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인간의 신>
<이주 계획은 사실 시안 씨가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돌아오겠다는 목표는 명확했으니까요.>
“허…….”
시안은 라가오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번에 갔던 섬, 아마란에 갔을 때 말씀드렸지요? 무기 말고도 다른 걸 연구하는 곳이 많았다고. 그곳에서는 알파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며 루크라의 피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제 몸속에 그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연구자료는 계속해서 구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특성은 전혀 발현이 안 되더군요. 하지만 그러던 와중… 전혀 기대하지 않던 수확을 얻었습니다.>
“설마…….”
<맞습니다. 그게 바로 시안 씨이지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긴 세월, 여러 가지 정보를 찾고 알파를 위해 도움이 될 정보를 찾던 중에 충분한 자료를 모은 라가오페는 이제는 넘어갈 방법에 전력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 준비과정 와중에 라가오페는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던 수확을 얻게 된다.
오만하고 치졸하지만 강대하기 이를 데 그지없는 종족, 루크라의 피를 발현해 낸 기적과도 같은 존재를.
<제 피를 넣으면서도 인간종에게서 루크라의 피가 발현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원래 강대한 피는 잘 발현이 되지 않습니다. 아까 원숭이의 반응성이 1, 인간종이 100이라고 했지요? 루크라의 피는… 거의 300 정도 되겠군요. 예전에 연구했을 때 그 정도 반응성을 보였습니다. 인간들에게 루크라의 피를 넣어도 발현이 되지 않을 텐데 제가 어찌 원숭이들 사이에서 루크라의 피를 깨운 존재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겠습니까?>
“허… 300이라…….”
말이 300이지 인간의 세 배에 해당하는 잠재성장률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소리였다. 이곳의 인간들이 라-시안 대륙에서 초인이라고 부르는, 귀족의 경지까지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 수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저도 시안 씨의 반데르 수치를 보았을 때 놀랐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대를 많이 했지요. 시안 씨의 수치는… 루크라의 피를 개화했다는 뜻이니까요. 3000년 동안 발현된 걸 본 것은 시안 씨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알파의 가능성을 보인 것도요.>
“허…….”
<루크라의 피가 발현된 증거가… 죽음 속에서 강해진다는 것이지요. 사실 한번 죽을 뻔했다고 그렇게 쑴풍쑴풍 경지가 올라가는 게 사기 아닙니까? 루크라를 제외한 다른 베타들은 그런 식으로 강해지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의 방법을 찾지요.>
인간종은 수련을 통해 강해지고 드라고나는 탈피를, 크로나는 자식을 먹어치움으로써 경지를 올려간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종족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루크라뿐이다.
“…….”
<시안 씨는… 인간종의 장점과 루크라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것이지요. 루크라들은 수련을 한다고 강해지지 않으니…….>
하지만 시안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상한데요? 설령 그 종족의 피를 제가 100프로 발현했다고 쳐도… 300이 한계 아닙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큰 기대를 했지요. 이제 제 이해를 넘어갔다는 뜻이니까… 제 입장에서 그냥 시안 씨는 확률의 제약을 뚫고 나타난 기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흠…….”
<다른 출생의 비밀은 없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그 정도 수치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과학자인데… 제가 이해 못 하는 현상을 싫어하면서도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알 수 없기에 조종은 안 되지만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흐음…….”
<뭐… 어찌 되었건 시안 씨의 아버지도 놀랐던 모양이더군요. 시안 씨의 축복식을 진행한 자에게 비밀서약 이적을 걸고 돌려보냈던데… 안 그래도 항상 수치가 높게 나오는 로만가에 검사를 하러 갔던 법도사에게 비밀 서약 이적이 걸려서 돌아왔다? 이 얼마나 수상합니까. 후후. 당연히 해제하고 물어보았죠.>
“허…….”
<뭐… 시안 씨 아버지 입장에서는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법도회가 사실 저희 하청업체인데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조사하면 다 나오지요.>
“허… 그 정도로 궁금했습니까?”
라가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요. 그리고…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497이라는 수치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부터 시안 씨를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획을 수정했지요. 자료를 들고 바로 돌아가기보다… 동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시안 씨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요. 괜히 동료들에게 말했다가 찾아가서 이상한 짓을 하고 악감정이 생길까 봐요. 아시겠지만… 개망나니 같은 녀석들이 워낙 많고 저보다 강해서 컨트롤이 안 됩니다.>
라가오페는 처음에 이 일을 동료들에게 말할까 했지만 시안이 강해지기 이전에는 비밀로 했다. 괜히 어릴 적에 싹수를 시험해보겠다고 찾아가 일을 벌이면 나중에 강해져서 어떻게 틀어질지 몰랐기에.
“저를 알파로 만들고 싶었군요.”
시안은 수정된 라가오페의 계획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라가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태어났으니. 원래 이 대륙에서 알파의 가능성을 가진 자가 태어날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동료들을 만들어 넘어갈 생각이었지요.>
“흠…….”
<시안 씨의 반데르 수치를 듣는 순간, 저는 시안 씨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혹시 어린 시절에 저를 알파로 만들기 위해 저 몰래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거나 한 겁니까?”
시안이 살짝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라가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딱히 제가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지요. 스틸 씨처럼 보호해야 할 필요성도 없었고… 리비아스 씨처럼 뒤에서 무언가를 몰래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고… 게다가 제가 가르칠 수준은 열두 살 때 지나가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놀랐습니다. 아무리 남다른 피를 타고났다고 해도 그건 너무 비정상적인 속도거든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 열두 살 때 벽을 넘은 것까지 라가오페는 모두 알고 있었다.
“허… 꼼꼼히도 살피셨군요.”
<그럼요. 어쨌건 저는 정말 시안 씨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정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굳이 제가 손 안 대도 무럭무럭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셨는데 뭐하러 제가 손을 댈까요. 저는 시안 씨에게 정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버려두어도 쭉쭉 강해지면서 알파가 되기 위한 단계를 밟아가셨는데… 제가 뭐하러 손을 대겠습니까? 괜히 어설프게 손대었다가 망치느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낫지.>
“흠… 수상한데요.”
그렇기에는 라가오페가 세운 계획들이 자신을 너무 잘 얽어매었기에 시안은 꼬롬한 표정을 지으며 라가오페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면… 시안 씨가 엄청나게 재수가 없었다는 걸까요? 저는 정말 손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굴러들어와서 처박히시더군요.>
“…으잉?”
시안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 ☆ ☆
라가오페는 무럭무럭 커가는 시안을 정말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재능. 신국 시절에도 저런 재능은 본 적이 없었다. 저대로라면 이제까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이 필요 없이 스스로 베타의 벽을 차례차례 깨부수고 알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라가오페는 아빠 미소를 지으며 시안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이 쓸모가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원래 수단이 목적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만약 이곳에서 자신이 시안을 도와 알파로 만들 수 있다면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던 이주도 미룰 계획이었다. 이주는 알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었으니.
알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기를 내심 바라던 라가오페는 열일곱 살, 벽에 막힌 시안의 대처를 보고 당황하고 만다.
<나 이제 안 강해지련다. 놀고먹어야지. 이 정도면 충분하지.>
무장 가문에 태어나 무장 수업을 받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 더 큰 문제는 저 반응이 상당히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시안의 강함은 원숭이들 사이에서 살아가기에는 충분하다 못 해 과할 지경이었다. 열일곱에 공작의 경지에 도달하여 베타의 벽에 가로막혔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 그지없었으니.
하지만 라가오페의 입장에서는 정말 되도 않는 소리였다. 시안에게는 미안한 소리였지만 자신은 꼭 알파를 탄생시켜야 했다. 시안의 존재를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저런 보석 같은 가능성이 있는데 놓아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이주에 성공하고 자신이 준비한 것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로르발 공작 이외의 인간종이 알파의 경지에 이른다는 보장은 없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로르발 공작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런 와중에 하늘이 내려준 것처럼 등장한 시안을 라가오페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알파가 되려고 노력해도 알파가 될까 말까 한데 저런 태도라니! 라가오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행동에 들어갔다. 시안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조사한 라가오페는 시안이 머무르던 케르벨 백작과 그 주변 인물들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시안을 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고민해 보던 라가오페는 실망에 차 포기하고 만다.
<죽을 위기여야 강해진다고? 저걸 도대체 무슨 재주로 죽이나…….>
벽에 막힌 시안은 이미 자신들 수준으로는 손을 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예전의 콘-라드나 네크라가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콘-라드는 아직 전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고 네크라는 활동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곳이라면 벽에 막힌 시안을 위협할 존재는 없지만 넘어가면 그 정도 수준은 발에 채일 정도로 있으니. 그곳으로 살살 꼬드겨 데리고 간 후 갈구면 된다.
판단을 내린 라가오페는 우선 시안에 대해 신경을 끄고 원래 진행하던 계획을 진행시킨다.
하지만 케르발에서 아펜탈을 열고 있는 도중, 그 안에 처박힌 시안을 보고 라가오페는 당황하고 만다.
<아니… 도대체 여기는 왜 있고 저 안에는 왜 처박히는 거야……?>
아무리 약하게 열었다지만 아펜탈은 벽에 막힌 정도로는 너무 위험하다. 그렇기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시안은 정말 훌륭하게 살아 돌아왔다. 베타1으로 진화한 채. 라가오페는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새로 생겼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알파만 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악사라이의 접속자의 혼이 날아가고 나서 라가오페는 불안했지만 결국 콘-라드를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라가오페는 살짝 욕심을 부려볼까 했다. 강해지게 만들 수 있다면 이곳에서 최대한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 낫다. 그래서 고려한 수단이 대전사, 네크라였다. 벽에 막혔지만 대주술을 사용하는 그라면, 베타1의 경지에 이른 시안을 훌륭하게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가오페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네크라를 어떻게 엮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안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당황한 라가오페가 사방으로 시안을 찾아 헤매었지만 어디서도 시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시안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았던 스틸까지 행방불명이 되었고. 당황해서 뒤져보니 다행히도 스틸은 주변의 가족들과 나라샤 국왕에게는 말을 해놓았고 조심스럽게 조사한 결과 기특하게도 스스로 죽을 자리에 걸어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타게 기다려 보았자 별로 대책이 없었기에 그냥 마음 편히 기다렸고, 그 결과 시안은 훌륭하게 베타2로 진화하여 되돌아왔다.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주는 시안에게 라가오페가 어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가오페는 시안이 너무나 좋아졌다. 그 이후로 라가오페는 굳이 관심도 없는 시안의 가족들 전혼옥을 만들어주며 시안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는 시안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기에.
그리고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시안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베타 2단계에 이른 시안을 위협할 만한 것은 라-시안에는 없었다. 바보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아펜탈에 빠져 줄 리도 없고.
하지만 그건 이 대륙의 이야기이고. 저 대륙에는 베타2 정도는 충분히 곤란하게 할 수단들이 있었다.
그렇게 라가오페는 라-시안 대륙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고 이주 준비를 실행했다.
아펜탈 역시 시안을 위기에 빠트리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얼간이도 아니고 누가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주겠는가. 게다가 한 번 들어갔었는데 말이다. 그건 진짜 크로나를 꼬시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고, 사실 라가오페는 나중에 라-샤르-로아를 설치한 후 전혼옥을 만들어주겠다고 시안을 돈-나시안 대륙으로 꼬셔낸 후 악사룸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곳이라면 베타2에 다다른 시안이라도 충분히 위험할 테니까.
그렇기에 비사와 이주 계획에 대해 밝힐 때 모든 것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면 루크라와 드라쿤에 대해도 말해야 하고, 그런 걸 들으면 시안은 전혼옥으로 꼬신다고 하여도 절대로 대륙으로 건너오지 않을 것이니.
시안을 나중에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라가오페는 이주 계획을 실시했고 도중에 극한의 산에 들렀다. 자신의 축복을 씻어내는 동시에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했기에.
오랜만에 본 신관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키에 황금색으로 되어 있는, 촉수와 같은 머리카락. 알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는, 하지만 기품이 넘치는 옷까지. 예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만약 자신이 더 강했다면 눈앞에 있는 신관의 강대함까지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그사이에 알파가 된 것이리라. 죽음의 위기를 넘어야 강해지는 루크라들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곳, 극한의 산은 그렇게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라가오페는 그런 신관을 보며 가장 궁금했던 점부터 물어보았다. 그나마 평안한 대륙을 보니 큰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지만 자신 같은 존재들이 알파의 세계를 알 수 없으니.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인간종아, 오랜만이구나. 전황은 여전하다. 치열하긴 하지만… 대치 중이지. 이제는 삼파전이니… 균형이 더 잘 맞아떨어진다.>
<호오…….>
<짐승 녀석들은 사실 이 정도로 키우려고 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커버렸다. 이제는 우리도 그 안으로 섣불리 들어가기 힘들다. 그렇기에 이 균형은 아마 당분간은 유지되겠지. 이 판을 뒤엎을 만한 무언가가 끼어들지 않는 한……. 그러니 묻겠다.>
<물으시오.>
<성과는 있었느냐? 그 예전, 전쟁신과 같은 오만하면서도 강대한 자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자 라가오페는 씨익 웃었다.
<기다리시오. 조만간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테니. 놀라 자빠지지나 마시오.>
그 말에 신관 역시 웃으며 말했다.
<그것참 기대되는구나.>
그리고 신관은 축복을 씻어냈고 자신의 몸에서 피를 걷어냈다. 라가오페는 자신의 몸 내부에서 무언가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동결되었던 시간이 풀린 것이었겠지. 지금부터 수련하면 강해질 수 있겠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시간에 연구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
신관은 그런 라가오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너에게 남은 시간은… 십 년이 조금 되지 않겠지. 그 안에 이루어내길 바란다.>
<걱정 마시오.>
라가오페는 자신의 몸이 시간 속에서 서서히 흘러가기 시작함을 느끼며 극한의 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과연 피가 없어서 그런지 올 때는 무사히 지나쳐 올 수 있었다. 도착한 라가오페는 곧바로 로르발부터 찾아갔다. 로르발은 여전히 베타에서 머물러 있었다.
<역시… 프로젝트는 실패였군요.>
신관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리고 성공해서도 안 되는 프로젝트였지만 이렇게 되니 매우 씁쓸했다. 자신의 세월이 부정당한 것 같아서. 하지만 라가오페는 곧 힘을 회복했다. 자신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찾아냈으니.
<라가오페… 세상에, 살아있었나? 이 무슨?>
죽었어야 마땅한 세월을 뛰어넘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라가오페를 보며 로르발은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라가오페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로르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이제까지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이 능력이… 나를 가로막을 족쇄라니. 나는 새로운 신이 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인가…….>
<…힘내십시오. 그래도 그곳에서 많은 것을 얻어왔습니다.>
그리고 라가오페는 그간 있었던 연구성과와 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로르발은 단번에 한 마디를 꺼냈다.
<그자를 데리고 오게, 나는 글렀으니……. 그자를… 우리의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네의 성과에 이 저주받을 능력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신이 없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로르발은 두 번 고민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글렀으니. 남은 가능성을 모조리 그자에게 몰아주어야 한다.
시안을 불러올 라-샤르-로아를 설치하려면 우선 결계를 치고 게르나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열심히 게르나에 대한 대비를 하던 중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결계를 보수하던 콘-라드에게서.
<야, 니가 말한 그 시안이라는 사람… 여기 있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자신들이 도망치려고 열어둔 아펜탈에 재수 없게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모조리 뚫고 올라와 베타3이 되었고. 이쯤에서 라가오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정말 어지간히도 재수가 없는 사람이구나.>
여기 저기 툭툭 죽을 위기로 기어 들어가 빠지는 걸 보니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 같았다. 어쩜 그리 죽을 자리를 잘 찾아다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혹시나 하여 악사룸에 보내봤는데 역시나 쉽게 다녀왔다. 사실 그곳의 연구원이던 자신은 언제든지 그 안에 들어가 코어를 들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을 위해 아껴두었는데 의도치 않게 실험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시안이 베타3에 오른 것을 확인한 라가오페는 고민에 빠졌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떠오르지 않은 것. 시안이 너무 강해져서 이제는 손쓰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드라쿤 녀석들에게 시안을 보여주면 단번에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고민하던 찰나 또 시안이 한 건 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안의 피가.
그렇게 진화하라고 몰아붙여도 진화하지 않던 무라칸이 순식간에 베타2로 진화한 것. 그리고 그들이 떼거지로 시안을 덮쳤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황이었지만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로르발 공작의 퀘스트창은 당장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그토록 저주하던 능력이 지금은 자신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다린다. 그리고 그자가 베타4에 올라가고… 무라칸들이 빈사가 되었을 때 끼어든다.>
과연 악사라이가 가르쳐준 대로 무라칸들은 시안을 강제로 베타4로 만들어놓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베타3에 다다른 무라칸의 정수까지 얻은 것. 삼천 년간 고민하던 것이 시안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번에 모조리 해결되었다.
그 덕분에 로르발은 베타4에 다다랐다. 일부러 정체되어 있다가 거침없이 강해져가는 그 모습을 본 라가오페는 공작의 생각을 알아챘다.
<공작님… 설마…….>
<때가 왔다. 쓸모도 없는 내가 죽어 알파를 만들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이지.>
<설마 봐주면서 싸우시려고 하십니까?>
라가오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먹힐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싸운다면… 상대를 알파로 만들지 못 할 것이다. 정말 죽을 위기에 몰아넣으려면 죽을 정도로 몰아붙여야겠지.>
<그러다가 이기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악사라이가 됩니다.>
공작은 별문제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자도 결국 거기까지인 거지. 내가 이길 것 같으면 자결을 하겠네. 하지만 내 생각에… 결국 경지는 같아도 그자가 이길 것이다.>
<…또 감입니까?>
신관도 그렇고… 과학자인 라가오페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내키는 소리가 아니었다. 툴툴대는 라가오페를 보며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감이 감이 아니지. 걱정 말게나. 다 잘 될 걸세.>
공작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웃으며 최종 진화를 위해 코어 안으로 들어갔다.
☆ ☆ ☆
<뭐… 여기까지입니다. 흑막의 배후자 같은 느낌으로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별로 한 게 없군요. 결국 시안 씨는 스스로 강해진 것이지요.>
“…….”
시안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들은 지금 알파 하나 만들겠다고 삼천 년을 그 고생을 하며 달려온 것이다.
“뭘 바라는 겁니까? 그리고 제가 알파가 된다고 하여도… 그 동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에 대해 잘 아실 텐데요. 그러면 뭐… 저에게 잘 보이고 이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잘 알고 있지요. 그렇기에 잘 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지요. 만약 저희가 잘 해준다고 저희를 지켜주실 겁니까?>
“…….”
<아니지요? 시안 씨는 지켜보니 목숨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가족들 외엔 별 신경 안 쓰시더군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드라쿤과 하리쟌들은 강대하기 그지없으니 목숨을 걸고 싸워야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텐데… 시안 씨가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데 저희가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얻어내야지요.>
“무슨……?”
다른 방식이라는 말에 시안이 호기심이 생겨 입을 열었다.
<일단 시안 씨 덕에 얻은 건… 안전이라고 할까요. 이제 대륙에는 오롯이 인간뿐이지요.>
“흐음…….”
<차원장막이 슬슬 약해져 가던 서쪽의 아펜탈과 악사룸 안의 녀석들을 모두 박살을 내셨지요. 그 안에 살던 녀석들로부터의 보호를 부탁하려던 것이었는데요.>
“…….”
<북쪽의 게르나 또한 물리쳤지요. 게다가 위협이 되던 동쪽 반도마저 박살 내지 않으셨습니까? 그곳으로는 이제 괴수들이 넘어오지 못 하겠지요. 게다가 중앙에 살던 나리쟈 종들도 모조리 쓸어버렸지요. 시안 씨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 대륙 안에는 인간뿐입니다. 스웜들이 돌아오기 전에 모조리 청소를 해 버렸지요.>
“하지만 남쪽이 남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루크라들도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하는 것일 텐데요.”
라가오페의 말대로라면 모든 게 잘 풀린 듯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다른 모든 걸 다 합쳐도 그 문제를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시안이 생각하기에 남쪽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하리쟌에 루크라, 드라쿤들까지… 지금은 셋이 치열하게 견제하느라 신경 쓰지 못 하지만 아마 인간종이 위협적일 정도로 성장한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이제 시안 씨가 알아서 하셔야 할 겁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만?”
시안은 자신이 잘 못 들었나 싶어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라가오페는 매정하게 한마디 더 내뱉었다.
<시안 씨가 알아서 하셔야 한다고요. 알파까지 만들어 드렸는데 그것까지 제가 떠먹여 드려야 합니까?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그런 미친 녀석들을 상대하는 방법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하하하!>
“허허… 허허허허허허… 허허허…….”
시안은 온몸의 혈압이 맹렬하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 정말 후련합니다. 수명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원하던 바를 모두 이루어서 그런지… 상쾌하군요. 모든 짐을 내려놓은 느낌입니다. 아, 그리고 그렇게 사람 막 때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하! 이 말이 어찌나 하고 싶던지!>
“…….”
‘쫓아야겠다.’
시안은 온 대륙을 뒤져서라도 라가오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라가오페는 이미 그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는지 다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제 수명은 오 년 정도 남았습니다. 몇 천 년을 고생했는데 이 정도 휴가는 좀 봐주시지요. 그리고 한 마디 더 말씀드리자면 사실 저 찾을 시간도 없으실 겁니다.>
“…뭐라고요?”
<제가 왜 그곳에 이동법진을 설치해 놓았겠습니까?>
“집에 가라고…….”
<맞습니다. 지금 당장 집으로 가셔야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아까 까먹고 한마디를 빼먹었더군요.>
그리고 라가오페는 자신이 극한의 산에서 신관과 계약을 하고 짐승의 땅으로 떠나기 전 한 대화를 시안에게 말해주었다.
<저곳이라면… 계획을 완성시키기 더욱 수월할 텐데…….>
떠나며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이 왔던 대륙을 보는 라가오페를 보며 신관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쉬워하지 말라. 어차피 너는 저 아래로 가야 한다. 너는 어차피 그 대륙에서는 알파를 탄생시키지 못 한다.>
<…왜 그런 것이오?>
화가 난 와중에도 호기심이 생긴 라가오페가 묻자 신관이 오히려 되물었다.
<너는 왜 드라쿤들이 너희 인간들을 내버려둔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우리와 싸우고 있다지만… 그들 중 너희 말로 베타 3단계 정도의 개체만 내려가도 너희는 멸망이다.>
<…….>
<기본적으로 저들은 오만하기 그지없어 약자를 상대하는 것 자체를 더러워하고 치욕스러워한다. 그러니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약한 종족이니까.>
<…빌어먹을.>
라가오페는 약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짜증 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알파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충분히 손을 섞을 자격이 되니까. 너는 알파의 탄생을 본 적이 없지? 알파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온 대륙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그 기파가 요란하다. 저 대륙은 드라쿤들이 언제든지 손을 쓸 수 있는 영역. 알파라면 저들에게도 더 이상 약자가 아니지. 저 안에서는 설령 네가 프로젝트를 성공하여 알파를 만든다고 해도 바로 잡혀 죽을 뿐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오?>
<알파가 탄생한다면… 저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 죽이려고 자신들의 알파를 보낼 것이다. 반드시 대피시켜라!>
<알파들로부터 안전한 곳이 있겠습니까?>
라가오페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신관이 이에 대답했다.
<만약 너희가 알파를 만들게 되면… 저기 짐승들이 사는 땅 안으로 보내라.>
<허……!>
<우리는 저 바깥의 진화하는 녀석들을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알파가 되면… 우리와 싸우고 있는 드라쿤들은 섣불리 저 안으로 침입할 수 없겠지. 그리고 저 안의 짐승 녀석들의 시선도 우리가 끌어주마. 그러면 저 안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 된다. 너는… 그 안에서 해답을 찾고 만약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드라쿤의 영역에서만 알파를 탄생시킬 수 있다면… 대피시켜라.>
시안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라-시안 대륙에서 해결했어야지, 왜 여기서…….”
싸우더라도 둘 다 공간이동해서 거기서 탄생하면 그 드라쿤들이라는 녀석들이 쫓아오지 않을 것 아닌가? 적어도 시안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영상기기 너머의 라가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라-시안 대륙에서 탄생했어도 위험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드라고나나, 크로나, 라이오나가 쫓아왔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주 맛 좋은 먹잇감이었을 테니. 거기서는 도망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동쪽 반도를 막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로르발 님이 괜히 그곳에서 싸운 것 같습니까? 후흐흐흐.>
“미친…….”
<뭐… 초인 시절에도 느끼셨지만 루크라들에게 물어보니 알파 때도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기운을 숨기면 알파끼리도 찾지 못 한다고 합니다. 탄생 때의 강렬한 기파만이 알파를 찾는 지표가 된다고 하더군요. 이 정도 얘기하면 무슨 말인지 아셨지요?>
“…….”
<지금의 기운을 드라쿤들은 느꼈을 겁니다. 그 정도 기운을 못 느낄 리가 없지요. 드라쿤들의 베타야 시안 씨를 상대할 자신이 없어 쫓아오지 않겠지만… 루크라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의 알파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
<당장 그 법진을 타고 도망가십시오. 아마 루크라들을 포위하고 있던 드라쿤의 알파 녀석들이 지금쯤 연락을 받았겠지요. 이능의 조종들인 녀석들이니… 통신 이능쯤이야 아주 간단하게 쓰는 녀석들입니다. 그쪽으로 맹렬하게 날아가고 있을 겁니다. 새로운 알파를 잡아 죽이려고요.>
“미친… 그걸 왜 진작 말 안 해주고…….”
시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법진에 엄청나게 에너지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라가오페의 말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아주 멀리서 말도 안 되는 기운 셋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기에.
<뭐… 안 늦지 않았습니까? 당장 타고 도망가십시오. 하하하! 온갖 알파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그 한가운데, 라-시안 대륙이 시안 씨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숨어서 힘을 키우십시오! 그리고 모조리 쓸어버리십시오. 시안 씨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랑-라와 브록시안을 탄생시킨 종족의 피를 모조리 이어받았으니까요.>
“허…….”
<평화롭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 강해지십시오. 가면 당장은 안전할 것입니다. 몇천 년간 유지된 평화가 그렇게 쉽게 깨지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언제 이 힘의 균형이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대륙은 난장판이 되겠지요. 아마 반드시 휩쓸릴 것입니다. 그때 시안 씨가 가장 잘 하는 걸 하십시오. 두드려 패 주는 것! 압도적으로 강해서 여유 있게 두드려 패 주십시오! 반항도 못 할 정도로! 그것만이 시안 씨가 원하는, 평화로워지는 길입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 정도뿐이군요.>
“스틸 양! 이쪽으로!”
알파에 다다른 시안의 몸은 키큘러스가 공급해야 할 거대한 에너지를 단신으로 모조리 법진에 공급해냈다.
쯔우우우웅!
이윽고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치며 법진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시안은 법진이 작동하자마자 자신의 존재감을 모조리 감춘 채 그 안으로 스틸을 끌고 뛰어들었다. 이윽고 시안과 스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쿠우우웅!
그리고 멀리서 날아온, 거대한 동체에 미끈한 열 장의 날개를 자랑하며 착지한 드라쿤들은 땅에 착지하더니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은 법진을 살펴보았다.
<…짐승 새끼들이 사는 곳이군…….>
<…하필 거기인가…….>
드라쿤 중 하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차원장막을 찢고 들어간다면 미친 짐승 놈들은 단박에 자신들을 찢어먹으려고 사방에서 달려들 것이다. 자신들 셋만의 전투력으로는 짐승들을 상대하기에 벅차다. 같은 알파라고 하여도 그 차이는 있으니. 자신들과 루크라들이 싸우느라 전력을 소모하는 동안 짐승 녀석들은 차곡차곡 강해져왔다. 지금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돌아가자. 루크라 녀석들을 막으려면… 어서 돌아가야 한다.>
<땅개미 녀석들은… 놓아두는가? 저런 개체를 탄생시켰는데?>
<크허… 수준이 많이 떨어졌군. 손을 쓰고 싶다면 써라. 대신 손을 더럽히겠다는데 뭐… 말리지 않겠다. 어지간히도 무섭나 보군.>
드라쿤 중 하나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런 땅개미 녀석들에게 손을 쓰겠다니. 아까 도망친 녀석이라면 몰라도 저런 녀석들에게 손을 쓰겠다는 동료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죽고 싶은가 보군.>
다른 드라쿤의 말에 한 드라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라면 되었다. 눈앞의 목표에 집중해라. 우선은… 루크라 녀석들이다.>
<그러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후…….”
자신이 살던 악사룸 안에서 통신을 하던 라가오페는 통신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잘 된 것 같아?”
“그럭저럭 잘 된 것 같습니다. 역시 저놈들 오만한 건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실 라가오페가 가장 걱정한 것은 혹여나 드라쿤들이 인간종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 녀석들은 해코지를 안 하고 그대로 루크라들에게 날아가 버렸다.
“그나저나… 나는 악사라이의 접속자인데 괜찮아? 네 말대로라면… 나도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자 라가오페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 알파가 무슨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줄 아십니까? 접속자라고 그렇게 강해지면 왜 아직 베타가 못 되었습니까?”
“…아픈 곳을 찌르네. 그나저나… 너 진짜 수명 오 년 남은 거야?”
투덜거리는 콘-라드는 라가오페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제 수명은 오 년 정도 남았지요.”
“허…….”
“근데 뭐, 전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
“…….”
콘-라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라가오페를 쳐다보았다. 마지막에 5년 어쩌구 한 건 시안에게 동정표를 사기 위함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들키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맞을 것이다.
“이제 저는 할 만큼 다 했습니다. 나머지는 시안 씨가 다 알아서 해주겠지요. 후우…….”
“엄청 믿는구나. 하지만 그자는 인간을 위해 싸워주거나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계속 숨어있으면 어쩌려고?”
이제까지 콘-라드가 본 시안은 정말로 싸움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특히 죽을 위기라면 더더욱. 드라쿤이나 하리쟌에 맞서 싸우고 인간을 지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한계가 있을 겁니다. 제가 시안 씨를 알파로 만든 이유는 강해졌다고 당장 나가서 드라쿤이고 루크라고 하리쟌이고 모조리 두들겨 패달라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허… 그럼?”
“한동안은 평화로울 겁니다. 힘의 균형이 맞추어졌으니. 하지만 언제까지 갈까요?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전 대륙은 전화에 휩쓸리게 될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렇게 되면 가족을 아끼는 시안 씨가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족을 포함해서 인간종이 모조리 멸종당할 텐데?”
“그건 그렇지.”
“그걸 위해 전혼옥도 만들었습니다. 그 전에 가족들이 비명횡사하지 말라고… 그리고 스틸 양의 수명도 늘려놓았지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우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시안 씨의 역할은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저 재앙 같은 녀석들이 난장을 칠 때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는 정도로… 우리를 감싸 안고 지켜주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브록시안 님도 그러진 않았어요.”
“허…….”
“괴수의 역할은 괴수를 상대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음?”
무언가 사족이 있는 것 같자 콘-라드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라가오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콘-라드를 보며 라가오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과학도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시안 씨는 그런 운명이 아닙니다. 아주 재수가 없지요. 아마 싸우기 싫어도 싸우게 될 겁니다.”
“…하긴.”
그자의 기록을 살펴본 콘-라드 역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재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기에.
“일단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았으니 신경 끄고… 이제 우리는 시안 씨가 시간을 끄는 동안… 이곳을 재정비하지요.”
그곳에서 시안 말고도 알파를 만들 가능성을 찾았기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선은 인간종을 재정비하고 그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 후 폭발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제 이들을 다스리던 로르발 공작가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때를 대비하여 콘-라드를 데리고 온 것이다. 콘-라드라면 인간들을 수월하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래야겠지.”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들의 일은 괴수들끼리 하라고 놓아두면 된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콘-라드는 오롯이 인간만이 남은 이 대륙을 어떻게 채워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앞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