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즉위식>
평민들이 항상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 귀족의 작위는 누가 매기는 것이냐고.
명확한 기준은 없다. 하지만 상위 귀족들이 보면 이것이 명확히 보인다고 한다. 고로 자작이 보면 남작과 자작의 경지가 보이고 백작이 보면 백작과 자작의 경지가 구분되어 보인다고 한다. 고로 작위는 상위의 귀족들이 정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작을 평가할 수 있는 존재는 누가 있을까?
당연히 공작뿐이다.
전 대륙의 귀족가가 들썩이고 있었다. 후작령에서 백작령으로, 백작령에서 자작령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드넓은 대륙을 들썩이게 할 만한 소식.
<공작 즉위식이 시작된다.>
백 년 내에 몇 번 있지 않는 공작의 탄생. 그리고 공작으로서 인정을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앞에 탄생한 공작과의 승부. 딱히 이럴 필요는 없지만 이제까지 계속해서 이 공작의 즉위식은 릴레이를 이어갔다. 세간에서는 공작끼리 막내를 탈출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간다는 농담까지 돌 정도이다.
이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몸이 달아올랐다. 혹시나 이 세기의 대결을 관람할 수 없을 지가 궁금했기에. 특히 가장 최근, 콘-라드 공작의 즉위식은 주위 사람들 몰래 벌어졌기에 사람들의 갈망은 더욱 컸다.
여기에 대해서 칼튼하임 공작과 콘-라드 공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휩쓸려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는 놈들은 구경하러 와라.>
여기에 쫄아서 오지 않을 녀석들은 귀족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말을 듣고 오지 않는다면 희대의 겁쟁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한 단계 위의 귀족들 대결만 보아도 얻는 것이 많은데 공작이라니. 그 아크라의 공명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것이다. 자존심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각지의 귀족들은 자신의 보호령을 보호할 최소한의 귀족만을 남겨놓고 모조리 칼튼하임 후작령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칼튼하임 후작령의 키큘러스는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귀족 중에는 코쿨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안과 스틸, 그리고 코쿨 자작은 아크라의 공명을 쫓아 거침없이 평원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어려보이는 시안을 상대로 코쿨 자작은 존대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외모로는 상대가 몇 살인지 전혀 판단할 수 없으니. 그리고 로크 자작의 말처럼 그리 강하다면 앳되 보이는 외모와 달리 수백 년은 넘게 묵었을 것이다.
“흠… 아까 그 남작 두 분들은 안 와도 되는 겁니까?”
“칼튼하임 근처는 괜찮지만… 저희 영지 근처는 나리쟈 급 종들이 꽤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는 편이라 남겨두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음? 칼튼하임 근처는 적대 종족이 거의 없습니까?”
“한 300년 전인가… 알파가 나타났는데 상당히 위협적이어서 대대적으로 토벌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로는 약대 종족이나 우호종들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살벌하게 뿌리를 뽑아버려서 그걸 본 적대종들이 올 생각을 못 했다고 하더군요.”
“허어…….”
그 이야기를 들은 시안은 그란족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크자작은 위협이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귀족들과 연합하여 온 수림을 헤집으며 그란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시안이 말했지만 별로 귀담아듣지는 않는 눈치였다.
“신기하군요. 다들 호되게 데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청소를 하면 근방에 남아있는 로탄 급 적대종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귀족들은 과하게 로탄 급 적대종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웜이나 무라칸이라는 녀석들이 사고를 쳤다지만 그게 3000년 전의 일이다. 시안이 들으니 공작의 수명도 1000년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당시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인데 이런 반응은 이상했다.
그 말을 들은 코쿨 자작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으으으.”
“음?”
“아닙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리고 이어지는 코쿨 자작의 말에 시안은 혀를 찼다.
“허… 귀족에 올라가면서 그런 걸 겪는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키큘러스의 묘목을 받으러 갈 때 그런 일을 겪습니다.”
남작은 무리이지만 자작 정도 되면 이제 키큘러스의 나무를 심은 보호령을 가지기를 누구나 원한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기에.
키큘러스의 나무는 이제는 로르발 공작가에서 분양을 진행한다. 키큘러스 후작가에서 개발했지만 이제 키큘러스 후작은 공작이 된 후 그 비법을 로르발 공작가에 넘겼다.
자작들은 처음에는 긴장하며 로르발 공작가를 찾아간다. 이미 분양을 진행한 귀족들이 말하기를 항상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협박하기 때문이다.
<으… 나는 두 그루 받으라고 하면 못 받는다.>
도대체 무얼 지불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별로 가진 것도 없기에 쭐레쭐레 로르발 공작가로 찾아가면 로르발 공작가에서 자작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로르발 공작가. 거칠 것 없고 권리만을 탐하는 귀족들에게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 강대한 집단.
<우리가 너희들을 지켜보니… 보호령이 가지는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더구나. 가끔 업무태만으로 알파의 탄생을 방치하는 녀석들도 보이고. 너희가 필요에 의해 나리쟈 급 종족을 방치하는 건 이해하지만… 로탄 급은 그러면 안 된단다. 우리가 이제부터 그 의미를 보여주마.>
그러고는 무라칸의 영역으로 자작을 끌고 가서 경계의 최전선에 던져 넣는다. 로탄 급은 어떤 녀석들인지 알려주기 위해.
<으아아아악!>
그렇게 반쯤 죽을 뻔한 녀석을 몇 번 더 강제로 밀어 넣어 영혼을 탈탈 털어놓은 다음 몇 가지 약속을 하고 키큘러스의 나무 묘목을 건네어 준다.
“와우… 그분들도 생각보다 막나가네요.”
인간종을 지탱한다는 로르발 공작가의 방식은 생각보다 과격하고 투박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간단한 방법과 이능 몇 종류로 이 대륙의 인간종을 착실하게 강대하게 만들었으니. 실제로 계속 하여 키큘러스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었고 귀족들의 숫자도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호령을 가진 귀족의 작위가 올라갈 때마다 또 끌고 갑니다. 흐휴…….”
“…….”
후작 같은 경우는 그 귀족령을 보호하기 위해 세 번이나 끌려가고 경지가 올라갈수록 국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에 더 오랜 시간 붙들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로르발 공작가가 그때마다 하는 말은 비슷했다.
<몇백 년씩 사는 놈들이 겨우 그거 가지고. 이런 것도 다 좋은 경험이 된다. 너희는 자랑스러운 인간의 건아다. 힘내라!>
실제로 그곳에서 치고받고 싸우면 빠르게 강해지긴 한다. 하지만 완전 너덜너덜해서 돌아오게 되는 그 경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옥 같은 경험이지만 그렇다고 경지를 올리는 일을 포기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로탄 급의 위험성을 몸에 강제로 때려 박고 돌아온 귀족들은 결국 주변의 알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허… 대북벽 비슷한 곳이네, 강제로 끌려가긴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셋은 땅을 박차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코쿨 자작은 칼튼하임 후작령에 가 본 적이 있는지 굳이 영지에 들러 방향을 듣지 않고도 희미한 공명의 증감을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발걸음에 맞추어 가려니 조금 느린 감도 있었지만 바쁜 일도 없고 말동무를 하며 가니 이 세계에 대해 들을 수 있어 재미있었다.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무언가가 살짝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스틸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공명이 희미한 게 가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설마 저게…….”
“네, 맞습니다. 칼튼하임 후작령의 키큘러스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와우…….”
스틸은 달리다 말고 탄성을 내뱉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 저 나무에 비하면 로크 자작령의 키큘러스는 애들 장난이었다. 산맥의 한 자락을 모두 먹어치울 기세로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
“하하. 그래서 저 키큘러스의 별명이 <블라덱>입니다. <검은 뱀>이라는 뜻이지요. 기둥이 마치 뱀의 비늘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오, 별명도 있어?”
“그럼요. 후작령의 키큘러스 정도 되면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보호령이라고 해도 칼튼하임 후작령의 키큘러스는 조금 특이합니다.”
“흐음? 뭐가 특이하지?”
“보통은 귀족이 되고 자작의 경지에 올라 로르발 가문에서 키큘러스의 묘목을 분양받는다고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렇지.”
“하지만 몇몇 후작가의 키큘러스들은 조금 다릅니다.”
“흐음… 왜 그렇지?”
스틸의 질문에 코쿨 자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저 나무가 몇 년 정도 자란 것처럼 보이십니까?”
“흐음… 확실히 저런 건 몇십 년 자란 건 아니겠지?”
귀족들의 수명이 길다고 하지만 저런 나무 하나를 나이 먹어가며 키우려면 어림도 없어 보였다.
“맞습니다. 저건 키큘러스가 만들어 진 당시부터 키워진 나무입니다. 무라칸과 스웜의 난 이후 귀족들의 수가 확 줄어들었을 때 세워져 지금까지 자라왔지요.”
“흠? 귀족의 기운을 받아 자란다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 당시에 살아남은 평민과 귀족의 수가 급감했고, 또 그 사이를 틈타 로탄의 종족들이 크게 세를 키웠었지요. 그 때문에 귀족과 평민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수가 있는 후작들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 당시 총 스물한 개의 키큘러스 나무가 인간의 영역 전역에 세워졌지요. 그리고 로르발가가 스웜과 무라칸을 막고 있던 사이 키큘러스와 후작들을 중심으로 평민들과 모든 귀족들이 힘을 합심하여 키워내기 시작했습니다.”
“흐음…….”
“그 이후 스물한 개의 키큘러스를 중심으로 차츰차츰 세력을 키워가며 다른 종족을 밀어붙이고 점차 후작 아래 백작들과 자작들이 자신의 보호령을 세우며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눈앞에 있는 저 키큘러스 블라덱도 3000년이나 나이를 먹어 가며 자란 것입니다.”
“스물한 개라… 그러면 후작 중에서도 강대한 자들만 가질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후작가의 키큘러스라고 해도 같은 키큘러스가 아니지요. 그리고 저런 스물하나의 키큘러스를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호오… 뭐지?”
“<공작의 둥지>라고 불립니다.”
“공작의 둥지라…….”
“저 키큘러스를 차지할 정도의 강대한 후작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공작이 되거든요. 바꾸어 말하면 공작이 되려면 저 정도의 거대한 키큘러스를 가지고 끊임없이 아크라를 공급받으며 커가야 한다는 소리이고요. 저렇게 공작의 둥지를 끼고 끊임없이 경지를 높여간 후작은 결국 공작의 경지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보호령을 떠나가면 다른 후작들이 저 공작의 둥지를 물려받고요.”
“과연… 그래서 키워낸 것이 아니라고 한 거군. 한 명이 키워낸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요. 반대로 저 키큘러스들이 후작을 키워낸다고 보면 됩니다. 게다가 저 키큘러스에서 수련한 공작들은… 무언가 특이한 이능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나무이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달리니 어느덧 블라덱의 뿌리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흠… 숙박은 어떻게 하지요?”
“하하, 귀족들은 기둥 안에 머무르면 됩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수가 모여 있을 겁니다.”
“호오… 벌써요?”
“뭐… 금방 도착한다고 했으니까요. 공작이라면 키큘러스의 공명을 더 빠르게 쫓아올 수 있지요. 이쪽으로 가시지요.”
코쿨 자작은 앞장서서 달리며 블라덱의 숙소 쪽으로 둘을 안내했다.
☆ ☆ ☆
“흐음… 도대체 어느 나무를 끼고 자란 거지…….”
칼튼하임 공작은 콘-라드 공작에 대한 정보를 읽으며 곰곰이 고민했다. 처음에는 나무를 끼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란 자수성가형인가 했지만 듣자하니 각종 이능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를.
“뭐… 붙어보면 알겠지.”
붙어보면 알 수 있다. 칼튼하임은 곧 도착할 콘-라드를 기다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저자들이 이번에 새로 출현했다는 자수성가형인가? 흐음… 확실히 이제는 카림 백작으로는 힘들겠군.’
남쪽 지방에 후작령을 가지고 있는 리츤 후작이 새로 기둥에 들어온 둘을 보며 말했다. 여자 쪽은 확실히 강했다. 보호령을 가지고 꾸준히 수련하면 후작의 경지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온몸에 충만한 아크라의 공명이 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카림 백작이라면 백작 중에서도 꽤나 강한 편이지만 저 정도라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아크라가 없는 걸 믿고 덤볐나 본데, 이제 아크라가 자라났으니 붙으면 지게 될 것이다.
후작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훤히 드러나 있는 여자보다도 남자 쪽이었다.
홀로 알파가 생겨난 변종 난쟁이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는 자. 로크 자작으로부터 퍼져 나온 소문을 들어보니 그 정도 병력이라면 자신도 힘들었다. 실제로 얼간이 카림 백작은 저 여자에게 집적거리다가 남자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아크라의 공명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소문이 맞다면 최소 후작 급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자들이 두 명을 경계하는 이유였다.
칼튼하임 공작이 콘-라드와의 대결 후 이 영지를 떠나가면 이 블라덱에 자리 잡을 후작 경쟁자가 하나 늘어날 수도 있기에.
리츤 후작이 굳이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이곳, 블라덱까지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물론 공작끼리의 전투는 후작으로서도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이곳에 모인 후작들의 숫자를 설명할 수 없다.
‘과연 블라덱…….’
자신이 자작 시절부터 키워온 키큘러스 보호령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키큘러스와 비교하니 초라하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평민으로부터 수급되는 거대한 양의 아크라와 블라덱 자체가 품고 있는 기운에 리츤 후작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같은 후작의 키큘러스라고 해도 차이가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직접 와서 보니 더욱 탐이 났다. 아마 주위의 후작들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전투가 끝나고 생각할 일이다. 공작 간의 결투라면 분명 얻을 것이 많으리라.
리츤 후작은 전투의 광경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공작들이 서 있는 블라덱의 위쪽을 바라보았다. 블라덱에서 거리가 있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이 정도 거리면 구경하기에는 충분하리라.
☆ ☆ ☆
“평민들은 다 뿌리 안에 숨어있나 보군요.”
시안이 기둥 안에서 바깥을 보며 말했다. 안쪽은 곧 있으면 시작될 공작간의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자리 잡고 있는 귀족들로 분주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뿌리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기둥 쪽과는 달리 뿌리 쪽은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대결이 진행되면 그 여파만 해도 상당할 테니… 블라덱이라면 그 후폭풍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줄 것입니다. 거리가 좀 있다지만… 평민들 입장에서는 블라덱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지요.”
“…귀족들은 그래도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할 줄 알았는데 다 이 안에 있군요.”
그러자 코쿨 자작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무래도 공작 간의 결투이니까요. 그리고 멀리서도 다 보일 텐데 굳이 그리 가까이 붙을 필요는 없지요. 그나저나 이번 기회에 공작이 얻었다는 이능도 구경할 수 있겠군요. 칼튼하임 공작은 이번에 올랐기 때문에 아무도 그 힘을 확인한 적이 없거든요. 콘-라드 공작도 뭐, 소문만 무성하고… 여러모로 좋은 구경거리가 될 듯합니다. 아마 저쪽 산등성이 쪽에서 싸우지 않을까 싶군요. 평소에 귀족들이 저 산을 넘어 다니기 귀찮다고 했거든요. 이 기회에 지워버리면 편하겠지요.”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라는 자는… 끝나고 만나봐야겠군…….’
한쪽이 죽고 죽이는 결투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결투가 끝나고 나서 자신이 아는 그 콘-라드인지 물어봐도 늦지 않으리라.
“그나저나… 도착은 했는데 왜 시작을 하지 않는 걸까요?”
“뭐, 공작 둘이라는데 할 이야기가 많겠지. 기다려 보자고.”
분명 강대한 기운이 나무 위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는데 시작을 하지 않자 궁금해진 시안의 대답에 스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 ☆
높디높은 블라덱의 꼭대기 부분의 가지에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반갑구먼. 어느 나무를 끼고 자란 거지?”
칼튼하임은 눈앞의 콘-라드를 보며 뇌까렸다. 소문만 듣고 어느 수준인 줄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더 이상 내외부로 변할 수 없는, 인간종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
어린 여자아이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공작이 분명하다.
“그게 중요한가? 후후, 어쨌건 반갑군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공작의 경지에 오르셨기에… 다른 곳에서 일처리를 하느라고 좀 늦었습니다.”
칼-키라트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콘-라드는 오 년간 몸이 좀 자라 숙녀와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수백 년을 넘게 산 칼튼하임의 눈에는 어린아이의 육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순순히 응한 걸로 봐서 자신이 있나보군.”
칼튼하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먼저 공작의 경지에 올랐어도 벽에 막힌 자들은 추가적으로 익힌 이능과 운용에 따라 실력이 갈린다. 그리고 칼튼하임 자신은 자신이 공작의 경지에 오르게 되며 얻게 된 이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 칼튼하임의 말을 들으며 콘-라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이곳에 온 건 가입 제안의 의미가 크지요.”
그 말을 들은 칼튼하임 공작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흐음… 제안이라. 무슨 제안을 하러 온 거지?”
“이번에 공작에 오르셨으니 모르는 게 많으실 텐데요. 뭐… 저도 들어온 지 오 년도 채 안 되었으니… 선배 노릇 할 생각은 없지만 제가 돌아다니던 중인지라 이런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게…….”
“혹시 너도 이미 로르발 공작가에 들어가 있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콘-라드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칼튼하임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그런 콘-라드의 표정과 다르게 칼튼하임은 흥이 떨어진 표정이었다.
“뭐… 다 아는 수가 있지.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그렇지 않을 텐데요.”
콘-라드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그나저나 조금 예상외인데… 자네는 즉위식을 하지 않은 것 아니었나?”
칼튼하임 공작은 콘-라드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했다.
“뭐… 나 같은 경우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니 그냥 가입 제안만 받았지. 나처럼 유능한 인재는 어딜 가나 인기가 많으니까. 심지어 이쪽에서도 말이야. 그런데 그건 별 상관이 없지 않나? 한판 붙어보고 가입 여부만 결정하면 되는 걸 텐데.”
계속되는 상대의 반말에 콘-라드도 더 이상 존대할 필요를 못 느꼈는지 존대에서 말투를 바꾸고 원래의 말투로 돌아갔다. 사실 자신의 나이도 환생한 나이를 다 합치면 결코 저자 밑은 아니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이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아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아니… 조금 상관이 있지. 자네한테 연락이 두절되면 로르발 그 개자식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 것 아닌가?”
“…….”
콘-라드의 표정은 이제 무섭게 굳다 못해 무표정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벌써 뚫렸구나.”
“후후, 그렇게 열심히 결계 보수를 하러 다녔는데 이 정도쯤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핑계로 부르나 했는데 그동안 즉위식이라는 게 생겼다니… 편하게 되었어. 잘 와주었네. 자네가 없으면 결계 보수도 좀 늦어질 테고… 시간도 벌고… 완벽하구먼.”
“…젠장.”
콘-라드 공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온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상대는 자신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결코 없어 보였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한번 해 볼 생각이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보니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탈출]
-결계가 보수되는 동안 그 빈틈을 뚫고 상대가 침입했다.
-이곳을 탈출하여 로르발 공작가에 침범 사실을 알려라.
블라덱이라도 벗어나야 유리하게 싸울 수 있을 텐데 상대는 아마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뭐하러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를 포기하겠는가.
콘-라드가 인상을 찌푸린 동시에 칼튼하임 공작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콘-라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흐음… 코쿨 자작 님.”
“무슨 일이십니까?”
코쿨 자작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안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분명… 공작들의 즉위식은 사람들이 안 다치도록 조금 먼 곳에서 진행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아무리 블라덱이 잘 버텨준다고 해도… 후폭풍이 상당할 테니까요.”
“그러면 다들 도망가셔야겠는데요.”
“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쪽에서 거대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쿠우우웅.
“컥… 이 무슨?”
“동생? 무슨 일이야?”
스틸이 인상을 찡그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충 안다. 아마 위에서 콘-라드와 칼튼하임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리라. 하지만 동생이라면 무언가 더 자세한 사실을 알 것 같아 물어본 것일 뿐.
“그것참… 공작 정도 되면 좀 더 문화적일 줄 알았는데… 저희도 빠져나가지요.”
여기 있으면 스틸 양도 휩쓸리게 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자리를 옮기고 중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갑자기 주변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귀족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크윽… 이 무슨…….”
시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까지 일정량의 아크라만 수급해 가던 후작의 보호령이 맹렬한 속도로 에너지를 흡수해 가고 있었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아크라를 가지고 있는 귀족과 평민들은 모조리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안에는 스틸 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 ☆ ☆
“…지금 뭘 한 거냐?”
콘-라드 공작이 온몸에 이적을 두르며 공격하는 와중에 발밑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흡력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답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래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은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거슬렸다.
예상외로 칼튼하임 공작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뭐기는. 오랜만에 먹을 것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냥 보내줄 수야 없지 않은가. 기어 들어 오라고 일부러 소문까지 거하게 내고 시간도 많이 줬는데 말이야.”
“준비가 철저하구나… 언제부터 들어온 거지?”
“뭐… 근 오 년간 결계가 약해지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어야지. 여차저차해서 들어왔지.”
“제기랄… 역시 아펜탈이 약해진 것이 문제였나…….”
콘-라드는 입에서 쌍욕을 내뱉었다.
☆ ☆ ☆
“허… 이거 어떻게 하지…….”
아크라가 고장이 났는지 정신이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키큘러스의 나무로 맹렬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주변에 있는 평민들과 귀족들은 힘이 빠지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후작이나 백작 정도 되는 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후작령의 키큘러스, 블라덱의 뿌리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뻗어있었다. 몸속에서 요동치는 아크라의 공명과 빨려나가는 기운을 견디며 여유있게 빠져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위에서는 콘-라드와 칼튼하임이라는 자들의 충돌이 격렬해지는 지 점점 더 위험한 에너지가 여기까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블라덱이 막아주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파괴의 범위가 넓어진다면 여기 있는 귀족들과 평민들 모두가 위험했다.
‘이게 정상적인 건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이 즉위식이라는 건 처음 보지만 이런 걸 다른 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나무 안에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시안은 우선적으로 고민하다가 양 옆구리에 스틸과 코쿨 자작을 끼웠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나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까지 구하면 좋겠지만 우선은 아는 사람들의 목숨이 급했다.
☆ ☆ ☆
칼튼하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로르발… 개자식아, 우리가 돌아왔다.’
눈앞의 콘-라드가 강대하기는 하지만 이미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키큘러스의 나무의 지원을 받으며 싸우는 자신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이긴다.
칼튼하임이라는 이자는 정보가 너무 없다. 역시 로르발 공작가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정보통제가 되고 있었다. 눈앞의 녀석은 로르발 가문 소속이 분명해 보이니 이 녀석을 잡고 정보를 캐내면 된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칼튼하임은 정신없이 콘-라드를 휘몰아쳐 들어갔다. 녀석도 제법 하긴 하지만…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 애초에 이곳은 자신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침범한 이후 키큘러스의 나무를 조심조심 건드리며 개조해 나갔으니까.
자신의 몸에 기운차게 밀려들어오는 막대한 기운들이 그 준비의 산물들이었다. 비등한 싸움이 되었어야 할 전투는 끊임없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재생하며 몰아붙이는 칼튼하임으로 인해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흐하하! 없는 동안 재미있는 기술을 만들었구나! 그건 공작들이 다 익히고 있는 것인가?”
“제기랄 놈… 말 참 많네… 이건 내 독자적인 작품이라고.”
콘-라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채찍을 <루-사라>로 막아내고 쌍욕을 내뱉었다. 녀석이 로데발로부터 이어 받은 멸망한 종족의 이능이나 자신의 이적은 비슷했지만 화력에서 너무 밀리고 있었다.
[상태창: 칼튼하임<키케로>]
-특성: 로데발의 지배자, 검은 뱀의 후계자, 감염된 귀족.
-레벨: 399
-아크라: ……
-보유스킬: 감염, 분열, 포식……
한계에 막힌 것은 같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불리했다. 녀석은 아래에서 귀족들의 기운을 뽑아내어 무한정 퍼다 쓰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아크라의 공명 때문에 단거리 공간이동이나 통신 역시 모조리 막혀 있었다.
‘준비를 철저히 했구나…….’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안에 들어왔으면 누구나 위험했을 것이다. 방심했다고 자책할 수도 없다. 이런 사태는 알아도 막기 난감했을 것이다.
콘-라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단거리 대인 이적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아크마사이>를 칼튼하임을 향해 후려갈겼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크마사이는 공간을 격하고 상대의 체내계수를 거의 만신창이에 가까울 정도로 깎아내 버리는 저주이다. 초인에게는 이보다 더 무서운 이적이 없다. 한순간에 반병신이 되는 이적이니. 저항한다고 해도 상당히 유효한 타격이 나온다. 초인을 잡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공들여 만들어 낸 대이적.
과연 아크마사이에 후려 맞은 칼튼하임의 오른팔은 순식간에 시퍼런 색으로 변색되더니 이윽고 회색 잿빛으로 변하고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튼하임은 허물어지는 오른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쓸어 만졌다. 그 순간 왼손에서 시꺼먼 뱀들이 순식간에 자라나더니 잿빛 팔을 먹어치우며 맹렬하게 올라타 갔다. 오른팔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칠흙색의 뱀들만이 꿈틀거리는 광경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오른팔을 먹어치운 녀석들을 칼튼하임은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검은 뱀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얽히고설키더니 오른팔의 형상을 띠어갔고, 이윽고 칼튼하임의 오른팔은 언제 떨어져 나갔냐는 듯 원상태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본 콘-라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이적도 대단했지만 이는 수십 만, 수백만 명의 법도사가 수백 년에 걸쳐 함께 완성한 학문이었다. 단순히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저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대륙은 진짜… 기괴한 놈들 천지군…….’
속으로 투덜거리는 와중 칼튼하임은 완전히 재생한 오른팔을 들어 콘-라드를 후려쳐 갔다. 그 공격을 막으며 콘-라드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어쩐지 예정보다 빠르게 공작에 올랐다고 하더니…….”
“후후.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100년은 더 걸렸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대륙 인간들은 힘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더군. 무슨 야만인들인 줄 알았다니까. 후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는가? 보아하니 애완동물도 키우고 고풍스러운 취미도 있던데.”
“뭐… 나야 그것까지는 모르지. 나도 이 대륙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이를 갈며 내뱉은 콘-라드는 <라소드-라>와 폭축을 동시에 발동시키며 녀석을 후려쳤다. 칼튼하임은 피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검게 변화시킨 팔로 막아가며 콘-라드를 후려쳤다.
이리저리 밀리던 콘-라드는 결국에는 검은 팔에 후려 맞고 기둥의 한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쿨럭. 젠장…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을 당하려고 수백 년을 노력하여 이곳에 건너온 것인가를 생각하니 콘-라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에 왔다가 이런 꼴을 당하니 더 어이가 없었다.
그런 콘-라드의 표정을 본 칼튼하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이 녀석은 보관해 놓고 천천히 먹으면 된다. 방해꾼이 없어졌으니 다음 단계는 훨씬 수월하리라.
“후후. 뭐,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지 않은가.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칼튼하임의 몸이 더욱 검게 물들어갔다. 이윽고 검게 물든 그의 몸에서 아까 그의 팔을 치료했던 검은 뱀들이 뚝뚝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뱀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백 마리로 늘어났고 슬금슬금 기어가더니 콘-라드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검은 뱀들은 콘-라드를 먹어치울 생각은 없었는지 몸 주위를 감싸 올라갔다. 이윽고 콘-라드의 몸은 수백 마리의 검은 뱀에 휩싸였고 검은 뱀들은 차츰차츰 한 덩어리로 뭉쳐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칼튼하임은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나무의 감염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들킬까봐 천천히 하고 있지만 이렇게 재료도 넘친다면 거리낄 것이 없다.
실제로 상서로운 빛은 없었지만 건강한 빛을 뽐내던 키큘러스, 블라덱은 뿌리부터 빠른 속도로 검은색에 침식당해 가고 있었다. 아마 저 검은빛이 키큘러스를 모조리 감싸 올라오면 자신의 일차적인 목표는 완수가 된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이 녀석의 실종 소식은 금방 전해질 것이다. 통신을 막아놓았다지만 연락이 안 된다면 얼마 안 가 들키게 될 터이니.
로르발 공작가의 다른 녀석들이라면 지금 이 녀석의 몸으로는 상대하지 못 한다. 하지만 아래 있는 녀석을 깨우기만 하면 별문제가 없으리라.
칼튼하임은 음흉하게 웃으며 나무의 아래로 향했다. 애초에 자신의 목적은 이런 공작 두 놈이 아니었으니. 칼튼하임은 여유있게 아래로 날아 내렸다.
“크흐흐… 아펜탈이 왜 약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좋구나.”
칼튼하임은 저주받은 결계를 통과한 이후 일이 착착 잘 풀리자 기분 좋게 웃었다.
☆ ☆ ☆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나무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자 차츰차츰 스틸과 코쿨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날뛰던 아크라의 공명이 가라앉자 스틸이 쓴소리를 내뱉으며 코쿨에게 물었다.
“뭐야, 이거. 원래 즉위식이라는 게 이런 흡혈귀 같은 의식이 있는 거야?”
그러자 코쿨 자작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 했는데… 칼튼하임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 말은 이 현상이 확실히 비정상적인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비정상적이란 생각이 들자마자 스틸은 시안을 쳐다보았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원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시안 동생, 혹시… 나한테 말 안한 거 있어? 아펜탈을 닫을 때… 덜 닫았다거나…….”
그러자 시안이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틸을 쳐다보았다.
“억울합니다. 완전 문까지 다 부숴놓고 왔다니까요. 그 아펜탈의 차원이 이쪽 차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거 부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마 그 샘이 매개체 역할을 하던 모양이던데…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놓고 왔다고요.”
“흠… 그래?”
“스틸 양,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의심하시는 건 매우 안 좋은 습관입니다. 애초에 전 이곳, 칼튼하임 후작령이란 곳은 처음 도착했는데 저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하지만 스틸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그렇긴 한데 왠지 이런 큰일들이 자신들이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다는 것이 수상했다.
“에잉… 그런 눈초리로 아무리 쳐다보셔 봤자 이번에는 저 아닙니다. 애초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쩝… 미안, 동생. 내가 괜히 예민했나봐. 놀라서 그런가.”
“이제는 두 분 다 괜찮으신 거죠?”
“저는 괜찮습니다.”
“후…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데 동생, 어디 가게? 저 사람들 다 구해주려고?”
어디론가 뛰어갈 준비를 하는 시안을 보며 스틸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뭐… 빨아들이는 거 보니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들이라고 하는데… 설마 그 후폭풍에 죽겠습니까. 저는 콘-라드 씨를 찾아와야죠. 안 그러면 기껏 찾은 힌트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 맞다.”
그제야 스틸도 이곳에 자신들이 온 목적이 생각났다. 위에서 싸우는 기세를 보니 단순히 실력을 겨루어 보려고 하는 양태가 아니었다. 상대편은 콘-라드를 완전히 죽일 듯한 기세로 공격하고 있었다. 콘-라드라는 자가 공작이라고는 하지만 칼튼하임도 공작. 게다가 시안이 보기에는 둘 다 고만고만해 보였다.
그 정도라면 무난하게 막을 수 있으리라.
시안은 엄청난 섬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블라덱의 꼭대기를 향해 자신의 몸을 훌쩍 날렸다. 이미 블라덱은 잎사귀와 열매는 모조리 박살 났고 가지마저 쓸려나가고 있는 모양새가 전투의 흉험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콘-라드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 전에 가서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전투가 멈추고 콘-라드의 기운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설마 죽은 건가?’
시안이 당황했지만 좀 더 기감을 강대하게 살피니 그런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마 칼튼하임이란 자가 무슨 수를 쓴 모양인데… 어느새 전투가 끝난 칼튼하임은 뿌리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고 있었다. 시안은 저 아래로 사라져가는 콘-라드와 칼튼하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순간적으로 콘-라드의 기운이 사라져 당황하던 사이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어보였다. 시안은 위로 날아가던 방향을 틀어 칼튼하임이라는 자가 향한 뿌리 쪽으로 몸을 날렸다.
“흠… 여긴가…….”
시안은 블라덱의 아래로 몸을 날린 칼튼하임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괜히 속도 내면 위에서 빌빌거리고 있던 귀족들과 평민들이 다칠까 봐 조용하게 몸을 날렸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뿌리 아래는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존재했기에 살짝 헤매었지만 곧 칼튼하임이란 자의 흔적을 쫓을 수 있었다. 그 길을 쭉 따라가니 그 안에는 뭔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칼튼하임이 있었다.
‘…썩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군…….’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지하 밑에 공간을 만들어 놓고 검은 뱀으로 사람을 똘똘 묶어 아래로 끌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흐흐… 새내기는 관리를 잘 해야지. 선임이 이러면 불쌍한 신입이 위기에 처하지 않나.”
“음?”
‘약간 정신이 이상한가…….’
이해하지 못 할 소리를 하는 칼튼하임을 보며 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몸속에 저런 수상한 걸 넣고 다니는 걸 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있는 그분만 주시면 순순히 물러가겠습니다.”
뭔가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거기에 고춧가루 뿌리기에는 싫었기에 시안은 우선은 대화를 시도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자신이 주먹을 쓰면 일이 더 꼬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흐하하하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로르발의 종놈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온순해졌지?”
“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로르발 가문이라는 곳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음?”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던 칼튼하임, 아니 키케로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로르발 가문의 인장이 녀석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저주스러운 인장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니.
“그러면 넌 뭔가?”
“그것참… 보아하니 콘-라드 그분한테 볼일이 있으신가 본데… 저도 좀 마음이 급하거든요. 웬만하면 저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하!”
그나마 로르발 녀석들이야 쓸 만했지만 로르발의 종놈도 아니란 녀석이 뭐 이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뒤이어진 녀석의 말에 키케로는 어이가 없었다.
“뭐… 제가 이런 말 하면 좀 협박 같아서 그렇기는 한데… 웬만하면 그냥 합의 보고 말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까지 저 건드려서 영… 좋게 끝난 분들이 없어서 안타깝더군요. 보아하니 엄청 열심히 사시는 것 같은데… 뭐, 그런 삶의 자세… 존중합니다. 괜히 안 좋은 일을 당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
“허허허허…….”
완곡하게 말을 했지만 번역해 보니 쳐 맞기 싫으면 자신은 건들지 말고 순순히 콘-라드를 내놓으라… 이 뜻이다. 자신이 이놈을 어떻게 잡았는데!
뭐, 보니까 저놈도 말로 하기 싫은 것 같은데 잘 되었다. 마침 자신도 목표로 하던 바가 완료되었으니 말이다.
“후후. 뭐, 그래.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할 필요 없지.”
“음? 뭔가 오해를…….”
순간 발밑에서 무언가 엄청난 진동이 느껴지더니 땅 밑에서 솟구치면서 시안을 삼켜버렸다.
☆ ☆ ☆
‘제기랄…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이 검은 뱀에 삼켜진 후 이적도, 기운도 모든 것이 무력화되었다. 몸속에 모든 것을 찢어발길 만한 힘은 여전했지만 어쩐 일인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 장막은 어떻게 하지를 못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악사라이의 접속자의 능력은 봉쇄돼지 않은 것인지 허공에 떠오르는 상태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당히 위기라는 것도.
[검은 뱀의 배 속에서 탈출하라.]
-칼튼하임이 <블라덱> 밑에 봉인되어 있던 검은 뱀의 기운을 받아 수련한 <검은 뱀>의 이능에 붙잡혔다. 즉시 탈출하시오.
-탈출제한 시간: 5:14
탈출 시간은 끝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미친… 인장이라도 받았어야 했는데…….’
한 군데에 종속되는 것이 싫어 거부했는데 이런 식의 최후를 맡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바깥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지원인가 싶어 희망에 찬 얼굴로 위쪽을 바라보았지만 콘-라드는 다시 절망스러운 표정에 빠졌다.
[검은 뱀, <블라덱>이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상태창: 블라덱]
-특성: 푸른 뱀, 레바라 부족의 베타, 키케로의 종속.
-레벨: 1
-보유스킬: 포식, 분열, ……
‘제기랄…….’
이제 끝났다. 벽을 넘은 존재라니… 애초에 녀석의 목적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방심하는 사이로 틈타 한 놈이 넘어온 것치고는 일이 너무 커졌다. 콘-라드는 이를 악물었다.
☆ ☆ ☆
“후하하하하! 성공이다.”
<키이익!>
키케로는 뿌리 사이사이로 뻗어 나온 블라덱을 보며 광소를 퍼트렸다. 수 킬로미터는 넘게 뻗어 있는 키큘러스의 뿌리들 사이로 얼기설기 지나가며 매끈한 광택을 뽐내는 검디검은 기둥들.
누가 봐도 이 녀석을 결코 하나의 생물체라고 생각하지 못 할 것이다. 수천 년 만에 봉인에서 풀려나와 활개를 치는 블라덱은 건방진 녀석을 삼켜버린 후 뿌리와 뿌리 사이를 넘나들며 그 거대한 동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넘어올 때만 해도 이렇게 일이 잘 풀릴까 했는데 이 정도로 잘 풀리다니! 키케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풀리는 일처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로르발 녀석에게 발견되기 전에 훌륭한 숙주 하나도 먹어치웠고, 공작이 될 때까지 잘 키워냈다. 녀석이 공작이 되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기에 기다렸지만 기다린 보람이 충분했다. 더불어 콘-라드라는, 기묘한 능력을 쓰는 로르발 가문의 녀석까지 잡았다. 생각해보니 그 녀석도 인장이 없기는 했지만… 결계에 대하여 아는 것만 해도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것이다. 털어보면 많은 것이 나올 것이다. 아니면 아예 감염시켜도 되고. 보아하니 로르발 녀석들이 자신 말고도 신경 쓸 곳이 많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가장 성공적인 것은 봉인되어 있던 자신의 종속, 블라덱의 봉인을 해제한 것. 고작 알파도 되지 못 한 녀석들 둘이 치고받는 것을 뭐 그리 구경하고 싶다고 몰려든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녀석들이 모여들었기에 수월하게 봉인을 해제할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키큘러스에게 신경을 써야겠군.”
이상한 녀석을 삼켜버린 검은 뱀, 블라덱은 거대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녀석도 키큘러스를 부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애초에 이 나무는 수천 년간 검은 뱀을 성공적으로 봉인하고 쭉쭉 빨아먹고 있던 녀석이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튼하임의 귀에서 검은색의 물체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귀뿐만이 아니었다. 입에서, 눈에서, 코에서… 전신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검은 연기는 스멀스멀 주변의 키큘러스 뿌리로 스며들었다.
<크흐흐흐…….>
그간 야금야금 꾸준히 중심부분을 향한 감염을 진행해왔기에 본격적으로 진행하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간은 에너지가 부족하여 힘들었지만 위의 녀석들을 쪽쪽 빨아먹으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보충했으니 생각보다 빠르게 작업이 완료될 것이다.
<블라덱, 너도 올라가서 배를 채워라. 크흐흐… 귀족 녀석들은 귀중한 자원이지만 그 이하야 뭐… 너도 배가 고플 텐데. 아! 우선 이 녀석도 먹고.>
<키이이이익!>
기분이 좋아진 키케로가 키큘러스의 코어를 향해 침범하며 블라덱을 향해 명령을 내렸고 블라덱이 기괴한 괴성을 내뱉었다. 길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검은 뱀이 소리를 내지르니 위의 사람들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반항할 힘도 없어 몸만 움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너도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후후… 삼천 년 만이니.>
<키이이익! 키이익!>
<음?>
블라덱은 계속해서 높은 고음을 내뱉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키케로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고통이라니… 설마… 봉인이 덜 풀린 건가? 제기랄……!>
너무 쉽다 싶었다. 키케로는 서둘러 키큘러스로 향한 침식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사태는 키케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키에에엑!>
고통에 이리저리 몸을 틀어 보지만 뿌리 사이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많이 몸을 틀지도 못한 거대한 뱀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쩌저적!
그리고 거대한 뱀의 목 부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워낙 거대했기에 목 부분이라고 해도 입과는 거의 수백 미터 떨어진 부분이었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기묘한 소리는 키케로의 귀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무슨?>
블라덱의 몸 내부는 단순한 배 속이 아니다. 블라덱의 내부는 블라덱에 의해 계수가 조종되는 아차원이다. 삼킨 상대의 능력을 대부분 봉인한다. 게다가 차원이 다른 만큼 저렇게 뱃가죽을 찢어낸다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정해 보아도 블라덱의 목 한가운데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캬악!>
이윽고 블라덱의 목 한가운데가 벌어지며 기묘한 존재가 튀어나왔고, 블라덱은 고통을 참지 못 하고 수억 마리의 작은 검은 뱀으로 분열했다. 그 사이로 두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나왔다. 자신이 집어삼킨 콘-라드와 방금 먹으라고 시킨 칼튼하임이었다. 저것만 보아도 블라덱이 방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키케로는 짐작할 수 있었다.
“후…….”
<제기랄… 블라덱, 녀석을 막아라!>
시간을 벌어야 한다. 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이 키큘러스의 감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녀석은 결코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키케로는 쌍욕을 내뱉으며 코어로 향했고 이윽고 배 속에서 나온 시안을 향해 수억 마리의 검은 뱀들이 맹렬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후… 하… 심호흡… 심호흡… 은 무슨! 아오!”
녀석을 쫓아갈까 했지만 검은 뱀 녀석들을 내버려두면 옆에 기절해 있는 콘-라드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약한 녀석들이라고 해도 사방에서 조여와 몸을 빼기가 쉽지가 않았다. 바깥으로 나온 시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검은 뱀 녀석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 ☆ ☆
<후… 무슨 저런 미친 녀석이…….>
키케로는 키큘러스의 코어를 감염시키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중하자… 집중.’
블라덱은 포기한다. 저런 무식한 녀석 손에 걸려서 살아날 수는 없으니. 시간을 버는 용도 정도로만 써야 한다. 콘-라드와 칼튼하임이라는 녀석도 포기한다.
키큘러스만 감염시키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일단은 시간을 벌 수 있다.
키케로의 다급한 마음을 반영하듯 키큘러스의 코어를 잠식해 들어가는 검은색의 연기와 진흙은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른 보람이 있었기에 어느덧 키큘러스의 나무 전체는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인하여 검게 물들었다.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가 한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와 진흙에 의해 침식된 광경은 자못 기괴하기까지 했다.
‘됐다… 이제 결계만 해제시키면…….’
“하… 여기 있었네.”
<……!>
키케로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자신의 감각을 집중시켰다. 아까 블라덱을 찢어버리고 나온 그 기괴한 녀석이 자신이 자리 잡고 있는 키큘러스의 코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제기랄… 벌써… 후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키큘러스의 코어는 나에게 잠식된 지 오래니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후려칠 준비를 하는 시안을 본 키케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이런 무식한 녀석! 나는 이미 키큘러스와 동화되어 하나나 다름없다. 나를 죽이려면 키큘러스를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래도 괜찮으냐?>
“뭔 소린지… 거참.”
주먹에 뿌득 힘을 주는 녀석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진 키케로는 황급히 외쳤다.
<이런 미친……! 키큘러스를 부숴 버리면 결계에 구멍이 날 텐데… 괜찮다는 것이냐! 너희가 그렇게 열심히 지켜온 결계인데……!>
“그거참… 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만 여쭤봅시다. 그 결계라는 것 때문에 부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렇…….>
“혹시 고 안에 들어가서 놀고 계신 이유가… 이 나무를 죽이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빠르게 줄어들어 가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을 보며 시안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
“그럼 이제 별로 할 말 없지요?”
<잠깐…….>
빠악!
키케로가 무어라 항변하기 전에 시안의 손에 응집되어 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그대로 감염의 중심이 되고 있던 코어를 후려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