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이주>
라가오페는 브록시안 이후로 하나둘씩 동족이 생기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이 되었다.
<이자들을 데리고 그냥 이곳에서 알콩달콩하게 살자.>
비록 자신이 귀족 중 약한 남작이긴 했지만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있었다. 이 인원을 데리고 금지를 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본 자신이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금지를 넘기 위한 방법으로 동족들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모이는 속도를 보니 백만 년은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수명의 한계는 큰 문제였다. 300년이 한계라면 일곱 뿔이 아니더라도 수월하게 여섯 뿔을 사냥할 강자들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시간 동결이 걸려있기에 강해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외로움을 달랜 것만으로 만족하고 목표를 하향조정했다.
<콘-라드>가 태어나기 전에는.
대천재, 콘-라드. 300년도 되지 않는 세월 동안 눈에 거슬리던 대전사 네크라를 상대할 경지까지 치고 올라간, 괴물 중의 괴물.
그가 태어나고 그를 중심으로 인간들의 원숭이들이 ‘이적’이라는 신기한 학문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라가오페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자신이 사는 세상에는 이적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애초에 머리를 잘 쓰지 않는 완력 신봉자들이 많기도 했고 개개인이 쓰는 이능이 너무 강대했기에. 타고났는데 뭐하러 뭉쳐서 연구한단 말인가. 개개인의 강함은 철저히 본인의 재능과 노력에 비례했다.
하지만 이곳 원숭이들은 개개인이 약해서 그런지 이적과 마학이라는 신기한 학문을 만들어 냈고, 이것들은 파괴력은 약했지만 신기한 기능이 있었기에 라가오페에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때 이후로 라가오페는 목표를 수정하였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은 자신들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원숭이들밖에 없는 세상. 무인도와 같은 세상에서 100년에 하나 태어날까 말까 한 동족들을 기다리는 행위는 너무 피곤했다. 목표를 하향조정했다는 뜻이 이곳이 마음에 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니 포기했던 것이지. 하지만 이제 가능성이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시도해 볼 만하다.
이제까지 탄생시킨 동료들도 자신과 같은 동족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있다고 하니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하였다.
그 이후 라가오페가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만든 조직이 헤란테르이다. 아무래도 계획이 만만치 않으니 일손이 필요했기에.
라가오페가 살던 곳의 말로 ‘이주자’라는 뜻을 지닌, 조직의 이름.
“즉, 저희의 목적은… 저 너머, 제가 살던 곳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말로는… 돈-나시안 대륙이라고 하는 곳 말입니다.”
“허… 그게 가능합니까?”
시안이 궁금하여 물었다. 사방이 대괴수들로 틀어막혀 있는데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겠다니. 기억 속에서 그 강대함을 본 시안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궁금하여 물었다.
“후후, 가능성이 없으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다 방법이 있지요. 그걸 실현하기 위해 헤란테르도 만든 것이고요.”
그 와중에 스틸이 물었다.
“그런데 왜 조직은 비밀로 하는 거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히 비밀로 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그러자 라가오페가 말했다.
“비밀로 한 적 없습니다. 단지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말한 것뿐이지요.”
“아하.”
“굳이 초인이 아닌 자들에게 퍼트릴 필요가 없지요. 저희가 무슨 지배에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 목표에 필요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 이야기에 스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숭이 왕 놀이를 하기에는 저들은 너무나 다른 존재들이다. 자신도 실제로 초인이 되자 타란을 버리고 라그랑 지역으로 들어갔으니까.
스틸과 라가오페가 대화하던 중 시안은 방법이 있다는 라가오페의 말을 듣고 도대체 저들이 무슨 방법으로 돌아갈지 생각해 보다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 혹시 공간이동 같은 걸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이적의 발전에서 희망을 보았다는 라가오페의 말을 들은 시안이 공간이동의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라-샤르-로아를 만들어 낼 정도라면 분명 공간이동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가오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간이동은 불가능합니다.”
“음? 왜 그렇습니까? 라-샤르-로아 같은 이적을 활용하여 건너가면…….”
하지만 시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라가오페가 서글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양쪽에서 법진으로 좌표를 확정하고 붙들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라가오페는 그리고 예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 ☆ ☆
제국을 만든 콘-라드와 라가오페는 저 건너편 대륙으로 가겠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것저것 실험을 해 보았다. 그중 콘-라드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이적을 실험하던 중 공간이동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찾아낸 콘-라드는 흥분하여 라가오페와 동족들에게 알렸다.
<공간-이동으로 저쪽으로 넘어간다면 굳이 위험하게 대수림이나 하늘산맥을 건널 필요가 없다!>
그 말에 모두가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저 미친 괴수 녀석들을 지나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질러간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후 그들은 공간 이동에 대해 이것저것 실험을 해 보기 시작했다. 이적이란 것이 발달되고 공간이동이란 개념은 처음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잘못하면 다른 곳으로 튕겨나갈 수도 있으니. 콘-라드가 필요에 의해 지배한 제국 덕분에 재료와 인력을 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었다. 이때 원숭이도 쓸 만하다는 것을 느낀 라가오페는 나중에 하청업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들게 된다.
이 와중에 <공허>나 <라-샤르-로아>가 개발되었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인간을 지키고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모두 헤란테르의 사람들이 돌아가기 위한 노력 도중 개발된 것에 불과하다. 물론 퍼트리는 와중에 적당한 포장이 더해졌지만.
하지만 둘 모두 실패작이었다. 공허는 목적지를 지정할 수 없었다. 라-샤르-로아는 목적지와 출발지, 양쪽에 법진을 설치해 놓아야만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적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돈-나시안 대륙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곳에 이적을 설치해 줄 사람들도.
그렇기에 조직 사람들은 단거리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그 범위를 늘려나갔다. 5킬로미터… 10킬로미터… 20킬로미터… 이 와중에 생성된 단거리 공간이동 기술이 ‘아란칼의 병기창’에 배치되었다. ‘나랑겔의 문’도 이때 만들어진 기술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라가오페는 기쁨에 가득 찼다. 이대로라면 공간을 가로질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30킬로미터를 넘어갈 때쯤에 발생했다.
<음? 이곳은 우리가 지정한 좌표가 아닌데?>
그 당시 첫 번째 삶을 살고 있던 타키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적을 통해 인간이 되고 헤란테르에 들어온 타키온은 그 놀라운 지식을 이용해 개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니… 뭔가 목표 지점이 아니고 붉은 곳이 보여서…….>
그 말을 들은 라가오페가 공간이동 건너 지점을 바라보았다. 공간을 가로지른 구체의 건너편으로 원래의 목표 지점 광경 이외에도 다른 공간이 살짝 겹쳐 보였다.
30킬로미터 시험은 어찌어찌 통과했지만 그다음, 100킬로미터 시험 때는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미친! 막아!>
공간이동을 통해 뚫은 구체는 목표로 했던 평원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번에 그 건너편으로 보이던 요상한 붉은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괴물들. 동료들과 힘을 합쳐 간신히 녀석들을 쫓아내고 문을 닫은 라가오페는 쌍욕을 내뱉었다.
<젠장… 아펜탈이 왜 연결된단 말인가?>
자신들 대륙에서도 험지로 지정되어 있는 <아펜탈>. 강대한 자들이 즐비한 자신들 대륙에서도 ‘험역’이라는 뜻은 들어갈 때 유서를 써 놓고 들어가라는 뜻과 동일했다.
다른 차원이되 다른 차원이 아닌 곳, 자신들 대륙에 입구를 걸쳐놓은 채 반 계단 아래의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 그곳은 괴물이란 괴물은 모조리 모아놓은 곳이었다. 이제까지 들어간 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이후의 실험에도 결과는 모조리 동일했다. 공간이동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차원의 문은 모조리 아펜탈로 연결되었다.
타키온과 콘-라드는 이 결과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어 놓았다.
<반대편 좌표를 법진을 통해 고정시켜 놓지 않는다면… 공간이동 좌표가 모조리 그 아펜탈이라는 곳으로 빨려들어간다. 아무래도 그 아펜탈이라는 곳이 우리 차원보다 반 차원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곳으로 빨려들어갈 확률이 커진다.>
그 말은 저쪽 대륙으로 연결되는 공간이동의 문은 모조리 아펜탈이라는 곳으로 열린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공간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라가오페와 동료들은 허탈한 마음을 다잡고 다른 방향을 찾게 된다.
공간이동이야 실패했지만 이후 타키온은 포기하지 않고 이곳을 이용할 방법을 찾는다. 법도회 쪽에야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놓았지만 헤란테르의 수준이라면 여는 것은 힘들지 않았기에 따로 연구를 지속했다.
하지만 열 수는 있어도 차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제어할 수 없어 연구가 지지부진했는데, 후에 리마이누가 오면서 이쪽에서는 들어갈 수 있는 동시에 저쪽에서는 나올 수 없는 차원문을 완성시켰고 이를 지옥의 문, ‘타샤-다곤’으로 이름 붙인다.
☆ ☆ ☆
“…그거 열었던 게 헤란테르였습니까?”
“음? 모르고 계셨습니까?”
“끄응…….”
그냥 법도회 소속 실험인 줄 알았는데 진상을 알게 된 시안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안 씨가 그때 휘말려 들어간 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사태라…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라가오페가 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시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많이 흘렀거니와 이제 와서 그때의 일로 난동을 부리기에는 너무 받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미안한 것은 라가오페도 진심이었다. 자신은 거기에 시안처럼 귀중한 동족을 쓸어넣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말 재수 없게 꼬인 것이다.
“뭐… 어찌 되었건 공간이동으로는 못 넘어간다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요.”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시안으로서는 짐작이 안 갔기에 궁금하여 호기심에 물어보았지만 라가오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시안 씨가 들어오면 다 이야기해 드리지요.”
“음…….”
“저희랑 같이 안 가실 거면 굳이 계획을 아실 필요가 없겠지요? 여기까지만 아셔도 결정하는 데 지장이 없으실 겁니다. 저희와 같이 간다면 모든 걸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제안은 스틸 씨에게도 같이 하는 겁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요.”
그 말에 스틸과 시안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라가오페는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혹시 나중에라도 못 갑니까?”
시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가족들이 있어서 가지 못 한다. 하지만 가족들이 모두 죽는다면 자신은 이곳에 나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때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이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도 계획의 실행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시안 씨는 다시는 건너오시지 못 할 겁니다.”
“허…….”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닌가 보다. 그렇기에 좀 더 고민하던 시안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저는 그냥 여기에 남겠습니다.”
하지만 라가오페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시안이란 자를 살펴본 결과 가족을 떼어 놓고 따라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보니 자신들만큼 외로운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원숭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강요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계획은 궤도에 접어들었고 동족을 이곳에 놔두고 같이 못 간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스틸은 그런 시안을 바라보더니 냉큼 결정했다.
“뭐… 그럼 나도 패스. 여기서 동생이랑 오손도손 살지, 뭐.”
시안은 이제는 자신의 스틸 양에 대한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제안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떠나버릴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함께한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에서 기꺼운 마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스틸 양,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이야 가족도 있지만 스틸 양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후후. 그런 건 익숙하다고. 오히려 지금이 훨씬 낫지. 지금은 동생이라도 있으니까.”
“아…….”
그런 둘을 바라보던 라가오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으시군요. 그럼… 두 분은 이곳에 남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되었군요.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뭐… 아닙니다. 이건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이곳에서라도 행복하게 사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라가오페 자신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불행하고 참을 수 없기에 이주를 택하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다면 굳이 이주를 택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전혼옥은… 완성되면 보내드리지요. 빠듯하지만 계획 성공 전에 완성될 듯합니다. 저희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라가오페 씨도 계획이 성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시안은 라가오페가 주었던 아티팩트를 돌려주었고 라가오페는 그걸 받아 들고 사라졌다.
폭풍 같은 진실과 대륙의 역사에 대해 들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하지만 시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시안은 한동안 라가오페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시안과 스틸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시간을 보냈다. 라가오페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어느 날 한 통의 편지와 작은 상자를 받게 된 후였다.
☆ ☆ ☆
“시안! 네 앞으로 무언가가 와 있구나.”
리안은 누군가가 전달한, 작은 상자와 편지를 시안에게 가져다주었다.
시안은 스틸 양과 노닥거리다가 그 상자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시안, 너무 안에만 있는 것 아니니?”
몇 달간 성안에만 머무르는 시안을 보며 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청 편한데요. 하하. 그리고 제가 나가면… 나라샤 아저씨는 뒷목을 잡을 텐데요?”
“음… 그것도 그렇겠구나.”
딱히 그것 때문에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될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
시안은 자신에게 무엇이 왔나 해서 우선 상자부터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자그마한 네 개의 보석이 들어있었다.
“어… 이거?”
시안은 이 보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헤에… 이게 전혼옥인가 보네… 옆에 종이는 뭐야?”
옆에 같이 누워있던 스틸이 굴러 와서 상자 안을 살피다가 상자 안에 작은 쪽지가 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자… 사용… 설명서라고 쓰여 있군요.”
시안은 그 말을 읽고 편지보다 그 사용서를 읽기 시작했다.
<전혼옥 1.15 사용설명서>
-작성자: 라가오페
-사용방법
1. 전혼옥을 안전한 장소의 수조에 넣어둡니다. 물의 양이 충분해야 하기 때문에 작은 수조보다는 호수 밑바닥에 던져두는 것도 좋습니다.
2. 전혼옥 1.15는 대상자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 작동을 시작합니다.
3. 대상자가 죽을 경우, 전혼옥이 대상자의 사망을 감지하고 뼈대부터 시작하여 혼까지 순서대로 재생을 시작합니다. 필요한 재료는 그 안에 모두 들어 있으니 물만 꾸준히 공급해 주면 완성까지 3일이 걸립니다.
4. 사망 직전의 모습으로 다시 재생되며 수명이 다 되어 죽은 자에게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흐음…….’
묘한 설명이었지만 별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후손을 잡아먹어야 되지 않는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시안도 가족들의 불로불사를 바란 건 아니었다.
꽤나 만족하던 시안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는 무언가 말할 내용이 많은지 상당히 장문이었다.
<친애하는 시안 씨에게.
우선 선물을 확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선물에 대하여 우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아시다피시 가족분들의 전혼옥이 모두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한 것과 달리 자연사는 피할 수 없었지만… 저희 종족이 아닌 평범한 육체로는 이게 한계이더군요. 비록 노화로 늙어죽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비명횡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쁜 소식은 시안 씨의 전혼옥 개발은 실패했습니다.>
“으잉?”
시안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쪽지를 읽다 말고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 분명 상자 안에는 네 개의 전혼옥이 들어있었다.
당황한 시안은 다시 편지를 살펴보았다.
<실험을 거듭했는데도 시안 씨의 전혼옥은 계속 실패를 하더군요. 분명 실험까지 끝내고 저희 것은 제조를 완료하였는데도요. 아마 무언가 시안 씨와 저희의 차이가 있는 듯한데 결국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 하였습니다.
급한 대로 상자 안에 가족들의 1.15 버전 전혼옥 세 개와 만들어 놓았던 스틸 씨의 1.03 버전 전혼옥 하나를 동봉합니다.
저번에 두 분의 분위기를 보니 후손을 금방 만드실 것 같더군요. 그때 스틸 씨의 전혼옥을 사용하면 별문제 없으리라고 믿고 따로 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안 씨 연구를 계속 실패하느라 재료도 좀 모자랐고.
그리고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 민망하지만… 저희까지 떠나면 시안 씨가 그 대륙에서 죽을 일이 있겠습니까? 호언장담한 것치고는 결과가 좀 미흡하지만 만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완성시켜 전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저번에 말한 기회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거든요.
저희는 이제 떠날 겁니다. 다행히도 시간 맞추어 준비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시작되겠군요. 짧은 인연이지만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스틸 씨랑 행복하게 사십시오.
ps)물론 실패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제발 다시 안 만나길 빌어주십시오.>
“쩝…….”
자세히 보니 하나의 전혼옥이 다른 세 개와 조금 달랐다. 아마 저게 스틸 양의 전혼옥이리라.
무언가 기대하던 바에 못 미치기는 하였지만 공짜로 만들어 준 것에다 대고 뭐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스틸 양의 전혼옥을 손바닥 안에 밀어 넣고 가족들의 전혼옥은 설명서대로 저 멀리 호수에 던진 시안은 안타까움에 입맛만 쩝쩝 다셨다.
“이제 떠나가나 보네.”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기회라는 게 뭐길래…….”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시안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그 기회가 무언인지 알 수 있었다.
“……?”
누워있던 시안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뭐야, 무슨 일인데?”
스틸이 따라붙으며 시안에게 물었지만 시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스틸 양은 아직 느끼지 못 할 것이다. 이 느낌은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바꿔 말하면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심상치 않았다.
동시에 오랜만에 자신의 촉이 또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강렬하게.
“스틸 양,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 시안, 어디 가?”
시안은 등 뒤에 스틸을 남겨놓고 맹렬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가오페 씨,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시안은 달리면서 도대체 라가오페가 말한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다들 조심해서 옮겨!”
“그래, 다들 잘 하고 있다!”
티안의 동북쪽, 하늘산맥과 대수림, 대북벽 사이에 위치한 평원에서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공사도 보통 공사가 아니었다. 법도회가 진행하는 거대한 공사였으니까.
대방어법진, <루-사라>
망자의 군대 사건 이후 대법도회는 대북벽이 완전히 지어지기 전에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하늘산맥 아래, 크로티아 요새가 있던 곳 앞의 대평원에 거대한 법진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을 법진을 설치하면 티안과 타란으로 하리쟌들이 들어갈 길목을 틀어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국가는 이번에 워낙 호되게 당한 터라 대북벽의 연장공사 전까지 이러한 법진이 필요함을 인정했고, 그 결과 법진은 빠른 속도로 지어져 거의 완공된 상태였다.
“그나저나… 정말 거대하군요.”
직경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법진을 보며 공사에 참여한 기사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들은 이적에 문외한이기는 했지만 저런 거대한 법진은 들어본 적도 없다.
“뭐, 머리 좋은 친구들이 진행한 것이니 어련히 필요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나저나… 이제 저 가운데에 이것만 올려놓으면 작동한다고?”
기사들은 자신들이 운반해야 할 거대한 구를 보며 말했다.
얇은 강철로 둘러싸인 거대한 구. 수십 미터도 넘는 그 크기를 보니 기사들은 왜인지 모를 경외감이 생겼다.
“이것만 올려놓으면… 저 법진이 작동하여 대북벽이 건설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다는 것이군요.”
“그래. 법진은 완성되었다고 하니 어서 옮기자. 그나저나… 대법도회는 대단하군. 이런 건 어떻게 만든 거지.”
아무리 무장들이라고 하여도 저런 거대한 구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에 그들은 대법도회에서 제공한 정체불명의 기계를 이용하여 강철의 구를 조심스럽게 한가운데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 ☆ ☆
“다들 준비되었습니까?”
라가오페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동료들을 보며 외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들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 라가오페. 이번에는 괜찮은 거야?”
“하하,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킬라데팔 씨.”
라가오페가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하자 킬라데팔이 오히려 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야기… 400년 전에도 했었잖아. 그때도 몽땅 죽었잖아. 콘-라드 아니었으면 너도 죽었을 거라고.”
그 말에 라가오페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래도 다들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전혼옥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렇게 한 거지요. 이번에도 다 만들어 놓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잉…….”
그 말에 킬라데팔도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다시 살아날 수 있단 것을 감안하면 한번 해 볼 법한 도박이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오겠습니까? 이번 기회는 사백 년 전보다 더 좋습니다. 한번 기대해 보시지요.”
“하긴… 그건 그렇지.”
옆에서 부드럽게 생긴 인상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라가오페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그렇지요, 로바노튼? 흐흐. 이번에는 정말 잘 될 겁니다.”
“적어도 땅굴 작전이나 날아가자는 작전보다는 훨씬 낫네.”
“…….”
안 해본 것이 없던 라가오페에게도 가장 크게 실패한 계획 중 하나였다. 땅굴은 도저히 저 광대한 하늘산맥을 가로지를 엄두도 나지 않았고, 또 그런 짓을 하면 일곱 뿔이 모를 리가 없기에 기각되었다. 하늘을 날아가자는 작전은 이상하게 고도가 높아질수록 땅으로 자신들을 잡아끄는 힘이 강해져 불가능했다. 10킬로미터 정도는 가능했지만 그 정도는 드라고나나 크로나의 사정거리 안이다. 단번에 격추될 것이다.
제국의 1년 치 예산을 갈아 넣고도 거창하게 실패했던 계획을 떠올리며 라가오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새로 생겼다는 동족이랑 스탄탈은 정말 안 데려가도 돼?”
로바노튼이 궁금하단 듯이 물었고 그건 주위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각지에 흩어져서 계획을 준비하느라 바빴기에 새로 생긴 동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리비아스만 제외하고.
“야, 뭘 좋다고 보려고 그래. 그런 건 가까이 안 하는 게 좋다고.”
“그 정도야?”
로바노튼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리비아스를 보며 물었다.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리비아스가 저렇게 쫄아 있는 건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다. 콘-라드를 제외하면 아무한테나 틱틱대는 녀석인데 저런 걸 보니 참신했다.
“이제 볼 일도 없는데 알아서 뭐하게. 그냥 신경 끄자고.”
리비아스는 투덜거리며 대답을 피했고 라가오페는 로바노튼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뭐… 두 분이 선택한 것이니 존중해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안 씨는 이곳에서도 잘 사실 것 같더군요. 참 특이한 분이라…….”
시안의 가족 사랑을 떠올린 라가오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본 귀족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자. 네크라를 죽였다면 동급인 콘-라드보다도 더 강하다는 뜻인데 겨우 스물둘에 그런 경지라니. 라가오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족들이 휩쓸려 비명횡사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혼옥도 만들어주고 왔으니 계획에 휩쓸려 피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척 지면 찝찝하니까.
그 순간, 라가오페는 영상을 통해 법진 위로 알이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됐습니다. 알이 법진 위에 올라갔군요.”
“이제 그만 숨어 있어도 되는 거야?”
킬라데팔이 물었다.
“네. 뛰쳐나갈 준비하십시오.”
라가오페가 말했고 그런 라가오페를 보며 리비아스가 불안한 듯 물었다.
“라가오페, 그런데 그게 진짜로 그 법진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거야? 그건 나도 힘들겠던데.”
법진의 크기를 봤었던 리비아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자신의 ‘길’, 태양을 최대로 가동시켜도 힘들었다. 겨우 알 하나가 그 법진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후후.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게 누구의 알인데요. 충분할 겁니다. 그나저나… 다들 준비하시지요. 이제 시작입니다.”
라가오페는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다들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 ☆ ☆
“다들 대피해라! 대피!”
거대한 법진 위에 거대한 금속의 구를 올려놓자마자 거대한 금속 구는 기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치 법진이 기묘한 구를 구석구석 자극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법진에서 나온 빛이 구를 한 바퀴 휘감아 돌면 금속의 구가 부르르 떨며 그 빛에 자신의 빛을 더했다. 그리고 그 빛은 다시 구를 휘감아 흘러들어가 법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미약하던 빛도 시간이 갈수록 엄청나게 밝아지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에 있던 구 역시 마치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빛은 모조리 법진으로 게걸스럽게 삼켜지기 시작했기에 이윽고 구는 달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었고 대신 직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대피한 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땅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진동에 몸을 떨었다.
“오오… 무언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쿵. 쿵. 쿵. 쿵.
마치 심장박동과도 같이 울려 퍼지는 진동은 땅을 따라 점점 더 커져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윽고 무언가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건 법진의 고동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거… 무슨 발자국 진동 같은데…….”
“에이… 무슨 소리십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산이 걸어오는 것도 아니고.”
옆의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시야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저 너머로 보이는 하늘산맥과 대수림만이 있을 뿐.
그 시야 바깥에서 걸어오는 데 진동이 느껴질 정도면 얼마나 거대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법진이 발동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시안이 있었다. 일단 느낌이 시키는 대로 달려오긴 했는데…….
‘잘 온 건지 모르겠네, 이거…….’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것이 엄청난 기세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무언가.
“와… 저거 뭐야, 시안?”
“스틸 양, 따라오지 말라니까요.”
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스틸은 흥미로운 것을 본 터라 시안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저거… 저번에 그 녀석보다 더 강하겠는데?”
아직 기사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시안과 스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저 멀리서 땅을 울리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대괴수.
머리에는 예전, 자신이 붉은 구체 앞에서 싸웠던 소 머리의 하리쟌보다도 더 우람하고 굵은 뿔이 나 있었다. 흥분한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제야 저 안에 있는 구체가 무엇인지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저 알이 저기 달려오는 저 녀석의 알인가 보군요.”
“그러게. 그나저나 저건 도대체 어떻게 훔쳐온 거야?”
스틸과 시안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 녀석은 소대가리보다는 강해보였다. 하지만 그 말을 바꾸어 말하면 시안에게는 별것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보다 스틸은 저기 있는 저 법진의 용도가 무엇인지 더 궁금했다. 법진은 알의 부화를 위해 축적되어 있던 에너지를 정말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저 정도면 저번에 리비아스 아저씨가 뽑아낸 에너지의 양보다도 더 많았다.
스틸이 궁금해할 때, 아래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괴수를 보았는지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고 있었다. 이곳은 대북벽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지형이라 저런 괴수를 막을 만한 병력이 없었다. 물론 있어도 의미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저런 괴수는 평소에 그로인 경이 처리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윽고 법진 앞까지 도착한 괴수는 어마어마한 등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조심스럽게 알을 입으로 물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알이었지만 괴수가 어찌나 거대했던지 그 입에 살포시 물려 들렸다.
하지만 알은 이미 그 역할을 다했다.
괴수가 들어오는 순간, 발동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법진이 가동을 시작했다.
☆ ☆ ☆
“낚였다!”
라가오페는 영상으로 보고 있다가 <크로마트>가 법진으로 들어온 것을 보자마자 법진을 바로 가동시켰다. 역시 크로나도 그렇고 저 일족은 자신의 후손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못 한다.
“콘-라드, 알 가져오느라 수고했습니다.”
“후후, 뭐… 허공에서 시키는 그대로 했을 뿐인데. 그나저나… 이 악사라이라는 거… 정말 끝내주는군.”
옆에서 키라트였던, 이제는 콘-라드로 되살아난 존재가 눈앞의 퀘스트창이라는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시키는 대로 하니 크로나에게도, 그 새끼인 크로마트에게도 걸리지 않고 알을 훔칠 수 있었다. 절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좀 복잡한 과정 같기는 했지만 이제 콘-라드는 이 퀘스트창이라는 것을 완전 믿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성공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지만.
아마 400년 전에도 악사라이의 능력이 있었다면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후후. 엄청나지요? 후손이 아니라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콘-라드 당신을 믿었습니다. 애초에 환생한 경험이 없었다면 안 되었겠지요.”
애초에 후손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혼의 파장이 맞아야 성공률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나인의 육체에 환생을 겪었던 콘-라드라면 성공할 줄 알고 비축해 두었던 탈릭 스톤을 대량으로 쏟아부어 성공시켰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쓸 일도 없다.
“그러게.”
콘-라드는 자신의 앞에 떠 있는 상태창이라는 것을 보며 말했다.
[상태창: 칼-키라트->콘-라드]
-특성: 세 번째 삶을 사는 자, 악-사라이의 접속자, 이종 이능 사용자.
-레벨: 399
-반데르:……
-엑사르:……
-보유스킬: 폭축, 공허, 라소드-라, 파멸, 케루빔, 아크마사이……
……
“이 정도면 네크라 그 녀석도 이길 수 있겠는데. 그런데 그 녀석이 죽었다는 게 진짜야?”
“네, 죽었습니다.”
“거참… 진짜 괴물 같은 녀석인가 보네.”
네크라가 졌다면 자신도 진다. 둘 다 벽에 막혀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시안이라는 아이는 벽을 뚫은 모양이다.
“특이한 분이지요.”
“그러면 그… 이렇게 복잡하게 갈 필요 없이 그 녀석 껴서 그냥 어떻게 한판 해보면 되는 거 아냐?”
콘-라드는 라가오페의 계획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툴툴거렸다.
“…새로 태어나면서 기억도 많이 잃어버렸나 봅니다? 그게 어떻게 한 번 해볼 수준입니까?”
라가오페는 400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때도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필요 없는 원숭이들의 힘을 키워 제국이란 것도 만들었고 콘-라드가 이전부터 만들고 싶어 하는 전혼옥도 도와서 만들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하려는 계획이란 것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으니 보험은 필요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혼옥이 만들어지고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제국을 이용해서 칼-굴을 묶어 놓고 파수꾼, 네크라를 콘-라드가 묶어두는 동안 알을 낳으려고 준비 중이던 크로나의 새끼를 납치한 것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정말 크로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엄청나게 준비를 했으니까.
하지만 다 삽질이었다. 새끼가 구슬프게 울자마자 크로나는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고 그 순간 작전이 끝이 났다. 납치를 시도하느라 다친 새끼를 본 녀석이 내뱉은 숨결 한 방에 다 죽어버렸으니까.
저 멀리서 다른 계획을 실행하느라 범위 바깥에 있던 라가오페만이 살아남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라가오페가 살아 있어서 다른 자들을 모두 살릴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뭐, 그건 그래. 그 미친 덩치가 그렇게 빠를 줄 누가 알았겠어.”
“혼자 죽으십시오. 이제 죽어도 아무 감흥도 없습니다.”
전혼옥이 있으니까 리스크는 훨씬 줄어들었다. 심드렁하게 라가오페가 말하자 콘-라드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라가오페, 튕기기는. 너 내가 처음 죽을 때도 엄청나게 슬퍼했잖아. 하늘이 무너지도록 울었으면서. 내가 죽기 전에 다 봤다고.”
“…환생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쪽팔리게 크게 안 울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 생긴 동족이 죽는데 어찌 안 슬픕니까. 저만 슬퍼한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저랑 떨어지기 싫어서 불사가 되고 싶어 했으면서.”
투닥거리는 동안 법진은 완벽하게 가동하며 새끼 녀석을 옭아매었다.
400년 전의 계획은 완벽하게 대실패.
하지만 새로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첫째, 애초에 크로나는 새끼 근처에서 멀리 있지 않는다. 새끼가 자신을 믿고 나댈까 봐 새끼의 인지 범위 바깥에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고 주위를 맴돈다.
둘째, 크로나는 새끼가 울면 어디서든 듣고 달려온다. 그때도 크로나 몰래 새끼를 납치하려 했는데 울음소리 한 번에 달려왔으니까.
그리고 영상기기 너머로 법진에 완벽하게 빠진 크로나의 새끼가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 ☆ ☆
“허허허…….”
시안은 저 멀리 발동한 대법진을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이 케르발에서 빠졌던 붉은 구멍. 그게 다시 발동하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예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생성이 되었다는 것. 어느 정도이냐면… 그 위에 놓여 있던 괴수를 완벽하게 삼킬 정도로 말이다.
구멍에 빠진 괴수는 주변 녀석들에게 무섭게 공격받으며 구슬픈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괴수도 워낙 강했기에 꽤나 잘 싸우고 있었다.
“엥? 저거 뭐야. 동생이 빠졌던 구멍 아냐? 저게 그거지? 그… 저쪽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험지라는 곳.”
스틸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때 동생이 다 죽이고 나온 거 아니었어? 험지라더만 별거 아닌가 보네.”
예전에 시안이 뚫고 나온 것을 본 스틸은 시안이 그 안의 녀석들을 다 죽이고 나온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스틸의 오해였다.
“저도 그때 근처에 있는 녀석들만 쳐 죽이고 간신히 살아나온 겁니다.”
시안이 빠졌던 구멍은 크기는 작지만 그 안쪽은 그렇게 작은 세상이 결코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에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괴수들. 게다가 그 당시 자신과 비슷한 녀석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녀석들이 자신을 덮치기 전에 근처의 녀석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구멍이 완전 메꿔지기 전에 뚫고 나온 것이다.
그 짧은 전투로도 죽을 뻔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여전히 위험하잖아…….’
뚫고 나오는 거야 어렵진 않겠지만 저 안에 완전 갇힌다면 또 위험했다. 하지만 시안은 별 걱정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구멍은 커졌지만 이번에도 뚫고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저번과 같다면 이번에도 닫힐 것이다.
문제는 이걸 왜 설치했느냐 하는 것. 그때도 느꼈지만 저건 괴수 하나 잡기에는 과했다. 자신의 생각에는… 일곱 뿔의 발목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발목 잡는다고?’
시안은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슬슬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길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기랄…….”
“시안, 왜 그래?”
흥미진진하게 붉은 구멍 안의 녀석들과 괴수의 대결을 보고 있던 스틸은 격한 시안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스틸 양, 잠시만 들어가 계시지요.”
“야! 시안 너……!”
시안은 손에서 빠르게 카르나인을 꺼내서 카르나인에 새겨져 있던 주술을 발동시켰다. 다른 건 안 되지만 이건 카르나인이 열쇠 역할을 하기에 가능했다. 지금 부작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예전 스틸 양이 갇혀 있던 소마즈란에 스틸 양을 잽싸게 집어넣은 시안은 카르나인도 감추고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엄청나게 멀리서 검은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큰지 대수림 저 너머, 어마어마하게 멀리서부터 오고 있는데도 상당히 큼직하게 보였다.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은 괴리감 그 자체였다. 작은 산만 한 녀석이 뛰어오고 있었는데 어찌나 움직임이 가벼운지 무슨 표범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땅에 발자국이 찍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부 계수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고 있다는 소리.
당장 머리에 나 있는 일곱 개의 뿔이 아니더라도 저 녀석의 움직임과 덩치가 저 녀석의 강함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시안은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알 수 있었다. 시안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대수림의 지배자, 크로나.
녀석이 날듯이 붉은 구체로 달려오고 있었다.
‘와… 어마어마하네…….’
기억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실제로 보니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멀리 있는 시안에게까지 퍼져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달려오는 크로나를 보며 시안은 구멍 안에 있는 녀석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네크라의 기억 속의 녀석과 달라서 몰랐었는데 그 새 탈피를 한 번 진행한 모양이다.
라가오페는 저 법진에 크로나의 새끼를 처박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크로나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고.
“라가오페 씨… 이게 무슨…….”
☆ ☆ ☆
영상을 지켜보던 라가오페가 외치기도 전에 콘-라드가 허공에 뜬 상태창을 보며 외쳤다.
“됐다!”
깨어난 후 꾸준히 준비한 퀘스트의 끝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퀘스트: 대수림을 건너라.]
-훌륭한 기지로 대수림을 틀어막고 있던 크로나를 끌어낸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크로나는 현재 드라고나의 영역 옆에 있기에 결코 과한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크로나가 새끼를 구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크로나가 제 자리로 돌아와 대수림을 틀어막기 전에 대수림을 통과하라. 대수림을 통과한다면 크로나는 더 이상 당신을 쫓지 않을 것이다.
-성공 시: 이주 성공. 경험치: 0(경험치 최대 상태)
-실패 시: 전원 사망
이제까지 이루어 낸 모든 일들의 결실을 볼 때가 되었다.
이때를 위해 몇백 년간 크로나의 범위 바깥의 대수림에서 그로인을 포함한 동료들은 틈틈이 여섯 뿔의 하리쟌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크로나가 빠졌을 때 한 놈이라도 적어야 방해를 덜 받을 테니. 그리고 그 재료는 모조리 아마란으로 보내 병기를 제작했다.
크로나의 영역 안에도 여섯 뿔 몇 놈이 살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자잘한 잔챙이들은 자신들이, 상당히 강한 놈들은 콘-라드가 치울 것이다.
대수림을 건너는 데 가장 거슬리는 칼-굴족은 진작에 치워두었다. 더불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신경 쓰였던 네크라도.
타샤-다곤 외에도 크로나의 발을 묶을 준비를 해 놓았다. 얼마나 시간을 끌어줄지는 몰라도 일부러 드라고나의 영역 옆에 설치했으니 크로나는 힘을 모두 쓰지는 못 할 것이고 시간을 꽤 벌 수 있을 것이다.
400년 전에는 제국과 콘-라드가 시간 끄는 동안 새끼만 잘 납치해서 드라고나의 영역에 처박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크로나가 그렇게 가까이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강할지도. 어렴풋이 강할 것이다, 라고 느낀 것과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때 계획은 어부지리를 노려 어떻게 한번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두 녀석이 싸우면 고래 등에 새우 터지듯 모조리 터져 나갈 것이다.
이번에는 소소하게 발만 묶어 놓고 도망갈 것이다. 누가 보면 비웃을 수도 있다. 그렇게 거대한 조직과 강대한 세력을 세워 수백 년을 준비하고서 겨우 그런 게 목표라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크로나가 상대니 이런 소소한 목표도 너무 힘들었다. 눈앞에서 크로나가 한 짓을 직접 본 콘-라드와 동족들은 더 치사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달려!”
그 말을 들은 순간 크로나의 영역, 바로 바깥에 숨어 있던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콘-라드를 따라 대수림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잡히면 모조리 죽는다. 왜 대수림을 넘어가면 안 쫓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사라이가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진 않을 것이다.
대수림만 넘으면 된다.
그걸 목표로 그들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붉은 구체 안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새끼를 쳐다보고 있는 크로나를 숨죽이고 쳐다보았다.
크로나는 도착하자마자 붉은 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쫘악 하고 벌렸다.
‘허억? 쏘나?’
시안은 휩쓸릴까봐 움찔했지만 크로나는 입을 벌리더니 별안간 하늘산맥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이윽고 입을 벌렸다 닫던 크로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크라의 기억 속에서 본 섬광은 안 쓰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크로나는 입을 다물더니 앞발을 들어 붉은 구체를 후려쳤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앞발로 가볍게 후려쳤지만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구체와 앞발의 반발력으로 인해 발생했다. 붉은 구체는 단번에 박살이 나 찢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안은 예전에 겪어 본 익숙한 기운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운만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구체 안의 녀석들은 무서운 것도 없는지 자신들이 공격하던 새끼를 버리고 미친 듯이 기어 나와 크로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로나가 붉은 구체를 한 번에 엄청나게 부수어 버렸기 때문에 구멍의 크기가 엄청났고, 그에 비례해 어마어마한 녀석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모조리 크로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로나는 귀찮았는지 강한 녀석들부터 앞발로 후려쳐서 죽이기 시작했다. 약한 녀석들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거슬리는 녀석들은 꾹꾹 눌러 죽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와… 이빨도 안 들어가네.’
녀석은 무언가가 신경 쓰이는지 큰 힘을 쓰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붉은 괴물들을 죽여 나가더니 꽤 시간이 흐른 후에는 결국 구멍 안으로 머리를 스윽 들이밀었다.
그리고 힘이 빠져 움직이지도 못 하는 새끼의 꼬리를 물어 끄집어내었다.
‘그런데 묘하게 침착하네…….’
하는 짓을 보면 새끼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 같은데 차분하게 행동하는 크로나를 보며 시안이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신기한 점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태도 신기했다. 사실 도망가려면 더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을 톡톡히 도왔던 그 느낌이 무언가 이곳에서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미친… 설마 저 녀석의 뺨이라도 후리라는 건 아니겠지…….’
절대 사양이다. 한 대 후려치는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 동시에 시안은 녀석의 뺨을 후릴 생각을 할 정도로 강해져 있는 자신이 매우 대견했다.
촉을 무시하고 더 도망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순간, 산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산맥뿐만이 아니었다. 평원에서, 호수 속에서 어마어마한 고에너지가 집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직후, 에너지가 느껴지는 곳에서 갑자기 반투명한 비석이 솟아나왔다.
아마란과 대법도회, 헤란테르의 기술력을 모조리 응집시킨 기괴한 무기들. 시안이 본 허접한 시제품들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초인에게조차 영향을 줄 만한 엄선된 무기들을 뽑아서 강화시킨 녀석들이다. 라가오페와 타키온은 이 무기들에 굳이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 쓰면 크로나에게 모조리 박살 날 것이거니와 그쪽에서 만들 생각도 없으니까.
비석을 중심으로 기괴한 이적들이 발현되며 현세를 비틀기 시작했다. 대상은 정확히 붉은 구체 앞에 있는 크로나를 향하고 있었다.
비석들은 생긴 건 비슷했지만 효과는 다양했다. 어떤 건 공간을 비틀었고 어떤 것은 중력을 무지막지하게 증가시켰다. 지속적으로 공간에 구멍을 내는 종류도 있었고 직접적인 에너지 사슬을 만들어 크로나를 묶으려고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나만 수도로 향해도 도시를 순식간에 박살 낼 만한 위력들.
하지만 그 비석들을 보는 순간 시안은 라가오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애초에 잡을 생각이 없었구나…….’
비석은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이적을 행사했지만 대부분이 파괴력 위주라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용도였다. 어디 도망 못 가도록. 물론 파괴력이 없다고 해도 도시 하나쯤은 박살 내기 충분했지만 일곱 뿔을 대상으로는 무리였다. 아마 라가오페는 시간을 벌 목적으로 이걸 설치했으리라. 그동안 무엇을 할 건지는 몰라도.
효과는 있었는지 크로나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크로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앞발을 휘두르며 비석을 툭툭 후려쳤다. 반투명한 비석은 크로나가 가볍게 휘두른 앞발에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하지만 비석의 숫자가 워낙 많았고 붉은 구체에서 나오는 괴물들이 크로나에게 달라붙었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비석의 수가 엄청났지만 크로나는 차근차근 괴수들을 뭉개고 앞발로 후려치며 결국에는 비석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 크로나는 발목을 잡던 비석을 모조리 부수자마자 그대로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 떠나 버렸다.
쿠아앙!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크로나를 멍하니 지켜보던 시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숨어있던 것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입 바깥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어?”
시안은 날아가는 크로나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크로나에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크로나가 후려친 붉은 구체는 닫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저대로 내버려두어도 계속 열려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문제는 그 안에서 붉은 괴수 녀석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
시안은 갑작스런 사태에 멍 해졌다. 워낙 크로나가 압도적으로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시안은 크로나가 새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저 붉은 구체 안으로 들어가 저 안쪽도 싹 쓸어버릴 줄 알았다. 실제로 굉장히 짜증나 있는 표정이었으니까. 저 안쪽은 자신은 좀 위험하지만 크로나 입장에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새끼를 구하러 온 크로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발목 잡던 녀석들만 없어지면 새끼만 데리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안은 왜 느낌이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는지도 깨달았다.
“저걸 닫으라 이거지…….”
저거 안 닫으면 대륙은 모조리 망할 것이다. 자신이야 안 죽는다고 해도 저렇게 큰 구멍에서 저런 숫자의 괴물들이 흘러나오는데 모조리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별문제는 없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 자신이면 바깥에서 저 구멍 닫는 것 정도는 위험하지 않다.
그렇기에 시안은 자신 있게 일어나 몸을 풀며 붉은 구체 쪽으로 향했다.
빠득, 까드드득, 와득!
시안은 일부러 몸에 힘을 두르며 붉은 문 쪽으로 나아갔다. 녀석들은 허허벌판에 크로나를 제외한 먹을 것이 생기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흠… 생각보다 훨씬 편하네…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겠다.’
달려드는 놈은 으깨주고, 좀 더 강한 놈은 카르나인으로 두 동강을 내주었다. 이제까지 전투에 써 본 적이 없어 그 효용을 몰랐지만 써 보니 그 효능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자신이 죽인 녀석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뽑아내어 주인에게 공급하는 능력이 있다니.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토막이 나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처음엔 조금 껄끄러웠는데 이렇게 싸워보니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달려드는 놈을 토막 치며 앞으로 나아간 시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흉하게 일그러져 있는 붉은 구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붉은 구체가 떠 있던 허공은 아직도 크로나가 앞발로 할퀴고 지나간 흉터가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예 공간을 잡아 째 놓은 것.
그 흔적을 본 시안은 역시 자신의 육감이 쓸 만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 흔적이 사라지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녀석들이 그 기간 동안 쏟아져 나오면 이곳은 저 녀석들의 식당이 될 것이다.
문이 닫히지 않는 이유가 크로나가 할퀴어 놓은 자국이 공간을 억눌러 놓았기 때문임을 안 시안은 그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그곳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로나가 새겨놓은 흔적만 없앤다면 저 문은 자동으로 닫힐 것이다. 잔챙이들은 손발을 휘둘러 으깨버리면서 시안은 오른손에 잡힌 카르나인을 휘둘러 갔다.
요란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크로나가 새겨놓은 앞발 자국이 조금씩 없어졌고 이윽고 앞발 자국이 모조리 사라지자 거대한 붉은 구체는 조금씩 그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후아… 개운하구나.”
오랜만에 선행을 했더니 기분이 좋아진 시안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차례차례 토막 내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나오는 녀석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어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안은 녀석들이 적어도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상함을 느낀 시안이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던 칼질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푸느라 칼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너무 달려드는 수가 적었다. 아무리 자신이 많이 죽였어도 나온 녀석들의 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시안은 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의 수가 줄었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녀석들이 어디론가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라본 시안은 입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와… 나…….”
☆ ☆ ☆
크로나는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들고 온 새끼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정도라면 드라고나의 영역과 가깝지도 않으니 마찰이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땅바닥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자신의 새끼를 바라보았다. 여섯 뿔을 가진 거대한 괴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량한 모습.
그 모습을 본 크로나가 크르렁거리며 분노를 토해 냈다.
<크아아아아! 어떻게 키운 녀석인데 이렇게 파먹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을 쏟아 낸 크로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새끼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군… 더 키워야 했는데… 우선 여기서 먹어치우고 그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하러 가야겠군.>
어디 사는 녀석들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너갈 수 없어서 놓아두고 있었는데 자신이 먹을 것을 탐내는 건방진 짓을 하다니! 게다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자신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그 문이 닫히면 위치를 잃어버려 자신도 열 수 없기에 우선 입구가 안 닫히게 잘 열어 두었다. 이 녀석을 먹어치우고 나중에 가서 쳐들어가면 된다. 그곳이면 드라고나와도 마찰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멍청한 녀석. 400년 전에도 위험하더니… 손이 너무 많이 가는 녀석이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크로나는 눈앞 새끼의 목덜미를 물어 부러트려 버렸다.
까드드득!
크로나의 새끼, 크로마트는 지친 상태로 반항 한번 하지 못 하고 그대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멀쩡했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죽은 크로마트를 크로나는 그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꽈드득. 끄드드득.
크로마트는 거대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건 크로나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엄청나게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기에 크로마트는 순식간에 크로나의 배 속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 먹은 크로나는 자신의 몸 내부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드라고나가 탈피를 하며 진화를 이룬다면 자신은 자신의 본질을 기반으로 하되 새로운 가능성을 키워 낸 새끼를 먹음으로써 보다 나은 존재로 진화한다.
하지만 어설픈 놈을 먹으니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옆에 끼고 24시간 감시를 하고 싶었지만 위험한 환경에서 제대로 자라지 않은 놈은 모자란 놈이 되기 때문에 먹어도 의미기 없다. 그렇기에 방치하는 척하고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한눈판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게 다 그 녀석들 때문이다. 크로나는 이 분노를 아까 그 안으로 들어가 모조리 풀기로 결정했다. 이 좁은 땅에서 셋이 아웅다웅하느니 이 기회에 그 안을 모조리 청소하고 자신의 영토로 삼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진 크로나는 가볍게 으르렁거리며 붉은 구체 근처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크로나는 전혀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 녀석은 뭐지?>
웬 기묘한 녀석이 시뻘건 녀석들을 토막 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새겨 놓은 흔적까지 몇 번 휘둘러 치더니 지워버렸다. 그 때문에 붉은 구체가 닫히고 있었지만 크로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도 못할 정도로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녀석이 자신이 파수꾼으로 삼은 녀석에게 준 자신의 송곳니를 들고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런 녀석을 만났으면 파수꾼 녀석이 꽤 쓸 만한 녀석이라고 할지라도 죽는 게 당연하니까.
크로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직은 미숙했지만 저 녀석은 몇 번만 더 벽을 넘으면 자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아주 착실하게 그 예전, 수천 년 전 자신이 밟았던 것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단계를.
그렇기에 크로나는 탐이 났다. 저 녀석을 파수꾼으로 삼고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은 다음 조금만 더 키워서 먹는다면… 자신은 비교도 하지 못할 힘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드라고나와 라이오나 그 재수 없는 녀석들도 먹어치우고 더 강해진 후 바로 북쪽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다.
생각을 마친 크로나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잔챙이들을 모조리 밟아 토막 치고 훌쩍 몸을 날려 붉은 구체 앞에 서 있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은 다가가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신처럼 위대하고 강대한 존재를 보았는데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자신의 눈에 띈 이상 도망도 못 갈 것이기에 여유 있게 다가갔다.
눈앞에서 보니 더욱 탐이 났다. 당장 먹어도 자신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라이오나와 드라고나, 두 녀석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니 위험하다. 크로나는 식욕을 참고 눈앞의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공포로 협박하고 달콤한 대가로 어르면 제 녀석이 아무리 강해도 넘어오리라. 예전의 그 녀석처럼.
<크흐흐… 인간아… 컥?!>
뻐걱!
크로나는 의지를 전하던 도중 갑자기 자신의 뺨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드라고나와의 전투 이후, 몇백 년 만에 느껴진 뺨의 통증.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어안이 벙벙해진 크로나는 이윽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의 녀석이 자신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이 개미 같은 녀석이!>
분노에 가득 찬 크로나가 괴성을 지르며 앞발을 내리치려고 들었다. 하지만 곧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자신을 후려쳤을 녀석이 앞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녀석이 쓸 만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사라진다는 것은…….
그제야 크로나는 자신이 열어 놓았던 붉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흔적이 지워져 닫히고 있던 붉은 구멍은 어느새 모조리 닫혀서 조그마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맹랑한 개미 새끼가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구멍 너머로 도망간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크로나는 분에 받쳐 산맥을 떨어 울리는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뱉었다. 분노에 찬 일격을 허공에 내갈겼지만 공간만 쩍쩍 갈라질 뿐, 그 녀석이 도망갔을 공간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미 그 흔적이 끊긴 것이다.
한창 허공에 대고 분풀이를 하고 있을 때 하늘산맥 너머에서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거대한 포효가 울려나왔다.
<쿠워워어어어!>
그 외침을 들은 크로나는 살짝 분이 가라앉으며 이성이 돌아왔다. 여기서 드라고나 녀석과 치고받으면 라이오나 녀석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 준다. 일단은 먹어치운 새끼를 완벽히 소화시킬 시간도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크로나는 붉은 구멍이 사라진 장소를 노려보다가 그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훌쩍 몸을 날려 대수림 쪽으로 달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크로나에게 더 분통이 터지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개자식들이… 내 영토를 짓밟고 간 것이냐!>
대수림을 쭈욱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한 선명한 흔적. 누가 보아도 침입자가 자신의 영토를 지난 흔적이었다. 자신의 영토 내에서 기르고 있던 여섯 뿔 녀석들은 그 녀석들을 막으려다가 모조리 토막이 나 있었다. 그 아래 녀석들은 침입자 녀석들에게 겁을 먹어서 아예 달려들지도 못 하였다.
짓밟힌 그 선명한 흔적을 본 크로나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대한 패자로만 살아온 크로나에게 이런 능욕은 수천 년 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렇게 되었다니 더욱 열 받았다.
<크르르르르르!>
열 받아서 흔적을 쫓아갔지만 자신의 영토를 관통한 녀석들은 이미 대수림 바깥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아까 그곳에서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너무 끌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로 달려왔을 것이다. 바깥까지 쫓아가기 껄끄러웠기에 녀석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크로나는 열이 받아 대수림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그래 보았자 크로나의 분을 풀어줄 존재들은 모조리 그곳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애꿎은 하리쟌들만 황급하게 크로나의 곁을 피해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크로나의 손에서 살아남은 몇몇은 도망치다가 대북벽 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인간들은 때아닌 홍역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여섯 뿔의 하리쟌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철통같이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티안과 대북벽은 무사히 녀석들을 막아낼 수 있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강대한 하리쟌들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버린 덕에 대북벽의 수호대는 이후 한동안 평화를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