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코어>
나리쟈 급의 종족에서 로탄 급의 계급으로 올라가는 자들을 불러 종의 혁신, 알파라고 칭한다.
하지만 인간들이 벽에 막혔다고 하여 그 위의 경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곱 뿔의 하리쟌들은 그 훌륭한 증거이다.
당연히 로탄 급 종족 중에서도 그 벽을 뚫고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 종족들이 있다.
이들 역시 그 종의 첫 번째 개체라는 뜻으로 알파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하지만 나리쟈 급 종족과 로탄 급 종족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나리쟈 급 종족들은 단 한 번의 변이만 거치면 새로운 경지에 올라 알파가 될 수 있지만 로탄 급 종족들은 몇 개의 벽을 뛰어넘어야 알파라는 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종족을 벗어나 그 벽을 뛰어넘고 있는 존재들을 모조리 묶어서 베타라고 총칭한다. 아직 알파가 되지 못 한, 하지만 알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묶어서 말하는 것이다.
‘음… 그러면 나도 그 베타… 라는 것인가…….’
자신도 벽을 넘고 있으니 베타라는 경지에 해당이 되는 듯싶었다.
“아까 시안 씨가 보신 검은 뱀도 베타입니다. 예전에 존재하던 고대의 종족, <레바라> 종의 베타이지요. 그리고 게르나족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아, 설마…….”
“네. 그 녀석들 역시 게르나족의 지배를 받던 녀석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게르나족에게 감염된 상태로 벽을 넘은 것이지요. 게르나족 역시 같이 벽을 넘어버리니… 그대로 감염상태가 유지되는 게 문제이고요. 그런 녀석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로탄족 내부에 있던 녀석들이 얌전하게 구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그 안에서 튀게 행동하면 같은 종족의 습격을 받아 위태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타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직 알파에 오르지는 못 하였다지만 다른 개체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기 때문에 슬슬 지배자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로르발 공작가가 가장 우려한 것도 감염된 베타들이었고.
그렇기에 베타들의 수가 더 늘어나기 전에 게르나족을 급습했다. 그리고 이미 지배를 받던 베타들을 떼거지로 급습하여 제압했다. 녀석들이 강하다지만 베타들 역시 그 수가 많지 않았고 스웜과 무라칸의 숫자가 이미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기에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을 죽이는 것보다 새로 지을 키큘러스의 양분으로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로르발은 녀석들을 지하에 묻어버리고 그 위에 스물하나의 키큘러스를 세웠다.
“그래서 저 나무를 끼고 자란 공작들이 이능을 가지게 되었군.”
칼튼하임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종족의 베타를 기반으로 자란 나무이니… 그 나무를 끼고 자라면 아무래도 이능을 얻을 가능성이 커지지요.”
칼튼하임의 이능 ‘검은 뱀’은 콘-라드 자신이 익힌 이적에 뒤지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대종의 베타들이 자랑하는 비기였으니.
하지만 칼튼하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뭐하는가. 내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지배당하기만 했는데……. 후우… 한심하군.”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가만히 두었어도 당신은 벽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재능이 있으니 당신에게 스물한 개의 키큘러스 중 블라덱이 배정되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시안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저거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겁니까? 저걸 중심으로 결계가 유지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서둘러도 별 의미가 없으니 그런 것이지요. 어차피 저기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아크라를 제대로 공급하기 전에는 에너지가 모자라 결계를 만들어도 작동하지 못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자폭한 녀석은 그런 것을 노렸을 수도 있겠군요. 그나마 나무가 안 부서진 게 다행이긴 하지만…….”
“…….”
귀족은 몰라도 저 많은 숫자의 평민을 어디 가서 구해올 수 있을 리 없다. 아마 저들이 심신을 정양하고 제대로 아크라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묘하게 마음이 평온해 보이는지라 무언가 수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지만 콘-라드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뭐… 저도 결계 보수 담당인지라 정확한 건 모르겠군요. 우선 이 나무에는 못 들어오게 해 놨지만… 코어가 없으면 둘러싸는 결계는 만들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요.”
“음? 무슨 방법입니까?”
“이런 건 원래 프로젝트의 책임자에게 물어보는 게 제격 아니겠습니까. 후후.”
“음? 이곳에서 로르발가로 연결되는 쌍둥이가 있는가?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는데…….”
자신의 후작령에 자신이 모르는 쌍둥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칼튼하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콘-라드는 씨익 웃으며 칼튼하임 공작을 향해 말했다.
“뭐… 다 방법이 있지요.”
그리고 콘-라드는 기운을 집중시키며 이적을 발동시킬 준비를 했다. 예전에 그 흐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 시안이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통신 이적이군요.”
“맞습니다. 제가 딱히 쌍둥이를 통해 연락을 안 해도 되는 이유이지요.”
“허… 통신 이적도 미리 파장을 맞추어놓은 상대가 아니면 굉장히 힘들다고 하던데… 거리 따라 에너지 소모도 커지고…….”
시안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시안 대륙에서도 통신 이적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미리 아티팩트를 준비하거나 센터를 마련해 놓고 정해진 상대와 통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콘-라드가 하는 걸 보니 그런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이래 봬도 공작인데 그 정도 못 해서 쓰겠습니까. 여기서 이적은 저밖에 못 쓰니… 저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차피 쌍둥이가 있으니 별 상관 없지요.”
“하긴…….”
자신이 아는 콘-라드라면 제국의 황제까지 하며 이적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남자이다. 물론 지금은 여자의 몸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런 통신 이적을 사용하지 못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이윽고 콘-라드는 연결이 되었는지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다. 입으로는 시늉만 냈고 실제로는 머릿속을 통해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스틸과 시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가 로르발이라는 자인가 보네.”
“호오…….”
이제까지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로르발 공작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자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시안도 신기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가 궁금했지만 끝나면 다 가르쳐 줄 것이다.
이윽고 대화가 끝났는지 콘-라드의 기운이 점차 사그라졌다. 이적이 종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셋은 콘-라드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 끝났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안 씨가 그래도 이곳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군요.”
“흠…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선… 저희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고, 시안 씨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부터 들으실까요?”
콘-라드의 말에 시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대답했다.
“우선… 콘-라드 씨의 소식부터 듣도록 하지요.”
“아, 그럴까요? 알겠습니다. 우선 저희의 좋은 소식은 결계를 복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행히 나무가 모두 파손된 것이 아니고 코어만 박살 났기에 나무가 말라붙기 전에 코어만 제자리에 끼워넣으면 복구할 수는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키큘러스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곳만 복구해내면 결계는 완성되지요.”
콘-라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일찍 결계를 완성시켰다면 코어가 부서지는 지경까지는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 그러면 결계가 제 기능을 할 수 있겠군.”
칼튼하임 공작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콘-라드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코어를 끼워 넣기 전에 결계를 개조하고… 코어를 끼워 넣고 다시 아크라를 수급하게 되면 결계가 제 기능을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키큘러스의 코어는 몽땅 써버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특히 이 후작령의 코어 스물한 개는 더욱 특이하다고…….”
아까 대화를 하며 들은 이야기 중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러자 콘-라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그게 어떻게 보면 나쁜 소식입니다. 로르발 씨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그 코어의 여유분이 없다고 하는군요.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구하기가 워낙 힘들어서…….”
“저런…….”
시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결계를 복구할 수 있다고 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뭐… 그다음에 시안 씨에게 좋은 소식을 말해볼까요? 시안 씨는 전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어 저를 찾았다고 하셨지요?”
“아… 그렇습니다.”
콘-라드가 아까 이야기하던 도중 나눈 내용을 끄집어내며 묻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라가오페를 찾았지만 생각해보니 라-샤르-로아의 설치는 눈앞의 콘-라드가 담당하였을 것이다. 라가오페는 이적을 사용할 줄 모르니. 통신이적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솜씨를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콘-라드가 대답했다.
“좋은 소식은… 시안 씨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 정말입니까?”
“네.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라-샤르-로아의 설치 가능 여부였습니다. 라-샤르-로아 같은 공간이동 마법은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 저 혼자의 힘으로는 조금 무리이니까요. 다행히도 알아보니… 이곳의 아크라와 키큘러스를 잘 활용하면 조금만 개조해서 이적의 법진처럼 사용이 가능하더군요. 라-샤르-로아처럼 거대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마법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대륙을 건너는 이적은 에너지도 굉장히 많이 들어가고 법진의 개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급한 게 없으시면 무난하게 돌아갈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안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뭐… 이건 시안 씨나 저희에게 모두 해당되는 문제이겠군요. 지금 결계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도저히 그쪽으로 에너지를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결계의 유지에 쏟아붓고 있지요. 제가 각 키큘러스를 연결하는 라-샤르-로아를 아직 설치하지 못 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선 결계를 완전 보수시킨 후 천천히 설치해야 했거든요”
“…이런…….”
“정확히 말하면… 이대로 가면 평생 집에 못 돌아가실 겁니다. 게르나들은 부서진 결계 틈으로 계속해서 침입해 들어올 테고,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우선적으로 결계의 완전 파괴일 테니까요. 지금은 틈이 좁지만… 우선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자들은 키큘러스부터 부수려고 들 겁니다. 스물한 그루의 나무가 결계의 축이 되니까요. 키큘러스 없이는 그런 장거리 이동 이적은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적은 결계를 안정시킨 후에야 사용이 가능하니까요.”
“…코어를 구해와야겠군요.”
그 말에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가 게르나들을 틀어막는 동안… 시안 씨가 코어를 구해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시지요. 아펜탈을 뚫고 올라온 시안 씨에게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도 좋고 시안 씨에게도 행복한 결말이겠지요. 저희 입장에서는… 한 번 싸워봤던 게르나들과 싸우는 게 낫지요.”
“흠… 알겠습니다.”
‘집 한번 돌아가기 힘들구먼…….’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항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딱히 별다른 방법이 없어보였다.
“위치를 설명드리지요. 외진 곳이지만… 워낙 눈에 띄어서 찾기 힘들지 않을 겁니다.”
눈에 띈다는 콘-라드의 말에 시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 ☆ ☆
시안과 스틸은 평원을 가로질러 건너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콘-라드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빠르게 다녀와야겠군요.”
“뭐… 어차피 평민들이 회복되고 법진의 개조가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 안에만 구해다 주시면 됩니다.”
묘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콘-라드의 태도에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 그런데 큰일이 아닙니까? 말씀하시는 게 굉장히 평안해 보이시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변두리 조그만 종족도 아니고 삼천 년 전 대륙을 뒤집을 정도로 싸운 후에야 쫓아낼 수 있는 종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콘-라드는 일이 많아져서 귀찮다는 표정은 지어도 위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후후… 다 이유가 있지요. 애초에 이곳 후작령만 조금 늦은 것이지, 결계의 중심축이 되는 키큘러스 자체도 작은 결계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스물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더라도 보조 축이 되는 큰 백작령과 후작령에서는 제 동료들이 결계의 개조를 따로 진행했지요.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보호령 안의 사람들은 추가적으로 감염시킬 수 없게 되지요. 감염된 상태로 들어갈 수야 있지만…….”
“아하… 그렇다면?”
그제야 콘-라드의 여유 있는 표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네. 평소에 싹 쓸어놓은 보람이 있지요. 그렇게 되면 녀석들이 먹어치울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해 봐야… 소수 백작. 그리고 자작이나 남작, 그리고 나리쟈 급 종족이 되겠군요. 그 정도 세력으로 결계를 유지하고 구축하는 후작령이나 백작령에 이빨이나 들어가겠습니까. 시간이 많이 주어져 게르나에게 삼켜진 채로 성장을 지속한다면 위험하겠지만… 아마 이번 사태는 그 전에 끝날 겁니다. 시안 씨가 코어만 구해 오셔서 결계의 복구만 성공한다면요.”
게르나의 가장 무서운 점. 강자를 먹어치우고 또 약자를 강하게 만드는 종족의 특성을 부릴 여유가 없다. 그게 이번 사태에 대해 콘-라드가 보이고 있는 자신감의 이유였다.
“아 그리고… 스틸 씨는 이걸 가져가시지요.”
“이건?”
콘-라드가 준 건 자그마한 구슬이었다.
“1인용이긴 하지만 들고 있으면 게르나가 못 들어올 겁니다. 만들기는 쉽지만 탈릭 스톤이 다 떨어져서 더는 못 만들지만요. 후후. 원래 제가 쓰는 건데… 저는 어차피 이 결계를 복구할 때까지 이 안에 있을 거니 괜찮습니다. 이미 이 나무 안까지는 못 들어오게 손을 써놨으니까요.”
콘-라드가 사태가 끝나자마자 설치한 것이 무엇인가 했는데 나무를 감싸는 방어법진이었나 보다. 그걸 본 스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저는 필요 없습니까?”
“시안 씨를 잡아먹을 정도의 개체는 관측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녀석이 있다면 이제까지 결계를 뚫고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그 정도 힘이라면 결계 따위는 무시할 텐데. 편하게 다녀오십시오.”
“그것참… 주변 종족들을 쓸어버린 게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되는군요.”
아무리 게르나족이 위험하다고 해도 먹어치운 숙주가 별 볼 일 없다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 결계가 구축되어 있다는 보호령 안에만 있다면 추가적인 감염도 없을 테니.
“후후.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녀오자고.”
“아…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서둘러야지요. 그나저나 우선 아펜탈 쪽으로 가라고 했나요?”
“흠… 그랬었지. 로르발이라는 자가 가르쳐 준 위치에 따르면…….”
어디에 가서 어떻게 구해 오냐는 시안의 물음에 콘-라드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로르발 씨의 말에 따르면… 시안 씨가 박살 낸 아펜탈의 쭉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군요. 저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근데 이거 가지고 찾을 수 있나… 이거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만요…….’
전해주듯 말하는 콘-라드를 보니 그도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말하면서도 영 민망스러웠는지 다시 통신을 시도했지만 그 한 줄 가지고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런데 시안… 그 위치 찾을 수 있어? 그때는 작은 샘이었는데…….”
지도도 없는 동네. 게다가 아펜탈의 입구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수림 안에 흔하디흔한 호수 중 하나였기에 찾기 힘들 줄 알았는데 시안은 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후후.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 저기 보이는군요.”
“…….”
스틸은 그곳을 보고 왜 시안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펜탈을 찾아 나선 줄 알게 되었다. 수림 한가운데에 운석이라도 맞은 듯 푹 파인 정체불명의 구덩이는 누가 보아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쭉 달리면 보인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걸로 찾을 수 있나…….”
지도가 없어 걱정했는데 콘-라드는 아무런 걱정 말라고 했다. 자신도 예전에 한번 가 봤는데 엄청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서.
달리다 보니 시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거겠지요, 스틸 양?”
“허… 저거보다 더 눈에 튀고 수상한 건물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시안과 스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제까지 보아 왔던 이곳 대륙은 강하기는 했지만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화도, 예술도, 예절도 발달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그나마 로르발 공작가가 잡아놓은 법이 없었다면 더 개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의 기억을 한 번에 뒤집을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 저 수림 너머로 보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자신들이 건너온 수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바다는 건물의 이질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흐음… 이래서 이쪽으로는 아무도 살지 않았나 보군요. 저렇게 거대한 바다라니…….”
얼마나 거대한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건물은 그 암석 절벽으로 된 바닷가의 조금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생김새도, 위치도, 크기도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거대한 건물을 보며 시안은 저 건물이 콘-라드가 말한 건물임을 확신했다. 애초에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고 했으면 말을 따로 해 주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그 기괴함은 더 심해졌다.
“흠… 이거 분명 돌은 아니지요?”
“무슨 금속 같은데… 이 거대한 곳을 모조리 금속으로 지었다… 라. 확실히 뭔가 있기는 있을 것 같네.”
벽을 통통 쳐 본 스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보았다.
“흠… 그런데 딱히 위험한 것은 없어 보이는데… 우선 들어가 보지요.”
위험한 기세가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시안과 스틸은 터벅터벅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허… 별 게 다 있군요.”
안으로 들어온 시안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전에 라가오페를 따라갔던 바다 위의 병기창, 아마란이란 곳과 느낌이 비슷했다.
이곳은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삭막한 느낌만을 주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주변의 다양한 기계들은 돌보지 않은 지가 수십 년인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로르발이란 자가 썼던 곳인가?”
“뭐… 그건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대단하군요. 봐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런 쪽에 약했던 시안이기에 복잡해 보이는 설비들을 봐도 이게 무슨 원리이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건 스틸도 마찬가지였다.
“상관없지. 코어나 찾아서 나가자고. 아까 콘-라드가 뭐라고 했지?”
“흠… 분명 이곳에 도착해서 아래로 쭈욱 내려가기만 하면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시안의 말을 들은 스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펜탈에서 쭈욱 서쪽으로 가서 이상한 건물을 찾고 쭈욱 아래로 내려가라… 성의가 넘치는 설명이군.”
“그 이상 가는 설명도 없다는 것이 더 신기합니다.”
“하긴…….”
아직 코어는 찾지 못 하였지만 이제까지 그 한 줄만으로도 잘 찾아왔기에 시안과 스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부수고 갈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랬다가 코어라는 것이 휩쓸려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
이곳저곳을 뒤지던 스틸은 묘한 시설물이 거대한 건물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안 동생, 저거 아닐까?”
“흠… 확실히 다른 건 짚이는 게 없습니다만…….”
다른 곳을 다 뒤져 보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것은 없었다. 기운을 쏘아서 보내봤을 때도 지하로는 아무런 느낌이 잡히지 않았다. 스틸이 가리킨 방향에는 기이하게 생긴 원형의 거대한 고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푸른 장막이 원형의 고리 너머의 광경을 가려내고 있었다.
“정말 들어가기 싫게 생겼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야 코어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음… 그래 보이네.”
“하… 왠지 아펜탈 때가 생각나는데…….”
하지만 그때처럼 위험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시안은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기 계시겠습니까?”
“나는… 이 시설 좀 더 돌아보고 올게. 동생, 잘 다녀와.”
“네. 혹시 위험하면 안으로 따라 들어오시고요.”
“후후. 걱정 마. 이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니.”
그 말에 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있을까 하여 이 근처를 기감으로 훑었지만 이상한 존재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마친 시안은 기묘하게 일렁이는 푸른 물결 사이로 뛰어들었다.
“허… 여긴 또 뭐하는 곳이지…….”
들어가자마자 시안을 맞이한 것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드넓은 공간, 하지만 아펜탈처럼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아니었다.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모를 금속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자로 잰 듯 마냥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굉장히 넓은 공간이기는 했지만 방의 주위 역시 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높긴 했지만 천장 역시 막혀있었다. 천장에는 이상하게 생긴 수정구가 박혀 있었지만 작동을 중지한 듯 안쪽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시안에게 그 정도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시안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어둠 아래에서도 선명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이었다.
모두가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강대한 기파. 터질 듯한 육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에너지장과 갑옷 같은 외피.
강대한 생명체들이 기묘한 공간의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허… 이 대륙이 진짜 강하긴 강하구먼… 죄다 베타네…….”
콘-라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자신처럼 벽을 넘은 존재들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다고 했다. 베타.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말은 벽을 넘은 자들의 숫자가 꽤나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 모여 있는 각양각색의 종족들은 모두 벽을 넘은 존재들, 베타였다. 비록 모두 1단계로 보였지만 여기 모인 숫자가 상당했다.
그와 동시에 시안은 콘-라드가 자신에게는 별일이 아닐 거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갔다.
‘뭐… 딱 아펜탈 수준이네…….’
아펜탈 안의 존재들은 벽에 막혀있었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그 숫자가 많았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다들 기운이 없어 보이네…….’
안에 있는 각 종의 베타들은 강대한 기운과는 달리 굉장히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은 엄연히 이들 입장에서 보면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텐데 그저 넓은 공간의 구석에 엎드려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야 편하지…….’
덤벼도 상관없지만 마찰이 없다면 자신이야 좋다.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충돌이 달가운 건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먹은 시안은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기 시작했고, 그런 시안을 바라보던 각 종족의 베타들의 표정이 기괴하기 변하기 시작했다.
<카르륵…….>
“허허… 그렇지. 내가 이래야지.”
어쩐지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안 좋은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자신 근처에 있던 베타를 시작으로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베타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혹시 기세라도 풀어 헤치면 쫄아서 안 덤비려나…….’
아직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가 어딘지도 모르기에 지나칠 수도 없었던 시안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온몸의 기세를 끌어올려 사방으로 풀어 헤쳤다. 이자들에게도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있다면 강자인 자신에게 덤비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아펜탈 녀석들이 특이한 것이었지 대부분은 물러서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자신이 아주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헝!
“아, 나…….”
기세를 풀어 헤치는 순간 기묘한 베타종들은 사방에서 시안을 덮쳐들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저 멀리서 쉬고 있는 녀석들까지 기세에 자극되어 달려들었다.
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콰드드득. 우득.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베타들을 상대하며 시안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입자를 막는 건가… 이래서 못 들어온다고 했구나…….’
확실히 이 정도 공세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무리일 것이다. 로르발 가문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정도로 강한 자가 없다면 무리이다. 콘-라드 씨의 말투를 들어보니 그런 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자신도 아펜탈을 통해 이곳으로 건너오기 전의 수준이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바꿔서 말해 그렇기에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한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로 나아가는 입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래에 머무르고 있던 다른 베타들이 뛰쳐나오고 있는 곳을 찾으면 되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나 더 강한 자들이 나올까 봐 조심스럽게 나아갔지만 다행히 그런 자는 있지 않았다.
아래로 세 층 정도를 더 내려가니 아까 보았던 입구와 비슷하게 생긴 기괴한 고리가 하나 더 있었다. 안쪽에 푸른 일렁거림이 있는 것 역시 비슷했고.
‘설마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는 아니겠지…….’
꽤나 힘들게 내려왔는데 그런 결론이라면 상당히 마음이 아플 것이다. 시안은 심호흡을 하고 푸른 문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흠…….”
또 다른 베타들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곳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그마한 연구실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위층의 거대했던 건물들과는 달리 이 안쪽은 개인의 연구실인 듯 복잡한 기기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커다란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미 모조리 작동을 정지한 기계들은 장식품처럼 연구실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안에 코어가 있다는 건가…….’
앞에서 막고 있는 녀석들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길래 안에 무슨 엄청난 것이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것이 없자 시안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의 경비병을 배치한 곳이라면 코어 외에도 아펜탈에서 박살 난 자신의 껍질이나 이제는 무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카르나인을 대체할 보구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곳이 무엇을 하던 곳인지 궁금했기에 구석구석 뒤져보았지만 별다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을 비운 시안은 이곳에 도착한 목적을 떠올리고 연구실을 좀 더 자세히 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구석에 남아있던 붉은 씨앗을 찾을 수 있었다.
길쭉하게 생긴 원통형의 유리 안에서 기묘한 녹색 빛을 뿌리고 있는 씨앗은 다른 모든 기기가 작동을 멈추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을 미약하게나마 뿜어내고 있었다.
코어인지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게르나라는 이상한 종족들이 감염시키고 있던 키큘러스의 중심부와 똑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으니까.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풍기는 기운이 유사했다.
스물다섯 개의 유리관 중 앞의 스물한 개는 비어 있었고 네 개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시안이 눈치가 없다고 해도 이 정도쯤 되니 키큘러스의 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음… 여기서 가져왔구나. 그런데 네 개는 왜…….”
하지만 좀 더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개는 그때 보았던 코어에 비해 뭔가 좀 불안정해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생각이 있으니 가져달라고 했겠지…….”
혹시 몰라 네 개를 모두 꺼낸 시안은 조심스럽게 카르나인의 공간 속에 네 개의 씨앗을 집어넣었다. 무언가 더 가져갈 것이 있나 하여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 집채만 한 기계들을 들고 나갈 수도 없었기에 시안은 들어온 문을 통해 위층으로 몸을 날렸다.
☆ ☆ ☆
“시안? 뭐 이렇게 오래 걸렸어?”
“네?”
“나 여기서 거의 일주일 기다렸어.”
“음… 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왔는데요.”
시안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침입자들을 뚫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도 아펜탈처럼 광대하지 않았고 그 숫자도 아펜탈에 비해 훨씬 적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틸 양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음? 그래?”
“아무래도… 저 안쪽에 또 다른 차원이 형성되어 있나 보군요. 그것 때문에 시간 차이가 생긴 듯합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차이가 안 심해서 다행이군요.”
“호오… 안쪽에는 뭐가 있었어?”
스틸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았고 시안은 안쪽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기괴한 베타들과 그 안쪽에 위치한 실험실의 존재까지.
“호오… 그래서 못 들어간다고 한 건가… 그나저나 동생, 아펜탈이랑 비슷한데 하루밖에 안 걸렸어?”
“벽 넘고 나서는 싸우느라 오래 걸린 게 아니라 돌아다니고 입구 찾느라 오래 걸린 거지요. 엄청나게 넓었고 그 안에 가득 차있었으니까…….”
“그렇구나. 코어라는 건 가져왔어?”
“여기 챙겨왔습니다. 그나저나 스틸 양은 뭐 재미있는 거 찾으셨습니까?”
“음… 건물 쪽은 별거 없었어. 내가 봐도 아는 것도 아니고… 자료도 없고… 그런데 이쪽으로 와 봐.”
그러면서 스틸은 바다 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고는 아래를 가리켰다.
“봐 봐.”
“허… 이거…….”
절벽으로 생각했던 바닷가는 모조리 눌어붙은 흔적이었다. 들어가기 전에는 거대한 건물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 하였는데 스틸 양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절벽 전체가 전투로 인해 푹 파여진 것과 같은 흔적이었다. 시안은 고개를 들어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주욱 돌렸다.
끝도 보이지 않는 해안선. 그리고 그 해안선 모두가 이런 절벽과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지형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기묘한 지형. 시안은 바닷속으로 기파를 쏘아 보냈다. 안쪽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에.
그러고는 침음을 삼켰다.
“…어마어마하게 깊군요.”
당장 대형 하리쟌들이 무리 없이 들락날락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바닷속은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수상했다. 해변가라는 것이 차츰차츰 깊어지는 것이지 이렇게 절벽처럼 수직 하강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넓은 범위가 그렇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해안선 전체가 이런 절벽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눌어붙은 형태라니. 이런 비정상적인 지형구조를 보며 시안은 한 가지 결론을 내었다.
“누가 박살 냈군요, 이곳을.”
이곳이 원래부터 바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기묘한 지형은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자들이. 일부러 만들었다기에는 그 지형의 생김새가 너무나 투박했다. 곳곳의 파먹은 듯한 흔적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번에 동생이 말한 그… 크로나랑 드라고나인가… 그런 것들이 치고받은 흔적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겠군요…….”
눈앞에서 직접 크로나를 본 시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크로나가 전력을 다하면 이런 바다 하나 만드는 것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이 이곳까지 와서 싸울 이유가 없어보였기에 시안은 대답을 미루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딱 보아도 최근의 흔적이 아닌걸요.”
“흠… 그건 그래.”
“그래도 이쪽으로는 오지 말아야겠군요. 영 찝찝하니…….”
“그러게. 갑자기 왜 생뚱맞게 수림이 있다가 바다가 나오나 했더니…….”
어마어마한 열과 압력으로 눌어붙어 있었지만 그 위로 수많은 세월의 흔적이 뒤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일이천 년 된 흔적이 아니었다. 최소 수천 년.
갑자기 수림에서 바다로 연결된 것도 이해가 갔다. 분명 육지이던 곳이 전투로 인해 박살 나 바다가 된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렇기에 더욱 안심이 되었다. 멀쩡한 육지를 바다로 만들 만한 존재가 대륙을 뒤흔들 생각을 했으면 이미 절단이 났을 것이다. 이제까지 멀쩡하게 인간종이 살아있는 것만 보아도 별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지요.”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시안과 스틸은 몸을 날렸다.
☆ ☆ ☆
아펜탈을 지나 콘-라드가 머물고 있는 칼튼하임 후작령으로 가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편했다. 한 번 왔던 길이니. 하지만 가는 길에는 이제까지 자신이 보지 못 했던 존재들이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게 스웜이라는 녀석들인가 보군요…….”
“그러게… 와… 저거 진짜 상당하네…….”
기묘한 은색 빛을 흘리며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녀석들은 쉴 새 없이 남작령과 자작령, 그리고 나리쟈 급 부족들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듯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은 철저히 특정 대상들만을 집요하게 공략했고 녀석들에게 삼켜진 자들은 온몸이 녹아내리며 시커먼 검은 연기를 뿜어내었다. 하지만 그 연기도 스웜의 몸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칼튼하임 후작령으로 가는 길 내내 그런 광경들이 보이고 있었다.
“저 스웜이라는 자들은 게르나라는 종족을 볼 수 있는 모양이군요.”
“뭐… 애초에 게르나 잡으려고 만들었다니까 그런 특성이 있는 게 당연하겠지.”
살아남은 평민들과 보호령의 귀족들은 쌍둥이를 통해 연락을 받았는지 쉴 새 없이 결계가 쳐져 있는 백작령과 후작령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중간에 몇 번 게르나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스웜은 인간종들의 주위를 맴돌며 그런 자들이 생기는 족족 먹어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리쟈 종들은 그런 것도 없었기에 쉴 새 없이 검은 연기에 감염되고 있었고, 이를 스웜이 습격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연출되고 있었다.
“허… 엄청 잘 막아내는군요. 콘-라드 씨가 걱정을 안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뭐… 그래도 게르나족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은데… 결계가 계속 무너져 있으면 문제가 커지겠어.”
스웜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감염자들을 먹어치우고 있었지만 검은 연기는 계속해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땅 위를 뛰어다니는 스웜들과 다르게 영체들은 거의 공간을 헤집으며 돌아다녔기에 이동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마 들어오는 게르나들을 틀어막지 않으면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실제로 오면서 본 한 부족은 거의 게르나에게 먹혀 근처의 백작령을 공격하고 있었다. 게르나들은 백작령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나뭇잎과 뿌리 사이에 걸려 있는 장막에 막혀 계속해서 튕겨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염된 종족들은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산발적으로 안으로 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몇몇 게르나들이 날아가고 있는 스틸과 시안에게도 접근했지만 스틸의 품속에 있는 구슬 때문인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튕겨나간 게르나들은 옆의 시안에게서는 아무런 반발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 시안의 몸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허…….”
<크흐흐… 이제부터 내가 네 몸을… 끄아아아!>
하지만 오히려 안 들어오느니만 못 했다. 시안의 몸 안에 들어왔던 녀석들은 정신에 잠깐 접속했다가 모조리 녹아내려 흡수되고 말았다. 예전 아크라가 몸 안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동생을 보면 진짜 등불 같아. 후후. 어찌 이렇게 주변을 잘 태워버리고 불나방들이 잘 달려들까.”
“…….”
빠르게 달려가니 저 너머로 칼튼하임 후작령의 세계수, 블라덱이 보였다. 그 웅장한 크기는 여전했지만 생기가 없어지고 나뭇잎이 떨어진 모습을 보니 무언가 을씨년스러웠다.
“이 코어라는 게 중요하긴 한가 보군요. 허…….”
“어서 가자.”
코어 하나 망가졌다고 저 거대한 나무가 저렇게 된 것이 신기했기에 시안이 한마디 내뱉었고 스틸은 그런 시안을 재촉했다.
☆ ☆ ☆
<…준비를 철저히 했구나…….>
게르나의 상급 령, 카론은 기묘한 영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로르발 녀석들이 삼천 년간 놀고 있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대비가 상당했다. 아펜탈이 약해지는 동안 치고 들어왔지만 감염시킬 만한 강자들은 모조리 기묘한 나무 안에 들어가 숨어있었다. 나무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는 몰라도 그 안에서는 감염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 안에만 숨어 있는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들 말로 자작이나 남작이라는 자들, 혹은 나리쟈급 종을 먹어치워 키워내면 되니까. 함락은 그 이후에 시키면 된다. 하지만 그 예전, 자신을 쫓아냈던 저주받은 은빛 생명체들이 쉼 없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동족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조금씩 세력이 커지고 있었지만 이러다 결계가 완성되면 더 이상 동족들이 들어오지 못 한다. 그 전에 키큘러스라는 나무를 부러트려야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카론은 저 멀리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키큘러스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내키지는 않지만… 따질 때가 아니지…….>
이대로 결계가 재건되면 완전히 망한다. 그 전에 수를 써야하기에 카론은 미루어 두었던 수단을 꺼내들었다.
☆ ☆ ☆
“아… 시안 씨, 도착하셨습니까.”
나무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보수하던 콘-라드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좀 힘을 되찾았습니까?”
“뭐… 갇혀서 나가지 못 하는 걸 제외하면 별문제 없습니다.”
급조한 결계이기에 나무 기둥 안쪽으로만 보호가 가능했다. 그렇기에 평민을 비롯한 귀족들 모두가 나무기둥 안쪽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콘-라드도 바깥으로 나와 결계를 개조할 때는 정신방어 이적인 카라프를 걸고 나와 조심스럽게 개조를 하고 있었다.
“스웜이 굉장히 많이 배치되어 있군요.”
“뭐… 아무래도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 하니 방어가 힘들지요. 이곳은 노려지기 쉬우니… 스웜도 많이 필요합니다.”
말라비틀어졌다고는 하지만 키큘러스, 블라덱은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나무뿌리의 경계를 몽땅 둘러싸고 있는 은빛 물결을 보니 로르발 가문이 이곳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옵니까? 그리고 무라칸… 이란 것들도 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그 말에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뭐… 막아야 할 녀석들이 이놈들 하나가 아니거든요. 스웜도 최근에 무라칸의 강화 연구가 성공해서 여유가 생겼기에 간신히 빼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저 녀석들은 정말 강하니까요. 아… 스웜을 이끌고 온 사람은 한 명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워낙 로르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 와서 많이 들었기에 호기심이 생긴 시안은 냉큼 만나보겠다고 했다.
“그러면 제가 코어의 설치를 하기 전에… 안내해드리지요. 우선 코어를 주시겠습니까?”
“아, 여기 있습니다.”
손바닥에서 네 개의 코어를 꺼낸 시안은 이를 콘-라드에게 건네주었다.
“흠…….”
“뭐가 좀 부족합니까?”
시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고 이에 콘-라드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나하나가 미완성품이긴 한데… 그래도 네 개나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군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흠… 코어의 설치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마 몇 시간 이내로 끝날 것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리고 콘-라드는 감염된 코어가 있던 곳으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간 시안과 스틸은 감염된 코어를 제거하고 그곳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마에 기이한 문양을 새긴 남자는 콘-라드가 오자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했다.
“키큘러스 씨.”
“콘-라드, 왔는가. 후우… 덩치가 덩치이니 살려놓는 것도 힘들군.”
‘허… 혼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니…….’
키큘러스는 수많은 평민과 귀족들이 공급해야 하는 에너지를 블라덱에 홀로 공급해내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막대한 에너지가 키큘러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쉴 새 없이 나무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코어를 가져왔군. 다행일세. 뒤의 저자들인가?”
“네. 코어를 설치하는 동안… 대화들 나누시지요.”
“그러지.”
그리고 키큘러스는 코어에 공급하던 에너지를 중단하고 그 자리를 콘-라드가 들어가서 메꾸었다. 키큘러스는 시안과 스틸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키큘러스라고 한다네. 반갑네.”
“반갑습니다. 시안입니다.”
“스틸이야.”
“그나저나 대단하군… 그 안에서 진짜 코어를 가져오다니. 난 예전에 궁금해서 로르발 님의 말을 듣고 한번 들어갔다가 바로 도망쳐 나왔는데… 베타 3레벨이라는 것이 진짜인가 보구먼.”
“흠… 벽을 세 개 넘었다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그 고생을 하고도 겨우 벽 하나를 넘었는데…….”
실제로 키큘러스는 콘-라드보다도 훨씬 더 강대한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저 거대한 나무에 에너지를 공급하여 살려놓는 일은 콘-라드라면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키큘러스 씨라면… 제가 들은 삼천 년 전의 그분이 맞습니까? 이 나무의 개발자라는?”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키큘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코어가 있었기에 개발이 가능했지. 그나저나 참 예전 일이구먼…….”
“세상에,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아오셨습니까? 벽을 넘으면 그렇게 수명이 늘어납니까?”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작의 수명이 천 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삼천 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이었기에. 눈앞의 키큘러스가 벽을 하나 넘었다지만… 상상하기 힘들었다.
“뭐… 원래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로르발 님에게 방법이 있더군. 난 별로 오래 살기 귀찮았는데 워낙 못된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이 나이 먹도록 경비를 해야 한다니… 흐휴…….”
씁쓸한 표정을 짓는 키큘러스를 보며 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 그런 방법도 있습니까?”
“흠… 있다네.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거. 아주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말일세.”
사소한 부작용이 뭔진 모르겠지만 사람의 수명을 강제로 늘리는 방법이라니. 그런 건 들어보지도 못 했다.
‘아… 아니군. 예전에 라가오페 씨에게 들은 적이 있긴 하구나.’
하지만 키큘러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궁금해진 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키큘러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거 아마 말하면 안 될 걸세. 로르발가에 들어와야만 이야기해주는 사실이라…….”
“쩝… 그렇군요.”
시안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무슨 방법인지 몰라도 영생 자체에 관심이 없었기에. 당장 지금의 수명만 해도 수천 년이 넘어갈 것 같은데 이것도 버겁다.
주제를 바꾼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그 불길한 진동에 시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이 나무가 쓰러지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허… 설마…….”
하지만 시안이 바라는 바와 달리 땅의 진동은 계속 커졌다.
까드드득. 두두둑.
이윽고 진동의 정체가 밝혀졌다.
쿠오오오오오오!
아래에서 뻗어 나오기 시작한 진동은 점점 더 커지더니 이윽고 나무뿌리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평소라면 키큘러스의 뿌리에 막혀 보호령 쪽으로는 올라오지 않는다는 지저룡들이 사방에서 날뛰며 뿌리를 뜯어 헤치고 있었다.
“호오… 지저룡이군요. 저건 어떻게 대처를 하실 겁니까?”
왠지 대처를 해놓았을 것 같았기에 시안이 물었지만 옆에서 키큘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엥… 저건 생각도 못 했는데.”
“…….”
“아니…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나라고 뭐 다 아는 줄 아나. 그리고 지저룡은 어차피 키큘러스를 못 쓰러트린다네. 이 크기를 보게나.”
“하긴…….”
실제로 올라온 지저룡들은 그 두께가 십 미터는 되어 보였지만 거대한 키큘러스의 뿌리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그나저나 게르나 녀석들… 마음이 급했군. 녀석들은 원래 이성이 약한 생명체에게 깃드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렇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녀석들이라… 예전에도 철저하게 지적 생명체만을 노렸지. 강해도 멍청하면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네. 그래서 인간을 좋아했고. 그나저나 저걸로는 무리일 텐데…….”
“지저룡이라… 저런 녀석들도 베타가 있군요.”
시안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키큘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관찰되지는 않았지만 있지 않겠나? 녀석들도 로탄 급 종족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
확신하는 듯한 시안의 말에 키큘러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이곳으로 오고 있는 녀석이 있어서요.”
“뭣?”
“그나저나… 오기 전에 잘라야겠군요. 저 녀석이면 진짜 쓰러트릴 수도 있겠는데…….”
키큘러스의 나무도 거대했지만 지금 오는 녀석 역시 만만치 않았다. 뿌리를 물어뜯고 끊어버리기 시작하면 설령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코어를 설치해도 살아나지 못 할 것이다.
결계가 완성되어야 하는 시안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 되었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바깥으로 향했다.
수십 킬로 바깥에서 오고 있는데도 그 진동이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녀석. 저런 녀석이 뿌리를 끊고 몸통박치기라도 한다면 결계를 완성시키는 데 썩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이다.
시안은 나가자마자 저 멀리 뿌리 바깥의 범위로 향했다. 그리고 오고 있는 방향의 지하를 향해 천천히 손아귀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파스스스스.
시안의 주먹에 모여든 에너지의 양에 기겁을 하던 스틸은 땅으로 주먹을 천천히 내뻗는 그 광경을 보며 움찔했지만 대지가 통째로 푹 하고 파여 나간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시안의 주먹이 내뻗어진 곳은 살짝 일렁거림만 생겨났고, 그 결과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쿠오오오오오!
수십 킬로 바깥에서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리며 거대한 무언가가 땅 속에서 솟아 나왔다.
마치 거대한 암석의 산이 튀어나오는 듯한 그 광경에 줄기 안에 숨어있던 자들은 침음을 삼켰다. 엄청난 거리였지만 보이지 않을 크기가 전혀 아니었기에.
거대한 암석의 괴물은 전신에 금이 간 채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내뱉고 있었고, 그 사이로 검은 연기가 스물스물 새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감염되었었구나.”
시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게 암석룡 쪽으로 접근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키큘러스는 신음성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저렇게 쉽게…….”
같은 베타라도 종족에 따라 강함이 달라진다. 지저룡이라면 그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같은 베타라고 하여도 결코 쉽게 상대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게다가 암석을 삼키고 압축시키며 만들어낸 껍질은 베타라고 해도 부수기 쉽지 않다. 애초에 녀석들이 겁이 많고 햇빛을 싫어하는 성질이 없었다면 대륙에서도 꽤나 상위 종족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시안이라는 자는 주먹질 한 번으로 더 거대한 덩치를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땅은 파이지 않았지만 손아귀에 모이던 그 거대한 기도를 본 키큘러스는 신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키큘러스는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역시… 우리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시안은 쓰러져 있는 암석룡에게 다가갔다. 암석룡은 땅 위에 그 거대한 머리를 대놓고 기대어 있었고 그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연기가 원망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헉… 너 같은 녀석이 있다니…….>
그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영 찝찝했지만 시안으로서도 나무를 부수겠다는 자를 놓아둘 수는 없었기에 그 눈초리를 받아넘겼다.
<크흐… 더러운 로르발 녀석들…….>
“저는 결계만 부수지 않으면 됩니다. 쩝… 저도 신경 쓰기는 싫은데 키큘러스는 부수면 안 됩니다. 원래 살던 곳에 가서 사셔야지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원래 이곳에서 살던 종족은 우리였거늘… 신국이 망하고 도망쳐 온 녀석들을 받아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을 짓는 시안을 보며 카론은 가증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자가 정말로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놈… 로르발 가문이 아니구나.>
“꼭 로르발이라는 곳만 강하란 법 있습니까. 저 같은 평범한 사람도 강할 수 있지요.”
좀 강하다고 하면 무조건 로르발이라고 하길래 이상함을 느낀 시안이 물었다. 그러자 카론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개소리냐. 엄연히 종의 한계가 있거늘. 인간종 주제에. 그리고 로르발 녀석이 제 종속 이외에 피를 나누어 줄 리도 없고.>
“음?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십니까?”
<크흐흐… 꺼져라… 원통하구나. 네놈 같은 녀석이 인간종을 보호한다면… 우리는 평생 고향 땅을 밟지 못 하겠구나. 아펜탈이 약해진 이번이 절호의 기회인 줄 알았거늘…….>
카론은 아까의 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는지 연기의 형상조차 제대로 유지하고 있지 못 하였다. 이윽고 검은 연기는 날아가듯 위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카론을 찝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시안은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동북쪽, 반도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
그리고 그런 거대한 산맥을 먹어치우며 자란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칼튼하임 후작령의 블라덱도 거대했지만 이 나무의 거대함은 한층 더 강렬했다.
로르발의 공작이 머물고 있기에, 그 이름을 딴 거대한 키큘러스의 나무.
<로르발>
그 아래에서는 한창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속세에 알려진 것처럼 무라칸과 스웜,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전투가 아니었다.
기괴한 거인족들이 미친 듯이 키큘러스, 로르발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기괴한 거인족들은 숫자는 별로 되지 않았지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치 백만 대군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욱 위협적이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체. 갑옷 같은 피부. 머리에 달린 한 개의 뿔과 기괴하게 벌어져 있는 입. 그리고 그 사이에 나 있는 날카로운 이는 딱 보아도 녀석들이 온순한 성격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무를 부숴버릴 것 같은 강대한 거인들 수십 개체는 그 기세와는 달리 쉽사리 나무에 접근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는 수많은 군대 때문이었다. 거인들에 맞서는 자들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크기는 거인에 비해 훨씬 작지만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괴수들. 기괴한 괴수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괴수들 역시 이상하게 생긴 걸로 따지면 결코 거인들의 아래가 아니었다. 팔이 세 개 달린 녀석이 있었다. 등에 입이 달린 녀석들도 있었다. 입에서 기묘한 화염을 뿜는 녀석도 있었고 갑자기 투명해지는 녀석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특징을 가진, 흉폭하게 생긴 괴수들은 거인들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개체의 강함은 거인이 훨씬 더 강했지만.
그리고 거대하기 그지없는 로르발의 중간쯤 가지에 서서 그 광경을 남김없이 쳐다보고 있는 인원들이 있었다. 특이하기로 따지면 이곳의 인물들 또한 특이하기 그지없었다.
백 년에 몇 태어날까 말까 한 공작들. 그것도 벽에 막힌 평범한 햇병아리 공작들이 아니었다. 한 단계의 벽을 뛰어넘은 자들. 그런 자들 수십 명이 가지 위에 서서 아래의 전투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대하다는 것 이외에도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마에 있는 기묘한 문양.
나무 위에 서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이마에 기묘한 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허… 새로 만든 녀석들의 위력이 대단하구려… 무라칸은 원래 저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 거인족 녀석들을 저렇게 밀어붙이다니… 저 정도라면 우리도 힘들겠는데…….”
공작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래서 싸우고 있는 기괴한 괴수들, 무라칸을 보며 품평을 했다. 저기 있는 거인족 녀석들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벽을 깬, 강대한 전사들. 거인족들은 수는 적지만 베타에 이른 강자들의 비중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반도 너머의 저쪽 대륙에서 침입해 오는 자들 중에도 상당한 위협이 된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스웜과 무라칸이 힘을 합치고 자신들도 협공을 가하여 녀석들을 몰아내고는 했다. 반도를 넘어 침입해오는 녀석들 중 약한 종족들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리를 비울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라칸 홀로 저 거인족 녀석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쓰러진 거인족 녀석들을 뜯어먹으며 더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까득. 까드득.
쓰러진 거인족을 먹어치우던 한 무라칸의 표피에서 마치 거인족의 피부와 같은 갑옷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도 더 길게 찢어지고 덩치도 한층 더 거대하게 변화하였다.
거인의 장점을 흡수한 녀석들은 한층 더 강대한 모습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런 무라칸들을 마치 애완동물을 보는 듯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후후. 이제야 여유가 좀 생기겠군. 빌어먹을… 게르나 녀석들을 몰아냈다 했더니 저런 녀석들이 치고 들어올 줄이야…….”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며 300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3000년 전, 마음에 들지 않는 게르나 녀석들을 쫓아낸 것까지는 완벽하게 잘 풀렸다. 게다가 새로 얻은 스웜과 무라칸이라는 녀석들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 녀석들은 강제로 개조하여 만든 종족이기에 베타로 올라갈 수 없지만 자신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고 그 숫자도 어마어마했기에.
이런 병력이 새로 생겼으니 인간종의 영역을 넓히고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일은 여반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도를 넘어 빌어먹을 녀석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후… 녀석들이 게르나를 두려워하여 안 내려오고 있을 줄은…….”
게르나의 특성은 어떤 종족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특성이다. 자신들이야 여러 가지 준비를 철저히 하여 게르나를 몰아냈다지만 녀석들은 대륙의 주인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종족이었다. 그 때문에 반도 건너편 대륙에 있는 녀석들이 침범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고.
하지만 게르나 녀석들이 결계에 몰려 모조리 북쪽으로 쫓겨난 것을 눈치채자마자 그 이후로 얕은 바다를 건너 가열하게 침공해 들어왔다. 반도와 건너편 대륙을 가르는 좁은 해협은 그들에게는 전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삼천 년간 지루한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삼천 년간 죽인 종족의 숫자들만 해도 수만은 넘을 것이다. 죽어나간 공작들과 스웜, 무라칸의 숫자 역시 엄청났다. 만약 인간종을 키워 끊임없이 공작을 보충 받지 않고 <인장>을 찍어 영생을 보장받지 않았다면 이미 뚫렸을 것이다. 덕분에 끊임없이 인간종을 채찍질해야 했다. 보충되는 공작의 숫자가 모자라게 된다면 바로 뚫리게 될 테니. 그 정도로 간당간당했다.
그렇지만 오늘로써 그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도 끝이다. 저렇게 무라칸이 강해졌다면 이제 남는 여력을 돌릴 곳이 생긴다. 저곳을 무라칸 하나로도 틀어막을 수 있으니. 실제로 반도의 한쪽은 스웜과 공작들이, 다른 한쪽은 무라칸과 스웜들이 막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라칸을 나누어도 두 군데 모두를 막아내고 있었다.
“당장 스웜을 북쪽으로 돌려 게르나 녀석들부터 쓸어버려야 겠군… 후후후. 그러면 키큘러스와 아크라의 에너지에도 여유가 생기겠지. 빌어먹을… 결계 유지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이번에 콘-라드라는 신생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를 이용하여 결계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잊힌 학문이었던 이적까지 익히고 있었던 것이 자신에게는 천운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강대해진 무라칸은 스웜을 돌릴 여력을 만들어 주었고 결계의 빈틈은 지금쯤 해결되었을 것이다. 혹시 몰라 공작들을 남겨두었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보였다.
이게 다 이번에 돌아온 일등 공신 덕분이다.
로르발 가문의 정점. 로르발 공작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라가오페, 대단하군. 도대체 저런 피를 어디에서 구해서 무라칸을 저 정도로 개조한 거지? 이제까지 아무도 넘지 못하였다는 금지를 넘은 보람이 있군. 잊힌 학문을 익힌 자들도 데려오고. 후후, 수준이야 좀 낮지만 말이야.”
그 말에 라가오페가 살짝 웃었다.
“운이 좋았지요. 다행히도 루크라들도 길을 열어주었고.”
“허… 사실 그게 제일 신기하단 말이야. 그 오만한 놈들이 길을 열어주었단 말인가?”
로르발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실 조사대를 꾸려 라가오페를 남쪽 금지로 보내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미친놈들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에.
“뭐… 쉽지는 않았지요. 저만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더군요.”
“녀석들이 좀 얌전해졌나 보군. 후후.”
그러던 와중 로르발은 허공의 무언가를 주시했다. 그러고는 라가오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좋아. 결계가 복구되었나 보군.”
“허, 벌써 말입니까?”
라가오페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시안이라는 자가 구해왔다는군. 그나저나… 그게 정말인가? 베타 3레벨이라니…….”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긴 세월, 신국이 그 강대함을 유지할 때도 인간종에서 베타 1레벨 이상은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자신들 신혈들이 없었다면 베타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숭이들이 사는 대륙에서 그런 자가 나오다니.
“콘-라드가 살폈다니 정확하겠지요.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후후. 하긴, 그건 그렇지.”
로르발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강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라가오페가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로르발은 코웃음을 쳤다.
“후후. 내가 왜 불안해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축복할 일이지. 인간종에 그런 강대한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의 오랜 숙원이었으니.”
그러면서 로르발은 아련한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잘 풀려가는구나… 결계가 회복되었으니 우선 스웜으로 내부 청소를 하고 북쪽으로 돌려야겠군.”
그 거머리 같은 녀석들을 쓸어내지 않으면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없다. 결계를 완성시키라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상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이다. 천천히 쓸어내도 되리라.
완벽한 방어를 실천했다. 그리고도 여력이 남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확장뿐이다. 예전의 위대한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앞으로 벌어질 계획에 대해 떠오르는 수많은 퀘스트창을 보며 로르발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