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칼튼하임>
카림 백작은 요즘 살맛이 났다. 공작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후작이던 시절에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느 정도 막나가도 상대방들은 항상 한 수 접어주었으니까. 후작은 몰라도 적어도 같은 백작이라면 자신이 눈치 볼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공작이라니! 순식간에 대륙으로 퍼져 나간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한 건 카림 백작이었다.
그러던 와중 아래 자신의 아래 있는 자작령의 쌍둥이로부터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왔다.
<뭐… 너희 자작령 근처에 있는 로크 자작령 근처에서 변종이 나왔다고?>
<예. 토벌에 참여해 달라고…….>
<됐고.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뭐 다른 이야기는 없어?>
<아, 거기에 신원 불명의 백작이 새로 등장했다고. 여귀족인데 아크라도 없이 나타났다는군요.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나머지 소식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잠깐.>
<네?>
<그… 새로 생겼다는 여백작 이야기 좀 더 해봐라.>
이야기를 다 들은 카림 백작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호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로크 자작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꽤나 먼 거리이긴 하지만 백작인 자신이 달려가면 금방이다.
‘크흐흐… 장난감이 떠나기 전에 어서 도착해야 할 텐데…….’
가끔 발견되고는 하였다, 보호령이 없는 귀족들이. 그런 귀족들을 희롱하는 건 카림 백작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약한 놈을 괴롭히는 것도 재미있지만 강한 놈을 괴롭히는 건 그 희열이 몇 배는 더 하였으니까.
이제까지는 백작 급은 함부로 건드린 적이 없다. 자신도 강한 편이지만 상대가 보호령을 끼고 싸우면 만만치 않기에. 그렇기에 항상 아쉬웠는데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백작 급인데 보호령도 없는 신생 귀족이 나타나다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이다. 아마 이제까지는 못 느껴본 쾌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도착해 보니 난쟁이 놈들이 변하여 생겼다는 변종 놈들은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난쟁이 녀석들 있건 말건 자신에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 새로 도착했다는 자들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나무 안에 있다는 것밖에는…….”
“그래? 찾기에는 좀 넓은데… 크흐흐… 그러면 이 나무를 반쯤 박살 내면 나오려나?”
되도 않는 말을 하는 녀석을 보고 카림 백작이 협박하듯 뇌까렸다. 물론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엄명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녀석은 모르니 이렇게 살짝만 털어주어도 나올 것이다.
“진짜 모릅니다!”
“보호령의 주인이라는 놈이 제 영지 안에 있는 귀족을 모른다는 게……. 아, 맞아. 아크라 공명이 약하다고 했지.”
그제야 카림 백작은 들었던 사실이 떠올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앞의 이 녀석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볼일은 없다.
“넌 그러면 가 봐라. 토벌해야지.”
“…알겠습니다.”
뒤돌아 떠나는 녀석을 보고 카림 백작은 자작의 보호령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미 인상착의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속으로 투덜거렸다.
‘딱 봐도 여귀족처럼 생겼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나. 이놈의 팔다리를 틀어야 하나…….’
자신도 들은 대로 전달한 것뿐인데 사지가 틀릴 위기에 처한 쌍둥이는 다행히도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림 백작이 그 여귀족을 찾았기에.
‘진짜네…….’
정말 딱 봐도 여귀족처럼 생겼다. 귀족을 외모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키가 작은 자도 있고 큰 자도 있고 귀엽게 생긴 자도 있고 사납게 생긴 자도 있다.
하지만 저렇게 귀족처럼 생긴 여자는 처음 보았다. 큰 키에 오만한 눈매. 몸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당당함과 자신감까지.
생각보다 한 수 있어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카림은 천천히 걸어가며 조용히 상대의 기세를 재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긴다.’
아크라의 공명이 없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실력은 자신보다는 조금 위로 보였다. 그렇다면 아크라를 끼고 싸운다면 자신이 이긴다. 상대의 아크라는 듣던 대로 아직 미약했으니까.
일단 이긴다는 확신이 서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던 속도를 높여 성큼성큼 여귀족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스틸이라고 했던가.’
“안녕하신가.”
“넌 또 누구니?”
“…….”
자신도 한 무례 한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이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크흠… 난 카림 백작이라고 한다. 그대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지.”
“하…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음?”
“아니야, 아니야. 무슨 일인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스틸이란 여자의 말을 들으며 카림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봐주기로 했다. 원래 사나운 짐승일수록 길들였을 때의 보람이 큰 법이니.
“후후. 뭐, 남녀사이에 별거 있겠나. 그저 좀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자는 거지.”
파앗!
말을 건네는 카림의 주위로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카림은 전신에서 기세를 내뿜으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하며.
하나는 어차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순순히 즐거운 시간을 가지거나.
다른 하나는 모욕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덤벼들거나.
둘 중 어느 것이 되었건 자신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눈앞의 스틸이라는 자는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흐응… 즐거운 시간? 좋지. 나도 마침 심심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카림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도 즐기는 부류였군.’
예상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크흐흐! 좋아, 그럼 어디로 갈까?”
“나?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
“허허. 생각보다 당찬데. 좋아,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여기서 하자고.”
대화를 할수록 즐거워짐을 느낀 카림 백작은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 번으로는 아깝군. 아예 영지로 데리고 가야겠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던 카림 백작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무언가가 맹렬하게 날아드는 것을 느끼고 기겁을 하며 피하려 들었다.
‘크윽! 늦었다.’
콰앙!
피하기는 늦었기에 황급히 팔을 들어 막아낸 카림은 맹렬히 날아가 키큘러스의 나무 둥치에 거세게 처박혔다. 키큘러스는 그 엄청난 충격량을 고스란히 받아내고도 크게 부서진 곳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귀족들이 키큘러스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워낙 튼튼하기에 귀족들이 웬만큼 난장을 부려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카림은 또다시 날아드는 무언가를 급하게 피한 후 역공을 가했다. 성격이 더러운 것과 실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반격을 하며 시간을 번 카림은 쌍욕을 내뱉었다.
“오? 막네?”
“미친년이! 뭐하는 짓이냐!”
“뭐야?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여기도 괜찮다며? 다 괜찮다고 해놓고는 왜 그러나? 크흐흐. 시간 별로 없으니까 어서 놀자. 좀 있으면 동생이 온다고.”
“뭣! 이런 정신 나간 년이… 크압!”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양손의 검은 장갑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스틸을 보며 카림은 쌍욕을 하며 허리춤의 칼을 휘둘러갔다.
☆ ☆ ☆
“음? 무슨 일이지?”
아펜탈로 들어가는 입구를 모조리 부숴버리고 나무 쪽으로 돌아가던 시안은 자신이 있던 로크 자작령의 키큘러스의 나무에서 굉음과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력을 돋워 살펴보니 한쪽은 스틸 양이었는데 다른 한쪽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둘은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엄청나게 치고받고 있었다. 아무리 후폭풍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저런 굉장한 에너지가 오가고 있음에도 키큘러스의 나무는 가지만 부러질 뿐 기둥은 건재하게 서 있었다. 예전 라그랑 지방을 떠올리면 아무 피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스틸 양이 밀리는군.’
스틸이 조금 밀리는 것을 본 시안은 속도를 조금 더 높여 빠르게 둘이 싸우는 곳으로 접근했다. 사정을 모르기에 일단 싸움을 진정시킨 후 물어보기로 결정한 시안은 둘을 밀어냈다.
투앙!
“윽.”
“크윽.”
갑자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기도에 짓눌린 카림과 스틸은 잽싸게 있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카림과 달리 스틸은 단번에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
“으… 동생, 빨리 왔네.”
“이런… 스틸 양, 괜찮습니까?”
“하하. 뭐, 이 정도 가지고. 침 바르면 낫지. 발라줄 거지?”
“…….”
민망한 농담을 건네는 스틸의 말을 듣고도 시안은 웃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나있는 상처는 방금 전의 싸움이 꽤나 심각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 뭐, 별건 아니고, 저쪽이 갑자기 오더니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보면 모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퉷.”
입에서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스틸은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비등한 상대를 만나 몸을 푸니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물론 시안의 기분은 조금 달랐지만.
“스틸 양, 장갑 좀 줘보십시오.”
“음? 하지만 이거… 동생 손에는 안 들어갈 텐데?”
스틸은 시안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자신의 손이 큰 편이라지만 체격이 큰 시안의 손에 비할 수는 없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손에 낄 것이 아니니까요.”
“음? 그럼 장갑은 왜…….”
스틸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안은 스틸의 손에서 장갑을 쏙 빼내 들고 갔다.
“어? 그거 없으면 나 뭘로 싸워?”
스틸은 갑작스런 시안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카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슨……!”
갑작스럽게 자신을 밀어낸 기운의 주인이 눈앞의 남자임을 알아챈 카림은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경계를 하다가 갑자기 그 남자가 양 손에 건틀릿을 들고 오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눈앞에 급격히 확대되는 검은 물체를 보고 카림은 황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떠억!
“크악!”
날아온 건틀릿에 정통으로 얼굴을 두들겨 맞은 카림은 비명을 질렀다.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건틀릿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곧이어 그 건틀릿이 어디 있는지 왼쪽 옆구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떠억! 따악! 까득!
쉴 새 없이 자신을 두들겨 패는 금속 장갑의 감촉을 느끼며 카림은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끄으응…….”
전신에서 고통을 느끼며 카림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자신이 왜 이런 곳에 누워있는지를 생각해내기 시작한 카림은 이윽고 기억 속에서 그 원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크으… 그 미친 연놈들…….”
자신을 뚜드려 패던 남자는 그 여귀족 옆에 딸려왔다던 부속품이 틀림없다. 꼬박꼬박 존대를 사용하고 기세도 별로 느껴지지 않길래 스틸이라는 자의 애완동물 같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자신을 미친 듯이 뚜드려 패던 그 광경을 떠올리니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몸 내부의 기운을 돌려 몸을 정상화하기 시작하자 아크라가 자신을 도왔다. 그렇게 몸을 회복시키던 중 바깥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음, 로크 자작이군. 제기랄…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
“왜 말이 없나?”
“일주일 정도 되셨습니다.”
“…뭐?”
몸 상태가 엉망인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카림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그 연놈들은 어디 갔어?”
“그자들은… 코쿨 자작령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을 거쳐 레바단 백작령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삼 일 정도 되었습니다.”
“크윽…….”
“혹시… 복수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안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터라 아픈 와중에도 머리를 굴리고 있던 카림 백작은 로크 자작의 소리에 역정을 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로크 자작은 자신이 그란족의 흔적을 쫓아가 본 광경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다고? 그 많던 알파 녀석들이? 그리고 그 부하들도?”
“네…….”
녀석들의 시체를 통해 군대의 규모를 파악한 로크 자작은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이 넘는 알파에 그 몇십 배는 훨씬 넘는 붉은 난쟁이들. 이 정도면 자신들 보호령은 그냥 쓸려나간다. 고위귀족들이 합심해서 막아야 할 정도로 붉은 난쟁이들은 세력이 커져 있었다.
“…그걸 날 뚜드려 팬 녀석이 혼자서 했단 말이지?”
“별로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더군요. 혼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최소 후작이라는 뜻인데…….”
“…망할.”
이러면 계획을 완전히 수정해야 한다. 그 정도로 강대하다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리다.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건 아버지를 잘 모르는 자들이 하는 소리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랜 세월 아버지를 보아 온 자신은 안다. 칼튼하임 공작은 그렇게 자식을 끼고 도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후작 시절에 자신이 방종하게 놔두는 이유도 자신을 미끼로 하여 낚여든 귀족들을 압박하려고 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세력이 필요 없는 공작이 되었으니 그런 낚시를 할 이유도 없다.
단신으로도 후작령을 압박할 수 있고 벽에 막혔으니 평민들로부터 수급하는 아크라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뭐하러 후작령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겠는가. 자신이 공작이 되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사가 말해준다. 이제까지 모든 공작들은 자신을 키워낸 후작령을 떠나갔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실제로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칼튼하임 후작령은 지금 아버지 밑에 있던 귀족들의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이 말은 아버지가 보호령을 떠날 의사를 비쳤다는 것이다. 아크라는 골고루 나눠먹게 되겠지만 새로운 후작이 탄생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카림 백작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우선은 아버지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다음 판단은 아버지가 하게 될 것이다.
카림 백작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영지로 몸을 날렸다. 칼튼하임 후작령과 연결되어 있는 쌍둥이는 이 근방에는 자신의 영지밖에 없다.
카림 백작은 자신의 백작령으로 돌아온 후 쌍둥이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쌍둥이의 손을 잡고 있는 카림 백작은 답지않게 엄청나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녀석들이 아펜탈을 모조리 파내어 버렸다고? 너는 두들겨 맞고?>
“예, 아버지.”
카림 백작은 주눅이 든 채로 말했다. 언제 대해도 자신의 아버지, 칼튼하임은 너무 무서웠다. 심지어 쌍둥이를 거쳐 전해져 오는 음성조차도. 후작일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공작이 되니 자신을 억누르는 위압감이 훨씬 늘었다.
<그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설마… 힘을 빌려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보는 칼튼하임 공작의 표정을 본 카림 백작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이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런 사소한 일까지는 보고 안 해도 된다. 그리고 너도 슬슬 돌아오도록 해라.>
“아버지, 설마?”
<그래. 콘-라드 공작이 방문한다. 너에게도 유익한 경험일 테니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 ☆ ☆
‘흐음, 어떤 녀석들이지…….’
이야기를 마친 후 쌍둥이의 손을 놓은 칼튼하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들었지만 별로 유익한 정보는 없어 보였다.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칼튼하임은 생각이 복잡해지자 잠시 그 생각을 접어두고 자신에게 들어온 보고를 떠올렸다.
“뭐, 아펜탈이야 별 의미는 없지만… 완전 부서졌다면 그것 또한 좋지. 그나저나… 콘-라드 공작…….”
최근 자신이 공작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콘-라드 공작이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아마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예상했던 바였다.
“후후. 기다리고 있지.”
칼튼하임은 곧 방문할 콘-라드와의 만남을 상상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나는 여기 와서 이곳 사람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거든. 품위라고는 없고.”
“…….”
“그런데 동생을 보니 이미 훌륭하게 적응한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네. 세상에. 후후후후.”
“…….”
‘세상에, 내가 스틸 양에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시안은 놀림당하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틸 양, 제가 생명의 은인이라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제가 왕자님처럼 멋지게 날아와서 구해드렸는데요.”
“그리고 망나니처럼 두들겨 팼지. 후흐흐흐.”
“…….”
“동생, 농담인 거 알지? 그나저나… 그 아펜탈은 다 해결된 거야?”
그 말에 시안은 영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결은 되었습니다. 아예 부숴버렸으니 이제 그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필 그 녀석들을 먹어치워서… 시체에 사념이 남아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었다며. 계속 죽이려고 쫓아왔다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나저나… 오 년이라. 그러면 동생은 거기 천 년 넘게 있었던 거야? 그러면 이제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못 하겠는데.”
예전 아펜탈에 빠졌을 때는 잠깐 다녀왔는데도 일주가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여기서 오 년이 지났다면 그곳에선 천 년은 기본으로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마 팔 층에 빠졌을 때라 그랬을 겁니다. 한 층씩 올라올 때마다 그 차이가 줄어드는 것 같더군요. 실제로 계산해보니… 한 100년 정도 빠져있던 것 같았습니다. 출구가 있는 1층 같은 경우는 현실이랑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흐음… 그러면 아직은 동생이구나. 후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스틸은 아크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아크라라는 거 진짜 편하네. 공명만 따라 가면 보호령이 나온다니.”
“그거 바로 갈 수는 없답니까?”
“그러기엔 보호령 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더라고.”
수많은 평민들의 아크라와 강대한 기운이 흘러 다니는 키큘러스 나무라고 해도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면 영향을 끼치기 힘들다. 실제로 스틸의 몸 안에 있는 아크라도 거대한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미세한, 아주 미세한 공명. 그 공명과 개략적인 방향을 바탕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조금씩 공명이 커지는 방향으로. 예민하기 짝이 없는 초인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공명의 증감을 느끼지 못 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귀족들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다. 평민들은 길잡이를 활용한다. 하지만 길잡이 역시 도시 하나 정도가 한계이다.
“흐음… 후작이나 공작 같은 경우는 보호령 하나 정도는 건너뛰고 직행할 수 있다고는 하는데… 나는 아직 무리인 것 같아. 그런 걸 보면 확실히 후작 아래겠네.”
“뭐, 두들겨 팬 사람도 백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틸 양은 여기서 백작에 해당되나 보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저 멀리 거대한 나무가 보이는 것을 보고 스틸이 입을 열었다.
“이제 보인다. 멀긴 진짜 머네…….”
저 멀리 보이는 키큘러스의 나무가 코쿨 자작령이리라. 확실히 로크 자작령이 큰 편이었는지 코쿨 자작령이라는 곳의 키큘러스 나무는 로크 자작령에 비해 조금 작은 편이었다.
도착하고 나서 스틸과 시안은 이곳의 주인이라는 코쿨 자작을 찾았다. 이곳은 두 명의 남작과 코쿨자작이 함께 아크라를 수급하고 있다고 한다.
“반갑습니다. 이곳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코쿨입니다.”
코쿨 자작은 쌍둥이를 통해 미리 로크 자작에게 연락을 받은 상태였기에 대접에 소홀함이 없이 둘을 맞아들였다. 물론 연락이 없어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새 스틸의 몸에 가득 들어찬 아크라는 강대한 공명을 일으키며 코쿨을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긴장한 상태의 코쿨을 보며 스틸은 코웃음을 쳤다.
“봐 봐. 이러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만약 아크라가 없으면 스틸 양은 정말 나쁜 사람이 될 겁니다. 하루에도 몇 건씩 폭행 살해 죄목이 추가될 테니까요. 협박으로 끝나는 게 어딥니까.”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코쿨 자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로크 자작에게 듣기로는 이자는 옆의 백작보다도 더 강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몸속에서 단 하나의 아크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자가 더 위험했다. 실수로 건드리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긴장하던 코쿨 자작은 대화주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레바단 백작령은… 콘-라드 공작에 대한 정보를 찾으러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최근에 그곳을 들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 뭔가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흠… 콘-라드 공작님에 대한 정보가 목적이십니까?”
“그건 아니고 좀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말에 코쿨 자작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다가 손바닥을 쳤다.
“아… 혹시 이곳에 오시면서 남작 보호령을 들르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냥 달려왔습니다만…….”
“그렇다면 못 들으셨을 수도 있겠군요. 레바단 백작령까지 가실 필요는 없으실 듯합니다.”
웃으며 말하는 코쿨 자작을 보며 시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귀족들에게는 쌍둥이로 구성된 연락망을 통해 연락이 쫙 돌았습니다. 콘-라드 공작이 칼튼하임 공작을 만나러 그의 본거지인 공작령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곳으로 바로 가시면 될 듯한데요.”
“허? 그게 모든 귀족들이 연락을 할 만한 사항입니까?”
만나러 가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남작 급 귀족들에게까지 연락을 쫙 돌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시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습니까.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선물을 뜯어보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코쿨 자작은 궁금해하는 시안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