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5화 (66/81)

<65. 진화>

시안과 스틸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나무 위로 올라와 있었다.

<결계만 안정화되면… 바로 떠나실 수 있을 겁니다. 결계는 조만간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겠군요. 스웜이 생각보다 게르나족을 빠르게 먹어치우고 있으니까요. 그때가 되면 키큘러스의 에너지를 원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겠지요.>

콘-라드가 자신할 정도로 라가오페의 최대 걸작, 무라칸과 스웜은 그의 목표인 인간종 보호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곳 반도는 지옥과도 같다는 로르발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 새 새로운 거인족들이 반도를 넘어와서 맹렬하게 무라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거인족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꾸역꾸역 계속해서 넘어오고 있었고 무라칸은 그에 맞서 피가 튀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인간족의 힘만으로 막으려고 들었다면 밀려도 진작에 밀렸을 것이다. 인간종의 베타, 공작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신혈인 로르발의 인장을 받고 피를 마셔 벽을 넘고 강해진다고 해도 애초에 벽까지 도달하는 공작의 수 자체가 모자랐다. 그 빈틈을 무라칸은 훌륭하게 메꾸어주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강화된 녀석들은 밀어붙이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잘 싸우네.”

저 멀리서 보이는 무라칸을 보며 스틸이 감상평을 내뱉었다.

무라칸은 수십 마리가 조직적으로 달려들어 거인을 공략하고 있었다. 거인이 팔을 휘두르고 입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토해내며 무라칸을 죽이려고 들었지만 그런 공격에 당하기에 거인은 이미 무라칸의 공격에 너무 많이 당했고, 무라칸들은 거인을 너무 많이 먹어치웠다. 간단하게 입에서 뿜은 에너지를 몸으로 버텨낸 무라칸들은 순식간에 거인의 발목부터 갉아먹기 시작했다.

거인의 발목은 두껍기 그지없었지만 무라칸들이 수십 개의 입과 수백 개의 팔로 갉아대는데 버틸 여력이 없었다. 결국 거대한 거체를 지탱하던 발목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고, 아킬레스건이 끊긴 거인은 그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타고난 전투종족이었던 탓에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황이 나쁜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높이가 낮아진 탓에 무라칸들은 훨씬 수월하게 거인을 타고 오르고 있었고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훨씬 더 수가 많아진 무라칸들은 결국 거인을 모조리 감싼 채 사방에서 공격하고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스틸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왕들이라면 누구나 원할, 그런 군대가 눈앞에 있었으니.

거인의 공격에도 맞설 만한 강대한 개체의 힘.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

상대를 먹어치워 상대의 장점을 복사하고 단점을 극복하는 능력.

철저하게 지배를 따르는 습성까지.

예전에 우샤란 왕국의 장난감을 보고 꽤 쓸 만한 전쟁용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저기 있는 녀석들은 개개체가 공작 급이었으니까. 게다가 빠른 속도로 베타로 진화해 나가고 있었다. 점차 녀석들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라칸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적을 막아낸 후 적의 시체를 먹고 자신의 종족들 숫자를 불려나갔는데 이제는 몇 녀석 죽지도 않고 상대편들을 모조리 갈아 마시고 있었다.

“저 녀석들을 가지고 대륙 진출이라도 할 예정인 걸까요?”

저 정도 여유병력이 남으면 반도 너머라는 곳을 탐사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기에 시안이 의문을 품었다.

“글쎄… 어? 저거 한 녀석 또 강해졌다.”

저 멀리서 고개를 파묻고 정신없이 거인을 파먹던 한 녀석이 크게 울부짖는 것을 보고 스틸이 외쳤다. 울부짖는 녀석의 몸은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잡다하게 나 있는 팔과 다리들이 모조리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 안에 나 있던 수십 종류의 입들은 서로를 물어뜯더니 천천히 사라져갔다. 몸에 나 있던 세 개의 머리도 서로 합쳐져 하나로 뭉쳐갔다.

이윽고 녀석에게는 강인한 두 다리와 억센 네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머리만이 남아있었다. 얼핏 보면 수인족과 비슷한 형상. 이전의 괴물 같던 형상에 비하면 훨씬 더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기괴함이 사라져 더 약해보이기도 한 상황.

하지만 녀석의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예전 그 누더기 같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녀석들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개조할 때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싸우고 먹어치우며 훨씬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외형 차이가 엄청나군요.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아마 저게 원래 저들이 향하고 있던 진화의 방향이 아니었을까?”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전의 모습이 강제 개조에 의한 모습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시안이 조금 찝찝한 부분은 다른 문제였지만.

“그런데 저 녀석들… 왜 이쪽을 보고 있지요?”

어느새 쳐들어온 거인족들을 모조리 쓰러트린 녀석들은 바닥에 누워있는 거인을 모조리 쓰러트린 후 바닥에 있는 녀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개중 몇 녀석은 먹는 것을 멈추고 나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나야 모르지. 아직 먹을 게 모자란다거나…….”

스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허…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듣기만 해도 피곤하군요.”

시안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저 녀석들이 모조리 달려들면 자신이라고 해도 상당히 피곤해진다. 이기기야 이기겠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은 그런 상상은 하지도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 ☆ ☆

“허어… 베타의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구먼. 이 정도라니.”

로르발은 아래 모여 있는 무라칸들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법진의 설치는 잘 되어 갑니까, 콘-라드?”

로르발은 무라칸들을 살피다가 콘-라드를 보고 말을 걸었다.

“뭐… 이제 결계도 거의 안정화되어 가고 있으니… 결계만 안정화된다면 법진의 설치는 금방이지요.”

“다행입니다.”

“아마 게르나들을 모두 쓸어내고 결계를 풀어도 된다면… 그다음에는 라-샤르-로아도 설치할 수 있을 겁니다.”

“뭐… 그건 우선 게르나를 쓸어내고 생각하도록 하지.”

로르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숭이들이 사는 대륙에야 관심 없다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 기틀을 살려놓았다는 옛 학문, 이적에는 관심이 갔기에. 가끔 발동시키는 정도라면 키큘러스의 에너지에도 별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로르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무슨 일입니까?”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군… 요즘 들어서 동족 포식의 빈도가 좀 늘어난 것 같은데…….”

“습성을 최대한 줄여놓기는 했습니다만… 전투 시나 전투 후에는 그 빈도가 조금 늘어나는 것 같더군요. 별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 예전, 연구원 시절 라가오페가 여러 종족을 연구할 때, 라가오페는 무라칸의 특이한 습성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강해질 수 있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서로를 먹어치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습성. 하지만 지배를 해야 하는 라가오페 입장에서 이 습성은 위험하기 그지없었기에 수천 년 전 개조를 하여 최대한 억눌러 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군대의 숫자 자체가 줄어든다. 먹을 게 없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먹어치울 녀석들이 반도에서 넘어드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흐음…….”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을 본 로르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들은 얼핏 보면 거인족을 먹어치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로르발 공작의 예민한 시각은 그 속의 이질적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거인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동족들을 먹어치우고 있는 녀석들. 게다가 그런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거인과 동족들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고 있었다. 먹을 게 부족한 건 아니었다. 녀석들의 수가 엄청나다지만 거인족의 숫자 역시 상당했거니와 그 시체에서 나오는 고기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으니까.

라가오페는 그걸 보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지배가 깨지거나… 그러진 않으셨지요?”

“그건 아닐세.”

과연 로르발 공작이 그 행위를 금지하자 녀석들은 그르렁거리면서도 동족 포식행위를 중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 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건 언제나 달가운 일은 아니다.

“조금 더 살펴보아야겠군요… 이번에 개조하면서 예전에 해두었던 것들이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

라가오페는 돌아오는 녀석들을 보며 조금 더 만전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지금 거대한 힘을 다루고 있다. 저런 녀석들이 난장을 피우게 되면 앞으로의 일이 피곤해지리라.

☆ ☆ ☆

무라칸들은 자신의 몸속을 휘몰아치는 두 종류의 피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한 몸 안에 들어 있었지만 그 피가 자신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느낌은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한 종류는 자신을 끊임없이 지배하려고 들었다. 그 상태에 머무르고 순종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명령을 들으라고.

다른 한 종류는 끊임없이 죽이고 먹어치우며 다른 존재로 거듭나라고 자신을 종용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존재 무라칸. 평소대로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첫 번째 피가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그 피는 자신들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였기에. 그에 비하면 두 번째 피는 최근에 들어온, 이물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차 그 양상이 바뀌고 있었다.

두 번째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라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피의 주인은 첫 번째 피의 주인에 비해 비교할 데 없이 강할 것이라고. 온몸을 돌아다니며 첫 번째 피를 먹어치우고 있는 두 번째 피가 그것을 증명했다.

무라칸은 자신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강해지는 것은 그들 종족의 잊힌 본능이었으니.

그리고 꿈꾸었다. 이 두 번째 피의 주인을 만나고 싶다고.

단순한 피 몇 방울로도 자신들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준 존재. 먹어치운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 자신을 지배하는 첫 번째 피의 흔적이 동족들에게 너무 많이 남아있다. 이 피가 자신들의 몸 안을 흐르는 한… 자신들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없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려면 우선 이 치욕스러운 흔적을 모조리 씻어내야 한다. 이 피를 모두 씻어내는 날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자신들이 다시 태어나는 때가 될 것이다.

☆ ☆ ☆

“이제 되었군. 베타의 비중이 엄청나게 올라갔어. 이 정도라면 벽을 넘지 못 한 존재는 거의 없구먼.”

로르발은 저 멀리 보이는 녀석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개조된 무라칸들은 끊임없이 거인과 어인, 그리고 각종 이종족들을 먹어치우고 강해지더니 이제는 군대의 대부분이 벽을 넘게 되었다. 저 정도의 병력이 쌓였다면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 단계의 차이 정도는 얼마든지 숫자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

“아쉽군요. 저 숫자 그대로 베타 2단계가 되었으면 훨씬 더 강력했을 텐데.”

“그러면 조종이 안 되지 않나. 후후. 이 정도로 충분하네. 들어가지. 녀석들은 저 너머 평원에서 머무르게 해야겠군. 그편이 더 나을 테니…….”

로르발은 저 멀리 평원으로 걸어가는 녀석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무라칸들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려고 들던 피는 나중에 들어온 피에 의해 거의 모두 씻겨나갔다. 이제 남아있는 피의 수준으로는 자신들을 지배할 수 없다.

더 좋은 건 자신들을 이곳까지 올 수 있게 해준 두 번째 피의 존재가 자신들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들의 어버이와 같았으니까. 멀리서도 풍겨오는 그 존재감과 그 향기. 너무나 그리웠고… 너무나 먹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렸다. 아직 이빨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기에. 무라칸들은 자신들에게 진정할 자유를 줄 존재의 강대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 흉포함과 그 강대함. 자신들은 강해졌지만 도저히 그를 당해낼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이빨을 드러낸다면 모조리 찢겨져 나갈 것이다. 평소라면 몰랐겠지만 자신들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가 끊임없이 경고했다.

다행히도 이곳은 힘을 키우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먹잇감은 끊임없이 넘어온다. 자신들을 얽어매던 피도 모조리 씼겨 나갔다. 그 덕분에 자신들은 차례차례 힘을 키웠다. 종족들 모두가 벽을 넘은, 새로운 존재가 될 때까지.

하지만 그래도 모자라다. 숫자는 충분하지만 숫자를 믿고 덤빌 존재가 아니었다. 만약 이 상태로 달려든다면 모조리 분해될 것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다. 수천 년 전 개조되고 지배된 탓에 파묻혀져 있던, 종족 진화의 가능성.

<동족 포식>

서로를 먹는다. 그리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모자란 부분은 메꾸고 강점은 더욱 강화시킨다. 자신들을 지배하던 피는 자신들의 가능성을 틀어막아 놓았지만 이제 그 피는 모조리 씻겨 나갔다. 그리고 그 피를 쓸어낸 강대한 존재의 피는 자신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강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무라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다수가 희생당하더라도… 한 번의 벽을 넘은 새로운 존재들로 탄생하게 된다면 그걸로 되었다. 두 단계 차이는 극복할 수 없지만… 한 단계 차이라면 숫자로 극복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를 이끌어준 피의 주인을 먹어치울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무라칸들은 서로를 미친 듯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얌전히 먹혀주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상대를 죽일 듯 달려들었다. 강대한 네 개의 팔과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있는 입으로 상대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하지만 대학살은 정말 조용히 진행되었다. 상대를 협박하기 위한 기도를 뿌리지도 않았고, 흉성을 토해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상대를 할퀴고 물어뜯고 먹어치웠다.

주변에서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녀석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죽이는 와중에도 상대를 씹어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서로를 먹어치우며 빈틈을 메꾸고 강해졌다. 있던 단점은 사라져 갔고, 가지고 있던 강대한 팔과 이는 더욱 튼튼해졌다. 몸을 휘몰아 돌던 피는 그런 자신들의 변화를 재촉했다.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던 동족들의 숫자가 반의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상대를 먹어치우고 가장 열심히 싸운 무라칸. 변화는 그 개체로부터 시작되었다. 등에는 새로운 팔이 또 한 쌍 돋아났다. 기존에 있던 머리 옆에 하나의 머리가 새로 돋아났다. 덩치는 더욱 커져 벽을 두 개 넘은 무라칸들은 기존의 동족들의 두 배 크기는 족히 넘었다.

그 무라칸을 시작으로 주변에서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열심히 싸우고, 가장 열정적으로 동족을 먹어치운 순서대로. 그 개체 수가 결코 많지는 않았다. 수백의 동족을 해치워가며 간신히 탄생한, 종의 한계를 한 번 더 뛰어넘은 놀라운 존재들. 그 개체수는 많지 않지만 새로운 진화체들은 주변의 모든 종족을 압도하는 기운을 뿌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의외로 이렇게 새로이 벽을 넘은 존재들은 즉시 싸움을 멈추고 전장 바깥으로 물러났다. 훨씬 강해졌으니 서로를 잡아먹기 더 쉬울 터인데 그들은 포식도 멈추었다. 이제는 서로를 먹어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동족 포식으로 강해질 수 있는 수준은 지금이 한계였다. 수백 년이 더 흐르고 더 많은 종족들을 잡아먹는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기다릴 수 없다. 자신들의 목적은 이렇게 벽 하나만 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해결책이 보이는데 전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빠진 빈자리를 채운, 벽을 넘지 못 한 존재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잡아먹었다. 벽을 넘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해서 먹어치웠다.

이런 대학살은 그들의 숫자가 수백 분의 일로 줄어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친 듯이 서로를 먹어치웠다지만 아직도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시체들은 밤에 일어난 처절한 사건을 여과 없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시체들 사이로 남아있는 그들의 숫자는 처음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와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백 개체 정도. 처음에 모여 있던 숫자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숫자.

하지만 살아남은 무라칸들 중 어느 누구도 밤사이의 포식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개체는 없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을 이끌어 준 두 번째 피의 인도에 따라 새롭게 태어났으니까.

세 쌍의 팔과 통나무 같은 다리. 강철을 꼬아 만든 것 같은 근육에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씹어 으깰 수 있을 것 같은 이.

이제 마지막 단계만이 남았다.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 이들 중 단 하나라도 피의 주인을 먹어치우는 데에 성공한다면… 자신들의 종족은 모조리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개체가 우리를 인도하는 종족의 지도자가 되고 다시 종족을 융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무라칸들은 자신이 있었다. 피의 주인,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의 강대함은 알지만… 자신들의 힘도 만만치 않다. 자신들은 증명할 것이다. 자신들을 이끌어 준 피의 주인을 먹어치움으로써 우리가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음을.

두 번째 피의 주인도 분명 종족의 진화에 보탬이 된다면 틀림없이 기뻐하리라.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다. 방해받을까 봐 조용히 진행하였지만 위대한 진화는 끝이 났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이 남았을 뿐. 간밤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무라칸들은 최종 목표를 위해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로 미친 듯이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구오오오.

저 멀리 하늘을 가르며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피의 주인이 날아왔으니까. 자신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를 본 무라칸들은 미친 듯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시안은 한숨을 쉬었다.

“하… 라가오페 씨 말은 앞으로 안 믿어야겠는데… 분명 별일 없을 거라고 하더니.”

일부러 그런 것이야 아니겠지만 현재 돌아가는 꼴을 보니 무언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였다.

자던 와중 평원 너머에서 느껴지는 흉폭한 기도에 놀라 날아왔다. 그 적의는 분명 나무에 머물고 있던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로르발 공작이 자신을 습격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다.

‘아니다…….’

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날아오면서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들은 로르발 공작이 조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강대한 이능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강대한, 벽 위의 존재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녀석들은 밤사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벽을 하나 더 깨고 로르발 공작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들로 거듭나 있었다. 벽 하나를 깬 로르발 공작은 어제의 녀석들이라면 조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녀석들을 조종할 수는 없다.

흉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방금에서야 알아채고 날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해서 이 녀석들이 밤사이에 무슨 일을 벌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녀석들의 영악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들은 밤사이에 서로를 먹어치우면서도 철저하게 기도를 감추고 있었다. 벽에 넘은 존재들은 서로 감추기로 마음먹으면 알아채기 매우 힘들다. 애초에 자신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것이 틀림없다.

도망가도 소용없을 것이다. 흉성은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이 이렇게 자신을 원하는 이유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라가오페 씨가 쓴 자신의 피가 녀석들을 어떻게든 자극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 차라리 여기서 푸닥거리하자… 후…….”

나무 쪽으로 후퇴해서 공작들 끼고 싸워봤자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공작들 다 합쳐보았자 저기 있는 무라칸 중 하나를 상대하기도 힘들 것이다.

말은 한숨을 내뱉으며 편하게 하고 있었지만 시안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자신과 벽 하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백여 개체라면 충분히 위협이 된다.

시안은 전신의 힘을 끌어올렸고 슬금슬금 주변으로 다가들던 무라칸들 역시 맹렬하게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는 감출 것도 없는지 속에 감추고 있던 흉포한 기도를 모조리 풀어 헤치고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을 지르며.

크허허허헝!

시안 역시 죽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양손에 강대한 힘을 두르고 가장 먼저 달려오는 녀석을 후려쳐 갔다.

누가 되었든 간에… 이곳에서 살아남는 존재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시안과 무라칸들은 그 대상이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서로를 향해 손에 응집된 막대한 힘을 휘둘러갔다.

“빌어먹을! 집 좀 가자!”

시안은 울분을 담아 외치며 그 분노를 무라칸을 향해 풀어갔다.

☆ ☆ ☆

“미친… 무슨 일이야?”

스틸은 자다 시안이 어디로 날아가는 것을 느끼고 무슨 일인가 하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너머, 반도 쪽의 평원에서 느껴지는 흉악한 기파에 몸을 날려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주변은 자신들보다 강한 공작들뿐이었지만 그들도 지금에서야 느낀 듯 모조리 바깥으로 튀어나와 나무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스틸은 옆에서 허겁지겁 달려가는 라가오페를 붙잡고 물었다.

“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별일 없을 거라더니!”

그 말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저도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

“모르긴 뭘 몰라? 딱 봐도 저 무라칸이라는 녀석들이랑 시안 동생이 싸우는 중인데!”

스틸은 라가오페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며 외쳤다. 연구원 출신인 라가오페는 그 손길에 잡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된 건지… 억! 그나저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

“도망가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대답은 라가오페가 아닌, 그 뒤에서 들려왔다. 스틸이 뒤를 돌아보니 침음을 흘리며 서 있는 로르발 공작이 서 있었다.

“안 도와주러 가고?”

상대가 공작이었지만 흥분상태였기에 스틸은 거침이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강하다고 존대를 쓴다면 그게 더 스틸답지 않겠지만. 로르발 공작 역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그러기에는 너무 급박했으니까.

“흠… 자네 혹시 나를 이길 수 있는가?”

“…….”

“못 이기겠지? 나도 저 안에 휩쓸리면 살아날 자신이 없네. 다른 공작들도 마찬가지이지. 자네는 말할 것도 없지. 가면 방해만 될 걸세. 녀석들 체력을 채우는 도시락의 용도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제기랄.”

스틸은 그 예전, 붉은 구멍 안으로 시안이 빨려 들어갔을 때의 무력감이 떠올라 쌍욕을 내뱉었다. 나름 강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동생을 따라다니며 본 드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은 강자 축에도 끼지 못 하였다.

저 너머, 수십 킬로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인데 그 기파에 온몸이 저려올 정도였다. 동생도 동생이지만 상대하고 있는 녀석들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 도우러 가봤자 동생의 정신만 분산시킬 것이다.

“자네 정도의 실력으로는 휩쓸리면 그냥 죽을 뿐이야. 그러니… 도망가 있게나. 여기 라가오페를 부탁하네.”

“음?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

말하는 투가 그를 비롯한 공작들은 떠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에 스틸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들 입으로 말했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터인데 로르발 공작의 태도는 말과 일치하고 있지 않았다.

그 말에 로르발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기서 녀석들이 이긴다면 우리는 쓸려 나갈 거라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시안이라는 자와 저 정도로 치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당해낼 수 없겠지. 시안 그자가 이기는 것이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바이지만… 녀석들이 이긴다면 어디부터 오겠나?”

“…당신을 쫓아오겠군.”

스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들이 저렇게 흉폭하게 날뛰고 있는 것 자체가 눈앞에 있는 로르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수천 년간 자신을 지배하고 머리 위에 올라타 있던 존재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이니까. 녀석들은 로르발이란 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로르발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맞혔네. 뭐… 보아하니 이긴 쪽도 빈사상태가 될 터이지만… 확실하게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빈사상태라고 해도 우리가 다 달려들어도 이길지 모르겠구먼.”

그러자 라가오페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폭주하실 계획이군요.”

로르발은 대답 없이 웃기만 하였다. 부정하지 않는 그 태도가 이미 폭주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스틸은 폭주라는 것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엄청나게 위험한 것임을 알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라칸이란 녀석들에게 충분히 피해를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것임을.

“라가오페를 잘 부탁하네. 뭐… 녀석들 다음 목표가 나라면 굳이 로르발 가가 아닌 자네까지 휩쓸릴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자네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네.”

“제기랄…….”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시안 저자가 이기면 모두 해피엔딩이니까. 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로르발 공작 역시 썩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로르발은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보이는 평원을 바라보았다.

‘꼭 살아 남게나…….’

그자는 살아남은 인간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였다.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될 자.

로르발은 안색을 굳히며 대비에 들어갔다. 폭주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상황이 어찌 될지를 모르니 여차하면 뛰어들 준비를 해야 한다.

☆ ☆ ☆

시안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미친 개 녀석들을 쥐어뜯어내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시안은 싸우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다행인 점과 불행인 점.

다행인 점은 예전 아펜탈에서 여러 녀석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는 점.

불행인 점은 이 녀석들 역시 강대한 자를 여럿이서 사냥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몸으로 습득했다는 점.

포위를 빠져나가 차륜전으로 한 명씩 상대하려고 했지만 녀석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물고 늘어지면서 절대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진형을 유지했다. 이런 걸 배운 적도 없을 터인데 어찌나 진형이 교묘한지 시안은 결국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이곳에서 억지로 빠져나가려고 했다가는 출혈이 더 클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하여도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 백여 개체나 있다. 무리는 곧 죽음이다. 괜히 억지로 빠져나가려다가 큰 상처라도 입는다면 빠져나가자마자 따라잡혀 다시 포위될 것이니.

시안은 자신의 팔뚝을 물려고 달려드는 녀석을 후려치며 싸움 너머, 뒤 쪽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놈들이…….’

자신과 싸우며 큰 타격을 입고 빠진 녀석들은 뒤에서 죽어 나자빠진 동족들을 먹어치우며 그 상처를 열심히 회복하고 있었다. 어차피 동시에 백여 개체가 달려드는 것이 무리인 걸 안 녀석들은 철저하게 차륜전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동시에 시안은 여기 이 녀석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싸우는 꼴을 보니 답이 나왔다. 녀석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자신을 이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랬다면 시안으로서도 훨씬 싸우기 편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방어를 생각하면서 휘두르는 공격은 위력이 반감되기 마련이니. 뒤를 생각한 공격은 훨씬 막기 편한 법이다.

하지만 녀석들의 공격 하나하나를 보니 뒤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잡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피해가 얼마가 되건 자신 하나는 꼭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

‘아… 뭐 전생에 나랑 원수라도 지었나…….’

시안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들은 생명체의 기본 조건, 생존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덕분에 시안은 한층 더 곤란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 자신의 팔뚝 한 번이라도 물고 죽어나가니. 그렇게 해서 죽었다면 모를까 다치기만 한 녀석들은 뒤로 빠져서 저렇게 자신의 손에 시체가 된 동족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나마 시체를 먹는다고 더 강해지지는 않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몸에 끊임없이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는 자신과 다르게 저 녀석들은 시체를 먹고 자신의 몸을 재생시키며 끝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동족의 시체를 먹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더 강해지지는 않았으니. 시안을 가장 곤란하게 하는 녀석들은 자신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은 녀석들이었다.

꾸드드득!

‘망할…….’

시안은 눈앞에서 자신의 팔뚝 한쪽을 물어서 살을 한 움큼 베어간 녀석을 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자신의 살이 파여 나가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시안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자신의 살을 베어 문 녀석의 변화였다.

자신의 피를 삼킨 녀석은 상처가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많은 양을 물어뜯어가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더 위험했다.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삼킨 녀석들의 등의, 자신의 주먹에 맞아 파인 상처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나오고 있었으니까.

얼핏 보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코앞까지 달려든 녀석과 싸우고 있는 시안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그맣게 솟아나은 손톱, 그리고 그 아래에 위치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손. 분명 시간을 더 주면 저 상처에서는 한 쌍의 팔이 더 솟아 나오리라. 팔 한 쌍이 더 솟아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것은 결과에 불과했으니까. 저 팔이 솟아나게 된 원인이 중요했다.

녀석들은 자신의 피를 먹어치우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그 가능성이 자신에게 열린 것이 기쁜 듯 미친 듯 괴성을 지르며 뒤로 빠지려고 했다. 가능성을 열기는 했지만 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뒤의 동족들을 먹어치우고 회복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이미 저런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더욱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런 녀석들이 뒤로 빠져서 회복해 돌아오면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기에 시안은 무리를 해서라도 저런 개체들은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놓았다. 당연히 긴박하게 싸우는 도중에 무리를 하니 몸에 상처는 점점 더 늘어갔다.

동시에 시안은 이 녀석들이 왜 자신의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을 먹어치우겠다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 하나만 먹어치우면… 된다는 뜻이구나.’

가능성을 연 하나의 개체는 그렇지 못 한 나머지 종족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는 강함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래에 그 개체 하나가 가지게 될 가치의 문제이다. 새로운 시작으로써, 동족들을 모조리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이니까. 무라칸 녀석들은 지금 그 가능성을 얻기 위해 평원에 있던 수천, 수만 개체들을 희생해가며 이렇게 덤비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 먹어치우면 무라칸이란 종족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삐그덕거리며 맹렬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 시안은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세 번이나 겪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이제까지 세 번이나 느낀 대변화. 그 네 번째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위기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으니.

시안은 이를 악물며 녀석들을 후려쳐갔다.

“허… 빌어먹을…….”

시안은 쌍욕을 내뱉었다. 자신은 열심히 싸웠지만 한 끝이 부족했다.

어떻게 보면 분명 승리이다. 녀석들은 단 한 개체만을 남기고 모조리 죽었으니까. 게다가 녀석들을 쳐 죽이며 거의 마지막에 벽도 넘었다. 여기서 회복만 한다면 자신은 벽 네 개를 넘은, 이곳 대륙의 말로는 베타 4레벨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패배한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는 한 개체가 살아남아 있었으니까. 녀석들은 결국 자신을 먹어치우고 자신을 먹어치운 동족의 시체를 먹어가며 차츰차츰 자신의 피의 비율을 높여가며 진화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살아남은 한 녀석은 기어코 베타 3레벨에 도달했다. 녀석 역시 살아남는다면 당할 자가 없는 강대한 존재가 되리라.

녀석의 몸도 만신창이였고 자신의 몸도 만신창이였지만 자신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녀석도 다 죽어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톱 박아 넣고 만찬을 즐길 정도의 여력은 있어 보였다.

‘후… 엄청 허무하네…….’

보통 주인공들은 이런 위기에서 동료들이 잘도 구해주러 나오던데 자신에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에이… 빌어먹을. 잘 먹고 잘 살아라!”

시안은 마지막 힘을 모아 일갈을 내지르고는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잘려나간 두 다리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 네 쌍의 팔 중 남아있는 세 개의 팔을 이용하여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던 녀석이 주변을 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음?”

시안은 고개 돌릴 힘도 없었기에 녀석의 반응을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순식간에 날아온 수십 명의 인원들. 그들은 힘이 빠진 녀석을 둘러싸고 폭격에 가까운 공격을 뿌리고 있었다. 힘이 빠졌다지만 베타3. 그들은 접근은 하지 못하고 미친 듯 공격하며 녀석이 다가오지 못 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쳐다보는 자신을 안아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제 시간에 왔구먼. 후… 남자한테 안긴다고 너무 뭐라고 하진 말게나.”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등지며 웃고 있는 사내. 그 사내를 본 시안은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후… 너무 늦지 않으셨습니까, 로르발 씨.”

“늦다니. 자네가 안 죽었지 않은가. 보아하니 벽도 넘은 것 같은데 이보다 완벽한 타이밍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제 저 녀석만 없애면 완벽하지. 좀 주무시게나. 너무 멋진 순간에 우리가 나타났다고 반하지는 말고.”

무슨 헛소리냐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시안은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후우…….”

시안은 자신의 몸 안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느꼈다. 이제 자신은 베타로서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고.

‘크로나와 드라고나들도 이 단계를 거쳤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넘게 된다면… 전설에 나오는 브록시안이나 드라고나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 물론 자신은 그들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겠지만 말이다. 벽을 넘은 시간이 다르니 당연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 벽을 넘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이렇게 벽을 넘고 난 후 자신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언제나 자신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어느 정도냐면 이 정도면 그래도 그 미친 짓거리를 할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시 하라면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몸 내부에서 느껴지는 힘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미쳤나 보구나… 이런 생각이 들고… 읏차…….”

머리를 휘돌리며 잡생각을 몰아낸 시안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회복하고 내부를 다스리느라 외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 하였다. 몸이 위기를 느꼈다면 자동적으로 일어났을 테지만 이제까지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을 보니 로르발 공작가가 마지막에 녀석들을 해치우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군…….’

마지막에 뛰어들었다지만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 전에 뛰어들었다면 녀석들의 체력 재생용 도시락이 되었을 것이나 좀 더 늦었다면 자신을 먹어치우고 강대해졌을 마지막 무라칸에게 모조리 쓸려나갔을 것이다.

“아? 일어났는가?”

“아… 로르발 씨.”

시안은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로르발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제가 쓰러진 지 며칠이나 지난 겁니까?”

“흐음… 한 한 달 정도 되었나.”

“휴… 다행이군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아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외부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지 짐작도 하지 못 하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무라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안의 질문에 로르발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네. 원래대로라면… 우리 실력으로 죽이기 힘들었겠지만 다행히도 자네가 거의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아 이길 수 있었지. 자폭까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허… 자폭이라면?”

“뭐, 별거 아닐세. 무라칸 녀석들을 끌어들인 후 그냥 키큘러스를 폭주시켜 통째로 터트리려고 했지.”

“…….”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내용만 들어도 무시무시했다.

“뭐,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이기지 않았는가. 하하. 자네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지. 진심으로 고맙네.”

“다음부터 그런 위험한 것 만들지 마십시오.”

“휴… 이건 예상 밖이었다네. 자네의 피가 이렇게 강력할 줄은…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녀석들 안에 섞여 있는 내 피는 자네 피에 모조리 잡아먹힌 지 오래였더군. 무라칸 녀석들이 갑자기 강해지고 내 지배를 풀어버린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네.”

“허…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제는 잘 처리했으니 잊어도 된다네… 후.”

“허… 그러면 이제부터 넘어오는 녀석들에 대한 방비는 어떻게 합니까?”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넘어오는 녀석들을 막는 무라칸이 모두 사라졌다면 로르발 공작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로르발 공작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과연 로르발 공작은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다른 방법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직 스웜은 남아있으니 말일세.”

“스웜 말입니까?”

“그렇다네. 이제 녀석들을 쓸 수 있지.”

“게르나족을 모조리 정리하셨나 보군요.”

“생각보다 북쪽에 숨어있는 녀석들의 개체가 많지 않더군. 결계가 무너진 동안 필사적으로 들어왔던 모양이야. 이번에 청소하면서 스웜의 개체수도 많이 불어났다네. 먹이가 많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지만… 이 정도면 어찌어찌 막을 수는 있을 게야.”

“호오… 다행이군요.”

“더 좋은 소식은 이제 녀석들이 쓸려 나갔으니 결계의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후후.”

“엇… 그러고 보니…….”

시안은 하늘을 뒤덮으며 묘한 기운을 풍기고 있던 결계가 어느새 모조리 사라졌음을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삼천 년간 지속하던 결계가 없어지니 뭔가 좀 묘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이제는 되었네. 이번 기회에 완전히 대륙 내부를 청소했으니… 당분간은 무라칸이 없어도 반도 쪽에 방어를 집중하면 막을 수 있겠지. 전역에 흩어져 있던 스웜들도 지금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다네. 아마 오늘 내일 안으로 모두 도착하겠지.”

“축하드립니다.”

“뭘. 그리고 이건 자네에게도 좋은 소식이라네.”

“아… 그러고 보니…….”

분명 예전에 콘-라드가 말했다. 결계가 안정되고 나면 그 에너지를 돌려 공간이동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데 이렇게 결계를 해제하였다면 에너지의 여유분은 훨씬 여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네. 자네는 이제 공간이동을 할 수 있지. 콘-라드가 지금 바깥에서 열심히 이적의 법진을 그려내고 있다네. 아마 오늘 저녁쯤이면… 완성이 되지 않을까 하는군.”

“음…….”

이제야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로르발의 말에 시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기쁘지 않은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뭐… 좋긴 한데 자고 일어나니 완성되어 있다고 하니 영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

“후후. 한 달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자고 있는 동안 우리는 꽤 바빴다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말이야. 푹 쉬고 있게나.”

“아… 스틸 양은 어디 계십니까?”

주변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스틸의 행방이 생각난 시안은 로르발에게 그 행방을 물었다. 로르발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무 바깥쪽 뿌리에 있는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네. 요즘 엄청나게 수련에 매진하고 있더군.”

“음…….”

“이번 사건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야. 그래도 재능이 있으니 금방 강해지겠지. 주변 공작들이 봐주고 있다네. 불러줄까?”

“아닙니다. 제가 나가보도록 하지요.”

“안내해 주겠네. 따라오게나.”

수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시안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고 로르발 공작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 ☆ ☆

“하! 그게 아니라니까. 좀 더 빠르게 몰아붙여야 돼!”

“크윽…….”

바깥쪽 뿌리에 마련되어 있는 수련장.

이곳은 공작들의 대련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곳, 반도 방어선이야 하루를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었지만 인간끼리의 대련은 또 다른 느낌이었기에 공작들은 취미로, 혹은 그 감을 유지하기 위해 이 수련장을 애용하고는 했다.

당연히 공작들이 치고받아야 하는 곳이니만큼 엄청나게 튼튼하게 지어졌다. 키큘러스, 로르발의 가장 단단한 부위를 잘라서 가져온 후 공작들의 각종 이능을 덕지덕지 발라 만들어진 이 대련장의 바닥은 작정하고 부수려들지 않는 이상 그들, 베타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 버텨줄 정도의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원목 바닥 수천 장을 깔아 만든 직경 1킬로미터에 달하는 수련장 위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스틸은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는 한 공작의 기괴한 나무뿌리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크윽… 이건 도대체 뭐야…….”

“허허. 예전 고대 종족 중 ‘안타라’라고 하는 나무의 종족들이 있지. 내 이능은 그곳에서 비롯되었다네. 지금은 저기… 남서쪽에 있는 키큘러스 아래에 묻혀있겠군.”

“제기랄…….”

나무뿌리 주제에 단단하기는 어찌나 단단한지 스틸의 공격에도 잘 끊어지지 않았다. 치열하게 나무뿌리를 공격하던 스틸은 결국 빠르게 자신을 휘감아 들어오는 공작의 나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훌쩍 뒤로 날아 물러섰다.

“후우…….”

“만만치 않지? 그들 종족도 남서쪽 지역을 지배하는 패자였다네. 비록 그 예전 게르나 사태 때 휩쓸려 나가며 베타를 잃고 몰락했지만 말이야.”

“이래서 어느 세월에 강해지나…….”

스틸이 투덜거렸다. 개나 소나 공작이고 베타인데 적어도 그런 녀석들은 따라잡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투덜거림을 들은 공작이 스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몸에 좋은 거 좀 없나? 그런 거라도 좀 먹어 보는 게 어떤가?”

“몸에 좋은 거?”

스틸이 솔깃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키큘러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뭐… 그런 건 많지 않은가. 고대 종족의 심장이나… 그 코어 같은 것들.”

“호오…….”

생각해보니 시안에게 그런 게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수련으로 강해져야 진정한 자신의 강함이라는 말을 스틸은 그다지 신봉하지 않았다. 노력보다는 결과이고 그런 좋은 게 있다면 닥치는 대로 먹어두는 것이 당연하다.

“동생이 일어나면 물어봐야겠군.”

“뭐… 그러도록 하고… 몸 한번 더 풀어야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스틸의 주위에 있던 나무뿌리들이 스틸 양을 둘둘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스틸은 투덜거리면서도 주먹에 낀 흑색 장갑을 휘둘러갔다.

그리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시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몸에 좋은 거라…….’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기는 했다.

<네크라의 심장>

<카르나인>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통해 할 수 있는 것도.

<계승>

네크라의 힘이 담긴 심장과 무기를 통해 계승을 시도한다면 스틸 양은 분명 한순간에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전 반푼이였던 쿤타리안과는 다르게 스틸 양이라면 그 힘을 모조리 녹여내어 자신의 안으로 흡수할 수 있을 테니 먹으면 바로 벽에 막힌 존재로 탄생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수명 문제도 해결이 되려나…….’

동시에 그간 찝찝했던, 스틸 양의 수명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스틸 양의 수명은 이제 몇십 년 남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시안은 저 멀리 스틸이 치고받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로르발은 시안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리 고민하는가?”

“아… 그게…….”

오랜 세월을 산 로르발이라면 혹시 이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여 사정을 말하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영 신통치 않은 대답이었다.

“흠… 그런 거라면 나는 잘 모르겠네. 나는 그쪽의 전문이 아니니 말일세. 싸우는 거면 몰라도… 게다가 난 칼-굴이라는 종족이 뭘 하는 종족인지도 모르니 말일세.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쓸 만한 로탄 급 종족인 것 같기는 한데…….”

“이런…….”

원점으로 돌아가자 기운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시안을 향해 로르발이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사람은 알고 있지.”

“아하.”

그제야 시안도 깨달았다. 전문가가 멀리 있지 않았음을.

“콘-라드와 라가오페라면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겠지. 가서 한 번 물어보게나.”

“그래야겠군요.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법진을 설치하고 있겠지. 코어 쪽으로 가보게나.”

“감사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은 몸을 날려 사라졌다.

“흐음… 칼-굴이라. 오랜만에 듣는 종족이군요.”

법진을 개조하고 있던 콘-라드와 라가오페는 시안이 가져온 심장과 카르나인을 보고 다가왔다. 특히 이것이 그들과 싸우던 칼-굴의 대전사, 네크라의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이적으로 실험을 해보던 콘-라드는 라가오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탐구욕에 불을 붙인 것인지 둘은 옆에 시안을 내버려두고 네크라의 심장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뭐… 별문제 없을 듯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심장도 안정화되어 있고… 시안 씨가 말한, 크로나의 흔적이나 이런 것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세뇌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흠… 그래도…….”

시안이 무언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라가오페가 왜 저러나 싶어 궁금해하다가 손바닥을 쳤다.

“아… 혹시 전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안은 자신이 예전에 본 케이스에 대해 말을 했다. 쿤타리안이라는 자의 인격이 사라지고 칼라굴이라는, 칼-굴족의 전사가 대신 자리 잡게 된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은 콘-라드와 라가오페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흠… 듣자하니 그 쿤타리안이라는 자는 우리가 연구하던 심장을 우연히 얻게 된 모양인데… 그걸 전혼할 때까지 두드려 패다니… 시안 씨 엄청나시군요.”

“…….”

“뭐… 전혼의 부작용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음? 왜 그렇지요?”

사람의 인격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작은 부작용이 아닌데 가볍게 말하는 콘-라드를 보며 시안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보통 전혼이 될 정도로 외부에서 충격을 받으면… 그 전에 죽게 될 테니까요.”

“아…….”

“보통은 육체가 먼저 박살 나기 마련입니다. 스틸 양이 어차피 그런 위기에 처한다면 전혼이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런 위기를 생각하면 차라리 강해지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요.”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부담 없이 드셔도 될 듯합니다. 아… 혹시 드시기가 좀 불편하면 가공을 좀 해 드릴까요?”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시안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히 이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있는 게 숙녀가 먹기에는 영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크기가 상당하기도 했고.

콘-라드는 대답하지 않고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허공에 작은 원이 그려졌고 주위에 수많은 무늬들이 새겨졌다. 콘-라드는 시안에게 심장을 받아 그 위에 놓고 힘을 가했다.

까드득. 빠득. 우드득.

그러자 심장에서 기묘한 소리가 나더니 으스러지고 분해되며 허공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가루나 모조리 사라지나 했지만 허공에 흩어진 가루에서 유달리 붉은빛을 띠는 가루들은 콘-라드가 그려놓은 원 안으로 다시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고, 이윽고 엄지손톱만 한 작은 돌 모양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상당한 크기였던 심장은 사라지고 붉은 보석만이 허공에 떠 있게 되었다. 콘-라드는 붉은 보석을 잡아채서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시안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이건……?”

“생긴 게 익숙하지요? 전혼옥을 만드는 이적으로 심장을 정제한 것입니다. 물론 전혼옥을 만드는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고 많은 재료가 추가적으로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렇게 심장을 정제한 보석을 기반으로 작업이 진행되지요. 힘의 정수를 압축시킨 것이니 크기는 좀 작아도 힘의 손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흡수도 훨씬 빠를 것이고요.”

“이적이란 게 신기하군요. 감사합니다.”

“뭘요. 저희는 이제 작업을 마무리할 테니… 가서 먹이고 오시지요. 흐… 이제는 스틸 씨도 만만치 않겠군요.”

그 예전 네크라와 치고받던 때를 떠올린 콘-라드가 미소를 지었다. 스틸은 주술을 다룰 수는 없으니 네크라보다야 약하겠지만 그래도 벽에 막힌 존재가 되면 어느 정도 상대해 줄 만할 것이다.

시안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스틸이 있을 연무장을 향해 날아갔다.

☆ ☆ ☆

“어머! 시안, 일어나자마자 이런 선물을 가지고 오다니. 후흐흐. 연무장에서 보고 있었구나?”

“네. 뭐, 이야기 들은 김에 저도 궁금해져서 물어보고 왔지요. 이렇게 가공도 해주더군요.”

시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 보석을 스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야… 서비스가 좋네. 그러면 별 부작용이 없다, 이거야?”

“뭐… 콘-라드 씨가 말한 거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라가오페 씨도 그랬고.”

“그 라가오페라는 작자는 저번에 무라칸 사태 때도 괜찮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

“뭐, 별일 없겠지. 그러면… 이걸 먹고 카르나인이란 칼을 심장에 가져다 대면 된다는 거지?”

“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안은 영 찝찝했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았고, 그 말에 스틸이 웃으며 말했다.

“별일 있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강해지셔도…….”

혹시나 자존심이 강한 스틸이 껄끄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러자 스틸이 웃으며 말했다.

“강해지는 데 왕도는 없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대함을 취해야 하는 거야. 나중에 약해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니까. 강해질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취해야 하지. 이건 어린 시절 왕궁에서 배웠지.”

“허…….”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동생이야말로 괜찮아? 그렇게 되면 카르나인은 못 쓰는 거잖아?”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거 어차피 고장 났습니다. 아펜탈에서 치고받고 싸우다가. 부담 가지지 마시지요.”

“후후. 동생 예전에 내 갑옷을 빌. 려. 가. 서 부숴 먹었던 걸 이제야 갚네.”

“…으…….”

“농담이야, 농담. 자, 그러면…….”

스틸은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있던 보석을 입안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시안의 손바닥에서 나온 카르나인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날을 심장에 쑤셔 넣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 심장에 카르나인의 손잡이를 가져다대자마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큰 소리가 나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안의 눈에는 스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명확하게 보였다.

붉은 보석은 배 속에서 쪼개져 다시 붉은 가루가 되었다. 그러고는 스틸의 온몸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스틸의 심장에 닿아 있던 카르나인에서도 거친 기운이 쏟아져 나와 그 붉은 가루와 반응하여 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체내계수가 맹렬하게 변해갔다.

근육은 강철처럼 꼬여갔고 신경은 더 예민하게, 더 세밀하게 변해갔다.

뼈는 더욱 탄탄해지고 흐르고 있는 피는 척수부터 시작하여 모조리 새로운 피로 갈아치워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크라의 심장과 무기는 순식간에 스틸의 온몸을 바꾸어 놓았고 이윽고 붉은 가루의 힘이 모조리 떨어지며 변화는 끝이 났다.

모든 과정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안은 변화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흠… 스틸 양?”

“…….”

스틸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팔다리를 휙휙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으로 뻗어나가는 주먹과 발차기.

스틸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시안을 보고 웃었다.

“와우… 역시 사람이 몸에 좋은 걸 잘 챙겨먹어야 하나 봐.”

“휴… 놀랐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다른 인격이 들어찬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시안은 스틸의 쾌활한 음성을 들으니 안심이 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네. 후후. 완전 신 나는데!”

풀쩍풀쩍 뛰는 스틸 양을 보니 새로 얻은 힘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건네주기를 잘 한 것 같아 시안은 미소를 지었다.

“카르나인은 안 쓰십니까?”

스틸이 카르나인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자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스틸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고장 났다며?”

“장갑을 넣고 다니는 용도로는 쓸 만할 겁니다. 목걸이보다 훨씬 편하겠지요.”

“오, 그러네. 여기에 넣고 다니면 되겠다. 니츠마탄은 다시 동생이 가져가고.”

이제까지 장갑을 보관해야 했기에 니츠마탄을 건네주었지만 이렇게 되면 바꾸는 것이 낫기에 시안은 스틸과 목걸이를 교환했다.

“흐음… 역시 장갑이 최고야. 저 카르나인이라는 게 고장 안 났어도 장갑을 썼을 것 같아.”

손을 부딪치는 스틸을 보며 시안은 웃었다. 그러던 와중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은빛 물결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허… 스웜 수가 어마어마하군요. 게다가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저 멀리서 오는 스웜 군단은 예전에 칼튼하임 후작령을 보호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짧은 틈 사이에 그렇게 수가 늘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 전역에 있던 스웜들이 모조리 돌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가장 특이한 점은 녀석들이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저런 에너지를 어디서…….”

“후후. 이제 결계가 필요 없으니 그 에너지를 모조리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일세.”

“아, 키큘러스 씨.”

스웜을 통솔해 온 자들이 키큘러스였는지 스웜의 무리 한가운데서 겅중겅중 뛰어 나무 쪽으로 날아온 키큘러스는 시안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이제 저걸 써서 막아내야지. 각지를 돌며 키큘러스에 남은 여유 아크라를 싹 긁어모아 왔다네.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네. 후… 고생했구먼.”

“뭘…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저 정도면… 확실히 도움은 되겠군요.”

도착한 스웜들은 차례차례 거대한 키큘러스, 로르발의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체 나무가 거대했던 터라 어마어마한 숫자의 스웜들이 모조리 그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웜들이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보니 무라칸이 없어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무라칸에 비하면 좀 모자라지만 저 정도면 뚫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충원되는 결계의 에너지로 무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방어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안 좋은 쪽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충원된 병력을 보며 마음이 편해진 시안은 집에 갈 생각에 기대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구구궁!

오밤중에 갑작스레 키큘러스, 로르발 전체를 울리는 어마어마한 진동을 느낀 시안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이제는 특이한 일이 생기면 바로 불안해지는 시안이었다. 게다가 이건 그냥 넘어갈 수준의 에너지 파동이 아니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대파동. 이거에 비하면 폭축은 어린아이의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터져 나가면 자신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 같은 에너지.

하지만 시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에너지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불안한데…….’

에너지의 양을 보니 무언가 작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건 분명했다. 시안은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으로 몸을 날릴까 하다가 우선 스틸 양이 걱정되어 스틸 양을 찾아갔다.

스틸 양도 잠에서 깨어 이게 무슨 일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시안? 무슨 사고 쳤어?”

“…….”

시안을 보자마자 툭 튀어나온 스틸의 한마디를 들은 시안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제가 무슨 재앙신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저도 놀라서 나온 겁니다.”

“흐음… 수상한데…….”

“그나저나… 별로 안 위험한가 보군요.”

“그러게… 도망을 안 가네.”

“우선 저쪽으로 가보지요.”

멀뚱히 서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공작들을 보니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시안과 스틸은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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