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57화 (58/81)

<57. 보호령>

시안은 몸속으로 들어온 아크라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아크라는 몸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시안은 기대에 차서 지켜보았다. 강해져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으니.

하지만 이윽고 시안은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스틸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생, 무슨 일이야? 잘 안돼?”

“저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되네요. 에잉…….”

시안의 몸속에 들어온 아크라는 기운을 빨아들이려다가 오히려 시안의 몸속을 휘몰아 돌던 피에 모조리 잡아먹히고 말았다. 몇 마리 성공적으로 부화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자신이 강해지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나마 그 녀석들도 모조리 녹아버렸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바이다. 이런 걸로 강해질 수 있다면 좀 편하겠는가.

“흠… 아쉽네.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더 못 구하나… 이거 몸속에서 자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희번덕 눈을 두리번거리던 스틸과 눈을 마주친 파르훔은 찔끔했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이 거기에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시안이 한숨을 쉬며 스틸을 제지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랄 것인데 천천히 가시지요. 들어보니 그 아크라라는 것 자체의 효능도 상당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거대한 보호령의 주인 정도 되면… 거두어들이는 기운도 어마어마하겠군요.”

“이론상 그렇기는 한데… 그런 곳에는 보통 평민들이 많은 곳에는 많은 귀족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비슷할 겁니다. 높은 작위가 있으면 더 많은 양을 가져가기는 하겠지만 말이지요.”

“오호.”

강함의 한계가 달랐기에 신기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이곳 세계가 시안은 매우 신기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와중 저 멀리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흠… 저게 보호령이라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커다란 성과 그 안에 모여 옹기종기 사는 평민들을 상상하던 시안의 머릿속과는 다소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하고 거대한 나무.

어찌나 큰지 암석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의 줄기가 웬만한 성 한 채 규모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방으로 쭉 뻗어 있는 거대한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안력을 돋워 살펴보니 잎사귀 한 장 한 장이 장정보다도 거대했다.

딱히 상서로운 빛이 감돈다거나, 요정이 거주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압도적인 크기의 나무는 존재 자체가 신비로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줄기 하나하나, 잎사귀 한 장 한 장에 깃들어 있는 넘치는 생명력이 저 나무의 웅대함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나무에 신경 쓰느라 보지 못하였는데 나무뿌리 근처, 나뭇잎에 의해 형성된 그늘 안에는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상에… 저게 자작령입니까?”

“네. 저곳이 로크 자작령입니다. 혹시… 저것도 처음 보십니까?”

“…….”

‘도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거지…….’

파르훔은 키큘러스의 나무도 처음 본다는 시안과 스틸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건 스스로 자란 나무인 건가요?”

“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파르훔은 설명을 시작했다.

대단한 이능을 가져 후작 중에도 강대함을 뽐내는 키큘러스 후작. 그리고 그 아래 모여 키큘러스의 보호를 받는 권속들이 자신들의 이능을 융합하고 실험하던 와중 나온 걸작 중의 걸작.

그렇기에 제작자의 이름을 따 이름 붙여진 <키큘러스의 나무>는 아크라와 함께 평민을 보호하고 인간 종족의 세력을 강대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키큘러스 후작가는 이 나무를 독점하고 싶어 했지만 로르발 공작가의 강권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보호령을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에게 이 나무의 묘목을 분양했다. 하지만 만들기 매우 힘들기 때문에 큰 보호령의 순서대로 분배하였기에 파르훔이 머물던 아주 작은 남작령과 같은 경우는 묘목 없이 보호령을 건설하는 경우도 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평민은 구할 수도 없고 구해도 키울 수도 없다.

하지만 키큘러스의 나무는 귀족이 일정 크기 이상의 보호령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묘목이다. 보호령을 만들려고 하는 귀족의 기운과 그 아래 살아갈 평민들의 기운을 기반으로 자라나는 이 나무는 은혜로운 나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단 묘목을 심은 후 귀족의 기운을 불어넣으면 이 나무는 그 기운을 시작으로 맹렬하게 성장을 시작한다. 주위의 산맥과 토지를 먹어치우고 땅 속의 광물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끝없이 자라난다. 그렇기에 줄기가 완전히 성장하고 뿌리를 땅에 내리는 성장의 초창기에는 마을을 지을 수 없다. 지어 봤자 뻗어나가는 뿌리와 쑥쑥 자라나는 줄기에 밀려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일단 뿌리와 기둥이 자라나면 아래에서는 마을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무의 위에서는 줄기가 뻗고 가지가 자라며 잎이 매달리고 열매가 자란다. 묘목에 기운을 불어넣은 귀족의 수준과 수, 그리고 나무에 기운을 공급하는 평민의 숫자에 따라 나무의 크기가 달라지게 된다.

투자되어야 하는 자원이 적은 것은 아니다. 묘목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거니와, 나무는 평민과 귀족들에게 적지 않은 양의 에너지를 흡수해 가니까. 하지만 결코 손해 보는 투자는 아니다.

그 강대하고 튼튼한 뿌리는 웬만한 지저룡의 침입조차 모조리 막아내고, 줄기는 훌륭한 집의 재료가 된다. 어찌나 튼튼한지 귀족들 중에는 저 줄기를 깎아 수련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잎사귀와 열매. 귀족의 기운을 먹고 평민들의 아크라를 흡수하여 자라나는 저 묘목은 어느 수준 이상 성장하면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 기운의 대부분은 거대한 동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지만 일정 부분은 열매를 맺고 잎사귀를 퍼트리는 데 쓰인다.

기운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잎사귀를 달여 먹으면 개개인의 기력을 보강하고 강해지는 데 도움을 주고, 열매의 경우 맛과 영양소가 엄청나 보호령에 사는 평민들이 위험하게 외부로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생존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어떤 의미로는 아크라타보다도 굉장한, 희대의 보물.

아크라타가 인간을 뭉치고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면 키큘러스의 나무는 인간들에게 안정을 제공해 주었다.

“저희도 남작령에 키큘러스의 나무가 있었다면 좀 더 버텨 보았겠지만… 남작령 정도의 크기에 저런 나무는 사치이지요.”

“흠…….”

“저게 없으면 바깥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다녀야 합니다. 아무래도 작물만으로는 모자라니까요. 여러모로 위험합니다.”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보며 감상에 잠겨 있던 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곳까지만 도착하면 정착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에 자신들이 출발할 때 라울 남작이 보여주었던 코웃음을 떠올리며 파르훔은 시안과 스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왜 코웃음을 치나 했더니 그자는 자신들이 가기 전에 걸려 죽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방에서 사냥을 할 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주를 결정했지만 보호령 근방과 이주를 위해 영지 사이의 길은 그 위험도가 전혀 달랐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했다. 아마 눈앞의 귀족들을 만나지 못 하였다면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라바가 이끄는 파르훔의 무바칼은 로크 남작이 보호하는 키큘러스의 나무 아래의 마을 쪽으로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그곳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을에는 집과 같은 건축물들은 지어져 있지 않았다. 단지 지상에 드러나 있는 뿌리 쪽의 연약한 부분을 파내어 동굴처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원시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보니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다. 뿌리라고는 해도 두꺼운 뿌리 가지의 경우 그 두께가 10미터는 훌쩍 넘었기 때문에 굉장히 안쪽이 넓어보였다.

그리고 뿌리라고는 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깨끗하게 관리를 하고 있었기에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마을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시안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자 파르훔이 입을 열었다.

“굳이 재료를 구해 집을 지을 필요가 없지요. 저렇게만 해도 훌륭한 집이 되니까요. 물론 저 안에 살면 키큘러스의 나무에게 기운을 소량 공급해 주어야 하지만… 그 정도는 평상시 생활 중에서도 충분히 회복이 가능하니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키큘러스의 나무에 흐르는 기운들 덕에 육체는 강건해집니다.”

“음… 그러면 파르훔 씨는 그곳에 도착하면 어떻게 살 곳을 마련하십니까? 기존 주민들과 알력이 있다거나… 이런 건 없습니까?”

파르훔은 눈앞의 귀족의 존대가 부담스러웠지만 이런 자들도 있다고는 들은 적이 있기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나무뿌리를 파내어 저렇게 집을 지으면 되지요. 어느 정도 수준이 되지 않으면 파내기도 힘들기에 이주한 사람들만으로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동안 무바칼에서 지내면 되니까요.”

“호오…….”

마을로 진입하기 전 자신들의 대륙에서처럼 무슨 검문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법도, 신분도 없는 동네에서 검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귀족들 입장에서는 평민들 하나하나를 구별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것이고.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저 새로 도착한 평민들이 아크라만 꼬박꼬박 공급하면 그만일 것이다.

무난하게 도착한 시안과 스틸은 파르훔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저 멀리 사라지는 시안과 스틸을 바라보던 파르훔은 근래 가장 특이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존대를 꼬박꼬박 쓰고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들이라니.

‘아… 그러면 하나 더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이런… 뭐 상관없겠지.’

아크라에 대해 중요한 걸 말해주지 않은 것을 깨달은 파르훔이었지만 설마 무슨 큰일이 벌어지랴 싶어 무바칼에 집중했다.

☆ ☆ ☆

파르훔이 말하기를 귀족들은 중간의 줄기 부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줄기 쪽에서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뿌리 쪽에서 줄기로 향하는 기운의 흐름을 보고 눈치챌 수 있었다.

거대한 나무의 크기만큼 광대하게 퍼져 있는 뿌리는 땅 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만 해도 그 면적이 상당했는데 그곳에 빼곡하게 사람들이 들어차 살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감으로 이를 느끼던 시안은 한 가지 궁금증을 더 해결할 수 있었다.

“허… 이런 식으로 아크라를 받는군요.”

“음? 무슨 말이야?”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거든요. 그런 식으로 손에서 손으로 아크라를 건네받는다면 도대체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아크라를 다 받을까 하고요. 주기적으로 평민들로부터 걷어간다고 했는데…….”

“흠, 듣고 보니 그러네.”

아크라라는 것이 어느 정도 허공을 격하고 전달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먼 거리에서 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아크라를 받아가는지 스틸도 궁금했는데 시안은 그걸 눈치챈 모양이다.

스틸이 궁금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이 키큘러스의 나무를 통해 아크라를 받아가는 모양입니다.”

“허… 그런 것도 보여?”

“물론이지요. 뭐… 기둥 깊숙한 곳까지는 안 보이지만 뿌리 쪽에서 기둥으로 흘러가는 흐름 정도는 보입니다. 아마 이곳을 보호한다는 로크 자작이라는 자에게 흘러가고 있겠지요. 그 아래 머무른다는 남작들이나요.”

“무슨 세금처럼 받아가네… 그래도 이런 방식이면 큰 보호령들도 얼마든지 받아갈 수 있겠어.”

아크라라는 것이 하도 특이해서 떠올리지 못 했지만 마치 영주가 꾸준히 영지민들에게서 세금을 걷어가는 것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시안과 스틸은 급한 게 없었기에 구경도 할 겸 뿌리로 이루어진 길을 걸었다. 라가오페를 당장 찾을 길이 막막해지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이런 신세계를 구경할 일이 언제 있겠냐는 생각이 시안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여행 본능을 자극했다. 스틸과 단둘이 돌아다니니 예전 여행을 다니던 추억이 떠올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시안은 뭔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왠지 주변 시선이 우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 착각이겠지, 동생?”

“…….”

현 상황을 명확하게 짚어 낸 스틸의 한 마디를 듣고 시안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어색함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 ☆ ☆

뿌리 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1남 1녀를 본 루피카는 경멸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층민 녀석들 아닌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루피카만이 아니었다. 거리에 머무르던 모든 자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자는 경멸받아 마땅하니까.

귀족들 입장에서야 평민이 거기서 거기이기에 귀족들 사이에서만 계급을 나누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또 계급이 나뉜다. 어딜 가나 서열을 정하길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기에.

딱히 다른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기준은 명확했다.

<얼마나 강한가.>

지극히 명확하고 단순한 기준. 귀족들에게 명확하게 적용되는 이 기준이 평민 계급으로 온다고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약하면 철저하게 무시당했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귀족들보다 더 지독한 면도 있었다.

귀족들이 하는 짓을 본 사람들이 모두 귀족을 두려워하고 귀족을 싫어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귀족들의 횡포를 욕했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귀족을 부러워하고 하루빨리 무력을 쌓고 경지를 높여 귀족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다.

아무리 예술이나 제련, 건축 등에 재능이 있고 한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는다면 무엇하겠는가? 결국 그 모든 대가들을 지배하는 자가 귀족이다.

귀족의 다른 뜻. 지배하는 자.

귀족은 다른 것에 뛰어날 필요가 결코 없다. 오직 단 한 가지, 지배하는 법만 알면 된다. 그리고 이 기형적인 세상에서 지배자가 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무력을 쌓아 경지를 높이는 법뿐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평민들에게도 그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귀족들은 같은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로르발 공작가는 인간종 전체의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 귀족들이 평민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배격했다. 귀족들의 보호의 대가로 제공하는 기운은 귀족이 되는 것에 결정적인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평민사회조차 기형적으로 무력의 강대함을 추구했다. 어차피 먹고사는 것은 키큘러스의 열매가 해결해 주었고, 보호령 안에만 머무른다면 보호는 귀족들이 해주었으니.

키큘러스의 나무가 없는 파르훔의 보호령 같은 경우는 모두 힘을 합쳐 사냥을 하고 함께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동료애가 강했지만 키큘러스와 귀족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자들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무력만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가졌기에 상대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더욱 강했다.

이런 환경과 문화 속에서 약자는 당연히 무시 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재능이 없는 자들은. 만약 평민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귀족들이 제어를 하지 않았으면 진작에 사달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평민들에게 축복이 된 아크라에게는 약자를 알아볼 수 있는 기묘한 특성이 있었다.

<아크라는 아크라끼리 공명한다. 그리고 아크라의 공명을 통해 상대가 지닌 아크라의 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아크라의 양과 질은 철저하게 실력에 비례한다.>

이는 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평민들에게는 다행이다. 보는 눈도 없이 귀족에게 덤벼들다가 단번에 목이 날아가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으니까. 귀족들이 다가오면 평민들은 기절할 정도로 강한 아크라의 공명을 느낀다. 기세를 감추면 귀족 간에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크라의 공명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능이 없는 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허장성세조차 먹히지 않으니. 인간은 외부의 적이 있으면 단단히 뭉치지만 일단 안정적인 환경에 놓이면 우선적으로 편을 가르고 계급을 가른다. 그리고 귀족들의 보호 아래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한 평민들 입장에서 공명하는 아크라로 명확히 구분되는 약자들은 맛 좋은 먹잇감이었다.

체내에 아크라가 미약한 약자들은 둘 중 하나였다. 재능이라고는 정말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장애인이거나, 혹은 자신은 꿈이 있다고 주장하며 무력이 아닌 다른 길을 추구하는 샌님 자식들.

후자의 비중이 더 높았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다. 핵심은 둘 다 짓밟기 좋은 먹잇감들이라는 것이니까. 귀족들도 아크라의 수급에 별 기여를 하지 못하고 열매만 축내는 저런 자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며시 부추기는 경향도 있었다. 본보기를 보여야 평민들이 열심히 경지를 높여 아크라를 생산해 내는 데에 기여할 것이니까. 꿈꾸는 샌님들은 귀족들 입장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마초 같은 환경에서 샌님들은 하층민이라고 무시당했고, 실제로 강대한 부모를 두지 않은 자들은 가족 통째로 보호령의 가장 바깥쪽 구역으로 밀려났다. 저들은 보호령에 기여를 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꿈만을 좇는 벌레들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대부분 린치가 두려워 중심부 쪽으로는 발걸음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크 보호령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대로에 그런 하층민들이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층민이라는 증거는 명확했다. 눈앞에 보이는 1남 1녀에게는 아크라의 공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반반하게 생긴 여자 쪽에서는 살짝 공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준이 미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아크라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는 것처럼. 게다가 남자는 한 술 더 떴다. 남자에게서는 전혀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루피카는 이런 벌레 녀석들을 고분고분 놓아둘 정도로 성격이 좋은 편이 되지 못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도.

다른 녀석들은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럴 때 행동력 있는 사람이 나서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루피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 뒤로 실실 웃으며 자신의 친구들이 뒤따랐다.

“거기 하층민들, 거기 서봐라.”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 넷을 보고 시안과 스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던 대륙에서는 딱 보아도 특이해 보이는 조합의 그들을 건드리는 굳이 먼저 건드리는 자들은 없었다.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접근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며, 그것도 개무시를 하면서 다가오는 자들을 만난 경우가 시안은 거의 처음이었기에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옆의 스틸은 더 했다. 미모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훤칠한 데다 누가 보아도 한 수 익히고 있을 것 같은 탄탄한 외모. 게다가 거침없는 언행은 그녀를 건드리려는 자들을 한 번 더 조심하게 했다. 평생 자신의 앞에 있는 녀석을 으깨며 살아온 스틸에게 이런 도발적인 언행을 하는 자들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신선한 감정에서 나온 호기심이 지금 저들을 사지 멀쩡하게 서있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층민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군요.”

“그러게.”

로만 백작가의 2공자. 그리고 타란 왕국의 국왕.

하층민과는 자못 거리가 먼 생활을 살아온 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단어였다.

“흐음… 사는 대륙이 달라서 기세나… 이런 걸 느끼지 못 하는 걸까요?”

아무리 잘 감추고 다닌다고 하여도 스틸 양에게 다져질 수도 있는 자들을 위한 배려로 어느 정도의 기세는 항상 흘리고 다니는 시안이었는데 저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글쎄…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엄청 확신하고 있는 것이… 뭐가 또 있는 거 같은데. 뭐 천천히 물어보면 되겠지. 후흐흐, 쟈그론 그 아이가 떠오르는데.”

스틸은 엄청 신난 표정으로 장갑을 손에 꼈다. 저기 서 있는 녀석들은 자신들 대륙으로는 그랑-반더 정도는 되어 보였다. 아마 예전에 스탄탈 꼬맹이가 소개시켜 준다고 데리고 온 쟈그론이라는 꼬맹이 정도. 그 정도라면 장갑을 써도 힘을 빼고 치면 신나게 뚜드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본 시안은 스틸을 뒤에서 붙잡았다. 그리고 잽싸게 장갑을 빼앗아 들고 라가오페가 준 금속막대를 꺼내 스틸의 손에 들려주었다.

스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아, 뭐야… 동생. 이거 써보진 않았지만 타격감이 장갑보다 별로일 것 같은데.”

“그 장갑을 타격감이 나올 때까지 쓰게 되면 이 키큘러스라는 나무에 비료만 주는 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도 부탁하러 온 처지인데 적당히 하시지요.”

“어머, 동생. 시체 만들 생각은 없었어.”

“…….”

“에휴, 알았어. 동생 선물을 열심히 쓰려는 내 진심이 느껴지지 않나 봐.”

“다치지 말라고 드린 겁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보다는 즐거웠는지 스틸은 팔에 들린 금속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며 네 명의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루피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더니 뒤의 동료들을 보고 웃었다. 아크라의 공명도 없는 녀석들이 배짱을 부리는 것을 보니 귀엽기까지 했다. 뭔가 사라졌다 없어지는 것 보니 재주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까짓 것, 칼질 앞에서는 재롱에 불과하다.

“야, 아까 보이던 저 장갑은 내 거다.”

“흐흐. 그러면 내가 여자 먼저 써도 되지?”

“야… 치사하게.”

“난 남자가 더 좋아. 크흐흐흐… 너네들끼리 싸워.”

티격태격하던 네 명 앞으로 도착한 스틸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는 여자의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힌 루피카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혹시 이런 여식을 가진 남작이 로크 보호령에 살고 있냐고.

남작의 딸 정도 된다면 자신의 꿈을 좇는다고 하여도 무시당할 위치는 아니다. 건드렸다가는 당장 남작이 달려와 곤죽을 내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뒤의 셋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귀족에 대한 정보였다. 특히 귀족이 아끼는 주변인물들. 귀족이야 자신들이 건드릴 수도, 건드릴 일도 없지만 잘못해서 귀족이 아끼는 평민을 건드리면 사지가 찢겨나갈 수도 있으니.

눈앞의 여성은 기억에 존재하지 않았다. 큰 보호령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남작 넷과 자작 하나가 전부이니.

동료들의 태도를 본 루피카는 다시 자신감을 찾고 눈앞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흐흐. 미친년이었구나. 공명도 없는 년이 이리 당당한 태도라니. 부모님이 바깥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가르쳐 주지 않으시던?”

“흐음… 내 부모님이란 작자들은 형제자매들 손에 목이 달아났는데. 예전에 내가 살던 곳은 바깥보다 집 안이 훨씬 더 위험했거든. 그나저나 공명이라… 너희들 판단의 근거가 그것인가 보구나.”

공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이 녀석들에게 천천히 물어보면 된다. 예전의 더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 녀석들을 위해 친절하게 장갑을 꺼낼까 고민했지만 시안 말대로 낯선 대륙에서 시작부터 거하게 사고 칠 필요는 없기에 스틸은 막대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이란 자들이 가르쳐 준 것이 있기는 하지.”

“음?”

“좋은 칼 놔두고 왜 입을 쓰냐는 것 말이야. 내 평생 신조지.”

말을 마친 스틸은 눈앞에 있는 녀석의 이마를 그대로 뚜드려 깠다.

빠아악!

“끄아아악!”

“음?”

스틸은 예상외의 결과가 나오자 의문의 표정을 띠었다. 자신은 분명 녀석의 이마를 깨트려버릴 생각으로 후려쳤다. 앞의 녀석은 기절시켜 놓은 후 나머지 세 놈을 다져놓고 나중에 이 녀석이 깨어나면 공명이 무엇인지 물어볼 생각이었기에.

하지만 예상과 달리 녀석은 기절하지 않고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고 있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자신이 할 리는 없으니 원인은 동생이 준 막대에 있다.

“후후.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었나 보네. 한번 써보고 판단할까.”

무기의 효과를 알아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휘둘러보는 것이다.

뜻밖의 재미를 얻게 된 스틸은 기분 좋게 웃으며 뒤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세 명을 향해 막대를 휘둘러 갔다.

“흐음… 그러니까 몸속에 있는 아크라가 서로 공명한다, 이거지?”

스틸은 몸속을 돌아다니는 이 쪼그만 녀석들이 별걸 다 한다 싶었다. 그런 기능까지 있다니.

“…그렇습니다.”

“과연… 그래서 너희들이 이렇게 용감했구나. 남의 가정교육까지 들먹이면서.”

“…….”

루피카는 멋대로 주둥이를 놀린 과거의 자신을 패 죽이고 싶었다. 과거의 자신도 지금 자신의 꼴을 본다면 기꺼이 맞아 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러면 계속 피곤하겠는데. 여기 사람들은 생각보다 아크라 라는 걸 엄청 믿는 모양이네.”

하긴 대륙에 쓰지 않는 인간이 없고 항상 공명하며 그 수준을 가르쳐 준다면 그걸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도 원래 인간이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되니까.

“스틸 양… 그렇게 즐겁다는 표정으로 피곤하겠다는 소리 해보아야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머? 아니야, 동생. 난 평화를 사랑하는데 이러면 계속 날파리가 꼬일 거 아냐. 동생은 아예 아크라 자체가 몸에 없고.”

“그래도 아크라는 몸에 넣어두시지요. 강해진다는 데 굳이 그렇게까지 몸 바깥으로 배출시키려고 하지 마시고.”

“…들켰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손끝으로 모아서 꺼내려고 하면 누구나 눈치챕니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몸 안의 아크라가 공명하여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 순간부터 스틸은 얼마 되지도 않던 몸속의 아크라를 조심조심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 아마 일반인 연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시안은 스틸이 그런 개미지옥 놀이를 하게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에잉… 그래. 강해진다는 데 몸 안에 좀 넣어두지, 뭐. 그래도 이게 내 수준까지 자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는데. 후후.”

아크라는 자라는 속도에 한계가 있는지 스틸의 몸속에서 기운을 먹어치우며 천천히 분열하고 있었다. 아마 스틸 양 본연의 수준에 해당하는 공명이 나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스틸도 그걸 깨달았는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후후. 동생,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라고. 그리고 차라리 약해보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이곳 수준이 아직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다 까발려지면 별로 좋을 건 없잖아.”

“…….”

그 말이 옳기는 했지만 스틸 양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건 원숭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를 보호한다는 영주는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안 나오나?”

“그러게요. 찾아가는 수고를 덜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뿌리에 나 있는 잔털에 네 명의 사람이 매달려 있는 데도 나와 보지 않다니.

“그냥 평민들 신경을 많이 쓰지 않나 본데.”

“계속 가 보지요. 그래도 재밌는 사실을 많이 들었으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과 스틸은 다시 키큘러스의 기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기둥에 서 있던 로크는 갑자기 발생한 아크라의 진동을 느끼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키큘러스에 기운을 불어넣은 귀족은 그 보호령 내부에서는 아크라의 흐름에 매우 민감해진다.

그리고 그쪽 방향을 본 로크 자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자신이 느낀 아크라의 진동은 저 녀석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찌나 야멸차게 두들겨 패는지 보고 있는 자신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전신을 골고루 다져놓고 있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게다가 저 몽둥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뚜드려 패는데 맞고 있는 놈들은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만 계속 내지를 뿐.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것이다. 평민끼리의 분쟁이야 흔한 편이니. 죽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 없다. 하지만 두들겨 패는 쪽에서 아크라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로크 자작의 신경을 자극했다.

게다가 저 손놀림과 속도. 봐주고 있다는 걸 감안해도 자신의 아래가 결코 아니었다. 아크라의 공명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로크 자작은 장님이 아니었다.

‘백작이다. 게다가 성격도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군… 저런 자들이 왜 우리 영지에…….’

여자는 후작 급은 아닌 것 같지만 백작 중후반 정도의 수준으로 보였다. 자세한 건 붙어봐야 알겠지만 아크라가 없어도 손놀림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지금 자작이나 남작들은 몰라도 백작들은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이 시기에 자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변방 자작 급 보호령까지 올 리 없다. 게다가 아크라까지 없다니.

로크 자작은 그 두 가지를 조합하여 판단을 내렸다.

‘자수성가형이군… 그나저나 저 경지에 오를 때까지 어찌 참았지……?’

가끔 그런 자들이 있다. 놀라운 재능을 타고나 아크라의 도움이 없이도, 귀족의 보호 없이도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적대종들을 물리치며 귀족의 경지에 오르는 자들이.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있었지만 아크라를 거부하고 귀족의 지배와 보호를 거부한 채로 살아가는 평민들의 후손 중 가끔 그런 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자들조차 보통 남작의 작위에 오르면 몸이 근질근질하여 돌아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평민이 귀족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그 신세계를 맛보고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물론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까불다가 쳐 맞는 건 그다음 문제이지만,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어디에 틀어박혀서 수련만 했다는 이야기를 로크 자작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로크 자작은 혹시 모를 사태에 자신의 아래 있는 남작들을 불러들였다. 혹시 모르지만 만약 싸울 것이면 기둥의 안쪽에서 싸우는 게 나았다. 괜히 바깥에서 싸우게 되면 평민들이 휩쓸려 귀중한 아크라 수급원들이 쓸려나갈 수도 있고 나무줄기의 안이라면 아크라의 도움을 받아가며 싸울 수 있으니까.

보호령 안에서 싸우는 보호령의 주인과 가신들은 그렇지 않은 귀족에 비해 훨씬 많은 어드밴티지를 가진다. 저 여자의 무력을 보니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는 것이지만, 정체불명의 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 우선 대비를 하는 것이 옳다.

‘그나저나… 저 녀석들, 이번 달 아크라 수급은 면제해 줘야겠군. 공을 세웠어. 아니, 맞은 걸 보니 한 달로는 좀 모자라군… 한 석 달?’

저놈들이 두드려 맞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자들을 함부로 대했을 것이다. 아크라의 공명이 느껴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저 녀석들이 먼저 사고를 쳤기 때문에 자신도 미리 그에 걸맞은 대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기특하게 생각한 로크 자작은 저 네 녀석의 아크라 수급을 면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깥에 순찰을 나가 있는 하나를 제외한 남작 중 나머지 셋을 불러들였다.

☆ ☆ ☆

캬르륵. 캬륵.

용맹한 그란족의 전사인 쿠쿠루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 다 잡았던 사냥감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희멀건 녀석들은 먹으면 맛도 좋고 몸속에 기묘한 기운을 키우기 때문에 힘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평소에는 기묘한 나무에 숨어 살기 때문에 찾기도 쉽지 않다. 오랜만에 나무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는 정신 나간 녀석들이 있길래 기분 좋게 덮쳤고 실제로 거의 성공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들은 모조리 기절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힘들게 키운 안타인 녀석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다.

캬륵!

그때 일을 떠올렸더니 다시 기분이 안 좋아진 쿠쿠루는 자신이 타고 있던 안타인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안타인의 숫자가 모자라면 언제 평원에 있는 바르칸 녀석들이 자신이 맡은 구역을 밀고 들어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빠르게 잃어버린 안타인의 숫자를 복구할 필요가 있다. 구역을 빼앗기게 된다면 족장 녀석이 열 받아서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 들어오지 않는 수림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수림 안쪽은 먹을 것도 별로 없고 기묘한 기운 때문에 영 찝찝해서 들어오기 싫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이 안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숙주를 구해 안타인의 숫자를 회복해야 한다.

캬르르륵. 캬륵.

안타인을 부려 빠르게 사냥을 하고 괴수들을 사냥하던 쿠쿠루는 이곳의 느낌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오면 기묘한 느낌이 강해져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케륵?

쿠쿠루는 의아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면 오히려 좋은 것이다. 평소에는 그 기운이 걸려 깊게 들어가지 못 했지만 이렇게 되면 더 깊숙하게 들어가 먹을 것을 더 많이 구할 수 있으니. 족장 녀석은 평소에 이 근처로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먹이를 구해 가지 않으면 가장 먼저 자신의 목을 칠 녀석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부려 열심히 사냥을 하던 중 사냥감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할 장소를 찾던 쿠루루는 작은 호수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호수인지 샘인지 모를 작은 크기의 물가에 자리 잡은 그들은 사냥감을 분류하고 안타인에게 먹으라고 던져주며 장난을 쳤다.

캬르르륵! 캬르륵!

퍽!

눈치도 없는 부하 녀석들이 좋다고 물가에서 물을 마시다 첨벙거리는 것을 보자 심사가 뒤틀린 쿠쿠루는 장난을 치던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발에 걷어차인 녀석은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호수에 빠져버렸다.

캬륵! 캬르륵!

그 꼴을 보며 주변에 앉아있던 녀석들이 고소하다는 듯 크게 비웃었다. 한데 이상했다. 물이 깊지 않은데 빠진 녀석이 나오지를 않았다.

케루룩?

이상함을 느낀 쿠쿠루는 직접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빠진 녀석을 건져 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얕은 곳에서 익사할 리 없을 것 같지만 그런 멍청한 녀석이어도 나쁘진 않다. 안타인에게 먹일 수는 있으니까. 시체라도 꺼내 와야 한다.

그렇게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던 쿠쿠루는 갑자기 발밑이 확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지만 쿠쿠루는 침착하게 숨을 참고 허우적거리다가 갑자기 발이 땅에 닿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물 바깥으로 몸을 일으킨 쿠쿠루는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섬뜩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케루룩!

당황해서 다시 물속에 몸을 담그니 방금 느꼈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평온을 찾을 수 있게 된 쿠쿠루는 주변을 살폈다. 옆에 보니 아까 빠졌던 얼빠진 녀석도 옆에서 자신처럼 몸을 낮추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사방을 메우고 있는 붉은 대기가 기분 나쁜 느낌의 근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쿠쿠루는 다시 샘물에 몸을 담그려고 했다. 아마 올 때처럼 하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옆에 있는 얼빠진 녀석이 자신을 불렀다.

케루루룩.

무슨 일인가 싶어 짜증을 내며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이 샘물 바깥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엇인지 궁금해져 그곳을 본 쿠쿠루는 녀석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불렀는지를 깨달았다.

캬르르…

엄청나게 쌓여있는 시체의 산.

처음 보는 붉은 괴수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얼굴도 쳐다보지 못 할 정도로 거대하고 무섭게 생긴 녀석들이었지만 죽은 걸 알았기에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을 살피던 쿠쿠루의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깃들었다.

캬륵! 캬르륵!

즐거운 괴성을 내지른 쿠쿠루는 부하 녀석을 시켜 바깥의 녀석들도 몽땅 들어오라고 시켰다. 먹을 것과 숙주가 이렇게 많으니 어서 어서 먹어치워야 한다. 상하기 전에.

녀석을 내보낸 후 쿠쿠루는 천천히 일어나 물 바깥으로 향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도저히 눈앞의 시체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녀석들이 오기 전에 먼저 맛을 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쿠쿠루는 천천히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시안과 스틸이 로크 자작령으로 무바칼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8권에서 계속>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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