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8화 (69/81)

<68. 루크라>

<흠…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하나… 제가 시안 씨를 알게 된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뭐… 오래되기는 했지요.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자신이 아펜탈에 빠진 것이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당시 처음 자신을 보았다면 적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시안의 말을 듣고 라가오페는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었다.

<좀 더 오래되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라그랑 전투 때부터? 콩티앙 때?”

그 당시라면 상류층에는 꽤나 소문이 퍼졌으니 자신에 대한 소문이 라가오페의 귀로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집히는 때가 상당히 많았다. 라가오페의 조직 헤란테르의 정보력 정도라면 그런 사실들은 모조리 라가오페의 귀로 들어갔을 테니.

그렇지만 라가오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오래되었습니다.>

“대체 언제 보았길래…….”

<뭐… 태어났을 때부터라면 얼추 맞겠군요. 정확하게 말하면… 축복식 이후부터라고 할까요?>

“으잉?”

예상치 못 한 답변에 시안은 입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축복식 때 부터라니… 자신은 그때의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본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시안 씨는 축복식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 태어났을 때의 반데르 수치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그걸로 재능을 판별한다고…….”

<그러면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

<기운은 그때그때 다르지요. 개개인의 기운을 외부에서 명확히 측정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대기 중의 에너지를 자신의 마음대로 사역할 수 없는 100일짜리 아이한테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반데르 수치란 개념을 대륙에 도입하고 축복식이란 걸로 귀족가의 재능을 측정한 이유는… 뭐, 이쯤 말하면 아시겠지요?>

대답은 스틸에게서 나왔다.

“네가 예전에 말한… 그 인간종과 원숭이의 피의 비율을 측정하는 것이었구나.”

<바로 맞히셨습니다. 뭐… 공식적인 기록은 86퍼센트가 최대였지요. 이걸 반데르 수치로 표현하면 86이라고 한 거고요.>

“그 정보는 모두 네게 들어갔겠고.”

그러자 라가오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려고 법도회 쪽에서 그런 쓸데없는 의식을 만들게 한 건데. 귀족들의 경쟁의식과 미래의 잠재력을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이용하면… 빠르게 문화로 정착시킬 수 있지요. 의미가 없지도 않고요. 실제로 저 수치가 높을수록 높은 재능을 타고나게 되니까.>

“음… 그걸로 동료가 될 자들을 미리 찾아보신 겁니까?”

라가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높은 피의 비율을 가졌어도… 어렸을 때는 의외의 사고로 죽어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높은 피의 비중을 가진 자들은…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인재들이지요. 어릴 때부터 좀 돌봐주기 위해서 이런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후후. 안 그러면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우리 스틸 씨께서 어떻게 반역에 성공하고 왕좌를 탈취할 때까지 그 험악한 왕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재능이 넘쳐도 어린 소녀일 때는 스틸 씨보다 강한 자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는데.>

“허… 네가 뒤에서 봐준 거였어?”

<아마 스틸 양 담당은… 로바노튼 씨였을 겁니다. 바빠서 계속 봐줄 수는 없고… 가끔 가끔 뒤에서 봐주고… 나머지는 법도회 쪽에서 압력 넣고 이런 식으로 조종을 했지요. 헛되이 죽기에 우리들 한 명 한 명은 너무 소중했으니까요. 80퍼센트가 넘는 반데르 수치를 가진 자들은 이런 식으로 잘 관리해주면 보통 거의 다 초인이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 저도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뭐… 시안 씨는 좀 특이했죠. 아예 시작부터 달랐으니까. 스틸 씨, 스틸 씨의 반데르 수치는 얼마가 나왔었죠?>

“…82였나. 그 덕분에 미쳐 날뛰는 둘째 오빠랑 넷째 언니한테 목이 달아날 뻔했지.”

스틸은 예전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진정하란 듯 기묘한 손동작을 하고는 시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시안 씨는 얼마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글쎄… 동생이면 한 99나 100 아니었을까?”

동생의 기묘한 강함을 생각하면 200, 300이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애초에 퍼센트라는 것이 100이 끝이 아닌가. 그렇다면 100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가오페는 고개를 흔들었다.

<497이었습니다.>

“뭐? 이거 분명 퍼센트라며? 100이 끝 아니야?”

어처구니없는 수치에 스틸이 놀라 되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에 담겨있는 힘의 반응성을 측정하는 겁니다. 원래 라-시안 대륙에 살던 원숭이들 피의 반응성이 1 정도 된다면… 여기 살고 있는 인간종의 피의 반응성은 거의 100 가까이 되거든요. 그걸 기반으로 계산하는 것이지요. 만약 순수한 원숭이의 피가 넘친다면 반데르 수치는 1이 나올 것이고… 그보다 40배 정도 강렬하게 반응한다면 거의 40퍼센트 정도…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497은 뭡니까? 제 피가 남들보다 다섯 배 많은 것도 아닐 텐데요. 아… 혹시 제가 전쟁신이나 태양신이란 자들의 직계 후손입니까? 제가 뭐 그런 자들의 환생이라거나… 숨겨져 있던 아들이라거나…….”

시안도 뜬금없는 출생의 비밀이 나오자 신기하여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콘-라드가 하던 말을 어쩜 이리 똑같이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런 건 배우지 마시지요.>

“…….”

<그런 출생의 비밀은 없습니다. 다른 건 있지만. 예전에 제가 원숭이들에게 실험을 할 때 제 피를 섞었다고 했지요?>

“그랬지.”

<그리고 그때 다른 피도 섞였습니다.>

“음? 그냥 네 피만 써서 만든 거 아니었어?”

스틸이 처음 듣는 사실에 되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하지만… 뭐?”

스틸이 궁금하다는 듯 보채어 물었다.

<제 피가 순수한 인간의 피라고는 말한 적도 없지요.>

“…무슨…….”

<흠… 뒤의 이야기를 설명드리려면 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겠군요. 아까 스틸 양이 물어본 것도 있고.>

“무슨… 아, 맞다. 너 왜 아직 살아있어?”

“음? 무슨 뜻입니까?”

“아니. 분명 신혈이 죽으면 인장에 종속된 사람도 다 죽는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라가오페는 왜 아직 살아있어?”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이제까지 라가오페의 수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듣자하니 인장이란 걸 받으면 영생을 산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라가오페는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로르발이 마지막 신혈이 아니거나, 혹은 신혈이 죽어도 그 아래 종속자들은 죽지 않는다거나.

시안이 라가오페를 쳐다보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로르발 님은 마지막 신혈이 맞았고 그 아래 종속자들 역시 죽습니다. 저 바깥의 공작들이 그 증거이지요. 이제 브록시안의 피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굉장히 담담하게 말하는 표정의 라가오페를 시안은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표정으로 보실 것 없습니다. 원래 새로운 알파가 나타나면… 그 이전의 흔적은 쓸려나가는 게 섭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전에 분명 말씀드렸지요, 신관의 축복을 받았다고. 저는 신혈의 인장을 받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스틸이 헛갈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둘 모두 생소한 개념이라 스틸 입장에서는 그게 그걸로 들렸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완전 다르지요. 신관은 인간종에게는 없는 개념이거든요.>

“…….”

<뭐… 굳이 인간종에게만 신관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당시 신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 혹시…….”

시안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 영생을 부여한 자들은… 인간종의 신혈이 아닙니다. 태양신, 그랑-라를 따르는 일족, 루크라의 신관들이지요. 저는 현재 그 자들의 피를 얻어 살아있습니다. 제 몸속에는 그자들의 피가 섞여 있었지요.>

그리고 라가오페는 말을 이었다.

라가오페는 로르발에게 알파가 되기 위한 모든 자료를 넘겨준 후 금지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으니까. 바깥세상에서야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지만 악사룸의 안에 있던 자신에게는 겨우 백오십 년 정도가 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구에 집중하느라 자신은 남작의 경지밖에 성취하지 못 했고 악사룸에 들어가기 전에 소비한 세월과 나와서 로르발 공작을 찾으며 소비한 세월을 생각하면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실제로 자신도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고. 기껏해야 십 년 정도.

로르발 공작의 인장을 부여받고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 로르발 공작은 자신의 인장으로 스웜과 무라칸, 공작들을 다스리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그저 탐험가의 마음을 가지고 내려갔다.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그냥 금지나 구경해 보자는 마음으로. 명목이야 부족한 연구 재료의 조달이었지만 무슨 재주로 금지의 주인들이 지키고 있는 그 안에서 재료를 구해 나오겠는가. 그 당시에는 아직 알파가 아니었지만 알파나 베타4나 라가오페 자신에게는 그게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그곳을 무덤 삼을 생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가던 그는 예상치 못한 납치를 당하게 된다.

정체불명의 이들. 이들은 예전 탐험대가 지나갔던, 극한의 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길로 지나가던 라가오페를 강제로 산 안으로 끌고 왔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힘은 극한의 산 안에서도 그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는 라가오페의 기억을 읽은 후 탄식하듯 내뱉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자는 신관의 계급을 담당하고 있는 이였다. 분명 다른 언어를 쓰기에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지만 신관이 내뱉은 한마디는 영파를 통해 라가오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빌어먹을… 어쩐지 너에게 끌림이 느껴지더니…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는가.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나타난 걸 보니…….>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니… 로르발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접속자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아직 악사라이의 뿌리를 뽑지 못 했다는 증거이니…….>

천생 연구자였던 라가오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들, 신관의 말에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너희들 인간 말로는… 루크라… 정도가 되겠군. 위대한 그랑-라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그리고 그랑-라를 모셨던 루크라들의 신관은 그들의 역사에 대해 쭉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극한의 산에 머물며 강대하기 그지없는 알파, 그랑-라를 배출해 낸 위대한 종족, 루크라.

처음부터 극한의 산에 살았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강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약한 축에 속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특성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만 강해질 수 있다. 아무리 수련을 해도 강해질 수 없다.>

<반대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다면 큰 폭으로 강해진다.>

특이하기 그지없는 혈통.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랐지만 대륙은 위험이 넘치다 못해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종족은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초반에는 약했지만 그들의 특성은 나중에 벽에 막혔을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남들은 수련으로 넘기 힘든 벽을 그들은 죽을 위기를 넘기며 거침없이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피해가 너무나 컸다. 죽을 위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살아남은 자들은 많았지만 죽어나가는 자들 또한 많았기에 그들은 차츰차츰 정예화되었지만 그 숫자는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강해지며 대륙을 떠돌던 도중, 그들의 부족은 굉장히 신기한 땅을 발견했다.

강하면 강할수록 위험한 땅.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던 강대한 육신이 나를 공격하는 곳.

다른 생명체들은 극히 꺼려하는 이 땅은 루크라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땅이었다.

그들은 신지를 찾은 이후 돌아다니지 않고 그 안에서 끝없이 수련을 해 나갔다. 처음에 약한 자들은 낮은 곳에서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짜 죽을 것 같으면 조금 내려가서 덜 위험한 곳에 머물렀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자들은 정상 쪽으로 차츰차츰 나아갔다. 정상에 올라갈수록 기묘한 산은 더욱 가혹하게 변해갔지만 이는 루크라들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켰다.

인간들은 극한의 산이라고 명명했지만 그들은 이곳을 축복받은 땅, 신지라고 명명했다. 이 땅을 찾은 이후로 그들의 세력은 꾸준히 커져갔다. 그 와중에 그들의 종족은 극한의 산에 완전히 적응하여 바깥으로 나가면 오히려 약해지는 단점도 생겼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경지를 올리면 모조리 해결되는 문제이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계속해서 벽을 깨고 정상 쪽으로 나아가 정상에 도달한 그들의 전사는 인간의 말로 알파라는 경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알파가 되니 신지의 정상이라도 그들에게는 죽을 정도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때부터 그들은 나가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종족의 강대한 알파들을. 그들과 싸우며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아남은 자는 더더욱 강해졌다. 나중에 인간종들은 동쪽 대륙에 오고서는 강대한 종족이 없음에 만만하게 보았지만 이는 극한의 산 안에 살던 전사들에 의해 동쪽 대륙의 알파란 알파들은 모조리 쓸려나갔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비록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기에 루크라족의 알파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었지만 계속된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한 존재를 배출하게 된다.

가장 강한 자. 마치 신과 같은, 수많은 알파를 갈아 마시고 그들을 으깨어 만든 한 자루의 금빛 칼을 휘두르며 극한의 산이 위치한 동쪽 대륙을 호령한 위대하기 그지없는 존재.

<그랑-라>

그랑-라는 동쪽 대륙을 호령하던 거인족의 왕을 쳐 죽이고 마치 신과도 같은 강함을 가지게 되었지만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거인족의 알파 이후로 도무지 자신을 자극할 만한 강자가 없어졌다는 것.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강해지는데 자신에게 죽음의 위기를 겪게 할 만한 강자가 도무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 있기는 했다. 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창공을 살아가는 자들의 지배자.

<악사라이>

구름 위에 살며 창공을 지배하는 드라쿤들의 지배자. 전지전능한 자. 이능의 지배자.

하지만 악사라이는 그랑-라와 싸워봤자 상잔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랑-라를 피해 다니며 싸워주지 않았다. 악사라이가 피해 다니면 딱히 잡을 방법도 없었다. 창공은 그들의 영역이었으니. 이에 실망한 그랑-라는 다시 신지로 돌아와 잠에 든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루크라의 알파들도 그랑-라를 따라 같이 잠에 들었다.

이후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루크라들은 그랑-라가 잠들어 있는 동안 꾸준히 극한의 산 안에서 수련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서쪽 대륙에는 루크라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강해진 기적의 인간종, 브록시안을 필두로 인간종이 번성하게 된다.

우연히 인간종들의 탐사대가 들어온 것을 본 신관은 바깥세상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그들의 머릿속을 읽어본다. 그랑-라께서는 약한 베타 상태로는 신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셨으니까.

하지만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랑-라와 필적할 만한 강대한 알파가 저기 서쪽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 신관은 이 이야기를 그랑-라에게 전하였고 그랑-라는 흥분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몸을 날려 한걸음에 신국 쪽으로 날아갔다.

<저자와 싸워 다음 벽을 뚫겠다!>

브록시안 역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기에 흥을 내며 치고받았다.

하지만 예상외의 변수가 나타났다.

<이번 기회에 너희 두 놈을 모두 죽이고 마음 편히 쉬겠노라.>

아래에서 미친 듯이 자신들을 귀찮게 하던 두 알파 녀석들이 치고받는 광경을 본 악사라이 역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놈은 자신과 싸워 벽을 뚫겠다고 미친 듯이 쫓아다니던 놈이고, 한 놈은 이상한 섬까지 띄워 가며 허공으로 바락바락 기어오르려고 한 놈이었다. 악사라이 입장에서는 틈만 나면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이 땅개미 같은 놈들이 거슬리기 그지없었지만 한 놈 한 놈이 자신만큼 강하니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 두 놈이 치고받으니 이 기회에 결판을 내려고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저러다가 저 두 놈 중 하나가 더 강해지게 되면 더 이상 창공이라는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먹히지 않는다. 이 기회에 무조건 죽여야 했다.

그 싸움의 결론을 그랑-라의 신관은 알 수 있었다. 그랑-라께서 마지막에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해 주었으니까.

<공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대한 셋은 서로 치고받다가 결국 다 같이 죽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신은 죽었지만 다른 알파들도 죽은 것을 확인한 루크라들은 우선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위대한 신이 죽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저 위에 살고 있는 <드라쿤> 녀석들은 결코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서로의 신이 죽었으니 입장은 동일했다. 인간종들은 이 치열한 싸움에서 제외되었다. 거의 절멸하다시피 했으니. 끼워주기에는 너무나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그 후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루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애초에 서로의 영역에서의 전투력 차이가 너무 심했기에. 신지 안은 그 안에 적응한 자신들의 종족에게는 편안했지만 다른 종족들은 들어오면 그 자체만으로 생명이 위험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드라쿤 녀석들이 살고 있는 창공 역시 막대한 중력에 적응한 녀석들이 아니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곳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서로를 경계만 할 뿐 쳐들어가지는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크라족의 신관은 극한의 산 바깥을 지나는 인간종에게 끌림을 느끼게 된다. 신은 죽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관의 지위는 남아있었다. 애초에 신관의 지위는 그가 가진 특이한 능력으로 신께 봉사했기에 신관이지, 신에게 능력을 받아 신관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

그 끌림에 따라 그 인간종, 라가오페를 납치해 와 그 기억을 읽어본 신관은 탄식을 내뱉었다.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이능의 지배자이자 전지의 권능을 지닌 악사라이. 신관들은 사실 그가 죽은 것을 그랑-라의 눈으로 확인했거니와 그가 죽었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육체와 혼이 찢겨나가며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이능들이 전 세상으로 퍼져 나가 각 종족들에게 깃든 것.

하지만 악사라이가 죽으며 세계를 뒤흔들며 각 종족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물론 태어나며 숨 쉬듯 수많은 종류의 이능을 다룰 수 있는 드라쿤의 종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종류의 이능은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 각 종족마다 생겨났다. 자신들, 루크라 종에도 그런 자가 나타났으니 이보다 악사라이가 찢겨나갔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원래 그 이전에 다양한 이능은 오롯이 악사라이의 통제하에 악사라이와 그 아래 드라쿤들에게만 허용되던 능력이었다. 악사라이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면 다른 종들이 이능을 사용하는 것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억을 읽어보니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생겨난 것을 발견했다. 다른 이능과 달리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전지의 권능을 지닌 악사라이의 혼의 파편을 일부 받아야 사용할 수 있는, 권능에 가까운 이능이었다. 악사라이의 전지에 대한 권능과 수많은 이능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존재들. 정말 소수의 드라쿤들만이 허락받았지만 악사라이가 죽기 전 태양신과 전쟁신과 싸우기 전에 그 파편을 모조리 회수해 갔기에 이제는 단 하나의 접속자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마 찢겨져나간 혼의 파편 중 큰 녀석들이 튕겨져 들어간 것이리라. 하지만 신관은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두려워 탄식을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그자들의 전투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자신들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

중요한 것은, 저 악사라이의 접속자를 계속 강해지게 놓아둔다면 전지의 권능을 이용해서 강해지고 강해져서 결국에는 악사라이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 악사라이가 동족애가 넘쳐서 자신의 힘이 감소되는 것을 각오하며 혼의 파편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이 크나큰 상처를 입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강해지는 방법을 계속해서 알게 된다. 그렇기에 그 길을 따라가다가 언젠가 알파가 된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강해진다면 그 과정에서 악사라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갓 태어난 알파 정도는 악사라이의 정신력을 거부할 수 없는 데다 악사라이의 능력으로 강해진 것이니 더욱 빼앗기기 쉬웠다.

하지만 조금 더 기억을 살펴보던 루크라의 신관은 사태가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음은 깨달았다.

<어설프구나…….>

악사라이가 죽으며 제멋대로 생겨난 파편이기에 제대로 된 접속자는 아닌 듯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악사라이에게 종속되어야 하는데 자유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으니.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면 저럴 리가 없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르발이라는 자가 가진 권능도 원래 악사라이의 접속자에 비하면 굉장히 어설펐다.

당장 로르발이라는 자가 겨우 베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제대로 된 악사라이의 접속자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위로 계속해서 기어 올라갔을 것이다. 전지의 권능을 바탕으로 강해지는 길을 찾아가는 접속자란 그런 존재들이었으니.

게다가 라가오페의 기억을 읽어 본 신관은 라가오페가 세운, 무라칸과 아크라를 이용하여 알파를 만든다는 계획도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자는 지금 책상놀음으로 알파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당장 무라칸이라는 개체는 앞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로르발이라는 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루크라의 신관은 고민에 빠졌다. 그 뒤의 일이 막막했기에.

바깥에는 짐승 녀석들이 새로운 존재로 진화 중이었다. 저 너머에 사는 기묘한 짐승 녀석들은 악사라이도, 그랑-라도, 인간종의 알파인 브록시안이 죽은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는지 부랴부랴 준비를 하더니 진화에 들어가 이제 진화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아마 녀석들이 태어나면 새로운 알파 셋이 추가될 것이다. 나가서 정리를 할라 치면 드라쿤들이 득달같이 하늘 위에서 내려왔다. 녀석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름 위에서 정확히 자신들을 보고 있었으니까. 자신들은 어찌 보면 이곳에 갇혀있는 셈이었다.

안에서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늘로 올라가 싸우면 무조건 진다. 바깥에서 싸우면 비등하지만 누가 굳이 비등한 싸움을 하려고 하겠는가?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길 수 있는 확신이 드는 싸움이 제일이다. 루크라는 싸움을 즐겼지만 개죽음은 사양이었다. 녀석들의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멸족이었으니. 까닥하다 밀리면 모조리 쓸려나간다.

그렇기에 녀석들도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고 자신들도 나가지 못 하는 기묘한 대치상황이 신들의 전쟁이 끝난 천 년 후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신관의 생각대로라면 이 대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만약 저 짐승 놈들이 알파로 진화한다면 이파전은 삼파전이 되면서 더욱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고.

하지만 악사라이가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그 자는 위대한 태양신과 공멸한, 전설과도 같은 강함을 소유했으니. 되살아난 녀석은 당장에 자신들을 쓸어버리러 내려올 것이다. 또 내버려두었다가 그랑-라 같은 자가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할 테니.

다행히도 드라쿤 녀석들은 악사라이가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만약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 위험하게 방치해두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녀석들의 신경이 온톤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로르발이란 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접속자가 생겨나고, 혹여나 드라쿤 안에서 접속자가 탄생하게 된다면 지금의 균형은 단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드라쿤들을 멸망시키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악사라이의 접속자의 뿌리를 뽑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대치상태를 깰 수 없다는 것이지만.

<…나가야 하는가…….>

최악의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신관의 눈앞에 이 정보를 들고 온 인간이 보였다.

라가오페라는 이름을 가진 자.

기억을 모두 읽은 신관은 라가오페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 찬연했던 문명이 통째로 날아갔기에 이제는 드라쿤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 불쌍한 인간종. 드라쿤들은 굳이 인간들은 멸족시키지 않았다. 거의 멸족이나 마찬가지였거니와 전쟁신과 같은 자가 다시 태어나기 힘들 것을 알았기에.

우선 문명과 사회, 집단에 의존하게 되면 개개인은 극도로 약해지고 개개인을 극한까지 단련해야 태어날 수 있는 알파의 탄생 가능성은 줄어든다. 개개인을 최우선으로 두고 극한까지 단련하는 루크라와 드라쿤들에 비해 인간종은 그런 성향이 너무 강했다. 당장 그 위대한 피, 신혈을 이어받고도 나타나는 특성이 고작 지배였다. 드라쿤들은 그딴 쓸모없는 특성이나 가지는 종족에 신경 쓸 여유까지는 없었다.

드라쿤들은 인간종에 대한 경계는 접고 루크라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

라가오페는 그런 불쌍한 인간종들 사이에서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전쟁신. 그 위대한 가능성을 재현시키려고 하는 자.

그리고 루크라의 신관은 잠시 고민한 후 라가오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인간아, 내 말을 들어라.>

<무엇입니까?>

<우선 안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다. 무엇부터 듣겠느냐?>

라가오페는 불안했지만 먼저 매부터 맞자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소식을 듣겠습니다.>

<좋다. 안 좋은 소식은… 네가 실행하고 있는 알파를 만드는 계획은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 로르발이라는 자는 절대로 알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악사라이의 접속자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라가오페는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프로젝트는 완전 실패이다. 신혈을 각성시키는 계획인데 유일한 신혈인 로르발이 알파가 되면 안 된다니.

<안 되겠군요. 어서 가서 알려야…….>

<우선 좋은 소식부터 들어라.>

조급한 마음으로 로르발에게 돌아가려는 라가오페를 신관이 붙잡았다.

<말씀하시지요.>

<좋은 소식은 어차피 네 프로젝트는 실패할 거라는 것이다. 네 기억을 읽어보았는데… 그걸로는 모자라다. 너는 알파가 된다는 의미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

라가오페는 자신이 백 년을 넘게 준비한 프로젝트가 어차피 실패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신관의 말이 맞다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해서는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 라가오페를 보며 신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여기서 계속해서 힘을 키우거나… 아니면 당장 종족 전체를 모아 드라쿤들을 치러 가거나.>

<…….>

<알고 있나 보군. 두 가지 모두 좋은 선택은 아니지. 저 미친 녀석들은 계속해서 하늘을 지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간다면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다, 하나둘씩. 물론 대부분은 죽어나가겠고, 또 대부분은 강해지다 멈추겠지만 언젠가는 이 기묘한 대치상황을 박살 낼 존재, 악사라이로 거듭나겠지.>

<…….>

<우리는 이렇게 이 신지 안에 갇혀서 몰락을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멸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드라쿤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악사라이의 접속자를 관리해야 하지만… 무리이겠지.>

라가오페는 신관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들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설마 동맹을 맺고 드라쿤들을 치러 가자는 소리는 아니었지요?>

그러자 신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너희는 지금 너무나 약하다.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하지. 나는 너희 인간종들을 믿고 싸울 수 없다.>

<…….>

<하지만… 그 위대한 존재, 브록시안을 탄생시켰던 너희 인간종들을 한번 믿어보겠다.>

<…설마…….>

<어차피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몰락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치고 나갈 수도 없지. 그러니 동맹을 제안하고 조건을 걸겠다.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알파 녀석들과 드라쿤 녀석들의 시선을 끌어주마. 그동안 너는 네가 하던 연구를 지속하여 알파를 만들어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고 그때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여라.>

놀라울 정도로 좋은 조건의 제안. 어차피 신관이 제안한 것은 라가오페가 원하는 바, 바로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현실을 깨달은 라가오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리요. 나는 살아 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리고 알파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그러자 신관이 라가오페를 보며 말했다.

<기억을 읽어보니 로르발이란 자는 인장을 한계까지 사용했더군. 하지만 그건 내가 해결해주마. 이걸 삼켜라.>

그리고 신관은 손바닥에서 기묘한 붉은 구슬을 생성해냈다. 신성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그 구슬을 보며 라가오페가 궁금하여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피다. 우선 삼켜라.>

이 상황까지 와서 신관이 자신에게 이상한 제안을 할 리 없다 생각한 라가오페는 그 피를 삼켰다. 그러자 신관은 중얼거리며 기묘한 기운을 쏘아보냈다.

<이게 무슨……?>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맹렬하게 변해가는 느낌을 받은 라가오페는 당황했다. 그런 라가오페를 보며 신관이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축복은 우리 종족에게밖에 작용하지 않기에 네가 축복의 효과를 받으려면 우리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어야 한다. 물론 너희 인간들에게는 우리의 특성이 발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너는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피가 남아있는 한…….>

<…허…….>

<그리고 그 피는… 네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종족의 피는 너희에 비해 강대하기 그지없으니.>

놀라운 재료와 영원불멸의 시간을 얻게 된 라가오페는 온몸에 자신감이 끓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영구한 시간 동안 강대한 종족, 루크라의 피를 연구하면 설마 알파의 비밀을 풀지 못하랴 하는 생각에.

<당장 돌아가서 연구를 수행하겠소! 그리고 동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알파를 만들어 내리다!>

라가오페는 당장 대륙으로 돌아갈 것처럼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신관에게 제지당했다.

<왜 그러시오?>

<너는 이제 그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

<…무슨……?>

<네 몸에는 이제 우리 종족의 피가 흐른다. 저 대륙 쪽에 영향력을 미치는 드라쿤들이 그 피를 놓칠 것 같은가? 너는 저쪽으로 건너가자마자 죽게 될 것이다.>

신관이 내뱉은 말에 기가 찬 라가오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면 어쩌란 말이오?>

<사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라도 축복을 거두어주면 너는 언제라도 저 대륙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물론 시간은 다시 흘러가겠지만…….>

<허…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이오? 결국 이곳에서 시간만 축낼 뿐이지…….>

그러자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래로 내려가라.>

<…짐승의 땅 말이오?>

<그렇다. 너는 그 아래로 가면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라가오페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합니까?>

그러자 신관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인간의 말로… 감이다.>

<…….>

‘참아라, 오른손아…….’

라가오페가 조금만 힘이 강했다면 눈앞의 신관 녀석의 뺨을 후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이기에 라가오페는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억눌렀다.

그 광경을 보던 신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라. 우리 신관들의 감은… 너희들이 말하는 감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네가 지나갈 것을 알고 너를 데려온 것도 이 감에 의한 것이다. 제멋대로 발동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지에 가깝지. 그리고 너에게는 어차피 다른 방도도 없지 않은가.>

<후… 알겠소.>

결국 라가오페는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방안을 택했다.

<그러니 저 아래로 내려가서 너에게 주어진 영생과 피를 이용해서 해답을 찾아와라. 그리고 해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이곳으로 찾아와라. 그러면 그때 축복을 거두고 다시 올려보내 주겠다.>

<지금 바로 말이오?>

라가오페의 말에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출발해라. 진화를 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너처럼 약한 녀석이 건널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은 녀석들을 지키느라 모든 짐승들이 녀석들의 곁을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그 틈을 이용한다면…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허겁지겁 바깥으로 나온 라가오페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우선은… 알파를 만들 수 있는 자료를 모은다. 그리고 돌아간다.>

이곳을 돌아다녀 본 결과 이곳은 원숭이들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알파가 태어날 것을 라가오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서도 알파가 태어나지 않는데 원숭이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신이 될 존재가 태어나리란 것을 라가오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우선 영생이 보장되는 동안 자신들 대륙에 돌아가서 인간종들에게 접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알파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그와 동시에 저 짐승들을 뚫고 다시 자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비록 돌아가면서 축복은 풀고 가야겠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는 십 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성과만 있다면 인간들에게 접목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서 라가오페는 그곳에 사는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피를 넣어 동족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며 끊임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많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니. 그런 생각으로 끊임없이 연구를 하던 와중 라가오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의 탄생을 보게 된다.

원숭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이 될 것 같은 가능성을 가진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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