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조우>
스틸은 밝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뭐야… 내 몸 상태 왜 이래…….’
강철도 으스러트릴 수 있는 주먹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건물도 뛰어넘을 수 있는 다리는 계집애처럼 연약해져 있었다.
스틸은 갑작스런 변화에 자신의 몸 상태를 이리저리 체크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별 이상은 없었다. 단지 체내 대사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뿐. 이런 건 회복시키면 그만이다. 다행히도 회복은 예전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리저리 몸 내부를 조작하며 몸 상태를 회복시키다 보니 자신이 왜 이런 상태에 처했는지도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그, 그, 험지라는 걸… 구경하다가 갑자기 시안한테 끌려 들어왔지?’
마지막 상황이 생각난 스틸은 시안이 갑자기 자신에게 왜 이랬는지 궁금했지만 우선은 몸을 회복시키는 게 급하기에 거기에 집중하였다.
이윽고 몸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된 스틸은 눈을 떴다.
“…음?”
눈을 뜬 스틸은 자신이 있던 곳이 예전 그곳이 아님을 깨닫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스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시안이 자신을 꺼냈다는 뜻이다.
뒤를 돌아보니 시안이 서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가기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시안……?”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시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 좀 더 성숙해진 느낌도 들고… 무언가 이전과는 달랐는데 스틸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맞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안의 말에 스틸은 한 번 더 자신의 몸을 체크하고 별 이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음…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시안, 여긴 어디지? 아무리 봐도 예전에 우리가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대수림이야?”
스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늘산맥은 단 한 자루의 풀도 자라지 않는다. 오로지 하얀색으로만 빛이 나고 있기에. 그렇기에 고고한 산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지금 스틸과 시안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솟아나 있었다. 많은 경험을 한 스틸도 이런 숲은 처음 보았다. 그렇기에 스틸은 대수림이라는 추측을 했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곳 중 하나가 대수림이니까.
시안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사실 저도 이곳이 어딘지는 모릅니다.”
“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있지요. 후… 앞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고생깨나 하겠다는 것이요.”
“……?”
시안의 알 수 없는 말에 스틸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 표정을 본 시안은 걸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걷지요. 계속 이곳에 있을 수도 없으니…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음… 그래.”
스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시안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저번에 라가오페가 말한 고향 같다는 뜻이지?”
“네, 아마도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여기로 오려면 대수림을 건너야 한다며? 설마… 거길 뛰어서 건너온 거야?”
그 말에 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제가 이렇게 재수가 없는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몰랐단 말이야?’
스틸이 보기에 동생의 인생은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풀린 적이 별로 없었다.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가치관과 달리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힘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잘 엮이는지 옆에서 보고 있던 스틸도 신기할 정도로. 일부러 사고를 치는 자신보다도 더 격렬한 사건들에 휩쓸리고는 했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틸을 보며 시안은 다시 입을 열었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스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험지라는 곳의 문을 닫고 있었는데 뒤에 크로나가 서있었다고?”
“네.”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뺨에 한 대 먹이고 아펜탈로 뛰어들었고?”
“후… 진짜 고민 많이 했습니다.”
시안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크로나가 서 있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 녀석이 훌쩍 뛰어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는 더욱더.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졌지만 시안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대로 녀석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바로 붉은 구멍으로 뛰어든 것. 본능이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붉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명확한 한 가지가 있었다. 저 녀석에게 잡히면 정말 지옥이라고. 네크라의 기억을 본 시안은 도저히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녀석의 눈동자를 보니 자신을 잡아먹고 싶은 눈치였다. 둘 중 무엇이더라도 자신에게는 전혀 이롭지 않다.
그렇기에 일단 뛰어들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일단 뛰어들자 두 가지를 깨달았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
좋은 점은 자신이 뛰어든 후 붉은 문은 완전히 닫혀 녀석이 쫓아오지 못했다는 것. 아무래도 안쪽에서 여는 것과 달리 바깥쪽에서는 쉽사리 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쁜 점은 자신도 나갈 수가 없다는 것. 맹렬하게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흔적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시안은 도저히 그곳을 다시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설프게 열었다가 바깥에서 그 녀석이 그 길을 따라 구멍을 넓히고 들어오면 꼼짝없이 잡힌다.
갈팡질팡하며 주위에서 달려드는 녀석들과 미친 듯이 싸우던 도중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시안은 험지의 안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후… 그때 떠오른 게 라가오페 씨의 말이었습니다.”
“라가오페의 말?”
스틸은 그 말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그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펜탈이라는 곳은… 저희 대륙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통과해서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아 혹시 시안 씨가 앞장서서 길을 뚫어준다면…….>
<절대 사양하겠습니다.>
<쩝…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시안 씨도 무리이겠지요. 저희를 모두 지키며 통과한다는 건.>
“맙소사, 너 설마…….”
놀란 표정의 스틸을 보며 시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 뚫고 올라왔지요. 으…….”
시안은 아펜탈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예전, 잠시만 있었는데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던 곳. 두 개의 벽을 넘고 갔기에 조금 더 수월할 줄 알았던 자신의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훨씬 수월하기는 했다. 그때는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던 녀석들의 공격이 버틸 만했으니까. 하지만 쉴 곳도 없고 출구도 모르는 지옥 같은 세계를 기약 없이 헤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르나인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공급해 주었기에 무리 없이 굶어죽을 염려는 덜었다는 것.
싸우고 또 싸웠다. 입구 쪽의 녀석들은 오히려 약한 편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갈수록 더 강한 녀석들이 나왔다. 계속해서 쳐 죽이고 쳐 죽이며 끊임없이 출구를 찾아 돌아다녔다. 외로워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스틸 양을 꺼낼 수도 없었다. 자신 한 몸 지키기도 벅찼기에.
그렇게 싸우고 죽이며 계속해서 기묘하게 얽힌 그쪽 세상을 떠돌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녀석들도 많이 남지 않아서 쫓아다니며 죽였다. 녀석들을 죽여 생명력을 흡수해야 굶어죽지 않을 수 있기에.
그렇게 아펜탈을 온통 헤집은 끝에 겨우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구석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샘.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출구라고. 샘은 정말 이 세계의 가장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아마 알고 찾았어도 쉽지 않았으리라. 팔 층으로 구성된 세계의 가장 아래에 샘물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몸을 담그니 웬 호수로 연결되어 있더군요.”
“음? 그렇게 쉽게?”
스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다면 다른 녀석들도 이미 나와 있을 것 아닌가.
“음… 녀석들은 왠지 그 샘물이 껄끄러운 모양이더군요.”
실제로 시안은 그 샘물이 어떤 작용을 할지 몰랐기에 얼마 남아있지 않던 괴수 녀석을 하나 잡아 그 안에 먼저 던져넣어 보았다.
놀랍게도 자신도, 크로나도 두려워하지 않던 붉은 괴수는 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작은 샘에 녀석을 던져버리자 녀석은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그 모습을 본 시안은 샘 안으로 들어가기 엄청나게 껄끄러웠지만 살짝 손을 담가 본 결과 별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어차피 이제 생명력을 흡수할 녀석도 별로 없어 그 안에 있다가는 굶어죽을 판국이었다.
다행히도 자신은 별 이상 없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고 카르나인에 저장해 놓았던 옷가지를 꺼내 입은 시안은 주변이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스틸을 꺼낸 것이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저도 이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지요. 단지 이곳이 라가오페 씨가 말한… 고향 대륙의 어딘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말을 모두 들은 스틸이 시안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결국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붉은 구체를 닫으려고 했다가 재수 없이 휩쓸려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공간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괴수들과 싸우다가 나온 것이다.
그 표정을 본 시안은 스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되어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 안 보셔도 됩니다. 뭐… 그것도 익숙해지더군요.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더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할지겠지요.”
“아… 그러네. 동생은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보러?”
“네. 그래도… 가족들의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시안을 보며 스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살아있을까? 동생이 안쪽에서 그렇게 오래 싸웠다면…….”
“아, 그건 괜찮습니다. 예전에 제가 잠깐 붉은 구체 안에서 싸우다가 빠져나왔을 때… 스틸 양이 말씀해 주셨었지요? 바깥은 시간이 얼마 안 흘렀었다고.”
“음, 그랬지.”
“저는 그 안에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있었습니다. 아마 그 안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 같더군요. 제 예상대로라면… 이쪽 세상은 그렇게 시간이 많이 안 흘렀을 것 같더군요.”
“그러면 우선은 다행인데… 어떻게 건너가려고?”
라가오페는 라-시안 에서 돈-나시안으로 건너오고 싶어 했지만 건너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괴수들 때문에. 그건 돈-나시안에서 라-시안으로 건너갈 때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틸은 의외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어? 혹시 동생 설마?”
스틸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만약 동생이 그 안에서 죽을 위기를 겪고 벽을 완전히 넘어 라-반더 다음의 경지에 올랐다면… 건너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스틸의 기대감을 배신했다.
“흐아…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무리예요.”
“이런…….”
“하지만 방법은 있지요. 그 안에서 꾸준히 고민하다가 방법을 찾았습니다.”
“오, 그래?”
궁금하다는 스틸을 보며 시안은 입을 열었다.
☆ ☆ ☆
시안과 스틸은 끝없이 펼쳐진 숲을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뭐 이렇게 괴상한 녀석들이 많지요?”
“그러게…….”
조용하던 아펜탈의 출구 근처와는 다르게 그곳을 조금만 벗어나니 정말 별의별 녀석들이 다 보였다.
괴상하게 생긴 개구리 녀석들은 갑작스럽게 입을 쫙 벌리며 괴상한 액체를 쏘아 보내 날아다니던 곤충을 녹여버리고 그 액을 핥아먹었다.
녹색과 검은색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무들은 근처로 가자마자 바닥에서 요상한 덩굴들이 타고 기어 올라왔다.
공통점은 서로를 필사적으로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것. 녀석들은 이 넓은 수림 속에서 끊임없이 생존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며 상대를 잡아먹고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핏 보면 사납기 그지없는 광경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인간들이 살아가기에는 썩 좋은 환경은 아니다.
하지만 이 관경을 본 시안과 스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약한데요.”
“그러게. 무슨 괴수 우리 같은 곳인 줄 알았더니…….”
사실 라가오페에게 이쪽 대륙은 초인이 넘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대충 상상한 대륙의 모습은 이랬다.
어마어마한 대괴수들. 동네 뒷산에 사는 소대가리. 옆집 연못에 사는 망둥이 1호. 애완용으로 키우는 다섯 뿔의 하리쟌.
그리고 녀석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격돌하는 초인들의 한판 승부!
하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은 분명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하겠지만… 그랑-반더 정도 되면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는 녀석들이다. 초인들에게는 정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녀석들.
실제로 괴상한 곤충들이 꼬이는 것이 귀찮았던 스틸이 기세를 내뿜기 시작한 뒤로부터 녀석들은 기겁을 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다.
“혹시 이 나무가 건드리면 초인도 죽일 만한 맹독도 나오는…….”
“…그냥 덩굴식물 아닌가.”
“그러면 저기 있는 늑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사실 무리사냥을 하며 초인도 물어죽이는…….”
키에에엑!
“방금 그 덩굴식물한테 끌려가는데.”
“…….”
“흐음… 라가오페가 우리한테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
워낙 괴리감이 심했기에 스틸이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들에게 그런 허풍을 떨 이유가 없다.
“뭐… 이유가 있겠지요. 라가오페 씨도 고향을 떠난 지 수천 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것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뭐… 이곳에 도착한 지 겨우 하루인데요. 너무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 없다고 봅니다.”
그 말에 스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 이곳에 산다는 주민을 찾아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대략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리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도대체 이 동네가 사람이 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강함과 상관없이 사람이 산다면 어느 정도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러면 계획이 초장부터 꼬이겠는데, 동생.”
“그러게요… 그것참… 급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실마리가 없어서야…….”
시안이 아펜탈 안에서 싸우며 세운 계획은 별것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보였으니까.
건너온 라가오페 씨를 찾아 그쪽과 연결될 수 있는 라-샤르-로아를 건설해 달라고 하는 것.
그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이쪽으로 돌아왔을 것이고, 라-샤르-로아를 만들어낸 그들이라면 하나 더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에 대한 대가야 조절하면 될 일이다. 그곳에서야 자신의 무력이 필요한 일이 많지 않았을 테지만 이곳에서라면 자신의 무력이 필요한 일이 분명 있을 테니.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물론 라가오페 씨가 이곳으로 건너오는 데 성공했는지도,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라-샤르-로아를 만들 수 있는지도 확실하진 않지만 시안은 우선적으로 목표를 귀환으로 잡았다. 막히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애초에 이 넓은 대륙에서 금방 그들을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급하게 마음을 먹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단서가 없다면 곤란하다.
단서를 잡으려면 우선적으로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흔적도 없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1단계부터 막힐 줄은 몰랐기에 시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야 주변을 살피고 대화도 할 겸 천천히 걸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아무 방향으로나 움직일 수 없었다. 라가오페가 말하기로는 대륙은 엄청나게 넓다고 한다. 방향을 잘못 잡아 아예 반대로 가면 시간이 한참 더 걸릴 것이다.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중 스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고 올까?”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잠시만요…….”
그러고 나서 시안은 눈을 감았다. 누가 보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
잠시 후 시안은 밝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운이 좋군요. 이쪽으로 가지요.”
“음? 뭔가 찾았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방향은 찾은 듯합니다.”
그리고 시안은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고 스틸도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한참을 달려 나가다 보니 어느새 나무들의 높이가 차츰차츰 낮아졌고 목적지에 가까워 질 때쯤이 되자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그 언덕을 넘으니 널따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시안과 스틸은 그곳에서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분명 자신들과 유사하게 생긴 사람들이 서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흠… 저거 마차 맞지?”
“생긴 건 그렇게 생겼지만 훨씬 거대하군요. 그 앞에 끄는 짐승들도 말이 아니고.”
수림의 바깥쪽에 거대한 짐승이 여러 마리 서 있었다.
생긴 건 코뿔소를 닮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덩치가 훨씬 더 크다는 것. 한 마리 한 마리가 집채만 한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등에 달려있는 갑주는 상당히 단단해 보여 마치 중갑기사의 장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특이한 점은 그 뒤에 달려 있는 육중한 마차였다. 무슨 재질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를, 작은 저택만 한 마차가 거대한 짐승들의 뒤에 튼튼한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제야 왜 저런 거대한 짐승들이 필요했는지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저만한 크기의 마차를 끌려면 말의 역할을 할 짐승들도 분명 저 정도 크기는 되어야 무리가 없을 것이다.
누가 보았다면 비웃을 수도 있다. 마차란 본디 이동수단의 용도이다. 저렇게 거대하고 튼튼하게 만드느니 작은 마차를 여러 개 끄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 짐을 싣기에도 좋다. 마차 앞의 거대한 짐승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저렇게 육중한 마차를 끌어야 하니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들이 저렇게 줄줄이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마차를 설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차를 보고 있는 시안과 스틸은 그 마차의 설계자를 비웃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에서 기괴하게 생긴 마차는 더할 나위 없이 본래의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어서 막아라!”
“아이와 여성은 무바칼 안쪽으로 집어넣어!”
마차를 중심으로 인간으로 보이는 자들이 둥글게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초록색 난쟁이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난쟁이들은 손에서 기괴한 녹색의 불꽃을 쏘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작용을 하는지 몰라도 장수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맞은편에 칼을 꼬나 쥐고 있는 자들은 그 불꽃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고 있었으니까.
마차는 그런 불꽃을 훌륭하게 튕겨내고 있었다. 대부분이 주위에서 방어를 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날아갔지만 몇 개의 불꽃은 마차를 정확하게 맞혔는데 마차를 두른 장갑에 흠집만 내고 사그라졌다. 일반적인 작은 마차였다면 모조리 불타 없어졌을 것이다.
마차가 안전한 것을 확인한 방어 병력들은 한결 편한 표정으로 주위의 난쟁이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딱 보아도 근접전에는 약해보이는 난쟁이들이었고, 마차 주위의 인간들도 끊임없이 난쟁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쟁이 녀석들 앞에는 기괴하게 생긴 곤충들이 떼를 지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안은 저렇게 생긴 곤충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외부를 뒤덮고 있는 기괴한 외골격을 바탕으로 녀석들이 곤충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장정만 한 덩치를 가진 곤충들은 마스터라고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마차를 이끄는 대장으로 보이는 인간은 그랑-반더 수준으로 보였는데 기괴한 곤충 떼와 난쟁이의 견제 때문에 쉽사리 난쟁이들을 해치우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 수준도 실로 만만치 않아서 기괴한 곤충들과 난쟁이들 역시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압박을 하고 있었다.
시안과 스틸은 우선 상황을 지켜보았다. 당장 급한 것은 없어 보이니. 그리고 구경을 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라가오페 씨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군요.”
“그러게. 다들 수준이 상당한데.”
저들의 수준이 이곳에서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안이 있던 티안 왕국에도 넷밖에 없던 그랑-반더가 저 안에는 당장 둘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 중에도 마스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칼에서 붉고 푸른빛을 뿜어내며 끊임없이 곤충들을 썰어내고 있었다.
시안과 스틸이 흥미롭게 상황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난쟁이 녀석들이 무어라고 웅얼거리더니 갑자기 곤충들 중 일부가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마차 앞으로 향한 것.
녀석들은 빠르게 땅을 기어 이동하더니 마차를 이끄는 거대한 짐승들에게로 다가갔다. 보아하니 짐승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녀석들에게 상처를 입혀 기동력을 상실하게 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를 이끄는 대장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거칠게 칼을 휘두르며 크게 외쳤다.
“리론! 젠장! 어서 라바를 엎드리게 해!”
리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명령으로 인해 시안과 스틸은 앞에 있던 거대한 짐승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차 앞의 짐승들은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육중한 여섯 개의 다리를 배 안쪽으로 말아 넣고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렸다. 라바라는 짐승들이 엎드리자마자 곤충들이 그 위로 달려들어 몸 이곳저곳에 달려있는 날카로운 날을 휘둘렀다.
까득, 까득!
하지만 라바라고 불리는 짐승의 등갑은 생긴 대로 그 방어력이 엄청났다. 그랑-반더의 칼날도 어느 정도 받아내고 있던 곤충들의 날이 이빨도 들어가지 않은 것. 군데군데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엎드려 있는 저 짐승을 죽이려면 하루 종일 갉아도 모자랄 것 같았다.
난쟁이들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곤충 몇 마리만을 남기고 빠르게 포위망을 다시 구축했다. 애초에 목적이 짐승들을 죽이는 것이 아닌, 도주를 방지하는 것이었는지 상당히 기민한 대처였다.
곤충들이 다시 합류하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던 포위망에는 다시 긴박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점 더 난쟁이 쪽으로 우세하게 전투가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난쟁이 쪽은 자신이 없었으면 습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곤충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지만 수림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곤충들이 보충되었다. 그렇기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중심으로 뭉친 무리들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흐음… 동생, 라가오페의 행방을 어느 쪽이 더 잘 알까?”
스틸이 양쪽의 기괴한 대치상황을 보며 질문했고 그 말에 시안은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차 쪽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딱 보아도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인간 종족.
그리고 반대쪽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기괴한 곤충들을 부려 하나둘씩 인간을 잡아가려고 하고 있는 땅딸막한 초록색 난쟁이들.
“뭐… 저 난쟁이들이 라가오페 씨의 이종사촌이라도 되고 라가오페 씨처럼 삼천 살 정도 먹지 않은 이상… 마차의 주인들이 더 잘 알 것 같군요.”
“그래? 그럼 결정 났네. 가자, 동생.”
“그러지요.”
시안과 스틸은 언덕에서 훌쩍 날아올랐다. 시안은 난쟁이 쪽으로, 스틸은 곤충 쪽으로.
☆ ☆ ☆
무바칼을 이끄는 이주민의 호송대장, 파르훔은 탄식을 내뱉었다.
“제기랄… 절반도 오지 않아 이렇게 되다니…….”
그토록 조심하며 이동을 했는데도 결국에는 숲 속에 사는 녹색 난쟁이들인 <그란> 녀석들에게 걸리고 말았다. 평원에 사는 <바르칸> 녀석들에게 걸리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별 차이는 없다.
녀석들의 영역 경계를 신중히 오가며 나아갔는데 길잡이가 실수한 것인지 어느 지점부터 녀석들이 쫓아오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라바는 마차를 끌며 장거리 이동을 하기에는 매우 적합했지만 이동속도가 훌륭한 녀석들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결국 이렇게 끝이 나는가 보다. 목적지로 삼은 로크 자작의 영지까지는 반도 오지 못 하고. 자신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빌어먹을…….’
속으로 빌어먹을 귀족들을 욕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때 하늘 위로 무언가가 지나가며 자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
칼을 거칠게 휘둘러 그란 녀석의 종놈을 토막 낸 파르훔은 급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약 하늘로부터 적의 기습이 날아든다면 방어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파르훔이 하늘을 보았을 때 이미 자신의 머리를 지나간 물체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쿠쾅!
우드득!
까드득!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파쇄음에 파르훔은 하늘을 보던 시선을 급하게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
“에잉, 이 녀석들 가지고는 몸도 안 풀리네.”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상대하던 <그란>의 종속, <안타인>을 거침없이 갈아버리고 있는 기괴한 여자.
위기에서 구출되었지만 파르훔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까. 특유의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모르면 그건 장님이다.
‘제기랄… 귀족이다.’
귀족이 모두 나쁘지는 않다. 선한 자들도 많았고 평민들을 챙겨주는 자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눈앞의 귀족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무도한 귀족을 만나는 것은 눈앞의 그란 무리를 만난 것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위험했다.
게다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안타인들을 툭툭 치며 박살을 내고 있는 여자는 성격이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외모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눈치라는 것이 있다.
눈앞에 있는 여귀족은 분명 파괴를 사랑하는 부류였고, 보아하니 순식간에 다 때려부순 안타인들 가지고는 성에 안 차는 눈치였다.
파르훔은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귀족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날듯이 땅에 내려앉자마자 그란 녀석들을 모조리 기절시킨 남자. 얼굴의 선은 굵지만 더러운 그란 녀석들을 모조리 몰살시키지 않고 기절만 시킨 것을 보니 온후한 성격처럼 보였다. 저 남자가 이 여자를 잘 말려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가르며 등장한 두 명의 남녀가 땅에 내려앉은 지 십 초도 되지 않아 모조리 정리된 전장을 바라보며 파르훔은 전투 때보다 더 긴장을 끌어올렸다. 여기서부터 대처를 잘 해야 한다.
☆ ☆ ☆
“음… 저분은 왜 저리 긴장하지요?”
“글쎄. 여기서는 귀족이 흔한 것 아니었나? 그나저나 동생은 다 살려뒀네.”
“뭐… 저는 여기 이분들과만 볼일 보면 되니까요. 저자들은 관심 없습니다.”
“어이구…….”
스틸은 동생의 성격이 참 신기했다. 너무 강해서 생긴 부작용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았을 때는.
난쟁이들은 재수가 좋게도 위의 두 조건에 모조리 부합했기에 살아남았다.
“중요한 건 저분들과의 대화 아니겠습니까. 우선 가 보지요. 아까 들어보니 말이 통하던 것 같은데.”
놀랍게도 저자들은 어느 정도 왕국어를 기반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과 스틸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대륙에 쓰이던 왕국어는 제국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제국어는 라가오페가 퍼트린 것. 라가오페가 문자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닌 이상 당연히 이곳에서 쓰던 언어를 기반으로 했을 것이다.
빠르게 다가간 시안은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고귀한 분들이시여.”
“아… 뭐… 소개부터 하지요. 저는 시안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물어볼 것이 있어 이렇게 여러분을 찾았습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남자의 말이 멋쩍었기에 시안은 빠르게 자기소개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대화는 통했다. 군데군데 조금 다른 억양이 있기는 했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 이 무바칼을 책임지고 있는 파르훔이라고 합니다. 말씀하시지요.”
파르훔은 생각보다 온건해 보이는 시안이라는 자의 태도를 보고 조금 안심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변태 같은 녀석들은 어디에나 많았으니까.
“음… 이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막상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하는지 정리가 잘 되지 않았던 시안이 버벅거렸다. 다짜고짜 라가오페라는 사람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면 이 사람들이 알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본 파르훔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스틸이 답답했던지 앞으로 대신 치고 나왔다.
“동생, 어차피 싹 다 물어봐야 하는데 뭘 그리 고민해. 거기, 파르훔이라고 했나?”
“네, 말씀하시지요.”
파르훔은 살살 풀리고 있던 긴장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무언가 얼이 빠져 보이는 것이 귀족 같은 느낌이 없었기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는데 남자를 제치고 나온 여자는 자신이 이제까지 보아온 귀족의 모범 그 자체였다.
오만한 분위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듯 온몸으로 뿜어내는 자신감. 게다가 거침없는 행사까지.
“우리가 이곳이 초행이라 말이야.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물어볼 것이 상당히 많은데… 혹시 급한가?”
“아… 그게…….”
“뭐, 급해도 상관없어. 우리도 저 마차에 타고 가면 되니까.”
“마차라니… 무바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생소한 단어에 어리둥절하던 파르훔은 이들이 말하던 마차라는 것이 무바칼을 지칭함을 깨달았다.
“흠… 저걸 무바칼이라고 부르나? 그래, 저거. 보아하니 남는 공간이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좀 타고 가지. 동생도 괜찮지? 어차피 급한 것도 없고.”
“흠… 그것도 괜찮겠군요.”
생각해보니 이쪽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라가오페를 찾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우선 이 세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왕 사람을 찾는다면 이들을 따라가며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으리라.
“괜찮으십니까? 대가로 다가오는 녀석들은 우리가 치워드리지요. 무임승차 할 수는 없으니.”
“그러면 저희야 감사합니다.”
파르훔은 눈앞의 두 귀족들이 너무나도 수상했지만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여귀족은 거절이란 단어를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런 상황에서 거절했다가 무슨 후폭풍이 몰아칠지 두려웠다.
그리고 무바칼을 지켜준다는 제안 역시 거절하기 어려웠다. 목적지까지 반도 가기 전인데 그란 녀석들의 습격을 받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귀족들이 자신을 지켜준다니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동승하는 걸로 하지요. 딱히 자리가 없으면…….”
“아닙니다. 저렇게 넓은데 모실 자리가 없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동 중인 짐을 싣느라 자리가 빠듯했지만 차마 그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까의 전투로 몇 명이 사망했으니 그 자리를 비우고 자리를 재배치해 이들에게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면 된다고 생각한 파르훔은 둘을 우선 무바칼 안쪽으로 인도했다.
무바칼 안쪽으로 들어간 시안은 생각보다 안이 넓고 쾌적한 것에 놀랐다. 짐마차처럼 생긴 외양과는 다르게 내부는 거주를 위한 시설이 잘 설치되어 있었고, 짐 같은 경우는 오히려 천장이나 벽면에 분산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상당히 안쪽으로 들어간 그들은 응접실 용도로 보이는 작은 방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음… 그렇다면 이주민들을 데리고 다른 자작령으로 이동 중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시안은 이곳이 다른 대륙은 다른 대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인이 영지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니. 자신들 대륙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왜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십니까? 아까와 같은 습격이 자주 있는 편이 아닙니까? 위험할 듯하던데요.”
오면서 무바칼 내부를 살펴본 시안은 의문점이 들었다. 내부 시설을 보아하니 단순한 이주용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거주가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이 말은 여차하면 정착하지 않고 떠돌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아까의 습격도 그렇고, 돌아다니기에 별로 안전한 환경이 아니어 보였기에 시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받은 파르훔이 묘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이곳 초행이다 보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바깥의 환경이… 안전하지는 않지요. 오히려 이제까지 한 번만 습격 받은 게 신기할 정도로요. 귀족들이 보호하는 영지 바깥은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귀족들이 보호해 준다니…….’
초인이 인간을 보호해준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 슬슬 이곳이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흠… 보호해 주는 귀족들이 녀석들을 소탕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까?”
시안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까와 같은 수준이라면 그랑-반더까지에게야 위협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녀석들이 던지는 불꽃은 꽤나 위력적이었고 부리고 있던 안타인이라는 곤충들도 상당히 강력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녀석들이 모인다고 해도 초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없다. 여차하면 빠졌다가 다시 박살을 내면 그뿐이니까. 아예 자신들 대륙처럼 보호를 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모를까 자신이 보호하는 영지 바깥에 그런 녀석들이 돌아다니도록 놓아두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시안이 질문을 던졌다. 영지와 영지 사이에 그런 녀석들이 함부로 돌아다니게 놓아둔다는 것이 신기했다.
“당연히 일부러 놓아두지요.”
“으잉?”
“…정말 먼 곳에서 오셨나 보군요.”
“뭐…….”
산속에서 살며 수련만 하다가 귀족이 되는 케이스가 흔하지는 않지만 못 들어본 일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높은 재능을 가졌다면 아크라의 도움 없이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까. 어쩐지 아크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싶었는데 이 두 귀족도 그런 자수성가형인가 보다.
눈앞의 두 귀족들도 그런 부류일 것이라고 생각한 파르훔은 처음부터 모조리 설명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귀족들은 일부러 그 녀석들을 방치합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키워 주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로르발 공작가에서 정한 율법 때문입니다.”
로르발 공작가가 정한 율법.
그것이 이 기묘한 초인들의 대륙에 기현상을 만들어 낸 시발점이었다.
☆ ☆ ☆
수천 년도 더 전, 대륙은 개판 오 분 전이었다.
이유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생긴 기묘한 거리감과 주변의 환경 때문이었다.
대륙은 귀족들이 살기에는 꽤나 편안한 환경이었다.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리쟈 급의 종이었기에 귀족의 경지에 오른다면 로탄 급 종족에게 걸리지 않는 한 목숨을 위협받을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민에게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인간종은 대륙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수는 많았지만 개개인을 놓고 볼 때 결코 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란 같은 종족은 인간을 잡아 내부의 아크라를 빨아 먹고, 외부 껍데기는 자신들의 종인 안타인을 키우는 숙주로 이용했다. 평원에 사는 바르칸들은 단순히 식욕을 채우기 위해 인간들을 사냥하고는 하였다.
그렇기에 평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 대상은 물론 귀족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냉담했다.
<내가 왜 너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인가?>
종족 전체로 볼 때 귀족들이 평민을 보호해야 인간 전체가 부강해질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도 결국 평민 중에서 태어나는 것이니까. 귀족이 될 수 있는 재능은 유전을 통해 세습되지 않는다. 남작을 넘어 자작, 백작 급의 귀족들 자식이라고 하여도 반드시 자작, 백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민에 그치는 경우도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건 종족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귀족 개인으로 볼 때 평민을 보호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위험하고 안 위험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민들에게 얻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믿는 것은 단 하나였다. 세력도, 재력도, 정보도 아닌 오롯한 자신의 강함. 이외의 것은 강함에 딸려오는 물거품과 같다.
강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라-시안 대륙은 아무리 개개인이 강해도 그랑-반더가 최고였다. 수련하여 자신이 초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함을 키울 시간에 세력을 일구는 것이 같은 수준의 강자인 그랑-반더를 압박하기 더욱 좋았다. 자신이 강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고 자신이 강해지는 속도보다 자신의 세력이 강해지는 속도가 더욱 빠르니까. 나라샤 국왕이 좋은 예시이다. 그는 키라인 검공보다도 약했지만 결국에는 키라인 검공보다 강한 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 대륙은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강자 위에 또 강자가 있었다. 평민 위에 남작이 있고 남작 위에 자작, 자작 위에 백작이 있었다. 남작 급이 아무리 세력을 일구어봐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같은 남작 급이었다. 어느 정도 수가 모이면 한 단계 위의 귀족들도 우습게 볼 수 없었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들이 그렇게 항상 오손도손 뭉쳐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을 부하로 두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런 세력으로 어찌 한 단계 위의 귀족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세력은 부질없고 재력은 의미 없다. 귀족들은 자신보다 약한 자를 상대로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고, 반대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한다. 아무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저쪽 대륙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곳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국가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 법이 있어야만 이를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강자들은 남이 세워놓은 규칙 따위는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강제력이 없는 법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법이 없으니 국가도 존재할 수 없고, 약자를 수탈하고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현상을 억제할 아무런 제어장치가 없었다.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했다. 결국에 남는 것은 개인의 강함이고 다른 것은 부질없다. 세력을 형성할 시간에 수련을 하여 한 단계 강해진다면 그 세력을 일군 자를 격살하고 그자가 가졌던 것을 모조리 빼앗아 올 수 있다. 라-시안 대륙에서는 강함이 한계가 있었지만 이곳은 그 한계가 없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항상 개인의 강함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았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배도 좋지만 강함보다 위에 있지는 않았다. 지배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강하기만 하다면.
재능, 노력, 시간, 자신의 경지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
그리고 이 중 평민들이 귀족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래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의 손이 닿는 곳까지는 보호를 했지만 그 이상은 결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자선행위를 하다가는 같은 귀족들에게 밀려나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들의 세력은 차츰차츰 약해져만 갔다. 필사적으로 강해지려고 노력하니 귀족들이야 당연히 강해져 갔지만 새로운 귀족들을 키워 낼 평민층이 나날이 쇠약해져 갔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정도가 심각해지자 귀족들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대륙에는 귀족을 위협할 만한 종족이 거의 없지만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녀석들이 세력을 키운다면 인간 종족은 통째로 쓸려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공작들을 필두로 모인 귀족들은 합의를 보았다.
<귀족들은 손닿는 데까지 평민을 보호한다. 종족 전체를 부강하게 할 의무를 서로 나누어진다.>
모두가 합의했다. 하지만 그 해석이 문제였다.
손닿는 데가 어디까지인가? 서로 합의하에 책임을 나누어 가지기는 했지만 그 책임에 딸려오는 권리가 하나도 없었다. 평민들을 아끼고 보살펴 귀족으로 만든다고 하여도 경쟁자가 하나 늘어나는 것뿐이다. 피붙이도 아닌 자들을 정 하나만 믿고 수십 년을 돌봐주기에는 대륙이 너무 험했다.
당연히 위의 규칙은 유명무실해졌다. 애초에 자신이 능력이 안 된다고 하거나 숨어버린다면 공작가라고 해도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이름을 딴 가문 아래의 인물들만 지키기에 바빴다.
로르발 공작가는 이 현상을 보고 고민했다. 딱히 평민을 감싸고돌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종이 유지되려면 각자 최소한의 무언가는 해야 한다. 그러던 와중 로르발 공작은 기가 막힌 생각을 내어 놓았다.
<너희들이 평민들에게 얻을 것이 없어 그들을 방치한다면 내가 얻을 것을 만들어 주겠다. 이것이 퍼지게 되면 너희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래 있는 자들을 모아 새로운 이능을 만들어 내었다.
평민을 위한, 동시에 귀족을 위한 놀라운 이능.
아크라를 생성할 수 있는 비기 아크라타.
이 아크라타가 평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후 인간 종족 전체에게는 격변이 오게 된다.
드디어 평민에게도, 귀족의 강함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거래의 수단이 생긴 것이다.
☆ ☆ ☆
“평민이건 귀족이건 인간 종족이라면 이 아크라타를 모두 익히고 있습니다. 아크라타에는 두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호오.”
처음 듣는 개념에 시안과 스틸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파르훔을 쳐다보았다.
“하나는, 개개인의 강함을 늘려줍니다. 아크라타를 익히면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본신의 실력이 증가하게 됩니다. 이것이 평민들에게 퍼지게 된 후, 귀족이 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아질 수도 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음? 왜 그렇지요?”
개개인을 강대하게 만들어 주는 로르발 공작가의 이능, 아크라타.
재능과 노력이 중요하다지만 그 아크라타라는 것을 익히면 더 빠르게 강해진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귀족이 되는 비율이 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시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두 번째 효능 때문이지요. 개개인이 축적한 아크라는 같은 아크라타를 수련한 타인에게 양도가 가능합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귀족 계급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요.”
“흠?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이제 귀족들에게도 평민을 보호할 이유가 생긴 것이지요. 그 대가로 평민들은 자신이 키워낸 아크라를 제공합니다. 제공하는 양을 생각하면… 배우기 전과 별 차이는 없지만 그 대가로 보호를 받지요.”
자신의 휘하에 있는 평민들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아크라를 제공받는다. 이 아크라타는 단순한 수련법이 아니었다. 공작가 휘하의 이능 사용자들과 무인들이 모여 만들어 낸, 초유의 비기. 아크라타를 수련한 자들끼리는 아크라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크라는 귀족들의 수련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평민들 개개인만 따지면 정말 병아리 눈물 같은 양이었지만 그들이 모이고 모이게 되니 그 양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평민들 입장에서도 개개인이 강해지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존재가 생기는데 익히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이 아크라타는 귀족과 평민들 사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 지금은 익히지 않은 존재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이를 듣고 있던 스틸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네 말대로라면 네가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귀족들이 놓아줄 리 없으니.”
강함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평민들을 귀족들이 돌아다니게 놓아둘 리가 없다.
그 말을 들은 파르훔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분명 초창기에는 그랬지요.”
아크라타가 퍼지기 시작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사냥에 가까운 평민 쟁탈전이 벌어졌다.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는 자들이니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대우가 좋을 리 없었다. 이제까지는 평민이 필요하지 않으니 귀족들도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필요성이 생긴 이상, 귀족들은 그들을 강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귀족들이 강제하려고 들면 평민들이 반항할 방법은 전무했다.
하지만 로르발 공작가는 이것 역시 예상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규칙을 내어 놓았다.
<개개인이 익힌 아크라를 건넬 선택권은 오롯이 개인에게 있다. 어떤 경우에도 강제할 수 없다.>
아까 말했듯이 강자들은 법이나 규칙 따위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 위에서 노는 강자들이 강제한 규칙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르발 공작가는 지배에 관심이 없을 뿐,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세력이었으니까. 다 필요 없고 공작인 로르발만 나서도 후작 가문 정도는 절단이 난다. 게다가 로르발 공작가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위의 율법을 지키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실제로 그 당시에 위의 규칙을 무시하다가 박살난 귀족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로르발 공작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기가 막히게 그런 귀족들을 찾아내서 패주고 이제까지 그들이 모은 모든 아크라를 빼앗았다.
이후 평민들에게도 선택권이 생겼다. 자신이 수련한 아크라를 제공하는 대가로 보호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이 아크라를 가지고 스스로 강해지는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심지어 자신이 보호받을 귀족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들은 스틸이 혀를 찼다.
“그래서 저런 녀석들이 돌아다녔군.”
“맞습니다.”
위협이 없다면 보호도 필요 없다. 그렇게 되면 평민들이 굳이 귀족들에게 자신이 익힌 아크라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의 강함을 키울 수 있으니. 설령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성격 더러운 귀족 밑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귀족 중에도 성격 좋고 평민들을 챙겨주는 자들의 수가 꽤 되었으니.
그렇기에 귀족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영지 주변의 적대종들을 방치했다. 적대종이 없는 경우에는 들여오는 경우도 흔했다. 보호 영역 주변에 저런 괴수들이 돌아다니니 평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귀족들에게 아크라를 제공하며 보호를 요청했다. 저런 적대종들은 귀족들에게는 간단하지만 평민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에.
덕분에 평민들은 어디로 이동하지도 못 하고 꼼짝없이 귀족들의 보호 범위 내에서만 머무르며 아크라를 제공해야 되었다.
물론 방치하는 건 평민에게만 위협이 되는 나리쟈 급 종족까지만이다. 귀족들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로탄 급 적대종족들은 힘을 모아 말살했다. 그리고 나리쟈 급 종족이라도 힘이 커져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귀족들끼리 힘을 모아 청소를 했다.
그렇게 각 영지와 영지 사이에는 평민들을 위협하는, 하지만 귀족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없는 적당한 수의 나리쟈 급 적대종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로르발 공작가는 너무 얽매어 놓으면 터질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이런 것까지는 억제하지 않았다. 평민들의 생존률은 극적으로 상승하게 되었고 귀족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강해졌기에 결과적으로는 윈윈이었다. 인간 종족은 그 후 빠르게 그 힘을 불려 나가며 적대종족과의 균형을 유지해 내는 데에 성공한다.
로르발 공작가가 내어 놓은 하나의 이능과 하나의 율법 이후 평민과 귀족이 공존하는 기묘한 체계가 완성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시안은 왜 이렇게 이동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살던 곳의 귀족이 어지간히 성격이 더럽나 보군요.”
“…….”
파르훔은 쓰게 웃는 것으로 그 대답에 대한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 ☆ ☆
위의 기묘한 평형상태에서의 치명적인 단점.
<귀족들의 성격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평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은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 곳은 결국에는 아크라를 공급해 줄 평민들을 찾아다니던 귀족들이 정착하게 되니까. 한 도시에 여러 명의 귀족들이 모이게 된다면 귀족들이 평민에게 함부로 하지 못 한다. 다른 귀족들에게 아크라를 몰아줄 테니까. 같은 도시에 자신보다 강해지는 녀석이 나타나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로르발 공작가도 귀족이 평민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의 작은 보호령 같은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사람의 수가 적어 다른 귀족들이 별로 탐을 내지 않을 만한 곳이 있다. 이런 곳은 두 종류의 앞길이 놓이게 된다.
귀족의 보호 없이 계속 버텨보다가 버티지 못하고 목숨 걸고 가까운 인근의 귀족령을 찾아 떠나든가.
아니면 이런 작은 보호령도 신경 쓰지 않을 귀족을 기다리든가.
파르훔이 있던 라울 남작의 영지는 두 번째 케이스이다. 하지만 파르훔이 있던 작은 보호령에 찾아오는 자들은 보통 두 부류이다.
하나는 적은 양의 아크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작은 영지의 평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량한 귀족들.
다른 하나는 아예 다른 귀족들과의 아귀다툼을 피해 조그만 지방에서 왕 노릇을 해보겠다는 귀족들.
당연히 압도적으로 두 번째 부류가 많았고, 파르훔의 보호령도 확률의 압박을 피해 가지 못 했다.
파르훔이 머물던 보호령을 보호하는 라울 남작은 보호는 해주지만 아크라를 로르발 공작가가 정한 선 내에서 착취에 가까울 정도로 뽑아 갔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어차피 아크라는 보호에 대한 대가로 제공하는 것이니.
문제는 라울 남작의 성격이 아주 더럽다는 것. 라울 남작의 경우 제 머리 위에 누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아예 다른 귀족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지방까지 일부러 내려온 케이스였다. 파르훔이 살던 곳은 별로 중요한 것도 없고 근처에 험지, 아펜탈이 있었기에 다른 귀족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라울 남작은 오자마자 보호보다는 평민들 지배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보호는 해 주었지만 반반한 평민들은 모조리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고 이곳저곳 부려먹으며 수련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충실하였다.
이런 케이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련을 거듭하여 간신히 귀족이 된 후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겠다는 심리로 평민들을 함부로 다루는 귀족은 남작들 중에는 꽤나 흔했다. 문제는 그런 자가 파르훔의 영지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의 딸까지 끌려가게 될 위기에 처한 파르훔은 평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선택했다.
<이주>
평민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지만, 보호령 주변에 가득한 적대종들 때문에 쉽사리 발동할 수 없는 권리.
하지만 파르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람을 모아 이주를 선택했다. 라울 남작은 떠나는 이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번 갈 테면 가보라는 식으로.
“딸이 아니더라도… 이주를 결정했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아크라를 가져가는 정도가 슬금슬금 늘어나서 쓰러지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상단에서 쓰이는 무바칼을 개조하여 이동에 떠난 것이지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로크 자작령은 그나마 낫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 습격을 당하고 시안 님과 스틸 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허… 참… 어딜 가나 비슷하군요.”
시안은 혀를 찼다. 자신이 살던 곳은 라-반더와 그 이하는 완전히 구별되어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이곳은 평민과 귀족이 같은 종족이고 서로를 인간으로 본다고 하여 더욱 살기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를 인간으로 보니 더욱 상황이 안 좋았다.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애초에 종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강함의 차이가 너무 나는 것이 문제였던 것.
로르발 공작가라는 곳이 묘수를 내놓지 않았으면 지금쯤 상황은 더욱 안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귀족들의 보호를 받지 않는 마을 같은 것은 없나요? 평민들끼리만 뭉쳐 산다거나…….”
시안이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초인들보다 약할 뿐이지 평민들도 꽤나 강했다. 만약 눈앞의 파르훔 같은 자들이 좀 더 뭉치고 성벽을 지어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만해 보였다.
그 말에 파르훔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귀족의 보호 없이는 평민들끼리 뭉쳐도 오래가지 못 합니다. 인간을 노리는 적대종들이 자신들도 힘을 모아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을은 무리입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지요. 시안 님 말대로 평민들끼리 뭉쳐 사는 지역도 있습니다만… 그들도 마을을 짓고 살지는 못 합니다.”
“흠? 왜 그렇지요?”
“지저룡들 때문이지요.”
대륙 아래를 돌아다니는 거대한 암석룡들은 딱히 인간에게만 재앙이 아닌, 모두에게 재앙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덩치가 커지는 이 녀석들은 마을 밑에 구멍을 뚫어놓아 마을을 모조리 무너트린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가끔은 마을 위로 올라와 집 같은 것들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그런 주제에 강자에 대한 경계심이 어찌나 큰지 귀족들이 머무는 보호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귀족들 입장에서 기특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었다. 평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아크라의 손실이 생기는 것을 원천 방지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평민들끼리 모여 사는 지역도 무바칼을 타고 다니며 이동하며 거주하고는 했다. 유목민족처럼.
“그것참…….”
“뭐… 이건 저희 근방 지역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지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 환경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요.”
그 이후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았다. 혹시나 해서 라가오페 일행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평민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들이 향하는 자작령으로 향하기로 했다.
파르훔이 돌아간 후 시안과 스틸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귀족이란 자들을 만나 보아야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영 정보가 부족하니… 이곳이 구석 지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파르훔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남작의 보호령에 있어 많은 것을 알지 못 하지만 후작이나 백작의 보호령 정도 되면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이동하는 물류량이나 인원들의 숫자도 상당하다고 한다.
“우선 이자들이 가는… 로크 남작이 있다는 곳으로 가 보자고. 그나저나 궁금하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될지.”
파르훔의 말을 들으면서 스틸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하나였다.
<자신은 이곳에서 얼마나 강할 것인가.>
자신의 대륙에서도 눈앞의 시안을 제외하면 자신은 초인들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했다. 라가오페는 말할 것도 없고 리비아스보다도 자신이 우세했다. 그로인 아저씨와는 동수였고.
하지만 이곳은 듣자하니 초인이 넘치고 넘치는 동네. 계급까지 나누어 놓을 정도면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만나 보면 알겠지요.”
“흐음… 시안 동생은 마음이 편해 보이네. 궁금하지 않아? 자신이 어느 정도 되는지?”
듣자하니 이 대륙에는 강자도 많고 위험한 종족도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안전제일주의인 시안은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도 묘하게 마음이 편해보였다.
‘설마 그 안에서 싸우면서 성격이 바뀐 건가…….’
하지만 스틸의 기대를 시안은 무참히 저버렸다.
“하하. 예전에 라가오페 씨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펜탈이라는 곳은 자신들에게도 위험하기에 험지로 정해졌다고.”
“음… 그랬었지.”
“근데 저는 그런 험지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뭐 이곳에서도 저는 강한 편이겠지요.”
“…….”
“그리고 저는 라가오페 씨만 찾아서 조용히 이곳을 떠날 예정인데 뭐 큰일이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에잉…….’
시안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안 스틸은 한숨을 쉬었다.
☆ ☆ ☆
무바칼을 타고 이동하는 일정은 생각보다 훨씬 평온했다. 스틸은 너무나 심심했기 때문에 아예 기척을 싹 감추어 버리고 그란이나 바르칸이라는 녀석들을 유인해 보려고 했고 실제로 바르칸이라는 녀석들을 두세 번 정도는 낚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몇 번 갈려나가자 녀석들 사이에서 소문이 쭉 퍼졌는지 더는 습격해오지 않았다. 그란이라는 녀석들은 인간고기에 환장을 한다길래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특한지 더는 달려들지 않았다.
심심해진 스틸의 시선을 끈 것은 이곳 대륙 모두가 익히고 있다는 아크라타였다. 스틸도 초인인데 강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아크라타를 가르쳐 달라는 스틸의 말에 파르훔은 거칠 것 없이 승낙했다. 어차피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크라타는 대륙에 사는 인간이라면 모조리 알고 있었으니까.
“아크라타를 익히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건 수련법이라기보다는 이능에 가까운 종류이니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손을 줘 보시겠습니까?”
“동생, 그래도 괜찮아?”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후후. 외간남자에게 그러면 질투할까 봐 그러지.”
“걱정 말고 진행하시지요.”
“그래? 그러면… 자, 여기.”
스틸은 장갑은 이미 니츠마탄에 넣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고운 손을 내밀었다. 크고 길게 뻗었지만 희고 가늘기 그지없는 손. 이런 손에서 그런 강대한 파괴력이 나왔다는 사실에 파르훔은 다시 한 번 전율했다.
파르훔은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무언가가 건너갈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크라입니다. 아크라타의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거부하지 말고 우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파르훔은 손끝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파르훔의 몸 내부에서 기묘한 흐름이 일더니 무형의 무언가가 스틸에게로 넘어왔다. 아무런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청량감이 느껴지는 그 기운에 스틸은 별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게 아크라라는 건가?”
“네. 아크라타 근본을 이루는 요소이지요. 이제 끝났습니다.”
“벌써?”
“네. 중요한 것은 그 아크라를 건네어 받는 것이니까요. 사실 아크라타라는 뜻은 그 아크라를 관리하고 키우는 법이라는 뜻이지만… 아크라들이 스스로 자라나기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방금 건너간 녀석들이 씨앗 역할을 하며 몸에서 불어날 것입니다.”
“흐음… 특이하네.”
과연 스틸의 몸속으로 건너온 씨앗이라는 것들은 순식간에 스틸의 몸 안을 돌아다니며 그 기운을 키우더니 분열하며 스틸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스틸은 몸 안에서 이 녀석들이 하는 작용을 관조했다.
아크라는 스틸의 몸 안에 돌아다니는 강대한 기운을 먹고 천천히 그 수를 늘려갔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 녀석들은 고작 기생충 취급만 받고 끝났을 것이다.
아크라의 진정한 효능은 그다음부터이다. 대상자의 기운을 먹고 자라난 이 무형의 씨앗은 두 가지의 효능을 지닌다.
하나는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여 사용자에게서 먹어치운 그 이상의 기운을 공급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크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능을 기반으로 사용자의 육체를 강화시켜 주는 것.
스틸은 잠깐 동안 아크라를 살피고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고 감탄했다.
“대단하군. 처음에 어떤 식으로 기운을 건네준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이해가 가네. 이 아크라라는 씨앗을 건네어 줄 수 있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아크라 자체도 상당한 기운을 담고 있으니까요. 일정 기간 동안 개개인의 몸에서 건너갈 수 있는 아크라의 양에 한계가 있기에 많은 양이 건너갈 수는 없지만… 수많은 평민에게 이를 거두어들인다면 무시할 수 없는 양이 되지요.”
“흐음… 그러면 이 아크라라는 건 무한정 몸속에 쌓을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파르훔은 고개를 저었다.
“개인의 경지에 비례해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크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크라는 넘어온 지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기운은 그대로 상대의 몸에 남지요. 그걸 어느 정도 소화해 내는지는 귀족분들의 재능에 따라 다르다고 하더군요.”
“흐음… 이거 수련하면 빨아들이는 기운이 더 많아지고 그러는 건가?”
스틸이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처음 배운 자신도 이 정도 효과를 본다면 충분히 시간을 내어 수련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파르훔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이능에 더 가까우니까요. 아크라타를 능숙하게 활용한다고 하여 아크라의 효율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히 본인의 실력에 비례해 아크라타의 효율이 올라가지요. 아크라타는 수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자의 능력에 비례하여 그 육체를 기반으로 스스로 생성되지요.”
그 말에 스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예전 성직자들에게 받았던 버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체내의 기운을 늘려주고 육체를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파르훔은 아직 경지에 오르지 않아 모르고 있었지만 이 녀석들은 끊임없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체내계수를 미약하게나마 변화시키는 것 또한 돕고 있었다.
“이거 대단한데.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 낸 거지… 아무래도 라가오페가 없던 동안 뭔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시안 너도 손 한 번 내밀어봐.”
“음… 어떻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기본이지.”
자신 있게 말한 스틸은 시안을 재촉했다. 그 말에 시안도 혹해서 손을 내밀었다.
시안의 손을 잡은 스틸은 자신의 몸에서 키운 아크라를 보냈다.
그리고 몸 안으로 넘어오는 아크라를 살피며 시안은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