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찾으러 왔어요.2017.10.13.
“미안하지만 재언아, 내가 너를.”
“…….”
“……사랑하지 않아.”
소현에게도 쉽지 않은 말. 하지만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흘러나온 말,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비가 내렸다. 아니, 부서지듯 쏟아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먹먹한 시선으로 소현은 재언을 바라보았다.
류재언이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구나. 저렇게 꽉 잠긴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애원할 수도 있었구나.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얼굴로 바라볼 수도 있었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소현의 마음은 어딘가에 붙들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안타까운 심정 그걸로 끝이었다. 안아줄 수도, 안길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너의 슬픔이 나를 울리지 않아.
너의 아픔이 내 심장을 건드리지 않아.
내 안에 가득한 건 오직 미안한 마음뿐.
그건 모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이내 재언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아. 내가 할게. 내가 잘해주고 내가 다 할게.”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간절하게.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얘기해. 뭐든 다 할 테니까.”
숨죽인 절규로 소현에게 매달렸다.
툭, 떨어진 눈물을 스스로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눌러 닦아내며 재언은 소현의 앞에 주저앉았다.
소현은 당황했다. 그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인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기에.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소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현이 자꾸 물러설수록 재언은 더욱 간절해졌다. 이대로 끝이라도 보겠다는 듯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재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 없었다.
정말 날 좋아하긴 하는 걸까, 그런 의심은 수없이 들었지만.
10년을 그렇게 보내왔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헤어지자는 소리 없이 계속 만나는 거겠지, 애써 스스로를 달래며 그렇게 재언의 곁을 지켰다.
지치고 또 지쳐 잔뜩 닳아버린 마음이 한계에 달했을 때, 바닥을 보고서야 결국 소현이 먼저 돌아섰었다.
그땐 기대도 했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재언이 곧 자신을 붙잡으러 와주지 않을까.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잡지 않는 냉정한 남자임을 알면서도, 매일 밤 울면서 기대했었다.
결국 그의 비서와 만나 식장을 취소하고, 드레스를 취소하고, 계약금을 돌려받고, 일련의 절차들 속에서 기대는 무참히 깨어져갔다.
한때 나무에 무성했던 이파리는 낙엽이 되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고, 결국 버서석 밟혀 가루가 되었다.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마음을 이제 와 어떻게 나무에 다시 붙일 수 있을까.
더 이상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시간들을, 이제 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아니, ……안 될 것 같아. 네가 어떻게 해도.”
떨어진 낙엽을 다시 나뭇가지에 붙인다고 봄이 오는 건 아니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 어린순은 새로 돋는다. 꽃도 새로 피고, 무성한 나뭇잎이 새로운 그늘을 만들 것이다.
또다시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가 되면, 무참히 밟아 가루로 만드는 게 아니라 곱게 치워줄 사람을 기다릴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예의를 지키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을.
“소현아. ……소현아.”
절절한 음성으로 부르며, 재언은 소파에 앉은 소현의 다리로 엎어지듯 고개를 묻었다.
잘못을 고하느라 무릎을 꿇은 건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쓰러진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재언은 완벽히 무너지고 있었다.
소현은 재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감정과 현실이 어긋난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몰라 숨죽여 울던 자신을.
고개를 파묻고 처절히 흔들리는 그에게서 서러운 눈물이 쏟아져 그녀의 다리 위로 번졌다.
소현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왜 진작 내게 이러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이젠 너도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알겠냐고 묻지 않았다.
아플 때 걱정 한번 해준 적 있었냐고, 약 한번 사다 준 적 있었냐고, 얼마나 야속했었는지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원망 또한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재언의 후회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아쉽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사랑이 때가 있는 것처럼 기다림에도 기한이 있었다.
그녀의 기대는 끝이 났다.
지난 시간들도, 지금 이런 재언의 모습도, 소현은 묵묵히 흘려보내기로 했다.
◇ ◆ ◇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재언은 인정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단번에 그래, 너는 그렇구나, 하고 돌아설 수 있겠는가.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된 사랑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현이 흔들리기는커녕 재차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모습에 재언의 가슴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그녀를 보내줄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나 호텔로 돌아갈게.”
“여기서 지내다가 서울에 같이 가.”
“여기 있으라고?”
당황스러운 눈으로 소현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인터넷과 택시만 있으면, 길을 몰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걸 안다.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뉴욕 지리를 잘 모를 거라는 핑계로 소현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심을 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재언은 낮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몸에 손끝 하나 안 대. 그냥 여기서 자, 늦었어.”
소현을 잡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었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같은 공간에 머물자고 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는 소현을 바라보다가 결국 약한 구석을 찾아 찔렀다.
“의사가 내일 다시 여기로 올 거야. 네 상태 지금 별로 좋은 거 아니니까, 그냥 여기서 쉬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눈앞에서 멀어진다면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실처럼 나약한 연으로 간신히 맺어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재언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현이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할 방법을 이제부터 찾아야만 했다. 시간이 필요했고, 소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여기 계속 있는 것보다는 호텔이나 서울로 그냥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래.”
“무리했다가 금방 또 쓰러지지 말고, 잠깐이라도 좀 쉬어.”
그동안 소현이 무리한 것도 이제껏 자신이 만든 상황 때문이었다.
그녀를 바쁘게 만드는 건 무척이나 쉬웠으나, 감정을 움직이는 건 이토록 어렵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런 게 우선이 아니었는데.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였는데 그걸 미처 몰랐다.
몰랐으니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겠지만.
그렇기에 재언은 더욱 미안했다. 소현이 제게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죄책감까지 느끼게 만든 자신이 이제 와 미친놈처럼 느껴졌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전부 내 욕심 때문이었지.
“류재언. 미안한데, ……나 너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거 이제 좀 불편해.”
“알아.”
소현의 솔직한 말도 아프지만 이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로(0)가 아닌 마이너스에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완벽히 이해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아가야 하니 현실을 직시하는 건 반드시 필요했다.
로직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재언의 방식이다.
“네 마음 편해지면 고백도, 청혼도, 그때 다시 생각해. 너한테 답을 당장 내놓으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소현의 입장에서는 오늘 일이 얼마나 갑작스러웠을지 재언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올해 안에 결혼하자고 말은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난 이미 대답했잖아.”
하지만 소현은 생각보다 단호했다.
네가 어떻게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눈빛 위로 미안한 기색만 비칠 뿐이다.
“사람 일 모르는 거야.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거절해. 얼마든지.”
“……지금은?”
“그래, 지금은.”
인정하기로 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젠가 소현의 마음이 돌아설 날까지, 자신을 다시 봐줄 날까지,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수없는 거절로 매번 심장이 찢기는 벌을 받으라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류재언.”
소현의 눈썹이 그믐달처럼 기울었다. 부르는 이름이 아프게 들렸다.
“……재언아.”
“얘기해.”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하려는 듯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빈틈없이 촘촘하게 벽을 쌓아올린 채 입장을 단호히 밝혔다.
소현의 마음이 이제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재언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시선을, 그 마음을, 모두 빼앗아 제게로 돌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 그럴 수 없다는 것까지도…… 슬프지만 알고 있었다.
“그래, 알아.”
낮은 음성으로 수긍했다. 쓸쓸함의 틈을 채우는 건 소현의 의구심이었다.
“아는데……?”
그런데 자신에게 왜 이러냐는 듯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소현이 바라보았다.
“상관없어. 만나고 싶으면 만나. 그것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사랑하고 싶은 만큼. 함께 하고 싶은 만큼. 네가 원하는 만큼 다 해도 괜찮아.
실컷 만나고, 실컷 사랑해보고, 질릴 정도로 흠뻑 빠졌다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와.
“기다릴게.”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부디, 돌아오기만 해줘.
◇ ◆ ◇
“은소현이랑 연락했어? 안 돼? 아직도?”
마침내 정한이 앤드류의 오피스에 도착했다. 뉴욕 시간으로 아침이었다.
앤드류가 흥분하며 소현과 연락이 되었는지부터 물었다. 어제 소현이 쓰러지고 갤러리에서 나간 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데 그런 그녀와 아직 통화조차 못 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한의 심정이 어땠을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본인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정한이 알고 있으리라 상상도 못 할 텐데. 게다가 여기까지 달려온 상황도 모를 것이고.
두 사람이 어서 연락부터 닿아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설마 이렇게까지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 못 했기에 앤드류는 더욱 안달이 났다.
“병원에서 나가서 호텔로 간다고는 했었다는데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니……. 은소현이 전화를 안 받으면 찾을 수도 없다는 게……. 이거 진짜, 하아, 답답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은소현이 눈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진 몸으로 뉴욕 한복판에서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뉴욕에 호텔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어떻게 찾느냔 말이야. 크리스한테 어느 호텔로 데려가는지 물어보라고 할 걸 그랬어.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될 줄 그땐 생각도 못 했지만.”
앤드류의 말을 뒤로하고 정한은 잠시 숨을 돌렸다. 말없이 창가에 선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밖을 바라보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소현에게 전화했지만 여전히 불통이었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택시에 오르고 겨우 앤드류의 건물에 도착했었다.
1, 2층에 있는 갤러리는 자신의 전시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지만 정한은 안중에도 없이 바로 오피스로 뛰어 올라와 앤드류를 만난 것이다.
쓰러졌다는 소현의 생각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소현이 ‘다른 남자’와 있는 상황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다른 남자가 바로 ‘류재언’이라는 사실이었다.
소현의 전 약혼자이면서,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해 곁을 맴도는 남자.
가장 위험하고도 불안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한시도 참을 수 없어서,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어서.
“……앤디.”
마침내 정한이 입을 열었다.
“갤러리나 경매 통해서 그림 구매한 기록 있을지도 몰라, 그 남자.”
“그림 구매 기록?”
“내 그림이나 다른 작품 다 상관없어. 앤디 갤러리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면 더 좋고.”
소현이 제이 라르고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류재언이 의뢰한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정한은 그가 이쪽에 제법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여배우의 결혼식 기획, 밤하늘 화집, 특별전, ……이 모든 건 류재언이 실제로 라르고의 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직접 뉴욕까지 와서 갤러리 특별전을 볼 정도라면, 아마 작은 그림이라도 구입에 성공했거나 시도하려던 전력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뉴욕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본 결과였다.
“아, 그래. 알아볼게.”
잠시 후 앤드류가 직원을 통해 가지고 온 기록은 정한의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앤드류의 갤러리를 통해 ‘류재언’이 작품을 구매한 기록은 다섯 건.
“한, 여기. 매번 같은 주소였어.”
예술작품만을 전문으로 배송하는 업체에 전달한 주소는 다섯 건 모두 동일했다.
류재언의 뉴욕 거주지.
이제야 겨우, 소현을 만날 시간이었다.
◇ ◆ ◇
이곳이 뉴욕 아닌 서울이었다면.
게다가 쓰러질 정도로 지친 몸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였다면.
그렇다면 이런 불편한 상황도 없었을 텐데.
아침이 밝았고, 소현은 겨우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류재언은 이를테면 신사였다. 이전부터 싸늘한 면은 있었으나 소현을 강압적으로 휘두르려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었다. 지나치게 매너 있어서 오히려 그런 면이 더 매정하게 느껴지고 서운할 때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
오랜 세월 함께했던 경험으로 그나마 안심할 수는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소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밤을 보냈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해도, 오늘 안에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호텔에서 네 짐 이쪽으로 가져올 거고, 아침식사로 죽 부탁해놨어.”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소현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곳에서도 재언은 능숙하게 사람을 시켜 원하는 모든 걸 해냈다.
“나 그럼 좀 씻을게.”
거의 하루를 꼬박 누워 있었기에 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었으니 찝찝한 몸을 어서 씻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단단히 문단속을 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따스한 물줄기가 몸으로 떨어지자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어제 갑작스러운 류재언의 청혼으로 가득했던 잡념을 애써 밀어냈다. 그랬더니 생각의 빈자리를 채운 건 또 다른 그리움이다.
서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굉장히 오래된 기분이었다.
정한은 무얼 하고 있을까. 탐미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일까.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저녁은 뭘 먹었을까.
……보고 싶었다. 미칠 만큼.
이렇게 잠깐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목소리도 듣고 싶고, 다정한 눈빛도 그리웠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만 지켜봐도 된다고. 마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 이제 그만둬도 된다 말하고 싶었다.
가슴속이 온통 정한으로 가득 차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애타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소현은 샤워부스에서 물기를 닦고 나왔다.
“아, 짐 가져온 다음에 씻을 걸 그랬나…….”
이미 씻었는데 벗어둔 옷을 다시 입기도 그렇고 해서 둘러보니 재언의 것으로 보이는 가운이 있다. 일단 저걸 입고 있다가 짐이 도착하면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월 재질로 된 큰 가운에 소현의 몸이 폭 파묻혔다.
젖은 머리를 드라이 하려고 할 때였다.
벨이 울리는 소리, 재언이 문을 열기 위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지금 왔나 보네. 빨리 옷 가져와 입어야지.’
소현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가운을 꼭꼭 여미며 얼른 밖으로 나가 물었다.
“내 짐 왔어?”
그리고 우뚝 멈추고 말았다.
열린 문밖으로 복도에 서 있는 사람, 분명 정한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게 현실일 수가 있지. 저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지금 저기 서 있는 거지.
머리가 멍해지고 주변이 하얗게 날아가며 오로지 눈에는 정한만이 보였다.
중요한 건,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는 사실이었다.
울컥 치솟는 마음.
소현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다.
그리움이 터졌다.
점차 걸음이 빨라져 달리듯, 날듯이 그에게로 향했다. 재언을 지나쳤다는 것도 몰랐다.
정한에게 다가가 그대로 와락 안겨버렸다.
그가 뒤로 밀리며 품에 가득 소현을 받아 안았다.
마음과 마음이 완벽히 하나가 되는 깊은 포옹.
비로소 벅찬 음성이 낮게 깔렸다.
“소현 씨 찾으러 왔어요.”
대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감정이 치솟은 소현이 그에게 매달리듯 꽉 끌어안기만 했다.
정한은 한 손으로 소현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 안은 채 다짐하듯 말했다.
“이제 더는 못 기다려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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