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말아요.2017.09.25.
“생각보다 되게 빨리 왔…….”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있던 은소현의 입매가 단번에 굳어졌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재언은 묵묵히 내려보았다.
실망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웬일이야? 병원은? 어떻게 벌써 퇴원했어?”
기다리던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은소현의 태도는 바로 달라졌다.
“연락도 안 하고 갑자기 왜 온 거야?”
별일이 다 있다는 듯 건조하게 묻는 말끝에 은소현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
“얘기 좀 하자.”
누구를 기다렸든 상관없다.
재언은 날카롭게 내뱉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약속 있어.”
은소현은 단아하고도 그윽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일부러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빛이 흘렀다.
한때 그 빛을 당연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감히.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해 꾸민 모습으로 서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몹시 아름다웠다.
“다친 다리로 어딜 가려고.”
“이 정도는 생활에 지장 없어, 괜찮아.”
누구를 기다리고 누굴 만날 건지 뻔히 알기에, 재언은 순순히 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몰랐다. 갑갑한 마음으로 그는 은소현의 앞을 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저 평소처럼, 딱딱하게.
“잠깐이면 돼.”
“탐미재 얘기 하려는 거면 나중에 해. 이미 주인 허락 다 받았고 진행만 하면 되는데 왜 자꾸 태클을 못 걸어 안달인 거야. 그거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재언은 잠시 듣고 있었다.
열심히 말하는 입술이 오늘따라 참 붉구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코를 찡긋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하면서…….
“너희 배우 결혼식 준비하는 게 힘이야 들겠지 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네가 이럴수록 난 안 써도 될 시간까지 너무 뺏긴단 말이야. 다른 신부들 결혼식도 나한테는 똑같이 중요한데. 톱스타만 주인공인 거 아니잖아. 각자 다 자기 인생에서는 주인공이고 그 신랑신부들한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내가 너희 배우 일에만 마냥 매달릴 수는 없잖아.”
하태랑이 은소현과의 첫 미팅 후 마음에 든다고 했던 점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자신이 배우라고 지나치게 특별히 대하는 면이 은소현에게는 없었다고.
그렇게 그냥 은소현의 신부 중 평범한 한 명이 되는 기분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재언은 하태랑의 독특한 취향 내지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은소현은 모든 신부를 고르게 특별히, 또 소중하게 대했다. 그걸 하태랑은 이미 느꼈던 모양이다.
마음은 마음으로 흐른다는 걸 재언은 그때 알지 못했다.
“류재언, 네가 너희 배우 각별히 아껴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 잘 알겠는데, 준비는 내가 잘할게. 큰 산 하나 잘 넘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넌 네 몸이나 챙겨.”
그게 아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만 하면 되는 그 쉬운 일이 이 순간 재언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니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하면 또 그 다음에는?
황당한 얼굴로 뒷걸음질 칠 은소현이 눈앞에 그려졌다. 긁어 부스럼만 될 것이다.
평소에도 섣불리 움직여 일을 그르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던 재언이다.
은소현을 다시 데려오는 일조차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알 수 없어 어지러웠다. 갑자기 페이스에 말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지금 누구 때문에 정신 못 차리고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떠난 사람 다시 붙잡고 싶으면 내 결혼식 장소 가지고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가서 무릎을 꿇고 돌아와달라고 빌어.」
하태랑의 충고는 다시 생각할 가치도 없다. 지금껏 헤맨 것도 충분히 꼴사납고 자신답지 않았다.
“그래, 해.”
“응?”
재언은 냉랭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탐미재에서 결혼식, 진행하라고.”
대신 내일부터 넌 아주 바빠질 거야.
한가하게 치장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릴 여유 따위 없어지겠지.
“아아, 다행이다. 어쩜 이렇게 대표님 컨펌이 빡센지 몰라. 탐미재 허락받는 것보다 더 힘드네. 그럼 이제 된 거지?”
“내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내 사무실로 내려와.”
재언의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그려졌다.
은소현의 스케줄을 뒤흔들고 꽉 조이는 건 재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을 셈이었다.
“아침부터 너희 사무실에?”
“이제 책방 주인 설득은 다 끝났는데, 굳이 탐미재로 출근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긴 하지.”
현관 앞에 선 채로 얘기하던 은소현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일단 알았어. 용건 다 끝났지? 서서 얘기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이제…….”
“지나던 길이었어. 간다.”
버림받을 수 없어 먼저 돌아선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그럼 내일 봐. 조심해서 가.”
간단히 인사를 마친 은소현이 재언의 등 뒤에서 현관문을 닫았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도어록이 단숨에 잠기고, 차가운 기계음의 파장이 계단 위아래로 무심히 울렸다.
재언은 계단에 멈추어 선 채 눈을 한 번 꽉 감고 마른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타는 이 갈증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틀거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다다랐을 때다.
잠시 벽에 기대서 있던 재언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바닥으로 향해 있던 그의 시야에 낯선 로퍼가 보였다.
재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건물 좁은 계단 앞에서 맞닥뜨린 사람.
지금 집에서 은소현이 기다리고 있을, 바로 그 남자였다.
◇ ◆ ◇
“전화로 하면 될 걸, 쟤는 꼭 저렇게 얼굴 보고 얘기하더라. 사람을 못 믿어서 저러나?”
귀찮지도 않을까,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소현은 거실 소파로 와서 앉았다.
정한에게 전화가 왔을 때로부터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도착하기에 좀 이르기는 했다. 빨리 온 줄 알고 들떠서 나간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괜히 운전에 방해가 될까 봐 관두었다. 늦어지면 다시 전화가 오겠지.
어서 오라 재촉하고만 싶은 마음을 달래며 소현은 TV를 켰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TV 앞에서 무료한 기다림 끝에 깜빡 졸던 소현이 벨 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왔다.”
얼른 현관 쪽으로 갔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은 아닐까. 혹시 몰라 현관문 외시경으로 밖을 보니 그토록 기다렸던 정한이 서 있었다.
하마터면 목이 빠질 뻔했던 소현이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늦었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차 많이 막혔죠?”
“서둘러 일찍 오긴 했는데…… 그렇게 됐네요.”
도착을 이미 했었다는 말인지는 모르고 소현은 정한을 올려보며 괜찮다며 연신 웃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웃어요?”
“하하, 그러게요.”
마냥 웃는 소현을 바라보며 정한도 나비가 살랑 앉았다 간 듯 가벼운 눈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
서로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
“그럼 저녁 먹으러 나갈까요?”
“네, 가방만 가지고 나오면 돼요.”
“잠깐.”
정한이 돌아서려는 소현의 팔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위로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소현은 흠칫 놀라 굳어졌으나, 정한은 아주 귀한 것을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내렸다.
“앗.”
방금 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젖힌 채 잠깐 잠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던 게 분명했다.
산적 같은 머리 꼴을 하고선 문을 열어젖히며 반갑게 웃었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보니, 소현의 볼이 그만 벌게졌다.
거울이라도 보고 나올걸. 방금 전까지 막 널뛰다 온 여자로 보였겠지.
“엉망이죠?”
“아뇨, 전혀.”
하지만 정한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전혀 엉망이 아니라고. 당신의 모든 모습이 내 눈엔 그냥 예뻐 죽겠다고.
호락호락 동조해주지 않는 그의 깊은 눈빛에 소현의 심장은 미친 듯 설렜다.
◇ ◆ ◇
“연예인이겠지. 모델이나 배우 지망생이라든가.”
“에이, 설마. 모자나 마스크도 없이 이런 데를 왔겠어?”
“혹시 모르니까 사진 찍어둘까? 우리가 모르는데 유명하거나, 아님 앞으로 유명해질 사람일 수도 있잖아?”
“진짜 연예인한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면서 저 남자 보고 사진을 다 찍네.”
“그러니까. 얼굴, 기럭지 다 미친 듯. 진짜 너무 잘생겼다.”
큭큭 웃으며 두 여자는 조심히 휴대전화로 촬영을 시도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음식을 주문한 뒤 화장실에 다녀오던 소현은 지나는 길에 이를 보고 멈추어 섰다.
방금 온 손님들인 듯 아까만 해도 비어 있던 자리였다.
휴대전화 카메라 화면에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대상은 저 멀리 창가 테이블에 앉은 정한이었다.
소현은 그 여자들의 휴대전화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가렸다.
“아, 뭐야.”
사진을 찍으려다 놀란 그녀들이 고개를 들었고, 소현이 조용히 말했다.
“저 남자 일반인이에요. 찍지 마세요.”
무안해진 그녀들이 도리어 인상을 쓰며 소현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중 한 여자와 소현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은 실장.”
마진혜 팀장이다.
소현이 오던 방향을 등지고 앉아 있어 그녀인지 미처 몰랐다. 게다가 소현의 시선은 휴대전화 카메라에만 가 있었으니.
“팀장님, 안녕하세요.”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 소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인사했다.
정한이 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데려올 때만 해도, 소현은 이전 회사와 가까워 자주 왔던 곳이라 반갑기만 했었다. 이렇게 마 팀장을 만나게 될지는 몰랐지만.
“난 친구랑 저녁 먹으러 왔어.”
말끝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촬영을 막아서던 소현의 행동을 의식하는 듯했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던 마 팀장의 친구는 기분이 약간 상한 얼굴로 소현을 보고 있었다. 그 예쁜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인상이 그리 안 좋은 걸 보니, 역시 사람 얼굴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두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딱히 말을 더 섞고 싶지는 않아 바로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 팀장이 물었다.
“은 실장, 저 남자랑 같이 온 거야?”
아니면 소현이 참견했을 리가 없다는 듯 확신하는 투였다. 물론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려 착하게 꾸민 말투였지만.
“아, 네. 맞아요.”
“무슨 사인데?”
연이은 질문에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좋아하는 마음으로 만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관계에 대한 설명을 마 팀장 앞에서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기엔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소현이 약간 난처한 얼굴로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그냥 조금 아는…….”
“제가 은소현 씨를,”
일순 기분 좋은 전율이 온몸에 스쳤다.
“좋아해서 따라다니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들려온 건 바로 정한의 목소리였다. 소현은 참았던 숨을 겨우 내뱉으며 돌아보았다.
말의 내용도, 낮은 음성도, 그림 같은 그의 얼굴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사이는 뭐라고 해야 할지 은소현 씨가 좀 곤란하겠네요. 아직 제 마음을 받아준 건 아니라서요.”
소현은 멍하니 정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들도 다 돌아볼 정도의 미남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에 대한 짝사랑을 고하고 있으니, 소현은 그저 얼떨떨했다.
그제야 마 팀장이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전 우리 은 실장이랑 같이 일하던 선배예요. 마진혜라고 합니다.”
“네, 서정한입니다.”
정한은 평소와 같은 웃음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가워 보이지도 않았다. 적당히 상냥함을 내보이며 타인을 대하고 있었다.
소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하던 그의 눈빛이 얼마나 애틋하고 특별한 것이었는지.
하지만 그 정도의 형식적인 상냥함조차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재주가 있는지 마 팀장과 그녀의 친구는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보는 그가 더욱 멋있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 은 실장이 매력이 넘치긴 하죠.”
이내 정신을 차린 마 팀장이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남자들이 은근 많이 따른다니까요. 왜, 그런 적도 있었잖아. 어떤 신랑은 신부 몰래 은 실장한테 따로 연락하고 그러다가 그 결혼 파투날 뻔 했고. 뭐, 결국 결혼은 했지만 그분들 잘 사시는지 모르겠네. 은 실장 혹시 아직 연락해?”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신부 어머니가 회사에 쫓아와 소현에게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막말을 퍼붓기도 했었다.
자신의 이상형을 이제야 만난 것 같다며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그 남자를 쳐내느라 소현은 무척 힘들고 괴로운 시기를 보냈다.
단호하게 거절하던 소현의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나서야 오해가 풀렸지만, 지금 돌이켜도 무척 찝찝한 기억이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들춰내며 마 팀장은 살갑게 웃었다.
“지났으니까 그것도 이제 다 추억이다. 그치, 은 실장?”
심지어 그땐 류재언과도 만나고 있을 때였다.
“은 실장 남자친구가 알았으면 진짜 기분 나빴을 텐데. 끝까지 얘기 안 했다면서. 혹시 정말 그 신랑이랑 따로 뭐 있었던 거 아니지?”
농담인 듯 가볍게 덧붙이며 마 팀장은 호호 웃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류재언에게 얘기했었고, 그는 오해인 게 밝혀졌으면 됐다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 팀장은 마치 무언가 사정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 말했다.
앞에서도 이런데 소현이 없는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지어냈을까.
“걔도 알고 있었어요.”
“어머, 그랬구나.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헷갈렸나 봐.”
하지만 그녀가 그 말을 꺼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남친이랑 엄청 길게 만나지 않았어? 10년이었나, 고등학생 때부터 만났다고 했었지? 결혼을 코앞에 두고 헤어질지 몰랐어. 그때 은 실장 힘들어하는 거 보고 내가 다 가슴이 아프더라.”
헤어진 전남친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남자를 보니 그러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그 남친 재력에, 배경에, 외모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둘이 헤어진다고 했을 때 너무 아쉬웠는데 그래도 세월이 참 대단해, 이렇게 다 잊고 또 다른 사람 만나서 씩씩하게 지내는 거 보면. 우리 은 실장이 착하고 예쁘니까 남자 복도 많은가 봐.”
이 여자한테 과거에 그런 존재가 있었는데, 그쪽도 아냐는 듯한 눈빛으로 정한을 살짝 보면서 말했다.
일부러 칭찬과 좋은 말을 섞어가면서. 그게 마진혜 식이었다.
“그렇게 오래 사귄 남친이랑 파혼도 한 입장인데, 혹시 또 상처받는 건 아닐까 내가 다 걱정이야. 아직도 엮여 있는 거 같던데.”
하지만 정한은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과거 남자의 존재도, 현재 엮여 있다는 사실도, 그렇게 마 팀장이 안간힘을 쓰며 은근슬쩍 전달하려는 상황들을 그는 벌써 다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정한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저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 뿐이었다.
“은소현 씨 걱정을 이렇게 많이 해주시는 분도 계시고, 제가 다 감사하네요.”
밑바닥에 악의를 깔고 배배 꼬아서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걱정’을, 정한은 바로 간파해냈다.
그리고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제는 필요 없으니.
“이제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은소현 씨 마음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앞으로 더 많이.”
악의 하나 없이.
순수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정한은 소현에게만 보이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돌아보았다. 눈빛 가득 물기 어린 사랑이 배어 있었다.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나 믿고, 그만 행복해져요.
그는 미소로, 눈빛으로, 손길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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