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76화 (77/81)

<76. 잔존권능>

시안은 자신의 눈앞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길을 따라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지만 계속해서 의문이 떠올랐다.

‘…이쪽 맞아? 진짜로?’

이제까지 본능을 따랐다가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고는 있었지만 가면서도 점점 의문이 들었다.

저 멀리서 거침없는 기세로 드라쿤들이 날아오고 있는데 본능은 계속해서 구름섬의 중심으로 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 저기로 가면 어떻게 살 수 있다는 거지…….’

아무리 봐도 죽을 무덤자리 찾아 들어가는 거로밖에는 안 보였지만 시안은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어차피 바깥으로 도망치기에는 이미 글렀고, 공간이동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눈앞의 길을 따라가는 것밖에 답이 없다.

쿠구구구구궁!

어찌나 분탕질을 쳤는지 지저땅굴은 용암이 넘치고 사방이 무너지고 있었다. 단순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구름섬 전체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어찌 되었건 임무는 훌륭하게 완수한 셈인가…….’

운카라가 통째로 몰살당했으니 결계는 서서히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정의의 용사 역할을 마무리한 채로 죽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기에 빠르게 몸을 날렸다.

이윽고 시안은 눈앞의 길이 어디로 자신을 이끄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인가…….’

섬이 통째로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보인, 구름섬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슬. 주변의 땅이 모조리 무너지며 가라앉고 있었지만 붉은 구슬은 허공에 여전히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사방으로 은은한 빛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직경이 5미터는 넘어 보이는, 얼핏 보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붉은빛의 구슬을 보며 시안은 침음성을 흘렸다.

‘저건…….’

시안은 저것이 무엇인지 본 적은 없지만 단번에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연기를 기반으로 결계, 아쿤-칼을 만들어낸다는 악사라이의 권능.

저 구슬에는 그 권능이 담겨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길이 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수상한 곳 안으로?’

아무리 자신의 본능이 자신을 여러 번 살려줬다지만 이건 너무한다 싶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힘의 양을 살필 수 있었다.

가히 어마어마한 양. 이 정도면 차원을 찢고 이어붙이고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정도의 역도와 권능이 담겨있으니 대륙을 뒤덮고도 남을 결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루크라의 신관이 이걸 대신 부수겠다고 했을 때 비웃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저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에 시안은 뛰어들지 못 하고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자들과 마주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빈약한 시안의 상상력으로도 충분이 예상이 갔으니까.

<넌 누구냐?>

<아니, 그게…….>

<네가 운카라를 죽이고 결계를 부수었구나.>

<아, 그러려던 건 맞는데…….>

<죽어라.>

<으아악!>

‘제기랄… 빼도 박도 못 하잖아…….’

길가다가 도둑놈 취급 받은 게 아니라 도둑질하러 왔다 걸린 상황이니 할 말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기세와 살의를 뿌리며 날아오는 드라쿤들을 바라보던 시안은 눈을 질끈 감고 붉은 구슬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뛰어든 시안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을 가득 메운 거대한 권능은 파괴를 위한 힘이 아닌지 시안이 들어와도 시안을 있는 힘껏 갈아버린다거나 뭉개버리는 비인간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음… 생각보다 별일은 없네… 그런데 여기서 저 녀석들이 갈 때까지 기다리란 건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쉰 시안은 이번에도 자신을 살려준 본능에 감사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붉은 구슬 안은 생긴 그대로 딱 직경 5미터 정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깥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점. 기묘한 액체가 가득 차 있는 공간은 분명 붉은빛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시야에 제한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안은 저 멀리서 순식간에 날아와 도착한 드라쿤들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드라쿤들은 자신이 숨어있는 붉은 구슬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음이 급한지 서둘러 자신들이 날아온 방향으로 날아갔다.

<후… 다행이다.>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저들도 이 안으로 오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들 중 하나만 안쪽으로 들어와도 자신은 생사투를 벌여야 한다. 저들 모두가 들어온다면 결과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네… 저치들은 못 들어오나?>

생판 관련 없는 자신이 들어왔는데 악사라이와 같은 종족인 드라쿤들은 이 안으로 못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여 시안이 중얼거렸다.

<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꽤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거라.>

<……!>

시안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시안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당황하여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후… 그나저나 진짜 몇천 년 만에 의사표현을 해보는 건지 모르겠군. 어찌 되었건 반갑구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은 당황하다가 그 목소리가 인사를 해오자 얼떨결에 받아쳤다.

<뭐… 반갑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아무리 봐도 안 들리던 목소리가 들릴 이유는 이 요상한 곳에 들어온 것밖에 없어 보였기에 시안이 물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긴 뭐야, 네가 대형사고 친 거 내가 좀 수습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거지. 겸사겸사 목숨도 구해주고.>

그러자 시안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형사고라니요?>

머릿속에서 한심하다는 어투를 잔뜩 담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긴 뭐야, 이놈아. 니가 박살 내 놓은 결계지. 열심히 만들어 놨더니 이런 팔푼이한테 박살 나다니. 어이고…….>

시안은 머릿속의 존재가 누구인지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악사라이입니까?>

그러자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이놈아. 흐휴…….>

시안은 인상을 굳혔다. 이자가 루크라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자라니.

아니, 애초에 그런 자가 왜 자신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이 대형사고를 쳤다는 말은 무엇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던 시안은 입을 열었다.

<당신 입장에서는 대형사고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안 그러면 당신들 종족, 드라쿤들이 인간을 쓸어버리려고 했을 테니까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엄청나게 답답하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아이고, 그 라가오페라는 녀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팔푼이 새끼야, 너네 속은 거야, 속은 거.>

<…무슨 말입니까.>

시안이 표정을 굳히며 묻자 악사라이 역시 굳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녀석들을 가둬 두던 결계가 풀렸으니… 녀석들은 이제 튀어나올 것이다. 모조리 쓸어버리러.>

사실 시안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고 있는 바가 있기에 이런 계획을 실행하였다.

<그럴 수 없을 텐데요. 아무리 당신이 만든 결계가 사라진다고 하여도 루크라들은 위치상으로 드라쿤과 하리쟌들의 가운데에 있어요.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협공을 받을 텐데 극한의 산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포기하고 나올 수 있을 리가…….>

결계가 없어진다고 치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결계 때문에 극한의 산의 권능이 약해지면 지리적 이점이 없어져 결계를 부수려고 한 것이지.

그러자 악사라이가 인정한다는 듯 말했다.

<뭐, 그렇겠지. 네가 들은 대로라면. 그런데… 아… 설명하려면 귀찮은데. 그냥 직접 봐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물밀듯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안은 그 광경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 ☆ ☆

수천 년 전.

드라쿤들을 비롯한 각종 이종족들이 섞여서 살던 이 땅.

그 당시에도 드라쿤족은 다른 종족보다 훨씬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살아가는지라 다른 종족과 별로 얽힐 일이 없었던 터라 충돌 없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라쿤족을 이끌던 악사라이는 저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게 무엇이지.>

악사라이가 안력을 높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체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소유욕을 자극할 만한 아름다운 황금빛의 수정.

황금빛 수정은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더니 그들이 살던 구름을 뚫고 내려가 저 멀리, 현재 극한의 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내리꽂혔다.

황금빛 수정의 속도는 엄청났지만 크기는 크지 않았고 기이한 힘이 작용했는지 산봉우리의 위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겼을 뿐, 커다란 피해가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서 조사해 볼 까요?>

<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

생긴 걸 보아하니 절대로 자연적으로 생긴 물체는 아니었다. 아주 세밀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으니까. 악사라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빛 수정에 흥미가 생겼지만 저게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우선 드라쿤들에게는 접근을 금지시키고 멀리서 지켜보라고 명했다.

하지만 악사라이는 여유 있게 지켜볼 수만 없음을 곧 깨닫게 된다.

즈우우우웅!

황금빛 수정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그 수정을 중심으로 기이한 권역을 형성했으니까. 다행히도 그 권역은 저들이 떨어진 산만을 감싼 채 더 많이 넓어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재배치되는 기묘한 법칙들을 보며 악사라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기로 들어가면… 힘을 제대로 쓰지 못 하겠는데…….>

약한 녀석들일수록 저 안에서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 할 것이다. 황금빛 수정이 떨어진 후 저곳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대륙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 되었다.

그리고 황금빛 수정을 중심으로 기이한 권역이 설정된 후, 수정이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그 광경을 본 악사라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그마한 수정에서 웬 이상한 녀석들이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으니까.

<…처음 보는 놈들이로군.>

수정의 크기는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덩치가 큰 녀석들 수십, 수백 개체가 타고 있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기묘한 느낌을 흘리던 녀석들은 찌뿌둥한지 몸을 이리저리 피고 돌리더니 이윽고 권역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새로 떨어진 환경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들은 권역에서 사는 것에 익숙한지 수정을 중심으로 한 권역 바깥, 즉 자신들이 원래 살던 행성에 발을 내뻗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새로운 환경이 녀석들의 입맛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녀석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악사라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들… 저기서 뭐하는 거지?>

녀석들은 수정으로 돌아가더니 수정 안에서 조그마한 보석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현재 극한의 산의 남쪽 방향에 털털 털어 뿌리기 시작했다.

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고 악사라이는 그 변화를 처음부터 모조리 지켜볼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녀석들이 루크라였다.

루크라들이 뿌린 작은 보석들은 땅에 떨어진 이후에는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변화는 생겨났다.

보석을 중심으로 주변의 대기와 흙, 물 등이 맹렬하게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는 보석을 중심으로 천천히 뭉치더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뭉쳐있던 재질이 변하며 강인한 발톱과 근육, 튼튼한 피부와 날카로운 이를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지만 아주 단단해 보이는 하나의 뿔이 형성되었다. 형성된 육체에 피가 흐르고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흉포함이 깃들었다.

<크르르르르!>

작은 보석은 어느덧 훌륭하게 한 마리의 작은 짐승으로 변해서 사방을 보며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보석을 뿌린 루크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인지, 루크라들의 앞에서는 아주 얌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보석의 숫자가 굉장했기에 순식간에 주변의 재료를 모아 형성된 짐승들의 숫자는 물경 수천, 수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를 보던 악사라이는 혀를 찼다.

<저딴 거 수만 마리 만들어서 뭐하지? 애완동물인가?>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는 강했지만 머리에 뿔이 하나 달린 애완동물들은 너무 약했다.

하지만 루크라들의 행동은 아직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수정으로 가더니 안쪽에서 또 다른 종족을 꺼내 왔다.

그 모습을 보던 악사라이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뭐야… 저것들은 더 약하네…….>

악사라이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저 아래 떨어진 녀석들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특히 맨 마지막에 나온 녀석은 정말 강해서 자신으로서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렇기에 저런 수상한 짓을 꾸준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좀 만만해 보였다면, 그리고 저 권역이라는 것 안에만 숨어있지 않았다면 악사라이는 당장에라도 드라쿤들을 모아 저기 있는 녀석들을 털어버리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강한 녀석들이 데리고 다니는 것들이라고 보기에 방금 나온 짐승과 종족 녀석들은 너무 약했다.

악사라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차분히 그 꼴을 지켜보았다.

루크라들은 아직까지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하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환경이 불쾌하였는지 쉽사리 권역 바깥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보석을 중심으로 생성된 녀석들과 수정 안에서 나온 종족들은 달랐다.

보석을 중심으로 생성된 작은 짐승들은 이곳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져서 그런지 굉장히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쳐보였다. 어찌 되었건 그 짐승 녀석들은 지금의 극한의 산, 남쪽으로 쭈욱 퍼져 나가 사방을 살피고 정찰하였고 수정에서 생겨난 원숭이같이 생긴 녀석들은 그 짐승들의 엄호를 받으며 천천히 대륙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사라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 저기 있는 녀석들은 저 원숭이 녀석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작은 짐승 녀석들은 자신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었지 저기 남쪽 촌구석에 살고 있는 기존의 종족들 정도는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숫자도 워낙 많았고 흉포하기가 이를 데 없었기에 작은 짐승 녀석들은 순조로이 수정의 남쪽 부분을 청소해 나갔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원숭이 녀석들이 자리를 잡았다. 원숭이 녀석들은 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찌나 번식력이 강한지 짐승들이 청소한 자리를 메꾸며 순식간에 그 숫자를 불려나갔다.

그 와중에 다른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 뿔이 하나 달린 작은 짐승들은 다른 종족들을 먹어치우며, 혹은 꼬박꼬박 세월을 먹으며 강해져 갔다. 처음에는 모든 녀석들이 뿔 하나였지만 점차 뿔 두 개, 세 개, 네 개… 차츰차츰 그 뿔의 숫자를 늘려나갔다.

그 후, 악사라이는 저 녀석들이 저 원숭이 비슷한 녀석들을 무슨 용도로 데리고 다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식량이었구나.>

정확히 말하면, 루크라들이 먹지는 않았다. 녀석들이 ‘로’라고 부르는 종족들은 루크라들이 ‘나’라고 부르는, 작은 짐승을 닮은 녀석들의 식량이 되었다.

물론 워낙 허약한 녀석들이라 저런 녀석들을 먹는다고 강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짐승 녀석들도 기본적으로 생물의 형태를 띠는지 강한 것과는 상관없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모조리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 녀석들은 흉포함을 키우기 위함인지 풀이나 광물 같은 것을 먹어 생존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육식.

로라고 불리는 저 원숭이 비슷한 녀석들은 오로지 짐승 녀석들이 허기질 때를 대비하여 데리고 다니는 식량 종족이었던 것이다.

‘로’들이 이것저것 아무거나 주워 먹고 세력을 키우고 숫자를 늘리면 ‘나’들이 슬그머니 가서 잡아먹고 허기를 채우는, 그런 세월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녀석들이 보석을 뿌려 키운 작은 짐승 놈들은 더 이상 작다고 하기 미안할 정도로 그 덩치가 커졌다.

이걸 악사라이가 그냥 보고만 있었느냐, 하면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이미 드라쿤들과 루크라들은 치고받고 있은 지 오래였다. 녀석들이 내려와서 하는 수상한 짓을 본 이후로 악사라이는 도저히 저 녀석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 때문에 지속적인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루크라라는 녀석들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황금 칼을 휘두르는 그랑-라 녀석은 무식한 놈이 강하기는 어찌나 강한지, 자신과 맞먹을 지경이었다. 녀석과 싸우며 죽고 살고를 반복하며 자신과 그랑-라는 끊임없이 강해져 갔다. 녀석에게 특이한 특성이 있다면 자신 역시 전지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니.

게다가 질 것 같으면 잽싸게 자신들의 황금수정을 중심으로 한 권역으로 가서 숨어버리는데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아직은 대치상태이지만 악사라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지금 무언가를 기다리며 차일피일 승부를 미루고 있다는 것을.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도 권역을 중심으로 수비를 굳건히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악사라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역시 알 수 있었다.

<저 짐승 놈들이 커가길 기다리는 것이구나…….>

딱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기 있는 짐승 녀석들은 지금은 대부분이 여섯 뿔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 단계를 뛰어넘어 일곱 뿔이 된다면, 그리고 그런 녀석들이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면 이 균형은 단박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동시에 오랜 기간 루크라와 싸우던 악사라이는 왜 저들이 저런 기묘한 종족들을 데리고 다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루크라는 그 힘이 강대하기 이를 데 없지만 종족의 특성 때문인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도 싸울 때마다 수가 계속해서 줄어들면 결국 멸종될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해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하는 것도 큰 문제였고.

그렇기에 그들은 현지에서 조달하여 써먹을 수 있는 양산형 전투종족, ‘나’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양산형치고는 시간을 주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에 악사라이는 결단을 내린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

저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리고 저 짐승 녀석들이 착실하게 강해진다면 이 균형은 결국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이를 깨달은 악사라이는 현재의 구름섬에 와서 결계를 친다. 결계를 침으로써 나중에 브록시안이 나타나 대치상태가 깨질 때까지, 루크라와 드라쿤들의 상태는 아주 공고한 균형상태를 이루게 된다.

결계의 기능은 루크라들이 말한 내용과 모두 동일했다. 애초에 루크라들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결계였으니.

하지만 루크라들은 시안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의 기능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 ☆ ☆

<내가 만든 결계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녀석들의 지배를 방해하는 것이다. 원래 녀석들이 ‘나’와 ‘로’를 풀어놓고 기르던 땅까지 모두 루크라들의 영역이었지. 하지만 결계가 완성된 후 루크라 녀석들은 꼼짝없이 갇힌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배가 풀렸기에 너희들이 하리쟌이라고 부르는 ‘나’들이 루크라들 역시 가차 없이 공격했기 때문이지.>

<…….>

시안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라-시안 대륙에 살던 자신들의 종족과 하리쟌들이 결국 수천 년 전 루크라들이 와서 이 땅에 풀어놓은 종족이었다니.

게다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번에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잘했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녀석들은 기다린 끝에 ‘나’ 녀석들을 잘 키워 냈으니까. 그 드라고나, 크로나, 라이오나 셋이라면… 이 균형을 무너트리기에는 아주 충분하지. 그나마 결계가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이 다행일까…….>

<제기랄……!>

시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시안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악사라이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긴, 너희가 뭐… 그런 사정을 어찌 알았겠나. 그 교활한 신관 놈이 말한 그대로 했을 뿐인데. 어찌 보면 너희는 정말 최선을 다한 거지…….>

<라가오페 씨가 들은 말은… 거의 대부분이 거짓말이었군요.>

시안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자 악사라이의 음성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 거짓 반… 진실 반이지. 이것저것 섞어서 말해주었으니까. 자기들한테 유리한 대로. 그래도 그 녀석이 똑똑하긴 하구나. 결국 이렇게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계를 박살 내었으니. 후…….>

<신지의 권능이 약해지고 있다는 말도 거짓이었을까요?>

시안이 묻자 악사라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아마 그대로 내버려두었어도 대치상태는 계속해서 유지되었겠지. 하지만 대치를 깨트리기 위해 너를 만들어 낸 신관이 네가 컨트롤하기 힘들 정도로 힘을 키우고 있는 걸 볼 리가 없지. 그래서 이 기회에 결계도 박살 내고 드라쿤들의 힘을 빌려 너도 죽여 버리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

<그래서 내가 그렇게 이쪽으로 가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이런 얼빵한 녀석 같으니. 기어코 이쪽으로 기어 들어와서 결국 결계나 박살 내고… 얹혀사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제약되는구먼.>

시안이 악사라이의 음성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호라니요? 나는 그런 것 받은 적 없습니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말했다.

<내가 계속 이쪽으로 가면 위험할 거라고 협박했잖아? 평소에는 잘만 도망다니더니 왜 이번에는 바득바득 이 안으로 기어 들어와서… 흐휴…….>

<…….>

그제야 시안은 자신의 몸 안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던, 경고의 본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본능이 알리는 바에 비해 이번 일이 지나치게 쉽게 풀리기는 하였다. 본능의 외침은 이곳이 위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이곳의 결계를 부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쩐지 쉽다더만…….’

시안은 어처구니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혹시 이 구체 안에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더 어처구니없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거 완전 얼간이 아니야. 말이 되냐. 당연히 네 안에 있지. 이제까지 말한 것들이 지금 이 안에 갇혀서 알 수 있는 것들이냐? 다 네가 보고 들은 거 기반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

시안은 자신의 머리 안에 웬 대왕 기생충이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내 몸 안에 있었습니까?>

시안이 표정을 굳힌 채로 물어보았다. 분명 자신이 듣기로 악사라이의 접속자들은 알파가 되는 순간 몸을 악사라이에게 빼앗긴다고 한다. 그런 존재가 자신의 몸 안에 있다고 하는데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런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가 피식 웃으며 다시 목소리를 전했다.

<긴장 풀어라. 안 잡아먹는다. 잡아먹을 거였으면 진작에 먹었지.>

<…악사라이의 접속자들이 알파가 되면… 당신에게 몸을 먹힌다고 하던데요, 루크라들은.>

그러자 악사라이가 코웃음을 쳤다.

<넌 알파 아니냐? 넌 왜 아직 멀쩡한데.>

<…….>

<그거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애초에 그렇게 먹는 게 간단하면 일찍부터 내가 먹고 키우는 게 훨씬 낫지, 뭐하러 알파가 될 때까지 기다리나. 재능 있어도 될까 말까 한 게 알파이고 강해지면 오히려 먹기 더 힘든데.>

하지만 시안은 이 말을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루크라들이 보인, 악사라이의 접속자에 대한 경계는 어느 정도 진짜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루크라들이 접속자가 알파가 되는 것을 경계했습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말했다.

<뭐… 접속자가 알파가 되면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맞거든. 그게 접속자의 몸을 빌려서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신관 녀석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협박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겠지.>

시안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겁니까? 알파가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러자 악사라이가 말했다.

<너는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아니니까.>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반푼이 같은 능력으로 어딜……. 지금도 내가 남겨놓은 권능의 힘이 있는 장소이니 나의 힘이 증폭되어 너와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네 몸속에 들어있는 혼의 조각은 로르발이나 콘-라드라는 자가 가진 혼의 조각보다 더 작다.>

<…….>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가 웃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는 말아라. 혼의 크기가 작아 전지의 권능이고 이능이고 아무것도 못 하지만, 그래도 가장 핵심적인 능력을 발현했으니까.>

<…….>

<브록시안 녀석의 종의 피를 이어 그런가… 아니면 루크라들의 특성을 타고나서 그런가… 강해지고 싸우는 재능 하나는 타고났더구나. 내 혼도 네 녀석의 재능에 맞추어 권능이 발현했다.>

<음…….>

<혼의 크기가 작으니 전지의 권능도, 이능도, 아무것도 쓸 수 없지만 그것 하나는 꽤나 쓸 만하게 진화했더구나. 무식한 놈들의 피를 이어서 그런가… 허 참…….>

그제야 시안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이 수상한 길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강해지는 길.

이기는 길.

<이건 원래 당신의 능력이었습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긍정의 답변을 보냈다.

<뭐… 내가 살아있을 때 가장 믿던 권능 중 하나였지. 그게 너에게 이어졌구나. 축하한다.>

그 말에 시안은 악사라이의 혼이 언제부터 자신과 함께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길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자신에게 보였으니까.

<그러면… 쭈욱 나와 함께 있었군요.>

그러자 악사라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뭐… 정확히 말하면 네 부모님 세대부터 계속해서 혼의 파편을 전달해 오고 있었지. 너희 로만가가 그 전달자의 역할을 맡았다.>

<왜 우리 가문입니까?>

시안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인간종을 선택했다면 더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자신들의 가문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그러자 악사라이가 어이없다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뭔 소리야. 그냥 내가 그랑-라랑 브록시안, 그 개망나니들이랑 싸우다 터져 나갈 때 너희 ‘로’종 쪽으로 파편 하나 넘어간 거지. 너네가 뭐 특별해서 그런 건줄 아니.>

<…….>

<뭐…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 내 혼을 담아 전달하려면 원숭이들 피 안에 있을 인간종의 잠재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후손에게 보내야 했을 테니. 후손의 숫자가 많을 수는 없고… 혼의 파편이 없는 개체라면 잠재력도 혼의 파편을 가지고 간 개체에게 모조리 빼앗겼을 테니 태어나도 금방 죽었겠지. 그래도 그 덕분에 강했으니 남는 장사 아니냐. 자세하게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딱 네 수준선으로 정리했다.>

<아버지나 형은 나 같은 선은 안 보인다고 하던데…….>

<말했잖아, 너희 가문은 안 특별해. 네가 특별하니까 발현해 낸 거지. 너희 가문이 강했던 건 내 파편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파편을 옮기느라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한 명에게 몰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그 말에 시안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루크라의 피를 발현해 내 악사라이라는 자의 혼의 파편을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에 눈앞에 그런 선이 보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제는 너희 가문도 앞으로 평범해질 거다. 네가 내 혼의 파편을 발현하여 흡수하였으니…….>

그러자 시안이 맹점을 발견한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흥미롭다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오? 뭔데? 머리를 쓸 줄 알다니. 기특하구나.>

<…그렇게 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형은 시름시름 말라 죽어갔어야 했는데 엄청 잘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재밌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재력을 끌고 간 게 너라고 누가 말했느냐. 네 형은 사실 혼의 파편도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너에게 갈 잠재력까지 모조리 끌고 갔다. 만약 네가 루크라의 피를 개화시키지 않았다면 너는 말라붙어 죽어 있을걸.>

<…….>

<나도 살다 살다 너희 형처럼 재수 좋은 사람은 처음 봤다. 좋은 것만 딱 먹고 튀다니.>

<그리고 저처럼 재수 없는 사람도요. 후우…….>

시안은 이 기묘한 구슬 안에 박혀 요상한 목소리와 대화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중얼거렸다. 우째 한 번도 일이 잘 풀리는 적이 없었다. 죽을 뻔하여 쫓겨 다닌 적이 이번만 해도 몇 번째인지.

그러자 악사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건 좀 내가 미안하게 됐다. 나는 네가 좀 강해졌으면 싶었거든. 너처럼 타고난 놈이 몸을 사리다니. 그건 손해지, 손해.>

<…뭐라고요?>

시안은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해서 귀를 의심했다.

<아니, 나는 네가 좀 빨리 강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몸을 사리니 어쩌겠니. 일부러라도 밀어 넣어야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러자 목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별거 없는데? 그냥… 그 아펜탈이란 곳에 다른 접속자를 이용해서 널 거기에 집어넣은 거랑… 드라고나란 녀석이 남긴 껍질을 반드시 깨야만 할 것처럼 느끼게 한 거… 사실 넌 그때 도망쳐도 되긴 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그런 녀석 찾기가 흔치 않았거든. 상식적으로 패줘야 할 놈이 촉이 오는 게 말이 되니? 크하하하!>

<…….>

<아! 그리고 다시 아펜탈이 열릴 때 자고 있던 너를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준 거… 그것도 내가 참 잘 한 것 중 하나지. 그리고 로르발이라는 접속자 아이를 이용하여 너를 알파로 만들어 주도록 시킨 거 정도?>

<…….>

분명 몇 개 되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 몇 개로 인해 시안은 모조리 죽을 뻔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재수 없게 엮인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을 엮고 엮어서 자신을 그 안으로 처넣은 것이다.

<후흐흐… 라가오페라는 그 인간종은 계획을 세워놓고 실패하고 써보지도 못하고 그랬지만… 나 악사라이야, 악사라이. 내 사전에 실패란 없지.>

<…….>

<야, 너무 그렇게 뚜드려 패고 싶은 표정 짓지 마. 어차피 난 네 안에 있어서 손도 못 쓴다고. 그리고 내가 피해만 준 것처럼 보지 말아라. 도와준 것도 얼마나 많은데.>

<…뭐가 말입니까?>

<이상하지 않았느냐? 대북벽 너머로 가면 위험할 것을 느낀 게?>

<…….>

<알고 있다시피 크로나나 드라고나만 아니면 열일곱 그 당시에 너를 위협할 것은 대수림 안에도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크로나의 존재를 몰랐음에도 대북벽을 가기 싫어했지. 그게 누가 도와준 것이겠는가?>

<…….>

<스틸이라는 계집도 하도 못 찾는 게 안타까워서 내가 좀 도와줬지. 내가 아니었으면 네 형수라는 자가 있었어도 어찌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느냐.>

<…허, 어쩐지 너무 쉽게 찾아지더라니…….>

듣고 보니 그랬다.

<그래도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후련하지 않느냐? 여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네가 이런 걸 어찌 알았겠니.>

누군가를 정말 진심으로 패고 싶어진 적은 오랜만이었다. 말하는 꼴도 어찌나 얄미운지.

‘후… 진짜 맞을 놈이 너무 많아…….’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시안은 곧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차피 손 쓸 방도도 없는 데다 지금 시안의 머릿속은 다른 걱정이 온통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결계는 열심히 걷혀나가고 있을 것이고, 그 결계가 모두 걷혀나간다면 루크라들은 드라고나를 비롯한 하리쟌들을 조종하여 드라쿤을 칠 것이다. 자신이 강해졌다지만 드라고나, 라이오나, 크로나 셋을 동시에 상대하여 세력의 균형을 맞출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시안은 까불거리는 악사라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놀리려고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온 겁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니. 뭐… 일단은 너를 살리려고 이쪽으로 이끈 것이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해결책을 주려고 부른 것이지.>

시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해결책이라니요?>

<뭐긴,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 할 거 아니냐. 네가 결계를 부쉈으니 네가 원상태로 되돌려야지.>

<표현이 참 저렴하십니다. 무슨 수로요?>

<너도 오래 살아봐라. 그나저나… 뭐… 무식한 놈을 상대하는 방법이 뭐겠니. 무식한 방법으로 상대해야지.>

<……?>

<네가 강해져서 두들겨 패 주면 될 것 아니냐.>

시안이 무슨 말 하냐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음성을 토해냈다.

<그리 쉬우면 이 고민을 하겠습니까. 혹시 결계가 모두 풀릴 때까지 백 년 정도 걸립니까?>

그러자 악사라이가 어림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뭔 소리야. 한 달, 한 달이면 아마 다 날아갈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 튀어나오겠지. 루크라 녀석들… 개체 수가 적어서 몸을 엄청 사리거든. 아마 확실하다고 판단될 때까지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할 거다. 삼천 년 기다렸는데 한두 달을 더 못 기다리겠나.>

<…그러면 한 달 안에 저기 있는 드라고나, 크로나, 라이오나 셋을 동시에 두들겨 줄 정도로 강해지면 되는 거군요?>

<그렇지. 그렇게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은 좀 자제해 보도록. 어차피 내 목이 네 목이라고.>

시안은 혹시나 하여 악사라이에게 물었다.

<혹시… 차원을 비틀어 일 분의 시간으로도 수백 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겁니까?>

예전의 아펜탈을 떠올리며 시안이 혹시나 하여 물었다. 그런 곳 안에서 강해져서 나온다면 한 달이라는 시간도 남을 것이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긍정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있지.>

<오오!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을 땐 그 정돈 식은 죽 먹기였지. 그런데 넌 안 되지.>

<…어떻게 열화판이라도 못 만듭니까, 제 힘으로?>

그러자 악사라이가 비웃으며 말했다.

<넌 그냥 칼질이나 집중해라. 내가 네 몸 안에서 널 살폈는데 넌 정말 다른 건 재능 없어. 그냥 누구 패 주는 거에 집중해.>

<지금 그 패 주는 게 너무 힘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당장 패 주고 싶은 게 넷 정도 있는데 하나도 못 건드리고 있네요.>

<설마 그 넷이 짐승 셋에 나 하나는 아니겠지? 그리고 어차피 그런 편법으로는 안 돼. 그런 공간 만드는 게 힘든 건 아니지만 너 정도 강자가 들어가면 공간 자체가 무너져 내리거나 이곳 차원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게 되면 나도 진작 그런 공간을 만들어 놓고 수련했겠지.>

<하긴…….>

<그 대신 내가 아주 몸에 좋은 걸 준비해 놓지 않았느냐. 뭐… 너 주려고 남겨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먹어라. 그러려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니.>

<몸에 좋은 거라니… 설마…….>

시안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몸속의 악사라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변에 남겨놓은 내 피를 먹어치우고 그 힘과 권능을 소화시켜라. 그러면… 좀 봐 줄 만해지겠지…….>

‘…이 수상한 걸 먹으라고?’

시안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그는 악사라이의 설명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여기 있는 게 당신의 피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악사라이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래. 내 피에다가 내 힘과 권능을 담아 스스로 결계를 생성하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이지. 만드느라 공 좀 들였다, 한 번 만들어 놓고 신경 안 쓰려고. 이 정도면 꽤나 도움이 되겠지?>

<이 정도 피 뽑아내면 안 죽습니까?>

악사라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했다.

<야, 내 덩치가 얼마였는데. 이 정도 가지고…….>

‘하긴… 이자도 드라쿤이었겠지…….’

저번에 본 드라쿤들의 덩치는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몸이라면 피를 이 정도 빼낸다고 하여도 치명적이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허…….>

시안은 제안이 자신에게 너무 유리했기에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눈앞에 있는 힘은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모조리 소화해 내면 정말 강해질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강해질지는 먹어보아야 알겠지만.

하지만 머릿속의 수상한 존재 말을 덥석 받아들이기가 못내 찝찝하였기에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 수상하다는 표정 짓지 말아라. 사실 안 먹어도 상관없다. 그러면 뭐… 다 죽는 거지. 한 달 수련해서 그 드라고나랑 크로나… 이런 거 잡을 자신 있어?>

<…무리이지요.>

<그럼 뭐 답이 딱 나온 거 아닌가? 그리고 너무 의심하지 마라. 난 이런 천한 몸, 줘도 관심 없다. 내가 살아나려면 네가 필요해서 도와주는 거지.>

그 말에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피할 길이 없어보였으니.

<후… 어떻게 먹습니까. 설마 이걸 다 마시란 건 아니겠지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온몸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해. 그러면 내가 좀 도와주마.>

<알겠습니다.>

시안은 전신을 열고 피를 받아들이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그 순간, 붉은 공간을 가득 메꾸던 액체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한 액체는 이윽고 점점 더 거칠게 회전하더니 이윽고 맹렬한 속도로 시안의 근처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몸을 휘감아 치던 피는 시안의 몸속으로 차근차근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흡수되는 과정이 요란하다거나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조용히, 그러면서 찬찬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시안은 온몸으로 파고 들어오는 거대한 힘에 이를 악물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기랄…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기운인데도 이렇게 힘들다니. 만약 적대적이었으면, 그리고 자신의 몸 안에 악사라이의 혼의 파편이 없었다면 단번에 몸이 으깨졌을 것이다.

그리고 온 정신을 집중한 시안을 돕던 악사라이가 시안의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소화시키는 데에 좀 걸릴 거다. 그 전에 바깥에서 큰 사달이 나진 말아야 할 텐데……. 뭐,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지만. 양쪽 다 난리가 났겠구먼…….>

악사라이는 마지막 중얼거림을 마치고 시안을 돕는 데 자신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결계가… 무너지고 있다.>

드라쿤 종의 1급 쿤, 카투라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까지는 결계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이 권능이 부여된 연기를 뿜어내던 구름섬이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이렇게 되면 뻔하다.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결계가 완성된 이후, 루크라 녀석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져 이리 가지도 못 하고 저리 가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완전 상황이 달라진다. 녀석들은 자신들이 키워 낸 짐승들을 데리고 거침없이 이곳을 침공해 올 것이다.

<모조리 전쟁에 대비해라. 빌어먹을…….>

결계 없이 루크라에 짐승들까지 상대해야 하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카투라는 이를 악물었다.

☆ ☆ ☆

<결계가 풀렸구나. 크하하하! 그 ‘로’놈이 해냈나 보군.>

루크라의 신관은 호탕하게 웃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저 빌어먹을 결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게다가 드라쿤들이 구름섬으로 날아가는 것까지 똑똑히 확인했다. 그때 드라쿤들을 공격했다면 시안을 위해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곳에 가서 죽으라고 보냈는데 뭐하러 시간을 끌어준다는 말인가. 그 정도 숫자가 녀석을 공격했다면 녀석 역시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완벽하군.>

이제 저 바깥에서 말도 안 듣고 제 멋대로 자란 ‘나’ 녀석들을 앞세워 침공하면 정말 최소한의 피해로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오랜 시간 방목했지만 ‘나’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 있었으니까.

비록 조종권을 상실하였기에 먹이로 준비해 둔 ‘로’를 먹지 않고 서로 먹어치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6급 ‘나’는 별로 없었지만 7급 개체를 셋이나 얻었으니. 저 정도 개체라면 드라쿤들을 상대하는 데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해낸 녀석도 ‘로’에서 나온 개체가 아닌가! 여러모로 크게 이득이다.

황금수정의 열쇠가 사라진 이상 이제 자신들은 다른 거주지로 가지도 못 한다. 오직 이곳에서만 살아야 한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곳인데 드라쿤 같은 위험한 경쟁자들을 남겨둘 수는 없다.

루크라의 신관, 카툰-할은 어서 저 구름이 모조리 걷히고 무럭무럭 자란 ‘나’들의 지배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지배권이 돌아오는 순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바로 드라쿤 녀석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 ☆ ☆

“…뭐지?”

콘-라드는 갑자기 드는 기묘한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익숙한,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창이 자신의 눈앞에 떠올랐다.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아, 들리느냐? 아니, 보이느냐 가 맞겠구나. 어디서 이런 기이한 반푼이 같은 시스템이 접목된 거야… 내 아름다운 접속자 시스템에.]

“…누구냐?”

콘-라드는 처음 보는 <메시지>라는 창이 떠오르며 누군가에게서 대화가 날아오자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이런 건방진 놈 보소. 이놈도 그렇고 요 놈도 그렇고… 다들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구나. ]

“…….”

[딱 하면 알아채야지, 이 정도 하면. 네놈이 접속하고 있는 분 아니겠느냐.]

“…악사라이? 어떻게… 나는 아직 알파도 아닌데…….”

콘-라드는 당황했다. 악사라이라는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는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콘-라드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메시지는 날아왔다.

[이놈아, 지금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거기 있으면 너희 모조리 죽는다.]

“뭣… 갑자기 무슨 소리요?”

다짜고짜 메시지를 날리더니 너희는 이제 다 죽을 거라고 협박을 해대는 악사라이를 보며 콘-라드가 당황한 음성을 터트렸다.

[뭐… 별건 아니고. 너희도 루크라와 드라쿤… 알지? 좀 있으면 전쟁이 터진다. 아마 루크라들이 드라쿤들의 영역으로 쳐들어갈 터이니… 너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곳은 전쟁터가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희는 당연히 몰살이지. 아마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죽어나갈 것이다.]

“이런…….”

악사라이라는 존재의 말이 맞다면 인간종은 단박에 몰살당하게 된다. 굳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전투여파만으로도 대륙은 박살이 날 것이다. 그 위에 살고 있는 자신들은 당연하고.

[어서 너희들이 라-시안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인간들을 모조리 대피시켜라. 일단 그곳은 안전할 테니.]

“그건 불가능하오.”

[뭐? 너희 그 공간이동인가 뭔가… 그런 걸 개발하지 않았느냐? 그걸로 가면 되지.]

그러자 콘-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인간의 수가 너무 많소. 전쟁이 혹시 몇 년 정도 남은 것이오?”

[너희들 역법으로… 한 달 정도? 흠… 확실히 너희들에게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겠군.]

“…빌어먹을… 택도 없군.”

콘-라드가 이를 갈자 악사라이가 차선책을 내놓았다.

[그러면 너희들 말로… 그 최대한 극한의 산에서 가장 먼 구석으로 가서 숨어 있어라. 그 근처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그래야겠군, 시간이 없으니……. 그나저나 당신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거요?”

콘-라드가 아까부터 의문인 점을 물어보았다. 상식적으로 악사라이가 자신을 도와 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그러자 악사라이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뭐… 시안이라는 아이가 너희 걱정을 하더구나.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거라. 그리고 도망가란 말 하나 해주는 게 뭐 힘든 거라고.]

“…시안?”

콘-라드는 이마를 좁히며 되물었다. 악사라이 이자가 시안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런 콘-라드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악사라이의 메시지가 한 번 더 날아왔다.

[궁금한 것이 많아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 많은 대화를 하게 될 터이니.]

☆ ☆ ☆

쩌적!

붉은 액체로 가득 차 있던 구슬은 어느새 단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은 채 투명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안의 허공에 떠 있던 시안은 눈을 감은 채로 명상을 하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번쩍 눈을 떴다.

“후우…….”

시안은 권능을 완전히 흡수한 것을 느끼고 몸을 풀며 투명한 구슬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주변의 섬은 모조리 박살 났고 사방을 감싸던 연기는 모두 날아갔기에 사방은 발 디딜 곳 없는, 망망대해뿐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공중에 뜬 상태로 천천히 몸을 풀며 몸 상태를 점검하며 하나하나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보아하니… 사기 당한 건 아닌 것 같네…….”

온몸에 힘이 끓어 넘쳤다. 이렇게 날로 강해져도 되나 할 정도로.

[사기라니. 어린 인간 종자가 속고만 살았나. 맘에 들지?]

“…안 사라졌습니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시안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힘이 엄청나게 강해졌으니까. 내 혼 한 조각 정도가 자리 잡을 곳은 있지. 걱정 마라, 영원히 있지는 않을 것이니.]

“그… 부활이라는 것에 성공하면 이 목소리도 사라지는 겁니까?”

시안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들어보니 이자의 목적은 새로운 몸을 얻는 것 같았으니.

[그래. 그러니까 너도 나랑 평생 같이 살기 싫으면 더 열심히 부활을 도와야 한다. 솔직히 지금 너 나한테 받아먹은 게 있는데.]

“흐휴…….”

한숨을 내쉬던 시안은 갑자기 손을 쭉 내뻗으며 외쳤다.

“폭축!”

[…….]

대차게 내민 손이 뻘쭘해질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쇼를 하고 있는 시안을 보며 머릿속의 악사라이가 중얼거렸다.

[너, 뭐 하냐?]

그러자 시안이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거 사기 당한 거 아닙니까?”

악사라이가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담아 물었다.

[뭐가?]

“뭐… 이능의 지배자, 전지의 권능을 가진 자… 타이틀이 화려하지 않았습니까?”

[크… 그리운 별명이구나.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왜 그런 당신의 힘을 흡수한 나는 그런 거 못 씁니까?”

그 예전 로르발이 이능을 뻥뻥 사방으로 난사하던 것을 본 시안은 악사라이의 힘을 흡수하면 자신도 그렇게 멋드러지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헌데 힘을 흡수해서 이능의 이자도 발휘될 생각이 안 했기에 이상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기가 막힌 듯 머릿속에서 외쳤다.

[이런 생양아치를 봤나… 강해졌으면 되었지 완전 날로 먹으려고 하네. 내가 아까도 말하지 않았냐고, 넌 다른 데는 아예 재능이 없어. 아예 꿈도 꾸지 마. 게다가 네가 쓰려고 한 건 이능이 아니라 이적이잖아. 그나마 이능은 가능성이라도 있지. 이적은 네 머리로는 불가능하다.]

“제기랄…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그러자 악사라이가 투덜거렸다.

[불공평한 건 네 재능이고. 네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해진 녀석은 내가 본 적이 없다. 그 개망나니 브록시안 녀석도 네 발 끝에도 못 미쳤어, 네 나이에는.]

그 말에 시안도 뻘쭘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곳으로 주제를 돌렸다.

“뭐… 그나저나 별일 없었습니까? 우선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겁니까?”

시안은 힘을 다스리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악사라이는 이제까지 자신이 접속하고 있던 콘-라드를 통해 조사한 바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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