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11화 (11/52)

11화– 누군가의 안식처2017.08.07.

“……류 대표님. 언니 아직 좋아하시는 거, ……맞죠?”

차애주의 질문에 재언은 숨이 순간적으로 멎어버릴 뻔했다.

누구도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온 적 없었다. 심지어 은소현조차도.

그러니 재언으로선 원론적인 물음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차애주 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신의 눈빛을 되레 꼼꼼히 살피려는 차애주가 부담스러웠다.

“쓸데없는 망상에 허비할 시간 있으면 회사 걱정이나 하시죠. 여기, 망하기 직전 같은데.”

“흐음. 정말 아니에요?”

좋아하긴 누가.

그럴 여유도 없이 살아온 인생.

은소현은 그 속에 공기처럼, 물처럼, 빛처럼 머물며 존재했었다.

떠날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은소현이 없으니 자신의 삶이 조금 불편해졌고, 그래서 다시 곁으로 데려다 놓으려고 하는 것이지, 다른 의미는 추호도 없다.

그에게 있어 은소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저 최소한으로 주어진 삶의 기본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참으로 어이없는 소리.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아마 차애주가 독심술을 했다면, ‘그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예요!’라고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좋은 능력은 없는 듯, 차애주는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짜 아니에요? 제가 이런 거 정말 잘 맞히는데? 진행하던 신랑신부님들 웬만한 사정은 제가 다 맞히고 그랬거든요. 심지어 결혼 앞두고 바람피우던 신랑님, 아니 신랑새끼까지! 제 예감은 빗나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구요.”

은소현은 왜 저런 후배를 데려다 놨나. 사람 피곤하게.

더 이상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듯 재언은 오만한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싸늘히 몸을 돌렸다.

뒤에서 차애주가 외쳤다.

“혹시 제 도움 필요하지 않으세요? 도움 필요하실 것 같은데!”

웃기는 소리.

누군가의 도움 따위 필요로 해본 적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재언은 대답 없이 사무실에서 나와 승강기 앞으로 향했다.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마음을 밟으며 걷는 길.

그의 걸음마다 서늘한 기운이 가득 배었다.

◇ ◆ ◇

하태랑의 집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주택이었다. 임 실장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소현은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크고 으리으리한 저택이야 류재언의 본가를 드나들며 실컷 경험했지만, 여배우 혼자 사는 이런 집은 처음이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공간디자인이 돋보여 집이 아니라 마치 대형 갤러리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조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실내가 갤러리라면 밖은 리조트다. 잘 가꿔놓은 정원의 저 선 베드에 누워 있으면 미세먼지고 뭐고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할 판이었다.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혀 허덕이는 자신과 하태랑의 처지는 확실히 달랐다.

처음으로 여배우 하태랑이 부럽고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좋겠다. 나랑 겨우 한 살 차이인데, 하태랑은 이미 다 가졌네.’

한 살 어린 쪽은 하태랑이었다.

소현은 종종 그녀의 당당한 포스 때문에 실은 그쪽이 언니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은 대표님 왔어요? 오래 기다렸죠? 운동이 방금 끝나서 씻고 나오느라고.”

하태랑의 등장에 소파에 앉아 있던 소현이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벌떡 일어섰다.

“아니에요. 방금 왔어요.”

“앉아요, 앉아.”

쭉 빠진 다리를 꼬고 앉는 자태 또한 하태랑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심하게 예쁜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흐뭇하다.

“갑자기 집으로 불러서 미안해요. 사무실에서 보면 류 대표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밖에서 만날 수도 없으니까.”

“그럼요.”

어차피 같은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는 안 보이니까, 옆에 있으면서 괜히 초라해지는 기분조차 들지도 않는다.

저분은 여신이시다. 그것도 현존하는 여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우신.

“이거 보여주려고 불렀어요.”

하태랑의 손짓에 임 실장이 리모컨을 들었다.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한쪽 벽에 대형 스크린이 내려왔다. 이윽고 돌아가는 화면에 이제는 익숙해진 제이 라르고의 대표작이 가득 채워졌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스크린을 바라보는 하태랑의 눈이 고아하게 빛났다.

“그 책방이요.”

“아, 네.”

보라는 화면은 안 보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소현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라르고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꼈던 기분과 좀 비슷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

“뭔가 그리운 느낌. ……그런 거 있지 않았어요?”

하태랑이 그렇게 말하니 알 것 같았다.

뭔가 그리운 느낌. 추상적인 표현이었지만 묘하게 공감이 되었다.

소현도 비슷하게 느꼈으니까.

정원 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나무 그늘. 여리게 춤추며 흔들리던 나뭇잎.

느리게 흐르던 음악 선율. 꽉 찬 커피 내음.

크고 작은 판형의 수많은 책들.

도시 속 조그만 오두막에 보물이 한가득 숨겨져 있는 듯, 그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설레고 뿌듯해지는 가슴.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그 언젠가 이국의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서 느껴본 적 있었던 감정.

탐미재는 갈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라르고는 누군가의…….”

“…….”

“안식처예요.”

그리고 뒤이어 나온 이야기들은 하태랑이 라르고를 얼마나 각별히 좋아하는지, 그 작품들을 보았을 때 자신의 느낌들이 어땠는지 등이었다.

그러나 소현은 내내 라르고가 ‘누군가의 안식처’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태랑은 왜 자신의 안식처라고 하지 않고, 누군가의 안식처라고 했을까. 그 미묘한 차이가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꼭 집어낼 수는 없었다.

“라르고 작품 콘셉트로 결혼식 기획하는 이상, 저는 장소로써 그 책방 분위기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은 대표님.”

“…….”

“잘 부탁해요, 정말.”

막무가내가 아닌, 정중한 부탁.

“거기 아니면 안 되겠어요.”

하태랑의 나지막한 호소에 소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은 대표님만 믿고 있을게요.”

그래, 어디 한번 해봅시다.

신부님이 이렇게 원하는데,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완벽한 동기 부여의 순간.

하태랑의 아련하고도 짙은 눈빛에 스르륵 홀려버린 소현은 다짐, 또 다짐을 했다.

“걱정 말아요. 이건 죽어도 성공시킬 거니까. 내가 하태랑 씨, 우리 신부님 결혼식, 평생 기억에 남도록 제대로 기획할게요. 꼭.”

◇ ◆ ◇

“할 수 있다!”

작은 소리로 조용히 외친 소현은 야무진 손길로 흐트러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라르고 화집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만 해도, 자신의 정착할 곳이 탐미재가 될지 전혀 상상도 못 했었는데.

현재 소현은 탐미재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중이다.

책을 정리하고 곳곳의 먼지를 닦는 소현에게 다가온 서정한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럴 필요 없다니까요.”

내가 있어, 이럴 필요. 내가 있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주인이면 다야? 꼬우면 허락이나 해주든가!

곱지 않은 속마음은 소현의 입에 장착된 필터를 거쳐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는 대답으로 바꾸어 나왔다.

“에이, 우리 슬리퍼 님도 참. 이럴 필요 없다니. 설마 내가 뭘 바라고 이러겠어요? 여기 하도 드나들었더니 정이 들어서 이러는 거지. 이제는 내 집 같고 내 방 같고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다가 먼지 좀 닦는 거 가지고,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넉살 좋게 손을 내저으며 소현은 하하핫, 열심히 웃었다.

절대 장소를 내주지 않겠다는 자신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던가.

‘선 봉사, 후 섭외로 가는 것이 나의 전략이시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출근해서 쓸고 닦고 눈치 빠르게 책방의 잡일을 착착 해내는 수밖에.

소현의 자존심은 소멸되어 화석으로만 남은 지 오래였다.

이제 가족도 없고, 남자도 없고, 오로지 믿을 거라곤 노후에도 걱정 없이 먹고살 돈. 그리고 인생에 대한 책임감.

이를 위해 맡은 바 열정을 다해 일하는 것, 소현에게는 이제 남은 건 그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쓰레기 같은 본모습을 철저히 감춘 채로 소년미 풍기는 자태와 청량한 미소로 한껏 위장한 서정한은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저놈이 밥을 주나, 쌀을 주나. 괜한 감정에 흔들릴 필요 없다고 소현은 매번 자신을 다잡았다.

싫어도 싫은 척하지 말고, 좋아도 절대로 좋은 척하지 말……, 아, 물론 좋을 리는 없겠지만!

그때였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그림자.

“또 왔네, 이 여자.”

지난번 아침에 마주쳤던 그 외국인이다. 이름이 앤디랬던가.

초면에 상반신 알몸부터 보았으니 상당히 친근하고 익숙한 기분……이 아니라, 멀쩡한 척 웃고 있는 얼굴이 상당히 꺼림칙한 그런 놈이었다.

서정한은 위장술이라도 쓰고 있지, 이 외국인은 대놓고 나 아무것도 안 가리는 놈이요, 하는 얼굴로 살고 있지 않나.

실상도 모르고 길에서 마주쳤으면, 할리우드 배우를 실물로 보는 줄 알고 애주랑 박수치며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겉모습은 믿을 게 못 된다.

하긴,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하니 어울리는 것이겠지. 개쓰레빠나 저놈이나 다 그 나물에 그 밥일 터.

여기서는 이놈들에게 아예 신경을 꺼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 싶었다.

“아, 네, 뭐. 안녕하세요?”

하여튼 동방예의지국에 왔으면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 이 외국인은 상당히 글러먹었다. 사람 보자마자 다짜고짜 ‘또 왔네, 이 여자.’는 뭔지.

인품 좋은 나는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 하고 소현이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했을 때.

“그래, 너도 안녕.”

아이스커피를 손에 들고 빨대로 쭉 마시던 외국인이 선심 쓰듯 인사를 받아줬다.

외국인치고 발음도 제법 정확하고,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고, 목소리가 어색하게 높아지지도 않는, 어찌 보면 굉장히 완벽한 한국어 구사 능력인데.

그런데 왜…….

“여긴 왜 또 왔어?”

자꾸 반말이냐고.

“여기서 결혼식 하면 안 된대. 우리 하니가.”

그래, 너네 잘난 그 하니가 존댓말은 안 가르치더냐!

“아, 제가 꼭 뭐, 결혼식 때문에 와서 이러는 건 아니라니까요…….”

소현은 감정을 꾸욱 억누르며 대답했다. 참자.

오로지 책방 정리만이 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소현은 열심히 책을 챙겼다. 여긴 무슨 책방인지 도서관인지 모르겠네, 생각하면서 정리와 청소에만 집중하려 하는데.

“그럼 뭐 때문에 오는 건데?”

외국인이 붙어서 계속 말을 걸어댔다.

아무리 외국인 쪽이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긴 해도,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꿋꿋이 반말로 일관하는 게 영 고와 보이지 않았다.

소현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뭐 때문에 오기는, 결혼식 때문에 오는 게 맞지! 알면서 왜 자꾸 묻는 거야, 그것도 자꾸 반말로! 그쪽이 물론 나이는 더 많아 보이지만, 그래도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예의는 커피에 말아먹었나.’

서정한은 대체 어디 있나.

야, 이 개쓰레빠야. 니 애인인지 파트너인지 친구인지 뭔지 이것 좀 제발 치워봐, 하는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그러나 서정한은 건너편에서 다른 손님과 한창 이야기 중이다.

“하아…….”

청운의 꿈을 안고 탐미재에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부딪힌 난관이, 이 근본 없는 외국인이라니.

“나한테만 살짝 얘기해봐. 너 뭐, 다른 속셈 있는 거지?”

쪼오옥 빨고 있는 저 아이스커피 소리마저 심히 거슬린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속셈은 무슨. 그런 거 없어요.”

“혹시 너 우리 하니한테 다른 마음…….”

“아, 없어! 없다고! 없다니까!”

“깜짝이야.”

결국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이 외국놈이!

소현은 조그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내가 미쳤냐고. 개쓰레빠한테 다른 마음을 왜 품어, 품기를!

그런 거 품을 시간 있으면 내가 차라리 달걀을 품어서 부화를 시키고 말겠다!

개쓰레빠가 뭐, 잘생겼으면 다인가. 웃는 게 예쁘다고 다냐고.

얼굴뿐만 아니라 쭉 뻗은 팔다리까지 환상이면 다냐.

피지컬이 아주 그냥 막 끝내주는 것도 모자라 거기다 꿀피부에 꿀성대면 사실 다지, 다야……, 가 아니라.

소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래, 처음에는 개쓰레빠의 잘난 얼굴에 혹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떤 놈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홀딱 빠질 뻔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창피해 죽겠는데, 이제 와 그런 흑역사를 뒤로하고 또 무슨 흑심이란 말인가. 대체 날 뭘로 보고.

“그리고 이봐요, 왜 자꾸 반말이에요? 날 언제 봤다고. 나 알아요?”

“몰라.”

살살 속 긁는 건 류재언과 서정한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런데 이제 웬 예의범절 말아먹은 외국놈까지 들러붙어 긁어대고 난리냐고.

“그런데 나한테 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모르니까 궁금해서 물어보잖아.”

묘하게 말이 된다.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 나도 너 이상해.”

자존심이 상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입장으로 외국인한테 말싸움에서 밀리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소현은 요즘 자신이 하도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그에게 역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그쪽은 저 주인하고는 무슨 사이인데요?”

“사랑하는 사이.”

그러지 마. 제발 사랑 좀 하지 마.

소현은 괜히 물어봤다 생각하며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진짜 사랑하는 사이인지, 엔조이인지, 장난하는 건지, 내가 알 게 뭐야.

편한 차림새로 탐미재 안을 유유히 활보하는 저 외국인을 보니 여기 고정 크루인 것 같은데, 저 외국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굴러들어온 돌일 수 있다. 그러니 최대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자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청객 플러스 불청객.

생각보다 어려운 탐미재 생활이 이어졌다.

◇ ◆ ◇

“이건 기회야.”

“기회? 무슨 기회?”

정한과 앤드류는 바 안쪽에 나란히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확히는, 서가 앞에서 손님이 보고 간 책을 제자리에 꽂고 있는 은소현을 관찰하는 중이다.

꽃받침을 연상케 하는 자세와는 다르게 두 사람의 표정은 다소 심각했다.

“저 여자가 여기서 일하는 거 말이야.”

며칠간 은소현은 이 책방에 취직이라도 한 것처럼 어찌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시간당 임금을 지급해주지 않으면 고용노동부에 신고라도 당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손님이 찾는 책의 위치까지 척척 안내해줄 정도로 발전했다.

게다가 책방에 와 있어도 기존 업무를 봐야 하는 듯 수시로 여기저기 통화를 하며 내내 노트북을 끼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녀는 책방의 잡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른바 자발적 투잡.

머리카락을 뽑아 분신이라도 만들어낸 것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탐미재에서 유일하게 바삐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은소현이었다.

“여기서 일하는 게 왜.”

“후우, 한. 너는 정말 나 같은 친구가 곁에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이렇게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니.”

앤드류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여기 와서 저렇게 힘들게 일해주지 않아도 방법이 있다고 해야지.”

“무슨 소리야.”

정한의 스타일은 결코 아닌 방법임을 뻔히 알면서도 앤드류는 과감히 제안하기로 했다.

“데이트를 하자고 해.”

줄곧 은소현을 바라보는 정한의 시선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그는 옆에서 보아 알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데이트 열 번에 장소 허락.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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