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70화 (71/81)

<70. 귀향>

제국, 쿠쿠타란의 7번 라-샤르-로아를 지키고 있던 무장, 라룬은 옆의 동료와 수다를 떨었다. 라-샤르-로아는 오늘도 평화롭게 운용되고 있었으니. 예전 같으면 혹시 모를 타국의 테러와 침입에 대비해야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수다를 떨던 라룬은 대화거리도 떨어지자 찾아온 지루한 정적에 하품을 내쉬었다.

“흐아… 오늘 라-샤르-로아는 조용하네.”

“조용한 게 좋은 거지. 난 평생 여기 보직이었으면 좋겠구먼.”

“그래도 너무 평화롭잖아. 재미없게…….”

라룬은 천성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이런 평온함이 영 지루했다. 예전, 대북벽에서 치고받으며 싸울 때에 비하면 이곳은 안전했지만 자극이 부족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라룬. 흐흐.”

“허… 그거 다 거짓말이야. 말이 씨가 된다는 건… 그냥 그 말을 하면 머릿속에 인상이 남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말 탓을 하는 거라고.”

“어이고… 먹물 먹은 티 내나.”

“흐흐. 내가 이래 봬도 그론-필라 출신 아니냐.”

빠지지직!

“…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뒤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 라룬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본 라룬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빠드드득. 빠지직.

잘 작동하고 있던 라-샤르-로아의 구체가 강제로 구겨지며 쪼그라들고 있었다. 이윽고 잘 작동하고 있던 라-샤르-로아의 차원문은 모조리 구겨지며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푸르디푸른 구체가 새로이 생겨나고 있었다. 엄청난 뇌전을 사방으로 튀기며 생겨난 푸른 구체는 점점 더 커지더니 이윽고 터질 듯 그 에너지를 사방으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미친… 도망쳐!”

라룬은 잽싸게 동료를 데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저 안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터지면 몸이 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몰라도 별로 자신들에게 이로운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레지스탕스인가… 무슨 일이야, 이게… 도대체…….’

라룬은 도망치며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라룬이 걱정하는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빠직거리는 소리를 사방으로 뿜어내던 푸른 구체는 그 에너지에 무색하게 천천히 빛을 잃고 사그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도망치던 중 그 변화를 느낀 라룬은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구체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고 이윽고 그 푸른 구체가 모조리 사라지자 두 명의 인영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인영이 나누는 대화도.

“와우… 따끔따끔하네…….”

“격렬하게 작동하는군요. 일반적인 라-샤르-로아 같지는 않은데.”

“뭐… 엑사르가 아닌 에너지를 써서 그럴 수도 있고… 흔적이 남아있으면 아까 그 녀석들이 쫓아올 수도 있으니 일회용으로 만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나저나… 후, 참 그리운 냄새네.”

“그러게요. 드디어… 돌아왔군요…….”

푸른 구체를 뚫고 도착한 두 인영, 스틸과 시안은 주변을 돌아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 인영을 라룬과 동료는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격렬한 에너지를 뚫고 나온 두 명의 인영. 눈이 돌아갈 법한 대단한 미녀와 인상은 평범하지만 장대한 골격을 지닌 사내. 굳이 생긴 게 아니더라도 저 둘이 특이하단 점에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라. 통제되고 있는 라-샤르-로아를 기묘한 수로 뚫고 나타났으니까.

“그런데… 이곳은 진짜 안전한 거야?”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는 두 명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스틸은 무시했다. 그보다 우선은 궁금한 게 있었으니까.

스틸은 도착하자마자 시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던 기운을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녀석들이 쫓아서 날아온다면 이곳은 개판이 될 것이다. 라가오페의 말이 있다고 하지만 워낙 속이는 게 많은 녀석이라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시안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라가오페 씨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안전하겠지요.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군요. 기운만 숨기고 있으면 괜찮을 듯합니다. 알파들이 이곳에 와서 분탕질을 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그랬겠지요.”

그렇게 힘들게 자신을 탄생시켰는데 위험한 곳으로 처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안은 혹시라도 걸릴까 봐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 당분간은 수련을 하며 힘을 키울 생각이다. 이렇게나 강해졌는데도 대륙은 아직 위험했으니. 그리고 자신의 재수 없음을 생각하면 언제 무엇이랑 엮여도 이상하지 않다. 그 전에 강해져야 한다.

시안의 말에 스틸이 궁금점이 생겨 물어보았다.

“기운을 숨겨야 하면… 힘도 못 쓰고 그런 거야? 막 라가오페 같은 녀석이 쫓아와서 시비 걸어도 두들겨 맞아야 하고?”

그러자 시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아예 차원이 다른걸요. 같은 알파와 싸울 정도만 아니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런 게 힘을 숨기는 거라고? 예전처럼 산맥을 박살 내고 그래도?”

그러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사실 산맥을 부수는 거야 큰 힘이 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넓기야 넓지만 단단하지 않으니. 그리고 그때도 그… 대전사라는 자가 힘을 산맥으로 날려버려서 그런 거지 원래는 그렇게 부서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큰 힘 드는 게 아니라고……?’

스틸은 묘한 눈초리로 시안을 바라보았지만 시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파끼리 싸워 에너지가 뻗쳐 나오는 정도는 그 정도가 아닐 겁니다. 파괴범위는 비슷할지 몰라도… 힘의 압축정도가 다를 테니까요. 그러니까… 핵심은 그 정도의 힘만 쓰지 않으면 됩니다. 산맥 부술 정도로 쫓아왔으면 예전에 이미 쫓아왔겠지요, 크로나가 드라고나가.”

“흐음… 그것도 그러네.”

시안은 설명을 마친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겠습니다. 오 년 만에 돌아왔으니… 좀 쉬어야겠습니다, 우선은. 그런데 여기가 어디 라-샤르-로아인지를 모르겠군요.”

그 말에 스틸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가서 물어보면 되지. 얘들아?”

스틸은 저 멀리 자빠져 있는 두 명의 무장을 불렀다.

그 말을 들은 라룬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그게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그러자 스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 잠시만 이리 와 보렴.”

“…네.”

길을 가다 보았으면 한 번쯤 작업을 걸어보았을 것 같은 대단한 미녀. 하지만 라룬은 마치 대괴수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분명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지만 라룬은 그 음성에 거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조건, 말하는 뭐든지 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멈칫거리며 오고 있는 상대를 보며 스틸이 입을 열었다.

“그래. 우선… 년도부터 물어볼까? 올해가 몇 년이니?”

그러자 라룬은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했지만 부드럽게 휘는 상대의 눈초리를 보고 허겁지겁 대답했다. 눈초리는 부드럽게 휘었지만 느낌이 엄청나게 안 좋았으니.

“올해는… 쿠쿠타란력 3년입니다.”

“…뭐?”

“쿠쿠타란… 력… 3년입니다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부들부들 떨며 대답하는 라룬의 말을 들은 스틸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는가를 고민했다.

“아니… 쿠쿠타란력은 또 뭐야. 그새 뭐가 바뀌었나… 여기 라-시안 맞아, 시안?”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라-시안 대륙이라고 했었는데… 라가오페 씨가… 여기 라-시안 맞습니까?”

그러자 공포에 질려있던 라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 짓지 마시고요.”

“맞습니다. 당연히 라-시안 대륙이지요. 여기 말고 다른 대륙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시안은 더 큰 고민에 빠졌다.

“…그럼 쿠쿠타란력은 도대체… 대륙력은 어디 가고…….”

시안 자신이 떠나기 전 분명 대륙력으로 1017년이었다. 어느 정도 오차가 있어도 대륙력으로 1022년 내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쿠쿠 뭐시기 역법이 나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라룬이 대답했다.

“아… 대륙력으로는 1022년입니다만… 어디 가서 말조심 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모두들 대륙력을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시안은 무슨 소린가 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또 무슨…….”

“그래도 우선 잘 찾아온 것 같기는 한데.”

“그건 그렇긴 한데… 뭔가 많이 바뀌었나 보군요.”

말하는 걸 보니 엄한 시간대나 애먼 대륙으로 날아온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떠나 있는 5년 사이에 무언가 큰 변화가 있던 것 같았기에 시안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스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뭘 고민해? 눈앞에 있는데. 물어보면 되지.”

“아, 그렇군요.”

“바쁜 거 없지? 그나저나… 이름이 뭐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여자의 말에 라룬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라룬… 이라고 합니다.”

“그래, 라룬. 우리가 어디 먼 곳을 여행 다녀오느라… 이곳이 오 년 만이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좀 해 주겠니?”

조용한, 하지만 무겁기 짝이 없는 기운을 담고 물어오는 스틸의 말에 라룬은 허겁지겁 자신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선… 오 년 전이라면… 하리쟌들의 대침공을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그래그래, 우리 시간 많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자세히 이야기해 보렴.”

그 말에 라룬은 심장을 진정시키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 ☆ ☆

5년 전, 대북벽 쪽에서 거대한 하리쟌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대법도회에서 건설하고 있던 거대한 방어 이적법진, <루-사라>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여섯 뿔의 하리쟌이 침범해 들어왔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여섯 뿔의 하리쟌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초인밖에 없으니.

모든 루트를 동원하였다. 대북벽을 지키고 있던 수호대들은 평소에 바깥으로 돌아다니던 그로인을 찾았다. 대법도회에서는 그들의 수장, 타키온에게 연락을 했다. 나라샤 국왕은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모두 별 의미가 없었다. 결국에는 찾을 수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대륙에 있던, 그나마 행적이 밝혀져 있던 초인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죽어 줄 수는 없으니 전 대륙의 사람들은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바리바리 끌어모아서 대북벽으로 향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북벽에 나타났다던 여섯 뿔의 하리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건설되고 있던 루-사라의 이적법진은 완전 박살이 나 있었지만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산맥 여러 군데가 파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체를 모를 기기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법도회에서 조사했지만 자신들의 수준을 한참 넘은 기기라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가져가서 연구해본다고 말했지만 도대체 뭐에 부서졌는지 완전 그 기능을 상실했기에 별로 얻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병력을 모아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 직후 대수림에서 하리쟌들이 미친 듯이 뛰쳐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각지에서 보낸, 여섯 뿔의 하리쟌을 쫓아내기 위해 모였던 병력들은 여섯 뿔의 하리쟌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지만 대수림에서 미친 듯이 몰려오는 수많은 하리쟌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때의 습격을 두고 사람들은 <대침공>이라고 불렀다. 몇십 년에 걸쳐 나왔던 하리쟌들이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여 바깥으로 도망쳐 나온 것처럼. 혹자들은 혹여 그 안에서 여섯 뿔의 하리쟌들이 세력 다툼을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내뱉었다. 실제로 바깥으로 뛰쳐나온 녀석들 중에는 여섯 뿔은 없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여섯 뿔의 하리쟌들이 뛰쳐나왔다면 대륙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초인을 제외하면 녀석들을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그나마 대북벽을 지켜주던 초인, 그로인을 비롯하여 모든 초인이 사라졌기에 더욱 그랬다.

어찌 되었건 결집된 인간의 힘은 상당했기에 모여있는 병력들은 효과적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하리쟌들을 차근차근 분쇄해 나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새로운 인간의 희망이 나타났다.

<쿠쿠타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대북벽에서의 격전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뼈를 깎는 고련 끝에 새로운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위대한 이름.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초인들은 초인의 경지에 오른 순간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쿠쿠타란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랑-반더였다. 중립 왕국, 브로샨의 위대한 그랑-반더. 그렇기에 이제까지 대북벽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다. 쿠쿠타란의 손에 스러져 간 다섯 뿔의 숫자만 해도 열이 넘어갔다.

그런 쿠쿠타란이 대북벽을 등지고 속세를 떠나간다면 방어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대북벽의 방어에 별로 여유가 있지 않았기에.

하지만 쿠쿠타란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대북벽을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다섯 뿔의 하리쟌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힘이 남으면 약한 하리쟌 녀석들도 싸그리 쓸어버렸다.

과연 초인의 위력은 명불허전. 일반인들이라면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초인의 위세를 실감한 병사들과 무장들은 모두 그 어마어마한 광경과 강대한 위세에 감탄하며 찬양했다. 새로운 인간의 수호자로 등극한 쿠쿠타란을.

☆ ☆ ☆

“뭐야, 그러면 그냥 그로인 그 아저씨 뒤를 따른 거 아닌가? 쿠쿠타란력은 뭐야 또…….”

‘…아저씨?’

초인, 그로인을 거침없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여자의 말에 라룬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이런 여자라면 초인과 사촌 지간이라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뭐… 아직 이야기가 더 있겠지요. 계속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아… 예. 뒤의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레이디의 말씀대로 거기에서 끝났다면 쿠쿠타란 폐하는 그대로… 그로인 경처럼 위대한 수호자로 남았겠지요.”

그리고 라룬은 그 뒤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 ☆ ☆

쿠쿠타란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떠나지 않았다. 당연히 떠날 줄 알았던 초인이 떠나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주자 백성들은 모두 열광했다.

하지만 쿠쿠타란은 떠나지 않은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오오! 쿠쿠타란 님! 저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그럼, 이제 다 내 것이 될 것인데… 다들 지켜줘야지.>

<…네?>

초인에 오른 쿠쿠타란이 한 일은 대륙 통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하였던 행동. 하지만 예상하였어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쿠쿠타란은 초인이었으니까.

간웅인 나라샤 국왕의 지도 아래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시키던 티안도, 드미트리 왕가의 인도 아래에서 콘 왕국을 병합하고 엄청난 속도로 강해지던 우샤란도 모두 대항하지 못 했다.

<강한 자 아래 모두가 머무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이렇게 외친 쿠쿠타란은 치열하게 눈치를 보며 싸우던 각 왕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통합하기 시작했다. 어떤 무기도, 어떤 병사도, 어떤 계략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라-샤르-로아를 타고 돌아다니며 각 왕궁을 방문한 쿠쿠타란에 의해 모조리 통합되었으니까.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대륙은 어처구니없이 통일되어 버렸다. 단 한 달도 되지 않아.

위대한 무인, 그랑-반더조차 초인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허약했다. 심지어 티안을 지키던 네 명의 그랑-반더들도 전혀 힘을 쓰지 못 하였다.

전 국왕, 나라샤

키라인 검공

드라고나 단장, 칼라굴

수호무장, 로만 백.

<파하. 뭐하나? 찾아가지 않아도 되서 편하긴 하네.>

모여 있던 네 명의 그랑-반더를 보고 쿠쿠타란은 코웃음을 쳤고 넷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무릎을 꿇었다. 애초에 수준 차이가 너무 심했기에. 차이라고는 초인의 벽을 넘었느냐, 넘지 못했느냐 그 하나였지만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다른 나라라고 해도 사정은 별로 비슷하지 않았다.

결국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라는 모조리 쿠쿠타란의 발아래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대륙의 7왕국은 사라지고 ‘쿠쿠타란 제국’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쿠쿠타란이 마지막으로 들른 타란 왕국이 발아래로 들어온 날을 1일로 하여 ‘쿠쿠타란력’을 사용할 것이 전 대륙에 선포되었다.

바야흐로 브록시안, 콘-라드에 이은 세 번째 절대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 ☆ ☆

“허…….”

그 말을 다 들은 시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스틸도 마찬가지였다.

“엥간히 할 거 없는 놈이었나 보네.”

스틸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초인이 되자마자 한 것이 병정놀이라니. 그딴 건 지난 초인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단지 가치가 없었기에 하지 않았을 뿐이지.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이제 초인들도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테고… 심심했을 수도 있지요.”

“하긴… 그때랑은 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스틸 자신이 알기로 이곳에 남은 초인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런 걸 깨달았다면 저런 모자란 행태를 보일 수도 있었기에 스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러면 동생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냐?”

“헉! 그러고 보니…….”

그제야 시안은 자신들의 가족이 생각나 다급하게 라룬에게 물어보았다.

“로만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만가 말입니까?”

라룬은 남자의 질문에 기억을 더듬었다. 워낙 삼 년간 충격적인 일이 많이 일어났고,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기에 티안을 대표하던 무장가, 로만가는 상대적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없었다.

고민을 하던 라룬은 그 와중에 떠오른 하나를 눈앞의 남자에게 말해주었다.

“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없는 걸 보니 별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통일되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뭐, 덤벼볼 짬이 되어야 덤빌 텐데… 덤빌 엄두가 나야지요. 제 기억에… 대북벽 쪽으로 이동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대륙의 모든 무장들과 병력들은 대북벽 쪽으로 옮겨갔으니까요…….”

“모든 병력이요?”

“모조리 통일되었는데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몽땅 모여서 대북벽을 지키고 있지요.”

“하긴…….”

그 이전의 병력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대부분이 국경에 얽매여 있었다. 당장 티안만 해도 칼라굴과 키리안 검공, 로만 백작들 모두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통일되었으니까.

“그러면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습니까?”

“아마도… 예전 크로티아 요새가 있는 곳에 계실 겁니다. 그곳이 가장 요충지이니… 그 예전 망자의 군대의 습격으로 무너졌지만 많은 물자를 투입하여 지금은 원 모습을 복구했다고 하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곳으로 가야겠군요. 이곳은 어디입니까?”

“여기는 7번 라-샤르-로아…….”

“쓰읍!”

스틸이 인상을 팍 썼다. 예전 자신이 알던 지형으로 이야기를 해야지 개편된 걸로 이야기해주면 어쩌란 말인가. 라룬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는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 여기는 타란 왕국의 남쪽 지방, 에인켈의 라-샤르-로아입니다.”

그러자 스틸이 손바닥을 쳤다.

“아… 어쩐지 익숙하더라.”

“아십니까, 스틸 양?”

“그럼, 예전에 도망간 첫째 오빠 잡으려고 여기까지 쫓아왔는걸. 멀리도 도망갔더라고, 그것참. 그래도 그때 우샤란까지 동시에 털어버릴 수 있어서 꽤 즐거운 나들이였지.”

“…….”

“어쨌건… 그러면 나도 길을 아니까 출발하자, 시안.”

“그러지요.”

“뭐… 하루면 가겠는걸.”

“스틸 양의 속도에 맞추면… 그 정도는 걸리겠군요.”

라룬은 지금 이 둘이 무슨 대화를 하나 싶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기… 크로티아입니다. 근처 도시, 크로탄이 아니라.”

“알아, 알아. 넌 여기 잘 지키고 있으렴. 가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틸은 몸을 쭉 뽑아내더니 이윽고 저 멀리 평원 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사람이 마치 혜성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는 것만 해도 놀랄 지경인데 옆에 있는 남자는 더했다. 어느새 몸이 흐릿해지더니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여자의 옆에 서 있었으니까. 마치 잔상처럼 허공을 수놓는 남자의 모습에 라룬은 눈을 비볐다.

“허… 우리가 뭘 본거지…….”

“우선 보고부터 올리자고…….”

라룬은 옆에 있는 동료와 함께 보고를 올리기 위해 허겁지겁 근처의 지휘본부로 향했다.

☆ ☆ ☆

“흐음… 그런 녀석들이 나타났단 말이지?”

“네, 폐하.”

카란 왕국에 머물고 있던 와중 보고를 받은 쿠쿠타란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좋아… 다들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었구나. 거기 여봐라.”

“네, 말씀하십시오.”

쿠쿠타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귀족이 쿠쿠타란의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

“그자들이 로만가로 향한다고 했지?”

“네.”

“저번에 아기 고양이가… 로만가에 가보고 싶다고 했지? 이번 기회에 같이 가도록 하지. 오랜만에 가보는 거니 좋아하겠군.”

“알겠습니다. 라-샤르-로아를 준비할까요?”

그러자 쿠쿠타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근처에는 아직 라-샤르-로아가 없지 않나. 뭐… 먼 거리도 아니고…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가도록 하지.”

“그러면 외출 채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쿠쿠타란은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아기 고양이들이랑 놀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만들어 둔 하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뭐가 많이 바뀌었군요. 오 년이면 분명 오랜 세월은 아니었을 텐데…….”

시안은 달려가는 도중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을 보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스틸 역시 그에 동의했다. 스틸은 수백 년의 삶을 살았지만 그 세월동안 변한 것보다 자신이 없는 동안 변한 것이 더 많아보였다.

“저건… 이동수단인가?”

아래를 지나가는 강철 모양의 마차를 보며 스틸이 중얼거렸다. 여러 개의 바퀴가 달린 상자처럼 생긴 기묘한 마차는 분명 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무게가 가벼워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흔한 것은 아닌지 강철마차는 도로 위를 지나가는 수많은 마차들의 사이에서 드문드문 보였지만 충분히 신기한 광경이었다.

“황제라는 자가 생기고 상당히 많은 것이 바뀌었나보군요.”

“그런데 시안… 너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야?”

스틸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안을 보며 물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속도를 맞추어 주는 줄 알았는데 가끔 보니 자신보다 속도가 더 느렸다. 제 한 몸 조종하지 못 할 경지가 아닌데 불규칙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스틸이 의문이 생겨 물어보았다.

그러자 시안이 스틸을 보며 씨익 웃었다.

“뭐… 수련 중이라고 할까요. 별일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시험 중이니까.”

웃는 시안을 보며 스틸이 궁금하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수련이길래 길바닥에서 그렇게…….”

“나중에 가서 말씀드리지요. 지금은 제대로 된 수련도 아니니까.”

“뭐… 그래. 그래도 거의 다 와 가네. 확실히 이쪽이 그곳 대륙보다는 좁구나.”

시안이 가끔 속도를 늦추는 일이 있었다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날아가고 있었기에 로만가가 있다고 하는 크로티아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스틸의 경지가 많이 올라 이동이 빨라졌다고 해도 예전에 몇 날 며칠을 걸려 세계수 하나를 이동한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어서 가지요.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겠군요. 후…….”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과 스틸은 평원 위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크로티아로 속력을 더 내기 시작했다.

☆ ☆ ☆

“후우… 시안 그 아이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로만 백작은 창 바깥에서 열심히 생산되고 있는 군수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그쳤지만 대북벽에서는 정병의 훈련과 군수품의 생산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특히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단체들은 놀라운 신기술을 제공하며 미친 듯이 군수병기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아마란이라고 했던가…….’

시안이 사라진 후 세상은 두 가지 존재들로 인해 크게 바뀌었다.

하나는 누구나 알고 있듯, 황제가 탄생한 것.

황제가 탄생한 후 400년간 각축을 벌이던 일곱 왕국은 단번에 단일제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를 나쁘다고 보는 사람들보다는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제는 지배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고 자신의 쾌락을 즐기는 데에만 주력했으니까. 제국을 만든 건 자신이 원하는 걸 제때 제때 공급받기 위한 수단이 불과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무능한 황제의 표본이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더 반겼다. 황제는 그 위치에 비하면 상당히 소시민적으로 쾌락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산을 밀어내는 공사를 하고 거기에 주지육림을 세우라는 등의 요구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느 방탕한 귀족의 사생활 정도. 물론 아무도 그 요구에 거부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고 몰아낼 수 없다는 것도.

이렇게 잃은 것은 적었지만 얻은 것은 많았다. 적어도 일곱 왕국 사이의 분쟁이 사라지고 대북벽에 병력을 집중하며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되었다. 게다가 절대자, 쿠쿠타란은 어떻게 보면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자였다. 이제까지의 초인들은 백성들이 죽어나자빠지건 말건 신경도 안 썼는데 쿠쿠타란은 달랐다. 자신들을 인간 취급 해 주고 나름 보호하는 모양새는 취하고 있었다.

하나가 황제로 인한 변화라면 세상에 다른 변화를 불러온 존재들의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있던지 모를, 마치 비밀조직과도 같은 곳에서 자신들의 지식을 풀어내기 시작한 것. 도대체 왜 이제까지 조용히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과 지식수준을 보유한 그들은 갑작스럽게 세상에 나오더니 자신들의 지식을 모조리 세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각종 병기에 대한 놀라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끊임없이 대북벽 쪽의 병력을 강화시키고 있는 아마란.

듣도 보도 못한 지식과 이적을 가지고 와서 인간에 대한 연구를 크게 증진시킨 바로카.

그리고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륜 이동 기기와 같은 기계들을 생산하고 있는 마카나.

이 세 조직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은 실로 놀라워 세상은 이들의 등장을 반겼지만 아직 세상이 이들의 기술력을 받아들일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아직은 더딘 속도로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걸 로만 백작은 돌아온 셋째 며느리의 동생인 리마이누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리안도 없고… 시안도 없고… 이 녀석들은 잘 살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로만 백작이 한숨을 쉬며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로만 백작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뛰어오는 두 개의 인영. 신기하게도 저렇게 엄청난 속도로 평원 위를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는데 흙먼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인영을 자세히 살피던 로만 백작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녀석! 돌아왔구나!”

☆ ☆ ☆

“아버지가 마중 나오시는군요.”

“그러게.”

예전이면 못 느꼈겠지만 네크라의 심장을 먹어치운 후 그 감지범위가 놀랍도록 향상된 스틸도 크로티아 요새 안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다른 기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큼직한 기운이 성의 바깥으로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 안에 계셔도 알아서 찾아갈 텐데…….”

“뭐, 오 년이나 기다린 아들이 돌아왔는데… 어찌 보면 당연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크로티아 요새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거대한 생산설비와 훈련시설을 구경하며 들어가던 시안은 자신을 마중 나온 로만 백작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시안! 이 녀석아… 도대체 어디 다녀온 게냐?”

무언가 바뀐 것 같았지만 로만 백작에게 시안은 똑같은 아들이었다. 로만 백작은 오 년 만에 만난 시안을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먼 곳을 다녀왔습니다. 동시에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지요. 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오려무나. 스탄탈 님도 들어오시지요.”

셋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만나 해후를 나눈 후 시안이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로만 백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허… 저 위쪽 대륙에도 인간들이 살고 있단 말이니? 그리고 여기 살던 초인들은 모조리 그쪽으로 이주했고?”

“네. 듣자하니… 이곳에도 초인이 하나 탄생했다면서요? 쿠쿠 뭐시기… 라고 하던 것 같은데…….”

그러자 로만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쿠쿠타란이란다. 3년 전에 초인으로 거듭났지. 지키는 방위가 달랐기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북벽에서 싸우던 사이였지. 브로샨의 그랑-반더였으니까.”

이야기하던 도중 시안은 문득 나라샤 생각이 떠올라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나라샤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좀 허탈하겠군요. 그렇게 티안을 강성하게 키워내려고 하셨는데.”

그러자 로만 백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바쁘긴 여전히 바쁘시단다. 명목상 통일되고 황제가 생겼지만… 그다지 지배에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니… 사실 내가 보기에 제국을 만든 것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해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때 제때에 공급받기 위한… 요즘은 하렘을 만들어 놀고 있다는구나.”

“흐음…….”

들으면 들을수록 특이한 초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초인, 혹은 귀족의 경지에 오르면 원숭이들의 문물과 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사람들로 도미노를 하건, 병정놀이를 하건, 시안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의 분쟁에 자신들의 가족이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형은 어디 있습니까?”

로만 백작의 표정이 갑자기 미묘하게 변했다.

“끌려갔단다.”

“…끌려갔다고요?”

“그래. 이번에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초인에게.”

“아니, 형이 어디에 필요하다고 데리고 갔습니까?”

무력이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마스터 하나의 무력이 초인에게 필요한 건 아닐 테니. 형은 강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무인은 차고 넘쳤다. 형인 리안이 필요할 이유가 딱히 없어 보였기에 시안은 의문이 생겨 물어보았다.

“…얼굴이 반반하다고 데리고 가더구나.”

“…뭐라고요?”

시안은 잘못 들었나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하렘이 집어넣는다고…….”

“허…….”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어 화보다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웬 하렘이란 말인가.

“아니, 그걸 순순히 따라갔습니까? 형수님들은 어쩌고요?”

그러자 로만 백작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네 형수들이 있으니 더 못 그랬지. 만약 초인에게 반항했다가 형수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리안은 반항하지 않고 끌려갔단다. 뭐… 반항해도 별 의미는 없었겠지.”

“뭐, 이런…….”

세상에 별의별 취미를 가진 놈들이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형을 그런 목적으로 끌고 가는 녀석이 있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방에 어여쁜 여자가 천지일 텐데 왜 그런 녀석들 놔두고 자신의 형을 끌고 갔다는 말인가. 아버지 앞이라 격한 말은 못 했지만 미친놈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집을 너무 오래 떠나있었구나…….’

시안은 이를 바드득 갈며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다.

“지금… 그 쿠쿠 뭐시기 어디 있습니까?”

“어머, 오랜만에 동생 힘 좀 쓰겠네.”

“후…….”

시안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녀석을 찾아가 어떻게 요리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카란에 있을 테지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단다.”

“네?”

“아침에 연락이 왔으니까. 이곳으로 온다고 하더구나. 네 형도 데리고.”

“…형도요?”

“그래. 아기 고양이라고 부르며… 아주 아낀다고 하더구나. 후으…….”

그 말을 들은 시안은 거친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온다니… 아주 좋군요. 그거 아주 좋아요.”

까드득!

근 3년 안에 올랐다면 고작 해야 남작 급일 것이다. 싸우느라고 사방이 부서질 일 따위는 절대 없기에 시안은 이를 갈며 이제 곧 기어 들어올 쿠쿠 뭐시기를 기다렸다.

☆ ☆ ☆

“이제 날 놓아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리안은 힘 빠진 목소리로 옆의 쿠쿠타란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쿠쿠타란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왜? 너처럼 잘생긴 아이는 본 적이 없다. 사실… 내가 브로샨에 있던 시절부터도 탐났는데 타국의 인재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놓아둔 것이지. 이렇게 경지에 올라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는데 내가 왜 너를 놓아준다는 말이냐.”

쿠쿠타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하렘에 들였지만 이 아이처럼 잘생긴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칼라굴이라는 아이 또한 잘생겼지만 뭔가 좀 꺼려지는 느낌이 들어 하렘에 들이지는 않았다. 아기 고양이라기보다는 개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스터 정도의 수준이 딱 귀엽다.

“후…….”

리안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래도 일 년의 반은 네 부인들과 함께 있게 해주었지 않는가.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었고.”

“…허…….”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제성을 띠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기에 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동생이라… 아마 이번에 새로 나타난 초인이 자네의 동생일 것 같은데… 나는 그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네. 드디어 나와 비슷한 존재를 만나는구나.”

“…….”

‘비슷하지는 않을 텐데…….’

자신이 초인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동생이 일반적인 초인은 아닌 것 같았다.

“후…….”

기대감에 가득 차 웃는 쿠쿠타란을 보며 리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판단하는 데 빠르리라. 자신의 동생이 어떤 존재인지.

어차피 이제 눈앞에 크로티아가 보인다. 그리고… 에인켈 지방의 라-샤르-로아에서 올라온 보고가 맞는다면 그곳에 나타난 자는 자신의 동생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다짜고짜 로만가의 행방을 물어볼 이유가 없으니까.

오랜만에 동생을 보게 되는 리안의 마음은 기대와 걱정으로 뒤섞여 물들어갔다.

☆ ☆ ☆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에 시안은 훌쩍 성벽을 타내려 뛰어넘어갔다.

느껴지는 기운. 틀림없는 초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한 대로 남작 정도의 수준이었고. 보아하니 딱 라가오페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형의 기운을 자신이 잊을 리는 없으니.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시안은 반가움에 달려갔다. 물론 거기에는 다른 감정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만.

스틸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흥이 나서 시안을 따라갔다.

“후후… 동생, 그 막대기 빌려줄까?”

스틸은 손에서 예전에 라가오페가 줬던 금속 막대를 꺼내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우선은… 형부터 데리고 와야지요.”

기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니 뭔가 거창한 행렬이 준비되어 있었다. 보니까 다들 수행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자신의 형, 리안이 보였다.

“형, 오랜만이야.”

“시안…….”

“…그나저나 이거 예상외인데…….”

시안은 느껴지는 기감으로 쿠쿠타란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약간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 거 빼고는.

초인이 서 있어야 할 위치에는 자신이 예상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산적 같은 외모를 한 채 자신의 형을 향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 것 같은, 딱 패주기 좋게 생긴 남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주먹부터 날아갔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서있었다. 리안의 옆에 서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여성, 쿠쿠타란을 보며 시안이 읊조렸다.

“남잔 줄 알았는데 여자였구나… 이 중요한 걸 왜 말을 안 해준 거야.”

제국, 쿠쿠타란의 초대 황제, 쿠쿠타란은 굉장히 여리여리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온몸의 다져진 근육은 여성이 절대 나약하지 않음을 증명해주고 있었지만 적어도 외모와 키만 보면 어느 귀족가의 여성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놀라운 미인이었다.

‘놀랍군… 납치범까지도 미인이 꼬이다니… 형은 정말 대단하군…….’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과 달리 형은 아무래도 축복을 무더기로 때려 맞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제까지 들은 이야기로만 보면 완전 상남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서 있자 시안의 머릿속에 잠시 혼동이 왔다. 여자라서 안 때린 것이 아니다. 너무 예상외의 상황이라 안 때린 것일 뿐.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어차피 패면 되잖아.”

스틸이 뭐가 문제가 되냐는 투로 물어보았다. 동생은 여자라고 패지 않을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잠시만요.”

옆에 서 있는 형의 표정이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아 우선은 사정을 제대로 들어보기로 한 시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갔다. 자신이 예상하던 상황과 달라 기존에 정해놓았던 대응방식도 바꾸어야 할 것 같았기에.

☆ ☆ ☆

성의 바깥에 간단하게 마련된 천막. 도대체 무슨 기술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가방에 들어있던 재료들이 순식간에 펴지고 조립되더니 꽤나 볼만한 천막이 만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굉장히 화려한 천막이 만들어졌다. 황제가 쓰는 것이라 그런지 조립식인데도 불구하고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네 명의 인물이 앉아있었다.

쿠쿠타란, 스틸, 시안, 그리고 리안.

다른 수행원들은 모조리 바깥에서 나가 마실 만한 음료와 음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리안을 마주보며 대화한 시안은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뭐… 처음에는 강제로 끌려가긴 했는데… 뭐, 완전 강제로 끌고간 건 아니고… 가서 정도 들었다, 이거네……?”

“그렇지. 너무 그렇게 보지 말거라. 알고 보면 불쌍한 여인이란다.”

“하아…….”

‘암에 걸릴 것 같다…….’

여자에 대해서는 자비롭기 그지없는 자신의 형, 리안은 어찌 보면 레이디에게 관대한 전형적인 기사도의 모범이지만 그런 건 개나 줘버린 시안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다 좋았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너무 약했다.

시안은 당장이라도 형을 강제한 저 쿠쿠 뭐시기를 좀 때려주고 싶었지만 형이 괜찮다고 하는데 때리기도 뭐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듣자하니 형한테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의 가족들도 잘 챙겨주었다고 하고…….

게다가…

‘흠…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안 데려가주나…….’

시안이 생각하기에 그게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만족할 생활이었기에. 노예처럼 부렸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저런 여성의 아기 고양이 역할을 하는 거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았기에 시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쿠쿠타란을 쳐다보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게 하는 데다 저런 미인과… 시안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생활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어… 부럽다…….’

시안은 형과 쿠쿠타란을 번갈아 보며 입맛을 다셨고, 그 묘한 눈초리를 본 스틸이 시안의 팔을 우드득 소리가 나게 잡았다.

꾸드드득!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헉!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저는 단지 앞으로의 거국적인 대사에 대하여…….”

“…….”

‘저년은 어떻게 해야겠군… 우선은 좀 나중에…….’

“아! 왜요, 왜.”

시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노려보는 스틸을 피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설마… 우리 형을 계속 잡아놓을 생각이 있습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뭐… 이제는 포기해야지요. 보니까 눈앞의 분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이제 내 아기 고양이를 놓아줄 때가 되었군요.”

‘…무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뭐 이리 능글맞아…….’

자신이 아는 무장들은 여자건 남자건 상당히 마초적이었는데 눈앞의 쿠쿠타란이라는 여성은 그런 것 같지 않았기에 시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형한테 한 짓을 보니 선을 넘지 않았다. 이건 자신의 존재를 알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를 했다는 뜻이다.

“뭐… 형은 이제 돌아갈 거지? 형수님들은 저기 크로티아에 계신 것 같던데 먼저 들어가 봐.”

“시안 너는 같이 가지 않니?”

“나는 뭐… 여기 있는 이자랑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리안이 사라지고 천막 안에는 셋만이 남았다.

“반갑습니다. 사실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쿠쿠타란이었다.

“흠… 궁금한 것이 많았다고?”

묘하게 차분한 태도의 쿠쿠타란을 보며 스틸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요. 저는 사실 저처럼 초인으로 거듭나면… 초인들이 뭉쳐서 살고 있는 집단이나… 이런 것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제까지는 초인들이 단 한 명도 활동하지 않았기에 뭔가 그들의 규율이 있고 그들을 억제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해서요. 하지만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더군요.”

“흠…….”

“그렇게 되니 궁금해지더군요. 왜 이전의 초인들은 이 좋은 힘을 놔두고 속세를 떠났을까?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살 수 있는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이게 너무 궁금하더군요.”

그제야 스틸과 시안은 눈앞의 쿠쿠타란이 왜 특이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쿠쿠타란은 다른 자들을 미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사랑스럽게 보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지배하고 싶은 욕구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제국을 만들고 하렘도 만들며 즐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쿠쿠타란은 라가오페가 원숭이라고 지칭한 나리쟈 급의 종족에서 인간의 피를 밀어내고 알파로 탄생한, 첫 개체였다.

“놀랍군요. 인간종의 피를 밀어내다니…….”

원숭이의 피로 인간종의 피를 씻어내고 알파로 각성한 개체라는 뜻이니 그 의미가 각별했다.

“흐음… 그래서 이런 느낌이 들었구나…….”

스틸은 아까부터 느껴진 기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저 쿠쿠타란이라는 여자는 강하기는 하지만 리비아스나 그로인처럼 감정의 대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라가오페의 예전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함의 문제가 아닌, 종의 문제라고. 눈앞의 쿠쿠타란은 귀족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자신들과 같은 종은 아니었다.

아마 쿠쿠타란이 자신들에게 존대를 쓰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수도 있다. 상대가 강자이기에 함부로 할 수는 없지만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를 것이다. 라가오페의 비사를 듣기 전에는 자신도 긴가민가했었으니까.

시안은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 끝에 그냥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해줘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기에.

“뭐… 어찌 되었건… 저는 제가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여 불안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 새로 태어난 다음에 저와 같은 존재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릅니다. 쓸데없이 나라 이름도 쿠쿠타란으로 바꾸고… 이렇게 요란하게 놀고 있으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해서요.”

“…….”

“사실 가장 최근에 흔적이 남아있는 초인은 눈앞에 있는 시안 씨, 당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곳에 오면 단서가 있을까 하여 왔는데 아무것도 없더군요.”

“겸사겸사 형도 납치하고요?”

시안이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건 미안합니다. 너무 제 취향이라… 그래도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

옆 나라 공주를 보쌈 한 왕자님의 입에서 나올 법한 대사를 미모의 여성 입에서 듣게 된 시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시안을 보며 쿠쿠타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엔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사실 다시는 나와 같은 초인들을 못 볼 줄 알았습니다.”

“흠… 이주한 흔적을 보셨군요.”

대북벽에서 싸우다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면 콘-라드와 라가오페가 북쪽으로 도주한 흔적을 찾았을 수도 있다. 전에 콘-라드에게 넘어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얌전하게 도망친 것은 아니었으니.

시안의 말에 쿠쿠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불안해지더군요. 초인들의 집단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속세를 떠나있는 것도 모자라 갑자기 뭉쳐서 대수림 쪽으로 단체로 이동하다니… 무언가 여기에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요. 재앙이 터진다거나…….”

위 대륙의 인간에 대한 존재나 라가오페의 계획을 모른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추측이었기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따라올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후후. 제가 왜 거길 가겠어요? 이곳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저 대수림 안쪽이 위험하다는 건 확실하지요. 대륙이 있다는 것만 알지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이곳이 이렇게나 좋은데. 저는 단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왜 그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났나…….”

“흠…….”

“만약 이곳에 무슨 문제가 생겨 도망을 친 것이라면…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아니면 그들을 따라 정말 이곳을 떠나든가.”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이곳이 안전합니다. 계속 여기에 계십시오.”

만약 사고가 터진다면 알파들이 원인일 텐데 대비한다고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기에 시안은 이곳에 있으란 말을 건네었다.

“뭔가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오 년 동안 어디에 갔다 오신 겁니까? 듣자하니 라-샤르-로아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두 사람만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그렇지요.”

“무슨 일로 다시 돌아온 겁니까?”

그러자 시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위에서 한 개고생이 다시 한 번 떠올랐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에 대고 화풀이할 수는 없으니 시안은 쿠쿠타란을 보며 대답을 해 주었다.

“뭐…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곳에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재수 없게 휩쓸려 간 거지.”

그러자 쿠쿠타란이 이채를 띠며 말했다.

“저 위, 북쪽에 무언가가 있군요.”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 위는 안 가는 게 좋습니다. 워낙 흉악한 녀석들이 많이 살아서요.”

드라쿤이니 루크라니… 라가오페가 자신에게 과거 이야기를 할 때 그 부분만 쏙 빼놓고 이야기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알았다면 전혼옥이고 뭐고 절대로 가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라가오페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곳에 끌려갔다는 것이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흠…….”

시원스런 대답을 듣지 못 한 쿠쿠타란은 살짝 인상을 좁혔지만 이내 털어버리며 다른 주제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자 쿠쿠타란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군요. 사실 그간 굉장히 불안했거든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뭐… 안심하십시오.”

시안의 안심하라는 말은 이제부터 안전할 테니 안심하란 말이 아니라 어차피 무슨 일이 터져도 감당하기는 힘들 테니 안심하라는 뜻이었지만 굳이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였기에 시안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흐아… 그나저나 그 알파란 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막나…….’

사고가 터지면 그 녀석들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 된다. 가족과 스틸 양뿐만이 아니더라도 그런 대전쟁이 터지면 자신이 안 휩쓸리기는 힘들 것 같으니.

힘의 균형이 잡혀있기에 안전할 거라고 하지만 대륙 주위를 그런 녀석들이 감싸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시안이 한숨을 쉬며 쿠쿠타란을 내버려두고 크로티아 쪽으로 향하자 쿠쿠타란 역시 주위의 천막을 정리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쿠쿠타란을 보며 스틸이 한 마디 던졌다.

“흠… 시안 동생, 저대로 보내줄 꺼야?”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생각보다 형한테 잘 해 줬더군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고요.”

“음?”

스틸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시안이 이야기를 이었다.

“깨달은 건데… 제가 생각보다 너무 재수가 없습니다.”

“…….”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을 짓는 스틸을 무시하며 시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항상 형의 곁에 있을 수 없겠더군요. 형 일은 최대한 형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만약 제가 두드려 패서 원한을 가지면 제가 없는 사이에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스틸이 무슨 그런 고민을 하냐는 표정으로 산뜻하게 말했다.

“그럼 죽여 없애 놔.”

“…그건 내키지 않는군요. 그리고 그건 스틸 양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까.”

“쳇.”

그 정도 잘못을 한 건 아니었기에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스틸은 아깝다는 듯 불만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전 수련하러 가야겠습니다. 아… 우선 가족들이랑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요.”

“수련?”

“네.”

스틸은 불만을 잊어버리고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시안이 수련을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시안은 그런 스틸을 데리고 내성 안으로 이동했다.

☆ ☆ ☆

“폐하, 다녀오셨습니까.”

쿠쿠타란은 돌아와서 자신의 하렘으로 가지 않고 회의실로 돌아왔다. 쿠쿠타란이 회의 같은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신기한 현상이다.

쿠쿠타란이 회의실로 온 이유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타키온의 수장 자리를 대신하여 법도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등극하고 사라진 초인들이 버려놓고 간 비밀 조직을 먹어치운 그들의 총수. 데카두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데카두인은 1급 법도사였지만 초인인 타키온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고 세력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타키온을 도우며 많은 비밀을 알게 있었다. 어찌 보면 그가 타키온의 빈자리를 메꾸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엉, 다녀왔어. 후…….”

“어떻습니까, 그자를 본 소감이?”

그러자 쿠쿠타란이 손사래를 쳤다.

“무리야, 무리. 절대 못 이겨. 후… 여차하면 죽이고 오려고 했는데…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어. 이제 스물일곱일 거라 해서… 쉽게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였습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 시안이라는 아이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덤벼들면 안 될 것 같은 위압감… 이런 게 있어서. 그리고 굳이 그 아이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그 여자가 더 무서워.”

“그 여자가 더 강한 것 같았습니까?”

“남자가 강한지 여자가 강한지 그건 모르겠는데… 나한테 별로 감정이 좋지 않더라고. 그리고 나보다 강한 건 확실하고.”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다르다고. 덤벼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무슨 상대의 실력이 보이고 재단할 수 있어 그런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영혼이 맹렬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덤벼들면 찢겨죽을 수도 있다고.

그 말을 들은 데카두인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러게… 네 말대로 리안 그 아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를 잘 했어.”

리안은 쿠쿠타란이 자신에게 호의가 있어 잘 해주고 아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호의가 있는 것은 맞았지만 쿠쿠타란은 자신의 것은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안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은 데카두인의 조언 때문이었다.

<리안의 동생이라는 시안이라는 자는… 초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형을 엄청 아낀다고 하더군요. 만약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폐하보다 약하다면 상관없지만 폐하보다 그자가 강할 때를,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허… 그것도 그렇군. 돌려보내야 하나?>

그러자 데카두인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니 데리고 있으십시오. 인질로서의 의미도 있고… 리안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여자에게 약하다고 하더군요. 호감을 사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요.>

<뭐… 좋아. 나도 아기 고양이가 좋으니까. 한 녀석 정도야 맘대로 뛰어놀도록 봐주도록 하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거기서 리안 그 아이가 한 마디라도 했으면 시안이라는 자는 기다렸단 듯 자신을 두들겨 팼을 것이다. 그리고 인질 놀이를 하지 않은 것도. 만약 거기서 그런 짓을 했다면 분쇄되어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

데카두인은 몸을 떠는 쿠쿠타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얻은 것은 있으십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 우선 새로 나타난 그 녀석들을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과… 이곳에 위기가 있어 이주한 것은 아니란 거 정도?”

“일단은 다행이군요.”

데카두인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타키온의 가장 최측근이긴 했지만 타키온은 항상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숨기는 느낌이 아니라 네가 알아도 의미가 없으니 말해주지 않는다는 느낌. 데카두인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비할 데 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타키온은 자신들이 왜 위쪽으로 가려고 하는지를 말해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데카두인은 타키온이 사라진 이후로 대륙에 무슨 일이 터질까봐 항상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왜 가려고 하는지는 몰랐지만 이주라는 행위가 힘든 것만은 확실했다. 대수림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도 그 위대한 초인, 타키온은 항상 걱정에 가득 찬 상태로 이주의 방법을 강구하고는 했으니까. 시안은 쿠쿠타란이 이주의 흔적을 보고 초인들의 이주를 알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데카두인이 말해준 것이었다.

대륙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제 문제는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쿠쿠타란은 위험한 요소를 결코 남겨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 대륙에 초인이 자신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느긋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 누구도 자신을 상대로 반역을 꿈꿀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초인이 새로 나타났다는 것을 듣고 바로 확인하러 갔다. 같은 초인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위협할 수 있으니 상대를 확인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안타깝게도 새로이 나타난 자들은 자신의 인지범위 바깥에 있는 강자들이었다.

자신을 크게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쿠쿠타란의 입장에서는 저런 초강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언제라도 수틀리면 자신의 목을 따러 올 수 있으니. 시안과 스틸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쿠쿠타란은 꼬박꼬박 상대를 향해 존대해야 하는 상황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혹시 위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아오셨습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뭔가 말을 안 해주더라고. 비밀인 느낌이 아니라… 네가 알아도 아무 소용 없으니 그냥 모른 채로 얌전히 살아라… 이런 느낌. 제기랄! 말하다 보니 또 열 받네!”

쿠쿠타란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매우 잘 아는 데카두인도 쓴웃음을 지었다.

“뭐… 위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시안이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에 위험이 미칠 요소는 없는 것 같았어. 결론은 이렇게 났으니 녀석들은 내버려두고 우리는 그냥 하던 거나 하자고. 괜히 건드릴 필요 없지.”

그 말에 데카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하렘 가서 놀고 있을 테니까 일 잘 하고 있어. 아… 혹시 말 안 듣거나 반항하는 아이들 있으면 말하고.”

“네.”

데카두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반항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저번에 대법도회에서 반항하던 인원들이 쿠쿠타란에게 어떻게 갈려나가는지를 모두 확인했기에.

‘무식한 것…….’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 초인이란 존재들은 너무 난폭했다. 다른 초인들과 다르게 인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더 위험했다. 다른 초인들은 아예 관심이 없었지만 저 여자는 인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하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기에 데카두인은 이 배에 좀 더 타고 있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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