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운카라>
떠나겠다는 소리를 하자 루크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영역 근처에 있는 키큘러스 중 가장 가까운 곳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바깥으로 나와 평원을 달리던 시안은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르르자 몸을 식히며 저 멀리 보이는 키큘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로르발 공작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는 코어의 힘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인지 키큘러스의 잎은 푸른빛을 내며 자신의 찬연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쪽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데… 물어보면 되겠지.’
그때 공작이 모두 죽고 유일하게 남은 공작은 아마 콘-라드일 것이다. 그들 성격으로 이곳에 숨어 지낼 것 같지도 않으니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쩝… 이게 뭐 길도 알려주고 이러면 참 좋을 텐데…….’
셋째 형수의 ‘운명의 길’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아마 단박에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능력은 싸워서 패주는 것 이외에 도움이 되지 않는지 한탄하며 시안은 차근차근 수련을 해나갔다.
☆ ☆ ☆
키큘러스에 도착한 시안은 귀족이 머무르고 있을 키큘러스로 걸어 올라가며 자신의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콘-라드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 아주 이상한 그림이 완성될 것 같았기에.
하지만 시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키큘러스를 다스리던 가리온 백작이라는 자는 시안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시안이라고 하는데… 혹시…….”
“아! 오셨군요. 연락은 받았습니다.”
“…연락이라니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시안이 되묻자 가리온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쌍둥이를 통해 연락이 왔더군요. 혹시 시안이라는 분이 오게 된다면 그 예전, 로르발 공작가가 있던 곳으로 오라고.”
“허…….”
시안은 라가오페 씨가 이 정도로 해놓았을 줄은 몰랐기에 탄성을 내뱉었다.
‘하여간 머리는 참 잘 굴러가…….’
어찌 되었건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다.
시안은 혹시 로르발로 공간이동이 되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직 그런 건 설치되지 않았다는 대답만 듣고 키큘러스 로르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아크라가 없어도 공명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대기 중으로 퍼져 나오는 미세한 코어의 에너지를 느끼며 시안은 동북쪽의 반도에 위치해 있을 로르발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키큘러스를 건너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 ☆ ☆
“후후. 이러면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모든 키큘러스의 코어를 뒤지지 않고 바로 로르발로 오겠지요?”
예전 루크라를 방문했을 때 시안에게 할 부탁이 무엇인지 대충 들은 라가오페는 어차피 시안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그렇고, 언젠가는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 있는지는 알 턱이 없으니 전 키큘러스를 뒤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다가 재수 없으면 걸릴 수도 있으니 아예 쌍둥이들을 통해 전 귀족들에게 혹시 콘-라드를 찾으려면 로르발로 오라고 해놓은 상태였다.
“뭐, 그렇겠지.”
자신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콘-라드를 무시한 채 라가오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겼다.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어디 가서 숨어있겠습니다. 후후. 여기… 통신 아티팩트를 놓고 갈 테니까 혹시 필요하면 부르시지요.”
‘하여간 잔머리는…….’
콘-라드는 라가오페를 보며 혀를 내두르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라가오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 언제까지 도망 다니려고? 사실 시안 그 친구가 널 죽이거나… 뭐, 그럴 것도 아니잖아.”
콘-라드 자신이 본 시안 그자는 그렇게 폭급한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라가오페가 직접적으로 시안을 죽이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복수하려고 들 것 같지도 않았기에 콘-라드는 라가오페를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시안 씨에게 맞는 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는 게 아닙니다. 뭐… 뒤끝이 있는 성격도 아닌데 한번 두들겨 맞고 끝나는 것이 편하지요.”
“…그럼?”
“왠지 엮이면 저까지 재수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불안정한 시기에는요. 옆에 있다가 무슨 불벼락을 맞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도 그렇군.”
불벼락도 아마 보통 불벼락이 아닐 것이다.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자신이 고려하고 있지 않던 한 가지가 더 생각나 되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자 라가오페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항상 무장이라면 위기를 달고 살아야 한다고 외치던 분이 여러분들 아니었습니까? 마침 위기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여기 오고 있으니 같이 잘 놀고 계십시오.”
“…….”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손을 억누르며 참아낸 콘-라드를 보며 라가오페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저 같은 인텔리의 경우 위기는 항상 피해야 한다는 주의라서. 하하하! 저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다른 일을 하고 있겠습니다. 사태가 끝나면 돌아오지요. 맞아도 뭐… 그때 맞는 게 낫지요.”
그리고 라가오페는 휭 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라가오페가 도망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은 키큘러스, 로르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르발은 워낙 거대해서 그런지, 아니면 로르발 공작을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키던 와중 기력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원상태로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처럼 보였다.
로르발 안으로 들어가니 콘-라드가 시안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반갑습니다, 콘-라드 씨.”
“오랜만이군요.”
‘진짜 살아 돌아왔잖아…….’
콘-라드는 눈앞의 시안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라가오페는 철석같이 시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도망갔지만, 사실 콘-라드는 시안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 예전, 크로나의 어마어마한 위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 그건 자신들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단박에 그 드넓은 제국 위의 모든 인간종과 칼-굴을 쓸어내 버린 기괴한 존재.
그런 녀석들을 뚫고 루크라들이 산다는 극한의 산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기에 콘-라드는 사실 시안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시안을 보니 콘-라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사람이면 그럴 수 없겠지만 눈앞의 존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의 경지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해야 하는데도 뭔가 기묘한, 차원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조용할 때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만 움직이면 폭풍을 불러올 것 같은, 그런 느낌.
‘로르발 씨… 성공했구려.’
이런 자를 탄생시켰다니. 콘-라드는 이제는 사라진 로르발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존경을 표했다.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안과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라가오페 씨는… 도망갔다, 이거지요?”
“그렇습니다. 저희에게도 위치를 안 알려주고 가서…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괜찮습니다. 사실 그게 급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시안은 이번에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콘-라드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콘-라드는 그걸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 구름산에서 일을 마치고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동 법진이 필요하단 말씀이시군요?”
“네. 저곳으로 도망치면 따라오지 못 할 테니…….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 근처에서 모두 피해 계십시오. 정말 재수 없으면… 이곳까지 휩쓸릴 수도 있으니.”
만약 자신이 성공적으로 도망쳐도 눈이 돌아간 드라쿤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시안은 그다음을 생각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불벼락…….’
콘-라드는 아까 한 라가오페의 말이 떠올라 엄청나게 찝찝해졌지만 머리를 털며 잊어버리고는 시안이 요구한 법진을 사용할 수 있을지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괜찮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평민이 없어 아크라가 수급되지는 않지만… 어차피 코어에 에너지만 불어넣는다면 당장에라도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저곳에서 이곳까지 오시는 건 문제가 없겠습니까?”
“흐음… 하지만 딱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뛰어오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리이기에 별 고민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드라쿤들에게 갇힌다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코어와 키큘러스를 기반으로 공간이동 법진을 만든 것은 거기에 공급할 에너지가 워낙 막대하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시안 씨라면 혼자 그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그랬듯이.”
“아하.”
생각해보니 저번에 드라쿤들을 피해 도망갈 때도 그런 방식으로 도망갔다.
“제가 공간이동 좌표와 법진이 수록된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에너지만 불어넣는다면 바로 공간이동이 가능하도록.”
“그런 걸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시안이 신기해서 묻자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번에 리비아스가 저쪽으로 건너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들고 왔기 때문에 그걸 개조해서 만들면 오래 걸리진 않을 듯합니다. 어차피 에너지가 구하기 힘든 것이지, 공간이동 법진이나 좌표는 하루 이틀 쓴 것도 아닌걸요. 소형화 작업만 거치면 끝납니다.”
“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자 시안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운카라를 해결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가면 된다.
이렇게 되니 한 가지 고민이 더 생겼다.
저 아티팩트가 만들어지고 정찰을 하러 갈지, 아니면 만들어지는 동안 정찰을 하고 올지.
‘고민의 여지도 없군.’
시안은 아티팩트의 완성을 기다리기며 수련을 하기로 했다. 운카라가 어떤 존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 무슨 동네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찾아가는데 저런 보험 하나쯤은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에.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저곳으로 찾아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온몸이 저릿저릿하게 경계를 띠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하단 건가…….’
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운카라가 강한 것인지, 혹은 드라쿤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루크라들의 말대로라면 이건 시안이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끝마쳐야 하는 일이다.
‘루크라들과 아티팩트를 믿는 수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시안은 루크라들이 시선을 잘 끌어주기를 바라며 수련에 몰입했다.
☆ ☆ ☆
“여기 있습니다. 사용하기 편하게 반지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필요한 에너지만 불어넣으면 바로 시안 씨가 예전에 도착한 에인켈로 떨어지게 해 놓았으니 별다른 사용법을 익히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콘-라드는 시안에게 작은 반지 모양의 아티팩트를 건네주었다. 반지에 박힌 작은 루비에는 작은 글자들이 셀 수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얼핏 보면 투박하게 생긴 모양이었지만 그 안에 집적되어 있는 고도의 술식들을 생각하면 그 가치는 성 몇 개를 간단하게 뛰어넘었다. 대륙에도 몇 개 없는 라-샤르-로아를 반지 하나에 응축시킨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시안은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런 걸 빨리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하군요. 라-샤르-로아의 숫자도 마구 늘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콘-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공간이동의 술식 자체도 굉장히 고난이도이고, 복잡하지만 그보다는 에너지를 끌어모으고 집적하는 이적이 더욱 중요합니다. 정말 대단한 에너지가 드니까요. 일인용으로 제작되었고 시안 씨가 그 안에 모조리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전제로 제작이 되어서 그렇지, 만약 평범한 라-샤르-로아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반지를 만들려고 했다면 수십 년은 더 걸렸을 겁니다. 일회용으로 제작되었으니 귀중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일회용이면 충분하지요. 감사합니다.”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시안은 반지를 왼손에 끼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콘-라드가 물었다.
“바로 떠나실 겁니까?”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끌 이유가 없지요.”
지금의 능력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면 최대한 빠르게 해결할수록 좋고 지금의 능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면 빠르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다. 반지만 준비되었다면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하긴 그렇지요. 무운을 빕니다. 최대한 잘 해결하고 오십시오.”
콘-라드는 애써 담대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라가오페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한 마디, 불벼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떠날 준비를 했다. 시안 말마따나 이곳에 있다가 휩쓸릴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보며 인사를 하고 빛살처럼 예전, 자신이 알파로 거듭 태어난 자리인 반도 너머의 구름섬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자욱하구나…….”
바다 위를 통통 튀기며 건너가던 시안이 한 줄의 감상평을 내뱉었다. 여전히 안개는 자욱하기 그지없었고, 그의 감지를 감소시키고 있었다. 물론 예전, 로르발 공작과 한판 붙기 전보다는 훨씬 더 먼 거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자신의 감지범위보다는 줄어들어 있었다.
만약 이게 결계를 만들기도 전의 연기 상태라면 운카라를 찾는 것도 꽤나 까다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사방팔방으로 뿌리고 땅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땅속을 모조리 헤집어야 할 테니까.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날려버리고 싶지만 그런 짓을 하다 실수로 뭘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드라쿤들이 자신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러 단숨에 날아들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이곳에서 싸우다가도 뭘 잘못 건드렸다면 알파가 되기도 전에 드라쿤들이 날아왔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하긴… 차라리 숨어 다닐 정도로 약한 녀석이면 좋겠다.’
그러면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계속해서 경고음을 날리는 몸뚱어리는 지속적으로 이곳에 들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제기랄… 시간만 더 있었어도…….’
그랬다면 꾸준히 수련을 하여 정면대결로 동맹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계가 약해지는 지금 언제 드라쿤과 루크라들의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한가로이 강해질 대로 강해진 다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물 위를 뛰어가던 시안의 앞으로 예전 치고받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름섬이 나타났다. 그때 그 난리를 쳤는데도 여전히 거대한 산맥 위에 불쑥불쑥 솟아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봉우리에서는 여전히 엄청난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시안은 저 연기들이 모두 똑같은 연기가 아니란 것을 발견했다.
섬의 가장자리, 땅의 균열이나 낮은 봉우리의 구멍에서 바닥 쪽으로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는 연기들은 바다 위에 깔려있던 안개와 비슷한 성분이었지만 섬 중앙 쪽에 있는, 거대하기 그지없는 산봉우리들에서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치솟고 있는 연기는 척 보아도 무언가 기묘한 기운을 담은 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발견하기 힘든 미세한 차이였다.
‘저러니 몰랐지…….’
엄청나게 은밀했다. 아마 자신도 아쿤-칼이란 것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면, 그래서 자세히 쳐다보지 않았다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악사라이가 무슨 수를 써 놓은 것 같았다. 결계가 온 상공을 뒤덮기 전에 그 존재감을 풀풀 풍긴다면 곤란했을 터이니.
그래도 일단 어디서부터 뒤져야 할지 방향이 잡힌 시안은 구름섬의 가장자리를 지나 험준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중심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시안은 가장 큰 봉우리부터 살펴볼까 하다가 연기가 나오는 가장자리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가장 가운데에서는 무언가를 찾을 확률이 가장 높았지만 그 말은 무언가와 마찰을 일으킬 확률도 가장 높다는 소리였다. 올라가던 와중 예전, 반도를 넘어 침입해 오던 거인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들은 반도로 쳐들어가던 예전과는 다르게 목적을 잃은 것처럼 사방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들은 어디서 계속 저렇게 기어 나오는 거야…….’
저 녀석들 정도로 자신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는 없었기에 시안은 살짝살짝 녀석들을 피해 가며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까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연기가 뿜어내는 봉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안은 그 연기에 살짝 손을 담가 보고는 감탄했다.
‘몸도 무거워지고… 감지범위도 더 크게 제약되고…….’
게다가 듣자하니 드라쿤들의 종족 특성인, 타고난 이능까지 증가시켜 준다고 하니 과연 루크라들이 골치 아파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봉우리에는 자욱하게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밑이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크기도 보통이 아니어서 어지간한 마을 하나 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시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결계가 자신의 감지범위를 너무 크게 제약하여 구멍 밑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뛰어내려 한참을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아래에서 올라오는 연기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고 점점 더 주변의 온도가 올라갔다. 물론 그 온도가 시안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안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고 느꼈다.
‘용암을 먹고 산다더니…….’
내려오면서 벽면을 잠시 살펴보았는데 자연적으로 생긴 구멍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비정상적인 토굴이 수백, 수천 개가 된다는 것부터가 수상하여 살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열심히 갉아먹으며 파내려 온 듯한 모양이 역력했다. 아마 운카라라는 녀석이 용암을 먹기 위해 지상에서부터 열심히 파내려 간 흔적으로 보였다. 아마 이 끝에는 운카라라고 하는 종족이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시안은 내려가던 도중 자신의 기감이 점차 넓어지는 것을 느끼고 이채를 띠었다. 결계의 작용을 하던 연기가 내려갈수록 일반적인 연기로 바뀌고 있었다.
‘와…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놓은 거지…….’
보아하니 아래에서 올라오던 연기에 권능을 심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시안은 그런 게 있는 줄은 느끼지도 못 하였다. 그저 연기의 변화를 보고 그런 게 있겠구나… 라고 추측하여 알아냈을 뿐.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시안은 루크라의 신관이 왜 웃었는지 서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확장된 기감에 바닥이 감지된 것을 느끼고 서서히 속도를 줄인 시안은 사뿐히 벽면에 몸을 고정했다. 혹시 드라쿤들이 경보장치를 해놓지 않았을까 했는데 이제까지는 그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별문제 없군… 하긴… 이런 곳에 누가 기어 들어 오겠나.’
시안은 실소를 흘리며 자신의 기감에 잡힌 운카라를 살피었다. 토굴의 아래는 운카라가 헤집어 놓은 곳으로 새어나온 용암으로 완전 용암바다였고, 운카라는 그 사이를 열심히 헤엄치며 돌아다니며 꾸역꾸역 용암을 삼키고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한 마리의 애벌레를 닮았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크기에 표피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용암에 견디기 위해서인지 마치 강철과도 같은 갑주로 덮여 있었다. 그런 갑주 사이로 삐죽 수백 개의 굴뚝 같은 구멍이 솟아 나 있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운카라에게서 새어나오는 연기는 아직 결계로서의 권능이 스며들기 전이라 그런지 아래로 내려오니 감지범위가 훨씬 넓어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시안은 부담 없이 멀리서 운카라를 샅샅이 살필 수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로 안 강한데…….’
물론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용암에서 살아서 그런지 녀석들의 갑피는 기괴할 정도로 강하게 진화하였고, 둔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동속도도 상당히 빨라보였다.
하지만 시안에게 위기를 느끼게 할 정도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혹시나 하여 가까이 다가갔는데 분명 시안을 느꼈을 텐데도 불구하고 주둥이 근처에 달린 여덟 개의 더듬이 방향을 돌려 살짝 감지하기만 했을 뿐 딱히 공격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성격이 더럽다고 했는데 그건 자신보다 약한 녀석에게만 통용되는 말인지, 강자인 자신이 공격할 의사가 없어보이자 운카라 녀석은 식사에 치중했다.
‘허… 감도 많이 녹슬었나 보네…….’
시안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저 녀석이 약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괜히 죽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보다 시안은 정찰의 임무를 좀 더 착실히 수행하기로 결정하고 녀석을 내버려둔 채 땅을 뚫으며 다른 운카라를 살피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이곳저곳 땅을 파며 여러 운카라들을 살핀 시안은 결론을 내렸다.
‘음… 이번 임무는 아주 식은 죽 먹기겠구먼.’
시안은 이런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왔음에 감사했다. 운카라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비록 아래 땅굴망의 범위가 광범위했기에 연기로 인해 감소된 감지범위를 생각하면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결국 하나둘씩 처리하다 보면 무리 없이 끝날 것이다. 베타 때라면 감지범위가 좁아 힘들 수도 있었겠지만 알파인 지금이라면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괜히 아티팩트까지 만들어서 왔군. 이대로라면 바로 이곳으로 왔어도 됐었겠는데…….’
드드드드드드.
꾸웡!
룰루랄라 하며 눈앞의 운카라를 처리하기 위해 걸어가던 시안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진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운카라가 몸을 비틀며 미친 듯이 어디론가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시안은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감지범위를 늘려 보려고 하였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원인이 직접 나타났으니까.
쿠워웡!
부글부글 끓고 있던 용암 동굴 위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그 사이로 나타난 기형의 생물체가 거칠게 운카라를 잡아채어 오도독 씹기 시작했다.
꾸워웡!
그토록 두터운 갑피를 가지고 있던 운카라는 갑자기 나타난 괴생명체에게 오도독오도독 씹혀 나갔다. 괴생명체의 식사 과정을 시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살펴보았다.
두꺼운 집게발.
머리에 나 있는 더듬이.
연기 속에서 보이는 칠흙빛의 갑주.
전체적인 모습을 본 시안의 머릿속에 익숙한 생명체가 떠올랐다.
‘…가재?’
물론 생긴 것만 비슷하지 디테일부터 시작해서 덩치까지. 어딜 봐도 가재는 아니었다.
수십, 수백 미터 크기의 운카라였지만 방금 천장을 무너트리며 나타난 녀석의 덩치는 그보다 월등했다. 대가리만 빠져나와 있었기에 전체적인 몸의 길이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상체의 전체적인 모양새만 보아도 운카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두터웠다. 그리고 양손에 나 있는 집게발은 용암과 지하의 압력에도 수월하게 견디던 운카라의 갑주를 마치 비스켓처럼 부수어놓고 있었다.
녀석은 운카라의 갑주는 맛이 없는지 갑주를 모조리 박살 내 놓고 그 안쪽에 용암을 먹고 자란 연한 속살만 집게로 요리조리 파내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껍질을 들더니 그 안에 붙어있는 속살까지 샅샅이 핥아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만 보아도 땅속에 박혀있어 보이지 않는 녀석의 몸뚱어리가 적은 길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배 속에 그 큰 운카라의 속살을 모조리 먹어치워 버릴 정도의 공간이 있다는 뜻이니까.
시안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렸다. 녀석의 흉포함에 질린 것이 아니었다. 잡혀서 씹혀 먹히고 있는 운카라가 불쌍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모든 원인은 눈앞의 녀석의 강함 때문이었다.
‘이런 녀석이 여기까지 올 때까지 몰랐다니…….’
딱 보아도 엄청나게 강한 녀석. 최소 자신과 동급이고 그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동시에 시안은 왜 운카라들이 저런 기묘한 연기를 내뿜으며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빌어먹을… 왜 이런 연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나 했더니…….’
이곳에 오면서부터 이상했다. 모든 생물은 필요에 의해 진화한다. 땅굴 깊숙한 곳에서 굴을 파고 용암을 먹으며 자라나는 운카라들이 굳이 자신의 몸을 숨기는 연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며 돌아다니는 것이 수상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천적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운카라들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이런 연기를 뿜어내며 돌아다니는 것을 선택한 것이고.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면서 그런 생각을 살짝 하기는 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연기를 내뿜는다는 것은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겨야 하기에 그런 게 아닐까 라는.
하지만 시안은 악사라이를 믿었다. 악사라이에게 필요한 건, 권능과 이능에 높은 반응성을 가지는 그 연기였다. 그 연기를 뿜어내는 운카라가 필요한데 설마 그 강대한 악사라이가 운카라의 천적을 살려두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마 자신이 들은 이야기의 반의반만큼만 강해도 악사라이가 눈앞의 가재 녀석을 잡아 목을 비틀어버리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은 이곳에 오면서 천적의 가능성을 살짝 내려두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다.
스르륵.
운카라 한 마리를 게걸스럽게 삼킨 녀석은 시안을 발견하지 못 하였는지 자신이 무너트리며 나왔던 땅굴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시안 역시 살짝 몸을 빼내어 다른 운카라들을 죽이러 움직였다. 녀석은 보아하니 강대하긴 하지만 별로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살살 피해 다니며 운카라를 죽이면 될 것처럼 보였다.
시안은 가볍게 다른 운카라들을 향해 몸을 날렸지만 시안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맨 처음 이곳에 도착한 악사라이는 운카라를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지만 동시에 천적인 게슈탈이라는 종족의 존재 역시 발견했다.
아니, 종족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녀석은 어떻게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단 하나의 개체밖에 없었으니까. 생긴 걸 보니 어디서 튀어나온 변종인 모양이었다.
악사라이는 녀석을 죽일까 하다가 관두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필요한 건 연기를 만들어내는 운카라였지, 그냥 안전하게 살아가는 운카라가 아니었으니까.
악사라이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이 이렇게 땅속에서 용암을 파며 연기를 뿜어대는 이유가 다 저 녀석을 피하며 숨어 다니기 위해서 그런 것임을. 만약 저 게슈탈이라는 녀석을 죽여 없앤다면 운카라들은 천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저런 순도 높은 연기를 만들어 자신의 몸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지니 당연히 연기를 뿜어내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신의 권능이 연기를 결계로 바꾸어 주면 무엇을 하겠는가? 기반이 되는 연기가 없어지면 결국 자신이 세워놓은 결계도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악사라이는 운카라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저 게슈탈 녀석을 살려두었다.
여기까지가 녀석을 살려둔 이유 하나였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저 게슈탈 녀석은 이런 연기를 뚫고 운카라 녀석을 잡아먹기 위해 진화해 왔다. 지저세계 바깥, 연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서 녀석의 감지범위는 그 강대함에 비하면 형편없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지만 연기로 가득 찬 이 땅굴망 안에서 녀석의 감지범위는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비슷한 수준의 알파에 비해서도 더욱더. 땅의 진동과 연기의 흐름, 온도의 변화와 용암의 방향을 읽어 입체적으로 구름섬의 지저세계를 조망하는 녀석의 감지범위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게슈탈이 마음만 먹으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운카라쯤은 모조리 도륙 낼 수 있었다. 연기 이상의 감지범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먹을 것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슈탈은 적당한 숫자의 운카라를 맞추어 놓고 정기적으로 한 마리씩만을 잡아먹으며 운카라의 숫자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자신의 땅굴망 안에 자신의 먹이 외에 다른 존재가 침범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운카라들은 자신들이 파 놓은 땅굴망을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게슈탈은 이 구름섬 지하의 모든 땅굴망을 자신이 운카라를 키우는 양식장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구름섬은 게슈탈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평생연금과도 같은 장소이다. 그리고 게슈탈은 이런 자신의 영역에 식사 이외의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가만히 두고 보는 성격의 존재가 아니었다. 악사라이가 드라쿤들을 내버려두고 자신 혼자 내려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즉, 악사라이가 보기에 녀석은 이 운카라들을 지키기에 아주 적합한, 훌륭한 파수꾼이었다. 안 그래도 루크라들과 싸우느라 바빠 전력을 빼내기 귀찮았는데 녀석을 살려두면 알아서 이 결계를 지켜주는 파수꾼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시안은 자신이 게슈탈에게 걸리지 않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게슈탈은 시안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게슈탈이 시안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하나, 아직까지 시안이 운카라를 죽이지 않았으니 자신의 밥상 파괴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둘, 밥상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드잡이질 하기에는 피곤한 수준으로 강했기 때문에.
하지만 운카라를 건드린다면 게슈탈은 불법침입자를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안이 사라진 후, 무너져 내린 땅굴망의 위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게슈탈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마치 시안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듯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구름섬의 지저세계로 사라졌다.
“흐음…….”
시안은 땅굴망을 돌아다니던 중 서서히 자신이 이곳 환경에 적응되어 감을 느꼈다. 서서히 감지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무엇보다 시안은 땅굴망의 위아래를 돌아다니며 무엇이 연기를 결계로 변환시키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일정 범위를 중심으로 어떤 은밀한, 그러면서도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권능이 연기의 규칙을 바꾸어 아예 다른 물질로 만들고 그 위에 결계를 덧씌우고 있었다.
시안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이 구름섬의 한가운데에 악사라이가 권능을 남겨놓은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수천 년간 열심히 일정범위 안으로 들어온 연기를 결계로 바꾸어 하늘로 내뿜고 있는 것이고.
처음엔 몰랐지만 연기에 익숙해지고 결계의 기운에도 익숙해지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니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남겨 놨길래…….’
문득 위대한 존재가 남겼다는 힘의 흔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본인도 아닌, 본인이 남겨놓은 힘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기에.
‘허… 나도 무장은 무장인가 보네…….’
시안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정했다.
‘가보자, 다 끝나면.’
가까이 가서 보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상외의 상황이 생긴다면 바로 도망가야겠지만 보니까 게슈탈이란 녀석도 자신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운카라들도 처리하는 데에 별로 위험할 것 같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살짝 들러서 보고 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리라.
하지만 시안은 본래의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운카라이다. 결계가 유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를 충분히 줄여놓아야 한다.
시안은 늘어난 감지범위를 사용하여 가장 근처에 운카라가 있을 법한 위치로 몸을 날렸다.
‘그… 괴물 같은 놈은 없겠지…….’
시안은 운카라 주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녀석의 존재 유무부터 살폈다. 그런 녀석과 충돌하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까.
주변으로 기감을 최대한 살펴본 결과 녀석이 없음을 깨달은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녀석이라고 그렇게 미친 듯이 사냥을 하진 않겠지.’
시안이 생각하기에 운카라의 개체는 수백에서 수천 개체 정도였다. 많다면 많은 숫자였지만 아까 그런 녀석이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먹어치우고 다닌다면 멸종해도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운카라가 살아있다는 뜻 자체가 사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시안은 추측했다. 그렇다면 방금 식사를 끝낸 녀석은 다른 운카라들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사실 없으면 좋겠다고 믿는 거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시안은 조심조심 접근하다가 운카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잘 가라.’
그리고 손날을 세워 단번에 운카라의 목을 잘랐다.
크워웡!
목이 잘리고도 움직일 수 있는지 운카라의 떨어져 나간 머리 부분은 구슬프게 울부짖었고, 남겨진 몸통 부분은 시안을 공격하기 위해 사방으로 몸뚱어리를 휘저었지만 마지막 발악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로 시안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날뛰던 몸뚱어리는 주변의 용암바다를 휘저어 놓고 땅굴망을 반쯤 부숴놓은 다음에 점차 힘이 빠진 듯 용암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시안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휘휘 저었다.
‘이건 해야 할 일이다…….’
고개를 저으며 다음 운카라를 찾아 나서려던 그 순간 시안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기감 바깥에서 무언가가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녀석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까 그 가재를 닮았던 녀석이리라.
즈우우웅!
시안은 지체 없이 자신의 반지에 기운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지금 저 녀석이 문제가 아니다. 저 녀석과 싸우게 되면 자신의 본신 진력을 모조리 끄집어 올려야 한다. 그걸 드라쿤들이 눈치채지 못 할 리 없고, 결계의 축이 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녀석과 드잡이질을 하는 동안 드라쿤들이 날아와 이곳을 공격할 것이다.
맹렬한 기운을 먹어치우던 반지는 휘황찬란한 빛을 토해내며 시안의 몸을 집어삼켰다.
‘…됐다!’
혹시라도 반지가 작동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작동하고 있었다.
시안은 자신의 몸이 이동하는 것을 느끼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후… 그나저나 돌아갈 때는 어떻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시안은 일 초도 지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뭐야! 왜 아직 여기야!”
아까와 열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 다시 나타난 시안이 당혹스러운 음성을 내지르자마자 땅굴을 무너트리며 튀어나온 거대한 가재의 앞발이 시안을 매섭게 후려쳤다.
우드드득!
쿠구구궁!
게슈탈의 앞발에 두드려 맞은 시안은 땅굴을 박살 내며 더 깊숙한 용암바다 안으로 떨어졌다. 풍덩 소리를 내며 빠진 시안을 보며 게슈탈은 더욱 빠른 속도로 시안을 향해 접근했다. 우선 한 대 후려쳐서 잡은 우위를 놓칠 수 없었기에.
‘크헉…….’
시안은 울컥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피를 삼켰다.
용암바다의 온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불시에 두들겨 맞은 가재 녀석의 집게발이었다.
‘큰일이다…….’
한 대 맞아 보니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자신보다 강하다. 긴긴 세월, 운카라들을 잡아먹고 힘들 키워 온 저 알파 녀석은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물론 차이가 난다고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크게 두들겨 맞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이동으로 대피에 성공했다고 안심하는 바람에 저 큰 집게발에 고스란히 직격하고 말았다.
시안은 피를 삼키며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이렇게 한 대 뚜들기고 끝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당장 저 멀리서 집게발을 후려쳐 오는 녀석은 자신을 아까 먹은 운카라의 후식으로 먹겠다는 의지가 아주 단호해 보였다.
‘빌어먹을…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금 드라쿤이 문제가 아니다. 저 녀석과 싸울 때 안 걸리겠답시고 힘을 아끼면 당장 온몸이 박살 나며 죽어갈 것이다.
당장은 눈앞의 저 녀석을 처리하고 그다음 문제는 이후에 생각해야 한다. 빠져나가는 게 베스트이지만 지금은 녀석이 너무 가까이 왔다. 아마 자신이 빠져나가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시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믿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래… 내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갈 리가 없지. 제기랄! 애초에 이런 탈출도구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시안은 단순한 공간이동장치 하나만 믿고 이런 위험한 곳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시안은 이를 갈며 이제는 빛을 잃어버린 반지를 손에서 거칠게 뽑아 버리고는 이제까지 몸속에 가지고 있던 브록시안의 창을 뽑아 손에 들었다. 이제까지는 무기를 쓸 필요도 없었고, 제대로 다룰 자신도 없어 뽑아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고 자신은 불의의 일격을 맞아 불리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한다.
크워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던 녀석은 시안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 멈칫했다. 본능적으로 무기에 담긴 압도적인 힘을 깨달은 것이다.
덕분에 시안은 한숨 돌리고 내부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시안도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후… 역시 이건 내가 아직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지금 시안 입장에서 이 두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칼을 두 개 들고 휘두르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렇기에 그랑-라의 칼은 꺼내지도 못 하였다. 지금은 손에 들린 창 하나를 다루는 것만 해도 벅찼으니.
하지만 그 창을 손에 쥐는 순간, 시안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 무엇이든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까까지만 해도 지금의 상황이 죽음의 위기처럼 느껴져 실력이 쑥쑥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 창을 쥐는 순간 전혀 그런 위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편하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소리는 전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야…….’
악사라이도 그렇고, 브록시안도 그렇고… 그들이 남긴 유산만 해도 이 정도다. 그들 본신이 살아있을 때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뭐… 지금은 중요하지 않지…….’
어차피 이제 그들은 죽었다. 중요한 것은 이 힘으로 이제 저 녀석을 요리할 차례라는 것.
‘넌 죽었다, 이 가재 새끼…….’
시안은 이를 빠드득 갈며 녀석의 브록시안의 창을 들고 거칠게 가재의 머리를 후려쳐 나갔다. 그리고 시안이 상대하던 게슈탈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앞발을 휘두르며 1킬로미터도 넘는 자신의 거체를 모조리 동원하여 시안을 압박해갔다.
이윽고 운카라들이 살던 구름섬의 지저, 용암 땅굴망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모조리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거기에 살고 있던 운카라들 역시 모조리 그 힘에 휩쓸려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 ☆ ☆
<뭐 이런…….>
악사라이가 만들어 낸 결계, 아쿤-칼 위에서 루크라들을 지켜보고 있던 드라쿤들은 갑자기 저 먼 대륙, 뒤쪽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파장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듭난 존재끼리의 격돌이 아니면 퍼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이 멀리 떨어진 이곳, 대립지역까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저곳은… 저번에 땅개미들의 알파가 태어난 곳이 아닌가… 그 녀석은 분명 짐승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었을 텐데…….>
정신을 집중해 보니 그보다는 조금 더 뒤쪽으로 느껴졌다. 이 파동이 어디에서 퍼져 나오는지를 좀 더 명확히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드라쿤족의 1급 쿤, 카투라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새로 생긴,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지 못 하는 알파라면 저번에 땅개미 녀석들에게서 태어난 녀석밖에 없다. 저 녀석이 무슨 수작을 부려 이 안으로 다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투라는 이 사태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파동이 퍼져 나오는 곳이 결코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으니까.
<맙소사… 결계가 위치한 곳이 아닌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드라쿤들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뻗쳐 나오는 이 거대한 파장. 이 파장의 느낌만 보아도 지금 결계가 있던 구름산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는 뻔할 뻔 자였다.
<큰일이군… 모두 모여라. 우리는 여기서 루크라를 경계하고… 2, 3급 쿤들 중 여력이 남는 자들은 즉시 구름산 쪽으로 날아가라! 당장 가서 막아야 한다!>
어차피 파장의 격돌을 보아하니 4급 이하는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2, 3급 쿤들만을 모아 파견하기로 결정한 카투라는 자신의 판단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랐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결계가 무너지게 된다면… 큰일이 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카투라는 이를 악물며 자신과 같은 1급 쿤을 모아 루크라들을 경계하는 동시에 2, 3급 쿤들을 모아 저 너머, 결계가 위치한 곳으로 날려 보냈다.
☆ ☆ ☆
투앙!
‘굉장하다…….’
시안은 브록시안의 창을 휘두를수록 이 무기의 강대한 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창을 쓰지 않았던 시안의 판단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만약 드라고나에게 쫓길 때 이런 무기를 썼다면 공격은 좀 더 쉽게 받았겠지만 몸속의 계수 균형이 무너져 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따라잡혔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시안은 힘겹게 힘겹게 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은빛 가재는 그 이상으로 힘겹게 창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키에에에엑!
은빛 창이 허공을 가르며 가재를 후려치기 위해 날았다. 가재도 워낙 강했고 필사적으로 시안을 공격하고 있었기에 시안 역시 정타를 먹일 수 없는 거리였고, 따라서 견제의 의미를 담고 가벼운 찌르기를 한 번 선보였을 뿐이었다.
가재는 공격에 힘을 쓰다 너무 가까이 온 나머지 은빛 창을 온전히 피하지 못하고 살짝 그 위를 스치고 말았다. 분명 강하게 들어간 공격은 아니었다. 생채기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상처. 어찌 보면 상처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은빛 창이 가재를 스친 순간 마치 은빛 필기구로 칠흙빛 종이 위에 선을 그은 듯, 은빛 물질이 가재의 갑피 위에 묻어나왔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가재가 필사적으로 시안의 창을 피한 이유가 곧 드러났다.
키에에에엑!
엄청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가 들으면 가재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터져 나온 줄 알겠지만 가재의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은빛 창이 스친 가재의 표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 묻어있던 은빛 물질이 내는 기괴한 소리.
그곳에 묻어있던 은빛 물질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며 가재의 갑피를 맹렬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마치 검은 소금이 쌓여 있는 곳에 물을 뿌린 듯, 가재의 표면은 맹렬하게 녹아 사라졌고 은빛 물질은 그렇게 가재를 먹어치우며 환희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어느 정도 먹어치우자 더는 무리다 싶었는지 은빛 물질은 가재의 표면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다시 시안이 들고 있는 창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시안은 창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창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구나…….’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브록시안에게는 저런 알파의 시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지만 이제까지 브록시안과 싸운 알파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은빛 창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폭력적일 정도로 밸런스를 무너트리는 브록시안의 창으로 인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가재는 거침없이 시안의 손에 분쇄되고 있었다. 처음 달려들던 그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피한다고 피해보지만 녀석의 전신은 이미 은빛 창에 먹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시안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는 정말 도망가야 할 때이다. 한데 저 녀석은 저런 꼴이 되면서도 필사적으로 시안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직까지 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지 않으면 도주는 불가능하다. 이 창을 들고 있으면 몸에 부하가 걸려 오히려 이동속도 자체는 떨어지는 데다 저런 녀석이 발목을 잡으면 무시할 수 없기에.
‘빌어먹을… 좀 쓰러져라.’
가재와 시안, 둘 모두 마음이 타는 상태로 승부를 벌이는 가운데 신이 난 것은 오랜만에 먹어치울 것이 잔뜩 생긴 브록시안의 은빛 창뿐이었다.
승부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가재도 강하기는 했지만 창의 위력이 너무 사기적이었기에.
시안으로서는 어찌 보면 얻을 것은 모두 얻은 승부였다.
가재도 죽이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싸움의 여파로 구름섬이 모조리 무너지며 운카라들 역시 몰살당했다. 아마 악사라이가 만든 결계는 연기가 사라짐에 따라 서서히 사그라져갈 것이다.
은빛 창을 다루는 법도 익혔고 그 강대한 위력도 실감했다.
하지만 시안은 웃을 수 없었다.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시안은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저 멀리 하늘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시간을 끌어준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야…….’
어찌 보면 이것이 시간을 끌어 준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벌어주었다 해도 자신이 이미 탈출하기 늦었다는 것은 똑같았다.
저 멀리 다가오는 거대한 기파들을 보며 시안은 체념했다. 저건 창 하나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강함도 강함이지만 그 숫자 역시 일곱이나 되었으니.
그 순간 시안의 눈앞으로 선명한 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길을 본 시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길이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깨달은 시안은 지체 없이 그 길을 따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