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79화 (80/81)

<79. 뒤통수>

저 멀리서 뻗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섬광을 본 스틸은 못내 불안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대수림이 무너지고 그곳에 바닷물이 들어차면서 새로 생긴 지형, 대수해.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하늘산맥.

이 두 지형으로 인하여 라-시안 대륙과 돈-나시안 대륙은 지리적으로 거의 갈라지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두 지형을 넘어서서 뻗쳐오는 거대한 섬광들은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돈-나시안에서 터져 나온 섬광은 다시 한 번 스틸이 머물고 있는 라-시안 대륙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스탄탈 씨,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입니까?”

안에 있다가 달려나온 리안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멀리서 일어나는 거대한 힘의 파동은 일찍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 예전, 제국을 한방에 날려버렸다는 대이적이라 해도 저 정도의 파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신들의 결전이 벌어지면 생길 것 같은 거대한 파동들.

그런 파동이 수십, 수백 개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데 기감에 민감한 무장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경지가 높을수록 예민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돈-나시안 대륙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기의 파장들은 라-시안 대륙의 무장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스틸은 리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리안은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얼마 전 대수해가 생긴 것도 그렇고… 세상에 멸망이라도 할 것 같군요.”

대수해 때도 공포스러웠지만 이번 사태는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동시에 리안과 스틸, 둘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동생이 멀쩡할까 의문이네…….’

스틸은 여행을 간다하고 대수해 너머로 사라진 시안을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빌어먹을… 이 애송이는 아직 크로나 못 이겼나…….>

악사라이는 눈앞의 드라고나를 밀어붙이며 이를 갈았다. 콘-라드라는 녀석처럼 커다란 혼의 조각을 가진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알파로 재탄생한 후 그 혼을 드라쿤에게 옮겨 담았다면 눈앞에 있는 도마뱀 정도는 순식간에 찢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파로 재탄생한 시안이라는 녀석 안에 들어있는 혼의 조각은 너무 작았기에 드라쿤의 몸으로 옮겨 담아도 전지의 권능과 이능을 온전히 모두 사용할 수 없었다.

눈앞의 도마뱀 녀석이 자신의 앞에서 건방지게 이능을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현재 자신의 힘이 모자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힘이 온전했다면 드라쿤을 제외한 다른 종족이 이능을 쓰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모두 자신의 통제 아래 있었으니까.

더 건방진 것은 그 이능을 감히 자신을 향해 쏟아붓고 있다는 점.

<크아아!>

드라고나가 자신에게 쏟아붓는 붉은 번개를 공간을 얽어매어 저 멀리 날려버린 악사라이는 건방진 녀석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

따아악!

<크워웡!>

<커헉!>

뺨을 맞은 녀석은 그대로 턱이 돌아가며 저 멀리 날아갔지만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맞는 동시에 꼬리를 휘둘러 악사라이를 후려친 드라고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끄윽…….>

하지만 드라고나는 곧바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배에 꽂혀 있는 검은 무언가로부터 엄청난 고통이 몰려들어 왔기에.

<언제 이딴 걸…….>

필사적으로 배에 박혀있는 검은 기둥을 뽑아내려고 하는 드라고나를 저 멀리서 악사라이가 날아와 후려쳤다.

<고통과 죽음을 형상화하여 모아놓은 거다, 이 자식아. 천박한 네놈이 언제 이런 이능을 구경이나 해 보았겠느냐.>

<끄윽…….>

<죽… 이런 제기랄!>

드라고나를 압박하여 끝장내려던 악사라이는 저 멀리서 날아온 섬광을 피하며 이를 갈았다.

섬광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루크라의 전사 중 한 녀석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드라고나가 밀리면 자신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고 이쪽까지 싸움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이대로 섞이면 개싸움이 된다.

<이제 전사 수준도 아니군… 골치 아픈데…….>

죽음의 위기를 겪고 살아난 녀석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이대로 신지로 숨어 들어가면 필히 귀찮아지리라. 이대로 가면 드라고나를 끝장낼 수 있었지만 루크라 녀석들은 그걸 허락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실제로 살아남은 드라쿤들로는 강해진 루크라 녀석들을 상대하기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기에 악사라이는 이를 갈며 살아남은 드라쿤들과 힘을 모아 잔존해 있는 루크라와 드라고나를 압박해갔다.

점차 양측의 피해가 커지는 상황에서 악사라이는 이를 갈았다.

<이 애송이 자식… 큰소리 뻥뻥 치더니… 아직도 크로나를 못 끝내고 뭐하는 거야.>

시안 녀석이 크로나만 끝장내고 이곳을 도와줬다면 이럴 필요도 없다. 순식간에 드라고나를 격살하고 드라쿤들과 합류하여 남은 루크라 녀석들을 끝장낼 수 있었으리라.

혹시나 하여 시안 쪽을 바라보았지만 시안 역시 상당히 힘든 상태인지 숨을 헐떡이며 크로나와 치고받고 있었다. 당분간 저쪽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니, 혹시나 시안이 지기라도 한다면 균형추가 저쪽으로 기울게 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그 전에 이곳의 싸움을 종결시켜야 한다.

악사라이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지고 있는 모든 이능을 개방하여 살아남은 루크라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 새끼… 설마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저기 밀고 밀리며 싸우고 있는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는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악사라이는 며칠 전, 시안이 콘-라드를 찾아간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시안이 찾아간 콘-라드가 보고 듣는 것은 여전히 자신 역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혼의 조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악사라이는 시안이 거기서 공간이동의 반지를 받은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멍청한 놈일세… 내가 도망가게 놓아둘 리가 있나…….>

공간을 비틀어 공간이동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자가 행하는 이적이라면 모를까, 콘-라드 정도가 만든 공간이동은 숨만 쉬어도 멈추게 할 수 있다.

만약 녀석이 도망가려고 하면 무조건 못 도망치게 방해할 것이다. 녀석이 도망치게 되면 완전 계획이 틀어지니까.

<그러고 보니… 끝나고 그 혼의 조각도 삼키러 가야겠군…….>

지금은 새로 얻은 육체에 안착하느라 혼의 조각을 수거하러 가지 못 하였지만 끝나고 그 조각을 수거하면 힘이 강해지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건 이 대결을 이기고 나서 고민할 문제이다. 당장 이 결전에서 이기지 못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

하지만 악사라이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자신들 대부분이 만신창이가 되겠지만 결국엔 이길 것이다.

악사라이의 눈에는 힘겹지만 따라 할 수 있는 ‘승리의 길’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으니.

그 순간 악사라이가 예상치 못 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크아아앙! 어딜 가느냐!>

“으악!”

그 변수를 본 악사라이는 이를 갈았다. 이놈들은 자신만큼 강해서 전지의 권능에 걸리지 않았기에 예측도 하지 못 하였다.

<미친! 크로나를 이쪽으로 끌고 오면 어떻게 하라고!>

“아, 같이 좀 싸웁시다! 그렇게 밀리는 것도 아니에요. 싸우다 보니 이쪽으로 온 거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말하는 시안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지만 흘끗 크로나 쪽을 본 악사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나 쪽도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니, 밀려서 도망쳐 온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악사라이는 한숨을 내쉬며 시안을 한심하게 바라본 후 다시 이능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 도망 안 간 게 어디냐.>

“…알고 있었습니까?”

시안이 뇌까리자 악사라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아주 이쁘장한 반지를 챙기러 간 건 아주 똑똑히 보았지. 그래도 기특하구나.>

“허허.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시안은 싸우는 와중에도 민망한지 헛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갔다.

크로나와 드라고나, 시안과 악사라이. 드라쿤과 루크라들이 모조리 섞여 다시 한 번 힘의 평형을 이룬 전쟁터는 다시 한 번 혼란의 구렁텅이로 변해갔다.

“커흑…….”

<크아하… 하아…….>

시안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크로나의 목에 박힌 금빛 칼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악사라이는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두 동강을 내 버린 드라고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렇게까지 될 줄은…….>

악사라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변에 살아남은 드라쿤들을 바라보았다. 루크라들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드라고나와 크로나를 이용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크로나를 조종하던 루크라는 이미 자신의 손에 죽었지만 살아남은 크로나는 조종이 풀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악에 받친 상태로 끊임없이 살아남은 시안과 드라쿤, 악사라이를 공격했다.

그 결과 악사라이와 시안은 최종 결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리고 멸족을 피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드라쿤은 단 두 개체만을 남기고 모조리 죽어버렸다.

마지막 결전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멸족에 가깝다. 살아남은 둘도 저 멀리 쓰러져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후우… 그래도 이긴 게 어디입니까. 그리고 쓰러진 자들도 회복하면 되지 않습니까.”

<후… 그렇기는 하지.>

악사라이는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을 포함해 단 세 개체만이 살아남았지만 이제부터 다시 종족의 수를 번성시켜 나가면 그만이다. 다행히 자신들은 무성생식을 하기 때문에 적군만 없다면 금방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악사라이 자신이 살아났으니 드라쿤의 앞날은 밝다.

악사라이는 굳어진 표정을 피며 시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은가? 보아하니 만신창이인데… 이리로 오라. 체력을 되돌리는 이능을 걸어주마.>

그러자 시안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전신의 계수가 만신창이인데. 와 보아라.>

“여유가 없지 않으십니까?”

시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악사라이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여유가 없긴 하지만… 너에게 걸고 나에게도 걸면 되니까.>

“그렇다면야 뭐…….”

시안은 악사라이를 향해 힘 빠진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그대로 악사라이의 가슴에 손에 들고 있던 브록시안의 은빛 창을 꽂아 넣었다.

푸욱!

<커억… 이게 무슨!>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악사라이를 보며 시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유가 없다니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저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직 여유가 있다니까요.”

시안은 창에 힘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끄윽… 이 무슨……!>

악사라이는 자신의 전신을 먹어치울 기세로 달려드는 브록시안의 창에 대항하기 위해 얼마 남지도 않은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려 대항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안은 추가적인 공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추가적인 공격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내부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동시에 시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아직 이 정도의 여력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악사라이는 결코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시안이 다가올 때도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악사라이는 점차 안심하였다.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는 시안의 체내계수는 만신창이인 것이 확실해 보였고, 그렇기에 시안에게 죽음의 에너지를 쏟아 넣어 확실하게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의외의 일격을 맞게 되다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시안을 살핀 악사라이는 시안의 체내계수가 상당 부분 회복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멀쩡할 때의 전투력의 2퍼센트도 발휘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거의 0퍼센트에 가깝던 방금 전 상태와는 확연한 차이. 이렇게 몇 초 안의 짧은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악사라이를 보고 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 몸 안에 있었다면 알 거 아닙니까, 예전에 내가 한 수련법을.”

그러자 악사라이가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내뱉었다.

<네놈… 체내계수를 돌려서 일부러 억누르고 있었구나. 그것도 전투 내내.>

전투 중간에 바뀌었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수가 일관적이었고, 아주 작은 정도만 억누르고 있었기에 악사라이는 단지 시안의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수의 변화가 지금은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그렇기에 시안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전지의 권능이 완벽하지는 않지요?”

<대체 왜…….>

악사라이의 신음을 들은 시안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살아나면 날 살려둘 리 없으니까요.”

시안은 창끝에 힘을 주며 악사라이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계획했느냐?>

악사라이가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시안은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뭐…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라가오페, 루크라의 신관, 당신들…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자들이 계속해서 차례차례 내 뒤통수를 치고 나를 이용하려고 들 때부터요.”

<…….>

“궁금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계속 뒤통수를 맞을까. 내가 약한 편은 아닌데.”

<답을 알았느냐?>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절대강자가 아니기에 두려워할 존재가 있고, 내가 약자가 아니기에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 머리로 용케 알았구나.>

악사라이가 비꼬며 말했다.

약해서 이용가치가 없다면 속여서 이용할 만한 가치도 없다. 너무나 강하기에 두려운 것이 없다면 조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시안은 루크라와 드라쿤들 사이에서 정확히 그 중간에 위치하여 있었다.

“나는 모든 걸 알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잘 알아요. 하지만 라-시안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 휘둘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를 겁박할 만한 존재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 저를 이용할 수 있는 자도 없었지요. 하지만 세상이 넓더군요. 저를 위협할 만한 자들이 생기자 속절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더군요.”

휘둘리지 않으려면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거나.

시안은 자신이 후자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어찌 알고 대처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대륙에 오고 나서는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루크라와 악사라이, 라가오페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협박하여 자신을 항상 안전한 쪽으로 몰아갔고, 그 와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였으니까.

그래서 시안은 결정했다. 이번 기회에 모조리 쓸어내고 자신을 조종하려고 들 자들을 치워내야겠다고.

<…그래서 원인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든 것이냐? 네가 두려워할 만한 자들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당신이나 루크라, 둘 중 누가 살아남았어도 날 죽이려고 들었을 텐데. 왜냐하면 당신들 역시 미래의 날 두려워하니까. 사실 가장 큰 원인은 이것입니다.”

<…….>

“당신은 끊임없이 날 관찰했지만 당신의 자아가 생긴 이후로 나도 궁금한 걸 당신을 통해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중요한 건 하나였지요.”

<…무언가…….>

“과연 악사라이, 예전 신과 같은 권능을 자랑하던 당신과 당신 종족들은 과연 날 두려워할까, 아니면 하지 않을까. 이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악사라이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시안에게는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내가 두려웠지요? 너무나 빠르게 강해지니까. 사실 나는 악사라이 당신이 나보다 빠르게 강해질 것 같으면 그냥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약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

“하지만 내가 더 빠르더군요. 그리고 그때 느꼈습니다. 당신들이나 루크라, 하리쟌들… 그자들을 살려두면 결코 내가 강해질 때까지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내 말이 맞지요?”

<…그렇겠지.>

어차피 탈출이 불가능한 것을 깨달은 악사라이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브록시안의 창은 일절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버티며 시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솔직한 자세가 아주 좋습니다. 어찌 되었건 내가 좀 빠르게 강해진다고 해도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지요. 이 기회에 모조리 정리하지 않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 제 입장도 좀 이해해 주시지요. 죽이려는 판국에 이런 말도 웃기지만.”

악사라이는 얼토당토않은 시안의 말을 무시하고 곰곰이 고민하다가 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놈, 크로나와 싸울 때 일부러 시간을 끌었구나.>

“맞습니다.”

서로 균형이 맞아야 서로 간의 피해가 극대화된다. 시안의 목적은 루크라와 드라쿤의 공멸. 그러기 위해 시안은 찝찝함을 감수하면서 악사라이의 부활과 악사라이의 계획을 도왔다. 악사라이가 없다면 균형추가 맞지 않으니까.

결전에 들어서서는 시안은 일부러 크로나를 상대하며 질질 시간을 끌었다. 혹시나 루크라들이 유리해지면 빠르게 처리하고 드라쿤들을 지원해 균형을 맞추고, 드라쿤들이 유리해지면 크로나를 끌고 드라쿤들에게 그 공격을 돌리기 위해서.

그리고 시안은 끊임없이 체내계수를 조절하며 양쪽의 균형을 맞추어 나갔다.

결과는 악사라이가 보기에도 굉장히 훌륭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살아서 돌아갈 자는 시안 하나밖에 없어 보였으니까.

<머리도 나쁜 놈이… 싸우는 데는 아주 도가 텄구나… 후…….>

말이 쉽지 전장을 조망하며 양측의 균형을 정확히 맞추는 동시에 동급의 존재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보통 재주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당장 악사라이만 해도 그런 건 자신이 없었으니까.

끝없이 체내계수를 조절하던 훈련을 하고 전장과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에 둘 수 있는 존재만이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눈앞의 시안이라는 녀석은 그걸 해낸 것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비꼬는 악사라이의 말을 시안은 감흥 없이 받았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자신이니.

<공간이동 반지도 일부러 받으러 갔구나. 네가 도망갈 것으로 착각하라고.>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도망갈 생각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두 끝내야 하는데 도망가서는 안 되지요. 그냥 당신이 그렇게 오해해 주었으면 해서 받아왔습니다.”

시안은 악사라이가 자신을 얕잡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안 자신이 악사라이를 비롯한 드라쿤들을 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주기를. 그래야 의심받지 않기도 좋고 마지막에 쓸어버리기도 좋으니까 .

그렇기에 꼬박꼬박 수상쩍기 그지없는 악사라이의 말을 군말 없이 따랐고 반지를 받으며 자신은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겁쟁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악사라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내가 전지의 권능을 너무 믿고 있었구나. 이런 수도 예측 못 하다니…….>

“뭐… 유언 없으시지요?”

그러자 악사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죽여라, 그냥. 너한테 힘 싸움이 아니라 머리싸움에서 패배한 거 자체가 쪽이 팔리는구나. 세상에… 너한테 뒤통수를 맞다니.>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유언 비스무리한 투정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기력이 바닥난 악사라이는 통째로 브록시안의 창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시안은 그 창을 들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드라쿤들을 차례차례 정리하고 극한의 산 쪽으로 가서 남아있는 황금수정까지 박살 내었다. 찝찝한 것은 부숴놓는 것이 옳으니까.

이로써 인간종과 루크라, 드라쿤과 하리쟌들이 모조리 참전한, 대륙의 절반이 날아간 대결전이 끝났다.

그 결전에서 강대한 루크라들과 오만한 드라쿤들을 모조리 격살하고 시안 하나만이 살아남으며 인간종의 승리로 끝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전의 장소 위에 홀로 오롯이 서있던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진짜 끝이겠지… 집에 가야지, 이제.”

너무 열심히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대륙 내를 모조리 청소해 버렸으니까.

‘집에 가서는 이제 좀 편하게 지내고… 하고 싶은 것도 좀 하고…….’

시안은 앞으로의 계획을 이것저것 고민하며 그대로 손에 낀 공간이동의 반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우선 콘-라드에게 들러 사태를 대충 설명해 준 후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윽고 대륙이 있던,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바닷물이 밀려들고 있는 대파괴의 현장 위에 있던 시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맙소사, 진짜 해냈군요.>

라가오페는 통신기기 너머로 콘-라드와 대화를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 하였다. 대결전이 끝난 후 시안은 콘-라드를 통해 모든 것이 종결되었으니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

동쪽의 구름섬.

서쪽의 아펜탈과 악사룸.

북쪽의 게르나.

남쪽의 하리쟌들과 루크라.

하늘의 드라쿤.

이 모든 존재가 단 한 명의 존재에 의해 쓸려나갔다. 그리고 이제 대륙에는 오롯이 인간종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라가오페와 대화하던 콘-라드 역시 놀라움을 담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인간의 신과 같다. 결국 그와 대적한 자들은 모조리 쓸려나가고 말았구나. 그나저나… 넌 언제 돌아올 거니? 이제 시안 그 친구는 돌아간다고 하던데. 아마 이곳으로 올 것 같지는 않아.”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야겠군요. 이제 뭐, 재앙이 될 만한 요소는 사라졌으니… 공간이동 좌표 좀 열어주실 수 있습니까?>

“바로 오게?”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코어의 에너지는 충분하니까. 돌아가지요. 할 이야기도 많을 것 같고… 지금 로르발에 있지요?>

“그렇지. 시안 그 친구를 라-시안 쪽으로 공간이동 시키려면 그게 편했으니…….”

<그쪽으로 가지요.>

이윽고 로르발의 코어가 맹렬하게 진동하면서 법진이 가동하고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도착한 라가오페는 반갑게 콘-라드를 향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하하! 없는 동안 잘 지냈습니까.”

“흐흐… 잘 지냈지요. 안녕하십니까, 라가오페 씨.”

“…음?”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에 라가오페는 설마 하는 심정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라가오페는 이를 악물며 콘-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콘-라드… 나를 속이다니.”

“미안, 나도 살아야지. 이야기 잘 해봐.”

이를 악문 라가오페를 뒤로하고 콘-라드는 잽싸게 방 바깥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런 라가오페를 향해 시안이 천천히 걸어갔다.

“라가오페 씨, 반갑습니다. 가기 전에 그래도 심도 있는 대화를 해야 앞으로 오해 없이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으아아아…….”

시안은 웃으며 라가오페를 향해 다가갔고 라가오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괴상한 신음성만을 입 바깥으로 흘렸다.

☆ ☆ ☆

“다녀왔습니다.”

갑작스레 사라진 아들, 시안은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나타났다.

로만 백작을 비롯해 리안과 스틸, 그리고 형수와 조카들은 모두 갑작스레 성 앞에 떡하니 나타난 시안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몸은 괜찮고?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은 아주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디 갈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래도…….”

걱정하는 가족들을 보며 시안은 웃으며 그들을 끌어안고 안심시켰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가족들을 안심시킨 시안은 웃으며 그들을 데리고 크로티아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륙력 2022년. 시안 폰 로만, 집으로 귀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