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29화 (29/52)

29화– 눈물 같은 비가 세차게2017.10.09.

소현은 목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무, 물…….”

일어나 제일 먼저 찾은 건 물이었다. 이토록 심한 갈증은 난생처음이었다.

젖은 휴지처럼 축 늘어진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자신의 몸을 살며시 감싸 안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받쳐주는 든든한 힘이었다.

그리고 입술에 물이 닿았다.

누군가 컵에 담긴 물을 조심스레 흘려 넣어준 덕분에 갈증이 가셔 소현은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아직 정신이 덜 깨어 몽롱한 가운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여긴 어디지?

“너, 쓰러졌어.”

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류재언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 다정한 손길이라 상상도 못 했는데, 자신을 일으키고 물을 마시게 해준 사람이 류재언이었다니.

낯설다, 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소현은 류재언의 손을 떨쳐내며 조금 물러나 앉았다.

“여긴 어디야?”

“내 방.”

“어우, 야. 여기 너무 멋지다. 근데 나 어제 잔 방이랑 인테리어가 다르네. 같은 호텔이라도 분위기가 영 다르구나. 호텔 같지도 않고. 나 구경 좀……, 어엇.”

힘없는 몸을 겨우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서려는데, 류재언이 소현의 어깨를 잡고 다시 눕혀주었다.

“좀 더 쉬어.”

프라이팬 위에 한 국자 떠 넣은 부침개 반죽처럼 침대에 몸이 철썩 달라붙어버렸다. 아직 일어날 상태가 아니기는 한 모양이었다.

구름처럼 포근한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싹 녹아버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대로 며칠 쉬면 정말 좋을 것 같기는 했다.

“나 원래 되게 튼튼한 체질인데…….”

쓰러진 상황이 민망하기도 하고, 까칠한 류재언을 귀찮게 했을까 걱정도 되어서 소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류재언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미안하다고……. 고맙고.”

이불에 폭 파묻힌 채 소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별 대답 없이 물컵을 쥐고 돌아섰다.

창밖은 어두웠다. 소현은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던 중 쓰러졌던 게 기억이 났다. 그때는 낮이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컨디션이 꽤 좋지 않았었다. 피로가 쌓이고 쌓여 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는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빙글 도는 느낌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절까지 할 일인가.

아니다. 그건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정신이 든 소현의 눈앞에 라르고의 그림이 환영처럼 펼쳐졌다. 흐릿한 색채가 보다 선명해지며 쓰러지기 전까지 보았던 작품의 느낌이 다시금 생생해졌다.

마치 그림을 그린 화가와 한 공간에서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것처럼.

전시에 갔을 때 처음에는 이름만 대면 아는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의상이나 소품에 라르고의 그림 스타일을 적용해 제작한 작품들이 그저 흥미로웠다.

라르고의 그림을 콘셉트로 하태랑의 식장을 꾸미고자 계획하고 있는 만큼, 소현에게도 그 작품들은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재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분위기로 연출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직접 보게 한 것인가 하며 류재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한 섹션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곳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라르고의 원화 한 점에 소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압도적이었다.

상상치도 못했던 커다란 사이즈는 물론이요, 작품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오라가 몸 전체를 덮치듯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게…… 라르고구나.’

처음 보는 라르고의 그림이었다.

화집에 인쇄된 것을 보고 느끼는 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두 눈으로 직접 실물을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 모를 정도로 소현은 넋 놓고 그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종일 보고 있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칠기도 하고 섬세하기도 한 모순적인 붓 터치가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밤하늘은 한없이 검고 어두우나, 가련히 빛나는 별들이 그 안에서 빼곡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인생처럼.

어떤 아픔도, 어떤 절망도, 어떤 슬픔도, 결국 흘러가는 강물처럼.

까닭 모를 어둠에도 빛은 스며 있다고 말해주며 가만가만 토닥이는 손길.

라르고의 그림은 위안이었고, 평온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었다.

깊은 안식을 느낌과 동시에 소현은 결국 그 앞에서 스르륵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 겪는 순간이었다.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문득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탁자에서 가방을 집어 안을 살폈는데 휴대전화만 없다.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류재언, 내 휴대전화 못 봤어?”

몇 발짝 떨어져 있는 소파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류재언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찾아.”

“아니, 혹시 못 봤나 하고. 그런데 어디 갔지, 떨어뜨렸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자 소현의 심장은 계속 뛰었다.

휴대전화로 할 일이 많았다. 어디 가면 라르고의 그림을 또 볼 수 있을까 찾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정한과 얘기하고 싶었다.

걱정할까 봐 쓰러졌다는 말까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라르고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 정도는 하고 싶었다.

서울에 돌아가면 탐미재에서 라르고의 그림과 관련한 책들도 보고 싶었다.

멀고 어렵게만 느꼈던 존재가 어느덧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달은 것처럼, 소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어어? 이거 라르고 그림이지?”

휴대전화를 찾던 소현의 눈에 들어온 건, 침대 맞은편 벽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이었다.

아직 보는 눈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이젠 라르고의 화풍을 어렴풋이 알게 되어, 새로운 그림을 봐도 구분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맞아.”

“와아……, 호텔에 이런 게 다 걸려 있네.”

소현은 신기한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화집에서도 보지 못한, 처음 접하는 그림이었다. 유명작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느낌만은 여전했다.

마치 숲 속에 와 있는 듯 캔버스를 가득 채운 초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세상에 있는 모든 초록이 그림 안에 들어 있는 듯 다채롭기까지 했다. 깊은 색감뿐 아니라 양감과 질감이 고루 풍부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진품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현은 캔버스 구석에서 유려하게 새겨진 라르고의 사인을 발견했다.

붓 자국들이 생생하게 보이는 걸 보면 실제로 그린 건 분명한데.

“진짜 라르고가 그린 건 아니겠지?”

“진품이야.”

소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작품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에이, 설마. 무슨 호텔방에 진품을 걸어놔.”

하필 여기에 그 비싼 걸? 게다가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하지만 라르고의 그림만 의아한 게 아니었다. 다른 예술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언뜻 비치는 침실 밖 공간이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

일반 호텔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가정집 같지도 않았다.

소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내려섰다.

창밖으로 빌딩의 불빛들이 한눈에 보였다. 꽤 높은 건물에 있는 집인 듯했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공간은 그냥 봐도 딱 류재언의 스타일이었다. 인테리어의 포인트는 예술품들이다.

“여기 혹시…….”

“그래, 내 집.”

자신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류재언이 부자라는 사실이 무척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해외에 부동산이 여러 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중 출장을 자주 가는 곳이라면 편안하게 머물 수 있게끔 거처를 마련해두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집값 비싼 뉴욕에 호텔 스위트룸 급의 집이라니.

라르고의 그림을 비롯한 고가의 예술작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자신이 류재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들이 떠올랐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너무 부럽다.」

「은 실장이 엄청난 매력이 있나 보다. 그런 대단한 남자한테 시집을 다 가고.」

「우리는 모르는 매력이 있는 거야, 뭐야? 있으면 우리한테도 비법 좀, 응?」

「은 실장이니까 가능한 거지, 배운다고 그게 되겠어? 우린 그냥 꿈 깨자.」

그런 관심은 부담스러웠다. 돈 때문에 류재언과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스펙과 배경의 차이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에서는 치켜세우며 칭찬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 돋아난 가시가 소현을 자꾸만 찔러댔다.

뒤에서 그들이 연일 입방아를 찧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현은 애써 외면했었다.

그런데 류재언의 집을 멍한 얼굴로 돌아보던 그녀는 비로소 실감했다.

다른 세계에 살던 너를, 10년 동안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었구나.

그와 자신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존재였음을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녀가 느낀 건 그렇게 완벽한 단절이었다.

긴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늘 멀리 있다고 느껴지던 사람. 그렇기에 결국 끝을 맞이하고 말았던 사이.

헤어지길 잘했어, 하고 생각하며 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괜찮으면 여기 앉아. ……할 얘기가 있으니까.”

류재언의 목소리에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뜬 후로 내내 낯설었다.

오늘따라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류재언이 소파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날카로운 눈빛도 여전하고, 말이 없는 것도 여전하고, 모든 게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데, 어째서 이렇게 달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

소현은 천천히 가서 류재언의 앞에 앉았다.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으니, 이제 휴대전화만 찾아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 류재언과 단둘이 오래 머무는 건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웠으니까.

하지만 평소와 다른 류재언이, 평소와 다른 얼굴로,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나 뭐 묻었어?”

소현은 당황했다.

그의 침묵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깊고 서늘한 눈빛이 자신을 향했다. 애달프게.

아무래도 아픈 쪽은 자신이 아니라 류재언 같았다. 얘가 진짜 왜 이러지, 오늘.

“은소현.”

견디기 어려운 침묵을 가르며, 그는 자신을 불렀다.

그리고 괴로운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소현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육감이랄까. 왠지 불편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만 같았다.

우습게도 류재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목이 찢어지고 타는 듯한 갈증이 심장으로 전해졌다.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도 심장 한구석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

“……결혼하자.”

번쩍, 하고 밤하늘을 환히 밝히며 천둥번개가 쳤다.

세찬 비가 쏟아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류재언이 두 번째 청혼을 했다.

◇ ◆ ◇

뉴욕이 이렇게 먼 곳이었던가.

정한은 아침이 되어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하필 밤에 소식을 듣게 되어 바로 떠날 수도 없었기에 마음이 더욱 타들어갔다.

눈앞에 소현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게다가 소현의 전화기는 내내 꺼져 있었다. 중간에 한 번 신호음이 가는 것 같았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고 이후 계속 꺼진 상태였다.

[뉴욕행 비행기 탔어요. 메시지 보면 어디 있는지 남겨줘요. 금방 갈게요.]

이륙 전까지 계속 전화를 걸어보던 정한은 결국 메시지를 보내놓고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소현을 사랑하는 남자가 지금 그녀를 데리고 있는 상황.

모든 걸 흘러가게끔 내버려둘 수 없었다.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소현을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왜 쓰러졌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정한은 애타는 가슴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솜을 찢어놓은 듯 흐리게 퍼진 구름 위로 비행기가 오르고 있었다.

소현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 ◆ ◇

“오늘 만우절 아니잖아.”

재언이 겨우 꺼낸 말에 대한 소현의 대답이었다.

그녀가 당황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재언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들끓었다.

어떤 식으로 얘기해도 말이 안 된다고 하긴 마찬가지일 테니, 재언은 그냥 결론부터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결혼하자. ……가능한 빨리.”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류재언 너 지금 좀 아픈 것 같아.”

이 정도 대답밖에 듣지 못하는 것도 모두 제 탓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던 예쁜 입술, 사소한 이야기에도 환히 웃으며 끄덕이던 얼굴,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던 사랑스러운 눈빛.

제 곁에 머물던 순간에는 당연하였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소현은 눈썹을 살짝 구기며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재언의 가슴을 서늘하게 베었다.

심장이 가빠졌다.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잘못을 고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소현이 자신을 받아줄까.

하지만 표현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그는 애타게 끓어오르는 속을 어찌 내보여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

가까스로 통증을 참으며 겨우 내뱉었다. 힘겹게 터져 나온 소리에 소현은 더욱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왜 그래, 너 정말.”

“……갚을게, 이제 다 갚을게.”

너를 외롭게 한 것, 너를 아프게 한 것, 너를 슬프게 한 것 전부.

“류재언…….”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소현의 음성도 사뭇 심각해졌다.

“네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파혼한 지 3년이 지났어. 남남보다 못한 사이야, 너랑 나.”

“내가 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재언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잘못했어.”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다음은 더 쉬웠다.

“내 잘못이다. 다 내가 잘못했어. 늦은 거 아는데, 내가, ……내가 잘못했어.”

창밖으로 눈물 같은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쉴 새 없이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가슴이 무너졌다.

이토록 쉬운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왜 깨닫지 못했을까.

바보처럼 왜 이제야…….

“나, 그런 말 들으려고 옆에 있던 건 아닌데.”

지척에 있는 소현이 마치 먼 곳에서 얘기하는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헤어진 건 누구 잘못도 아니고, 이제 와서 끄집어낼 필요 없는 것 같아. 그보다 돈이나 빨리 갚고 나도 이제 너 그만 괴롭혀야지. 매번 너한테 도움만 받고 면목이 없었어. 누가 보면 네 돈 뜯어내려고 이러고 있는 줄 알 거야.”

“갚을 필요 없어.”

매정하게 선을 긋는 소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끌어당겨 품에 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마음으로만 겨우 붙들고 말했다.

“나 너한테 돈 받을 생각 없어. 그것 말고도 원하는 거 있으면 다 얘기해. 전부 가능하니까. 뭐든지 해줄 수 있어. 평생 아무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줄게.”

“…….”

“그러니까 올해 안에 결혼하자.”

근사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소현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전하고 싶었지만 달리 멋진 말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청혼은 소현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당연해서였다면, 지금의 청혼은 이제 소현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아서였다.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도저히 소현이 없는 삶을 그려낼 수가 없어서.

그렇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나랑 결혼해.”

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소현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결혼하자고.”

재차 간곡하게 말하며.

“내가 너를, ……널 사랑해.”

그제야 겨우 내뱉었다. 이 모든 감정의 원천을.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이 한심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그리고 사랑을 말한 후에야 마침내, 소현에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재언아, 내가 너를.”

“…….”

한없이 슬픈 눈으로 소현이 말했다.

“……사랑하지 않아.”

그가 사랑이라 하였더니 그녀는 사랑이 아니라 대답하였다.

오직 그것만이 전부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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