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58화 (59/81)

<58. 알파>

시안과 스틸은 나무기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뿌리 쪽에서 점점 더 키큘러스의 몸체 쪽으로 다가갈수록 뿌리는 점점 더 두꺼워졌다. 그리고 기둥 쪽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강한 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것참… 여기도 이렇게 구역이 나누어져 있군요.”

예전에 엘-루아 구역에서 가란-티아를 하던 시절이 생각난 시안이 읊조렸다. 줄기 쪽에 가까워 질수록 더 단단해지고 더 두꺼워졌다. 그랑-반더 정도가 아니면 파내어 집을 만들기 힘들 정도로.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확실히 아래쪽보다는 살기 좋아보였다. 설사 적들이 침입해 와도 이곳은 가장 마지막에 침습당할 것이고, 기운의 양도 아래 잔뿌리보다 많은 것이 수련하기에 훨씬 유리해 보였다.

“뭐… 여기도 강하다 뿐이지 인간은 인간인가 보네. 하는 짓은 영 비슷해. 오히려 더 무식해 보이기도 하고.”

힘을 신봉하는 것이 무식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문화나 예술 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원래 귀족들의 여유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쪽은 그런 것이 발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항상 수련에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하니.

확실한 것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곳보다 큰 보호령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특이한 문화가 크게 발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쭉 올라가 기둥에 가까워지니 나무뿌리를 파내어 지은 집들은 어느덧 모두 사라지고 말끔하게 정리된 뿌리 위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을 쭉 걸어가니 나무둥치 한구석을 거대하게 파내어 만든 문이 있었다. 아마 이곳을 보호한다는 귀족들이 사는 곳이리라.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까지 만들어져 달려있었다.

“흐음… 두드리면 되려나…….”

이곳의 문화를 모르기에 무슨 수를 써야 안쪽의 사람을 불러낼 수 있을지 시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거대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으니까. 삐그덕 소리가 날 만도 한데 무슨 수를 써놓았는지 문은 거짓말처럼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부드러운 인상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기세는 그렇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세. 시안이 그 기세를 보니 이자는 라가오페 씨와 수준이 비슷해 보였다. 예전에 라가오페가 스스로를 남작이라고 한 적이 있으니 이자도 분명 남작이리라.

“처음 뵙겠습니다. 게슈탈이라고 합니다.”

“음… 반갑습니다. 시안이라고 합니다.”

“안쪽에 자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어… 음…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부드러운 태도에 시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갔다.

안쪽은 상당히 넓었다. 하긴 나무 자체가 워낙 거대하니 껍질 쪽에 이 정도 공간을 파낸다고 하여 별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안쪽에는 파낸 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듯한 장식들이 놓여 있었다. 가구부터 시작하여 벽에 걸린 기묘한 조각들까지. 생김새는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손으로 깎아내어 만들었다는 것.

깔끔하게 잘 만들기는 했지만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었기에 라-시안 대륙에서 온갖 문화와 예술을 접한 스틸과 시안의 안목을 만족시키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장식품들을 지나가니 상당히 거대한 공동이 나왔고 그 안에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셋은 남작… 그리고 저기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자작이구나.’

초인들이 기세를 감추면 알아보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차가 날 때의 이야기이다. 비록 아크라의 공명은 느낄 수 없다지만 시안의 눈에는 그들이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 대충 보였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시안은 스틸의 경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백작은 되겠구나, 스틸 양도.’

저기서 가장 강하다는 자작이라는 자와 스틸 양의 실력은 꽤나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백작 급을 본 적은 없지만 저기 있는 남작과 자작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될 듯싶었다.

시안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시오. 로크라고 하오. 이곳의 보호를 담당하고 있지.”

“아, 시안이라고 합니다.”

“스틸이야. 후후.”

로크 자작은 눈앞의 남자를 보자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자는 눈앞에서 보니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강해보였다. 하지만 저 귀족을 따라다니는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둘이 친해 보이는데 굳이 남자를 핍박하여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에 로크 자작은 호기심을 접어두고 대화에 집중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오? 혹시 정착을 하러 왔소?”

불안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였기에 로크 자작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크라 없이 귀족이 된 저 여성이 아크라의 존재를 알고 아크라를 수급 받으려고 왔을 가능성 역시 얼마든지 있었다. 보아하니 몸속에 씨앗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아크라타를 익힌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아크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욕심을 낼 법도 하다.

자신이 보호하는 이곳 보호령은 자신이 꽤나 신경 써서 관리한 편이기에 자작 보호령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수가 제법 되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아래로 네 명의 남작들이 몰려든 것이고.

하지만 백작 급이 해먹기에는 조금 부족할 텐데 이렇게 찾아오다니. 저자와 갈라먹으면 자신들에게는 떨어지는 것도 몇 푼 되지도 않을 것이다.

‘제기랄… 넘기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여길 열심히 키워 놓았다. 속으로 로크 자작이 조마조마해하고 있을 때 여성이 입을 열었다.

“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것도 꽤 괜찮은 생각인데?”

‘헉…….’

괜한 말을 꺼내 들쑤신 꼴이 되었기에 속으로 쌍소리를 내뱉던 로크 자작을 보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스틸 양, 놀리지 마십시오. 저희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좀 지위가 되는 분들이어야 알지 않을까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난 진심이었는데. 동생, 너무하네.”

“…알아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로크는 애써 여자 쪽을 무시하고 남자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애초에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여자에게는 존대를 써야 할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기에 눈앞의 남자와 대화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음…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시안은 자신이 찾고 있는 남자에 대한 특징을 설명했다. 외모와 이름, 그리고 간단한 특징.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크 자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그게 다인 것이오? 더 많은 정보는 없소? 남작이라면 어느 지방 보호령에 정착하고 있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특징적으로 구사하는 이능이 따로 있다든가…….”

“…….”

“그것만 듣고 이 넓은 대륙에서 어찌 찾겠소. 높은 작위면 몰라도 남작을……. 게다가 남작 정도면 일 년에 수십 명은 새로 생기고 없어질 거요. 새로 나타났다는 정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소.”

가장 생기기 쉬운 계급도 남작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다가 죽어나가는 계급이 가장 많은 것도 남작이다. 듣자하니 이 남자가 찾는 라가오페라는 자는 남작 계급인 것 같은데 그 정도 정보로는 찾을 수 없다.

“음… 그러면 혹시 이런 이름들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리비아스, 로바노튼, 카라칼, 그로인…….”

그러면서 시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열두 명의 초인 이름을 쭉 나열했다. 하나하나 열거되는 이름을 듣던 중 자작은 자신이 아는 이름이 나왔음을 깨달았다.

“콘-라드?”

“아십니까?”

“흠… 내가 아는 콘-라드가 그 콘-라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콘-라드 공작이라면 알고 있소.”

그러면서 자작은 자신이 아는 콘-라드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콘-라드 공작.

5년 전, 대륙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생 귀족. 최근 들어 가장 이름이 많이 들리는 두 명 중 하나였다.

흔하디흔한 남작이라면 몰라도 이 드넓은 대륙에서조차 공작은 정말 찾기 힘든 존재이다.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존재들. 수많은 귀족들이 강해지고, 강해지고 벽을 넘기며 인간종의 가장 위에 위치하게 된 존재들.

인간종의 한계라는 벽에 가로막힌, 한계를 탐험한 자.

물론 한계에 도달했다고 하여도 다른 방향으로 강함을 추구하기에 그 강함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일반 귀족이 넘보기 힘든 강대한 존재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콘-라드는 그런 공작의 타이틀을 거머쥔 자였다. 5년 전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그 자는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동쪽 지방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기에 서쪽의 끝 중에서도 끝인 자신의 영지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지만 자신의 귀에 들려올 정도로.

콘-라드라는 자가 맨몸으로 빠르게 세력을 구축하는 건 사실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었다. 강대한 존재가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여차하면 그냥 후작령에 쳐들어가서 녀석들을 모조리 발아래 놓을 수도 있다. 후작들이 많이 모이면 공작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지만 뭐하러 그들이 공작을 대적하겠는가. 그냥 아래 들어가서 아크라를 갈라먹는 것이 속 편하다.

그리고 공작들은 벽에 막힌 존재들이기 때문에 아크라의 기운으로 강해질 수 없고, 따라서 다른 방향으로 강해지는 방향을 추구한다. 공작 아래 머무른다면 보호는 받으면서 아크라는 고스란히 자신들이 가져가게 되니 누구나 공작의 아래로 들어가 비호를 받기 원한다. 물론 공작 입장에서는 전혀 얻을 게 없으니 이제까지 공작이 세력을 구축한 적은 없었다. 로르발 공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륙이 놀란 점은 그자가 세력을 빠르게 구축한 점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났다는 점이다.

강대하기 그지없는 공작이 새로이 나타날 리가 없다. 공작이 될 정도의 존재들은 후작 시절부터 이미 한 지방에서 거대하기 그지없는 키큘러스 나무를 보호령으로 삼고 수많은 평민을 거느리며 그 아래 많은 수의 백작과 자작, 남작들을 거느린다. 그 규모는 자신이 거느린 로크 자작령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다. 후작령 정도 되면 키큘러스 나무가 그야말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높고 산맥을 먹어치울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나니까. 그곳에 자리를 잡은 후작들은 꾸준히 그 기운을 바탕으로 수련을 거듭해 공작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작이 되면 새가 둥지를 떠나가듯 그곳을 떠나간다. 공작은 더 이상 아크라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경지니까.

한데 콘-라드라는 자는 그 순서를 역행했다. 등장할 때부터 공작이었고 그 강대함을 바탕으로 세력을 늘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대륙의 귀족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공작이 세력을 넓히다니. 자신은 워낙 거리가 멀기에 별 관심이 없어 많은 정보가 없지만 대륙을 흔들고 있는 그자의 이름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뜬금없이 동쪽의 새로운 패자, 콘-라드의 이름이 나왔으니 로크 자작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작의 말을 들은 시안은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자신도 라가오페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없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오! 그렇다면 그자에 대한 정보를 더 알 수 있겠습니까?”

“음… 그게…….”

로크 자작의 말을 들은 시안은 실망을 감추지 못 하였다.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가 많지 않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계속 해서 영지들을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그 많은 영지들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려면 공작이라도 꽤나 피곤할 텐데. 공작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으니 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오. 그나마 최근에 도착했던 곳이 레바단 백작령이라고 하던데… 그곳으로 가 보시겠소?”

“그러면…….”

시안이 근처의 백작령에 대해 물어보려던 그때, 회의실 안쪽으로 두 명이 급하게 들어오며 로크 자작을 불렀다.

“자작님!”

로크 자작이 누군가 하여 살펴보았더니 한 명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게라힘 남작이었다. 옆에 보는 이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자였다.

‘라울… 이라고 했던가.’

게라힘 남작이라면 분명 순찰을 돌고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다니… 로크 자작은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어 게라힘 남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게라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옆의 남작에게서 나왔다.

“큰일입니다.”

“음? 라울 남작? 큰일이라니?”

“알파가 나타났습니다.”

“…알파가? 이런… 어느 종인가?”

알파란 말을 듣자 로크 자작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시안과 스틸은 물어보려던 말을 잊고 호기심에 로크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게… 적대 종족 중 서쪽 수림 부근에 살고 있는 그란족입니다.”

“…그란족에 알파라고? 허… 그것참…….”

이야기를 들은 로크 자작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지켜보던 시안과 스틸 역시 궁금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게… 순찰 중에 저희 보호령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이 자를 발견했습니다. 알파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자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라울 남작이라고 했지?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로크 자작은 라울 남작을 보며 물었고, 라울 남작은 진정이 좀 되었는지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일이었습니다…….”

☆ ☆ ☆

라울 남작령을 보호하고 있는 라울 남작은 얼마 전 건방지게 자신의 영지를 떠난 녀석들을 생각하며 거친 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평민 녀석들… 보호해 주면 그 정도 대가는 당연히 치러야지. 목숨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다고…….”

평민 출신으로 태어난 라울 남작은 쓸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이 80쯤에 귀족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본 그 강대한 힘에 전율한 라울 남작은 세상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다. 이 강대한 힘이라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밝혀졌다. 평민 시절에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살아왔지만 귀족들의 세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민 중에는 꽤 강한 축에 속했기에 목에 힘 좀 주고 다녔는데 귀족이 되자마자 완전 최말단이 되어 귀족들의 눈치나 설설 보고 다녀야 했다.

강대한 귀족들의 보호령은 이미 자신 정도 되는 자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아크라를 갈라먹고 있었기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라울은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 있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렇기에 촌구석까지 내려와 적당한 평민 무리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그 수가 많지 않아 아크라의 수급이 많지는 않아 다른 귀족들은 이곳에 뿌리 내리지 않았지만 자신은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강해지려고 노력해봤자 자신의 머리 위에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수명이 다 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배하고 욕망을 채우며 사는 것을 택했다. 평민 무리의 덩치가 작으니 갈라먹자고 덤벼드는 귀족 녀석들이 없어 오히려 편했다.

빠져나가는 녀석들도 우스웠다. 어차피 자신은 아크라 수급에 별 관심이 없으니 몇 놈 줄어든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녀석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허겁지겁 보호령으로 쫓겨 돌아올 꼴을 구경할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크흐흐… 뭐, 생각보다는 오래 버티는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라울 남작은 그 녀석 들 중 파르훔이란 자의 딸은 꼭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꽤나 반반했으니까. 그리고 파르훔이란 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덤벼들면 기회를 봐서 죽여 버리면 더욱 좋고. 녀석의 재능은 자신의 평민 시절보다 뛰어났다. 틈 날 때 죽여 놓으면 좋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라울의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자신의 영지, 서쪽의 수림에서 풍겨오는 불길한 기운.

그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라울 남작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펜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에잉…….”

아펜탈이 아무리 들어가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지만 그래도 그런 흉물스런 것이 자신의 지배령 근처에 있는 것이 못내 찝찝했던 라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품고 있던 계집을 내버려두고 창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어렴풋한 형상을 본 라울은 코웃음을 쳤다. 익숙한 난쟁이들과 곤충.

수림에 살고 있는 그란족과 그 종속들인 안타인 녀석들이었다.

아직 아주 멀리 있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겁대가리 없이 수림에서 기어 나와 귀족님인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영역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허허. 미친놈들이로군. 겨우 나리쟈 쓰레기들이…….”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 생각한 라울은 숙소에 있던 자신의 칼을 뽑아왔다. 그리고 달려들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녀석들은 평소에 자신이 알던 녀석들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멍이 든 것처럼 푸르뎅뎅한 피부는 어디 가고 온통 시뻘겋게 피칠을 한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녀석들의 앞에 서 있는 안타인 녀석들은 예전의 비리비리해 보이던 껍데기는 어디다 팔아먹고 새 장비를 맞추었는지 갑주가 두껍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 변화에 비하면 사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터져 나올 듯 흉포한 안광에 온몸에서 뻗어 나오는, 더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오싹한 기세.

이런 변화를 모조리 캐치한 라울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빌어먹을… 알파가 떴구나!”

종의 혁명. 귀족들이 그토록 조심스러워하는 알파의 탄생. 지금 저 녀석들의 꼴을 보아하니 자신이 모르던 사이 그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이건 자신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라울은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다가 로크 자작령을 떠올렸다. 근방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가까운 보호령.

그리고 자신의 보호령으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안타인들을 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로크 자작령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이게 며칠 전 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리고 게라힘 남작을 만나 이곳에 도착했지요.”

공을 세웠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울 남작을 보며 시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평민들을 모조리 미끼로 던지고 도망쳐 왔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표정을 보니 무슨 훌륭한 정찰병 역할을 성공해 냈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파르훔 그 사람이 도망칠 만하구먼…….’

저런 마음가짐이라면 평소에 평민을 어떻게 대했을지 뻔했기에 시안은 혀를 찼다.

‘그나저나 알파라…….’

시안은 알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여 있는 남작들과 자작들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끝나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란족에 알파라니… 정기 순찰 중에 그런 징후는 발견도 하지 못 했었는데…….”

“아니… 그것보다 그란족의 특성상 알파가 생겨도… 종족 전체가 변하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텐데… 어찌 이리 빨리…….”

라울이라는 자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미 그란족은 상당부분 변화가 진행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로크 자작을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설령 정기순찰의 틈을 타 알파가 태어났다고 해도 그란족의 특성상 종 전체가 변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자 답답해진 시안은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알파가 무엇입니까?”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고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 수 도 있는 것 아닙니까.”

“허… 그거참.”

라울은 웬 찌끄레기 같은 녀석이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입을 열며 쓸데없는 질문을 하자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아크라의 공명도 느껴지지 않는 게 평민 중에서도 최하층민 같은데 갑자기 입을 열다니.

안 그래도 지배령을 모두 잃고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는데 눈에 거슬리는 녀석이 나타나자 라울은 이 녀석을 대상으로 화풀이를 할까 했지만 남들이 다 보고 있었기에 우선 참기로 했다. 남의 영토에서 사고를 칠 수는 없으니.

‘저 새끼가……?’

저 오징어 같은 녀석이 사랑스러운 시안 동생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눈치챈 스틸이 라울을 어떻게 으깨놓을지 고민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라울은 계속해서 시안을 노려보았다.

그런 대치를 본 로크 자작은 일부러 그 대치구도를 무시하고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뭐… 사고 치면 나야 좋지. 이참에 저 남자의 정체도 알 수 있고.’

“알파에 대해 모른다니 그에 대해 말해주겠소.”

그리고 로크는 알파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 ☆ ☆

종의 한계는 명확하다.

대륙에 살고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몇몇 종은 외부의 계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귀족 계급의 강함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말이다. 이런 종들은 그 특성이 무엇이 되건, 그 숫자가 얼마가 되건 나리쟈 급 종족으로 칭해졌다.

귀족 계급이 탄생하지 않는, 그렇기에 귀족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종족들. 적대종들의 경우 그 수와 공격성, 그리고 위험한 특성 때문에 평민들에게 위협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귀족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귀족과 평민의 강함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그리고 그 위에 로탄 급 종족이 있다.

개체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노력만 한다면 무난하게 평민을 넘어서서 귀족 급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개체들. 인간종도 이 로탄 급 종족에 속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체들이 로탄 급에 도달할 수 있는 종족들은 수와 공격성을 불문하고 충분히 귀족들에게 위협이 된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합심하여 영지와 영지 사이의 로탄 급 적대종족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나리쟈 급 적대종족들만을 남겨놓았다. 그래야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원활한 아크라의 수급이 가능했으니까. 로르발 공작가가 평민의 아크라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나리쟈 급도 쓸어버리고 평민들을 노예처럼 묶어두었을 것이지만 로르발 공작가가 그렇게 선포한 이상 이게 최선이었다. 로르발 공작가도 이 정도까지는 터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귀족들은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나리쟈 급 종족들을 쓸어버리고 싶어 했을까?

그 이유는 종족들 사이에서 때때로 탄생하는 존재들, 알파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전혀 위협도 되지 않을, 벌레 같은 나리쟈 급 종족 사이에서 태어나는, 종의 돌연변이 개체.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이런 돌연변이 개체가 형성되는지는 아직 연구된 바가 전혀 없다. 그렇기에 예방을 할 수도 없다. 조건을 모르니까.

알파란 종의 한계를 깨고 그다음 단계의 길을 열어젖힌 개체를 말한다. 충분히 귀족에게 위협이 될 만한 개체들.

사실 이 알파라는 존재 하나는 별것 아니다. 벽을 뚫어보았자 말 그대로 이제 남작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 정도야 남작 급 보호령 한 군데에서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귀족들은 항상 이들의 탄생을 주의하고 경계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아무것도 안하고 수련만 하는 줄 알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지 사이에 있는 나리쟈 급 종족들을 수시로 살피며 순찰을 한다. 혹시라도 자신들 영지 사이에 있는 나리쟈 급 적대종족들 중 알파가 태어나면 약할 때 쳐 죽이기 위해서이다. 그런 식으로 로크 자작의 손에 죽은 알파의 숫자만 해도 수십이 넘는다.

평민들은 모르겠지만 오랜 삶을 사는 귀족들에게는 수천 년 전, 위험한 종족의 특성과 알파가 결합하는 경우 어떤 대재앙이 발생하는 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 전 대륙을 휩쓸었던 위협적인 강성 적대 종족, 식수 <무라칸>과 군체종족 <스웜>의 탄생이 그것이다.

정확한 시기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먼 옛날.

인간 족들의 세력은 평민층이 얇아져 점차 쇠약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성했다. 인간종의 무력을 대표하는 귀족들은 여전히 그 힘을 뽐내었기 때문.

로르발 공작가가 인간종 보존을 위해 평민층을 두껍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만한 귀족들은 듣는 척만 할 뿐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저리 걱정인지 모르겠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인간보다 강대한 종족이 이 대륙에 어디 있다고.>

<벽에 막히니 쓸데없이 걱정만 느는 모양이오. 허허.>

금지에 살고 있는 자들이야 무섭긴 했지만 금지란 말 그대로 <금지된 땅>이다. 들어가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위협이 될 만한 종족들은 귀족들이 투쟁하고 물리치며 멸족시키거나 대륙의 구석으로 몰아넣은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간다면 다른 종족에게 밀리게 될 것이라는 로르발 공작의 말이 씨알이 먹힐 리가 없다. 오히려 노심초사하는 공작의 모습을 본 다른 귀족들은 공작의 위명이 부풀려진 것이 아닌가 하고 비웃기까지 하였다. 자신보다 강하기야 하겠지만 저러는 꼴을 보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알파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알파라는 놈들이 나와 봤자 변종일 뿐이고 겨우 벽을 뚫은 남작 급 괴물 따위야 장난감에 불과하다. 오히려 알파가 생기면 그 종족이 어느 정도 세력이 불어날 때를 기다렸다 사냥을 시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유흥거리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강해야 하니까.

그러던 와중 사고가 터졌다. 정확히 말하면 대륙 동쪽에 살던, 두 괴수 종족에게서 태어난 알파가 사고를 쳤다.

대륙의 동쪽 끝에는 로탄 급과 나리쟈 급을 비롯한 여러 적대종들이 살고 있었지만 대재앙의 시작이 된 알파가 태어난 종은 두 종족이었다.

대륙 동북쪽 끝 반도에 살던, 짐승 종족 무라칸.

그리고 그 아래로 주욱 내려와 길쭉한 바다를 기점으로 갈라진 반도에 살던 군체 기생 종족 스웜.

이 두 종족은 기묘할 정도로 알파가 태어나지 않는 나리쟈 급 종이었고, 굳이 인간들이 몰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세력 면에서 밀려 동북쪽에 위치한 두 개의 반도에 처박힌 상태였다.

이 두 종족은 기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라칸.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기묘한 짐승 모양의 종족. 굳이 짐승 모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의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먹어치운 종족의 장점과 외모를 흡수하여 강해지는 기괴한 종족. 얼핏 특징만 들으면 굉장히 강해보이지만 귀족들의 평가는 단 하나였다.

<잡스럽다.>

아무리 장점을 흡수해서 진화해 나가면 무엇하겠는가. 귀족이 태어나질 않는데. 그렇다면 결국 아무리 강해보았자 애완동물이다. 귀족들은 이 녀석을 잡아다 손수 먹이를 주며 멋진 모습으로 진화시키는 취미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스웜. 이 녀석들은 어찌 보면 무라칸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작은, 정말 작은 은빛 벌레들처럼 생긴 이 녀석들은 수천, 수억, 수백억 마리가 몰려다니며 마치 은빛 슬라임처럼 땅 위를 기어 다녔다. 그리고 그 파도에 휩쓸린 종족을 먹어치우고 그 몸에 달라붙어 살아갔다. 이 파도에 휩쓸린 자들은 마치 은색 점액을 뒤짚어쓴 모양새가 되었다.

이들이 강해지는 방법 또한 간단했다. 흡수한 종족에 기생한다. 그리고 그 종족의 강함의 비결이 담긴 본질에 대한 정보를 흡수하고 녹여 군체를 지배하는 가장 강한 정신체에게 보낸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 스웜들이 기생하는 생물체는 군체의 정보를 모조리 공유하는 스웜을 받아들여 고스란히 그 강함을 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종족에 대한 귀족들의 평가 역시 박했다.

<그래 봤자 진흙덩어리.>

애초에 귀족들의 몸에는 침범 자체를 못 할뿐더러 스웜이 먹어치워 강해진 종족들 역시 나리쟈 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녀석은 애완동물 취급도 받지 못 했다.

그랬기에 주변 로탄 급 종족들과 인간들에게 밀려 반도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이 두 종족 사이에 어느 날 알파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알파가 한 일은 매우 간단했다.

<나를 먹어치워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무라칸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알파를 먹어치웠다.

스웜들은 알파를 녹여 먹는 대신 그자를 군체의 우두머리 정신체로 삼았다.

그 즉시 변화가 일어났다. 단순한 그 하나의 개체가 아닌, 알파를 먹어치운 종족들 모두가 알파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무라칸과 스웜 모두.

그다음부터는 무한 반복이었다. 알파로 변한 무라칸을 또 주위 평범한 무라칸들이 먹어치우고, 또 알파로 변한 무라칸을 다른 무라칸들이 먹어치우고…….

스웜은 더 빨랐다. 우두머리 정신체가 알파가 되는 순간, 아래 모든 스웜들은 알파의 비밀을 공유했고 그 즉시 알파로 진화할 길이 열리게 되었으니까.

순식간에 무라칸과 스웜은 모든 구성원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한계를 초월한 알파 급 개체로 변해가며 나리쟈 급 종족에서 말도 안 될 정도로 강성한 로탄 급 종족으로 변했다. 그리고 미칠 듯한 기세로 주변의 종족들을 먹어치우며 그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반도를 빠져나와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쭉쭉 뻗어나갔다. 무라칸들은 서쪽으로, 스웜들은 남쪽으로.

그리고 그 경로에 있던 로탄 급 종족에는 인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친… 뭐야!>

<막아라!>

후작들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은 경악했다. 물론 개체의 강함은 아직 공작이나 후작들에 비해 약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귀족들이 한 단계 위의 귀족들을 이기지 못 한다고 하는 이유는 강함에 절대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아래의 귀족들이 위의 단계의 귀족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뭉치지를 못 하기 때문이다. 굳이 뭉쳐서 목숨 걸고 위의 단계의 귀족에게 대항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하지만 스웜과 무라칸 모두,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아펜탈이 금지인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 안의 괴수들 역시 로탄 급 괴수들이었지만 그 숫자가 정말 어마어마했으니까.

인간 족의 귀족들의 몇십 배는 되었고, 인간들이 휩쓸려 나가면서 잡아먹히자 그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그리고 전 대륙이 정신없이 녀석들에게 휩쓸려 나갔을 때 로르발 공작가가 나섰다.

<이 새끼들… 진작에 좀 잘 하자니까.>

그러고는 미칠 듯한 강함을 뽐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무라칸과 스웜족들을 밀어붙였다.

공작가의 강대함을 본 다른 귀족가들은 그 힘에 전율했다. 그제야 그들은 벽에 막힌 존재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쉬운 싸움이 아니었는지 미친 듯이 무라칸과 스웜을 밀어붙여 다시 반도에 처박은 공작가는 그 반도의 사이에 자신들의 본거지를 옮겨 세우고 그들이 나오지 못 하도록 틀어막는 데 그쳤다.

그러고는 이전부터 하던 제안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이제부터 이것을 익히고 퍼트려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종을 강하게 만들어 줄 이능이지. 아크라타라고 불러라.>

그 뒤는 모두가 아는 대로 진행되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위험한 특성을 지닌 종족과 알파가 통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은 귀족들은 자만심을 버리고 아크라타와 키큘러스의 나무를 중심으로 전 대륙을 통합해 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영지 사이에 있는 로탄 급 종족들과 위험한 특성이 있다고 판단된 나리쟈 급 종족들을 싹 쓸어내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나리쟈 급 종족도 모두 쓸어내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평민들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안전한데 누가 아크라를 바치며 보호를 요청하겠는가.

생각 같아서는 몽땅 노예로 묶어두고 싶었지만 로르발 공작가의 힘을 직접 눈앞에서 본 귀족들은 도저히 그들이 내린 율법을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게 더 이득이라는 것을 귀족들 또한 깨달았다. 강함의 길이 열려있는 평민들은 더 열심히 수련을 했고, 결과적으로 강제로 뽑아낼 때보다 더 많은 아크라를 수급할 수 있었다.

나리쟈 급 적대종의 필요성을 인정한 귀족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상 순찰을 돌며 알파가 태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위협적인 특성이 있는 종족들은 제거했다지만 혹시 모르니까.

☆ ☆ ☆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소. 그란족은 분명 위협적인 특성을 지닌 종족이 아니오. 그러니 지금까지 살려 두었지. 그런데 저렇게 순식간에 알파 종들이 늘어나다니…….”

그들의 특성상 단기간에 알파의 특성이 번질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기순찰을 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타부타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이미 결과가 나와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녀석들은 더 이상 나리쟈 급 종족이 아니었다. 이미 로탄 급으로 상향조정을 해야 할 만큼 강대해진 상태.

“제기랄. 뭐 좋은 거라도 주워 먹었나… 난쟁이 녀석들이…….”

라울이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럴 때가 아니군. 주변 보호령들에도 알려야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자작 급 보호령에서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보호령에 경고를 해 주고 정찰을 하다가 힘을 모아 격살해야 했다.

“카게라, 우리 보호령에 쌍둥이가 몇 명이 있지?”

“주변 세 개 자작 보호령과 두 개의 남작 보호령에 해당하는 쌍둥이들은 모두 있습니다.”

“어서 그 아이들을 통해 연락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이쪽 대륙에서 태어나는 쌍둥이들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이능을 타고난다. 얼마의 거리가 떨어져 있건 간에 쌍둥이들은 그들의 생각을 즉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귀족들은 쌍둥이가 태어나면 각 보호령을 연결하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고는 했다. 형제자매를 생이별시키는 것이지만 귀족들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남작들은 라울 남작을 따라가 그 종족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확인하도록 하게.

“엥……? 저 말입니까?”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휘말린 라울 남작은 깜짝 놀라 로크 자작을 쳐다보았다.

“그래, 자네. 자네가 안내를 해 주어야지 않겠나. 거긴 키큘러스가 없으니까.”

로크 자작이 눈을 번득이며 라울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본 라울 남작은 꼬리를 내렸다. 안 간다고 했다가는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제기랄… 내가 이래서 나보다 상위 귀족들과는 엮이기 싫었는데…….’

재수 없게 엮여버렸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라울은 강제로 끌려 나갔다.

다른 남작들이 모두 나가고 난 후 스틸과 시안을 쳐다본 로크 자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가겠다고 하면 막지도 못 한다. 백작이니까. 그리고 보호령을 끼고 싸우면 근처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떠날 테면 떠나시오. 이건 보호령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여기서는 모르겠지만 아마 백작령 정도로 가면 콘-라드 공작에 대한 정보가 있을 거요. 쌍둥이로 물어봐 주고 싶지만 이곳에는 레바단과 연결되어 있는 쌍둥이가 없구려.”

로크 자작의 제안에 시안이 잠시 고민했지만 뭔가 수가 있으니 이런 제안을 하겠거니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기…….”

“왜 그러시오?”

“혹시 지도 이런 건 없습니까?”

그러자 로크 자작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시안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요? 귀족이지 않소. 그렇다면 아크라로 키큘러스의 방향을 쫓아가면 되지 않소.”

“……?”

“아… 그대들은 아크라가 없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로크 자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귀족들은 모두 아크라로 길을 찾아다닙니까?”

“그렇소. 보호령을 구성하는 키큘러스의 아크라 공명을 느끼고 찾아다니지. 평민들이야 불가능하지만…….”

“지도는…….”

“그런 게 어디 있겠소. 필요도 없는데.”

“…….”

“레바단 백작령으로 가려면 코쿨 자작령의 키큘러스를 쫓아간 후 레바단 백작령의 키큘러스의 공명을 쫓아가면 되오. 사정상 도와드릴 수가 없구려. 어떻게 하시겠소?”

공격 받기 직전인데 저들 중 하나에게 길 안내를 해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스틸 양의 아크라가 자라날 때까지 꼼짝없이 이곳에 갇히게 생긴 시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라울 남작의 바람 덕분인지 정찰을 나갔던 그들은 그리 멀리 나가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작님!”

“게라힘, 무슨 일인가.”

“저 녀석들이… 이곳을 통해 똑바로 오고 있습니다. 오는 기세로 볼 때 며칠 안 걸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알파의 숫자가 상당합니다.”

다행히도 그란의 모든 녀석들이 알파로 변하고 귀족 급의 강함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한 달 전에 살폈던 그란족의 족장이나 대전사 계급 정도만 알파로 변한 것 같았지만 전혀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전력이 엄청나게 올라갔으니까. 비실비실하던 난쟁이 녀석들이 전체적으로 두세 단계는 강해져 있었다.

“…제기랄.”

‘설마 저 자식을 따라온 건 아니겠지…….’

로크 자작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라울 남작을 쳐다보았다. 백작인 스틸 앞에서야 얌전했지만 로크 자작도 그렇게 얌전한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그 표정을 본 라울 남작은 찔끔했지만 자신은 별 잘못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어깨를 폈다.

그 꼴을 보던 로크 자작은 라울 남작에게 명을 내리고 방을 배정해 주었다. 지금 자잘한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자신의 보호령으로 오다니…….

로크 자작은 쌍둥이들을 통해 주변 보호령의 귀족들과 회의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로탄 종은 싹이 자라기 전에 주변 보호령의 귀족들이 모조리 힘을 합쳐 쓸어버려야 한다.

☆ ☆ ☆

로크 자작이 마련해 준 방에서 머무르고 있던 라울은 로크 자작이 자신에게 처한 조치 때문에 씩씩거리고 있었다.

‘조만간 저 눈앞의 로탄 종에 대한 토벌이 시행될 텐데 자네도 포함되니 참가하도록.’

그것까지는 별 불만 없었다. 사실 애초에 이곳을 찾아오면서 예상했던 바였다. 이 자리에서 도망가서 상위 귀족들에게 찍히면 두고두고 고달플 것이니까. 그리고 귀족들이 뭉치면 저딴 난쟁이 녀석들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두 녀석에 대한 대우였다. 정확히 말하면 끝내주는 미녀 하나와 얼치기 녀석 하나에 대한 대우. 두 녀석 다 하층민처럼 보였는데 로크 자작은 그 둘에 대해서는 불공평할 정도로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듣자하니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라고 제안까지 하였다고 한다.

로크 자작에게 대놓고 불평하지는 못 했지만 같은 남작인 카게라에게 불만을 제시했더니 카게라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자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별일 없을 것이다.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도록.’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았다. 자신이 주먹이 생각보다 빠르게 나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 자작 정도 되는 귀족이 하층민을 기둥의 방까지 주며 머무르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열 받는 건 그자들에게 더 좋은 방이 배정되었다는 것. 게다가 여자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데 자작의 영지민을 어떻게 하기도 눈치 보이니 미칠 지경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카게라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놈들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설마 중요한 싸움을 앞에 두고 자신을 버리고 그런 비렁뱅이들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다못한 라울은 일어서서 하층민 녀석들을 찾으러 떠났다.

☆ ☆ ☆

로크 자작이 마련해 준 방 안에 있다가 심심해서 바깥으로 나온 시안과 스틸은 쉬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방을 살피고 있는 불청객의 기운을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라울이라는 자 아닙니까?”

“그러게. 저 얼치기가 왜 저러고 있지?”

“흠… 기세를 보니까 왜 그런지는 대충 알겠는데요.”

“동생.”

“왜 그러십니까?”

“내가 여기 온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여기는 좀 모자란 애들이 많은 것 같아.”

“뭐… 그렇다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충실하다고 해 두죠.”

개개인의 무력차가 너무 커서 생긴, 법도 없는 기묘한 세상. 힘에 대한 권리만이 있을 뿐,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는 자에게는 가차 없었다. 로크 자작도 아마 스틸 양이 얼치기 넷을 두들겨 패는 광경을 지켜보고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아크라는 없어도 그 움직임을 보고 알 수 있었을 테니.

방을 열어 보고 둘이 없음을 깨달은 라울이라는 자는 나무둥치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었다. 어떻게 너희들과 아웅다웅하다가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짓을 해 보겠다는 의도가 여기까지 전해지고 있길래 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틸이 즐거워하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저 라울이라는 자는 이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스틸 양…….”

“그럼, 그럼. 몽둥이. 그런데 쟤도 명색이 초인인데 이거 가지고 되려나 모르겠네. 이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지? 동생이 혹시 치료해 주나.”

“…….”

생각해 보니 저자도 초인인데 때려도 상처가 안 남는 몽둥이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는 것 같았기에 시안은 카르나인 안에 넣어 두었던 장갑을 꺼내 스틸 양 손에 씌워 주었다.

“후후.”

“뭐, 편한 대로 하십시오.”

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오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에 별로 막아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윽고 줄기 옆에 있는 공터로 라울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보아하니 찾아 헤매는 과정에 더 열이 받은 듯 보였다.

“저렇게 보니까 무슨 멧돼지 같네.”

“…….”

라울은 둘을 발견하자마자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안은 머릿속으로 상상을 돌려봤다. 이곳은 자작령이니 남작인 저자는 함부로 시비를 걸지는 못 할 것 같기에 시안은 지성미가 넘치는 것 같지는 않은 저자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로 세 가지 정도를 떠올릴 수 있었다.

1. 몸을 부딪치며 시비를 걸고 선제공격을 유도하여 정당방위를 성립시킨다.

2. 갑작스럽게 성희롱 후 선제공격을 유도하고 정당방위를 성립시킨다.

3. 인신공격을 하며 선제공격을 유도하고 정당방위를 성립시킨다.

‘뭐가 되려나…….’

뭐가 되던 결과는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저자의 상상력이 궁금했는데 시안은 라울을 너무 얕보았다.

4. 다짜고짜 남자를 갈긴 후 여자는 데리고 행복한 밤을 보낸다.

돌아다니며 줄기 안을 한참 헤맨 라울이 내린 결론이었다.

파파팍!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본 시안은 얼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턱.

“음!”

하지만 그 주먹을 잡힌 라울 남작처럼 놀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크악! 이거 뭐야! 이 새끼…….”

손에 잡힌 주먹이 빠지지 않자 라울은 놀라 왼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자신의 오른손을 잡은 채 무언가를 조용히 고민하고 있는 샌님 자식은 고개를 훅훅 돌리며 선 자리에서 자신의 주먹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헉…….’

그제야 라울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옆의 여자를 보니 생글생글 웃으며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턱.

“음? 스틸 양? 이거…….”

“동생, 뭘 망설여. 설마 주먹 좀 만져주고 끝낼 생각 아니지?”

여자가 남자에게 건네준 것은 금속 막대기였다. 그리고 그 몽둥이를 보는 순간 라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큭!”

이제는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고 전력으로 기운을 운용하며 빠져나가는 데만 집중했지만 이미 늦었다.

“음… 뭐, 이런 날도 있어야겠지요. 죄송합니다. 그동안 스틸 양에게 너무 맡긴 것 같군요. 그래도 제가 남자인데.”

“후후, 뭘. 내가 좋아서 한 건데. 신경 안 써도 돼. 오늘은 동생한테 양보할게.”

짧은 말을 마치고 몽둥이를 잡은 팔을 붕붕 휘두르는 남자를 본 라울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아닙니다.”

“…얼굴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로크 자작은 눈앞의 라울 남작을 보며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했지만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금 녀석들은 이쪽을 향해 정방향으로 몰려오고 있다. 주변 보호령과 연락해본 결과… 주변 열다섯 명의 남작과 다섯 명의 자작이 나서기로 했다. 아무래도 초창기에 소각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으니.”

“오오.”

라울은 눈가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탄성을 내뱉었다. 저렇게 많은 귀족들이 참여한다면 이제 로탄 급으로 탄생한 적대종 정도야 식은 죽 먹기로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존확률도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아마 백작들은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최대한 키큘러스를 끼고 방어하고 기회를 봐서 격살한다.”

워낙 보호령 간의 거리가 멀기에 쌍둥이를 통해 연락을 받아도 귀족들이 달려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멀리서 보기만 해서는 새로운 알파가 탄생한 저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알파의 숫자가 오십 내외라는 것. 그 정도면 자작과 남작이 힘을 합치고 키큘러스를 끼고 싸우면 할 만하다.

‘이 정도면 백작들은 없어도 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런저런 회의를 마치고 방을 나오자 바깥에는 스틸과 시안이 있었다.

몸을 움찔하는 라울 남작을 보며 로크 자작은 어제 이자가 어디 가서 두들겨 맞고 돌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틸 백작이 아닌, 시안이라는 남자를 보고 겁을 먹고 있다는 것.

‘역시 한 수가 있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라울 남작이 겁먹을 정도면 상당할 것이다. 역시 직접 건드리지 않고 옆의 이 모지리를 자극하여 실험해 보길 잘 했다고 생각한 로크 자작은 웃으며 시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주무셨소.”

“네. 그나저나 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꾸준히 관찰하고 있지만 무난하게 끝날 거요. 그나저나… 아크라 충전은 잘 되어 가시오?”

“영 느리군요.”

“원래 평생 동안 키워가는 것이니… 시간이 걸릴 것이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해 보시오.”

대화를 나누며 로크 자작은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정체불명의 귀족들이지만 그 무력 하나만큼은 진짜였으니.

‘설마 안 도와주지는 않겠지?’

여차할 때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 ☆ ☆

카르르르…

쿠쿠루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보며 침을 흘렸다. 이제껏 침범할 수 없었던 위험한 장소.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자신들은 달라졌으니까.

그 요상한 샘에서 고기를 가지고 나오려고 했지만 무슨 일인지 고기를 들고 물속을 통과하면 물속에서 모조리 녹아 없어져 버렸다.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 안에서 먹고 나오면 되니까. 내친김에 안에 있는 괴수들 시체에 안타인의 알도 깠다. 먹어치워서 나오는 건 아무런 이상도 생기지 않았다.

이 시체들을 먹어치운 동족들은 모두 한두 단계씩 강해졌다. 그중에는 그란족이되 더 이상 그란족이 아닌 것 같은 녀석들도 존재했다. 바로 자신 같은 전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온몸에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나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괴물 같은 녀석들도. 오히려 녀석들을 먹어치울 생각을 하니 기운이 넘쳤다. 그렇기에 가장 가까운 나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실제로 오기 전에 마을 몇 개를 덮쳤지만 거기에 살던 괴물 같은 녀석들은 이제 자신들을 보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고기를 먹은 이후 머릿속에 이상한 울림이 들린다는 것.

<…죽여라…….>

<우리를 이렇게 만든 녀석을…>

<죽여라…….>

하지만 쿠쿠루는 신경 끄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큰 울림도 아니었으니.

☆ ☆ ☆

로크 자작은 저 멀리 보이는 붉은 군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정찰병들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리 와 닿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어떻게 단기간에 저렇게 세력을 키웠지…….”

알파 몇 마리가 생겨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단기간에 저렇게 종족 전체가 모조리 강해지는 건 그란족의 특성이 아니다. 알파의 영향을 받아 종족 전체가 동시에 강해지는 위험한 특성을 지닌 무라칸이나 스웜 같은 종족은 귀족들은 가차 없이 말살했다. 설령 나리쟈 종이더라도. 그리고 설령… 적대종이 아닐지라도.

하지만 저 녀석들은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정기 순찰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애초에 저 녀석들이 그란족인지도 혼란스러웠다. 당장 피부색부터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로크 자작은 전방을 똑바로 주시했다. 전투가 끝나면 조사에 들어가 뿌리를 뽑겠지만 당장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곧 있으면 백작님도 도착하시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키큘러스의 나무기둥 중간쯤에 나 있는 가지에 앉은 스틸과 시안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동생, 저기 있는 군대 있잖아.”

“네.”

“저번에 우리가 봤던 난쟁이 녀석들 맞지?”

“그런 것 같군요.”

“생긴 게 좀 변한 것 같은데.”

“뭐… 아주 살짝의 변화가 있군요.”

“뭐, 그렇지? 색만 확 변하고 덩치가 두 배씩만 커진 거 말고는. 한두 단계 오른 거야 동생 입장에서 바뀐 것도 아니지, 뭐.”

“…….”

“그리고 기운이 왠지 익숙한 것 같지 않아?”

“기분 탓일 겁니다.”

“어디서 굉장히 좋은 거라도 주워 먹었나 봐, 저렇게 종족 전체가 변한 걸 보면.”

“…….”

“동생, 그 아펜탈이라는 거. 문 안 닫고 왔지?”

“제가 열어놓은 건 아닙니다만… 설마 제가 또 사고 친 겁니까?”

“후후… 부정하지 마, 동생.”

시안은 가슴이 쿡쿡 찔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에게 피해 주지 않은 그란이라는 종족을 건드리기 그래서 전투에 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크 자작이라는 자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보아하니 아펜탈에 들어가서 자신이 쓸어버린 괴수들 먹고 기어 나와 저렇게 용기백배한 것 같은데…….

“후… 딱 문만 닫고 오겠습니다.”

“후후… 잘 다녀와, 동생.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계속 열어뒀으면 일이 더 커졌을걸.”

스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놈이다.>

<…녀석이다…….>

케르륵?

위대한 그란족의 족장, 그로란은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기묘한 울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울림이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며 자신의 의식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종족들이 모두 머리를 감싸 쥐더니 하나둘씩 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늘을 지나가는 그 무언가를.

이윽고 정신력이 약한 녀석들부터 하나둘 그 물체가 향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를 움켜쥐고 갈팡질팡하더니 이윽고 아무 생각 없이 물체가 향한 방향을 향해 몸을 옮겼다. 그리고 걸어가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고, 몇몇 녀석은 안타인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안타인은 자신들보다 훨씬 이동속도가 빠르니까.

그리고 그런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윽고 나무 앞에 정렬해 있던 자신의 모든 군대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케르르륵! 카라락!

그로란은 미쳐 날뛰는 녀석들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머릿속의 울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

<…쫓아라.>

이윽고 머리를 움켜잡던 그로란은 멍한 표정으로 달리는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니, 뒤쳐진 만큼 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 안타인을 타고 앞에 있는 녀석들을 제치며 더 열심히 무리의 앞으로 향했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사라진 존재를 따라잡기 위해.

☆ ☆ ☆

위치가 잘 기억나지 않았기에 시안은 위치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 샘 비슷한 호수가 어디 있는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 호수 안으로 끊임없이 초록 난쟁이들이 기어 들어가고 붉은 난쟁이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이상하리라. 사실 호수 바깥으로 나오는 녀석들은 덩치가 커져 이제는 난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 광경을 보니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잉… 어여 닫고 끝내야겠다.”

시안은 가볍게 땅에 내려앉았다. 요란하게 착지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부드럽게 착지할 수 있었다.

‘후후… 이 정도면 크로나 흉내는 내는 건가…….’

그 거대한 덩치로 사뿐사뿐 내려앉던 게 신기했는데 벽 하나를 넘으니 자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앉은 시안은 사방을 향해 기세를 풀어헤쳤다. 알아서 도망가라는 뜻으로. 시안의 생각대로 녹색 난쟁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후후, 역시… 이러면 일이 편하지.’

하지만 시안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녹색 난쟁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친 반면에 옆에 서 있던 붉은 난쟁이들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음?”

시안은 이 사태에 어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저기… 친구들, 여러분들이 비켜줘야 제가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데.”

말을 못 알아들을 게 당연하지만 예상외의 상황에 머뭇한 시안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호수에서는 붉은 난쟁이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니, 시안의 기세를 느낀 이후로 호수에서 뛰쳐나오다시피 하며 바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마치 호수에 살다 육지를 정복하기 위해 나온 군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문제는 그 군대가 정복하려는 대상이 아무리 보아도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

시안은 몇 초 후 자신에게 일어나게 될 일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 진짜…….”

시안이 마지막 숨을 내쉬자마자 주위의 붉은 군대들이 모조리 시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허… 어쩐 일이지?”

맹렬하게 달려서 수림 안으로 돌아가는 붉은 그란 녀석들을 보며 로크 자작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주위의 남작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자신들에게 겁을 먹어 도망간 건 아니었다. 저 녀석들은 분명 이곳을 짓밟아버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분명 건드리면 귀족들이 나올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던 로크 자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녀석들이 물러간 건 좋은 일이다.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주변에서 모여드는 귀족들을 모아서 본거지를 짓밟으러 가면 된다.

어차피 그란족에게 저런 잠재위험성이 있는 것을 알았으니 녀석들은 이제 멸족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단기간에 알파를 오십 넘게 키워내다니… 반드시 발본색원해야 한다. 녀석들이 멸족되어도 영지의 사이 사이는 나리쟈 녀석들이 메꿔 줄 것이니 별문제는 없다.

“일단 긴장을 풀지 말고 주변을 정찰하도록. 카게라는 저 녀석들을 따라가서 본거지를 확인한다. 절대 무리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로크 자작은 가장 몸이 날랜 카게라에게 정찰을 시킨 후 영지 안을 관리하기 위해 키큘러스의 아래로 돌아왔다. 거기서 그는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카림 백작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그나저나 어째서 이곳까지…….”

“방금 도착했지. 크흐흐…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당연히 도와야지. 변종 녀석들이 나타났다는데.”

로크 자작은 눈앞의 인물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눈앞의 인물은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카림 백작. 대륙의 수많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본능에 충실하기로 소문난 자. 재능이 뛰어나 빠른 속도로 강해졌지만 아무도 이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카림 백작의 신조가 그의 성격을 잘 대변해 준다.

<지배와 강함. 왜 귀족이 둘 중 하나만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둘 다 거머쥐겠다.>

그리고 그는 백작령 아래의 주민들을 거리낌 없이 쥐어짰다. 보통 백작령 정도 되면 그 아래에 수많은 귀족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백작령을 견제해야 하기도 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자작과 남작들이 많은 것이 낫기 때문이다. 아크라를 좀 나누어준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백작령 아래는 아무도 없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자가 아무와도 아크라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희 같은 녀석들과 이 귀한 걸 나누어야 한다는 말인가?>

백작령을 차지한 카림 백작은 아래 있던 녀석들을 모조리 쫓아내 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자의 성격이 정말 더러웠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귀족이라고 해도 가차 없었다. 종처럼 부리는 것은 예사였고, 여귀족 같은 경우에는 안 좋은 꼴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저렇게 위의 백성들을 쥐어짠 만큼 백작 중에서도 강한 편이라 같은 백작들도 카림 백작을 피하고는 했다.

보통 귀족들끼리 이렇게 하면 도태되고 만다. 왜냐하면 학을 뗀 자작과 남작들이 다른 백작에게 가서 붙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힘의 균형이 무너져 보호령을 빼앗기고 마니까. 카림 백작이 아무리 강해도 다른 백작이 자작과 남작을 합쳐 압박하면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카림 백작은 아직까지 멀쩡했다. 왜냐하면 이자는 최근 들어 콘-라드 공작과 함께 대륙에 이름을 떨쳐 울리고 있는 인물의 아들이었으니까.

서부 지역의 패자, 칼튼하임 후작. 아니, 이제는 후작이 아니다. 공작에 올랐으니까.

동쪽의 콘-라드 공작과 서쪽의 칼튼하임 공작. 근래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의 인물.

카림 백작은 그런 칼튼하임 공작의 아들이었다.

칼튼하임 공작이 후작이던 시절에도 그의 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튼하임 후작의 후작령은 강대하기로 유명했거니와, 후작 중에서도 강한 축인 칼튼하임 자체의 무력도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연히 공작에 오른 이 후로 카림 백작의 망나니짓은 더욱 심해졌다. 공작이 되면 세력에 관심이 없어지지만 가족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자는 이제까지 힘을 합쳐 로탄 족을 소탕하는 일에 단 한 번도 나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기만 했지,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변종 녀석들은 물러갔습니다.”

“어, 그래? 그럼 뭐하나, 쫓지 않고?”

“그게…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들이 상당한 지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뭐? 그러면 안 돼지. 그사이에 소중한 평민들이 피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빌어먹을 자식…….’

로크는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확실히 이자는 평민을 귀하게 여기기는 한다. 카림 백작 입장에서 귀족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기생충이었지만 평민들은 소중한 가축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작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백작이 같이 가면 피해는 적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뭐? 내가 왜 가? 그런 버러지들까지 내가 나서야 하는가.”

“그러면…….”

“어서 다녀오라고.”

“…….”

“아, 그리고 여기 백작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면서? 그 여자는 어디 있나?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던데.”

‘젠장할 자식…….’

로크는 쌍욕을 내뱉었다. 이제야 카림 백작이 거리가 있는 이곳 보호령까지 온 목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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