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비사>
기괴한 군대가 티안의 북방을 박살 내기만 한 상태로 물러간 후 티안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리쟌의 침입은 여전히 꾸준하게 벌어졌지만 각 국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는 대북벽의 공사 진행을 늦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벌어지면 끝장이니까.
그렇기에 지지부진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대북벽의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라면 일 년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티안의 힘이 충분히 깎였기에 견제를 조금 늦추어도 되겠다는 각국들의 계산도 반영되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나라샤 국왕은 이전과는 다르게 급속도로 진행되는 대북벽 연장 공사를 보고 속이 뒤틀렸지만 도와주는 자들보고 뭐라고 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제 북쪽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아도 된다. 대북벽은 일곱 왕국 전체의 문제이니.
문제는 남쪽이다. 정확히 말하면 남쪽 지방에 새로 생긴 거대한 협곡.
북쪽의 사태가 나라 전체를 강타했을 때에는 로가디스 지방의 문제가 이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하자 남쪽에 새로 생긴 협곡은 티안 전역, 아니 라-시안 대륙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생긴, 거대한 콘-티안 산맥을 가로지르는 대협곡.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신이 노하여 한 칼 내리친 흔적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거대 하리쟌이 땅 밑에 숨어 있다가 올라오며 생긴 흔적이라고도 하였다.
아직 정식으로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협곡의 이름까지 돌고 있는 상태였다.
<가다-바쉬>
<신의 일격>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어. 과연 대협곡은 신이 내리친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넓이를 보면 칼이 아닌 몽둥이를 내리친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신의 기적이라고밖에 불릴 수 없는 이 협곡이 단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간사한 자일 줄은 몰랐군.”
망자의 군대를 막아주었을 때는 그토록 고마웠는데 남쪽 문제를 생각하니 또다시 머리가 아픈 나라샤 국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앞에서 탈린 자작이 나라샤 국왕의 말을 받았다.
“그래… 이번엔 그래도 시안 그 아이에게 큰 빚을 졌어. 북쪽의 문제에 비하면 남쪽 문제야 훨씬 머리가 덜 아프지.”
괴상망측한 망자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교활한 우샤란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다행히도 남부의 새로 떠오른 신성, 파레온 백작은 구멍이 뚫린 곳에 위치한 쿨란 성을 빠르게 강화하여 간이요새로 쓰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선적으로 우샤란의 발을 묶어 둘 수는 있다.
북벽의 공사가 진행된다면 차차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을 빼내어 아래쪽, 협곡으로 배치하면 된다. 비록 많은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대북벽 전체를 방어하는 것보다는 그 범위가 훨씬 더 좁았다.
“현재 전황은 어떤가?”
“우샤란과 타란이 전쟁을 멈춘 상태입니다. 갑작스런 군 병력 이동 때문에…….”
“계속 주시하도록 하게. 그리고 녀석들이 이동하면서 남겨두고 갔을 세작들 찾아내는 것에 각별히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안 그 아이는 지금 라빌란에 머물고 있나?”
“네. 거의 바깥출입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군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특히… 그 내성 안에 걸려 있는 해먹을 잘 살피다가 사라지면 즉각 주변 인물들부터 조사하고.”
“알겠습니다.”
감시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시야에 들어와야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았기에 나라샤는 명을 내린 후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 ☆ ☆
시안은 오랜만의 평화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원래는 껍질 속에서 나오자마자 마땅히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했을 평화.
하지만 예기치 못한 납치극에 휘말린 스틸 양을 구하느라 전 대륙을 뛰어다니느라 잃어버렸던 자신의 권리를 시안은 라빌란에서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저 멀리 자신을 바라보는 나라샤 아저씨의 부하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라샤 그 아저씨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결과만 보면 이번 여행은 얻은 것이 많았다.
구하기 힘들 것 같았던 재료도 손쉽게 구했고,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쓸모 있어 보이는 심장도 구했다.
‘하지만 역시 이 녀석이 최고지.’
시안은 왼손에서 카르나인의 손잡이를 뽑아 허공에 휘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 얻은 카르나인은 시안의 마음에 쏙 드는 무기였다. 어느 정도냐면 시안이 원래 가지고 있던 갑주만큼 마음에 들었다.
쓸데없는 파괴를 구현하지 않는 압축된 파괴력.
자신의 힘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내구성.
게다가 날만 안 뽑으면 훌륭한 몽둥이가 되었다.
아직 써보지는 않았지만 이 녀석이 마음에 쏙 들었던 시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속 막대는 스틸 양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다. 그런 몽둥이는 시안 생각에는 자신보다 스틸 양에게 훨씬 더 어울렸다.
스틸 양은 그 몽둥이의 기능을 듣고 손맛 떨어진다고 받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시안은 반드시 쓸 일이 있을 거라며 강제로 넘겨주었다. 스틸 양이 끼고 다니는 장갑은 그 위력이 너무 흉악했다.
“그런데 스틸 양, 장갑 이름은 뭘로 지었습니까?”
시안은 옆의 스틸 양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만든 김에 하나 지어주는 게 어때?”
“저는 영 그런 거에 약해서 말이지요.”
“그러면 콩티앙은 어때? 후후… 이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어디 있겠어?”
“…일부러 저를 놀리려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요?”
“물론 아니지. 동생도 그 무기 이름 바꾸는 게 어때? 콘-티안으로 말이지. 후후. 그 산맥을 하나 갈아버리고 얻은 무기잖아. 아니면 멋지게 ‘가다-바쉬’라든가. ‘신의 일격’이라니. 이름 참 잘 지었어.”
“어이구… 신은 무슨… 스틸 양이 못 봐서 그래요.”
손사래를 치는 시안이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기억 속에서 일곱 뿔의 하리쟌이 가지는 권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본 시안은 농담으로라도 자신이 신이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신이란 말은 그런 대괴수한테 붙어야지, 자신은 아직 멀었다. 한번 어떻게 해보려면 우선 벽을 뚫어야 한다. 물론 벽을 뚫어도 한번 어떻게 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스틸 양과 노닥거리고 있는 시안의 위로 갑자기 그림자가 스윽 드리워졌다. 시안은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인사했다.
“라가오페 씨,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시안 씨.”
인사치레가 아니라 라가오페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안이 라빌란으로 돌아오고 연락을 취하자 찾아와서 재료를 받아간 라가오페는 한동안 엄청나게 바쁘다고 돌아다니더니 오늘 오겠다고 오전에 연락을 하고 이렇게 시안을 찾아온 것이다.
“전혼옥은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제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준비기간도 있고…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라가오페가 전혼옥을 만들기 위해 받아간 재료는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무슨 뼛조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지만 라가오페는 로샤란족에게서 뽑아온 황금빛 피와 가족들의 피를 조금씩 받아 갔을 뿐이다.
시안은 가족들이 자신들의 후손을 통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라가오페는 그 걱정을 일소시켜 주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 현실적으로 까다로운 조건이라 이번에 개량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저번 리비아스 씨를 보니까… 재능 있는 후손이 나오지 않으면 상당히 골치 아프더군요. 스틸 씨처럼 후손이 없는 경우도 있고……. 이번에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적용시켰으니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호언장담을 하던 라가오페를 떠올린 시안은 문득 자신이 물어보려다가 저번에 못 물어본 것이 기억났다.
저번에 그 요정들이 자신을 보고 귀족이라고 하던 것.
박학다식한 라가오페라면 알 것 같아 물어보려고 했다가 라가오페가 재료만 받고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 했었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궁금했기에 오늘 날을 잡아 물어보기로 하였다.
“저기… 라가오페 씨, 혹시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십시오, 시안 씨. 아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설명을 들은 라가오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아시는 내용입니까?”
라가오페가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이런 것까지 알지는 몰랐기에 시안은 이채를 띠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라가오페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를 아는 듯한 태도였다.
“알고말고요. 그런데 이야기가 좀 길어질 듯합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십니까?”
“뭐,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기에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조직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요. 스틸 씨도 같이 들으시지요.”
그 말에 스틸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해먹에 걸터앉았다.
“후후… 그렇게 앉으시니 두 분 참 보기 좋으십니다.”
둘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라가오페가 웃으며 이야기했고 시안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제가 저번에 두 분에게 제안을 하였지요? 우선 전혼옥을 만들어 드릴 테니 조직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해 보시라고요. 그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지요. 저희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함께할지 말지를 결정하실 테니까요.”
그 말에 시안과 스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뭘 하는 조직인지,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같이 할지 말지를 결정할 것이 아닌가.
이해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며 라가오페가 말을 이었다.
“조직 이야기도 그렇고, 로샤란들이 말한 귀족 이야기도 그렇고… 이해하시려면 우선 역사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고 한 것이고요.”
“흠…….”
“그렇게 공부는 싫다는 표정을 안 하셔도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니까요. 후후. 들으면 반드시 흥미가 생기실 겁니다.”
“…….”
“우선 질문 한 가지 드리지요. 이 대륙 이름이 무엇이죠?”
“라-시안 대륙이지요.”
“질문이 너무 쉬웠군요. 후후. 그럼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 위에는 뭐가 있습니까?”
“하늘산맥과 대수림이 있지요.”
라-시안의 북쪽을 틀어막고 있는 대수림과 하늘산맥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위에는 뭐가 있지요?”
“하하. 이것도 쉽군요. 돈-나시안 대륙이 있지 않습니까.”
초등교육 수준의 질문에 시안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해가 뜨는 대륙, 라-시안. 그리고 하늘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그 위에 존재하는 해가 지는 대륙, 돈-나시안. 이는 어린아이도 아는 것이다.
“잘 맞히셨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그 대륙의 존재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다른 분은 몰라도 시안 씨라면 아시겠지요. 하늘산맥과 대수림에 무엇이 사는지…….”
그 말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드라고나와 크로나의 영역이다. 절대의 존재들이 틀어막고 있는 영역. 기억에 따르면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그곳을 틀어막고 있었다. 인간이 언어를 발달시키고 국가를 생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어?”
여기까지 생각하자 시안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하늘산맥과 대수림을 통과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다. 굳이 드라고나와 크로나가 아니더라도 그곳은 각종 흉포한 하리쟌들과 험난한 지형으로 가로막혀 있는 금지 중의 금지이다. 그리고 초인이 그 영역에 기어 들어간다고 해도 일곱 뿔들에게 걸려 찢겨 죽을 것이다.
하지만 라-시안 대륙의 모든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돈-나시안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다.
“후후.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시지요?”
“…….”
“거기서부터 말씀드리지요. 아마 처음부터 들으셔야 이해가 더 쉬우실 겁니다.”
그리고 라가오페는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은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이곳, 라-시안 대륙에 살던 이 중 돈-나시안 대륙을 확인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흠…….”
“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이 이곳으로 넘어온 경우는 있지요. 물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륙을 돈-나시안이라 부르지 않고, 이곳을 라-시안이라고도 부르지는 않습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명칭은 통일하지요.”
“아하…….”
그곳에서 살던 사람이 넘어왔다면 이해가 갔다.
“후후. 이야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라가오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돈-나시안 대륙에 살던 자가 있었다.
그 대륙은 넓기가 그지없었고 그 넓이에 걸맞은, 수많은 이종족들과 괴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곳도 많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곳도 꽤 있었다.
하지만 기나긴 대륙의 역사 속에서도 특별히 위험하고 다른 곳보다 더 비밀이 많은 곳은 당연히 존재했다.
돈-나시안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따로 이름을 붙이고 금지, 험역이라고 이름을 붙여 멋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세상에 목숨 아까운 것을 모르고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돌아다니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돈-나시안 대륙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을 모아 금지를 탐험하기로 결정했다. 동료들은 모두 걱정했지만 유유상종이라고, 그들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금지를 탐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발 들인 금지는 예상과 같으면서도 예상과 전혀 달랐다.
위험한 것은 맞았다. 동료들 중에 살아남아 금지를 통과한 사람은 결국 남자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덜 위험했다. 금지의 소문의 반의반만 맞아도 남자는 이미 찢겨죽었어야 하는데 결국 통과했으니. 무엇보다 금지를 금지로 만든 그 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동료를 잃은 슬픔도 잠시였다. 위험지역을 지나 괴수들의 영역을 벗어난 남자는 새로운 세상에서 발견하게 될 신비를 기대하며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남자는 엄청나게 실망하고 만다.
새로 발견한 땅은 상당히 넓었다. 자신들 대륙과 비교하면 꽤 작았지만 자신들 대륙의 엄청난 넓이를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넓이이다. 남자가 수백 년을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하지만 내용물이 없었다. 남자가 수백 년에 걸쳐 대륙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결과 찾아낸 것은 모자란 원숭이들과 군데군데 집단을 이루어 사는 수인 등의 이종족들이 다였다. 그나마도 자신들의 대륙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을 정도로 약했다. 자신들 대륙이었다면 하루 만에 멸족되었을 수준.
남자는 그 이유를 금지의 특수성에서 찾았다. 금지의 주인들이 대륙으로부터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안쪽으로는 관심을 껐으니 이 약한 녀석들은 천적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계속 약한 상태로 살아간 것이고. 신비를 건설할 종족이 없으니 당연히 남자가 발견한 땅은 신기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 중 어떤 종족들이 남긴 것 같은 왕국은 찾았는데 이미 박살이 나 있었고 그곳에 살던 종족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그곳에는 노예로 추정되는 모자란 원숭이들만이 터를 잡아 살고 있었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려고 금지를 통과해 온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었기에 남자는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면서 위험하기는 했지만 한번 겪어봤으니 칼-굴이라는 기묘한 종족만 조심하면 어찌어찌 통과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발길을 옮긴 순간, 거대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정확히 세 군데에서.
하나는 남자가 지나온 대수림에서.
하나는 하늘산맥이라고 이름붙인 거대한 산맥의 아래쪽에서.
하나는 남자가 대남해라고 이름붙인 거대한 남쪽의 바다에서.
위대한 존재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거대한 파동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동시에 터져 나와 남자가 있던 대륙을 통째로 휩쓸었다.
그 순간 남자는 절망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금지의 주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경쟁자들을 의식하여 눈치를 살피다가 동시에 진화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은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이제 그 진화가 끝났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거대한 파동이 뻗어 나온 곳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하나는 바다에.
하나는 하늘산맥에.
하나는 대수림에.
그 말은 남자가 빠져나갈 모든 구멍이 막혔다는 뜻이다. 저 흉포한 지배자들은 귀족 정도 되는 강자들이 결코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이제 더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절망했다.
자신은 원숭이 수준에 가까운 종자들밖에 없는 이 땅에 홀로 갇혀버린 것이다.
☆ ☆ ☆
“…휴… 그렇게 해서 제가 이 땅에 갇혀버린 것이지요. 진짜 그때의 절망감이란…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라가오페의 장담대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진행을 듣고 있던 시안과 스틸은 라가오페의 마지막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여 시안은 라가오페를 보며 물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본인이라고요?”
“네. 제가 그 얼빠진 탐험가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천성이 좀 방랑벽이라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도대체 나이가…….”
라가오페가 말한 금지의 주인 중 하나는 크로나가 분명하다. 그리고 하늘산맥의 주인은 드라고나이고 바다 쪽에 산다는 녀석은 라이오나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시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안이 네크라의 기억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크로나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은 수천 년 전이다. 그렇다면 지금 라가오페는 지금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뭐… 세는 건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이삼천 년은 족히 넘었을 겁니다.”
“…그쪽 대륙의 사람들은 모두 불로불사의 존재입니까?”
시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가오페 정도의 존재가 수천 년 동안 수련을 했다면 적어도 스틸 양보다는 훨씬 강해야 맞다. 하지만 눈앞의 라가오페는 스틸 양보다는 약해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받은 신관의 축복 때문이지요.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여행이 길어질 때를 대비하여 받은 축복인데, 후… 이렇게 여행이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그 축복이?”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인간을 시간의 흐름에서 분리시키는 축복입니다. 이렇게 하면 늙지도 않지만 더는 강해질 수도 없어요. 세상을 속이고 숨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 사람은 평생 그 상태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별건 아닙니다. 늙지만 않지 맞아 죽을 순 있거든요.”
라가오페는 별것 아니란 듯 말했지만 스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도 신관은 있지만 그 능력이 대단하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약간의 상처 치유와 버프 정도. 저런 대이능을 구사할 수 있는 신관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후후.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뭐… 이건 조직이랑 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그냥 신세타령 정도로 들어주십시오.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꺼내니까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아… 뭐… 계속하십시오.”
시안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 ☆ ☆
처음 몇백 년간 남자는 필사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남자 정도의 귀족이 지나가면 하리쟌들이 모조리 들러붙었다. 그렇게 치고받다 보면 점점 더 강한 녀석이 왔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남자보다 더 강한 하리쟌들이 올 것이고 더 나아가… 금지의 주인들이 직접 찾아온다.
수없는 시도가 모조리 실패하자 남자는 절망했다. 꼴을 보아하니 혼자서 탈출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혼자?>
이때 남자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벼락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혼자가 힘들면… 동료를 만들면 된다. 설령 동료들과 함께 금지를 지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동료들과 함께라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남자는 원래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는 절망감보다 외로움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남자는 계획에 들어갔다.
자신들과 같은 동류를 만들어 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위대한 작업에.
☆ ☆ ☆
“뭐… 이 종족 저 종족 잡아와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았습니다만… 놀랍게도 가장 적합한 종족이 원숭이 녀석들이더군요.”
“원숭이라면?”
“그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 초기에 말씀드렸던… 원래 이곳에서 살고 있던 녀석들. 어디서 노예생활 하던 녀석들 같은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없더군요. 이 녀석들이 원체 멍청하고 약하기도 약한데 특이하게 저희 인간들이랑 싱크로율이 잘 맞더군요. 애초에 저희랑 비슷하게 생겼을 때부터 그럴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호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짜 원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단지 인간과 구분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일 뿐.
“그래서 녀석들을 선택했습니다. 후… 그때는 진짜… 리마이누 씨 표현으로 암 걸린다고 하나요? 이 녀석들을 언제 쓸 만하게 만들어 놓나 하는 생각에 진짜 암 걸리는 기분이더군요.”
“세상에, 그랬겠습니다.”
시안이 그 말에 동의했다. 망나니 같은 녀석을 사람 만들어 놓는 것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원숭이를 사람 수준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라면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스틸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그래서 성공했어?”
“하하, 제가 누굽니까! 당연히 성공했지요.”
“오! 축하드립니다. 그러면 그 원숭이들은 어디 있나요?”
시안의 질문에 라가오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있다니요?”
“아니… 그 사람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남은 원숭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설명이 조금 부족했군요. 인간이 될 확률은 엄청나게 낮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못 된 나머지는 이렇게 훌륭하게 대륙에 퍼져있지 않습니까. 다 제가 잘 보살피고 키운 덕이지요. 후후후.”
“…어?”
시안은 잠시 후에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 ☆
남자는 처음에 이것저것을 시도해 보았다. 다행히도 남자는 지식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기에 박학다식했고, 동료들이 죽으며 챙겨온 물품 중에는 자신을 도와줄 보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원숭이 녀석들을 단기간에 인간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결심했다. 아예 종족 자체를 처음부터 개조하고 이 넓은 대륙에 씨를 뿌리자고. 그리고 진화를 가속시키고 수확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자고. 다행히도 자신에게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 후 남자는 실험에 들어갔다. 기본적인 방향은 자신의 피를 섞고 그 본질에 융합시켜 재능과 능력을 개선하는 방향이었다. 다행히 이 방향은 틀리지 않았는지 남자는 무난하게 성공한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원숭이의 피에서 자신의 피에 해당되는 부분이 너무 작았다. 대부분이 5에서 10퍼센트 정도… 이 정도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냥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강한 원숭이에 불과하다.
남자는 실망했지만 원숭이들은 계속해서 번식해 나갔다. 남자 눈에 안 차는 것이지 천적이 없는 이 대륙에서 남자의 피를 조금이라도 이어 받은 원숭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다시 원숭이들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원숭이들 중 몇몇이 높은 수치를 가지고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원숭이는 15퍼센트, 어떤 원숭이는 20퍼센트… 확률의 문제인지 원숭이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높은 피를 타고나는 원숭이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남자는 희망을 가지고 원숭이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에 주력한다. 확률이 문제라면 경우의 수를 늘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자 이 원숭이 녀석들이 저들끼리 치고받기 시작한 것.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하리쟌들도 슬금슬금 내려오기 시작하여 완전 개판이 되었다.
<아… 이 원숭이 새끼들은 답이 없구나…….>
조금 똑똑해지고 강해졌나 싶더니 그걸로 서로 치고받고 있었다.
남자가 이 녀석들을 다 쓸어버려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안에서 기적의 확률을 뚫고 남자가 원하는 원숭이가 태어났다.
<…80퍼센트!>
자그마치 80퍼센트나 남자의 피를 타고 태어난 남자. 이 정도면 눈에 차지는 않지만 꽤나 쓸 만하다. 물론 피의 비율이 높다 뿐이지 약하기는 그지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굳이 100퍼센트로 태어날 필요는 없다. 저 정도는 자신의 계산에 들어 있었으니까. 자신의 피를 저 정도로 타고났다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원숭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자신들 대륙의 인간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벽을 두드릴 가능성이 충분하다.
과연 새로 태어난 원숭이는 엄청난 속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고받던 원숭이 녀석들을 때려잡으며 통일시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그에 따라 경지가 높아지며 몸이 개조되며 피의 비율이 점차점차 늘어갔다.
85퍼센트… 90퍼센트… 95퍼센트… 99퍼센트… 그리고 100퍼센트.
그리고 남자가 기대를 걸던 원숭이는… 드디어 내면에 있던 원숭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내고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진화를 이루어 내는 데에 성공한다.
남자는 자신의 실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환호했다. 자신의 가설이 맞은 것이다. 이 원숭이들이 자신의 피를 이용하여 자신과 같은 종족인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지 수천 년 만에 남자는 드디어 자신과 함께할, 함께 웃고 울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를 탄생시킨 것이다.
라가오페는 환호성에 가득 차 자신이 직접 원숭이, 아니 이제 동족이 된 남자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브록시안>
그것이 1000년 전, 모든 인간을 통합하고 원숭이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처음 진화를 성공해 낸 자의 이름이었다.
☆ ☆ ☆
“그 아이를 제가 얼마나 이뻐했는지 모릅니다. 수천 년 만의 동족이었다고요.”
“허…….”
대륙을 처음 통일한 대제, 브록시안이 라가오페의 프로젝트의 첫 성공인물이었다니.
라가오페의 말에 따르면 전 대륙에 있는 인간들은 원래 이곳에 살고 있는 원숭이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원숭이들에게 라가오페가 자신의 피를 넣고 진화를 촉진시켜 원숭이를 인간으로 바꾸는 대진화 프로젝트를 전 대륙을 상대로 실행한 것이고.
“흠… 그 말은… 우리가 다 라가오페 씨의 자식이란… 그런 뜻입니까?”
시안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징그럽게 무슨 말입니까, 그게. 피를 나눈 것뿐이지. 음… 저는 여러분이 자식이라는 느낌보다 형제, 동류라는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흐음…….”
예상치 못한 대륙의 역사를 듣게 된 시안과 스틸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금세 회복하였다. 특히 스틸은 무언가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애초에 초인으로 바뀐다고 해도 성격이 너무 극심하게 변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틸 양?”
“동생은 좀 특이한 것 같지만… 인간에서 초인으로 바뀌는 순간… 기존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전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아. 오히려 애완동물… 이런 느낌이지. 동생도 겪어봤지?”
“음…….”
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려고 했다. 자신은 그걸 어느 정도 억누른 상태이고. 이게 단순한 자아의 변화가 아닌, 종의 변화에서 오는 변화였다니.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나마 친하던 사람까지 그렇게 된다는 게 이상하더라고. 내가 감정이 없어진 건 줄 알았는데 그로인 아저씨나 리비아스 아저씨, 그리고 동생을 만나 보니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게 뭔지 애매했는데 확실히 알겠어. 이제 우리는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우리끼리만 인간으로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 아래는 원숭이로 보이는 거고. 그러니 성욕이나 질투, 시기, 친근감 등이 생길 리가 없지.”
“정확하십니다, 스틸 양.”
“그러면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물어보시지요.”
스틸 양이 꾸준히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라가오페는 아빠 미소를 지으며 모조리 받아주고 있었다.
“그러면… 저 너머, 네가 왔다는 대륙은 모조리 초인들, 아니 너희들 말로 인간들만 살고 있나? 모조리 나나 너, 시안처럼 강하고?”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대답했다.
“음… 오해가 있으시군요.”
“흠?”
“저희라고 태어나자마자 강해져서 모두가 초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까 시안 씨가 물어본 귀족에 대한 답변도 할 수 있을 듯하군요.”
“오호.”
“우선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종의 한계를 알고 계십니까?”
“종의 한계?”
“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무력을 기준으로 말씀드리지요. 이건 제가 저쪽에 있던 시절 연구한 자료와 이곳의 원숭이들을 연구한 자료를 기반으로 만든 자료이니 정확합니다.”
그리고 라가오페가 정리해 준 내용은 이러했다.
1. 종의 강함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2. 이 한계는 마치 세상이 정해놓은 것과 같아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벽을 뚫을 수가 없다.
3. 원숭이로서의 강함의 한계는 여기 말로 정확히 그랑-반더까지이다. 그 어떤 노력이나 재능으로도 이 벽을 넘을 수 없다.
4. 원숭이에서 인간이 될 조건은 한 가지이다. 경지를 올려 신체를 개조하고 벽에 막힌 상태에서 계속해서 피를 갈아치워 인간으로서 탈바꿈하는 것.
5.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동시에 원숭이로서의 한계도 벗어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원숭이로서의 한계는 그랑-반더이고… 그다음 경지에 이른 초인들은 이미 원숭이를 벗어나 인간이 되어 그 경지를 밟고 있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원숭이들이 몸 내부를 완전히 갈아치우려면 적어도 라-반더가 될 정도의 재능과 경지가 필요합니다. 피의 비율이 낮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그러면 이제 귀족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쪽 세상이라고 모두가 강하지는 않다. 태어날 때 모두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타고난 피가 다르다. 그쪽도 개개인의 재능 차이는 심하지만 평균적으로 이곳 대륙 원주민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원숭이와 인간 수준의 재능 차이가 난다. 당연히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도 이곳 말로 그랑-반더와 라-반더를 구분한다.
“왜냐하면 그랑-반더가 자신의 몸 내부를 조절하는 자들이라면 라-반더는 그 영향력을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니까요. 이 차이는 굉장하죠. 외부의 환경을 자신의 전투를 위해 조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니.”
시안이 수천 톤의 크로나-폰을 들고도 땅이 파이지 않는 것도, 거대한 하리쟌을 끌고 오면서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이다. 이곳은 아직 라-반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체내계수만 변화시키는 줄 알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내부만 바뀌느냐, 그 영향력을 외부에까지 표출할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영향력을 외부에까지 표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을 그쪽 대륙에서는 ‘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라-반더를 귀족 계급으로 보시면 편하겠습니다. 그 이하는 평민이지요. 누가 정해주어 귀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정해줄 왕이란 존재도 따로 없고 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지요. 스스로 고귀함을 증명했다고 귀족이라고 묶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특이하군요.”
“약간 이쪽의 귀족과는 같은 단어이긴 해도 느낌은 좀 다릅니다. 그리고 그쪽은 귀족과 평민이라고 해도 사랑에 빠지거나…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평민이라고 해도 종은 같으니까요.”
“아하…….”
라가오페의 말에 따르면 초인이 인간을 원숭이 취급 하는 이유는 강함의 차이가 아닌, 종의 차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시안 자신이 본 그라나인이나 칼-굴의 초인들은 자신들의 종족을 무시하지 않았었다. 단지 관심이 좀 적었을 뿐이지.
“아, 그리고… 단지 이곳과 차이점이 있다면… 훨씬 더 세분화되어 있지요.”
“음? 왜 그렇지요?”
“왜냐면 이곳은 라-반더 숫자가 워낙 적어 나눌 필요도 없지만… 그곳은 그 숫자가 상당합니다. 그쪽이라고 해도 라-반더 되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이쪽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지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라-반더도 같은 라-반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실력 차이가 심하고 숫자도 많으니 어느 정도 계급을 나누어 놓은 것이지요.”
시안은 처음 듣는 별세계 이야기가 너무 신기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그러면… 귀족에 대한 답변은 되셨습니까? 그 로샤란족을 이끌고 있던 자는 아마도 저쪽 대륙에서 온 자들을 본 적이 있나 보군요. 아니면 저쪽에서 살다가 대수림을 건너왔다거나…….”
자신이 모든 이종족을 아는 것도 아니고, 이종족 중 엄청난 세월을 사는 이들도 있기 때문에 금지가 막히기 전에 넘어왔다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다. 그리고 크로나는 드라고나에 비해 하리쟌들에게 관대한 편이다.
“네. 이해가 가는군요.”
“뭐…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아마 그들 종족이 원숭이 시절의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 대수림으로 도망친 후 진화한 인간들을 처음 본 것이고. 그러니 귀족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요. 이곳의 원숭이들은 절대로 귀족이 될 수 없으니까요.”
라가오페도 자신이 수천 년 전 여행 다니던 시절 찾았던 왕국의 정체를 알게 되자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꼴을 보아하니 나리쟈 급 종이었겠는데… 하필 시안 씨에게 걸려서…….’
라가오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흠… 그러면 그 뒤로도 꾸준히 초인을 탄생시키신 것인가요?”
“뭐, 그건 제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확률의 문제라서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지요.”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
원숭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초인들이 생겨날 확률도 늘어난다. 실제로 초인의 숫자는 미미하지만 꾸준히 증가세를 보였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라가오페는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원숭이들을 지키고 그 숫자가 빠르게 늘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신경 써서 관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큰 위기만 막아주니 빠르게 숫자가 늘어나더군요. 전혼옥도 다 그런 이유에서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너무나 힘들게 만들어 낸 동족들이니까요. 피를 섞을 때의 부작용인지… 이상하게 300년밖에 못 살더군요.”
“음? 그쪽 세상은 다른가요?”
“그럼요. 기본적으로 강해질수록 수명도 늘어나기에 정말 괴물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답하던 중 시안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초인들을 모으셨다면… 목적이 무엇인지요?”
시안은 라가오페가 그렇게 초인을 아끼고 필사적으로 모아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조직이란 걸 만들 정도라면 단순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시안이 조직에 들어갈지 아닐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받았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는군요. 잘 들어주십시오, 시안 씨. 저희는… 돌아갈 겁니다. 제가 태어난 곳으로요.”
이주, 혹은 귀환. 간단하지만 라가오페가 수천 년간 시도하면서도 실패한 목표.
그것이 라가오페의, 그리고 라가오페가 만들어 낸 조직 헤란테르의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