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전투>
악사라이는 시안이 깨어나자 이런저런 것을 말해주었다.
<현재 나는 전지의 권능을 쓸 수 없는 상태이다. 내 권능은 나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는 육체도 중요하니… 네 강함과 상관없이 네 육체로는 전지의 권능 대부분을 쓸 수 없지. 그 이외의 이능도 마찬가지이고. 어찌 보면 너에겐 다행이지. 가장 핵심적인 이능에 집중했으니까. 지금 하는 말인데, 네가 만약 이능 같은 걸 쓸 수 있도록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약했을 것이다. 네놈은 만 가지 잡기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지.>
“흠…….”
<뭐… 하지만 이럴 때 쓸모가 없는 건 변하지 않지. 따라서 네가 자는 동안 다른 접속자를 시켜 이것저것을 알아보았다.>
“잠깐. 그런데 지금 제가 얼마 정도 잠들어 있던 겁니까?”
그러자 악사라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2주다.>
“생각보다 많이 흐르진 않았군요.”
시안이 걱정했던 것은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엄청난 힘을 소화하느라 몇 년이 훌쩍 지나간 경우였다. 그렇게 되면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을 테고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 쳐도 사방에서 밀려들어오는 루크라와 하리쟌들을 상대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2주면 아직 결계도 풀리지 않았을 시점이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강해지지는 않았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런 시안을 본 악사라이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결코 넉넉하다고는 볼 수 없는 시간이다.>
“…음?”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악사라이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묻겠다, 어느 정도 강해진 것 같으냐? 네 몸이니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나도 네 상태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는 못 한다.>
그러자 시안이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드라고나 한 녀석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들으면 놀랐을 것이다. 알파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천 년간 수련하며 벽을 깨 온 드라고나를 때려잡을 정도로 강해지다니.
그 정도로 악사라이가 남긴 권능은 강대했다. 예전에는 쳐다보기도 힘든 녀석들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어떻게 하면 한 녀석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악사라이는 그 말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먹을 걸 줘도 결국 소화시키는 것은 개개인의 재능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시안 이 녀석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생판 남의 힘인데 저 정도로 먹어치우다니.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저 정도면 매우 흡족한 결과이다.
<권능을 모조리 흡수했구나. 생각보다 강해졌군. 걱정했는데 그 정도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겠다.>
“계획이 있으십니까?”
<힘이 모자라면 머리라도 써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우리는 전력적으로 열세이다. 그러면 당연히 계획을 짜야지.>
“…….”
<하여간 이런 무식한 놈. 하긴 너 계획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지? 그때 라가오페랑 나라샤 그 녀석들 개고생하던 게 아직도 생각나는구먼.>
‘다 지켜보고 있었구먼…….’
대화만 못 했지 안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안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원래 생긴 대로 사는 겁니다. 그나저나 계획이 무엇입니까?”
시안이 불퉁하게 말하자 악사라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우선 네가 빠르게 일어나서,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해져서 다행이다. 네가 자는 동안 나는 콘-라드라는 녀석을 이용해서 이것저것을 알아보았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살핀 것은 결계의 범위와 너희들이 하리쟌이라고 부르는 짐승들의 움직임이었지.>
“흠…….”
<현재 상태는 절대적으로 열세이다. 루크라와 드라쿤들의 세력 자체는 비등하지만 이제까지는 양쪽 모두를 공격하던 드라고나와 라이오나, 크로나가 루크라의 지배를 받는 순간 이 파워밸런스는 불공평할 정도로 심하게 무너지게 되지.>
“그렇겠지요.”
<게다가 루크라 녀석들의 신지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지. 아마 불리하면 그 안으로 그대로 도망칠 거다. 뭐…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녀석들이 타고 온 수정은 사용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수정이라면…….”
<네가 그 산 정상에서 본 수정 말이다. 그 열쇠가 되는 것은 네가 가지고 있다.>
그러자 시안은 그 열쇠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랑-라의 칼을 말하시는 것이군요.”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드라고나들에게서 도망칠 때 일부러 그 칼을 뽑지 않도록 했다. 무의식으로 그 정도 자극을 줄 수는 있었으니.>
“허…….”
<만약 네가 그 칼을 뽑았다면 루크라들은 너를 죽이고 그 칼을 가져갔거나 아니면 살살 구슬려서 가져갔겠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전력손실이다. 그 무식한 놈의 칼은 열쇠 기능 외에도 어마어마한 힘이 있으니.>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그랑-라의 칼을 제대로 써 본 적은 없다. 로르발 공작과 싸울 때 쓰기는 했지만 그건 썼다고 하기에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2주 전, 가재 녀석과 싸울 때 뽑아 썼던 브록시안의 은빛 창의 위력은 실로 경천동지였다. 그랑-라의 칼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무기. 이 무기마저 빼앗겼다면 지금의 상황은 더 절망적이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러자 악사라이의 우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내가 뒤에서 얼마나 너를 도왔는지 알겠지?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했단 말이다.>
“…….”
<그렇게 띠꺼운 표정 짓지 말고. 어찌 되었건 신지도 문제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이다. 그건 이기고 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으니까. 털리면 아무 의미가 없지. 그곳으로 도망가지도 않을 건데. 따라서 네가 지금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드라고나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 깨어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천만다행이다. 여유 있지는 않지만 이 정도라면…….>
“왜 그렇습니까?”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악사라이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직까지 결계가 모조리 걷히지 않고 루크라들이 드라고나들에게 지배권을 발동시키고 있지 않으니까. 루크라들은 어설프게 결계가 걷힌 상황에서 드라고나를 비롯한 짐승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껄끄러워하고 있다.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짐승 놈들이 지배를 받느니 미쳐 날뛰는 쪽을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지.>
“아하…….”
시안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짐승들이 자신을 지배하려는 존재에 대항하여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까지는 자신들도 공멸이 두려워 공격하지 않았지만 저 결계가 모조리 걷히고 완전히 지배당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상황이 두려워 차라리 루크라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루크라 입장에서는 정말 최악의 한 수일 것이다. 자신들의 병기가 자신들을 공격하게 되면 드라쿤들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으니까. 양 쪽에서 협공을 받게 될 것이다.
끄덕이는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가 말을 이었다.
<알겠지? 만약 결계가 모조리 걷히고 저 짐승 녀석들이 루크라의 아래에 들어가면 그때는 정말 손쓸 도리가 없다. 너도 그냥 드라쿤들에게 합류하여 같이 싸우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도 알겠지만 지게 될 것이다. 양쪽의 파워밸런스는 이미 허물어져 있으니.>
“흠… 확실히…….”
그 전쟁에서 이기려면 시안이 드라고나, 라이오나, 크로나 셋을 상대할 정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도 최소한. 아직까지 시안에게 그런 것은 무리이다.
<이제 너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루크라들의 지배를 받기 전에 무조건 그 수를 줄여놓아야 한다, 결계가 회복되기 전에. 최소 하나는 죽여야 하고 셋을 줄이면 베스트다. 뭐…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 말에 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보아도 셋 모두를 잡는 것은 무리이다.
“후… 그러면 어느 녀석부터 공격해야 할까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바로 대답했다.
<우선은 라이오나다. 그 녀석은 나머지 두 녀석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드라고나와 크로나, 루크라들은 서로 적대한다고 해도 그 위치가 너무 가깝다. 변수가 많지. 그나마 멀리 떨어진 라이오나가 사냥하기 유리할 것이다.>
“라이오나라…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그러자 악사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 녀석이 어찌 생겼는지는 모르겠군… 여섯 뿔 때는 보았는데 지금은 일곱 뿔이 되어 있을 테니…….>
“그나저나 녀석을 어떻게 찾지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머릿속으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잘 하는 거 있잖아.>
“…뭐 말입니까?”
시안이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악사라이가 결정타를 날렸다.
<뭐긴 뭐야, 맛있어 보이는 역할이지. 어서 미끼 될 준비해.>
“…….”
<내가 너 자는 동안 콘-라드 그 녀석을 시켜 이것저것 준비해두긴 했는데… 전지의 권능을 못 쓰니 한계가 있다. 녀석을 꼬시고 때려잡는 것은 온전히 네 몫이다. 어서 출발하자.>
“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악사라이의 말대로라면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시안의 말에 악사라이가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너희들 말로 대동해라고 불리는 곳이다. 현재 있는 위치에서 남쪽으로 쭈욱 내려가면 되겠군.>
대동해.
돈-나시안 대륙의 남쪽. 그리고 라-시안 대륙의 동쪽에 위치하는 거대한 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까지 이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많은 하리쟌들이 득실거리는 짐승의 바다이기 때문에.
그런 바다 위를 한 사내가 뛰어서 건너가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며.
덕분에 바다에 서식하던 흉폭한 하리쟌들과 어인족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흉폭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엉겨볼 만한 상대에 한정되었으니까. 지금 기운을 뿌리고 있는 존재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리쟌들은 이 기운이 사내의 전력이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알아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지만.
사내, 시안은 바다 위를 겅중겅중 뛰어가며 열심히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그 정도만 힘을 뿌려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머릿속에서 악사라이의 음성이 울렸다.
<그래. 이 정도면 라이오나를 적당히 자극하면서도 다른 두 녀석은 알아채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본신 기운을 모조리 뿜어내면 다가오지 않을 것이고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씨익 웃었다.
<그렇지. 어떤 면에서 보면 너에겐 행운이다. 만약 라이오나가 대수림을 건너 이곳으로 건너오는 너를 쫓지 않았다면 의심하여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리 봐도 이렇게 기운을 흩뿌리며 건너는 존재는 수상하니까.>
“음… 확실히…….”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이오나는 얼마 전 너를 보았지. 그것도 약한 상태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너를. 그때의 너는 전혀 힘을 감추지 않았다. 즉, 라이오나는 너를 그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며칠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강해졌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을 테니까.>
“그렇지요.”
시안도 이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이 이 정도 강해질 줄은 예상치 못 하였다. 자신도 그런데 라이오나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악사라이는 시안이 이해한 듯하자 마무리를 짓듯 이야기하였다.
<그 틈을 노린다. 오면… 죽여 버려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후… 말 안 해도 알고 있습니다.”
시안은 힘 조절을 하며 바다 위를 겅중겅중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라이오나는 몸을 회복시키며 중얼거렸다. 먹이 싸움이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거칠게 싸우기는 했지만 결국 목적이 되던 먹이 녀석이 홀랑 넘어가버린 탓에 목적을 잃어버린 셋은 김이 빠져 싸움을 중지했다.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아 어느덧 몸을 모두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로 간의 골은 더 깊어졌다.
<무식한 새끼들… 그걸 놓쳤잖아, 결국…….>
얼마 전 맛있는 먹잇감을 놓쳐버린 라이오나는 다른 두 녀석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그 녀석이 얼간이가 아닌 이상 숨어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쪽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잡을 수도 없다.
바다 밑 깊숙한 곳에서 몸을 회복하던 라이오나는 갑자기 자신의 영역 최외곽을 지나는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엉?>
라이오나는 지금 자신의 기감 안에 잡히는 녀석을 느끼며 이게 지금 현실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분명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녀석이 떡하니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녀석은 헐레벌떡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의심이 들었지만 고민은 짧았다. 무엇보다 녀석이 이대로 자신의 영토를 쭉 질러가는 경로의 끝은 크로나의 영역이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대로 크로나의 입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 되지, 안 돼.>
내가 못 먹어도 남이 먹으면 안 된다. 이것이 철칙.
라이오나는 자신이 머무르던 심해에서 거칠게 위쪽으로 쭉쭉 몸을 뽑아 올렸다.
☆ ☆ ☆
<온다.>
“어째 하나같이 단순하군요.”
<뭐… 본능에 충실한 것 아니겠나. 그리고 라이오나 입장에서는 네가 크로나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나름 심각하겠지.>
어찌 보면 계획은 간단했다. 바다를 건너 크로나의 대지 쪽으로 향한다.
만약 라이오나가 대동해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 꼴을 보고 있을 리 없으니 달려올 것이고 바다 위에서 끝장을 본다.
“그나저나… 그 덩치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군요.”
자신이 보며 느낀 것인데 같은 강함을 가져도 해양 하리쟌들은 육지에 사는 하리쟌들에 비해 그 덩치가 거대한 경우가 많았다. 라이오나의 모습을 확인한 적은 없었지만 그 거대한 드라고나와 크로나보다 크다면 정말 말 그대로 산이 움직이고 섬이 걸어 다니는 느낌이 들 것이다.
<글쎄다. 분명 여섯 뿔 시절일 때는 네 생각처럼 덩치가 크기는 했는데…….>
“음?”
묘한 말을 하는 악사라이의 음성에 시안이 의구심을 표했다.
<뭐든지 부딪쳐봐야 안다. 섣불리 판단하고 방심하지 마라. 너 지금 기감으로 덩치 찾으려고 그러고 있지? 그러다 지금처럼 한 대 얻어맞는다.>
떠억!
“커헉!”
<거봐, 분명 감지범위 안에 있었는데 다른 데 정신 파니까 제대로 못 피했잖아.>
시안은 물 아래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줄기를 급하게 피하다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스치고 말았다. 악사라이의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대비를 했기에 크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바다 밑에서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올라온 라이오나와 맹렬하게 치고받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아주 잠깐 치고받는 동안 이미 바닷물은 모조리 밀려나 증발해 나갔고, 그 범위 안에 있던 하리쟌들은 모조리 휘말려들어가 가루가 되었다.
흉험하기 그지없는, 격렬한 전투였지만 시안과 감각을 공유하는 악사라이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그 광경을 여유 있게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길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혼으로 인해 변한 시안의 육체였기에 딱히 자신이 도와줄 것은 없었다.
<그나저나… 변해도 너무 변했네. 저 정도면 인간형 사이즈잖아. 애 좀 먹겠군.>
악사라이는 시안과 치고받고 있는 인간형의 라이오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시안은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촉수를 뻗어오는 라이오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외모에 잘빠진 몸매. 길가다 만났으면 분명 한 번쯤은 돌아보았을 법한 생김새.
하지만 지금은 그 잘빠진 몸매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덩치가 크면 창을 휘둘러 맞힐 공간이 많을 텐데 덩치가 작은 데다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브록시안의 창은 번번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게다가 겉모습은 얼핏 인간을 닮았지만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촉수와 흐물텅거리는 회피동작은 상대가 명확히 다른 존재임을 시시각각 시안에게 인지시켜 주고 있었다.
‘말이 되나, 이게 진짜!’
시안은 사방팔방에서 자신의 경로를 봉쇄하며 날아드는 촉수를 피하며 이를 갈았다. 분명 악사라이가 자신의 기억 속으로 보내 준, 악사라이가 기억하던 라이오나의 모습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기억 속에는 분명 드라고나보다도 큰 개구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조막만한 촉수 괴물이 아니라!
그래서 변해보았자 거대 괴수 두꺼비이겠거니 하고 사방으로 감각을 펼쳐 거대괴수를 찾고 있다가 그만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작은 생물체를 보지 못하고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라이오나는 끝없이 촉수를 뻗어내며 시안의 전신을 노려왔다. 대처도 능수능란하기 그지없었다. 실력의 차가 크지 않으니 라이오나 입장에서도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할 수는 없었다.
브록시안의 창이 라이오나를 스칠 때마다 묻어나오는 은빛 물질은 괴성을 지르며 라이오나를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덩치가 작은 만큼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밀집되어서 그런지 브록시안의 창도 상대를 쉽사리 먹어치우지 못 하는 데다, 라이오나는 은빛 물질이 묻은 부분은 무슨 수를 쓰는지 몰라도 스스로 괴사시켜 몸에서 분리시켜 버리고 있었다.
덕분에 브록시안의 창은 라이오나를 제대로 먹어치우지 못 하고 있었다. 먹어치우려고 해도 은빛 물질이 묻은 부위를 정확히 괴사시켜 떨어트려 버렸으니까. 떨어져나간 부분은 순식간에 재생되어 차올랐고 라이오나는 아무 문제 없이 시안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시안은 브록시안의 창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고 이를 갈았다. 아직 두 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힘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과는 다르게 라이오나는 수천 년을 수련한 자답게 자신의 전신을 활용하는 데에 굉장히 능숙했다. 눈앞에는 끊임없이 길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하기에도 벅찼다.
그런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가 중얼거렸다.
<애송아, 그랑-라의 칼은 왜 안 써. 어서 그거 꺼내.>
그러자 시안이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며 외쳤다.
“아직… 두 개를 다룰 수준이 아닙니다. 정신만 산만해요.”
악사라이는 그런 시안을 보며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러면 아예 무기를 바꿔. 상대 덩치가 클 줄 알고 아무 말 안 했는데… 상성상 이런 경우에는 그랑-라의 칼이 더 유리하다.>
“…음?”
시안은 정신없이 싸우던 와중에 악사라이의 말을 듣고 강하게 브록시안의 창을 내지른 후 라이오나가 잠깐 물러선 틈을 타 브록시안의 창을 몸 안에 집어넣었다.
자신은 그랑-라의 칼은 제대로 써 본 적이 없기에 그 효과를 알지 못 한다. 하지만 그 칼의 주인과 직접 싸운 악사라이가 하는 말이라면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시안은 몸 안을 휘돌던 금빛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눈앞에 찬연하게 빛나는 금빛의 칼이 생성되었고 시안은 그대로 그 손잡이를 잡아 거칠게 휘둘러갔다.
라이오나는 갑작스레 바뀐 무기를 피하지 못 하고 스치고 말았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캬아아악!>
그랑-라의 칼이 스친 부분이 정말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위로 확산해가며 피살자를 잡아먹는 브록시안의 창과는 조금 달랐다. 그랑-라의 칼이 스친 부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재생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라이오나는 스친 부위를 끝없이 재생해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브록시안의 창이 스친 부위도 과감하게 떨어버린 것이고. 그 부위를 재생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랑-라가 스친 부위는 달랐다. 라이오나는 끝없이 그 부분에 대한 재생을 시도했지만 재생을 할 때마다 스친 부위는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브록시안의 창에 스쳤을 때처럼 아예 그 부분을 떨어내 버리고 새로이 재생을 하려고 했지만 마치 저주와 같이 그랑-라의 칼에 스친 부분은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그 탓에 라이오나는 재생을 시도하는 부위가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고통에 신음하며 괴성을 질렀다.
<저게 바로 그랑-라의 칼에 들어있는 저주다. 스친 부분은 끝없이 타오르지, 상대가 죽을 때까지. 화염처럼 번져 나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에너지를 뽑아다 쓰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나도 예전에 저 칼 때문에 정말 개고생을 했지.>
악사라이의 설명을 들은 시안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뭐 이런 흉악한…….”
브록시안의 무기도 그렇고 그랑-라의 무기도 그렇고 무기 자체가 흉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지 않니? 엄청 열 받은 거 같은데.>
“헉!”
무기의 위력에 놀라던 시안은 악에 받쳐 뻗혀 날아오는 촉수를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재생을 포기한 라이오나는 끊임없이 고통이 느껴지는 장소의 재생을 아예 포기하고 그 여력을 모조리 공격에 돌리고 있었다. 시안으로서도 전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시안은 다시 거침없이 그랑-라의 칼을 휘둘러가며 상대의 전신을 휘몰아쳐갔다. 상황이 조금 유리해졌다고는 하지만 방심할 틈은 없다. 시안은 이를 악물고 라이오나를 토막 치기 위해 체내계수를 조종하며 전력으로 맞서나갔다.
☆ ☆ ☆
크로나는 저 멀리서 휘몰아쳐 오는 거대한 기파에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무슨.>
하나는 굉장히 익숙한 기파였다. 이제까지 수천 년을 드잡이질 한 라이오나의 기파를 자신이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하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언가 익숙한 기파가 섞여 나오는 것 같았지만 크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얼마 전 자신들의 손에 쫓겨 목숨을 위협 당했다. 라이오나와 싸울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크로나는 자신들을 일대일로 위협할 만한 존재가 대륙에 있나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퍼져 나오는 충돌의 기파는 분명 라이오나와 대등하게 싸우는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로나는 눈을 번득였다. 지금이 기회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기세가 드라고나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 그렇다면 누가 이겨도 만신창이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이 크로나는 전혀 없었다.
아마 드라고나도 지금쯤이면 이 기세를 느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안 빼앗긴다.>
그때는 셋이라 균형이 맞았기에 크게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못 한다. 게다가 저번에는 맛 좋은 먹잇감이 하나였지만 이번에는 둘일 것이다.
크로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동쪽의 바다를 향해 날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헐떡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상태는 시안이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시안은 라이오나의 공격에 의해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크고 굵직한 상처만 해도 라이오나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에 비하면 라이오나는 아직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였다. 전신에서 그랑-라의 칼에 의한 상처가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생채기에 불과한 상처들이 많았다. 그런 상처가 전신을 골고루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재생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지 브록시안이 먹어치운 부분이 이제는 재생을 지속하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라이오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고 시안은 그런 라이오나를 맹렬하게 쫓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어딜 가나! 그때는 그렇게 열심히 쫓아오더니!”
라이오나는 미친개처럼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드는 시안을 피해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시안은 그런 라이오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라이오나가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고 하자 시안은 맹렬하게 그랑-라의 칼을 휘두르며 라이오나의 전신을 태우려고 들었다.
이기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상황은 분명 시안에게 불리했다. 계속 싸우면 시안은 진다.
하지만 시안은 라이오나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오래 버틸 필요도 없다. 이제 무엇이 날아올지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라이오나도 그 기운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다급했다. 라이오나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시안을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러고 있으면 우리 둘 다 죽는다!>
하지만 시안은 그런 라이오나의 다급한 음성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그랑-라의 칼을 휘둘러 라이오나의 전신을 파먹는 데에 주력했다.
라이오나는 당황하여 아까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안을 떼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시안은 그런 라이오나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는지 자신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달라붙었다.
상처가 심각했기에 얼마 더 버틸 수는 없었지만 시안은 시간이 자신의 편임을 자신하고 있었다. 저 멀리 맹렬한 속도로 날아드는 두 존재는 만신창이가 된 둘의 기세를 느꼈는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악사라이는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반쪽짜리 성공이군.>
원래대로라면 라이오나를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라이오나가 너무 강했다. 제대로 싸웠어도 아마 양패구상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싸우던 도중 계속해서 실력이 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회복되고 사용해버린 기운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왔다!’
시안은 저 멀리서 뿜어 나오는 보랏빛 섬광을 보며 거칠게 자신의 금빛 칼을 휘둘렀다. 금빛 칼을 경계한 라이오나가 떨어져나간 동시에 자신이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콘-라드에게 받아온 반지에 그대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낀 라이오나는 그제야 시안의 속셈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거칠게 울부짖으며 시안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너 혼자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라이오나는 공간을 쩍쩍 갈라내며 시안의 공간이동이 성립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시안 역시 그걸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안은 라이오나의 공격을 모조리 쳐내며 공간이동을 성립시키기 위해 끝없이 반지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어느덧 공간이동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본 라이오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물론 드라고나와 크로나 정도 되면 공간이동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그 문을 찢어버리고 쫓아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 남아있고 녀석만 도망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찢어먹기 바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녀석은 공간의 흔적이 휩쓸려 사라진 채 그대로 살아 돌아가게 된다.
빠드득!
라이오나는 이를 갈았다. 저 녀석의 뜻대로 되게 놓아둘 수는 없었기에.
<죽어도 같이 죽자, 이 개자식아!>
라이오나는 녀석의 몸을 휘감고 거칠게 따라붙었다. 우선 공간이동으로 같이 건너가면 녀석들은 먹을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공간을 찢고 쫓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저 녀석과 같이 죽을 수는 있다.
“헛!”
시안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게 칼을 휘둘러 맹렬하게 라이오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라이오나는 전신에 엄청난 상처를 입기 시작하였지만 결국에는 떨쳐내지 못하고 같이 공간이동이 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시안은 라이오나와 함께 공간을 찢고 이동하게 되었다.
<크흐흐! 같이 죽자!>
라이오나는 득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시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녀석의 표정을 지켜보기 위해.
하지만 시안의 표정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완수했다는 안도감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후… 한 놈 낚기도 참 힘드네…….”
<뭣……!>
라이오나의 의문 섞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이동은 완료되었고 그 자리로 크로나와 드라고나가 허겁지겁 날아와 도착했다.
<제기랄… 놓쳤나.>
크로나는 이를 갈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공간의 파동을 휘익휘익 저으며 녀석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를 찾아보았다. 어차피 두 녀석 다 만신창이이다. 건너가기만 하면 무조건 잡아먹을 수 있고 크로나는 그런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옆의 드라고나 녀석과 갈라먹을 수는 있으니까.
몇 번 휘저어 본 크로나는 그 녀석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깨닫고는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기에. 먹을 것도 없는데 굳이 드라고나 녀석이랑 드잡이질 할 필요는 없다.
드라고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 궁금하여 크로나의 뒤를 이어 공간을 휘저어 보고 크로나가 왜 포기하였는지를 단박에 깨달았다. 하지만 크로나와 같이 단번에 포기가 되지는 않았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공간 너머를 바라보다가 결국 무리임을 깨닫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나저나 라이오나 이 멍청한 녀석은 왜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간 거야…….>
라이오나와 그 적대종이 넘어간 공간의 좌표는 정확히 드라쿤들의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쫓아가면 이만저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드라고나와 크로나는 이를 갈며 자신들의 영토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키우우웅!
공간이동의 준비는 길었지만 이동은 순식간이었다. 시안은 황급히 자신을 타고 온 라이오나를 내팽개치며 자세를 잡았다. 가까이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녀석이었으니.
그리고 거리가 떨어지자마자 강대한 광선들이 사방에서 만신창이가 된 라이오나를 덮쳤다.
<……!>
시안의 공간이동을 망치기 위해 이미 무리한 상태였던 라이오나는 갑작스레 쏟아진 공격을 막지 못 한 채 그대로 죽어나갔다. 일반적인 공격이라면 아무리 만신창이가 된 라이오나라도 당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공격을 가한 자들은 대륙을 양쪽으로 갈라 서로를 박살 내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강대한 종족. 그 종족 중에서도 알파의 위치에 올라선 이들이다. 라이오나 역시 강대하긴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게다가 기습까지 받은 상태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결국 라이오나는 온몸이 불타오르며 죽어갔고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보석 하나만을 남긴 채로 세상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라-시안 대륙을 갈라 지배하던 세 짐승의 대장 중 하나였던 것치고는 굉장히 허망한 죽음이었다.
<수고했다. 그래도 어떻게 한 녀석을 잡아냈구나. 그리고 시체도 안 넘겼고. 성공적이다.>
“후… 운이 좋았지요.”
<운이라니. 다 이 몸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거늘.>
시안은 전투가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현재 시안이 있는 곳은 하늘 위에 있는 드라쿤들의 본거지였다. 드라쿤들은 자신들의 이능을 사용해 남아있는 연기를 모으고 뭉쳐 하나의 섬 형태로 만들었고, 그 위에서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드라쿤들의 본거지로 공간이동을 해온 것이다.
애초에 악사라이는 시안이 강해졌다고 해도 드라고나와 크로나들에게 들키지 않고 라이오나를 끝장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강하다면 굳이 각개격파를 시도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계획을 짰다. 우선 콘-라드를 시켜 공간이동의 반지를 하나 더 만들어놓게 하고 미리 드라쿤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인간이라면 그 연락 방법을 알 리가 없지만 악사라이는 드라쿤들이 따로 쓰는 통신 채널망을 알고 있었다. 콘-라드에게 그 채널망을 가르쳐준 후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드라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을 테니.
게다가 드라쿤들 입장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판국. 절대적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상대의 주전력 하나를 제거할 수 있는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처음에는 드라쿤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시안도 파워밸런스를 생각한 끝에 이 제안에 찬성했다. 라이오나를 죽이고 자신을 죽인다면 이들은 살아남은 드라고나와 크로나를 상대할 방도가 없다.
그럭저럭 계획이 성공했음을 느낀 시안은 우선 한 발을 내디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시안을 보며 거대한 동체를 자랑하는 드라쿤 하나가 나타났다.
드라쿤들은 기본적으로 덩치가 십수 미터가 넘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드라쿤의 덩치는 더욱 거대했다. 거의 20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시안은 이 존재를 처음 보지만 새로 나타난 1급 쿤, 카투라는 콘-라드라는 땅개미를 통해 이 존재에 대해 이미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위대한 신에 대해서도.
<악사라이시여, 그 안에 계십니까?>
“…어. 이거 뭐라고 해야 하나. 직접 이야기 못 해요?”
시안이 중간에 끼어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악사라이가 안될 것 없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다.
<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아라.>
“음… 이렇게요?”
시안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손을 내뻗어 카투라의 머리로 향하는 시늉을 했다. 카투라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들었는지 높이 위치한 자신의 머리를 내려 시안이 그 위에 손을 얹을 수 있게 하였다.
이윽고 악사라이가 영파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구름에 올라탈 자격을 가진 아이, 카투라여. 오랜만이다.>
그러자 카투라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저 표현과 이름을 아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영파에서 굉장히 익숙한 기세가 실려 나왔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자신들의 왕.
<악사라이시여! 부활에 성공하셨군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완전한 부활은 아니지. 아직 이 안에 갇혀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네가 도와줘야겠다.>
<명하십시오.>
이윽고 악사라이는 카투라에게 이것저것을 명하기 시작했고 시안은 그 대화 내용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