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로샤란>
“으으…….”
로쿰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티안의 수비병들은 결국 망자의 군대에게 패배했고 자신이 지키던 북쪽의 요새는 결국 점령당하고 말았다.
주변은 이미 자신이 아까 싸우던 기괴한 군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 사이에서 망자의 군대라고 불리고 있는 녀석들은 아까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은 이미 포로로 잡힌 상태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들을 먹어치우던 녀석들이 오히려 이렇게 조용하자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게다가 녀석들이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는 그 시선을 보니 더욱 그랬다. 마치 자신에게 앞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듯한 시선이었기에.
그러던 와중 자신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망자의 군대들 사이에서 갑자기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뭐지?’
공포에 질린 로쿰이었지만 그런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더 최악이 올 수는 없을 것 같았기에 지금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요소라도 반가웠다.
망자의 군대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더니 그들이 한곳을 두려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망자들이 주루룩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무언가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눈에 고인 피 때문에 무엇이 나온지 잘 보이지 않았던 로쿰은 머리를 털어 굳은 피를 떼어내고 갑자기 등장한 무언가를 바라보기 위해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요정?’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었지만 생김새만 보면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요정이 분명했다.
어린아이만 한 체구에 등에 달린 네 장의 날개.
그런 날개가 사방으로 뿌려질 때마다 작은 은빛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얼굴은 어찌나 귀엽게 생겼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변태 같은 귀족들에게 잡힌다면 곤욕깨나 치를 것처럼 생겼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성별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식인을 하는 망자의 군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의 등장에 로쿰을 비롯한 포로들은 순간 멍해졌다.
동시에 작은 희망이 들었다. 저런 존재라면 혹시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책 속에 나온 요정들은 장난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분명 선량한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생각이 공포에 질린 자신이 애써 떠올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히히.>
스물일곱 번째 딸, <라로쿠라>는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수천 년 전, 평화롭게 살던 자신들을 모조리 씹어 먹고 자신들의 왕국을 무너트린 괴물 같은 녀석을 피해 대수림으로 도망친 이후로는 항상 여왕님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최근 400년간은 정말 기분 좋은 일밖에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시작은 자신들을 협박하여 대수림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 하게 하던 제국 원숭이 녀석들이 400년 전 모조리 쓸려나간 때부터였다.
600년 전, 녀석들이 대수림 코앞까지 세력을 넓혔을 때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었다. 저 녀석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노예가 없는 대수림의 생활은 그들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수천 년 만에 다시 만난 원숭이 녀석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수천 년 전 자신의 노예 생활만 하던 녀석들이 자신들이 대수림에 숨어 지내는 동안 저런 기괴한 힘을 가지고 강대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뜨거운 맛을 보고 대수림 깊숙한 곳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노예 취급 당하던 녀석들에게 쫓겨 들어왔으니 그 치욕이 더욱 컸다.
그런 녀석들이 모조리 사라졌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더 좋은 것은 그 대재앙 속에서도 녀석들이 간신히 살아남은 숫자가 꽤 많다는 것. 예전에야 뭉쳐서 이적이란 것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야 두려웠지만 이미 가루가 된 녀석들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피가 많이 필요하기에 노예로 만들기 힘든 하리쟌밖에 없는 대수림에서 자신들은 세력을 키우기가 힘들었는데 저렇게 적당한 크기의 원숭이들과 이종족들이 많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대수림에 숨어 살던 자신의 종족은 즉시 넓은 땅에 흩어진 녀석들을 노예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천 년 전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때 그랬듯이.
수백 년간 걸친 작업 끝에 자신들의 세력은 꽤나 거대해졌다. 수천 년 전의 성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라로쿠라 자신에게는 대수림에서 우선 자리를 잡은 것 자체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다. 왕국이 건재하던 그때가 그리운 듯,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도 계속해서 옛 제국의 영토를 뒤지며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종족과 노예들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천 년 전 자신들을 씹어 먹은 괴물 같은 녀석의 기운이 강해졌으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 예전, 지금보다 수십 배 번성했을 때 자신들의 왕국을 침범해 들어온, 여섯 개의 뿔이 달린 괴물 같은 녀석.
수많은 노예들이 자신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괴물 녀석은 천천히 걸어와서 도망가는 동족들을 그 거대한 입으로 몽땅 집어삼켰고, 살아남은 여왕님과 자신의 동족들은 그 괴물이 쫓아오지 않는 대수림으로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행히 대수림은 다른 크로나의 영역이었기에 그 녀석, 드라고나는 침범해 들어오지 않았다.
여왕님은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그 괴물 같은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는 파수꾼들이 영토를 지나갈 때도 습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으니까.
그렇다고 대수림의 반대쪽으로 나갈 수도 없었기에 그들은 세력이 강대해진 후에도 한동안 수림 안에 숨어있어야 했다.
그러던 얼마 전, 종족들 모두를 환희에 떨게 한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더 이상… 더 이상 그 괴물 같은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왕님이 기쁨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그 말에 동족들 모두가 흥분했다. 이제 자신들을 가로막을 요소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자신들의 노예 군대는 완성된 지 오래였다. 하늘산맥을 넘어갈 수 없어 저 너머 남쪽의 인간 녀석들을 건드리지 못 하였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자신들을 두려워하게 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여왕님이 다른 것을 준비해 오는 동안 자신들은 모아놓았던 노예들을 부려 쭈욱 남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나타난, 원숭이들의 요새.
사실 내려오는 동안 살짝 걱정되기는 하였다. 600년 전 데일 때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적은 상당히 무서웠고 또 그 시간 사이에 무슨 발전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은 오히려 퇴보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칼질은 좀 더 쓸 만해졌다. 하지만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이적이라는 학문은 형편없이 퇴보해 있었다.
이 멍청한 원숭이들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적이라는 것보다 칼에 더 치중한 모양이었다.
자신들에게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의 노예는 칼보다는 이적을 더 두려워했으니까. 아무리 자신들의 권능을 받아 죽지 않아도 팔다리가 몽땅 불타버리면 움직이지 못 한다.
하지만 칼에 맞으면 먹어치우고 회복하면 그만이다.
노예가 저 녀석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할 일은 간단하다.
<노예의 숫자를 늘리는 것>
아마 자신의 형제자매들도 열심히 노예를 늘리고 있을 것이다.
<후후. 나도 게으름 피울 때가 아니지.>
라로쿠라는 눈앞의 노예 후보들을 보며 웃었다. 녀석들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지 못 할 것이다. 수천 년간 자신들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런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에 자신들은 이 녀석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라로쿠라는 자신의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죽지 않는 노예 녀석들과는 달리 자신은 연약하니까 조심조심.
이윽고 깨문 여섯 번째 손가락 끝에서 작은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누가 보면 핏방울이라고 하지 않았으리라. 피는 붉은빛을 띠지 황금빛을 띠지 않으니까.
이 황금빛 피야말로 자신의 일족, <로샤란>이 지배자임을 보여주는 증거. 천한 녀석들과는 아예 태생부터가 다름을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강하고 약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장 저 원숭이들의 장군이라는 녀석들도 자신보다는 강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지배하는 것은 자신이다. 귀족이란 강한 자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이니까.
손끝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핏방울을 쳐다보던 라로쿠라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짓눌려서 아무런 반항도 못 하는 원숭이의 입속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렸다. 눈앞의 녀석은 녀석들 기준으로 마스터는 되어 보인다. 그렇다면 한 방울 정도는 필요하다. 자신의 금보다 귀한 피를 한 방울이나 받아먹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피가 보통 피인가? 무려 ‘불사’를 선물해주는 놀라운 피가 아닌가. 겨우 100년 정도밖에 못 사는 원숭이들은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실제로 여기 있는 군대의 대부분은 제국이 멸망하고 만들어졌기에 기본적으로 삼사백 년은 살아온 상태이다.
입안으로 황금빛 피가 흘러들어가자 눈앞에 짓눌려있던 녀석은 먹지 않으려고 반항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핏방울은 입술에 닿자마자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또르르 굴러가 목구멍 속으로 타고 넘어갔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자가 변하는 광경을 지켜볼 시간이 없다. 형제자매들이 있다지만 아직 종속시켜야 할 노예들이 수백 명이 넘으니까.
눈앞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원숭이를 내버려두고 차례차례 순서대로 입안에 피를 한 방울씩 흘려 넣던 라로쿠라는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애초에 자신의 체구가 그다지 크지 않으니… 게다가 며칠간 쉴 틈도 없이 수를 불렸더니 더 그랬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불려 자신의 자매들보다도 더 많은 세력을 구축해야 여왕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라로쿠라가 작업을 하던 중 주변의 군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주위까지 시끄러워지자 작업에 집중하던 라로쿠라는 신경질을 내며 녀석들을 쳐다보았다.
<이런 버러지들이! 시끄럽게 지금 뭐 하는 거야!>
라로쿠라가 화를 내자 모두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라로쿠라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난 사백 년간 몸소 체험해 왔으니까.
하지만 게중 용감한 한 녀석이 저 쪽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저… 저곳에서 지금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뭐?>
그제야 라로쿠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속도로 평원을 가르며 날아오는 두 물체를 본 라로쿠라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저것의 정체가 무언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라로쿠라는 주위 노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를 보호해라!>
그러자 노예들은 차곡차곡 몸으로 방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직 종속시키지 못 한 노예들이 남아있지만 죽어도 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 수상한 것들로 인해 노예들이 다치면 회복할 먹을거리도 필요하고.
이윽고 노예의 방벽으로 둘러싸인 라로쿠라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궁!
굉장한 속도로 날아온 두 개의 물체는 땅바닥을 박살 내며 착지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위력에 라로쿠라는 살짝 귀엽게 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 놈들이 발사한 이적인 줄 알았기에 훨씬 더 강한 위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 정도라면 방벽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날아온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두 개의 인영. 하지만 라로쿠라는 방심하지 않았다. 평범한 녀석들이 이렇게 날아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날아온 인영 중 남자가 한 말에 더욱 긴장하며 노예를 이용하여 포위망을 좁혔다.
“저기… 거기 계신 분이 ‘로샤란’인가 하는 분들이 맞으십니까?”
<뭣? 네놈이 어떻게!>
애초에 자신의 종족을 아는 대륙 녀석들은 모조리 자신의 노예가 되었는데 정확하게 종족의 이름을 말하자 라로쿠라가 긴장하며 대답했다.
“아, 맞으신가 보군요. 제가 좀 받을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러면서 남자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이를 보던 라로쿠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예의가 아닌 줄은 알겠지만 헌혈 좀 하시지요. 네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통을 꺼내 보이는 건방진 녀석을 보자 라로쿠라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건방진 노예종족이 자신을 무슨 혈액통 취급하다니!
<쳐라!>
“…….”
“하하! 동생, 역시 이번에도 내 예상이 맞았지?”
그러자 사방에서 둘을 둘러싸고 있던 군대가 달려들기 시작했고, 스틸은 신나서 달려오는 녀석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 ☆ ☆
시안은 달려드는 녀석들을 보자 라가오페에게 걸려온 영상 통신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라가오페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로샤란이란 종족이 대수림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안 씨. 그런데 최근에 나왔지요. 정확히 말하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스틸 양이 깨어나는 것을 보면 바로 다녀올 생각을 했지만 생각보다 일어나지 않자 심심한 시안은 라가오페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자신이 구해 와야 할 것은 로샤란이란 종족의 피. 자연스럽게 로샤란이란 종족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 피에 아주 신기한 특징이 있습니다. 연구에 들어간 것도 그 특징을 보고 들어간 것이고요.>
“무슨 특징이 있습니까?”
<영혼에 대해 굉장히 강한 구속력이 있습니다. 먹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나지 못 하더군요. 영혼의 샘에 있던 샘물보다 훨씬 더 강력해요. 그래서 저희가 이걸 사용하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한 것이지요.>
“호오… 그러면 아예 그걸 먹으면 죽지 않는 것인가요?”
시안은 예전 그라나인족을 상대하던 것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 특성이 있다면 절대 죽지 않을 것 같기에.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기는 한데… 안 드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뭐, 특이한 취미가 있다면 존중은 해 드리겠습니다만…….>
그리고 라가오페가 말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영혼이 육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지 육체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육체가 손상되면 계속 그 고통을 느끼며 육체에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도 평생 동안.
특이한 점은 재료만 있으면 육체를 다시 재생시킬 수는 있다는 것. 하지만 단점이 크다. 그라나인의 경우는 껍질이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기에 그라나인들에게 스스로 재생하는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주었지만 피의 주인인 로샤란들은 그런 특성이 없다. 즉, 스스로 재생해야 하는데 딱히 에너지와 파괴된 육체의 재료를 구할 곳이 없다. 가장 만만한 것이 동족의 시체.
그래서 자신의 몸이 파손된 고통을 없애려고 시체를 먹어 재생시킨다. 시체가 없으면 동족이라도.
그리고 피의 주인의 노예가 된다. 피의 주인을 공격할 수도 없고 그 명령만 들어야 한다. 피의 주인이 풀어주기 전에는 평생 그 육체에 묶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인 입장에서 노예를 풀어 줄 이유가 전혀 없으니 평생 죽지도 못 하고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즉,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평생 탈출도 못 하고 무기징역으로. 만약 실수로라도 피를 먹게 되면 그자는 평생토록 자신에게 피를 먹인 로샤란족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
☆ ☆ ☆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했군…….’
시안은 달려오는 군대를 보며 쓰게 웃었다. 확실히 위의 특성을 잘 이용한다면 죽지 않는 무적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
죽지도 않고, 재생도 가능하다. 게다가 명령까지 잘 들으니 이보다 군대에 적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들의 절망에 빠진 표정을 보니 저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 듯했다.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왔고 앞으로 수천 년을 더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절망한 저들은 제발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듯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스틸 양은 그 기대에 훌륭하게 부합해 주고 있었다.
쿠앙! 콰직! 우드득!
스틸 양이 한번 후려칠 때마다 녀석들은 아예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혼이 육체에 묶여 있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저렇게 강대한 반데르의 충격을 받으면 피의 주박 자체가 박살이 날 것이다.
‘설마… 스틸 양… 저들을 풀어주려고 저런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시안은 사람이 죽을 위기를 겪으면 변한다는 사실이 진짜인가 하여 눈을 비볐다. 스틸 양의 수준이라면 저럴 필요도 없다. 땅 한번 내려찍으면 수백 명씩 곤죽이 될 것이다. 굳이 수고스럽게 저렇게 한 명 한 명씩 후려칠 이유가 전혀 없다.
“와하하하! 아주 그냥 스트레스가 쭉쭉 풀리네! 너무 좋다!”
‘아니었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 스틸 양의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니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 우선 안심이 되었다. 눈앞의 노예병사들도 스틸 양에게 가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꼈는지 시안은 무시한 채 모조리 스틸 양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덕분에 스틸 양 근처는 때아닌 피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잘 된 일이다. 어차피 시안은 노예병들에게는 볼일이 없었으니까.
시안은 눈앞의 로샤란족이 다른 명령을 내리기 전에 빠르게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앞에서 보니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생긴 건 귀엽게 생겼는데 사람을 거리낌 없이 노예로 부리다니… 역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당장 저기 스틸 양만해도 저런 외모로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미친… 너희 도대체 뭐야! 너희 같은 녀석들이 여기는 왜…….>
요정같이 생긴 로샤란족은 스틸의 파괴행위를 보고 기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인 처음 보나… 왜 이리 놀라나…….’
라가오페에게 듣기로 대수림에 산다고는 하지만 수명이 굉장히 길다고 하였다. 아무리 초인들이 보기 힘들다지만 수백 년씩 살았다면 초인들을 볼 법도 한데 눈앞의 종족은 초인이란 존재를 처음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대수림에는 초인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니까. 그리고 눈앞의 요정이 어릴 수도 있는 것이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시안은 눈앞의 로샤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그러게 피만 좀 주셨으면 좋으셨을 텐데요. 하지만 아까 보니까 아낌없이 뿌리고 계시더군요. 엄청 귀한 건 줄 알았는데 그렇게 뿌리고 계신 걸 보시니 제가 좀 가져가도 괜찮을 듯합니다.”
<미친…….>
날개 달린 요정이 흉악한 표정을 지어봤자 별로 무섭지 않았다.
“자꾸 그러시면 저 그냥 돌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눈앞의 요정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좋은 제안을 왜 자신에게 하냐는 듯. 요정 입장에서는 자신이 꺼져주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이 요정은 하나는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 하고 있었다.
“저기 저 여성분은 놓고 갈 거예요.”
<…….>
스틸 양이 이곳의 군대를 모두 갈아버리는 데는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한 명씩 갈아버리고 있다고 해도 그 속도가 엄청났으니까.
당연히 이곳의 심심풀이 상대가 모두 사라지면 그다음은 눈앞의 이 요정이다.
“사실 저도 그러는 게 더 많은 피를 챙겨갈 수는 있지만… 그런 유혈사태는 피하시는 게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서로 좋게 좋게 가지요.”
<…얼마나 필요한데.>
결국 눈앞의 로샤란족도 현실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시안이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요정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야! 너 뭔데…….>
“뭐, 별 거 아니고… 딱 이 정도만 채워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안은 라가오페에게 받아 온 특수 제작 용기를 꺼내 들었다. 라가오페가 말하기를 이 병 안에는 소형 아차원이 형성되어 담아온 피를 변성되지 않고 완벽하게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병을 본 요정은 왜 눈앞의 남자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양심도 없는 새끼…….>
“뭐, 어쩌겠습니까.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당장 저도 급해서요.”
시안의 손에는 요정의 몸통 반에 해당하는 병이 들려있었다. 저 정도를 뽑아내면 죽지야 않겠지만 자신은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하면 자신은 다른 방향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테니까. 좀 더 과격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빌어먹을!>
“하하… 뭐, 그래도 한 번만 보면 다시는 볼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쭉 뽑으시지요.”
시안은 준비해놓았던 조그마한 칼 조각을 주었다. 어서 그으라는 뜻. 사실 오면서 양심에 조금 찔렸었는데 이 숲속 요정 친구들 하는 거 보니 별로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어졌다.
때아닌 날강도를 만난 라로쿠라는 병 안으로 뚝뚝 흘러들어가는 황금빛 피를 보며 점차 표정이 핼쑥해졌다. 하지만 더는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남자의 이어진 말 때문이다.
“정 힘들면 저기 여성분 쪽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아마 참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
“피가 좀 안 나오면 거꾸로 매달아 드릴까요? 책에서 봤는데 그러면 압력이 높아져서 더 빠르게 나온다고 하더군요.”
<…….>
“뭐, 아니면 됐습니다.”
피박살이 나고 있는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며 라로쿠라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헌혈 행위에 집중했다. 그래도 이 남자의 말 대로라면 다시는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 ☆
“라가오페 씨, 오셨군요.”
“하하! 시안 씨, 반갑습니다. 빠르게 다녀오셨군요. 스탄탈 씨는… 초면이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가오페라고 합니다.”
“흠? 초인이 또 살아있었어?”
“아… 시안 씨 이야기를 안 해주셨군요.”
“이런…….”
생각해보니 스틸 양은 그로인 말고는 다른 초인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워낙 다른 이야기가 할 것이 많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 말았다.
라가오페와 시안은 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을 시작했고 스틸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와… 그런 게 있단 말이야? 나는 왜 안 만들어줬어?”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때 그로인 씨가 가서…….”
“아, 그때 말한 게 그거였어? 그 아저씨는 워낙 말을 더듬어서… 그것참.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오 년 전에 좀 더 달려들어 볼걸. 에잉.”
“그러시면 안 됩니다. 스틸 양은 전혼옥이 있어도 후손이 없어서 살아날 수 없단 말입니다.”
용감해지려고 하는 스틸 양을 시안이 나무랐고 그 말을 들은 스틸이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흐음… 후손이라.”
“…….”
‘이 느낌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노려지는 느낌에 민망해진 시안은 주제를 돌렸다.
“아… 라가오페 씨, 그나저나… 구해 왔습니다. 여기요.”
그러면서 시안은 손바닥의 아공간에서 담아두었던 병을 불쑥 꺼내어 라가오페에게 건네었다. 저번에 얻은 칼, 카르나인에는 자체적으로 공간을 찢어 창고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었기에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라가오페는 병 안에 든 황금빛 액체를 찰랑거리며 웃었다.
“아, 시안 씨,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재료는 준비되었으니 만들기만 하면 되겠군요. 이제 나머지 세 병도 주시지요.”
“네?”
“음?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이 병 하나가 일인분이라고.”
“…….”
“이런… 어쩐지 빨리 돌아오셨더라니.”
“쩝…….”
“뭐, 별문제 있겠습니까. 또 구해오면 되지요.”
라가오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고 그 말에 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킬 예정이다. 굳이 그 로샤란족에게 찾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들어보니 종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차례차례 찾아가면 된다.
☆ ☆ ☆
로샤란족의 여왕.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진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인간의 군세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바르르르르.
어찌나 흥분되는지 등 뒤에 달려있는 날개가 절로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천 년 만에 그 옛날, <황금의 혈족>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찬란했던 자신들의 성세를 되찾을 때가 왔으니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군대를 보며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마스터와 대병력들. 군데군데 섞여 있는 이종족들까지.
게다가 죽음도 이들을 위협하지 못 한다.
누가 봐도 위협적인 대군세였지만 로샤란의 눈에 찰 수는 없었다. 그 예전, 산맥과 산맥 사이의 평원을 차지하고 살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양도, 질도 너무나 초라했으니까.
왕국의 찬연한 시작을 알릴 지금 이 순간을 장식하기에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군대.
물론 노예들은 처음에는 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도 수백, 수천 년을 살며 계속 해서 전투를 겪으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숫자가 계속해서 불어나니 자신들, 로샤란이 찬연한 위세를 뽐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원숭이가 한계까지 강해진 1급 노예도 수백 명 가까이 되었다. 그렇기에 여섯 뿔의 하리쟌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 하였다. 여섯 뿔과 1급 노예의 차이는 컸지만 그 차이도 수백 정도 되면 충분히 뒤엎을 수 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모은 그 시절의 군대는 괴물 같은 드라고나 녀석에게 모조리 잡아먹혔다.
지금의 군대는 겨우 400년 정도 묵었을 뿐이고, 그 규모도 예전에 비해 훨씬 작다. 1급 노예도 겨우 여덟밖에 없다. 수백 년을 모은 군대와 수천 년을 모은 군대의 규모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니 영 못마땅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 이쪽으로 처음 건너왔을 때가 생각나네…….’
여왕은 문득 이곳, 저들의 언어로 라-시안에 맨 처음 홀몸으로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눈앞의 저 녀석들만 모조리 노예로 삼으면 된다. 이 전투는 자신들의 왕국의 부활을 알리는 시초가 될 것이다.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한다. 이번에 노예로 삼은 녀석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 나라당 1급 노예의 숫자는 서넛뿐이고 그나마 단합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이기고 나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저 녀석들을 수백, 수천 년간 굴리면 1급 노예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니.
자신들에게도 중요한 전투기에 자신의 아들딸들 역시 자신이 불린 노예병들을 이끌고 이곳에 모두 모여 있는 상태였다. 얼마 되지도 않아 몇 배 이상 불어난 군대를 보니 뿌듯했다. 역시 이래서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대수림에 갇혀 지내던 시절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사실 로샤란은 걱정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600년 전 제국과의 충돌에서 철저하게 밀렸던 사건 이후로.
노예 원숭이에 불과하던 녀석들이 저렇게 발전하는 동안 자신들은 수천 년 동안 대수림에 갇혀 있었기에 변화에 적응하지 못 하고 도태된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진군에서도 살짝 걱정되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자신들은 여전히 강력했다.
뿌듯해하고 있던 로샤란은 자신의 아이들 중 하나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라로쿠라는 어디 갔지?>
<나갔다가 반죽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기절한 채로 휴식중입니다.>
그 말에 로샤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로쿠라는 비록 날개는 네 장뿐이 안 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딸이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기에.
끝없이 욕망하면서도 제 주제를 안다. 그렇기에 라로쿠라는 태어난 이래로 가장 빠르게 날개의 숫자를 늘려온 아이였다. 노예 병사의 숫자에 따라 힘이 증가하는 혈족의 특성상 이번 침략이 끝나면 일곱 날개는 무리더라도 여섯 날개는 무리 없이 달 줄 알았는데 쓰러져 있다니? 자신이 아는 라로쿠라는 그렇게 무리할 아이가 결단코 아니다.
무언가 미심쩍었던 로샤란은 옆의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흐음… 뭐 특이한 사항은 없고?>
<모르겠습니다. 병사들은 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오는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멍청한 아이 같으니… 무리하게 병사를 만들었나 보군.>
절제하는 법을 아는 줄 알았더니 피를 무리하게 공급했나 보다. 너무 많이 자신의 아래에 두려고 피를 과도하게 뽑아내면 통제력이 흐트러져 오히려 병사들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본체가 회복해도 병사들은 한 줌의 피안개로 흩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조심하라고 하는 것 중 하나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로샤란은 라로쿠라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다.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고도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통제력의 상실은 지배가 기본인 그들에게는 가장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병사가 없으면 스스로 손을 써야 한다. 그건 정말 품위 없는 짓이다.
<가자, 아이들아.>
<네.>
로샤란은 자신을 호위하는 셋을 제외한 다섯 명의 1급 노예를 앞세워 자신들의 노예병을 진군시키기 시작했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 역시 흩어져서 모아 온 수만의 노예병을 진군시키기 시작했다.
☆ ☆ ☆
“오는군…….”
나라샤 국왕은 저 멀리 진군하는 망자의 군대를 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녀석들을 상대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녀석들의 무서움을 알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 수준이 아닌, 죽고 싶어 달려드는 군대.
녀석들이 달려드는 꼴을 보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라샤는 이제 저들의 절망적인 표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면 저 군세에 합류하게 된다. 처음에 본 망자의 군대들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저 꼴이 된 것이리라.
게다가 그렇게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수는 야금야금 늘어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되는 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들의 군세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 나라샤 국왕은 상대가 강대하다는 것을 깨달은 즉시 병력을 아껴 이번 결전을 위해 모아두었다.
옆에는 타란이 자랑하는 여섯 그랑-반더가 참전한 상태였다. 우샤란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랑-반더와 켈-루펀을 출격시켰다. 어마어마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나라샤 국왕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 저기 서 있는 요정같이 생긴 녀석들 때문이다.
개전 초반에는 보이지도 않던 그랑-반더 급의 망자들이 저 녀석들이 도착하자마자 증원되었다. 그것도 여덟이나.
그 전까지는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다가 저 녀석들이 도착한 순간부터 북쪽 지방은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비록 셋은 여왕을 지키느라 나오지 않았지만 다섯 만으로도 북부 요새들이 박살 나기는 충분했다.
게다가 저 녀석들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다. 날개 다섯 장 아래로는 무력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날개 여섯 장부터는 꽤나 강했고 날개 일곱 장쯤 달고 있는 녀석 정도 되면 그랑-반더도 쉽게 상대하기 힘들었다. 녀석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나서지 않아 다행이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했다면 전쟁은 훨씬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하… 시안 그 아이가 보고 싶구나…….”
나라샤 국왕은 진심으로 시안이 보고 싶었다. 필요할 때는 없다더니 수소문해도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작정하고 움직이는 초인의 움직임을 자신이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한숨을 쉬는 나라샤 국왕에게 타란의 무장, 불패의 쟈그론이 다가왔다.
“준비는 다 끝났소이까?”
“그렇소. 후… 경의 불패라는 호칭이 이번 전투가 끝나고도 꼭 붙어 있으면 좋겠구려.”
쓴웃음을 지으며 나라샤 국왕이 말했고 쟈그론도 그 말에 절실하게 동의했다. 항상 이기고 싶었지만 이번 전투처럼 이기고 싶은 적은 또 처음이었다.
자신도 전투의 영상을 지켜보았다. 만약 자신이 질 것 같으면… 바로 자살을 할 것이다. 저 꼴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때 쟈그론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저 멀리 평원을 가로지르며 뛰어오는 수상한 두 줄기의 유성.
“음……?”
쟈그론은 저 멀리 다가오는 유성을 바라보기 위하여 안력을 돋웠다. 두 줄기의 유성은 저쪽, 망자의 군대 쪽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저 물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은 쟈그론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옆에 서 있던 나라샤 국왕도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성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왔구나!”
체통머리 없는 그 웃음에 쟈그론은 도대체 누가 왔길래 속내를 안 드러내기로 유명한 너구리, 나라샤 국왕이 이렇게 좋아하는지 궁금했고 이윽고 안력을 돋워 유성의 정체를 확인한 쟈그론 역시 크게 웃기 시작했다.
“후하하하하! 폐하! 폐하가 오셨다!”
양 국가의 군대를 이끄는 두 무장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우샤란의 지휘관, 라쿤 2왕자만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 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곧 왜 두 무장들이 크게 웃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 ☆ ☆
<…저건 뭐지…….>
로샤란의 세 번째 딸, 라움이 무의식적으로 뇌까렸다. 일곱 장의 날개를 가진, 로샤란 혈족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
그녀는 저 멀리 날아오는 유성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저게 무엇이건 어머니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제거한다.
<이쪽으로 와라.>
그녀는 우선 가장 믿을 만한 1급 노예들을 불러 모았다. 이 노예들은 전투력만 보면 자신들보다 나았기에 아주 믿음직했다.
그러고는 방벽을 쌓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저 유성이 폭발형의 이적일 경우 거기에 휩쓸려 어머니가 다치면 안 되기에.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주변 자신의 남매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쌍둥이, 리움이 라움의 과한 대처를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대처하는 것인가? 별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리움의 말에 주변 자매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유성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설마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느낀 건가?’
항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자신의 쌍둥이가 자신보다 무언가를 더 보았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움은 이어진 라움의 말에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께서 긴장하고 계신다.>
그 말을 들은 리움이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과연 어머니는 굳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신 것이리라.
그제야 리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곱 장의 날개를 퍼덕이며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온다…….>
쿠왕!
빠른 속도로 접근하던 유성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군대를 톡톡 뛰어넘더니 가볍게 착지했다. 물론 그 착지만 해도 상당한 흙먼지를 동반하기는 했지만 날아오던 속도에 비하면 마치 제비가 나무 위에 올라타듯 가벼운 착지였다.
후웅!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던 라움은 날개를 휘둘러 흙먼지를 날려버렸다. 작은 체구였지만 날개에서 나온 돌풍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었다.
“음? 감사합니다.”
<……!>
날아간 흙먼지 사이에서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한 녀석이 걸어 나왔다.
<…원숭이? 이 무슨!>
라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노예 종 주제에 이렇게 당당하게 한가운데로 들어오다니!
이는 라움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주변의 혈족들 모두 건방진 원숭이 녀석에게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달려들지 않았다. 저자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져서가 아니다. 단지 어머니가 가만히 저자를 보고 표정을 굳힌 채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난폭하면 난폭했지 절대 온화한 성격이 아닌 어머니의 이질적인 행동에 모두가 멈칫거릴 뿐 움직이지 못 하고 있었다.
“음… 여기 다 모여 계시니 이야기가 편하겠습니다. 저번에는 한 분한테 너무 많이 뽑은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골고루 뽑아 가면 되겠군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혈족들은 마음속에서 기묘한 불안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째서 여기에 <귀족>들이…….’
로샤란은 눈앞에서 느껴지는 자들을 보고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혈족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여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주변에서 자신을 보고 놀라는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판단력이다. 그리고 여기서 판단을 잘못 하면… 모두 죽는다.
“흠?”
시안은 생각보다 얌전한 여왕의 태도가 의아했다. 분명 자신의 갑주의 기운을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형수님들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렇게 발동시키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텐데.
“혹시 그… 전에 실려 간 분에게 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비실비실한 채로 날아가길래 좀 불안해 보였는데 이 요정의 반응을 보니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다.
‘이자들에게 당했구나… 라로쿠라…….’
여왕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 미안해졌다. 애초에 ‘귀족’들이 달려들었으면 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아니지만… 어찌 여러분들을 몰라보겠습니까. 그런데 ‘귀족’분들이 언제 여기까지… 이곳은 원숭이들밖에 살지 않는 곳인데…….>
“……?”
시안과 스틸은 이 요정 비스무리하게 생긴 녀석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틸 양, 저희가 귀족인 게 이분에게 중요한가요?”
“모르지. 그리고 귀족이 중요하면 저렇게 안 만들었을 것 같은데.”
스틸은 그러고는 요정들의 근처에 서 있는 한 노예를 가리켰다.
“저자는…….”
시안은 저자를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시안은 다른 사람의 인상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로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어린 시절 계속 다짐했기 때문에.
강해지기 위해 100년도 더 전 대북벽을 넘어간 무인.
<그랑-반더, 이클립스>.
시안이 열일곱 살 시절 벽에 막혀 고민하고 있을 때 절대 저렇게까지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주요 인물.
살아생전 타란의 귀족이었던 이클립스가 현재는 로샤란들의 노예 노릇을 하고 있었다.
‘쯧쯧… 대북벽 넘어갔다가 봉변을 당했군…….’
시안이 혀를 차고 있을 때 옆에서 스틸이 옆구리를 툭 쳤다.
“동생,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아, 그렇군요.”
저들이 말하는 귀족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귀족이 아닐 수도 있다. 대수림에 사는 종족들이면 단어도 자신들과 좀 다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 볼 일도 없을 텐데 굳이 자신이 요정어까지 공부하며 저 말을 알아들을 필요도 없다. 자신은 그냥 볼 일만 보면 되니까. 게다가 태도도 얌전하니 이번에는 아주 수월하게 대화가 진행될 듯싶었다.
“뭐… 저희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고… 제가 이곳에 볼일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
‘귀족들이 아닌 건가……?’
로샤란은 남자가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피로 느껴지는 저 강대한 기세를 보면 귀족이 아닐 리 없다. 남자는 잘 안 느껴지긴 했지만… 여자 쪽은 확실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저자들이 지금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였기에 로샤란은 남자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별건 아니고… 생명 살리기에 동참을 좀 해 주시지요.”
그러면서 시안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통 몇 개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스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 세 병만 더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 그게…….”
시안은 여기 오기 전 라가오페가 해준 말을 스틸에게 전해 주었다.
<구하기 귀찮으면 세 병만 구해 오셔도 되지만 될 수 있으면 좀 많이 구해다 주십시오. 하하! 저 녀석들 대수림으로 도망가면 찾기도 귀찮은데 이 기회에 많이 구해 놓는 것이 좋죠.>
그 말을 들은 스틸이 손바닥을 쳤다.
“아하! 그럼 최대한 많이 뽑아놓는 게 낫겠네.”
“그렇지요.”
둘의 말을 듣던 로샤란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아, 별건 아니고. 이 통에 피를 좀 채워주십시오.”
시안은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뭐, 죽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의 가책을 덜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걸 해서 가족의 목숨을 보장할 수 있다면 더 한 것도 할 수 있다.
로샤란은 눈앞에 수북한 통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저 정도 통을 모조리 채울 정도면 혈족들 피를 빈사상태가 될 때까지 뽑아야 한다.
자신들의 힘의 근원인 피를 뽑아달라니! 재수 없으면 힘이 약해져 날개의 숫자가 줄어들 수도 있다. 실제로 실려 온 라로쿠라의 경우 날개가 다섯 장으로 늘어나기 직전이었는데 도로 네 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번 붙어볼까?’
너무나도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순간 한판 붙어볼까 생각했지만 로샤란은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라고나의 습격을 받기 전이었다면 잠깐 고민을 했겠지만 지금 이 정도 군대를 가지고 귀족에게 덤비면 모조리 찢겨나간다. 어찌 보면 자신들을 갈아서 저 통 안에 담아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로샤란은 한숨을 쉬며 우선 이 상황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힘이야 하늘에서 찾아온 이 재앙 같은 존재들이 떠나고 평원 너머의 원숭이들을 종속시켜 회복하면 된다. 당장은 이 위기를 넘기는 것이 급하다.
<리움과 라움부터 앞으로 나와라.>
<어머니? 어찌?>
리움과 라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겨우 원숭이 두 마리 아닌가?
로샤란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흑역사까지는 말하기 싫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아는 건 드라고나의 침략 한 번으로 족하다.
로샤란은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고 그 표정을 본 리움과 라움은 입을 다물었다. 저 표정은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항변한 자신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지금 어머니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불쾌한 감정을 바깥으로 티를 내고 있지 않다는 것.
평소 어머니를 화나게 한 녀석들이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 잘 아는 쌍둥이는 어머니의 반응을 통해 현재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마 다른 녀석들도 이쯤 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저기 저 두 녀석들이 엄청난 강자이고, 따라서 어머니가 그 요구에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크윽……!>
결국 리움은 자신부터 앞으로 나가 팔에 칼집을 내고 피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 광경을 본 스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졌다.
“아쉽네…….”
“스틸 양, 몸은 충분히 풀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동생의 선물을 많이 많이 써봐야 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쓸 일이 없네. 오늘 엄청나게 쓸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양손에 끼고 있는 장갑을 캉캉거리며 부딪치는 스틸을 본 로샤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는 눈앞의 남자에게 집중해서 몰랐지만 입맛을 다시는 저 여자의 몸속에 돌아다니는 피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귀족이 맞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오지까지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남자와 달리 여자는 여기 있는 자신의 군대를 모조리 갈아버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더불어 자신들까지도.
‘어서 꺼져라… 피만 뽑고…….’
로샤란은 줄을 서서 피를 뽑고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비록 저 정도 피를 뽑으면 빈사상태가 되겠지만 골고루 조심해서 뽑으면 지배력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귀족들이라면 저기 원숭이 녀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녀석들을 먹어치워 힘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로샤란은 굴욕을 감수하기로 했다.
☆ ☆ ☆
“음.”
시안은 눈앞에 가득 들어찬 황금빛 병들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대수림 안에 있는 종족이라길래 구하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엄청 쉽게 풀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폭력도 쓰지 않고 문화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했으니 일거양득이다.
“이제 가 보실까요, 스틸 양?”
시안은 볼일을 다 보았으니 떠나려고 했는데 그런 시안을 보며 스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 왜 가는 거야?”
“음? 무슨 소리이십니까?”
“쟤들이 대수림으로 들어가면 좀 껄끄럽다고 하지 않았어?”
“음… 아무래도 살짝 그렇지요.”
시안은 기억에서 보았던 크로나를 생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라며?”
“그렇지요. 하지만 이제 용기가 가득 찼습니다.”
연구에도 그렇고 전혼옥에도 사용된다고 했기에 많을수록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받아 온 통의 개수가 모자랐다.
그런 시안을 보며 스틸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후후… 동생, 상상력이 부족하네. 왜 통이 필요해?”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로샤란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지금 저 미친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음? 무슨 말씀이신지……?”
“답답하네. 그냥 쟤들 몽땅 데려가자. 그리고 어디 가둬놓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 피만 뽑으면 되잖아. 보아하니 덩치도 쪼그마한 것들이 밥값도 별로 안 들겠는데.”
<……!>
‘미친…….’
저 여자 말대로라면 자신들 혈족은 이대로 모조리 끌려가게 생겼다. 그리고 평생 어딘가에 갇혀서 저들에게 피를 제공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다급해진 로샤란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음? 왜? 너희 여기 계속 살 거야? 그러면 우리도 편하지. 그러면 안 끌고 갈게.”
<…….>
생각해 보니 여기서 계속 산다고 해도 저 악마 같은 놈들은 계속 피를 뽑아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지금도 다들 피가 너무 뽑혀 날개가 힘이 없이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지속적으로 피를 뽑힌다면 날개의 개수가 계속 줄어들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미친 여자 옆의 남자가 그 제안을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보아하니 그럴 생각도 못 한 모양인데 그 제안을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젠장… 이렇게 되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로샤란이 최후의 발악을 고려할 때 시안이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그건 좀……. 이분들 너무 안쓰럽지 않습니까? 피는 충분합니다.”
“쩝… 동생은 너무 착해서 문제야.”
“그리고 지금 스틸 양 그 장갑 써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요?”
“…쳇.”
툴툴대는 여자를 보자 그제야 로샤란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고 소름이 돋았다. 저 여자는 자신들이 덤벼들지 않자 심심해서 일부러 몰아넣은 것이다.
‘미친 귀족 새끼들…….’
기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로샤란을 보며 시안이 입을 열었다.
“뭐, 볼일 마저 보십시오. 적당히 좀 하시고. 다음에 또 봅시다.”
‘…또?’
말을 마치고 땅을 박차며 날아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샤란은 마지막 말을 곱씹다가 아이들을 불렀다.
<돌아가자. 숨어야 한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마지막 말 못 들었느냐. 여기 있으면 또 찾아온다, 저 개종자들이.>
이를 빠드득 갈며 로샤란이 말했다.
<그래도…….>
눈앞의 엄청난 규모의 원숭이들이 아까웠던 아이들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로샤란은 한숨을 쉬었다.
<아까 여자 표정 못 보았느냐. 금방 다시 온다. 이번에 군대를 많이 모았지 않느냐. 대수림에 숨어서… 이 녀석들을 최대한 숙성시켜 나와야 한다. 저 녀석들과 드잡이질 하며 잃을 군대는 없다. 그리고 너희들도 지금 싸울 힘이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원숭이들은 덜 숙성된 녀석들로도 충분하기에 기분 나쁜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급하게 나왔는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는 대수림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깊숙하게 숨은 다음 최대한 힘을 키우고 다시 나와야 한다.
<…그때 복수해주마…….>
저 멀리 흡혈귀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이를 간 로샤란은 아이들을 시켜 군대의 방향을 돌렸고 이윽고 대수림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동생은 가끔 보면 너무 착해서 탈이야.”
“…찝찝한 걸 어떻게 합니까.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후후. 내가 한 연기 하지.”
시안은 돌아가는 로샤란들을 보며 생각대로 풀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맥을 박살 내어 놓은 것 때문에 영 찝찝했는데 이 정도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나라샤 아저씨를 흘깃 본 시안은 스틸과 함께 라빌란으로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