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4화 (65/81)

<64. 과거>

“어쨌건… 반갑습니다, 시안 씨.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신 건지 전해는 들었습니다. 그것참… 예전부터 느낀 건데 참 잘 휘말리시는군요. 그 근처에는 왜 가신 겁니까? 일부러 인간 영역 좀 떨어진 곳, 드라고나의 영역 아래에 열었는데…….”

“…….”

“내버려두면 알아서 닫힐 거였는데… 안타깝습니다.”

내버려두었어도 열 받은 크로나가 안에 들어가서 분탕질을 쳤을 것이기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콘-라드가 악사라이의 능력으로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 말투가 상당히 얄미웠지만 지금 와서 턱 돌려주기도 뭐 했기에 시안은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도 하고, 그것보다는 호기심의 해결이 더 급했으니까.

“쩝…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그 연구소는 무엇입니까?”

“별건 아니고… 구시대의 유물이지요.”

라가오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는 시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구시대의 유물치고는 엄청나던데요. 저는 그런 시설은 저쪽에서도 보지 못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물론이고요.”

힘만 센 이 대륙과는 달리 저쪽 세계는 이적과 마학이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다. 그 덕에 아마란 같은 시설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시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니 오히려 뛰어넘는 시설처럼 보였다. 문외한인 시안의 눈으로 보아도 말이다.

“흠… 그거 알려면 역사 공부를 한 번 더 하셔야 하는데요.”

“후후… 뭐 남는 게 시간인데요. 그리고 라가오페 씨의 역사공부는 참 재미나더군요.”

어차피 공간이동 하려면 2주는 걸린다고 하니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라가오페의 역사 공부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있는 시안은 기대감을 키우며 그 자리에 앉았다.

“뭐… 이야기가 좀 길어질 듯하니 나는 볼일을 좀 보고 오겠네.”

“그러시지요. 어차피 한번 들으셨으니.”

로르발은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인 듯 바깥으로 향했고 라가오페는 시안과 스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천천히 시작해볼까요. 흐음… 예전에 보니 시안 씨가 그랑-라의 손이나 일곱 행성의 대갑주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음…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때 아펜탈에 들어가기 전에 싸우시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때도 강하셨는데… 지금은 정말 엄청나시군요.”

그때만 해도 시안을 이길 만한 존재는 돈-나시안 대륙을 뒤집으면 수십, 수백도 넘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안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 벽을 넘지 못 한 자와 넘은 자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니까.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랬지요.”

“그럼 묻지요. 그건 누가 만들었을까요?”

“흠… 이곳의 사람들이…….”

“이곳의 문명이 그런 걸 만들 수 있어 보이던가요? 보시면 알겠지만 이곳은 이적이고 기술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개개인의 무력을 높이는 것에만 충실한 대륙이지요.”

“…그러게.”

스틸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그런 고등급의 아티팩트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쪽 대륙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제국 시절의 이적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 정도의 물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애초에 몇 있지도 않은 초인을 위한 물품을 만들기도 뭐했고, 자신이 알기로 그 물품들은 제국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알고 있다.

차원을 구겨 넣고 접고 강제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기술을 조그마한 반지 하나에 때려 넣는 기술력.

“허… 왜 이제까지 이게 안 이상했지?”

그러고 보니 이건 보통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는 물품들이 아니었다.

스틸과 시안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예전에 제가 살던 나라에서 들고 온 겁니다. 연구소를 빠져나오며 호신용으로 챙겨 나왔지요. 연구소도 그 나라가 존재하던 시절에 지어졌습니다.”

초인들의 보구를 무슨 호신용 몽둥이처럼 말하고 있는 라가오페였지만 표정에는 뿌듯함이나 과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안은 다른 질문을 했다.

“…나라라니? 이 땅에 있던 곳을 말하는 겁니까? 이곳에는 분명 나라라는 개념이 없다고…….”

“분명 그렇지요. 이곳에 왜 나라가 없는지는 아시지요?”

“절대적인 강제력이 없고 법이 없으니…….”

로르발 공작가가 강대하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가 부족하고 너무 바빴기에 도저히 나라를 만들고 구석구석 관리할 여력은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절대적이고 강력한 그 무언가가 있던 시절이. 이곳은 아니고 좀 더 서쪽에 위치하던 나라였지만요. 제 조국, 브로샨이 그런 나라였지요.”

“서쪽이요? 흠… 이 대륙보다 서쪽이라… 바다 건너 또 다른 대륙이 있습니까?”

듣기로 자신들이 들렀던 연구소 위아래로는 쭉 바다라고 한다. 도저히 나라를 세울 만한 공간이 보이지는 않았기에 시안이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아… 그렇진 않습니다.”

“음? 그러면 나라가 있을 만한 곳은 없던데요. 굉장히 작은 나라였습니까?”

그 말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거의 지금의 대륙만 한 넓이를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지요.”

“그런…….”

그 말과 기괴하게 부서져 녹아 붙어 있던 해안선을 조합한 시안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라가오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본 해안선 그 너머가 모조리 원래는 제가 살던 나라, 브로샨이 지배하고 있던 대륙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대륙이었었지요. 지금은 모조리 바다가 되었지만.”

“…….”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지요. 여러분이 본 연구소는 브로샨의 극동지역 연구소였습니다. 덕분에 간신히 그 대재앙의 날에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지요. 그 안에 있던 저를 포함해서요. 나머지는 모조리 죽었습니다.”

지금의 대륙만 한 땅이 그대로 가라앉았다는 말에 스틸이 고민하다 물었다.

“…무슨 운석 비라도 두들겨 맞은 거야?”

그 정도의 대파괴가 벌어질 일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이적 중 가장 강대한 위력을 자랑하는 운석 소환 이적을 떠올린 스틸이 조심스레 물었다.

“운석 정도는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지요. 그 정도의 기술력은 있었으니까.”

“허… 그러면 뭐야… 크로나나 드라고나인가?”

그러자 라가오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크로나나 드라고나도 알파가 아니었지요. 베타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베타의 끝자락이었던 크로나도 두려운 존재긴 했지만… 우리는 그 시절에는 두려운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음?”

“우리 유일신국, 브로샨을 지켜주는 위대한 전쟁신께서 계셨으니까요. 뭐… 진짜 신처럼 전지전능하진 않았지만 보통 한 가지를 기가 막히게 잘 하고 엄청나게 의지하고 싶으면 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그는 신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인간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리고 다른 종족의 어떠한 알파보다도 강대했던 알파. 그렇기에 인간의 몸으로 올라간 그였지만 누구도 알파라고 부르지 않았다.

진짜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강대함을 추앙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신’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그 파괴력과 오만함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칭호, 전쟁신.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을 벗어나 신의 경지에 올라간 남자.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절대강자.

<브록시안>

그 시절 위대한 신국을 지켜주던 수호신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브로샨을 바다 아래 처박은 멸망의 신.

콘-라드의 전생인 브록시안과 이름은 같지만 그 강대함은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그 이름이 저곳에서 따온 것이니.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라가오페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그 예전, 인간종들은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륙을 지배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들, 인간종에게서는 베타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벽에 막힌 자가 많아도 베타가 나온 종족을 이기기는 힘들다. 만약 그 베타가 벽을 두 개 넘은 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인간종은 거대한 대륙에서도 서쪽의 구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약한 종족은 아니었지만 확실한 건 강한 종족도 아니었다. 대륙에는 정말 괴물 같은 종족들이 즐비했으니까. 특히 로탄 급 종족 중에서도 알파를 배출한 종족이 있었다. 일곱 뿔과 같은 존재들의 지배를 받는 종족. 당연히 대륙의 패권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기적과도 같은 확률을 뚫고 벽을 뚫고 뚫고 뚫으며 알파의 경지에 이른 자가 나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곱 뿔이 된 것. 고대어로 그의 이름은 브록시안이었다.

브록시안은 단순히 알파가 된 것이 아니었다. 알파에 오른 이후로 대륙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의 알파를 사냥하며 자신의 강함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수없는 세월이 지난 후, 브록시안의 이름 앞에는 전쟁신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말 그대로 전쟁의 신. 싸우는 족족 이기고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무참히 짓밟는, 패배를 모르는 강대한 자.

그때쯤 되니 대륙의 서쪽은 인간종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딱히 브록시안이 동족들을 어여삐 여겨 각별히 보살피고 때려주는 놈들을 쫓아가 목을 동강내 주는, 그런 짓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브록시안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강자와의 전투뿐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알파란 알파의 목은 모조리 따고 다니는데, 그 와중에 주변 녀석들이 ‘아이고, 우리 대장의 목을 따 가십시오.’ 하고 놓아둘 리가 없고, 그 녀석들이 모조리 쓸려나간 자리는 야금야금 인간종이 차지해 나갔다.

브록시안은 지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끼는 자들 역시 존재했고 그의 여인들은 그의 자식을 낳았다. 전쟁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

신혈을 이어받은 자들은 실질적으로 전쟁신의 아래에서 나라를 통치했다. 굳이 전쟁신의 예쁨을 받아서 그런 것뿐만은 아니다. 신혈을 이어받은 자들 자체의 능력도 굉장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매력적인 특징이 존재했다.

하나, 알파의 피를 이어받아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은 베타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설령 경지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장구한 삶을 보장받는다. 다른 인간종이 베타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에 비해 이들은 기본적으로 베타까지의 경지는 보장받았다.

둘, 그런 신혈의 족속들의 피를 얻어먹게 된 자들은 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야 하지만 영생을 보장받고 베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육체가 개조된다. 비록 1단계에 불과하지만.

이 두 가지 특징이 조합되면 나오는 결과.

지배계급이 생긴다. 육체적으로도 우월하고, 마치 지배를 위해 생겨난 것과 같은 특성. 인간종의 본성이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생겨난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신, 브록시안의 아래에서 태어난 신혈들은 이 특성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인간종을 강화해갔다.

쓸 만한 강자들은 모조리 자신의 지배 아래 부렸다. 모두가 신혈의 피를 얻어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벽에 막힌 자들은 신혈의 피를 얻어 신혈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강대한 무력층이 되었다. 베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데다 영생까지 부여받으니 베타의 숫자는 빠른 숫자로 불어났다.

더불어 그들이 선택한 수단은 이적이었다. 베타의 경지에 오른 자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륙의 강대한 종족들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인간 한계인 벽 하나를 넘은 것은 엄청난 차이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다른 종족의 벽 두세 개를 넘은 자들과도 엄청난 차이가 났다. 브록시안은 알파 이외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종족들을 쓸어버릴 또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적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보장받은 장구한 삶과 막대한 자원, 그리고 본신의 강함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수단. 적은 수의 베타로도 베타2와 3을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수단. 라-시안에서 발전한 수준의 얄팍한 이적이 아니었다. 정말로 대륙을 주무르고 날아오는 운석을 그대로 박살 낼 수 있으며 생명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정도의 강대한 이적. 이름만 같지 수준 자체가 달랐다.

신의 탄생. 신혈의 지배. 이적의 발전.

이 세 가지가 조합된 결과 인간종은 빠르게 그들의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고 대륙은 완전한 인간종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처럼 바깥에서 들어오는 녀석들과 치고받고 그러는 수준이 아니었지요.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서쪽에서는요.”

그 단계까지 세력을 발전시킨 그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이적이라는 게 제국 시절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까?”

“흠… 제가 이적에 놀란 건 그게 처음 만들어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무에서 시작했는데 새로 만들어낸 것이 놀라웠을 따름이지요.”

“음? 라가오페 씨가 전수해 준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생명공학 전공이었습니다. 이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요. 만들어진 걸 사용한다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 저희 시절에도 그 분야의 전문가는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만들어진 이적을 보구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지요. 익히는 것보다 그게 더 위력이 강하기도 했고. 그냥 그 시절에 보고 들은 것을 이것저것 콘-라드와 타키온에게 말해주었는데 발전시키던 것이 엄청 신기하더군요. 수준이야 엄청 떨어지지만…….”

“허… 그 정도였습니까?”

“신국 시절에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섬을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요. 포기했지만.”

“음? 왜 그렇습니까?”

“우선 비정상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높아집니다. 이건 어떻게든 극복했는데… 구름 위에 지독한 놈들이 살더군요.”

“…….”

“구름 아래로는 못 내려오는 것 같긴 하던데… 그 녀석들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조금만 높이 떠도 공격하더군요. 벼락을 던져서. 브록시안께서 쓸어버릴까 하다가 뛰어 올라가면 엄청 높이 도망가서 결국 포기하셨습니다.”

“허…….”

구름 위에 사는 녀석들이나, 그거 쓸어버리겠다고 구름 위까지 쫓아 올라갔다는 사람이나 별로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잠시 샜군요. 그랑-라의 손이나 일곱 행성의 대갑주, 그리고 전쟁신의 창 같은 것들은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되던 물품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벽을 뚫지 못한 자들은 다른 종족과의 전투에서 피해가 클 수 있으니 뭘 또 둘러주어야죠. 저희 연구소에도 비치되어 있던 게 있어 제가 나올 때 들고 나왔습니다. 저 같은 남작이 세상 무서워서 돌아다닐 수가 있어야죠.”

“…….”

“정식 명칭은 신국 정식 군용 무투병기, AP-4였는데 그렇게 말하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적당히 이름을 붙였지요. 제 작명 센스가 어떻습니까?”

“…….”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시고. 뭐… 그렇게 대충 대륙 서쪽을 다 먹고 나면 이제 뭐가 남았겠습니까?”

“음… 휴식?”

“시안 씨의 관점 말고 그 당시 신혈들의 관점으로 봐주십시오. 힘은 터져 넘쳐흐르려 하고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 할 만한 알파는 쳐 죽여 주는 위대한 수호신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동쪽도 먹으려고 들겠지.”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스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하십니다, 스틸 양.”

“뭐, 나도 그 느낌 알거든. 후후. 왕궁을 먹으니 다른 나라도 먹고 싶더라고. 수련이 더 땡겨서 그냥 때려치웠지만.”

“…….”

“뭐… 어쨌건 대륙 동쪽을 쭈욱 둘러봤는데… 아, 여기서 대륙 동쪽이라고 함은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이 대륙입니다. 서쪽은 날아갔지요.”

“…….”

“뭐, 그런 안타까운 표정 짓지 마십시오. 언제적 이야기인데요. 아주 옛날입니다.”

“계속하시지요.”

“네. 어쨌건 동쪽을 쭈욱 둘러보니… 각 종족이 다 살고 있었는데 별로 영양가가 없더란 걸 발견했습니다.”

“흠?”

“정확히 말하면… 지배할 만한 이종족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이곳에는 이미 지배자가 있더군요.”

“허… 그 지배자라는 것이…….”

“게르나족입니다. 동쪽은 이미 이 종족이 몽땅 먹어치웠더군요. 게다가 종족 특성이 굉장히 강렬해서… 웬만한 종족들은 저 반도의 대륙으로 도망친 지 오래이더군요.”

“허… 그것참…….”

“뭐… 사실 인간종은 별 상관 없었습니다. 신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들은 게르나족의 지배를 받지 않더군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지요.”

“지배를 받는 자들만 보내서 쓸어버리려고 했겠군.”

지배를 받는 자들은 개개인이 베타의 경지까지 갈 수 있다. 게다가 강대한 이적이라는 학문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이다. 아마 게르나족을 쓸어버리는 것은 여반장이었을 것이다.

“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별로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신혈들이 썩 내켜하지 않았거든요. 촌동네 가서 살기 싫다고…….”

“…….”

“원래 그 당시 유행이 브록시안의 곁에 가까이 살수록 인정받는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브록시안께서 머무는 브로샨 신국의 한가운데서 살기를 원했지요. 신혈들 대부분은 그 근처에 모여 살았고요. 그런 촌동네를 가고 싶어 하는 신혈들은 없었습니다. 일이 년 걸릴 계획도 아니니까요.”

“허… 그래서?”

“뭐, 별수 있습니까. 신혈들이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하는 거지요.”

지배는 귀찮지만 동쪽에 사는 종족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진행되던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베타에 대한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두 개의 장소를 건설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보았던 연구소이지요. 악사룸. 진리를 연구하는 장소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각종 연구가 진행되었지요.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연구원으로.”

왜 동쪽에 지었나 의아했는데 이곳의 종족들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제야 시안은 그 안에 갇혀 있던 이종족들의 베타가 이해 가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아마 실험을 위해 잡혀 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풀려나지 못 한 채로 평생 그곳에 잡혀있었던 것이고. 그 안쪽의 시간은 바깥과는 다르게 흐르니 베타의 수명 정도라면 살아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시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스틸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른 하나는 어디지?”

“다른 하나는 시안 씨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설마?”

“맞습니다. 아펜탈입니다.”

“…거긴 도대체 왜 만든 것입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연구를 하면… 실패작도 많이 나오고 쓰레기도 많이 나옵니다.”

“…….”

“그런 자들이 혹시 나중에라도 필요할지 모르니 공간을 비틀어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아펜탈입니다. 투박해 보이지만 그 당시 신국 기술이 집결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차원감옥이지요. 그 당시 실패한 종족들 모두가 그 안에 버려졌습니다.”

“그 안에는… 거의 수백, 수천만에 가까운 괴수들이 있었는데요.”

시안이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저희가 버린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차원감옥이다 보니 아차원을 지나다니던 영체들이 잡혀 들어가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사악한 기운을 받아 번식도 하고 그랬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결코 적은 숫자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제야 시안은 그 안에 있던 녀석의 독기와 공격성, 그리고 사악한 기운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원한을 가지고 강제로 감옥에 박혀 수없는 세월을 그 안에서 보내게 된다면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뭐… 어쨌건 시안 씨가 본의 아니게 두 곳에 갇혀있던 종족들을 모두 그 굴레에서 풀어주시게 되었군요. 잘 되었습니다. 그 저주에서 풀어주고 싶어도 너무 강해서 어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영원히 그런 장소에서 고통 받아야 한다는 건 저주가 틀림없다. 라가오페는 그 점이 안타까웠지만 어떻게 해 줄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해결이 되었다니 잘 된 것 같았다.

스틸은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면 너희는 동쪽에 대해 지속적으로 조사를 하며 뭐 발견한 건 없었어? 연구소 말고 뭐 또 했을 거 아니야?”

그러자 라가오페가 한숨을 쉬었다.

“있었지요.”

그리고 라가오페는 말을 이어나갔다.

☆ ☆ ☆

게르나족을 연구하던 신국민들은 무언가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게르나족을 비롯한 각 종족들이 도무지 남쪽으로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는 것.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지성이 없는 종족들은 두렵다는 표정만 지을 뿐 도무지 왜 그런지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고, 이 게르나라는 녀석들은 어찌나 자존심이 강한지 잡아서 좀 강제로 대화를 시도하면 툭하면 자폭을 하고는 했다.

이런 걸 놓아두면 호기심 왕성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신혈의 명 아래 동쪽 대륙의 남쪽으로 향할 조사단이 꾸려졌고, 조사단은 남쪽으로 쭉쭉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대한 산을 마주치게 된다.

어찌 보면 별 특징이 없는 산.

거대하기만 할 뿐 생명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산을 둘러싸고 있는 수림은 무성하기 그지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어떤 경계선을 중심으로 풀 한 포기도 살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산의 경계.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수상하다고 멈출 수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산에 한 발짝 들인 사람들은 왜 그곳에 풀 한 포기를 비롯하여 단 하나의 생명체도 살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커억……!>

<물러서라……! 여기 무언가 이상하다.>

각 종족들을 물리치며 내려가야 할 조사단이 약자들로 꾸려졌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산에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모두 내장이 꼬이고 사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으며 쓰러지고 만다. 그나마 경지가 높은 자들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정상을 향해 더 나아가자 똑같은 느낌을 받으며 쓰러졌다.

<체내계수가 완전 역으로 변합니다.>

<뭐 이런 미친 동네가…….>

후일 조사단에게 <극한의 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곳.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 안의 계수가 완전 미친놈처럼 널을 뛰었다. 인간의 필수 생존 조건이라는 항상성이 모조리 헝클어졌다.

몸 안의 물질들은 독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약으로 바뀌었다.

신경을 전달하는 통로는 마비되었다가 작동하였다가를 반복하였다.

근육은 수축할 때 늘어졌고 늘어질 때 수축했다.

게다가 정상 쪽으로 다가갈수록 그 변화는 더욱 극심해졌다.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조사단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산을 돌아서 지나가기로 했다.

조사단은 세 팀으로 나뉘었다.

한 팀은 서쪽으로, 한 팀은 동쪽으로 산맥을 돌아 지나갔고, 나머지 한 팀은 바다를 건너기로 했다. 다행히 산맥의 끄트머리와 해변 사이의 아주 좁은 통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고 분리된 세 조사단은 그곳을 지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세 조사단 모두 처참하게 박살 난 채 돌아오고 만다.

서쪽으로 지나간 조사단은 극한의 산 너머에 위치하는 하늘산맥에 살고 있는 파충류 형태의 베타 4레벨에게. 후에 이 베타는 드라고나로 명명된다.

동쪽으로 지나간 조사단은 대수림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살던 포유류 형태의 베타 4레벨에게. 이 베타는 크로나로 명명된다.

바다를 건너 지나간 조사단은 대서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살던 양서류 형태의 베타 4레벨에게. 이 베타는 라이오나로 명명된다.

거의 모조리 찢어발겨진 후 <극한의 산> 너머의 땅은 <짐승의 땅>으로 명명되고 이 두 곳은 금지로 지정된다. 지금이야 무라칸과 스웜의 영역, 아펜탈이 금지이지만 그 시절에는 단 두 개의 금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신께서 나서 주면 간단했겠지만 신은 고작 베타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베타 4레벨은 신국의 힘으로써도 부담스럽기 그지없었기에 이곳에 대한 관심은 뚝 끊겨버리고 만다. 들어가지 않으면 위험하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그때 조사단은 무리를 해서라도 극한의 산에 들어가서 조사를 했어야 했다. 그곳에 무슨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지를.

그곳에는 엄연히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으니까.

☆ ☆ ☆

“라가오페 씨 이전에도 조사단이 있었군요.”

“역사가 오래되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극한의 산 안에 뭐가 있었나 보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극한의 산 안에 무언가가 있었는데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된 듯했다.

“뭐… 사실 알아도 별 차이 없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더 나은 방향을 도출할 수 있지 않았나 해서지요.”

“뭐가 살고 있었길래…….”

라가오페가 이마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흠… 이야기가 좀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아까 전쟁신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렸지요? 서쪽의 브로샨을 수호하는 수호신. 뭐… 사실 브록시안 님은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존재 자체로도 억제력이 있었지요.”

“들었습니다.”

듣자하니 엄청 적극적으로 지키려고 한 건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워낙 강대하고 또 흥미가 가는 상대는 알아서 싸우러 나가니 결과적으로 신국이란 곳을 지키게 된 듯하였다.

“저희 눈에야 그게 그거였지만… 신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알파 중에서도 엄청나게 강한 알파인 듯하더군요. 지금의 크로나나 드라고나는 그 자리에서 찢어죽일 수 있을 정도로요. 허풍을 떨지 않는 분이었으니… 정확했을 겁니다.”

“허…….”

“귀족 계급도 차이가 심하지 않습니까. 그 위의 계급 역시 차이가 엄청나겠지요. 어쨌건, 대륙에서도 저희는 브록시안 님의 상대가 될 만한 자는 없는 줄 알았습니다.”

“있었군요.”

시안이 짐작하여 말했고 라가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더군요, 그것도 극한의 산 안에.”

“허…….”

그 얘기대로라면 지금 대륙의 남쪽에 그런 존재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뭔지는 몰라도 그 근처로는 가지도 말아야겠군…….’

하리쟌만 해도 위험한데 그런 녀석들까지 살고 있었다니. 동시에 시안은 그제야 왜 이 대륙이 아직 하리쟌들에게 쓸려나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종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종족들이 틀어막고 있으니 하리쟌 녀석들이 나오지 못 한 것이다.

대체 어떤 녀석들인지에 대해 시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라가오페가 그 표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하나 여쭙지요. 라-시안 대륙에서는 몇 개의 종교가 있었지요?”

그러자 시안이 대답했다.

“두 개가 있었지요. 태양신교와 전쟁신교. 아… 설마…….”

“네. 그 두 종교는 제가 심심풀이로 해 준 옛날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뭐… 적당한 각색과 적합한 이능이 추가되기는 했지만요.”

“심심풀이라면…….”

“별거 아니고… 전쟁신과 태양신이 격돌한 이야기지요. 예전에 콘-라드가 브록시안이던 시절에 칭얼거릴 때 달래기 그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그 환생이라고 떠들고 다니더라고요. 거참 허풍도. 하하! 택도 없지요.”

“…….”

“나중에 콘-라드 보면 꼭 놀려주십시오.”

“허…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습니까?”

시안도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다. 태양신과 전쟁신이 격돌하여 바다가 꺼지고 산이 무너졌다는 옛날이야기. 온통 전설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다니.

“격돌한 장소가 신국 한가운데였다는 점이 불운한 일이었지요. 하… 그런 놈이 안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면 브록시안 님이 먼저 찾아갔을 것이고… 극한의 산 안에서 격돌했다면 지금쯤 날아간 곳은 서쪽 신국이 아니라 동쪽, 게르나의 영토였을 겁니다.”

“…….”

“아… 그랬다면 시안 씨가 살고 있던 라-시안까지 박살 났겠군요.”

그러면서 라가오페는 남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 ☆ ☆

극한의 산 바깥에서 알짱거리던 인간종 몇을 극한의 산 안쪽에 살고 있던 종족들은 모두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종족의 신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이능을 빌려 쓰러진 몇몇의 기억을 읽어보았다.

이능을 사용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었다. 거대한 대륙의 머나먼 서쪽에 대륙의 거의 절반을 집어삼킨 거대한 나라가 있고, 그들이 신이라고 믿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하지만 신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극한의 산’에서 살고 있던 그들 종족에게도 믿고 있는 신이 있었다.

<그랑-라>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는 존재라고 하여 강대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종족 내에서도 ‘태양신’으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던 막강한 존재.

신관들은 그들의 신에게 이 사실에 대해 알렸다. 그리고 강자에 목말라 있던 그들의 신은 그 사실을 듣고 즉각 극한의 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신국으로 쭈욱 날듯이 달려간 그랑-라는 신국의 한복판에 머무르고 있던 전쟁신, 브록시안과 치고받기 시작했다.

수천 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신국은 그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수억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륙과 함께.

☆ ☆ ☆

“허…….”

시안은 탄성을 흘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크로나는 비교할 수준이 못 되었다. 알파 중에도 엄청 상위 등급을 받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뭐…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위의 것도 영상으로 녹화되어 온 것을 연구소에서 확인하였기에 가능하였죠. 신국 내부를 움직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움직임은 모두 감시되고 있었으니까요.”

“음? 그다음은?”

“뭐…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다음에 대륙이 통째로 박살 났는데. 영상녹화기기고 뭐고 모조리 박살이 났습니다.”

“…허.”

“도망칠 새도 없이 대륙과 그 위의 신국이 통째로 박살이 났지요.”

라가오페는 연구소에서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격돌은 길지 않았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대륙은 모조리 박살이 났고 엄청나게 흩날리는 흙먼지를 맞으면서 라가오페는 동료들과 함께 그 광경을 남김없이 지켜보았다.

“뭐… 기승전결에서 결이 좀 짧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제국의 인구 대부분이 단 한 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애초에 연구소는 신국의 동쪽 국경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는데 그 연구소 앞까지 모조리 박살 났으니 말 다했지요. 아마 인간종들이 동쪽 대륙으로 천천히 이주 중이 아니었다면 그날로 멸종되었을 겁니다. 그나마 게르나족은 인간을 숙주로 여기니 죽이지는 않아 다행이었죠.”

‘허… 그래서 그때 게르나족이 그런 말을 했군.’

시안이 지저룡을 조종하던 게르나족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신국 녀석들을 받아주었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나 보다. 게르나족도 선의를 가지고 받아준 것은 아니겠지만 떠돌이 녀석들이 갑자기 뒤통수를 치고 자신들을 내몰았는데 열 받지 않을 리 없다.

“그러면 연구소에 있다가 나오신 겁니까?”

“네. 그 연구는 제가 어릴 적부터 꼭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인간을 부흥시키는 데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동료들은 참다못해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오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있더군요.”

“아… 그 지하의 연구실에 있던 것이 라가오페 씨였군요.”

“네. 시안 씨도 들어갔다 오셨다면 아시겠군요. 제가 연구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는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습니다. 인간종도… 가슴 아픈 삶을 살고 있더군요.”

예전 신국 시절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신혈은 브록시안 가까이 살던 것이 유행이던 시대. 당연히 신국이 멸망할 때 신혈들은 가장 먼저 쓸려나갔고 일반적인 인간종만이 남겨진 동쪽 대륙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돌아다녀보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법도, 규칙도 아무것도 없다. 지도자도 없다. 모든 걸 아우를 절대적인 강자도 없고 구심점이 될 사람도 없다. 이곳이 게르나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 아니었다면 진작 다른 종족들에 의해 잡아먹혔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종을 구원할 프로젝트를 완성시켰어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종을 보호할 수 있는 무력이 없다면 이 프로젝트는 실행조차 할 수 없었으니.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 라가오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드넓은 대륙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유일한 신혈. 그자는 게르나의 존재를 알고 게르나를 피해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키우며 대륙의 구석, 동남쪽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신혈이 생존해 있었습니까?>

<그것참… 여행을 가 있었는데 나라가 뻥 하고 날아가더라고. 덕분에 살았지만…….>

<다른 신혈은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없어. 천 년을 돌아다녔는데 나뿐이야. 어쨌건 반갑네. 난 로르발이라고 한다네. 내가 아직 살아서 신국 시절을 기억하는 자를 만날지는 몰랐구먼.>

로르발을 만나 꺼져가던 불씨에 희망이 생겼다. 차츰차츰 게르나족에게 먹혀가고 과거의 영광을 잊어 가던 인간종을 다시 되살릴 희망이. 우선적으로 신혈과 베타가 있다면 게르나를 몰아내고 인간이 성장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비록 이적에 대한 자료는 모두 없어졌지만 이는 인간종이 부활하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연구해서 세우면 된다.

희망을 얻게 된 라가오페는 연구실에서 다른 베타종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해 오던 프로젝트를 로르발과 함께 하나하나 실시한다.

☆ ☆ ☆

“그게 지금 보고 있는 것들입니다. 키큘러스, 아크라, 무라칸과 스웜의 개조 설계도, 그리고 각종 율법과 결계… 모두 제가 연구소에서 완성시켜 나왔던 것들이지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라가오페 씨는 무슨 스러져가는 인류의 구세주 같은 느낌이군요.”

“그러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라-시안 대륙의 이야기만 해도 놀라웠는데 이쪽의 이야기를 들으니 역사를 써내려 간 존재였다.

“그러면 라-시안 대륙에 온 건……?”

“뭐… 연구소에서 만든 자료는 모두 로르발 님에게 넘겨드린 후에 넘어갔습니다. 인간종의 발전에 좀 도움이 될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다음부터는 얘기해 드린 것과 같습니다. 뭐…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요. 그래도 크게 건진 것이 있지요.”

“음?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징그럽게 쳐다보시지요?”

“징그럽다니요. 사랑스럽다는 눈길의 표현입니다.”

전혼옥을 만들기 위해 받아놓았던 시안의 피. 라가오페는 베타2에 이른 시안의 피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전혼옥을 만들던 도중 그 피를 조금 남겨놓았다. 비록 전혼옥은 실패하였지만 그 피는 고스란히 로르발 가문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그 이후 연구를 지속하여 무라칸을 강대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즉, 저기 있는 녀석들은 다 시안 씨의 자식! 분신! 과도 같은 녀석들이지요. 하하.”

“…남의 피로 그런 변태 같은 짓을 하시다니. 그리고 저는 아직 순수한 몸이란 말입니다. 자식이라니요.”

“…….”

“왜 그렇게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십니까?”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시안 씨는 아직 스물일곱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앞으로 수천 년은 더 사실 건데 행복한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

스물일곱이 아니라 백 스물일곱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제 무덤을 파는 것 같았기에 시안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무라칸이라는 녀석들은 위험하진 않은 것입니까?”

“안전합니다. 로르발 님의 신혈도 같이 넣어서 키웠으니까요. 인장이 박혀있는 한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지요.”

“허…….”

철두철미한 라가오페를 보며 시안이 감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집에 가는 것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제부터 로르발 님과 콘-라드에게 들으시지요. 제가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대화를 마치고 라가오페는 키큘러스의 아래로 향했고, 시안과 스틸은 곧이어 들어온 콘-라드와 로르발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9권에서 계속>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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