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72화 (73/81)

<72. 도발>

초청장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라그랑 지방으로 오라, 이거지.’

놀랍게도 왜 오라는 소리조차 쓰여 있지 않았지만 시안은 그건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내용보다는 보낸 이가 더 중요했으니까.

“아니, 쿠쿠타란 이 여자가 나한테 이런 걸 왜 보낸 거지……?”

저번에 도망치듯 물러가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초청장을 맨 뒤에는 보낸 이가 ‘쿠쿠타란’이라는 서명이 아주 명확하게 적혀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간단하게 무시했을 것이다. 자신은 수련을 하느라 매우 바빴으니까. 그곳까지 귀찮게 왔다 갔다 투자할 시간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편지의 마지막에 있는 내용이 시안을 그럴 수 없게 하였다. 편지의 다른 내용은 모조리 미사여구에 가까웠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아주 명확하게 시안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오지 않으시면 리안 그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허…….”

상당히 도발적인 문구에 시안은 혹시나 하여 전설의 암살자가 알파인 자신의 기감을 뚫고 형을 납치해갔나 하여 온 성을 감지해 보았지만 실종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형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스틸 양, 세 명의 형수와 여덟 명의 조카까지 모두가 크로티아 성안 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혹시 자신을 라그랑으로 유인해낸 후 빈 집을 털려는 것인가 하여 생각해 보았지만 만약 자신이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가면 허사가 되는 일인데 이렇게 일을 엉성하게 꾸몄을까 하여 의문이 들었다. 쿠쿠타란 그 여자는 힘만 믿는 마초 타입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허… 뭔지 모르겠네. 그냥 맞고 싶은 건가…….’

시안은 가기도 찝찝했지만 안 가기도 영 찝찝했기에 결국 라그랑 지방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만약 진실로 형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있어 쿠쿠타란이 자신에게 알려주려고 한 것이라면 자신이 가서 해결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곳을 비우고 갈 수는 없었기에 시안은 스틸 양에게 이곳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스틸 양이 지켜준다면 쿠쿠타란이 혹시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족들에게 위협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틸 양, 이곳을 좀 지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수련장에서 한창 명상을 하며 수련을 하던 스틸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동생, 또 어디 가? 혹시 자신의 강함을 시험해보기 위해 알파의 힘을 써보러 가는 건가?”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이고, 말만 들어도 무섭습니다. 이곳은 라이오나의 영역인데 힘을 썼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습니다.”

애초에 위험할 건덕지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 놓은 대피소는 정말 최후의 보루였으니. 한심하게 수련한다고 알파의 기운을 사방에 뿌려대다가 라이오나한테 쫓겨 도망가면 이런 멍청한 짓이 없을 것이다.

“하긴…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면 어디로 가는데?”

그러자 시안이 대답해주었다.

“라그랑으로 갑니다.”

“라그랑?”

“네. 초대가 와서요.”

그러자 스틸의 눈매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설마 그년인가?”

“그년이라니…….”

“그 쿠쿠 뭐시기.”

“허…….”

시안은 스틸의 촉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스틸의 표정이 살짝 사나워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뭐, 잘 다녀와, 동생.”

시안은 뭔가 찝찝했지만 스틸이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 걱정을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기에는 상대와 자신의 격차가 너무 난다. 굳이 알파의 힘을 쓸 필요도 없다. 아마 열세 살쯤의 자신이라면 쿠쿠타란이 무슨 수를 준비해 놓았건 힘으로 모조리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시안은 스틸에게 크로티아 성의 가족을 부탁하고 라그랑 지방으로 몸을 날렸다.

‘뭐… 한 이삼 일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갈까…….’

초청장에는 분명 이삼 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니 가는 김에 수련을 하며 간다면 시간을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시안은 몸속의 체내계수를 맹렬하게 쥐어짜며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라그랑 지방을 향해 걸어 나갔다.

☆ ☆ ☆

“왜 안 오는 거지… 설마 리안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건가?”

쿠쿠타란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크로티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너무 여유 있게 시간을 주어도 대비를 할 테니 시간을 많이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삼 일의 여유만을 두고 시안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그곳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하루 정도 걸릴 것이니. 실제로 에인켈에서 크로티아까지 이동하는 데 하루 정도 걸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루 전에는 도착했어야 옳다.

하지만 시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계획이 처음부터 일그러질 위기에 처하자 점점 표정이 썩어 문드러지는 쿠쿠타란을 보며 데카두인이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올 겁니다. 조사 보고서에는 형을 굉장히 소중히 여긴다고 쓰여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쿠쿠타란이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한 결과 형을 굉장히 아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조사보고서를 모두 믿기는 힘들고 오 년이라는 세월은 사람 하나를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기에 일부러 직접 가서 해결했다. 애초에 이 계획은 시안이 형을 아낀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었으니까.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기에 쿠쿠타란은 시안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제 시안만 도착하면 되는데 도착하지 않자 화가 난 쿠쿠타란은 으드득 소리를 내며 손을 움켜쥐었다.

문제는 그 손아귀 안에 자신의 하렘에 있던 노예 하나의 머리가 들어있었다는 것이었지만.

파직!

노예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머리에 가해지는 압력에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닌지 쿠쿠타란은 가볍게 손을 털며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했다.

“가져다 버려.”

리안은 쿠쿠타란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순전히 쿠쿠타란이 가두어 놓고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초인의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굴이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쿠쿠타란은 그렇게 남의 비위를 맞추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노예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웃고 떠들던 동료의 시체를 바깥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쿠쿠타란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 이대로 가면 몇 명이 더 죽어나갈지 모른다.

‘빌어먹을 년… 그럴 거면 아예 여유 있게 초청장을 보내든가…….’

데카두인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저렇게 초조하게 기다릴 거면 왜 시간을 딱 맞추어 날짜를 가르쳐 주었단 말인가, 하루 이틀 빨리 오라고 할 것이지. 저러다가 멀쩡한 노예만 죽어나가게 생겼다. 쿠쿠타란의 눈에 찰 만한 잘생긴 노예 구하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기에 데카두인이 일이 늘었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쿠쿠타란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왔구나!”

초인의 시선으로 저 멀리 평원에서 오고 있는 시안을 확인한 쿠쿠타란은 방금 전까지의 잔혹한 행동을 벌인 인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방금 전까지 공포에 질려 떨던 노예들도 잠시나마 그 공포를 잊고 멍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하지만 쿠쿠타란은 곧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장애가 있나… 왜 저러며 와…….”

비틀거리고 온몸에서 김을 내뿜으며 오고 있는 시안을 보며 쿠쿠타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시안은 저 멀리 보이는 라그랑을 보며 자살 수련을 그만두고 체내계수를 모조리 회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이 되던 피는 마치 신이 축복을 내린 성수처럼 시안의 몸을 맹렬하게 치료해갔다.

몸의 재생 속도는 미친 듯이 빨라졌고 끊어지기 직전의 근육들과 바스라지기 직전의 뼈들은 더 강건해진 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시안은 멀쩡해진 상태로 돌아왔고 가볍게 라그랑 지방을 향해 뛰어올랐다. 저 멀리 쿠쿠타란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시안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쿠쿠타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도대체 여기까지 왜 부른 겁니까? 형이 위험하다는 소리는 무슨 뜻이고.”

그러자 쿠쿠타란이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우선 들어갈까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지요.”

“…….”

무엇을 기다리길래 시간이 남았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안 역시 궁금했기에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자리에 앉은 쿠쿠타란은 시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형을 정말 아끼시는군요.”

“…용건만 간단히.”

정체불명의 괴문서를 보낸 데다 형이 죽을 위기에 왜 처하는지 이유도 적혀있지 않았고 라그랑 지방으로 오라는 말만 써 있었다. 자신을 이용해 먹겠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의 형을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었다면 편지에 모든 내용이 있었을 테니.

날이 선 시안의 반응에 고개를 으쓱한 쿠쿠타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우선 이대로 가면 리안 그 아기 고양이가 위험해지는 건 백 프로 확정이에요.”

“누가 우리 형을 노리는 겁니까?”

칼라굴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이다. 리안을 건드린 쿤타리안이라는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니.

그 말에 쿠쿠타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실 목숨이 위험한 건 저이지요.”

“설마 형이 목숨이 위험한 당신을 대신해 기사도를 지키며 죽어줄까 봐 위험하다는 겁니까?”

아무리 형이라도 그럴 리는 없다. 자신감 과잉의 쿠쿠타란을 보며 시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쿠쿠타란이 웃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제가 죽으면 리안 그 아이도 죽거든요. 그 때문에 리안 그 아이가 죽을 위기라고 하는 것이고요.”

시안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한 번 파고 쿠쿠타란을 노려보았지만 쿠쿠타란은 여유있게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무슨 말입니까?”

“혹시 시라인에 대해 들어보았나요?”

“…….”

시안은 안 좋은 느낌이 뒤통수를 타고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들 일반적인 전투력 강화제 정도로 알고 있는데… 사실 바로카에서 시라인을 만든 목적은 전투 강화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지요.”

“…….”

“대수림의 어느 종족의 피를 이용하여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신약이지요. 아, 물론 전투 강화의 위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요.”

“어떤 식으로 지배를 강화한다는 말입니까?”

시안이 묻자 쿠쿠타란이 웃으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뭐… 시라인에 섞은 피의 주인이 죽으면 주술로 인해 시라인을 마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정도? 지배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특성이지요.”

“…….”

“바로카가 참 대단하지요? 이런 걸 만들다니. 아마 무장 중 시라인을 복용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뭐… 지금 저에게는 그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리안 그 아이가 약을 먹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만요.”

쿠쿠타란이 싱글벙글 웃으며 시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시안의 굳어진 표정이 자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기에.

☆ ☆ ☆

쿠쿠타란은 항상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지배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지금이야 초인이 자신 하나뿐이니 문제가 없지만 나중에 다른 곳에서 초인이 나오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실존했다고 알려진 열두 명의 초인들은 새로운 초인의 탄생 가능성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초인이 탄생한다고 하여도 먼저 태어난 자신이 강할 것이지만 혹시라도 둘 이상 탄생하게 되면 굉장히 골치 아파진다. 게다가 초인이 산속으로 숨기라도 한다면 평생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데 쿠쿠타란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든 걸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산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쿠쿠타란의 앞에 어느 날 데카두인이 나타났다.

<폐하, 저희를 지켜주신다면 놀라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쿠쿠타란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언데?>

<혹시 시라인에 대해 아십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걸 먹으면서 대북벽 너머에서 엄청나게 싸워대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쿠쿠타란을 보며 데카두인이 말을 이었다.

<원래 시라인의 용도는 단순한 전투력 강화제의 용도가 아닙니다. 그건 오직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지요.>

그리고 데카두인은 대수림 속에 사는 놀라운 종족, 로샤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디서 구해온지 모를 피를 가지고 연구한 끝에 바로카는 그 피에서 몇 가지 유효 성분을 추출, 제작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원래의 목적은 기록된 바와 같이 완전히 지배받는 불사의 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그 덕분에 시라인의 제작에 성공했으니까.

시라인은 본래 로샤란의 피가 가지고 있던 공능 중 하나를 담아낼 수 있었다. 시라인을 먹은 자는, 모체가 되는 여왕의 피를 제조하여 만든 약을 먹은 자와 주술적으로 연계된다. 그리고 모체의 피를 먹은 자가 죽으면 아래 종속된 자들은 모조리 동시에 사망하게 된다.

이제까지 시라인을 안 먹은 무장은 거의 없다. 적어도 대북벽에서 한 번이라도 근무했던 자들은 모조리 그 약을 먹었으니까.

게다가 때마침 돌아다닌 소문은 그 속도를 더욱 가속화했다.

<쿠쿠타란은 시라인을 먹고 수련하여 초인이 되었다.>

이 소문은 시라인에 별로 관심이 없던 무장들마저 모조리 이 약을 복용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데카두인은 쿠쿠타란의 고민거리를 정확하게 맞추며 제안을 가져왔고 쿠쿠타란은 크게 기뻐했다.

<이걸 드십시오.>

<이게 모체의 피를 정제한 약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먹지 않지?>

그러자 데카두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먹어도… 폐하가 계신 한 별 의미가 없지요. 뭉쳐도 초인을 당해낼 수 없으니. 그리고 이 약은 기본적으로 초인이 먹지 않으면 온몸이 녹아내립니다.>

그 말에 더욱 기꺼워진 쿠쿠타란은 단숨에 그 약을 삼켰다.

☆ ☆ ☆

“언젠가는 이 특성을 쓸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지요.”

쿠쿠타란은 표정이 굳은 시안을 보며 즐거운 듯 말했지만 현재 시안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지금 어떻게 해야 되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당장 머릿속으로 세 가지 정도로 압축이 되었다.

1. 좀 쓰다듬어 준 다음에 제압한 상태로 스틸 양에게 날아가 카르나인 안에 집어넣어 버린다.

2. 좀 쓰다듬어 준 다음에 피 속에 있는 그 모체라는 성분을 모조리 다 태워버린다.

3. 좀 쓰다듬어 준 다음에 형을 비롯한 가족들은 전혼옥이 있으니까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우선 3번은 기각이었다. 전혼옥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라가오페를 다시 찾지 않는 이상 다시 만들기도 힘든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여분의 목숨을 이렇게 허접한 이유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의 무장들이 모조리 죽어나갈 것도 굉장히 찝찝했고. 그렇게 되면 당장에 대북벽이 뚫리고 이곳 라-시안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다시 되살아나면 시라인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지가 확실하지 않았기에 시안은 3번은 넘겨버렸다.

2번은 시안 입장에서 아주 매력적인 방안이었다. 실제로 당장에 실천하려고 했지만 여자의 몸속에 흐르는 성분을 쭈욱 살펴본 다음 시안은 이 방법도 포기했다.

‘알파의 힘을 써야겠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약은 주술로 인해 혼과 육체와의 결합을 공고히 다진 상태였다. 특수한 공능을 발휘하는 성분을 모조리 태워 없애려면 적어도 알파로서의 힘이 필요했다. 그것도 작업이 끝나기 전에 죽지 않게 살려두면서 성분만 태워 없애려면 상당한 수준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라가오페의 말에 따르면 힘을 쓰면 알파에게 걸릴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했다.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안은 아직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것도 기각…….’

결국 가장 매력적인 제안은 1번이었다. 저 여자가 평생 그 공간에서 갇혀 살아야 한다는 것은 유감이지만 다 자업자득이니까.

‘우선 자결 못 하게 묶어두고 패야겠군…….’

이 여자는 자신의 힘에 대해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아 저런 제안을 하고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인생 살아가는 게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때가 되었다.

천천히 몸을 풀며 쿠쿠타란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문득 시안의 기감에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잡혔다. 워낙 익숙한 느낌이라 시안은 쿠쿠타란에게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그 느낌을 어디서 느꼈는지 떠올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한 종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음… 이 느낌 이거…….’

예전에 껍질을 지키던 그라나인의 느낌이었다. 분명 자신의 손에 몰살했었는데 어찌 된 일이지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맨 앞에 서있는 여자는 시안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라나인의 껍질 근처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던 세 명 중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던 개체. 여성체인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살아난 것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성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자들의 기감을 쿠쿠타란도 느꼈는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일 자들이 오는군요.”

그러자 시안이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어차피 1번 작업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여유 있게 해도 된다. 1번 작업이 끝나면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보지 못 하게 될 터이니.

“그런데 별로 살의는 느껴지지 않는걸요? 도대체 왜 죽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쿠쿠타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원래는 그럴 일이 없는데… 이제는 절 죽이려고 들 겁니다.”

그리고 말을 끝마치자마자 쿠쿠타란은 다가오고 있는 그라나인을 향해 풀쩍 뛰어들며 칼을 휘둘러갔다.

☆ ☆ ☆

예전, 초인이 되고 난 후 대수림을 돌아다니며 괴수들을 소탕하던 쿠쿠타란은 기묘한 존재들을 발견하게 된다.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군대를 데리고 다니는 기묘한 종족.

보는 순간 저 종족이 데카두인이 말한, 시라인의 원 재료가 된 종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대하기는 했지만 초인이 된 자신의 상대는 아니다.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모조리 묶어 갈 생각에 신이 난 쿠쿠타란은 싸우던 와중 웬 기묘한 녀석을 발견하게 된다. 로샤란 하나의 피를 쪽쪽 뽑아내어 들고 있는 뼈에다가 묻히고 있는 한 존재를. 녀석은 자신이 로샤란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몰래몰래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상당히 강해보였지만 자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쿠쿠타란은 궁금함을 풀기 위해 노예 종족들을 모조리 갈아버린 후 녀석에게 다가갔다.

“넌 뭐하는 놈이니?”

“…….”

대답을 하지 않자 흥이 떨어진 쿠쿠타란은 녀석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이 들고 있는 뼈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에.

로샤란의 피를 바르고 녀석이 기묘한 주문을 외우자 뼈에 살이 붙고 혈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뼈다귀들이 생겨난 근육과 인대에 의해 정렬되고 그 위에 피부가 덧씌워지고 신경이 새로이 생겨났다.

이윽고 뼈다귀는 사라지고 아름답게 생긴 여인 하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인이 아닌, 여성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었으니.

새로이 태어난 여성체는 쿠쿠타란을 무시하고 곧바로 기묘한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자신을 무시하는 여성체에 화가 났지만 쿠쿠타란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저 여성체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로데발, 수고했다. 덕분에 살아났구나.”

“아닙니다, 여왕님.”

“그런데… 이 로샤란이란 놈들의 숫자로 우리 종족을 모두 되살리려면 피가 턱없이 부족하겠는데.”

여왕이라 불린 여성체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샤란 녀석들을 드라고나의 영역 안으로 끌고 가서 키우면 가장 좋겠지만 크로나의 영역에 살며 그 냄새를 풀풀 풍기는 녀석들을 그 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드라고나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도 간신히 허락을 받은 것이니.

그렇다고 여기서 더 숫자를 늘려오라고 놓아주면 더 깊숙한 곳에 가서 숨을 것을 알기에 놓아줄 수도 없다.

고민하던 여왕의 눈에 웬 인간 녀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들 말로 초인이라고 불리는 자.

하지만 초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은 그 힘이 미약했다. 그자를 보는 순간 여왕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아.”

“왜 그러시나요.”

초인이 된 후 상대의 힘에 눌려 고분고분해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니 쿠쿠타란은 열이 받아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한 자는 죽기 싫다면 말을 들어야 하니까.

그런 상대의 속마음이 뻔히 보였지만 여왕은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이 로샤란이란 녀석들을 데려가서 잘 먹이고 키워 숫자를 불려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가서 피를 가져가겠다.”

여왕의 선택은 간단했다. 자신들의 영역으로 데리고 갈 수 없다면 눈앞의 인간종에게 키우라고 한 다음 피를 받아 가면 된다. 드라고나의 영역 바깥으로 오래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피를 받아오는 정도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무엇을 해줄 건가요?”

쿠쿠타란이 묻자 여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살려주마.”

‘빌어먹을 년이…….’

약한 것은 이래서 서럽다. 저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말을 꼼짝없이 들을 수밖에 없으니.

“…알겠어요.”

“너희들… 인간의 역법으로 1년마다 찾아가겠다. 라그랑 지역으로 찾아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라그랑 지방은 자신들이 머무는 하늘산맥에 매우 가깝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다면 훨씬 편하게 피를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저 인간 여자 입장에서는 불편하겠지만 그건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말을 마친 여왕은 그 자리에서 몇몇 로샤란의 피를 더 뽑아 즉석에서 로데발이 짊어지고 있던 뼈에 바르고 몇 명의 동족을 되살린 후 하늘산맥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쿠쿠타란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새끼…….”

힘이 없으니 반항도 할 수 없다. 듣자하니 이 로샤란이란 녀석들의 피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엿이나 먹어 보라고 모조리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했지만 쿠쿠타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저 여왕이라는 자가 자신을 살려둘 리 없다. 반드시 죽을 것이다.

보아하니 활동시간에 제약이 있는 것 같으니 숨으면 찾지 못 하겠지만 그렇다는 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딘가에 숨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힘이 가져다준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쿠쿠타란은 결국 로샤란족들을 데려와 라그랑 지방 아래에 숨겨놓고 차근차근 그 숫자를 늘려나갔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피를 쥐어짜내며 매년 찾아오는 여왕이란 자에게 피를 공급했고, 그럴 때마다 쿠쿠타란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더 열 받았다.

그러던 와중, 리안의 동생인 시안이라는 초인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다. 시안이라는 자를 이용해서 저 건방진 여왕이라는 자를 죽이고 나머지 녀석들도 모조리 죽여 달라고 할 것이다.

자신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안이라는 자가 어느 정도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여왕보다 강해 보이는 건 확실했다. 스틸이라는 여자와 여왕에게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지만 시안이라는 자는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

그걸 믿고 달려들었다. 자신이 죽으면 형이 죽는다. 자신은 여왕이라는 종자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왕 역시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러면 시안이라는 자는 자신을 대신해서 싸우는 수밖에 없으리라.

쿠쿠타란은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여왕이라는 자를 휘몰아쳐 들어갔다. 아니, 휘몰아쳐 들어갈 생각이었다.

따악!

“컥……!”

날아가던 도중 갑자기 후두부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을 받은 쿠쿠타란은 이윽고 전신을 두드리는 격통을 느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쿠쿠타란의 귀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종자였네… 무슨 생각이야. 하여간 맞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후…….”

☆ ☆ ☆

“흠…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구나. 로데발, 어서 가보자.”

“네, 여왕님.”

그라나인족을 이끌던 여왕, 켈-루샤는 만나기로 한 여자가 있는 곳이 소란스러워지자 호기심이 생겨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 오는 것이지만 이런 소란은 처음이었기에.

그곳에는 켈-루샤가 예상하지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 저 여자가 분명 말할 때 자신이 제국의 황제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요.”

“그런 것치고는 참 찰지게 맞고 있구나.”

전신을 두드려 맞고 있는 여자를 보며 켈-루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을 지켜야 할 자가 저렇게 두드려 맞고 있으면 자신들이 공급받아야 할 피를 가져가기가 힘들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켈-루샤는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생각해냈다.

‘그때… 드라고나의 껍질에서 맞서 싸운 그 남자이다…….’

불사의 권능을 부여받은 자신들을 두드려 패며 제압하던 그 남자. 그 당시 자신은 이성이 없이 껍질의 권능에 조종당하던 상태였지만 혼에 새겨진 기억만은 선명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저 쿠쿠 뭐시기라는 인간종의 황제가 두들겨 맞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자는 자신보다도 훨씬 강했으니까. 게다가 저 움직임을 보니 자신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약한 놈을 두들겨 패는 것이니 자신의 실력을 모조리 발휘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기다려야겠군.’

괜히 저기에 끼어들었다가 잘못 얽혀들기는 싫었기에 켈-루샤는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건드렸다가 자신도 두들겨 맞으면 엄청난 손해다.

순간, 켈-루샤는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자신의 머리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

켈-루샤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혼을 샅샅이 뒤지는 그 느낌을 받으며 켈-루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와중 머릿속으로 거대한 울림이 새어 들어왔다.

<너, 저기 있는 저 녀석에게 한번 덤벼들어 보아라.>

순간 켈-루샤는 입에서 쌍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눈앞의 존재 역시 무서웠지만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있는 존재는 더욱 무서웠으니.

<크흐흐… 조금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순간, 켈-루샤는 자신의 육체의 모든 통제권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 ☆ ☆

하늘산맥 깊은 곳. 아무도 오지 않는 고고한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그 봉우리 꼭대기에 한 생명체가 똬리를 틀고 엎드려 있었다.

마치 명장이 다듬은 갑옷과도 같은 수천, 수만 개의 붉은 비늘에 의해 감싸여 있는 거대한 존재는 마치 대자연의 일부와도 같이 조용히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었다.

조용한 상태로 있다지만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위압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늘산맥의 지배자, 드라고나.

산맥의 꼭대기에 엎드려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던 드라고나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종속들 중 하나에게서 갑자기 놀람의 감정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

드라고나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이곳은 힘을 키우기에는 최적이지만 너무 심심했다. 가끔 종속들이 보는 것 중 재미있는 것이 있나 해서 바깥세상을 둘러보고는 했던 드라고나는 종속들의 우두머리에 접속하여 그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종속의 놀란 감정의 근원은 한 남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로-종의 개체 수컷으로 보이는 개체.

드라고나는 그 개체를 알고 있었다. 몇 차례 종속의 기억에 접촉하며 그 기억을 읽어본 적이 있으니.

<음… 아닌가… <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본은 ‘로’인 것 같았지만 너무 강했다. 예전 기억을 읽었을 때는 꽤나 강한 것이 신기하였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무시하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랜 만에 종속의 시선으로 본 녀석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종속의 수준으로는 잘 파악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시선으로는 그것이 명확히 보였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예전, 종속의 기억과는 다른 무언가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때와 달리 몇 개의 벽을 더 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워낙 종속의 수준이 떨어지고 두들겨 맞고 있는 녀석과의 실력 차가 심해서 저 수컷 개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드라고나는 간단하게 결정을 내렸다.

<붙여보면 알겠지.>

종속으로 상대가 될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 개체가 완전히 자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 존재인지, 그것만 알면 된다. 조금이라도 그 흔적이 보인다면 자신은 눈치챌 수 있다. 어차피 상대의 본신의 힘을 끌어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직접 두드려 맞으면 느낄 수 있는, 상대의 동작에서 묻어나오는 그 흔적으로 눈치를 채는 것이니.

만약 거듭난 존재가 아닌, 그 이하라면 굳이 라이오나와 마찰까지 하며 노릴 가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거듭난 존재라면 라이오나의 영역이라고 하여도 결코 놓칠 수 없다. 그 정도로 맛있는 먹잇감이니까. 다행히도 라이오나는 아직 저 녀석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았다면 저대로 방치해둘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먼저 먹는 자가 임자이다. 그리고 드라고나는 자신 있었다.

판단이 서자마자 드라고나는 즉시 종속에게 명령했다.

<너, 저기 있는 저 녀석에게 한번 덤벼들어 보아라. 크흐흐… 조금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그리고 드라고나는 종속의 육체의 지배권을 빼앗아 직접 조종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종속된 그라나인 녀석들을 모두 다.

☆ ☆ ☆

“…이건 또 뭐야…….”

쿠쿠타란을 두들겨 패던 도중 갑자기 덤벼들어 오는 그라나인의 대장을 비롯한 그라나인들을 보며 시안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아까와는 뭔가 달랐다. 아까는 뭔가 옆의 그라나인들끼리 서로 대화도 하고 이성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완전 이성이 나간 채 무언가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 어이없는 점은 아까와는 경지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는 것.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벽에 막혀있던 평범한 초인 급이 아니었다. 체내계수를 맹렬하게 변화시키며 힘을 뽑아내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한순간에 벽을 두 개는 뛰어넘은 것 같았다.

다른 그라나인들도 한두 단계는 실력이 훌쩍 올라간 채로 모조리 자신을 바라보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혀 위협은 되지 않았다. 굳이 알파의 힘을 뽑아 쓸 필요도 없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겨우 베타 2레벨 정도로 자신을 위협할 수는 없다. 시안은 단박에 그라나인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성을 두들겨 패 제압한 후 땅바닥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그 뒤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도 팔다리를 분지른 후 차곡차곡 던져 쌓아놓았다.

하지만 시안은 이 기현상이 믿기지가 않아 찝찝한 표정으로 그라나인을 살폈다.

뭔가 뇌리 속에서 자신을 살살 자극하고 있었다. 이 느낌이 들었을 때 좋은 일이 벌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재 자신의 주변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느낌을 들게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었고 상황 자체도 위험하지 않았는데 이런 느낌이 들다니.

‘갑자기 강해진 것도 엄청 수상하고… 뭔가 개입하지 않는 한…….’

개입해도 엉성한 존재가 개입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 엄청난, 어마어마한 것이 개입하지 않는 한 저렇게 강제로 경지를 올려놓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 순간, 시안은 자신의 찝찝한 이 감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라나인.

드라고나의 파수꾼.

하늘산맥에 사는 드라고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엮어낸 시안은 하나의 결론을 유추해냈다.

“빌어먹을…….”

아니길 바랐지만 이제까지 자신의 운세를 생각하면 아마 100퍼센트일 것이다. 시안이 이를 가는 순간 이제까지 아무 말 없이 칼을 휘두르던 그라나인족의 대장의 입이 열리고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들켰구나.”

아름답게 생긴 여성의 입에서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새어나오니 그 모습이 사뭇 기괴했다. 마치 여성의 배 안에 똬리를 튼 짐승이 대신 울부짖는 듯한 소리. 게다가 이 목소리는 한 곳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포개진 채로 쌓여있던 모든 그라나인들의 입에서 기괴한 짐승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 말을 내뱉자마자 쌓여있던 그라나인들은 모두 전신이 녹아가며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겨우 벽에 막힌 육체로 베타2의 움직임을 소화해 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무리이니. 다른 그라나인들도 엄청나게 무리를 하고 있었다. 드라고나가 무슨 수를 써서 도와줬는지는 몰라도 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시안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이제까지 자신을 여러 번 도와준 자신의 느낌이 전신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가 찾아올 때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하… 그러면 그렇지. 내 인생이… 흐휴…….”

벌써 대피처를 써야 될 상황이 오다니 시안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쿠쿠타란을 보며 시안은 이를 갈았다.

“하…….”

자신을 이 상황에 엮어 넣은 여자. 만약 저 그라나인이라는 종족의 앞에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걸릴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시안은 여자를 괘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더 패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드라고나가 전속력으로 날아온다면 그가 어디 있건 이곳으로 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걸렸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 아까 자신이 세워 두웠던 2번 계획을 써야 함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니, 이제는 반드시 2번 계획을 써야 한다. 만약 이 여자를 내버려두고 갔다가 애먼 곳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안 되니까.

시안은 판단이 서는 즉시 알파로 거듭난 이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거대한 힘을 내면에서 끄집어 올렸다.

까드드득!

그리고 그대로 손을 쿠쿠타란의 머리 위에 올린 후 끌어올린 힘을 모조리 그 안으로 쏟아 붙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스치기만 해도 쿠쿠타란의 몸이 터져버릴 정도의 거대한 힘. 하지만 쿠쿠타란은 죽지 않았다. 모체의 흔적을 씻어내지 않은 상태로 죽어버리면 수만 명이 동시에 죽어나갈 수도 있으니. 그걸 알기에 시안은 일부러 힘 조절을 해가며 쿠쿠타란의 몸 구석구석에 있는 기괴한 주술의 흔적들을 쫓아가며 모조리 지워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쿠쿠타란을 초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육체도 모조리 망가져갔다. 아마 이 과정이 끝나면 쿠쿠타란은 목숨은 붙어있겠지만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시안이 알 바 아니었다.

까드득, 까드드득.

쿠쿠타란의 몸 내부가 청소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안의 전신에서 휘몰아치듯 올라온 힘은 순식간에 쿠쿠타란의 몸 내부를 모조리 휩쓸어버리며 주술의 흔적을 지워냈다.

‘라이오나에게도 걸렸겠구나…….’

사실 알면서도 힘을 썼다. 아니, 라이오나가 자신의 흔적을 알아채주길 바라며 힘을 더 거창하게 썼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차라리 라이오나도 아는 편이 자신이 도주하기에 더 유리하다.

작업을 끝마치자마자 시안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쿠쿠타란을 향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아직 기감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위기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시간이 정말 얼마 없었다.

“너는 이제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평생 속죄하며 살아라.”

말을 남긴 후 대피처로 향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뽑아 허공으로 날리던 시안은 주위 사람들 중 하나를 콕 집어 가리키며 외쳤다.

“거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나 말이오?”

어느 정도 고위직으로 보이는 한 인물을 보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가에 좀 전해주시오. 또 여행을 갈 것 같다고.”

말을 전하고 갈 시간도 없다. 빨리 도망가야 하기에.

이 말이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안 남겨두는 것보다는 좋았기에 시안은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은 그 자리에서 귀신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시안이 사라지자 숨도 쉬지 못 하던 주변 노예들은 주섬주섬 몸을 챙겨 일으키기 시작했다.

“크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나저나… 진짜인가… 초인의 힘을 잃었다는 것이…….”

놀라던 와중에도 한 마디는 명확하게 귀에 들어왔다.

<너는 이제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평생 속죄하며 살아라.>

폭풍처럼 쿠쿠타란을 비롯한 기묘한 종족을 쓸어버린 괴인이 남기고 간 한마디.

그렇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속박하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고.

하지만 워낙 쿠쿠타란의 존재가 두려웠기에 다들 노려보면서도 머뭇거리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하였는데 개중 한 명이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며 쿠쿠타란을 걷어찼다.

“빌어먹을 년!”

아까 쿠쿠타란에게 머리가 터져죽은 자와 친하게 지내던 귀족이었다. 설령 쿠쿠타란이 힘이 회복될지라도 이런 기회에 저 더러운 년을 걷어차 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기에 귀족, 케르돈은 거침없이 달려가 쿠쿠타란의 배와 머리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쿠쿠타란은 움찔움찔하면서도 반항하지 못 하고 쓰러진 그대로 얻어맞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용기백배한 노예들 역시 달려 나가 미친 듯이 쿠쿠타란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초인의 힘이 사라지고 체내계수를 조절할 능력이 사라진 쿠쿠타란은 이제 몸이 좀 튼튼한 여무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여기 잡혀있던 하렘의 노예들은 다 한 가락 하던 무장들이었다. 워낙 쿠쿠타란이 강대하기에 반항도 못 하고 잡혀있었을 뿐.

데카두인이라도 있었다면 막아줄 수 있었겠지만 데카두인은 쿠쿠타란이 두들겨 맞기 시작한 순간 일이 틀어진 것을 느끼고 도망간 지 오래였다.

이렇게 황제가 되어 삼 년간 라-시안 대륙 전역을 쥐락펴락하며 통치하던 쿠쿠타란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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