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8화 (8/52)

8화– 누구도 가까이하지 못한, 비밀로 가득한2017.07.28.

“은소현 씨. 나, 장소 바꿀게요. 여기서 결혼식 하게 해줘요. 이 책방에서.”

이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지.

소현은 제 귀를 의심하며 하태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류재언의 낮은 한숨 소리가 아득히 환청처럼 들렸다.

“아, 그러니까, 어, 결혼식 장소는 하태랑 씨가 요청하신 레스토랑으로 섭외를 진행하고…….”

“거기 말고 여기요. 여기로 바꾼다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듯 하태랑의 음성은 확고했다.

소현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말이다. 망할 놈의 이 책방에서 벗어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이미 레스토랑으로 픽스한 것도 아니고, 아직 날짜도 좀 남았잖아, 지금 장소 바꾼다고 해서 안 될 이유가 뭐 있어요?”

“아, 그게…….”

여긴 개쓰레빠의 책방이니까요.

……라고 말할 수 없어 슬펐다. 다른 이유들이야 얼마든지 댈 수 있긴 하지만, 지금 소현에게는 서정한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였다.

“류 대표, 내 결혼식, 협찬 하나도 안 받고 진행하는 거 아니었어? 누구 눈치 보고 홍보해줘야 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런데 내 마음대로 장소 선택도 못 해? 이거, 내 결혼인데?”

하태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결혼의 주인공은 하태랑. 당사자도 하태랑이었다.

소현은 류재언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해냈다. 상대가 하태랑인지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류재언에게도 갑인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하태랑이 아니었던가.

재계약이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왠지, 쌤통이다.

“은소현 씨?”

“아, 네?”

하지만 소현은 류재언의 수난을 고소해하는 감정에만 집중할 수 없어 진정 안타까웠다. 이 순간만큼은 류재언과 한배를 탄 상황,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결혼식 하게 해준다면서요. 그게 은소현 씨 일이고, 바라는 바라고 했었죠?”

그랬다. 그뿐인가. 자신 있으니 마음 놓고 맡겨달라고도 했었다.

소현은 그렇게 목 놓아 부르짖었던 과거의 자신을 엄벌에 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태랑의 결혼식만 진행하면 인생만사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 착각했던 어리석음이 죄라면 죄였다.

“그런데 하태랑 씨……? 하하하, 그게, 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으니까요.”

“왜 안 되는데?”

어디 이유를 들어나 보자는 얼굴로, 그러나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표정으로 하태랑이 팔짱을 탁 끼었다.

소현은 침을 꼴깍 삼키며 류재언과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 책방과 더 이상 엮이는 건 절대 안 돼.’라는 동일한 목적의식과 공동의 목표가 존재하였다.

“하태랑 씨, 일단 여기가 결혼식 장소로는 너무 협소하고…….”

류재언이 끄덕이며 지원사격에 나서기도 전에 하태랑이 먼저 치고 나왔다.

“여기? 협소하다고? 오히려 그 레스토랑이랑 크게 차이 없는 것 같은데요? 정원도 있어서 더 좋고. 그리고 어차피 극비 결혼이잖아. 하객으로는 직계 가족만 올 건데, 이 정도면 전혀 안 좁지. 다시 봐봐, 딱 좋아요. 그쵸?”

반박 불가.

“아, 뭐……, 그렇긴 해도 여기가 아무래도 책방이다 보니 결혼식을 진행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음식을 케이터링으로 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시설이 있고, 또 하객 분들이 아무리 소규모라고 해도 최소 열 분에서 최대 스무 분은 오시는데. 그만한 인원을 수용하려면 주차나 화장실 같은 시설 문제도 있어서, 생전 행사를 하지 않던 장소에서 갑자기 결혼식을 진행하려는 건 좀 무리가 있으니까요.”

스몰 웨딩 디렉터로서,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작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기획하는 것이 소현의 당찬 포부였다.

그러나 그녀의 원대한 꿈은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수없이 무너져왔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은 신랑 신부만의 일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었으니까.

……현실, 그놈의 현실.

그런데 지금 하태랑 앞에서 시설이 어떻고 장소가 어떻고 그래서 여기는 문제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려니, 소현은 매우 씁쓸해졌다.

그놈의 현실을 타파하고 싶어 호기롭게 뛰어든 일인데, 본인 입으로 남들과 똑같은 말을 내뱉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하태랑은 무턱대고 우기기만 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행사 진행 안 하던 곳이라고 누가 그래요.”

손가락으로 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켰다.

[탐미하는 밤 047- 랑푸노 술집 안에서]

뭐? 탐미하는 뭐?

소현은 하태랑이 가리킨 포스터 앞으로 얼른 다가갔다.

프랑스 화가 외젠 벤자민 피쉘(Eugène Benjamin Fichel)의 ‘랑푸노 술집 Le cabaret de Rampouneau’이라는 그림.

‘탐미하는 밤 047- 랑푸노 술집 안에서’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 부제로 ‘포도주를 마시며 함께 그림 나누는 시간’이라 쓰여 있었다.

또 그 아래로는 행사 일정이 적혀 있다.

보란 듯이.

날짜는 다음 주 수요일 저녁, 장소는 예술책방 탐미재.

심지어 인원은 열다섯 명……?

소현은 며칠 동안 책방을 들락거리면서도 미처 보지 못했던 포스터였다. 아니, 보았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지 모른다.

지금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여기, 행사 자주 진행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 모이는 거, 벌써 마흔일곱 번째 모임이라잖아요.”

하태랑의 말.

그건 즉, 비슷한 인원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상황이어도 시설 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쪽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책방 주인 서정한이 눈에 띄었다.

하아. 저 개쓰레빠의 몹쓸 존재감.

이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서정한은 그저 너무도 느긋하고 평화롭게만 보여 심술이 날 정도였다.

시설 핑계로 잘 설득해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탐미하는 밤이 어쩌고, 하는 이상한 모임을 열어대는 저 개쓰레빠 때문에 망하게 생겼으니 소현의 눈에 그가 곱게 보일 리 없다.

“하하, 여기 무슨 사람들이…… 뭐, 여기까지 얼마나 오겠어요. 행사라고 해봤자 그냥 이름만 걸어놓은 거겠죠.”

“저기요!”

하태랑이 서정한을 크게 소리쳐 불렀다. 그가 돌아보자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

“와인 마시면서 그림 보는 행사, 이거요. 아직도 신청 받아요?”

그리고 종지부를 찍는 대답이 돌아왔다.

“끝났어요. 마감.”

신이 난 하태랑은 목소리를 머리 꼭대기까지 올리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어머머머! 마감이구나! 인원이 열다섯 명씩이나 되는데! 이 책방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건 그만큼 거뜬하다는 얘기구나! 바로 요 앞에 공용주차장도 있고! 내부 화장실 공간도 충분하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하태랑은 시설 문제를 깨끗이 정리했다.

저 멀리 선 서정한은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는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하태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음, 이제 다른 이유는 없죠? 그럼 이 책방으로 섭외해서 장소 픽스하고 알려줘요. 난 은소현 씨만 믿을게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책방을 쓱 둘러보았다. 여전히 책방이 마음에 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

매니저 임 실장이 하태랑의 뒤를 따르고, 이제껏 묵묵히 지켜보던 류재언도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일어섰다.

소현은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류재언을 올려보았다.

이제는 유어 턴(Your turn)일세.

한때 내 일생을 걸어 의지했던 옛 친구이자 전 약혼자요, 현 슈퍼갑님아.

수렁에서 또 한 번만 나를 좀 구원해주시게.

개쓰레빠 책방에서 하태랑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진행해야만 하는 이 불상사를 네놈이라도 부디 막아주란 말이다.

여기 더 오기는 정말 싫으…….

“시끄러.”

“……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눈빛이 시끄러워.”

그래도 함께해온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지, 눈빛만 봐도 이놈이 내 마음을 아는구나 싶어서 소현은 순간 마음이 찡해졌다.

정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은 참 차갑고 재수 없었지만.

밖으로 나온 류재언은 하태랑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

“왜 또? 난 더 할 얘기 없어. 피곤해, 이제 들어가서 쉴 거야.”

“적당히 해.”

“아아, 류 대표님은 지금 내가 엄한 데 생짜나 부리는 막돼먹은 여배우로 보이시나 봅니다?”

“그럼, 아니야?”

더없이 싸늘한 음성.

옆에만 앉아 있어도 느껴지는 한기.

하태랑은 차디찬 류재언의 기운에 밀리지 않기 위해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일관했다.

“류 대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류재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인형이니까, 배우생활 하면서 손해 볼 일도 없고, 이미지는 좋아져서 내 몸값은 더 오르고, 비싼 광고도 넘치게 찍고, 돈도 많이 벌고, 끝내주는 부자한테 시집도 가고.”

“…….”

“와아, 진짜 너무너무 편한 인생이다, 그치?”

잔뜩 신난 말투와 지극히 건조한 음성이 너무도 이질적이다.

말라버린 슬픔이 뚝 하고 묻어날 정도로 버석거렸다.

“그러니까 류 대표, 네가 시키는 대로 나 편하게 살겠다는 거잖아. 그중에 장소 하나, 그거 딱 하나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돼?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예술책방인데? 저렇게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흘러넘치는 곳인데? 너무 좋지 않아?”

“그냥 레스토랑에서 해. 원래대로.”

“아니.”

“…….”

“난 저 책방에서 해야겠어.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게 류 대표 아니었어? 오히려 고상한 하태랑 배우 이미지에는 한옥 예술책방에서의 결혼식이 훨씬 더 잘 맞는 거 아닌가. 내가 캐릭터 잘못 분석했어? 난 제대로 한 것 같은데.”

엿도 아주 큰 엿을 준비해 온 하태랑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류 대표, 네가 좋아하는 인형놀이 어디,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그 빌어먹을 인형으로,

앞으로도 계속, 기꺼이 살아줄 테니.

◇ ◆ ◇

책방 골목에서 나와 서 있던 소현은 차에서 내리는 하태랑에게로 다가갔다.

마음을 바꾸었겠지, 하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은소현 씨. 그럼 여기 섭외 잘 부탁해요. 임 실장 통해 다시 연락할게요.”

그녀는 유유히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밴으로 향했다.

태연스레 사라지는 밴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찬 소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지? 얘기가 잘 안 됐나?”

얼른 류재언의 차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가 창문을 내렸다.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진행하기로 한 거야?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여기서 하고 싶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소현의 질문에 피곤한 듯 류재언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 진짠가 보네. 아무리 톱스타래도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뭐 말만 하면 뚝딱뚝딱 다 되는지 알아? 지금까지 라르고 그림 때문에 고생한 게 얼만데, 이번에는 뭐어? 책방 결혼식?”

“목소리 낮춰.”

“왜! 뭐, 목소리를 뭐!”

가뜩이나 분한데 경고까지 받으니 더욱 열이 뻗친 소현은,

“……낮추면 될 거 아니야.”

분노를 곱게 접어 삼켰다.

하태랑의 결혼은 극비로 준비 중이기에 조심해야 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런 와중에도 그들의 사정에 모든 것을 맞춰야 하는 소현은 진심으로 결혼식 기획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시종일관 대단하게 구는 류재언이 싫고.

그 위에 여제처럼 군림하는 하태랑도 싫고.

단계별로 존재하는 갑님들께 시달리기만 해온 ‘을 중의 을’, 최하위층 자신의 신세가 새삼 처량하여 더욱 싫기만 했다.

게다가 개쓰레빠는 결혼식 장소로 책방을 쉽게 내어주지도 않을 것 같다. 불안한 마음에 방금 소현은 책방에서 나오기 전, 살짝 떠보기도 했었다.

「혹시 이 책방, 대관도 해주고 그러나요?」

「소규모로 저자들 강연이나 북콘서트, 모임, 작은 전시회 같은 거, 그런 걸로 대관하기도 하죠.」

「그래요? 그럼 결혼식 목적으로도…… 대관 가능해요?」

그 물음에 개쓰레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덧붙였다.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내키는 제안은 아니네요.」

그러니 장소 섭외부터 큰 난관인 상황.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고, 그 산을 겨우 넘고 나면 비웃듯 거대한 산이 또 버티고 선 지금,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도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했다. 지금이야말로 하산의 적기가 아닌가 싶었다.

“농담 아니야. 나 너희랑 일 못 하겠다. 너희 쪽 결혼식 진행, 더는 못 해. 내 능력 밖이야. 그만하자.”

수없이 고민해온 포기를 결국 힘겹게 내뱉던 순간.

또다시 끔찍한 대답을 듣고 말았다.

“……그럼, 그러든가.”

◇ ◆ ◇

어둠이 내려앉은 탐미재.

정한은 책방 정리를 끝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생활공간인 안채에서 샤워를 마친 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정원으로 나왔다.

중앙의 나무 아래 평상에 걸터앉아 캔 맥주를 따는 시간.

평소 달고 시원하던 밤공기가 요즘 들어 쓰게만 느껴진다.

은소현.

이렇게 갑자기 다시 만날 인연이었으면 궁금해하면서 속이나 끓이지 말 것을.

어차피 세상사 애태우지 않아도 알아서 흘러가게 되어 있는데.

하지만 3년 전,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경멸의 빛을 잊을 수 없다.

「미쳤어요? 내가 그쪽 같은 개쓰레기랑 계속 연락을 하게.」

하루아침에 달라진 태도에 당황한 것도 잠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녀.

곱고 반짝이는 별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새어나간 듯, 정한은 허망함이 남은 손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설렘, 남은 건 이유 모를 상처였다.

그런데,

「……아하하하하하. 그쪽이 누구신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저는 한 개도 모르겠네요.」

3년 만에 제 앞에 홀연히 나타나서는 자신을 모르는 척하더니,

「화집이요. 제가 구하고 있는 한정판 화집이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이 라르고라는 미국 화가예요. 그 사람이 주로 그리는 게 하늘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밤하늘을 테마로 낸 화집이 있다던데요. 여기 있는 거, 맞아요?」

……생뚱맞게 화집이나 찾고.

「어, 어쩌죠……. 배, 배상을……. 아니, 이게 배상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인지도……. 여기에 하나뿐인……, 아, 어떡하지.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화집을 망쳐놓은 것도 모자라,

「혹시 이 책방, 결혼식 목적으로도 대관 가능해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먹이며 이렇게 가까이, 바짝 다가왔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제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은소현이라는 여자.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품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정한은 분명 제 곁으로 다가왔으면서도 여전히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그녀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웠다.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는 걸까.

그때였다.

“까꿍.”

이제는 뭐, 놀랍지도 않다.

밤도깨비처럼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저 인간, 어디 하루 이틀인가.

“한! 나 왔다니까.”

정한은 오밤중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하게 손을 흔들고 맥주를 마저 마셨다.

“뭐야, 오랜만인데 안 반가워?”

영업이 끝난 책방 담을 돌아서 안채 쪽 문을 통해 들어온 남자의 이름은 앤드류 베이커.

탐미재 안채 도어락에 당당히 자신의 지문까지 등록해놓은 위인이었다.

언제든 마음대로 드나들겠다면서.

“한국말 다시 공부해야겠어. ‘오랜만’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거든. 앤디, 얼마 전에도 왔다 간 거 기억 안 나?”

“에이, 반가우면 그냥 반갑다고 해. 하니 하니, 우리 하니.”

앤드류는 정한에게로 얼른 다가와 귀엽다는 듯 양손으로 그의 볼을 쭉 잡아 늘렸다.

오구오구. 우쭈쭈. 하니하니, 우리 하니.

“하지 마. 좀.”

정한이 아무리 질색을 해도 앤드류는 아홉 살이나 어린 그가 막냇동생처럼 귀여워 꼭 이런 식으로 인사를 했다.

처음 정한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소년 같은 상큼미를 지닌 미남자일 거라고 절대 상상치 못했었는데.

그렇기에 정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앤드류는 그가 가진 반전의 모습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작업은 많이 했어?”

2주 전 이곳에 들렀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서, 니스를 거쳐 마드리드까지 찍고 온 앤드류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작업 현황부터 점검하고 나섰다.

물론 정한은 들은 척 만 척하겠지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얼마나 그렸냐고. 가져갈 거 안 나왔어? 작은 거라도 좀 줘봐.”

“관심은 고맙지만 그림 얘기할 거면 그만 가시죠.”

“……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는 외국인도 자신이 불리할 때면 못 알아듣는 척을 한다고, 앤드류 역시 예외는 없었다.

정한 때문에 배우기 시작했던 한국어도 어언 8년이 되어간다. 유창하다 못해 앤드류는 이제 어디 가서 한국어 강사를 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뺀질뺀질 괜히 모르는 척하며 장난을 치려던 앤드류는 순간 분위기를 파악해버렸다. 지금 정한에게 그림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한의 반응이 다른 때보다 살짝 날이 서 있는 기분.

앤드류는 냉장고에서 제 몫으로 꺼내온 캔 맥주를 따며 평상에 눌러 앉았다.

“한, 기분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혹시 어머니 상황이 더 나빠지기라도 한 건 아닌지. 앤드류는 걱정 어린 얼굴로 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있어. 어떤 이상한 여자.”

“여어어어어자아아아아?”

앤드류가 벌떡 일어섰다.

이거야말로 경축할 일이라는 표정으로.

“한! 니 입에서 여자 소리가 다 나오다니!”

앤드류의 과장된 반응에, 정한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와아아아우!”

괜히 말한 거다. 이건 정말 괜히 말했다.

누굴 탓할까. 하도 답답해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자신이 대역죄인이다.

“어떤 여자야! 얘기해, 어서 얘기해! 한, 든든한 형이 바로 여기 있잖아! 나한테 다 얘기하라고!”

커먼 예에! 베이베!

호들갑을 떠는 앤드류가 처음부터 저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생긴 건 시크하고 스타일리시한, 전형적인 뉴요커 양반이 왜 갈수록 점점 경박스러워지는지.

게다가 아트 딜러(art dealer)로서 세계 미술 시장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데다 명성까지 높은 남자인데.

왜 정한 앞에만 오면…….

“나 궁금해서 당장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가식의 껍데기를 다 떨쳐버리는 건지. 보는 사람 참 부담스럽게.

“알았어, 진정해. 얘기할게, 해, 한다니까.”

그런데 이게 너무 잘 통하니 앤드류도 자꾸만 써먹는 거다.

그냥 내버려두면 신선처럼 느긋하기만 한 정한이기에, 잡고 흔들려면 이 정도 기술은 있어야 했다.

오랜 시간 경험으로써 체득한 실전기술.

앤드류는 이런 쇼맨십에 가까운 어리광을 여러 비기 중 하나로 사용하며 천하의 라르고를 제 손안에 고이 쥐고 있는 참이었다.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못한, 비밀로 가득한 화가 제이 라르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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