사이에서는 거의 문관에 가깝다는 평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샤 국왕은 그게 더 두려웠다. 악의를 가지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라니!

지금까지 그 아이가 직접적으로 박살 낸 것이 산맥 두 개이고, 간접적으로 부순 것이 도시 네 개이다. 특히 가장 최근에 벌인 짓은 국가가 동원되어도 수십, 수백 년이 걸릴 만한 행위였다.

그러한 것들을 아무런 악의 없이, 장난스럽게 벌였다는 것이 나라샤 국왕은 너무 두려웠다.

그렇기에 이제까지는 리안 경과 로만 백작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저 아이가 악의를 가지게 되었을 때 벌어질 일이 도무지 상상도 가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면 다 죽게 생겼다. 그리고 더 이상 고통 받는 병사들을 지켜볼 자신도 없었다.

‘그래… 그 아이가 반드시 사고를 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나라샤 국왕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노르바를 떠올리며 애써 희망적인 미래를 그렸다. 그러고는 로만가에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뭐? 사라졌다고?”

“네… 어제 일어나더니 인사를 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네… 같이 있던 여성과 어디론가 향했다고 하더군요.”

“아…….”

나라샤 국왕은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현 상황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그 아이에게 희망을 걸자.’

나라샤 국왕은 계속해서 레노르바를 떠올리며 희망찬 미래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 ☆ ☆

셀라인 백작령 위쪽에 위치한 대평원.

이러한 대평원을 엄청난 속도로 가로지르는 두 인영이 보였다.

두 인영은 때로는 날아서, 때로는 뛰어서 엄청난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라샤 국왕이 그토록 걱정하던 시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스틸이 같이 뛰어가고 있었다.

“시안 동생, 오랜만이네. 후흐흐.”

“…일어나 계셨었다니… 엄청난 악취미이시군요.”

시안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스틸을 바라보았다. 스틸은 자신의 옆에서 뛰어가면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니, 뭐. 동생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엄청 보기 좋더라고.”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습니까?”

“그 동결된 감옥에서 나오고부터? 의식은 계속 있었어. 단지 회복되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움직이지 않은 거지.”

“…….”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었다는 말에 시안은 죽고 싶었다.

“근데 회복되고 동생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좀 더 누워 있었지. 흐하하. ‘후후, 스틸 양이 좋아하시겠지?’”

“…….”

“‘어서 일어나십시오, 스틸 양.’”

주저리주저리 자신이 침상 옆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읽어주는 스틸 양을 보며 시안은 이틀 전 저런 말을 깨어 있던 스틸 양에게 읊조린 자신의 주둥이를 뭉개놓고 싶었다.

얼굴이 빨개진 시안을 보며 스틸 양이 웃었다.

“그러게 숙녀를 너무 방치하는 게 아니야.”

“…….”

“그래도 고마워, 시안 동생. 선물 잘 받을게. 굉장히 마음에 들어.”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놀릴 만큼 놀릴 스틸은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하겠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지은 후 고마움의 인사를 표했다.

시안은 스틸의 놀림이 멈춘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후후. 안 그래도 손에 상처날까 봐 걱정 많았는데 이게 있으면 걱정 없겠는걸.”

손에 낀 장갑이 마음에 드는지 캉캉거리며 부딪치는 스틸 양을 보며 시안은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스틸 양에게 한 대 맞으면 요단강 뱃사공을 보고 오게 되었지만 저걸 낀 상태로 맞으면 그날로 요단강 뱃사공으로 취직이다.

시안의 표정을 보았는지 스틸이 뛰어가는 와중에도 시안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후후. 걱정 마, 동생. 내가 아무에게나 폭력을 쓸 사람으로 보여?”

“뭐… 그럴 분은 아니시지요.”

아무에게나는 아니겠지만 아무렇게나는 폭력을 쓸 사람으로 보인단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시안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열심히 뛰던 와중에 스틸은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오랜만의 해후인데 너무 급박한 거 아니야?”

“아… 구해야 할 것이 있어서요. 해후는 우선 나중에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스틸 양은 좀 더 누워 계셔도 되는데…….”

시안은 스틸이 일어난 것을 보고 일어나서 라가오페가 말한 대체품을 구해오려고 했다. 하지만 스틸 양은 기어코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붙었고, 그 결과 둘이 같이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시안의 한마디에 스틸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동생을 따라가면 반드시 재미있는 일이 생기거든.”

“…….”

“나보다 더한 사람은 진짜 처음 봤어, 동생. 이번에도 기대할게.”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저처럼 젠틀한 사람에게 무슨…….”

하지만 시안 역시 스스로 말하면서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무언가 더 항변하려다가 말을 멈추고 앞으로 뛰어가는 데에 집중했고 스틸은 그런 시안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같이 뛰어갔다.

<7권에서 계속>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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