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3화 (64/81)

<63. 로르발>

“이제 일단 결계는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빠르군요.”

“준비는 다 완료되어 있었으니까요, 시안 씨가 다녀오는 동안. 코어만 넣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코어를 넣는 순간 검은 기운에 침식되어 말라붙어 있던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저 조그만 코어에서 무슨 에너지가 그리 넘치는지 순식간에 뻗어나가 나무를 점령한 코어의 에너지는 평민들의 아크라와 뿌리 중의 자원, 대기 중의 기운을 엄청난 속도로 빨아들이며 빠른 속도로 나무를 복구해 나갔다. 동시에 로르발 공작가에서 나온 키큘러스가 결계에 불어넣고 있던 기운을 대신 불어넣어갔다.

나무를 중심으로 기묘한 진동이 번지더니 나무를 중심으로 거대한 공명이 일어났다. 예전에 감염된 칼튼하임 공작이 기운을 빨아들이려고 했을 때의 기괴한 진동이 아닌, 기분 좋은 공명. 동시에 시안은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결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물한 그루의 키큘러스가 서로 공명하며 하늘을 뒤덮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허… 장관이군요. 어마어마합니다.”

“제 오 년 노력이 결실을 보는군요. 키큘러스들을 돌아다녔던 거 생각하니 눈물이 나는군요.”

그러면서 울먹이는 시늉을 내는 콘-라드를 시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외모와 상당히 어울리는 행동이기는 했지만 그 육체 안에 몇백 년 묵은 아저씨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 시안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시안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또 다른 반응이 일어났다. 나무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스웜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것. 최소한의 방어병력만을 남긴 스웜들은 남쪽으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흩어져서 사방팔방으로 달려 나갔다. 기묘한 은빛물결이 풀어 헤쳐져서 달리는 모습은 숫제 기괴하기까지 했다.

“저 스웜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부 정리를 하러 가는 것이지.”

콘-라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키큘러스에게서 나왔다.

“내부정리요?”

“이제 들어오는 게르나들은 막았지만 결계 내부에는 여전히 감염된 자들이 남아있지 않나. 그들까지 깔끔히 정리해야지.”

“아하… 그렇군요.”

“다 정리하면 저들은 북쪽으로 갈 것이라네. 아예 소탕을 해버려야지…….”

그 말에 기이함을 느낀 시안이 되물었다.

“음? 그렇게 쉽게 쓸어버릴 수 있습니까?”

“게르나가 무서운 점은 숙주 안에 들어갔을 때이지. 그것도 강대한. 하지만 북쪽은 그렇게 강대한 종족이 없다네. 로탄 급이 있긴 하지만… 스웜이면 무리 없겠지.”

“그러면 왜 이제까지는…….”

“스웜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키큘러스는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방어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스웜과 무라칸도 공작의 개발품이라고 했는데 막고 있을 이유가 없다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렇지. 그곳은 워낙 치열하기에 공작 이하는 도움도 안 된다네. 이렇게 안쪽에서 자극을 주어 공작을 키워내고 공작이 되면 로르발 공작가에서 영입을 하러 오지. 즉위식이라는 핑계로.”

“즉위식이 그런 용도였군요. 그런데 모두가 로르발 공작가에 들어가는 건 아닐 것 아닙니까?”

공작들이라면 자존심이 대단할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 로르발 공작가의 아래 있는 듯싶었다.

그러자 키큘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직위만 로르발 님의 아래이지. 실제로 시키는 건 별로 없다네. 딱 하나, 반도의 방어만을 제외하고.”

“호오…….”

“마음껏 싸울 수 있는 환경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동료들도 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혜택이 있다네. 보통 여기서 다들 넘어오지. 나도 좀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여기에 낚였고… 흐…….”

묘한 신음을 내뱉는 키큘러스의 말에 혜택의 정체가 궁금해진 시안이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 저번에 얘기한 몸에 좋고 맛도 좋다는 것 같았기에.

“궁금한가?”

“네.”

“들어오게나. 그러면 알려주지. 흐흐.”

“에잉… 됐습니다.”

그런 곳에서 경비병이나 하며 자신의 청춘을 썩힐 생각은 없었기에 시안은 호기심을 접기로 했다. 보니까 로르발 가문의 비밀인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 이제까지는 모두 수락했는데… 자네 정도면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아쉽구먼.”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예전 라가오페의 영입 제안이 생각났다.

“그럼 이제까지는 모두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까?”

시안의 또 다른 질문에 키큘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음……? 그게 누구입니까?”

“저기 있지 않은가.”

키큘러스는 결계를 완성시키고 이곳저곳을 손보며 마무리하고 있는 콘-라드를 가리켰다.

“음? 콘-라드 씨 말입니까?”

“그래. 저 친구는 뭐 프리… 랜서인가? 어디서 이상한 말을 가져와서 쓰던데… 한 곳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돕겠다더군. 방벽 안쪽을 관리하면서 인간종을 키워내겠다고. 그것도 나쁘지 않기에 수락했지.”

“강제로 가입하는 게 아니군요. 몽땅 가입했다길래 반강제로 하는 줄 알았는데.”

“어허, 이 친구가. 우리가 무슨 양아치 패거리인 줄 아는가. 다들 자율의지로 가입을 하게 된다네.”

시안과 키큘러스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 콘-라드가 결계의 설치를 마치고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하, 결계 설치는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이제 제가 손볼 것은 더 없습니다. 잔당은 스웜이 처리해 줄 것이고 결계는 커가며 안정화되겠지요.”

“오오… 그러면…….”

시안은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콘-라드는 살짝 웃으며 그 기대에 부응했다.

“맞습니다. 결계가 안정화되면 시안 씨와 스틸 씨 정도는 어떻게든 저 쪽 대륙으로 보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나중에 결계가 해제되고 키큘러스의 에너지가 남아돌면 그때는 더 수월하게 다닐 수 있겠지요.”

북쪽의 게르나를 소탕해 버린다면 더는 결계를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는 스웜이나 무라칸을 빼낼 여력이 없었지만 이번 라가오페의 연구로 인해 혁신적으로 강화된 무라칸은 게르나족에게 눈 돌릴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아, 라-샤르-로아를 설치하지는 않습니까?”

시안의 말에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펜탈도 없고… 라-샤르-로아는 대규모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법진입니다. 굳이 시안 씨와 스틸 씨만 보내는 데 그런 대규모 법진까지 설치할 필요는 없지요. 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 에너지 여력을 만들어내려면 북쪽이 정리되고 결계가 해제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설령 이곳에 다시 온다고 해도 공간이동으로 오면 되는데 굳이 라-샤르-로아까지 설치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필요하면 그때 로르발 공작가에서 알아서 설치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 머물까, 동생?”

“흠…….”

“아, 두 분은 별일 없다면 키큘러스 로르발로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음?”

“그곳에서 공간이동을 실시할 것입니다. 가장 크고 안정된 키큘러스거든요. 여력도 가장 많이 남고요. 어차피 키큘러스를 끼고 공간이동을 해야 하는데 아마 로르발이 가장 유리할 겁니다. 거리를 감안해도요.”

“흐음… 동생, 그러자. 궁금하기도 하고.”

스틸이 시안을 설득했다. 하지만 굳이 스틸이 설득하지 않아도 시안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도 로르발 공작가가 궁금했거니와 그곳에서 가장 빨리 공간이동을 실시할 수 있다면 굳이 다른 곳에 가서 머무를 필요는 없다.

“그러지요, 그럼.”

“키큘러스 씨는 저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콘-라드가 물었고 키큘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 스웜들을 통제해야 해서 말일세. 그리고 이 기회에 좀 나사 빠진 녀석들이 있으면 다잡아주고. 쭈욱 한 바퀴 돌고 가겠네. 먼저 가있으시게.”

“알겠습니다, 시안 씨. 스틸 씨, 이쪽으로.”

몸을 훌쩍 날린 콘-라드는 동쪽을 향해 쭈욱 달려가기 시작했고 시안과 스틸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 뒤로 따라붙었다.

☆ ☆ ☆

“온다는군.”

“호오… 연락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며칠 안 걸리겠군.”

로르발 공작은 눈앞의 라가오페와 이번에 개조된 무라칸의 성능을 실험해보다가 콘-라드의 연락을 받고 라가오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기대되는구먼. 벽을 세 번이나 뛰어넘은… 새로운 존재라. 저기 있는 무라칸 녀석들로도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니…….”

이번에 업그레이드 시킨 무라칸의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려 벽을 넘어 베타 1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한 번 벽을 넘은 존재들.

원래 무라칸들은 벽을 넘을 수 없는 존재였다. 원래가 나리쟈 급이었던 녀석들을 연구를 통해 로탄 급으로 만든 것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지만 로르발 공작의 입장에서는 살짝 불만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두 단계의 차이가 나면 정말 상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가끔 쳐들어오는 거인족 사이에 껴있는 녀석들의 대전사나 기묘한 인어 녀석들의 공주 정도 되면 그 강대함이 장난이 아니다. 벽 하나의 차이 정도야 숫자로 제압하면 되지만 베타 2단계의 녀석들에게는 벽을 넘지 못한 무라칸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한 번에 달려들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기에 모조리 토막이 나고 만다. 아펜탈처럼 수천만 마리가 넘는다면 몰라도 계속 죽어나가는 무라칸의 숫자를 유지하기도 벅찬 마당에 그런 군대를 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꾸준히 공작들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가끔 나타나는 베타 2단계는 무라칸들이 협공하는 사이 벽을 넘은 공작들이 힘을 모아 처리하고는 했다. 공작들은 베타 1단계이니 잡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이번에 라가오페가 가져온 피는 놀랍게도 벽에 막혀있던 무라칸을 강제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연구에 몇 년이 소요되었고, 단 한 개체만을 베타 1단계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예전에 했던 것처럼 주변의 무라칸들은 모조리 달려들어 새로 만들 녀석을 뜯어먹었고, 성공적으로 한 단계씩 강해지는 데에 성공했다.

“완벽하군. 녀석들을 지배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다니. 혹시 더 강해질 수도 있는가?”

강해진 것은 좋지만 더 강해져도 문제이다. 인장으로 지배할 수 있는 한계는 베타 1레벨까지이니. 로르발 공작이 살짝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조종할 수 없는 힘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 말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무리입니다. 이 녀석들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 좋아. 그러면 마무리를 부탁하네. 나는 새로 온다는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군.”

로르발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나갔고 라가오페는 오랜만에 보게 될 시안 씨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지만 눈앞의 문제가 급함을 깨닫고 무라칸의 연구에 집중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세심한 관찰이 필요했다.

☆ ☆ ☆

“저기 보이는군요.”

“호오…….”

콘-라드의 안내를 따라 달려오기 시작한 지 며칠째.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하기 그지없는 나무, 로르발을 보며 시안과 스틸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갈수록 거대해지는 나무의 크기를 보니 장관이 그지없었다.

“저게 가장 큰 나무입니까?”

“후후. 그렇습니다. 이제 더 놀라실 일은 없겠지요.”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저 보호령에는 평민도 거주하고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로르발의 키큘러스는 워낙 위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평민들은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아크라를 수급하지 못 한다는 뜻인데 거대하기는 오히려 칼튼하임 후작령의 블라덱보다 더욱 컸다.

“뭐… 로르발 공작가의 전투인원들은 전원 벽을 넘은 자들이니… 그들의 기운을 먹고 자랐으니 후작령보다 큰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지요.”

“저 아래도 특이한 종족이 묻혀 있습니까?”

시안이 궁금하단 표정을 지었다. 블라덱의 아래에는 검은 뱀, 블라덱이 묻혀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키큘러스를 키우는 양분이 되고 있었고. 저 정도 되면 그런 것들이 있을 법했기에 시안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뭐… 저도 본 것은 아니지만 저기서 일 년에 죽어나가는 베타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는군요. 아마 그 녀석들을 모조리 양분으로 주고 있겠지요. 아… 녀석들은 거의 다 무라칸의 밥이 되고 있으니 아닐 수도 있겠군요.”

“호오…….”

그 말을 들으니 저곳이 얼마나 격전지인지 실감이 갔다. 쳐들어오는 녀석들이 모조리 벽을 넘은 존재들, 베타라니.

“마중을 나와 있군요. 로르발 씨가 직접 나와 있다니…….”

저 멀리 나무의 아래,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셋에게는 달리면 금방인 거리였기에 넷은 금방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콘-라드, 오랜만이군.”

“로르발 씨도요. 스웜이 지원 나온 것을 보니… 라가오페의 연구가 진행이 잘 되었던 모양이군요.”

“잘 되다마다. 그 이상이라네. 자네도 이번에 수고했네. 결계를 이렇게 완벽하게 보수하다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로르발과 콘-라드를 보며 시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어색한 말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동맹관계라고 하지만 로르발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삼천 년 전부터 살아있었고, 그렇다면 콘-라드라고 해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니.

시안이 묘한 표정으로 로르발을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시안의 표정을 바라본 로르발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반갑소. 로르발이라고 하오.”

“시안입니다.”

시안은 로르발의 몸 안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게 강하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눈앞의 인물은 분명 벽을 한 단계 정도 넘은 인물이었다. 보통의 공작들보다는 좀 더 강하겠지만 엄청난 차이는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이 유심히 로르발 공작의 몸 안을 보고 있던 이유는 몸 안에 흐르고 있는 피가 달랐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인간이 아닌 듯한 피. 그러한 피가 온몸에 섞여 휘돌고 있었다. 베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훨씬 더 이질적이고 상위의 존재에 대한 존재감이 로르발 공작의 몸 안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받은 로르발은 이채를 띠며 입을 열었다.

“허… 무언가 보이나 보오?”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실례라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오, 아니오. 역시 대단하구먼. 벽을 세 개나 넘은 존재에게는 다 보이는구려. 뭐, 비밀도 아니니 나중에 말씀해 드리지. 우선 다른 할 이야기도 많을 테니 말이오.”

로르발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안쪽으로 둘을 안내했다.

“콘-라드 씨는 안 가십니까?”

“흐음… 저야 뭐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저녁에 따로 로르발 씨와 만날 겁니다. 저는 시안 씨의 귀환을 도울 준비를 해야지요. 한… 일이 주 정도는 걸릴 예정입니다. 공간이동 준비 자체보다는… 결계의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천천히 하십시오.”

백 년을 아펜탈 안에서 떠돌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겨우 이 주 정도를 더 못 참을 이유가 없었기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르발과 스틸은 걸어가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와중 저 멀리서 무언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금해져 안력을 돋운 시안은 뒤엉켜 싸우고 있는 두 집단을 보며 묘한 소리를 냈다.

“음… 저것들은 무엇입니까?”

“아… 저기 싸우고 있는 녀석들 말이오?”

“네. 한쪽은 무라칸일 텐데…….”

기괴하다는 소리만 들었지 자세한 생김새는 듣지 못 하였다. 그렇기에 시안은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녀석들 중 누가 무라칸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두 녀석들 모두 기괴하게 생기기 이를 데 없었기에.

“전체적으로 생김새에 통일성이 없는 녀석들이 무라칸이오. 그리고… 등에 지느러미 같은 걸 달고 있는 녀석들은 어인족이지.”

“어인? 인어 말입니까?”

동화 속에서나 나오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 시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자신이 아는 인어는 아름다운 상체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아인종이었는데 녀석들은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온몸의 강철 같은 근육에 물어뜯은 상대가 도망갈 수 없도록 안쪽으로 휘어져 있는 이빨들. 게다가 쭉 찢어진 여덟 개의 눈은 사방을 쳐다보며 무라칸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인어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인이라는 말은 내가 붙인 것이오. 라이오나의 자손들이지. 엄청나게 강하다오. 물 바깥이라 상대할 만한 것이지… 물 안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지…….”

로르발은 옛날 일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로르발은 원래는 반도 너머의 대륙에 방어기지를 설치하려고 했었다. 반도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힘을 집중시키기 힘들뿐더러 방어범위가 넓어 간간이 새어나가는 놈들이 있었으니까. 그때마다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저 녀석들을 보고 넘어가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저 미친 녀석들은 다른 괴물들은 잘만 통과시켜 주면서 자신들이 물 근처로 가기만 하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더 큰 문제는 물속에서는 물 바깥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 아무리 무라칸과 스웜이 있다고 하여도 도저히 물을 건널 엄두가 안 났다.

다행히도 녀석들은 바깥으로 나오면 약해졌기에 막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공주쯤 되는 녀석들이 오면 한쪽이 뚫릴 각오를 하고 몽땅 모여서 막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스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수월하게 녀석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로르발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 시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이오나라…….’

예전 네크라의 기억에서 들었던 이름이 나오자 시안이 이채를 띠었다. 아무래도 그 라이오나라는 녀석은 바다에서 사는 녀석인가 보다.

전투는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무라칸이라는 녀석들은 거침없이 어인족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기자마자 녀석들의 시체를 맹렬한 속도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녀석을 뜯어먹은 무라칸의 등에는 작은 비늘과 지느러미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허… 저런 식으로 다 먹어치우는군요. 나무 아래에 좀 넣어둘 줄 알았더니…….”

몇 마리는 나무의 양분으로 줄 줄 알았는데 무라칸은 남은 녀석들을 거침없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로르발은 성장을 다 끝마쳤기에 더 이상 양분이 필요하지는 않다네. 이쪽으로 오지.”

전투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셋은 로르발 공작의 안내에 따라 둥지 안쪽으로 향했다.

“후후. 뭐 궁금한 건 없으시오? 얼마 안 있으면 떠나게 될 텐데.”

로르발은 시안을 붙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저 강자를 만난 흥미만을 보이고 있을 뿐.

“아… 흠…….”

궁금한 게 많기는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물어오니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시안이 말을 버벅거렸다.

생각을 정리한 시안은 가장 최근에 보았던 건물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물은 그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괴상한 생물들 역시.

“그… 코어를 구해온 건물 있지 않습니까? 그 건물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 연구소를 말하는 것이오? 서쪽 해안에 붙어 있는?”

“아… 그게 연구소였군요. 무슨 연구를 했습니까? 그 코어란 것에 대해 연구한 것입니까?”

딱 보아도 무슨 연구를 한 것처럼 생겼긴 했다. 하지만 무슨 용도인지는 잘 몰랐기에 시안은 짐작하여 물어보았다.

“나도 잘 모르오.”

“으잉?”

“한번 가 보기는 했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소. 특히 그 코어가 있는 곳까지는.”

“허… 들어가서 꺼내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시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안은 굉장히 위험했다. 자신이니 무슨 주머니 물건 꺼내듯 꺼내온 것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순식간에 갈려나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은 로르발 공작 이외에는 이 물건을 꺼내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키큘러스의 나무는 로르발 공작과 키큘러스 후작이 공동개발을 진행한 물건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흠… 나도 건네받았소. 그 안에서 코어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서.”

“허… 그렇게 강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애초에 거기 로르발 씨가 지은 곳인 줄 알았는데…….”

시안은 호기심이 생겨 물어보았다. 그 안에서 그걸 들고 나왔다면 최소 벽 두 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로르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지은 곳이 아니오. 그리고 강할 필요는 없지. 원래 자기 집에 들어갈 때 강해야 경비병들을 뚫고 들어가는 건 아니지 않소? 나에게 그 코어를 건네준 사람은 그 연구소에 살던 사람이라오.”

“허… 그렇군요. 그나저나 겨우 경비병이었다니… 그 녀석들이… 코어란 게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입니까?”

생각해보니 지하의 연구실과 지상의 연구소를 오가려면 그 괴수들을 모조리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정상적인 연구가 가능할 리 없다. 무언가 침입자만 공격하고 그 안의 연구원들은 공격하지 않게 하는 수단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시안이 보기에 연구소 안에 남아있던 코어는 그렇게 베타를 둘둘 둘러 경비를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도 아니오. 물론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그 안에 있던 녀석들은 듣기로는 경비병인 동시에 실험용이었다고 하더구려.”

“…실험이요?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까?”

도대체 어떤 목표가 있길래 베타들을 그렇게 잡아와서 실험에 사용할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죽이는 것도 아닌 생포를 해 오다니. 그것도 그렇게 많은 숫자들을 말이다.

“흠… 거기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자세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구려.”

“음? 누구입니까?”

“누구겠소. 거기에 있던 연구원이지. 보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리고 로르발 공작은 어딘가로 연락을 넣었고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하하. 시안 씨,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군요. 언젠가는 뵙게 될 줄 알았지만 말입니다.”

문 바깥에서 웃으며 들어온 자는 시안도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라가오페 씨가… 거기 있던 연구원이었습니까?”

“뭐… 종신 계약직이었지요. 후후.”

라가오페는 웃으며 앉았고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시안의 궁금함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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