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어요2017.08.14.
눈물을 닦아주는 정한의 손길은 마치 데운 우유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를 올려다보는 소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흐려진 시야로 어렴풋이 보이는 정한의 눈빛은 애틋하기만 했다. 진심이라 믿고만 싶고, 진심이 아니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 나 왜 이러지…….”
이래서 병원이 싫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자신을 자꾸만 약해지게 했다.
특히 큰 병원에 가면 더했다. 눈물범벅이 된 채 엄마아빠를 부르며 뛰어가던 그날의 기억을 불러냈기에.
다리에 힘이 풀려 가는 동안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도 또 일어나 달려가고 했었다.
결국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바로 병원이었다.
그래도 이런 작은 병원에 와서 운 적은 없었는데.
정한에게 업혀 오는 동안 온 세상을 품고 있던 아빠의 등이 떠오르고 말았다. 아프게도.
주체하지 못할 눈물을 통증 탓으로 돌리며 소현은 잠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런가, 막 눈물이 절로 나네.”
“……알아요. 아픈 거.”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말하며 정한은 아예 소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앉았다.
병원에서 눈물을 쏟는 여자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러나 정한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눈에는 오직 소현만 보이는 것처럼 그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두 손을 뻗어 소현의 볼을 살며시 잡고 엄지로 계속해서 눈물을 조심히 쓸어주었다.
“아프니까 울죠. 우는 게 당연해요. 괜찮으니까 울고 싶은 만큼 울어요. 참지 말고.”
발목이 아픈 게 아니다.
가슴을 불로 지진 것처럼 뜨겁고 쓰라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속을 태웠다.
무너지고 쓰러질 뻔한 순간마다 믿고 의지할 건 오직 자신 하나뿐이던 고단한 삶.
“사람이 아파서 눈물이 나면 그냥 울어버리면 되지, 참긴 왜 참아요. 힘들게.”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게 너무도 무섭고 힘들어서.
상실감이 지독히 커서.
아무리 애써도 괜찮아지지가 않아서.
통증은 끊임없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동안 소현은 울지 말고 참자고, 강해지자고, 꿋꿋하게 이겨내자고, 그런 말들로 스스로를 채찍질했었다.
그런데 정한은 발목 통증이 아닌,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을 했다. 소현의 속을 다 읽어버린 사람처럼,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다.
입술로 말하고, 눈빛으로 전했다.
울어도 괜찮다고. 아프면 우는 거라고. 우는 게 뭐가 나쁘냐고.
힘들면 앉고 눕고 쉬었다 가라고.
약한 당신을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 보듬고 안아주라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따듯한 숨결처럼 공기를 포근히 데우며 정한은 선뜻 손을 내밀었다.
눈물을 흘리는 건 당신의 몫이라면 그 눈물을 닦아주는 건 이제 나의 몫이라는 눈빛.
그의 눈빛이 아픈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나 그럼…… 진짜 운단 말이에요…….”
설움이 폭발하듯 울음이 터졌다.
곱게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아예 소리까지 낸 울음이.
정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품을 내주었다.
아빠의 체온. 엄마의 눈빛. 아빠의 음성. 엄마의 손길.
그 모든 것이 정한의 품에 녹아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을 담고 있던 아빠의 등처럼.
◇ ◆ ◇
대낮에 병원 대기실에서 오열을 하다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소현은 새삼 부끄러워졌다.
당시에는 울음이 터질 이유가 수십 가지는 되는 것 같더니만, 막상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밀려드는 건 민망함뿐이었다.
1층으로 내려와 병원이 있던 역 근처에서 다시 필운동 쪽으로 건너가려다가 소현이 제안했다.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고 갈까요?”
“커피 마시고 싶어요? 들어가서 바로 내려줄게요.”
“아니, 그냥 밖에서 마시고 들어가요.”
“그래요, 그럼.”
정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현의 목적은 커피가 아니었다. 울었던 얼굴도 좀 정리하고, 마음도 가라앉히고 책방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한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아무리 개쓰레기든 개쓰레빠든, 미안하고 고마운 건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탐미재에 가면 시끄러운 앤드류 때문에 쉽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요.”
마침 자주 가는 커피 브랜드 체인점이 근처에 있었다. 소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커피 전문점 어플리케이션을 구동시켰다.
“뭐 드실래요? 여기서 고르면 돼요.”
“은소현 씨와 같은 걸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인데.”
“나도 그걸로요.”
소현은 앱을 이용해 능숙하게 주문하고는 다시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일할 게 걱정이긴 하지만 이만한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고마워요. 정말.”
커피 전문점에 도착해 테이블에 앉자마자 소현은 정한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살짝 접질린 정도라 해도 병원에 오지 않고 버티면 심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소현은 자신을 들쳐 업고라도 기어이 여기까지 데려온 정한에게 고마웠다.
“괜찮아요. 그런데 걷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책방 돌아갈 때는 다시 업고 갈…….”
“어우, 아니, 아니요. 이제 목발도 있고. 안 그래도 돼요.”
또 업혔다가는 이번엔 책방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앤드류가 시비를 걸겠지. 우리 하니 등에 업혀서 그렇게 좋았냐고. 울 정도로 좋아 죽겠냐고.
지금은 앤드류와 말싸움 할 기력이 없다. 그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목발 힘들죠?”
“처음이라 불편하긴 한데 익숙해지겠죠. 그래도 심하지 않아서 일주일 정도만 견디면 된다고 하니까.”
목발까지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 발목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걱정하는 정한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소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실 물어보고 싶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대체 어떤 마음인 건지.
그는 3년 전 하와이에서 만났을 때와 변함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거부감을 가지고 대한다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이 남자는 어찌 이다지도 투명한 물빛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소현은 헷갈렸다.
하와이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 그리고 지금.
무엇이 진짜인지.
그때 픽업대에서 직원이 호명을 했다.
“사이렌오더로 주문하신 ‘키헤이’ 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소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는데 정한이 따라 일어나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은소현 씨 주문이죠?”
“네, 좀 아까 병원 나올 때 앱으로 주문한…….”
“닉네임이, ……‘키헤이’예요?”
아차, 싶었다.
“‘키헤이’ 님!”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듯 저쪽에서는 키헤이를 불러대고.
하와이 마우이 섬, 석양이 아름다웠던 키헤이 해변에서의 기억도 함께 소환당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데이트. 몸과 마음 모두 녹아내릴 것 같았던 그날의 설렘.
“……그냥 있어요. 내가 가져올게요.”
정한이 픽업대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고 소현은 망했네, 중얼거리며 양쪽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렇게 질색을 하며 싫어해놓고.
다시 만나선 모른 척하며 실컷 잡아뗐는데.
그래놓고 사실은 ‘키헤이’라는 둘 사이의 특별한 장소를 잊기는커녕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들켜버렸다.
모순이었다.
싫었지만, 싫지 않았다.
잊고 싶었지만, 잊지 못했다.
밀어내려 했지만, 자꾸 당겨졌다.
영영 보고 싶지 않았지만, 기적처럼 보게 될 일이 생기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저 얼굴에 혹했을 뿐이라 외모 핑계를 댔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건 소현의 가슴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었던 깊은 눈빛과 진심 어린 말들, 눈부시던 미소.
단순히 눈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매료시킨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를 놓고 돌아서는 길이 참 씁쓸하고 허탈했다는 것을.
「언니, ……괜찮아요? 어쩌다 저런 놈이 우리 언니를…….」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어유, 나 괜찮아, 정말. 남자가 다 무슨 소용이니. 언제 봤다고 처음 본 남자한테 혹한 내가 바보지. 연애고 결혼이고 다 필요 없고, 나 이제 진짜 일만 열심히 할 거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었다.
하와이에 있는 남자와 장거리 연애를 하기도 힘들고, 설령 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연애, 그 골치 아픈 일을 다시 시작해 상대방은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으로 한 말인지, 뭘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다 신경 쓰고 맞춰가는 건 자신 없었다.
류재언과 파혼한 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마음을 닫아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번 겪은 상처는 사람을 움츠리게 했다. 또다시 상처받길 원치 않았다.
소현은 결국 돌아섰고, 다짐했다.
한 번뿐인 인생, 이제 더 이상 괜한 감정에 낭비하지 말고 내 행복을 위해 쓰자고.
그때.
“나에게 ‘키헤이’는, 소현 씨와 갔던 곳. 그 기억이 마지막인데.”
커피를 가지고 돌아온 정한이 입을 열었다.
소현은 어떤 사이트나 앱이든 계정 만들어 닉네임을 쓸 때마다 반사적으로 ‘키헤이’를 적어 넣었다.
다짐과는 다르게, 실은 잊지 못했던 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은소현 씨의 ‘키헤이’는…… 내 기억과 달라요?”
“…….”
사실, 같아요.
아마 같을 거예요.
추억의 온도도, 질감도, 기억하는 공기 모두.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얘기해줘요, 이제.”
많은 날들을 지나, 멀었던 거리를 좁혀,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소현은 3년 전 자신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음을 느꼈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것만이 이 순간 진실이었다.
“……서정한 씨 키우던 개.”
그래서 다가가기로 했다. 그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용기를 내어.
이젠 상처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직 하와이에 있어요?”
소현의 물음에 정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되물었다.
“그건 왜요?”
“이름이 루시였죠. 나, 그 개 실제로 봤었어요.”
정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키우는 개 사진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소현과 루시를 직접 만나게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때 오아후로 돌아와서 봤어요. 서정한 씨랑 만나던 애인분이…… 그 개, 루시를 데리고 산책 나오셔서.”
“나랑 만나던 애인……?”
“네.”
잠시 멍해진 듯 말을 잃은 정한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이내 의문의 빛이 가시더니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이제야 모든 비밀이 스르르 풀렸다는 듯.
“은소현 씨.”
웃으며 부르는 소리에 소현은 약간 당황했다. 생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서정한에게 당신의 애인을 만난 적 있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뭔가 그럴싸하게 둘러대거나,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거나, 아니면 들켰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하겠지 했었다.
만에 하나 소현이 오해를 했던 거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황당해한다든지 그런 반응도 예측 가능한 범위 내였다.
하지만 틀렸다.
모든 예상이 보란 듯이 빗나갔다.
서정한의 얼굴에는 특유의 맑고 깨끗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제야 전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도 했다. 분명 상황이 크게 달라졌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은 눈빛으로 소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어요. 은소현 씨가 뭘 봤는지도.”
이건 무슨 반응이냔 말이다.
“기분 나빴을 만해요. 그래, 오해한 게 당연하죠. 소현 씨가 그걸 봤다면 내가 개쓰레기라는 말, 들을 법도 하네요.”
산뜻하다 못해 상당히 쿨하기까지 한 인정이었다.
소현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기억을 되짚어 3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정한과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단추를 잘못 끼운 게 분명했다. 그 시작점이 어디인지, 소현은 다시 찾고 싶어졌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 ◆ ◇
3년 전 하와이 마우이 섬.
“언니, 생각보다 너무 일찍 들어온 거 아니에요?”
정한과 만나고 돌아온 소현을 보고 애주는 자신이 더 아쉬워했다.
“진짜 밥만 딱 먹고 왔어요? 술도 마시고, 좀 더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러지, 어쩜 해 지자마자 들어와요? 누가 보면 통금 있는 줄 알겠네.”
밥만 먹고 온 건 아닌데.
소현의 볼이 살짝 붉어졌지만 애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 입술에 그의 온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저녁 비행기로 다시 오아후에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바로 공항으로 갔어.”
“아, 당일치기로 왔다 간 거였구나. 하긴 비행시간으로는 사십 분밖에 안 걸리니까.”
“응. 낮에 여기 친구 보러 왔던 건데, 마침 내 일정이랑 맞으니까 같이 저녁 먹자고 했던 거고. 내일은 서핑 강습도 있어서 돌아가야 한대.”
“난 일부러 언니 보러 온 건 아닐까 상상했는데.”
“그건 아닌 듯.”
소현의 말에 애주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헷갈린다. 그래서 언니 좋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팁 때문에 만나서 저녁 사주는 걸로 퉁 친 거래요, 설마? 여기까지 와서 진짜 저녁만 먹고 그냥 가버리냐. 사람 참 매정하네.”
애주의 기준으로는 시원찮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현은 이렇게 자연스레 다가드는 만남도 좋아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꼭 만사 제치고 달려들어야만 운명적인 인연인 건 아니니까.
“모레 만나기로 했어. 우리 오아후로 다시 돌아가는 날 저녁에.”
자신의 여행일정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사이에서 만날 시간을 잡자는 것도 억지스럽지 않아 더 좋았다.
안 그래도 애주와의 여행이라, 남자 하나 때문에 혼자 이리저리 일정을 조정하게 되면 괜히 미안해질 것 같았는데.
하지만 애주는 이제 아쉬운 걸 넘어서서 안타까운 얼굴이다.
“시간이 천년만년 있는 것도 아니고, 언니. 우리 곧 서울 돌아가잖아요. 그 전에 여유롭게 썸 타고 있을 시간이 없다니까. 그 남자 마음이 어떤지 정도는 확실하게 알고 가야 될 거 아니에요. 언닌 그 남자 괜찮다면서요.”
“아는데, 마음.”
“네?”
“……나 좋다는 거 맞아.”
헷갈린다는 애주에게 소현이 분명히 말해주었다.
“헐, 대박. 좋대요? 언니한테 고백했어요? 아니, 하늘에서 한 번 뛰어내렸을 뿐인데 벌써? 하루 만에? 반한 거예요? 반했대요? 첫눈에? 언제? 어느 시점에서? 아, 얘기 좀 자세히 해줘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눈빛이 그랬어.”
“엥? 말이 아니라, 눈빛이?”
“……사실 키스도 했고.”
그 말에 애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에에? 키스? 진짜? 언니 같은 사람이? 여기서 처음 만난 남자랑 키스를? 대애박!”
“나 같은 사람이 뭔데?”
“언니 의외로 엄청 보수적이잖아요! 남자도 그 전 약혼자밖에 모르고 살고. 다른 남자한테는 눈길도 한번 안 주고, 스킨십에 별로 관심도 없고! 와, 근데 싱글이 되니까 엄청나네. 겁나 진취적이야, 이 언니! 그래서 키스는 잘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얼굴? 하긴 그 남자, 수녀님 타입의 언니를 얼빠로 만들었으니! 얼굴은 말해 뭐해요. 또 뭐가 좋아요? 그 남잔 뭐래요? 네?”
그날 밤을 새울 기세로 애주는 꼬치꼬치 물어왔다. 얼굴에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언니 너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기뻐했다.
파혼이라는 큰일을 겪은 소현이기에, 애주는 늘 그녀를 걱정했었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부모를 사고로 잃고 혼자가 되었다는 소현이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가 전 약혼자였는데, 이제 그마저도 놓아버렸으니.
소현의 빈 가슴을 채워줄 누군가가 곁에 생기길 애주는 항상 바라고 또 바랐었다.
“아, 너무 낭만적이다. 언니 그 사람이랑 계속 연락할 거죠? 톡에 프사 같은 거 좀 봐요. SNS는 없어요? 따르는 여자 진짜 많을 거 같은데 미리미리 점검 좀 해야죠. 한국 돌아가면 이제 롱디(Long Distance) 연애 들어갈 텐데 그 우주대존잘을 불안해서 어떻게 두고 가요.”
“……아, 연락처를 안 받았네.”
소현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하는 말에 애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헛똑똑이네, 이 언니. 그 중요한 걸 안 받아 오면 어떡해요. 아니, 연락처부터 따야지, 둘이 대체 뭐 했어요? 아, 키스했댔지. 키스만 엄청 하느라고 그것도 까먹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아…….”
어제도, 오늘도, 연락처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저 언제 어디서 만나자며, 시간과 장소 약속만 잡은 채로.
여행지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는지, 평소 꼭 끼고 살던 휴대전화도 지금의 만남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만나기로 한 날 엇갈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각자 휴대전화 다 놔두고 이게 무슨 쌍팔년도 식 연애랍니까. 아, 이 언니를 혼자 보낸 내가 잘못이지, 가 아니라 혼자 보냈으니 키스도 하고 왔지. 잘했어요. 아주 칭찬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애주는 이 연애의 성공적인 성사를 위해 강한 추진력 스킬을 사용했다.
“언니, 우리 모레 예정대로 말고 그냥 일정 당겨서 오아후 돌아갈까요?”
“내일? 오전에 너랑 몰로키니 투어하기로 했잖…….”
“난 괜찮으니까 언니 잘 생각해보고 얘기해요. 롱디 커플 되면, 보고 싶어도 자주 못 볼 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동안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야지. 그러고서 그 사람이 서울에 오든, 언니가 하와이에 오든, 그건 나중에 알아서 할 일이고.”
힐링여행이 아니라 본격 남친 만들기 투어가 되어버렸다.
애주는 사명감에 불타는 얼굴로 소현의 손을 꼭 잡았고, 소현 역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결의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애주야. 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래, 잘 생각했어요.”
“응. 약속한 날도 아닌데 갑자기 가면 같이 시간 보내는 건 어렵겠지만, 그냥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오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
“네, 바로 그 정신, 아주 마음에 들어요. 모레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려. 얼굴도장 적립은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남는 겁니다.”
애주가 응원에 바짝 열을 올렸다.
“내일 보면 연락처도 받고 그럼 되겠어요. 그 남자 내일 서핑 강습한다고 했죠? 와이키키로 가면 볼 수 있겠네요. 일단 어디 있는지는 아니까 가서 만나는 건 문제없겠고. 그럼 몰로키니 투어 취소하고 비행기랑 호텔 예약도 바꿔야겠다.”
“고마워, 애주야.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게.”
“이게 무슨 은혜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고생했던 게 얼만데. 뭐, 그래도 정 갚고 싶으면 언니가 행복해지는 걸로 갚든가요. 으아, 오글!”
애주는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도 밝게 웃었다. 마주 앉은 소현도 오랜만에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가 싶을 정도로.
그날 밤, 소현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마구 뛰어댔다.
침대에서 일어나 카디건을 걸치고 테라스로 나온 그녀는 검게 물든 밤하늘에 수놓인 별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반짝반짝.
「인생 참, 신기해요. 나는 그래서 좋은데, 은소현 씨는 어떤지…… 물어보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안 물어볼게요.」
새로 시작된 인연이 꿈처럼 느껴졌다.
얼른 내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부담스럽지 않다고. 나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 좋다고, 그에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다음 날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 그때의 소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설레는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촤아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고운 선율보다 더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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