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결계>
“끄으으응…….”
[퀘스트 성공: 검은 뱀의 속박에서 벗어나셨습니다.]
-……
허공에 뜨는 상태창을 무시한 채로 이리저리 몸을 풀던 콘-라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설마 로르발 가문에서 나왔나……?’
하지만 콘-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나온다면 미리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숨길 이유는 없으니.
“그러면 도대체 누가…….”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찢겨나간 검은 뱀의 사체가 있었다. 전해 들은, 봉인되어 있던 레바라 부족의 알파가 분명하다. 변이 1단계였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그 순간 위에서 강대한 파동이 격렬하게 퍼져 나왔다. 콘-라드는 본능적으로 그곳에 해답이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날렸다.
☆ ☆ ☆
<크윽… 크으윽……!>
“허… 그것참…….”
시안은 키큘러스의 코어를 툭툭 후려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검게 감염된 부분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세게 치면 코어가 박살 날 것이고, 그렇다고 힘을 빼고 치니 이자가 끈덕지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나무의 생명력을 갈아먹고 있었다. 자신을 떼어내려면 나무도 같이 죽여야 한다는 이자의 말은 거짓이 아닌지 굉장히 견고하게 동조하고 있었다. 시안 자신이 떼어내는 데에도 고생을 해야 할 정도로.
‘이쪽은 기괴한 종족들이 많구나…….’
오는 도중 코쿨 자작에게 들은 것도 그렇고, 기괴하고 무서운 특징을 가진 종족들이 많다고 했는데 눈앞에 있는 검은 연기도 그중 한 종족으로 보였다. 이건 이능이나 경지에 상관없어 보였다. 경지의 차이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눈앞에 있는 이 연기를 벌써 떨어져 나왔어야 맞다.
쉴 새 없이 녀석을 두드려 패다 보니 검은 연기가 침식하고 있던 범위는 서서히 줄어들었고, 어느새 코어까지 침식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자의 기운도 감소해 있는 상태였다.
<크흐흐흐흐!>
그렇게 두드려 맞았는데 눈앞의 검은 연기는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크흐흐흐… 있다 마다… 이제 되었거든…….>
“무슨?”
그 말을 마치자마자 코어 주변에 남아있던 연기가 맹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화되듯 어딘가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연기가 날아간 자리에는 이미 그 생명력이 다한 코어만이 남아있었다. 결국 그 수상한 연기는 죽기 전에 이 나무의 핵심을 유지하는 코어를 파괴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무슨 자폭까지 하나…….”
시안은 잠시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이 나무가 박살 난 것도 자신의 잘못은 아니고, 어차피 저 수상한 녀석 손에 놔두었으면 이렇게 될 일이었기에 마음을 가볍게 먹기로 했다.
하지만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인물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빠르게 날아 올라왔더니 주먹으로 코어를 후려치고 있던 시안을 발견한 콘-라드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코어가 완전히 박살 난 모습을 보고는 더더욱.
“무슨 짓을… 지금 키큘러스를 파괴한 겁니까?”
“아닙니다!”
졸지에 덤터기를 쓰게 된 시안이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 ☆ ☆
웅장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던 칼튼하임 후작령의 키큘러스 블라덱은 하루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찬연하게 자라나 하늘을 뒤덮고 있던 잎사귀들은 모두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였고, 가지는 콘-라드와 칼튼하임의 전투의 여파로 인해 볼썽사납게 망가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기둥과 뿌리는 온전해 보였지만 실상은 더욱 심각했다. 키큘러스를 유지하고 자라나게 하던 코어가 망가진 터라 뿌리는 천천히 그 기능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고, 아크라와 대기 중의 기운을 흡수하여 항상 충만하게 차있던 기둥은 텅 빈 강정 상태였다. 게다가 깨어난 검은 뱀이 난장을 부린 터에 뿌리의 이곳저곳이 손상되어 있었다.
뿌리 위에는 이제 서서히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귀족들과 평민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몸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천천히 뽑아나가던 아크라가 맹렬하게 나무로 빨려 들어가며 몸 안에 있던 기운까지 모조리 뽑혀나간 터라 사람들은 거의 혼절 직전까지 간 사람들도 있었다. 고위급 귀족들은 그나마 몸 안의 기운을 움직여 저항해냈지만 그럴 능력이 부족한 하위급 귀족들과 평민들은 꽤 오랜 시간 정양을 해야 원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모두 지켜보고 있는 네 명의 인물이 있었다.
칼튼하임 공작과 콘-라드 공작, 시안과 스틸이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그들은 사태를 정리하고 위에 모여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인데…….’
시안은 자신을 콘-라드라고 소개한 인물의 얼굴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긴 건 분명 예전에 봤던 그 여자였는데 존재 자체가 달랐다.
조금 이따 물어보기로 결정한 시안은 묵묵히 눈앞의 칼튼하임과 콘-라드의 대화에 집중했다.
“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칼튼하임 공작, 괜찮습니까.”
콘-라드 공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북쪽으로 쫓겨난 종족, 게르나족에 대해서는 지난 오 년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실제로 감염된 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다행히 상태창으로 살펴보니 감염은 해제된 상태였지만 영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칼튼하임을 보며 콘-라드가 물었다.
“뭐… 괜찮소.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려.”
칼튼하임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족을 지배할 수 있는 종족이 있다니. 이런 종족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공작의 충격은 더욱 컸다. 자신 같은 공작을 지배할 수 있다면 인간족 전체 지배가 가능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공작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수백 년을 살았지만 이런 사례를 들어본 적도 없는 칼튼하임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콘-라드는 그 얼굴을 보고 쓰게 웃었다.
“흠… 원래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여기 계신 분들은 들을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콘-라드는 시안과 스틸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별 상관 없을 것 같았기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어 보였고.
“이번에 칼튼하임 공작의 몸을 차지한 종족은… 게르나라고 불리는 종족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종족인데…….”
“당연하지. 로르발가에서 일부러 그에 대해 감추었으니까요.”
“흠? 왜 그렇소?”
이렇게 위험한 종족이라면 모두가 정보를 공유하고 대처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자신은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 정도 되는 사람이 모른다면 인간 종족 대부분이 모른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뭐… 안 좋은 역사이기도 하고… 알 필요가 없기도 하고… 알아서도 안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지요. 이제까지는 잘 막고 있었으니까요. 궁금한 게 많으실 텐데… 천천히 설명 드리지요. 어차피 이 정도까지 오셨다면 아셔야 할 테니…….”
그리고 나서 콘-라드는 설명을 시작했다.
☆ ☆ ☆
3000년 전 대륙에는 기괴한 종족들이 많이 살았었다. 개중에는 무라칸이나 스웜처럼 위험한 특성을 가진 종족들도 있고 그란이나 바르칸처럼 흉폭하지만 약한 종족들도 있다. 그때는 인간들이 타 종족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시기였기에 상대적으로 종족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중에도 특별하기로 치면 게르나족에 비할 종족은 몇 되지 않았다.
<게르나>
육체는 없다. 이들은 검은색의 빛을 띠는 연기 상태로 대기 중을 떠돌아다닌다. 이 연기가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체에 가깝다.
중요한 점은 이들은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안착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 최종 목적지는 타인의 육체가 된다. 그것도 다른 종족.
식물족이건, 충족이건, 기생족이건, 인간족이건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안착할 만한 빈틈을 보이는 종족에게는 바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가며 자신의 지배하에 차근차근 놓는다.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기괴한 정신체와 결합하게 되면 경지가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자신의 숙주를 강하게 만들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는 게르나족이 빠르게 숙주를 강해지게 돕기에. 그 대가로 지배를 당한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건 이들은 3000년 전 이런 식으로 빠르게 대륙 속으로 퍼져 나갔지만 다른 종족들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종족이 숙주를 지배한다고 딱히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아주 서서히 잠식되어 갔기에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확연한 변화를 느끼는 경우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지배하는 종족의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숫자를 야금야금 늘려나갔을 뿐. 대륙 내에서 이런 종족의 정체를 아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 종족의 가장 기괴한 특징은 숙주가 강해지면 자신도 덩달아 강해진다는 것. 애초에 자신의 수준 이상의 종족은 감염시킬 수 없는 종족들이었기에 초창기에는 약한 녀석들만 감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의 숙주가 강해질수록 그들의 지배력도 덩달아 강해진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그들은 기존의 숙주가 죽으면 숙주를 죽인 상대에게 옮겨 타는 형식으로 점점 더 강한 자들을 향해 옮겨갔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 로르발 가문은 인간종 곳곳에 퍼져있는 녀석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발견하고 다른 종족들도 살펴보니 다른 종족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이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 좀먹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숫자도 숫자지만 강자들에 포진해 있는 비중이 상당했다는 것. 약한 시절부터 같이 강해져 왔으니 긴 세월동안 그들이 지배하는 강자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결국 실질적으로 대륙이 이 녀석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것.
로르발 입장에서는 이들이 심하게 거슬렸다. 조용히만 산다고 다가 아니다. 멀쩡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앉다니. 게다가 지금에야 조용하게 산다고 하지만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 순간 대륙은 뒤집어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간종을 강대하게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던 로르발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신들의 종족을 강하게 만들고 귀족들을 강하게 하면 뭐하는가. 저들의 지배를 받는다면 죽 쒀서 개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로르발 공작은 결단을 내린다. 자신들 종족을 좀먹고 있는 이 녀석들을 모조리 쫓아내기로.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녀석들은 인간족 전체에 너무나도 많이 퍼져 있었을뿐더러 다른 종족 내에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잡아 죽이겠다고 덤벼들면 다시 종족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녀석들을 쫓아낸다고 해도 다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 연기처럼 눈에 보이지만 그건 형상일 뿐, 거의 영체상태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방어는 별 의미가 없다. 쫓아낸다고 해도 도망갔다가 다시 감염되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로르발 공작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저 기생충 녀석들을 모조리 쫓아내거나 없애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다시는 녀석들이 자신들 몸에 침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
그리고 목적이 생기자마자 즉시 계획에 착수한 로르발 공작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감염되지 않은 자들을 모아 계획에 착수했고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며 대륙을 뒤흔들었다.
“감염된 종족들을 쓸어내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의 세력이 강성하다지만… 그 강성한 세력의 대부분이 게르나였으니까요.”
콘-라드가 로르발 가문에서 나온 자에게 전해들은 사실을 전해주며 말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최강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힘의 상당 부분이 게르나로 전이된 상태였다. 게르나에게 감염된 종족은 인간족뿐만이 아니었다. 사방팔방에 산재해 있었다. 개중에는 로탄 급의 강대한 족속들의 강자들도 여럿 포진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가히 반칙에 가까운 종족특성이라고 할 법하다.
게다가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녀석들을 죽여도 녀석들이 죽기 전에 탈출하여 다른 자를 지배하려고 들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로탄족 중에서도 게르나의 힘을 빌려 알파로 진행 중인 강대한 변이종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 로르발 가문의 힘으로도 이 녀석들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로르발 공작은 녀석들을 효과적으로 쓸어버릴, 새로운 종족을 개발했다.
녀석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동시에 알파로 진행 중인 변이종들마저 제압할 수 있는, 강대한 무력을 갖춘 종족을.
“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무라칸이랑 스웜이라는 종족입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새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있던 녀석들을 개조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로지 게르나에 감염된 존재들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
나리쟈 급의 종족을 연구하여 알파로 만들고 강제로 로탄 급 종족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로르발 공작은 자신의 이능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먼저 <인장>을 찍었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지배의 인장. 이렇게 먼저 자신의 지배하에 놓아두면 이들은 게르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스웜이나 무라칸의 종족 특성상 단 하나만 지배한다면 모두를 지배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편했다. 애초에 그런 특성이 있었기에 로르발이 이 종족을 선택하여 개발한 것이긴 했지만.
새로 탄생한 녀석들은 실험장소였던 반도를 벗어나 거침없이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고 게르나의 지배를 받고 있던 종족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게르나의 힘도 강대했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강대해지는 스웜과 무라칸의 힘들 역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먹어치운 인구가 대륙 전체 종족의 삼분지 일에 달했다. 게르나만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그 당시 대륙의 삼분지 일이 게르나의 지배 아래 들어있었다는 뜻이 된다.
“허… 무라칸과 스웜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나…….”
칼튼하임 공작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탄식을 터트렸다. 3000년 전, 대륙을 휩쓸었던 두 대재앙이 로르발 공작가에서 만든 것이었다니.
“뭐… 그 정도로 습격을 당하니 녀석들도 난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결국에는 녀석들을 북쪽으로 싹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반도에서 튀어나와 게르나를 휩쓸어간 로르발 공작은 녀석들을 쫓아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하면 녀석들을 다시 침범하지 못 하게 할 것인가. 녀석들이 영체 상태로 있을 때는 잡아 죽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박멸은 불가능하다는 소리. 게다가 녀석들이 깃들 때마다 쳐 죽인다면 인간종과 게르나 녀석들은 동시에 멸종하고 말 것이다. 그건 로르발 공작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로르발은 게르나 녀석들이 침입하지 못 하도록 거대한 결계를 치기 시작한다. 북쪽뿐 아니라 대륙의 인간종이 사는 범위를 모조리 보호할 수 있는 거대한 결계를.
로르발은 그 힌트를 아펜탈에서 찾았다. 빠져나오기 힘든 지옥의 입구, 아펜탈. 이곳은 육체가 있는 자들에게는 별 영향이 없지만 영체 상태인 자들은 그 근방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실제로 게르나족은 이 근처로 가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기에 서쪽으로 도망가지 않고 대륙 위,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
로르발은 여기에 힌트를 얻었다. 어차피 견고한 결계를 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기에 로르발은 가장 잘 만들어지고 성장가능성이 큰 스물한 그루의 키큘러스를 인간종의 영역 둘레로 쭈욱 심었다. 그리고 거대한 차원 결계를 형성했다.
별건 아니었다. 그저 아펜탈과 키큘러스를 엮어 그 흡입력을 인간종의 영역 전체로 확대한 것일 뿐. 이로써 인간종의 영역에 침입하려는 게르나는 모조리 아펜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대결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흐… 그것도 모르고 예전에 공간이동 좌표를 이쪽으로 열었으니…….’
콘-라드는 예전 타키온과 한 실험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아펜탈로 왜 끌려가는지 정확한 이유를 내어놓지 못 했는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런 결계가 대륙을 감싸고 있으니 공간이동을 시도하면 아펜탈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당연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키큘러스에 의해 공간이 비틀려 아펜탈로 빠지게 되어 있으니까.
“흐음… 그러면 그 이후로 게르나라는 녀석들은 침범해 오지 않은 것인가?”
칼튼하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지요. 굳이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요. 결계만 유지되는 한 들어오지 못 할 터이고… 사람들 머릿속에 사는 기생생물이 있다고 말해보십시오.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
“대충 예상이 되시지요? 아마 서로 조금만 의심이 가도 쳐 죽이고 난리가 날 겁니다. 그래서 비밀로 한 것이지요. 뭐, 안다고 해도 개인 차원에서는 딱히 대처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 사태는 왜 벌어진 것이오?”
칼튼하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에게도 말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결계가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건은 터졌고 자신은 몸까지 먹혔다. 몸의 지배권을 빼앗겼지만 그간의 기억이 모두 남아있던 공작은 그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공작의 벽에 도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자신의 몸에 슬며시 스며들던 검은 연기를.
그러자 콘-라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결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아펜탈이 근 오 년간 확 약해졌기 때문이지요.”
콘-라드는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도착해서 돌아다니던 도중 로르발 공작가에서 접촉을 해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말해주며 자신들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리고 도전정신이 투철했던 콘-라드는 로르발 공작가의 목표인, 인간종을 최고로 강하게 만들자는 목표에 흥미를 느껴 이에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인장을 찍지 않고 동맹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로르발가와 같이 하기로 결정하자마자 그들은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이 요구한 사항이 있었다.
<최근 들어 게르나의 침입을 막던 결계가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소. 아마 근간이 되는 아펜탈이 약해지고 있어서 그럴 터인데… 이 결계를 보수해줄 수 있는가?>
아크라와 키큘러스에 대한 자료를 살피고 결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핀 콘-라드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약해지고 있는 결계를 개조하기 위해 전 대륙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계의 개조는 키큘러스를 중심으로 하고 아크라로 모이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설치되는 법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곳의 이능들은 강대했지만 주로 파괴에 집중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보호나 방어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하지만 자신이 익힌 수많은 이적에는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법진들이 많이 있었다. 확실한 에너지 공급원과 주술의 축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 위에 법진을 덧칠하여 개조해내면 된다. 이렇게 한다면 아펜탈이 없어진다고 하여도 게르나라는 자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스물한 개의 키큘러스를 중심으로 결계를 개조해 나가고 있었는데 아펜탈이 부서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결국 이렇게 사고가 터지고 만 것이다. 만약 시안이 오지 않았다면 이곳을 시작으로 결계가 모조리 부서졌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틸은 시안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웃음을 본 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틸 양, 무슨 표정입니까… 그건.”
“후후. 동생, 내 예상이 맞았지?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
“뭐, 동생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후후. 그래도 내가 맞혔지? 흐하하하! 동생은 항상 예상을 뛰어넘네. 흐흐.”
스틸이 웃고 있는 것을 본 콘-라드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후후. 그나저나 제대로 된 인사가 늦었군요. 시안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뵙는 건 처음이지요? 우선 구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뭐,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정말 콘-라드 씨 맞습니까? 어째 제가 아는 얼굴과 좀 유사한데…….”
시안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흠… 이 육체에 대해 아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이 몸을 통해 전혼을 했습니다. 이 몸의 영혼이 소멸했기에 육체는 비어있었거든요. 전혼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콘-라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혼을 진행하지는 않았기에 이 육체의 주인인 키라트에 관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시안의 묘한 표정을 보니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일단 물어보았다.
썩 유쾌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시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딱 보아도 키라트라는 그 여자는 아닌 듯했다. 시간이 흘렀다지만 강함의 차이가 너무 격심했으니.
아까부터 말투가 좀 어색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육체는 어린 여성이지만 원래의 영혼은 몇백 년 먹은 남성체이기에 그렇다고 하니 이해가 갔다.
“아, 뭐… 그러면… 아닙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러자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뭐… 라가오페에게 많이 듣기도 했지만 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후후… 이게 참 편리합니다. 뒷조사 같은 건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하지만 그런 말투와는 다르게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삼차 변이종이라니…….’
[상태창: 시안 폰 로만]
-특성: 로만가의 2공자, 인간종의 베타. 의도치 않은 파괴자(업적으로 인한 특수 호칭)
-레벨: 3
-보유스킬: ?
로르발 공작을 보았을 때도 턱이 빠질 정도였는데 이자는 상상초월이었다. 라-시안 대륙에서 나고 자란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저쪽 대륙에서 이런 강자가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 찝찝한 특성은 뭐지…….’
콘-라드는 특성의 마지막에 쓰여 있는 한 단어가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무시하고 자신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안 씨는 저쪽 대륙에 남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는 어떻게 건너오셨지요?”
분명 라가오페의 말을 들으니 시안이라는 자는 저쪽 대륙에서 알콩달콩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쪽 대륙에 있다니…….
“아… 그게…….”
시안은 자신이 이곳에 어떻게 건너오게 되었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콘-라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아펜탈 안에 있는 녀석들을 다 쳐 죽이고 뚫고 올라왔다는 말인가… 허 참…….’
이러니 결계가 제대로 유지가 되고 있을 리가 없다.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아펜탈이 아래에서부터 박살이 나고 있었으니. 만약 자신이 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지 않았다면 결계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자신들도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던 방법으로 이자는 뚫고 올라온 것이다.
“허… 대단하시군요.”
콘-라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펜탈에 따로 경비를 두지 않은 이유는 아펜탈을 박살 낼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면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 돌아다니며 모조리 쳐 죽여도 될 텐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하지만 이자는 그것보다 더 위험한 짓을 해냈다.
“뭐…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또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 언덕 아래 있던 녀석들은 무엇입니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시안은 라-샤르-로아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물어보기로 하고 우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딱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강함. 예전 자신이 아펜탈에서 나온 이후 정도의 강함을 보유하고 있던 검은 뱀은 자신이니까 막은 것이지 가만히 놓아두었으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어치웠을 것이다. 공작이라는 자들의 강함을 보고 자신이 최고로 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저런 녀석들이 모이면 위험하다.
“무슨……? 아, 블라덱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러고 보니 베타는 처음 보셨겠군요…….”
그쪽 대륙에는 베타가 없었으니 모를 수도 있다. 자신도 이곳에 와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콘-라드는 이야기를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