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7화 (68/81)

<67. 초월>

“시안? 그건 뭐야?”

뿌리 아래서 선물을 가져온다던 시안이 요상한 금빛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올라온 것을 본 스틸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로르발 공작의 손에도 기묘하게 생긴 은빛의 창이 들려있었다. 딱히 별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스틸은 아마 저 물건들이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강대한 보구인 카르나인도 별 쓸모가 없다고 쓰지 않는 시안이다. 하지만 지금 시안은 저 무기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저 손에 들린 무구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시안에게 필요한 무기라는 뜻.

“뭐… 선물이랍니다. 후…….”

“음?”

시안의 입에서 격한 한숨이 흘러나오자 스틸이 놀라 쳐다보았다. 선물을 받았다고 했는데 동생의 표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있어?”

“뭐… 별거 아니고… 여기에 머물러 계십시오. 잠시 어디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니츠마탄 좀 맡아 주십시오.”

로르발이 악의가 있다면 어차피 지금은 스틸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로르발의 태도를 보니 스틸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시안은 우선 이곳에 스틸을 놓아두고 다녀오기로 했다. 대화를 마친 시안은 로르발을 힐끔 쳐다보았고 로르발은 예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시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스틸을 두고 그 뒤로 따라 날아갔다.

☆ ☆ ☆

“잘 생각했네. 괜히 옆에 두어봤자 신경만 쓰이지. 방해만 되고.”

“…지금 어디로 날아가는 거지?”

시안은 반도 쪽으로 훅훅 날아가는 로르발을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상당히 먼 거리를 날아왔는데도 로르발은 온몸을 튕기며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로르발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 예전, 태양신과 전쟁신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싸우면 주변이 박살 날 텐데 걸맞은 전장이 필요하지 않겠나? 인간들이 없는 곳에서 싸우는 게 낫겠지.”

“인간을 굉장히 아끼는군.”

시안이 말했다.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자들이지. 우리 같은 신혈들이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나. 인간종에 알파가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 예전의 영화를 찾을 수 있을 걸세.”

“허… 나는 그냥 원래 내가 살던 데로 돌아갈 건데?”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된다네. 이긴다면. 후흐흐.”

“…….”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로르발을 보며 시안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한참을 뛰어가던 로르발은 반도의 끝에 도착하더니 바다 위로 훌쩍 뛰어들었다. 누가 보면 자살 지망생으로 보았겠지만 로르발은 물 위를 가볍게 한 번 박차더니 쭈욱 하고 바다 위를 날아갔다.

“음?”

“따라오게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뭐… 그래도 안전한 게 좋지 않은가?”

“쩝… 하긴…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군…….”

예전에 네크라 정도와 싸울 때도 산맥이 날아갔는데 이번에는 잘못 싸우면 더 큰 범위가 날아갈 수도 있다. 딱히 악의나 함정이 있어보이지는 않았기에 시안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자신과 치고받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 넘치는 투지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 제길… 비슷한 상대랑 싸우는 거 진짜 싫은데…….’

약자를 두들겨 패는 것도 취향은 아니지만 이렇게 강제로 싸우게 되니 저번에 라가오페가 가르쳐 준 표현이 떠올랐다.

‘암 걸릴 것 같다고 했나… 흐후…….’

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가는 바다는 엄청나게 짙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안은 기감을 뿌려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이 안개가 무슨 작용을 하는 지 수 킬로미터 정도밖에 살필 수 없었다.

‘어떻게 뒤통수 한 방…….’

자신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는 자에게 굳이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안개를 사용해 어떻게 암습을 해보려고 했지만 금방 포기하였다. 이런 거에 당할 정도라면 자신이 긴장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앞서 날아가는 로르발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날아가던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안개가 대단히 짙지? 이곳의 안개는 항상 이렇게 짙게 유지된다네.”

“건너가 본 적이 있나?”

“몇 번 있지. 물론 죽을 뻔했지만… 넘는 것 자체야 뭐가 어렵겠나. 어인들만 잘 피하면 되는데. 그리고 그 녀석들은 활동 주기가 정해져있기 때문에 피해서 넘어오면 된다네.”

“…….”

“이것도 무라칸과 스웜을 꽤나 많이 희생시키고 알아냈지.”

예전 로르발 공작은 반도 너머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끊임없이 이쪽으로 기어 내려오는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랬기에 무라칸과 스웜을 부려 길을 뚫고 대륙을 건너가 보려고 했다. 녀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왔지만 분명 드문드문 천천히 쳐들어오는 기간이 있었으니까.

<공작님이 죽으면 저희도 다 죽습니다!>

<어쩌시려고… 도대체…….>

아래 공작들이 뜯어말렸지만 그 당시 넘어오는 녀석들 때문에 신이 되고자 하는 계획을 한 발자국도 진행시키고 있지 못 하였던 로르발 공작은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이대로 막는 건 그렇다고 쳐도 도대체 저곳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 바퀴벌레 새끼들처럼 계속해서 기어 나오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천 년 만 년 이대로 있을 것인가? 그러다가 내 수명이 다 하면? 이대로 멸종당할 것인가?>

<…….>

할 말이 없어진 공작들을 놓아두고 로르발 공작은 수많은 무라칸과 스웜을 때려 박고 악사라이의 권능을 사용하여 빈틈을 찾아낸 끝에 기어코 이곳으로 가는 길과 건너기에 안전한 시기를 찾아내고야 만다.

“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지.”

“…….”

“뭐… 그때는 삼천 살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까.”

“지금 이 길이 그 길인가?”

심사가 뒤틀려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긴 시안이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많이 알아라도 두자는 심정에서.

그 질문에 로르발 공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네. 그리고 사실 안전한 시기도 아니지. 그때야 약해서 그랬지만 지금에야 그냥 무대포로 건너가도 아무도 우릴 막지 못 하는데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가겠나. 저 아래를 보게나.”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감을 조금 확장하니 바닷속에 수많은 물체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아마 로르발이 말한 어인들이리라. 어인뿐 아니라 수많은 물속의 하리쟌들도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꼬리를 치며 도망가고 있었다. 로르발은 자신의 기세를 숨김없이 폭발시키고 있었기에 기절해서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녀석들도 있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건너는 데에 성공했나?”

“물론이지. 그러니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자네를 끌고 가지 않는가. 물론 오래 있지는 못 하였네. 그 대륙 땅만 밟고 다시 돌아와야 했지. 내 실력으로는 위험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지. 다시 한 번 꼭 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되는군. 후흐…….”

“…….”

“나는 이기면 이쪽 대륙을 쭉 둘러볼 생각이라네. 만약 자네가 이긴다면 자네도 한번 둘러보게나.”

“…….”

절대로 이런 수상한 대륙에 올 생각이 없었던 시안은 로르발의 말은 무시했지만 이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기에 로르발의 뒤를 따라 빠르게 날아갔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안개가 슬금슬금 걷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안은 로르발의 장관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군…….”

“대단하지? 후후. 안개와 구름에 가려있지만 않았어도… 전 대륙의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을 것 같은 경치이지.”

안개가 걷히고 도착한 해변가.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은 단번에 로르발이 다시 보고 싶다는 경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멀리, 대륙 한가운데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산. 보통 산이 아무리 높아보았자 구름 아래 머물러야 하는데 수십, 수백 개의 산봉우리로 구성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산맥은 구름을 뚫고 저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구름 역시 안개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지 시안은 구름 위를 뚫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대륙이 거대한 산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 자신들이 도착한 이 기괴한 대륙은 평지는 없고 해변가에서 끊임없이 위로, 위로 천천히 높아지는 구조였다.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딱 보아도 대륙의 넓이가 상당해 보였는데 끊임없이 위로 솟구치고 있었으니 산의 높이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위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원래 있던 산이 아래는 바다에 잠기고 위로는 구름에 잠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동시에 시안은 자욱한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구름 아래로 보이는 상대적으로 낮은 봉우리의 위에서 끊임없이 안개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봉우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봉우리에서 끊임없이 안개와 구름,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광경. 하지만 엄연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툭 하고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허… 뭐하는 동네지?”

“그거야 모르지. 이 동네에 대한 정보는 잘 뜨지가 않더군. 예전에 왔을 때 잠깐 살펴보았는데… 거인족이나 다른 종족 녀석들은 저 산 구석에 박혀 있다가 내려오는 모양이더군. 싸움이 끝나면 천천히 돌아볼 생각일세.”

로르발은 새로 얻은 힘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온몸으로 자신감을 내뿜고 있었다. 문제는 그 힘이 그래도 될 수준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중에 여행하다가 꼭 크로나 같은 녀석을 만났으면 좋겠군.”

“후흐흐… 뭐, 내 이능이면 그럴 일이야 있겠는가. 그나저나 이 정도면 우리가 싸울 장소에 적합하리라고 믿네. 자네에게도 이곳을 한 번 구경시켜주고 싶었을 뿐. 죽기 전에 이런 곳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유언이 특이하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은 칼을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미 상대에게서는 흉폭하기 그지없는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몸을 자극하는, 저릿저릿한 살기.

이제까지 옆집 아저씨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잘 대해주던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태세 변화. 하지만 시안은 이미 이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저런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한 것이다. 저자는 아까부터 자신을 죽이겠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와 일대일로 싸워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군…….’

이제까지의 위기는 모두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의 협공, 혹은 요상한 껍질에 의해 찾아왔다. 자신과 같은 수준의 강자를 상대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아온 로르발 공작에 비하면 어찌 보면 불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자신의 몸과 머리를 믿었다. 지금도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어떻게 움직이라고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외치고 있었고 온몸은 그에 반응하여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쉴 새 없이 칼이 흘러가야 할 길을 그려내었고 몸은 그에 충실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예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수준으로.

시안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이 초능에 가까운 능력은 언제나 믿어왔다. 이제까지의 상대들은 모두 자신을 죽을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대한 녀석들이었고, 실제로 시안을 죽을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자신의 능력은 언제나 자신을 승리로 이끌고 다음 경지로 안내했다.

이번에도 자신의 능력은 자신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

결정이 서는 순간, 시안은 전신의 힘을 폭발시키며 자신의 머리가 그리는 궤적 그대로 손에 들린 태양신의 칼을 휘둘러갔다.

☆ ☆ ☆

“시작되었군요.”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섬광을 보며 라가오페가 중얼거렸다. 반도의 끝에 위치한 바다는 항상 안개가 자욱하기 그지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방벽처럼 저 너머의 광경을 꽉 틀어막고 있던 안개는 거대한 충격파에 의해 드문드문 밀려나고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은빛과 금빛 섬광은 그 틈새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안개에 먹혀 모조리 사라졌기에 더욱 기괴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마치 태양이 새로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는 듯한 그 광경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콘-라드는 라가오페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거야?”

“그렇지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계획은 미완이라고……?”

“음… 그랬었지.”

아까 말하기를 코어에서 나온 것만으로는 뭔가가 모자라다고 하였다. 콘-라드가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가오페가 대답을 해 주었다.

“우리가 한 준비로는 로르발 님을 베타4까지밖에 만들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벽을 깨지 못 하였지요.”

“음… 그건 보았지… 그런데?”

“하지만… 시안 씨가 있다면 알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가오페는 마지막 단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허… 둘이 죽을 정도로 치고받으면 알파가 짠하고 탄생한단 말이야? 엄청나게 신기한데…….”

콘-라드는 처음 들어보는 특성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라가오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아마 돌아오는 자는… 새로운 신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둘 다 죽든가.”

“…뭐, 그럴 수도 있고요.”

라가오페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가 되는 길이 그렇게 간단할 리는 없으니까. 계획대로 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하겠는가.

라가오페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누가 저 안개를 헤치고 돌아오게 될 지를 기대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 ☆ ☆

시안은 자신의 코 밑을 스치고 가는 은빛 창을 피해내며 길에 따라 금빛 칼을 휘둘러갔다. 자신의 손에 들린 이 칼은 도대체 뭘 갈아 넣어 만든 건지는 몰라도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땅과 공간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이미 주변에 있던 산봉우리 하나는 싸우던 와중 칼바람에 갈려나간 지 오래였다. 아래 살고 있던 거인족들과 바다의 어인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대재앙에 놀라서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시안과 로르발이 반도로 가는 입구 한가운데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반도 쪽으로는 넘어가지도 못 했다. 오로지 대륙 안쪽으로 깊숙이 달려 들어갔다.

빠른 속도로 박살 나 가는 대륙을 보며 시안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이 길로 누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겠네…….’

알파가 되기 직전의 존재들이 싸운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해 있는 괴수들은 향후 수백 년간은 이곳에 얼씬할 생각도 하지 못 할 것이다. 단지 남아있는 기운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대륙은 사라지고 엄청나게 깊은 바다가 생겨나고 있는데 육지 생물들이 이 바다를 헤엄쳐가는 것은 무리였다. 명확한 목적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시안은 빠르게 잡생각을 잡았다. 지금 그런 곳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상대가 이번에는 정말 만만치 않았으니까. 저번 무라칸이 자신 인생 최대의 위기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더 심각했다.

‘그보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거야…….’

시안은 상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종류의 이능을 보며 살짝 기가 질린 상태였다. 자신이 알기로는 공작들은 나무 하나당 하나의 이능을 가지고 나온다고 알고 있었는데 눈앞의 로르발은 수백 종류의 이능을 다채롭게 구사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력 역시 전혀 약하지 않았다. 시안은 은빛 창을 피한 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푸른 광선을 금빛 칼을 휘둘러 튕겨냈다. 튕겨나간 푸른 광선은 이미 가루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고 있는 구덩이 아래로 날아가더니 해일처럼 휘몰아치며 구덩이를 채워가던 바닷물에 그대로 적중했다.

쩌저저적!

그 부위에 맞은 바닷물뿐만이 아니라 반경 수십 킬로미터가 그 피격 부위를 중심으로 모조리 얼어붙어 갔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뒤이어 튕겨 나간 녹색 광선에 의해 모조리 녹아버렸으니까.

‘허… 이게 그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는 것의 권능인가… 너무한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이능은 모조리 다 가져다 쓰는 것 같았다. 시안은 사실 이곳에 따라오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똑같은 경지라고 하더라도 이긴다. 기본적으로 경지의 문제가 아닌 재능의 문제. 워낙 강해지는 속도가 빨라 아무도 따라잡지 못 하였지만 동급의 존재라도 시안은 항상 이겨왔다. 자신에게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후려쳐야 할지가 항상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로르발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자신보다 경지가 낮을 때야 압살할 수 있지만 이렇게 같은 경지에 오르고 보니 저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는 이능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심지어 그 예전, 네크라가 보여주었던 시간과 공간을 접는 이능도 자유자재로 가져다 쓰고 있었다. 물론 수준 차이는 비교할 것도 없었다. 네크라보다 더욱 강렬하고 더욱 빠르게 이능을 다루고 있었다. 종류야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효과가 더욱 흉험하다는 점에서 시안에게 이로운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자신 주위의 차원을 모조리 일그러트리며 들어오는 기묘한 붉은 파장을 칼을 휘둘러 갈라낸 시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잉… 상대는 저렇게 화려한데 나는 겨우 칼질 하나만 알고 있고…….’

시안은 답답한 마음에 의미 없는 투덜거림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대의 이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예에 서투른 것도 아니었다. 각종 이능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매서운 창질의 위력은 시안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귀 밑을 스치고 지나간 일격은 자신의 뒤로 날아가 도무지 그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깊숙한 구멍을 만들어내었다.

시안은 눈앞에 보이는 선을 따라 요리조리 피하면서 황금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쉬운 상대였다면 자신에게 완벽한 승리의 길을 보여주었겠지만 자신에게 따라 움직일 것을 강요하는 선들은 아쉽게도 그런 편안한 길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찌르려면 칼을 들지 않은 팔로 막아야 한다.

적의 목을 치려면 내 목도 달아날 각오를 해야 한다.

상대의 왼손을 부수어 놓으려면 내 오른손 역시 박살 날 수 있다.

수많은 길이 보였고 그 길들 하나하나가 완벽했지만 동시에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후… 쉽게 가는 때가 없구나…….’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쉴 새 없이 치고받고 있는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밑에 있던 땅과 바다는 모조리 녹아 붙고 박살 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까 그 반도에서 붙었다면 분명 키큘러스는 뿌리째 뽑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시안은 조금씩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넘은 벽은 이를 위한 준비였다는 것처럼 자신의 내부를 모조리 개조해나가고 있는 거대한 변화.

시안은 내부의 변화를 느끼며 신이 되고 싶다는 로르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갔다.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변화가 완료된다면… 전지전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로 신이 될 수 있는 자격 정도는 분명히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예전 제국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크로나처럼, 혹은 자신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 하였지만 멀쩡한 대륙의 절반을 부수어 놓은 그 옛날의 전쟁신처럼. 그들의 힘은 베타인 자신들이 보아도 분명 신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싸움은 점차 격화되고 있었다. 시안은 로르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조금 속도를 줄여 여유 있게 싸움을 풀어나간다면 아마 둘 다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알파는 될 수 없다. 자신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는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와 환경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내면을 모조리 갈아치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극한의 환경과 절대적인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싸움은 지금보다 훨씬 더 격해지고 더욱더 흉험해져야 한다. 아마 로르발의 몸 안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시안도, 로르발도 내면의 변화를 읽으며 깨달은 것이다. 어느 한쪽이 죽을 정도로 더욱 싸움이 거세어져도 알파로 올라설까 말까라는 것을.

시안도 슬슬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면 살아남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안도 궁금해졌다.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변화가 끝나게 되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지.

시안은 잡념을 없애고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아무리 화려한 이능을 써도, 경지가 높아도, 무기가 위력적이어도 밀릴 건 없다. 이제까지 칼질 하나만 믿고 살아왔으니 칼질 하나만 잘 하면 족하다. 이번에도 자신이 쌓아온 무력은 자신을 승리의 길로 이끌 것이다.

“크압!”

시안은 달려드는 은빛 창을 두 동강낼 기세로 황금의 칼을 휘둘러갔다.

☆ ☆ ☆

우우우우우웅.

스틸은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거대한 공명에 화들짝 일어났다.

“이건…….”

저 너머 격전지에서부터 울려 퍼져 나오는 거대한 파동. 마치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축복이라도 하듯 울려 퍼지는 거대하면서도 장엄한 칠흙빛의 파동은 수십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이곳, 키큘러스에서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니, 키큘러스뿐만이 아니었다. 저 거대한 파동은 그 뒤로도 한참을 퍼져 나갔으니까. 아마 예민한 존재들이라면 모두 느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작들이 모조리 쓰러지는 것을 본 스틸은 눈매를 좁혔다.

“어? 뭐야?”

수련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정이 들었던 존재들인데 이렇게 쓰러져 넘어지니 스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라가오페에 의해 금세 풀렸다. 라가오페는 의미 모를 미소를 얼굴에 띠우며 콘-라드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시안 씨가 이겼나 보군요.”

“음? 너 이거 무슨 현상인지 알아?”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말고요. 원래 인장을 받은 종속된 존재들은 신혈이 죽는 순간 모조리 따라죽습니다. 지금 공작들이 쓰러진다는 뜻은… 시안 씨가 이겼다는 뜻이겠지요. 저 거대한 파동의 주인도 시안 씨가 근원이겠군요.”

그 말에 화사하게 피어난 표정을 짓던 스틸은 이윽고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콘-라드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떻게 살아있어?”

인장을 안 받은 콘-라드가 안 죽은 것은 이해가 간다. 문제가 되는 것은 라가오페이다. 이제까지 스틸은 라가오페가 신혈을 받아 그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줄 알았다. 신혈의 주인이 죽으면 인장을 받은 존재들도 죽는다면 라가오페도 죽어야 맞는데 라가오페는 굉장히 멀쩡하게 서 있었다. 라가오페의 인장의 주인이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 그녀가 알기로 분명 로르발은 마지막 신혈이라고 들었으니까.

“뭐… 좀 이따 설명드리지요. 그나저나 시안 씨를 마중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다녀오시지요. 저는 여기서 코어를 점검하고 있겠습니다.”

스틸은 무언가가 찝찝했지만 옳은 말이었기에 급하게 아직도 울려 퍼지고 있는 거대한 파동의 근원으로 몸을 날렸다. 이겼어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에 서둘러야만 했다.

☆ ☆ ☆

죽어가면서도 엄청나게 후련한 표정을 지은 로르발을 보며 시안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그자는 자신이 알파가 되건 시안이 알파가 되건 별 상관 없었던 것도 같았다. 게다가 마지막 한 마디가 영 마음에 걸렸다.

<고생하게나…….>

“영 찝찝하네…….”

그 기분을 잊기 위해 시안은 변화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와우…….”

시안은 거듭 변화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는 순간, 그에 대한 보상인지 몰라도 만신창이였던 온몸이 재생되었다. 지금도 몸은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흘러나온 파동이 바깥으로 뻗어 나와 온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몸을 재구성하고 남은 잔재에 불과한 파동인데 말이다.

하지만 시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더욱 기가 막혔기에.

이제까지는 <생각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었다. 경지가 올라도, 벽을 깨부수어도 그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항상 똑같았다. 이적이건, 이능이건, 무술이건 몸 내부를 움직여 세상 바깥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바꾼다.>

어찌 보면 간단한 차이. 하지만 그 차이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당장 시안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머릿속 그대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지가 늘어갈수록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라-반더가 그랑-반더로는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듯, 알파가 된 시안은 그 전의 시안과는 아예 비교가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단순한 베타 한 단계의 차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차이.

그리고 깨달았다. 왜 그랑-반더에서 라-반더로는 한 번에 올라설 수 있는데 반해 라-반더에서 그 이상의 경지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이렇게 베타라는, 몇 단계의 벽을 거쳐야 하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그 변화의 폭은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이번의 벽을 넘은 것은 단순히 벽 하나를 넘은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벽을 넘으며 축적되어 오던 내부의 변화가 마치 터져 나오듯 거세게 몸 내부를 모조리 갈아치웠다.

게다가 무기도 두 개 챙겼다. 자칭 타칭 신이라는 호칭을 달고 있던 자들이 쓰던 무기이니까 신급 무기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벽을 타넘고 나서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까는 이 무기를 그저 장난감처럼 쓰고 있었음을. 온갖 알파들을 구겨 넣은 재료로 만들어진 창과 칼은 겨우 베타 정도가 사용하여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구가 아니었다.

칼과 창을 어디에 보관하나 했는데 갑자기 흐릿해지며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해된 금빛과 은빛의 가루는 시안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다시 무기를 떠올리니 척 하며 양손에 칼과 창이 잡혔다.

“허… 이런 기능도 있네…….”

시안은 사라졌다 나타난 무기를 다시 몸 안에 집어넣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으하하하하! 다시 길이 보인다! 으하! 으하! 이런 개고생 안 해도 강해질 수 있다!”

시안은 기쁨에 몸부림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예전, 열일곱 살에 벽에 막힌 후 더는 보이지 않던 ‘강해지는 길’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안이 이번에 개고생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아무리 강해진 것처럼 보여도 대륙은 넓고 강한 놈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벽에 막힌 후 자신보다 강한 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죽을 위기만 몇 번을 넘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스틸 양의 말이 백번 옳다. 강해질 기회 있을 때 자존심 세우지 말고 강해져 놓아야 했다. 게으름 피우면 쉽게 두들겨 팰 수 있는 녀석에게도 죽을 위기가 오게 될 것이 아닌가? 약자의 책임은 모조리 약자에게 넘어간다.

당장 지금만 해도 머릿속으로 자신보다 강한 녀석들 셋이 지나갔다. 크로나. 드라고나. 라이오나. 자신의 재수 없음을 보건대 언제 어떻게 그 녀석들에게 엮이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그 세 녀석을 뚜드려 쌈 싸먹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서는 좀 열심히 해야겠다… 그나저나… 와… 이래도 크로나한테는 안 된다 이거지……?”

이 힘 가지고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인데도 크로나를 이길 수 없었다. 경지에 올랐기에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크로나 뺨 한대 후리고 도망간 것이 정말 운이 좋았던 것임을. 아마 방심하지 않았고 크로나가 그런 생소한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역할 수 있는 한계와 크로나가 사역할 수 있는 한계의 차이는 명확했으니.

“후… 공간이동이 있어서 다행이다.”

강해져서 금지를 정면돌파로 뚫고 돌아가려면 정말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금지를 틀어막고 있다는 그 정체불명의 종족도 고마웠다. 그들이 없었다면 크로나와 드라고나들은 굳이 그 좁은 곳에서 다투지 않고 튀어나와 온 대륙을 휩쓸었을 테니까.

“흐후히후… 돌아가 볼까…….”

수련을 해서 강해질 수 있다면 돌아가서 수련을 하면 그만이다.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따라잡지 않겠는가?

시안은 기괴한 웃음을 날리며 사뿐사뿐 바다 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반도와 기묘한 구름 대륙을 연결하던 얕은 바다는 이제 거의 심해처럼 변해있었다. 하지만 물 위를 뛰어가면 되니 아무 문제 없었다.

날아가다 보니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스틸의 기척이 잡혔다. 시안은 가볍게 날아가 그 앞에 섰다.

“여깁니다.”

“시안! 어떻게 된 거야?”

“크흐흐. 이겼지요.”

어느덧 그쳐버린 거대한 파동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문제가 없나 보다. 시안은 오히려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면서 이야기하지요.”

일단 시안이 멀쩡한 것을 안심한 스틸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그간의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고, 시안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키큘러스로 몸을 날리며 대화를 진행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면 이제 완전 벽을 넘은 거야?”

“네. 이제 가로막고 있는 벽은 없습니다. 후… 정말 죽을 고생하며 강해진 거 생각하니… 흐휴… 수련으로 강해질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일 줄이야… 앞으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저기 보인다.”

“어서 가지요. 저는 라가오페 씨에게 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습니다.”

키큘러스, 로르발이 가까워져 가니 이제까지 했던 개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펜탈에 빠진 것부터 시작해서 아예 풍덩 빠져 이 기묘한 세상에 온 것, 무라칸에게 습격 받은 것, 그리고 로르발 공작이 강해져서 자신을 습격한 것까지. 생각해보니 하나도 빠짐없이 라가오페가 연관되어 있었다.

이를 갈며 날아온 시안은 로르발에 도착해서 기감을 넓혀 보았다. 이전까지 북적북적하던 로르발의 넓은 공간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휑하였다. 키큘러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로르발 가문의 인물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스웜도, 무라칸도, 로르발의 공작들도, 로르발 본인도 이제는 모조리 사라졌다.

“이래서 사람을 잘 보고 건드려야 한다니까.”

스틸이 감탄하듯 한 마디 토해냈다.

“어허! 스틸 양, 무슨 소리를… 누가 들으면 제가 다… 저한테 없어진 건 맞지만 저는 정당방위였습니다.”

“뭐, 그건 그래. 그나저나… 이러면 저 반도 쪽으로 쭉 뚫고 쳐들어오는 거 아냐?”

스틸이 물어보자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뭐… 적어도 수백 년간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쪽 반도가 완전 무너졌거니와… 기세를 읽을 수 있는 녀석들은 건널 엄두도 내지 못 할 테니까요.”

맹수가 영역표시를 한 곳에 잡스런 동물들은 얼씬도 못 하듯, 그곳의 흔적을 본 괴수들은 제정신이 박혔다면 그곳을 넘어오지 않을 것이기에 시안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일단은 그러면 해피엔딩이네.”

“후… 정말 긴 여행이었습니다. 조카들이 많이 태어나 있으면 좋겠군요. 우리 집은 손이 귀한데… 형수님이 셋이니 그래도 좀 태어나 있지 않겠습니까?”

스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시안 역시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운 집, 라-시안 대륙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키큘러스를 쭉 기감으로 훑던 시안은 차츰 표정이 굳어져갔다.

“뭐야, 시안? 무슨 일이야?”

“…아무도 없는데요, 이 키큘러스에.”

“뭐? 라가오페랑 콘-라드 둘 다?”

“…적어도 제 느낌에는 그렇습니다.”

알파가 되며 기감이 더욱 늘어난 시안에게 겨우 콘-라드와 라가오페가 기척을 숨길 수는 없었다. 시안은 표정을 굳힌 채로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어느덧 키큘러스의 코어에 도달했다.

로르발을 공작으로 만드느라 엄청나게 무리했을 코어는 텅 빈 고목처럼 공허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저 코어를 중심으로 한 번의 공간이동이 사용되었음을. 코어 주변에는 법진이 이리저리 그려져 있었다. 혹시 흔적을 찾을 수 있나 해서 공간이 갈라진 흔적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이미 물결이 사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라가오페 이 자식 도망간 거야?”

스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쌓인 것이 많다고는 했지만 쫓아가서 죽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간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물론 맞기야 했겠지만 말이다.

코어를 멍하니 바라보던 시안은 조그마한 구슬 같은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무언가 하여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내부에서는 조그마한 기운의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기에 시안은 살짝 그 흐름에 따라 자신의 에너지를 흘려 넣었다.

주우우웅!

이상한 소리가 나며 갑작스럽게 영상이 떠올랐다.

“…라가오페 씨…….”

<하하! 시안 씨, 안녕하십니까.>

조그만 알에서 뿜어져 나온 영상에는 웃고 있는 라가오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 이 자그마한 알이 영상통신기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여 그 흐름을 역추적해 보고 싶었지만 이미 손을 써 놓은 것인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어디 있는 겁니까?”

<뭐… 제가 거기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원래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지요.>

“…뭐 이렇게 급하게 가셨습니까?”

<하하! 로르발 님이랑 만났으면 이야기 다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제가 거기 있으면 어떻게 될지 아는데 어찌 거기 있겠습니까?>

“허허… 허허허허허…….”

<그래도 너무 화내지 마시지요. 우선 집에는 돌아가실 수 있으니까. 거기 코어 옆에 있는 법진 있지요? 그게 라-시안 대륙으로 연결되는 법진입니다. 코어야 망가졌지만… 이제 알파가 된 시안 씨라면 에너지 공급 정도야 식은 죽 먹기겠지요.>

“흠…….”

라가오페가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또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라가오페를 쫓아다니기도 피곤하였기에 시안은 그냥 나중에 만나면 갚아주기로 하였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우선은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시안을 보며 라가오페가 웃으며 이야기를 건넸다.

<예전에 제가 시안 씨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해 드렸지요?>

“그랬었지요.”

<거기에 제가 아직 이야기를 안 드렸던 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 안 해 준 게 많습니까?”

<이번게 정말 마지막입니다. 지겨워도 꼭 들으셔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라가오페에게 들은 신기한 이야기만 해도 한 무더기였다. 항상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터인데 감추었던 이야기가 있다길래 시안은 궁금해서 입을 열었다.

“왜 이야기를 안 해주셨습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셨다면 제가 맞는 걸로 끝나지는 않았을걸요?>

“허……?”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라가오페의 말에 시안의 표정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라가오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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