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온전하고도 충만하여 한없이 아름다운 사랑을.2017.10.30.
소현은 캔버스 앞에 선 정한을 하염없이 보고 또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현실을 보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영화를 보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숨이 막히도록 자신에게 커다랗게 다가왔던 라르고의 작품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한은 소현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완전히 몰두한 중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은 이내 제대로 옷을 챙겨 입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시간도 꽤 흘러 해가 이미 중천이다.
“배고프지 않으려나…….”
올라갈 땐 분명히 새벽이었는데.
소현은 씻고 옷을 입은 후 주방으로 들어섰다. 솜씨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먹을 걸 준비해두면 좋지 않을까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과 야채, 베이컨이 있어 꺼냈다. 오믈렛을 만들려던 참에 현관 쪽에서 벨이 울렸다.
어쩌지 싶었지만 그래도 위층으로 올라가 정한을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구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소현이 현관으로 향하는데, 다행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소현! 안에 없어? 나야!”
밖에 한국인이 와 있나 싶을 정도로 분명한 한국어 발음을 들으니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린 소현이 웃으며 문을 열자 역시나 앤드류였다.
“왔어요?”
화창한 햇살을 피해 얼른 안으로 들어온 앤드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숨을 돌렸다.
“우리 하니는? 아니, 너네 하니는?”
“너네 하니요?”
“이제 나만의 하니가 아니라는 사실이 슬프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여기까지 온 서정한이 어떻게 ‘우리 하니’겠어. 은소현 너 때문에 미친 듯이 날아왔으니까 확실히 ‘너네 하니’지.”
앤드류가 쓸쓸한 티를 팍팍 내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애틋한 눈빛을 하고는 이어서 한다는 말이…….
“잘해줘. 잘해줘야 돼……. ‘구 우리 하니’는 밤에 마시는 캔맥주를 좋아하고, 또 아기들을 좋아해……. 예쁜 아기만 지나가면 눈에서 꿀이 막 뚝뚝 떨어져서 혼자 어쩔 줄을 몰라 하지. 그리고 ‘구 우리 하니’는 가끔 피곤할 때 잠꼬대를 하기도 해. 잠꼬대했다고 얘기해주면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모른 척하는데, 천사 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아주 뻔뻔하지 뭐야. 흑.”
느릿느릿 아련하게 말하는 앤드류의 뒤로 예전 영화 삽입곡인 ‘I Believe’가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구 우리 하니’는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어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끝까지 안 하거든. 순해 보여서 쉽게 봤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어……, 조심해…….”
“알았어요, 알았어.”
적당히 막지 않으면 밤이라도 새울 기세다. 앤드류의 장난을 끊으면서도 소현은 여전히 웃었다. 그래도 캔맥주와 아기들, 잠꼬대 등 새로운 정보는 감사히 접수하면서.
“그런데 아침부터 왜 온 거예요? 온다는 말 없었는데.”
이제야 용건을 말하며 앤드류가 무언가를 꺼냈다.
“한이 전화를 안 받더라고. 이거 주러 왔어. 네 것 맞지?”
“어, 내 휴대전화!”
어디서 사라진지 알 수 없어 포기하려던 휴대전화였다. 소현은 반가운 얼굴로 앤드류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아들었다.
“어디에 있었어요?”
“갤러리에서 찾았어. 구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는지, 장식 테이블 밑에 가 있더라고. 한이 찾아봐달라고 해서 밤에 싹 다 뒤졌어.”
휴대전화를 두 손에 소중히 쥔 소현의 눈이 커졌다.
“정한 씨가 얘기했어요?”
“어, 갤러리에서 안 나오면 너 갔던 병원으로 쫓아가서 다 뒤질 생각이었나 봐. 은근히 집요한 데가 있다니까.”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걱정했었다. 비밀번호를 걸어두기는 했지만 누군가 해제를 해서 안에 든 정보를 본다면 큰일이었다.
휴대전화가 비싼 데다 할부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추억이 담긴 사진들 때문도 아니었다.
하태랑의 결혼과 관련한 자료들은 수시로 확인할 수 있도록 사무실 컴퓨터뿐 아니라 휴대전화 내에도 보관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일이나 파일 자동저장 앱에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니 만에 하나 배우 하태랑을 아는 누군가가 소현의 휴대전화 안을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소속사의 정식발표 전에 자신의 실수로 결혼설이 유출된다면……, 소현은 그 다음을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기에 조심, 또 조심을 하고 있었다. 류재언에게도 몇 번이나 각별히 주의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고.
“다행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어찌 귀국하나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찾으러 나가려 했는데, 정한이 이렇게 먼저 부탁해두었다니 고마움을 넘어서 감동과 안도감이 함께 들었다.
“한은 어디 있어?”
“위층에요.”
싱글싱글 웃던 앤드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진짜?”
“네.”
“위층에? 정말?”
“네.”
곧 화사한 웃음이 사르르 퍼졌다. 앤드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계단 쪽을 보며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웃었다.
엄청나게 기다렸던 것이 분명했다. 정한이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살다 보니 결국 이런 날도 오네.”
앤드류는 정한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 올라가요?”
소현의 질문에 앤드류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한은 위층에 올라오는 거 되게 싫어해. 여기 일해주는 사람들도 위층에는 절대 못 올라오게 했었거든. 나도 당연히 한에게 허락받기 전엔 못 올라갔었고, 간신히 허락받아야 올라갈 수 있…….”
앤드류의 말이 느려졌다. 설마…….
“너 올라갔었어?”
“……네.”
“헐, 대박!”
한국어 감탄사를 또 깨알같이 써먹으며 앤드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소현을 보았다.
“그럼 봤어?”
“봤죠.”
“목적어까지 얘기해봐. 뭘 봤어?”
“‘목적’어도 알아요? 그게 아니라, 엉뚱한 비밀 헛짚고 괜히 실수할까 봐 이러는 거죠, 지금?”
모든 걸 다 알게 된 소현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앤드류가 차마 자기 입으로 얘기 못 하는 한 가지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몰라, 몰라, 아무튼 너부터 얘기해봐. 위층에서 뭘 봤어?”
푸른 수염의 방에 들어간 사람이라도 보듯 당황하는 앤드류에게 소현이 똑 떨어지는 대답을 내놓았다.
“정한 씨가 그림 그리는 거요.”
“헐…….”
“그거 보고 얼마나 놀랐다구요.”
“그래, 놀랐겠다. ……근데 나도 놀랍다. 한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다 줬네, 다 줬어. 한은 이 정도면 완전히 다 준 거야.”
의외도 이런 의외가 없다는 듯 앤드류는 경탄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이 너랑 이 관계 엄청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와……, 진짜 사랑하는구나. 근데 내가 이럴수록 너는 더 부담스럽겠지?”
“살짝 좀…….”
“그래, 지금 충분히 부담스럽겠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큰 부담을 가지고 엄청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해. 그래서 두 사람 끝까지 열심히 백년해로하는 거야. 그럼 돼. 알았지?”
“와, 대체 미국인이 ‘백년해로’는 어떻게 알았냐구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쓸데없는 거 자꾸 물어보지 마. 난 뭐든지 다 아니까 네 앞길이나 걱정하라고. 너 우리 하니, 아니 너네 하니한테 완전히 코 꿰인 거야.”
엄중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만큼 달콤하고 행복한 경고.
가장 가까운 지인인 데다 일적으로도 가장 밀접한 관계의 앤드류조차 위층 출입이 어려웠다고 증언하는데, 자신에게는 그토록 관대했던 정한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세상을 상대로 지켜온 비밀을 자신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던, 새벽녘 정한의 눈빛과 손길이 아직 선했다.
이렇게 코가 꿰인다면 백번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한 작업하는 거 진짜 멋있지?”
고개를 끄덕이는 소현의 볼이 발그레했다.
“얼굴이 이미 그림이긴 하지 뭐. 내가 처음에는 진짜 스타 작가로 만들고 싶어서 제발 인터뷰 좀 하자고 사정했었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 사실 저 얼굴은 지금도 너무 아까워.”
“그런데 왜 자기라는 걸 알리지 않고 작업하는 거예요, 정한 씨는?”
소현이 생각하기에도, 이렇게 젊고 잘생긴 작가라면 이미지 마케팅하기도 훨씬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세상의 기준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한은 관심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매사에 조심스럽고. 난 이해할 수 없지만, 시끄러운 걸 엄청 싫어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화가의 의무나 책무도 아니기에, 정한은 자신의 삶과 직업 사이에 거리를 두고 균형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아마 한이 라르고라는 이름 뒤에 있지 않았더라면 훨씬 힘들어했을 거야. 그림을 금방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고. 처음 출품했을 때부터 너무 어린 나이기도 했으니까.”
그걸 두고 사람들은 온갖 추측을 하고 말을 만들어내고 상상을 할지언정, 정한은 그저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갔다. 자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서.
그의 이야기는 소현으로 하여금 제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행여 자신의 그릇 크기보다 더 많은 물을 담으려 한 적은 없었는지.
흘러넘치는 물을 보고 어찌할 바 몰라 힘들어하지는 않았었는지.
욕심을, 기대를, 조금 낮추지 못한 걸 뒤늦게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를.
자신감과 자만은 다르다. 의욕적으로 달려드는 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소현은 때때로 그랬다. 스스로를 잘 몰랐다.
세상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이, 몰라도 너무 몰라서 스스로를 힘들고 아프게 했다.
조금 더 편하게 해도 되는데. 너무 몰아치지 않아도 되는데. 덜 인정받아도 되는데. 너무 많은 걸 이루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소현은 새삼 정한이 놀라웠다.
그는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리는 게 좋아서, 그릴 수밖에 없어서 그렸을 뿐이었다. 그런 사실은 원치 않는 유명세를 치러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정한이 세상 앞에 나서지 않고 ‘제이 라르고’라는 이름을 만든 건 바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해야 다치지 않는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외롭고 험한 세상. 자신을 가장 알아주고 소중히 대해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해야 다른 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듯, 정한은 소현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다. 온전하고도 충만하여 한없이 아름다운 사랑을.
소현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정말 사랑받게 되었구나.
그런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고 있구나.
새삼스레 그 평범한 깨달음에 세상은 온통 은은한 빛으로 뒤덮였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지속하는 것처럼 소현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 ◆ ◇
“언니, 거기 있는 동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어요.”
- 너는 어때? 별일 없고?
사무실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
애주는 뉴욕에 있는 소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나누는 중이었다.
“별일 있을 게 뭐 있겠어요. 주말에 식 없으니까 내내 쉬다가 오늘 출근했는데요.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서울이랍니다. 여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쉬다 와요. 언니 근데 거기서 혼자 있어서 좀 심심하겠다.”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적적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소현이 뜻밖의 말을 했다.
- 정한 씨가 와서 같이 있어.
“네에? 진짜요? 뉴욕에?”
-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헐……, 책방까지 닫고 언니 보러 거기 간 거예요? 이제 언니 며칠만 있으면 돌아올 텐데, 그걸 못 참고?”
수줍게 수긍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주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소현이 쓰러졌던 사실까진 모르고 있지만, 알았다 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까운 지방도 아니고, 머나먼 뉴욕까지 달려갔단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소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셈인가.
“대박이다, 진짜. 어마어마한 사랑이네요. 우와, 언니 너무 좋겠다.”
그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니.
다행스러웠다. 그 사람이라면 소현의 마음을 달래주는 데 모든 힘을 쏟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면 형부 자격 합격이랄까.
“마음 같아서는 언니 오래오래 더 있다가 오라고 하고 싶네요.”
- 에이, 아니야. 내일 비행기니까, 서울 돌아가면 사무실에 얼른 나갈게.
“여기 걱정은 됐고 데이트나 많이 하고 신나게 놀다 와요.”
애주는 전화를 끊고 서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쩐지 소현의 목소리가 전보다 밝아졌다 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있다니, 괜히 애주의 기분까지 다 좋아졌다.
활기차게 걸음을 옮기며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던 애주는 잠시 멈춰 섰다.
건물에서 류재언과 중년의 여인이 함께 나오고 있었다.
“류 대표님 어머님이구나.”
류재언은 언제나처럼 냉기 어린 표정이었지만 그의 곁에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들이 저렇게 뻣뻣하니 고생이 많으시겠네.”
대기 중인 차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 걸 보니 사무실에 방문한 어머니를 배웅하러 나온 듯했다.
류재언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자주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애주의 엄마는 저 교수는 상냥하게 말도 참 잘하고, 영양 상식과 정보를 무척 쉽게 이야기해준다면서 TV에 나올 때마다 칭찬을 했었다.
어디 그뿐일까. 소현에게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었다.
‘예비 시어머니’로서 분에 넘치게 잘해주시고 예뻐해주신다고.
그분들은 소현이 근무하던 옛 회사에 간식거리를 자주 보내주시기도 했다.
소현의 생일에는 커다란 꽃바구니와 그 많던 직원 수에 맞춘 컵케이크와 고급도시락까지 보내주셔서 다들 감탄했었다.
“아깝다, ……언니가 그렇게 고마워하고 좋아했던 분들인데. 저 시부모님 자리는 아무리 봐도 참 아까워.”
류재언 대표의 무심함을 모두 상쇄할 정도로 그 부모님은 너무도 인자한 분들이었기에 애주는 아쉬움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언니가 어른들 사랑을 많이 받으며 결혼생활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고.
그때는 소현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녀가 회사를 퇴직할 때는 이제 시댁과 남편 재력 믿고 일할 필요도 없나 보지 하고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이후 소현의 파혼 소식을 듣고 고소해하던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애주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행복의 잣대가 저마다 다른데, 자신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고 혼자 질투하고 혼자 상처받고, 그러다 나쁜 일이 생기면 음험하게 기뻐하는 이들을 가까이하기 싫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은 그나마 보고 거를 수 있으니 다행이다.
때로는 그 추악함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차 실장!”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애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 마 팀장님. 안녕하세요. 이쪽엔 웬일이세요?”
“상담 때문에. 우리 신부님 회사가 이쪽이라서 잠깐 들렀거든. 차 실장네 사무실도 이쪽이었지, 참. 어쩜 이렇게 다 만나네.”
마진혜 팀장은 애주의 팔짱을 끼며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전 회사에 입사할 때부터 워낙 잘 챙겨주던 상사였다. 마 팀장 덕분에 빠르게 일을 익히고 신랑신부와의 소통도 더 수월해진 면이 있었기에 애주에게 있어 그녀는 늘 고마운 선배였다.
애주가 소현과 함께 일하려고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너무나 아쉬워하며 진심으로 걱정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왠지 친해지기는 어딘가 어렵고 불편한 사람이었다. 이유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기에 그저 서로 취향이 다른 탓이라고 여겼다.
“차 실장 바빠? 우리 차 한잔해야지.”
“네, 다음에 지은이랑 소현 언니랑 같이…….”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도 모르게 약간 거리를 두고 철벽을 쌓아올린다는 걸 애주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오랜만인데 이렇게 인사만 하고 가기 너무 아쉽잖아. 맨날 다음에, 다음에. 자기네 사무실 바로 여기 아니야? 바로 앞인데 차 한 잔도 안 줄 거야?”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단지 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단호하게 선을 긋기에는 서로 감정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가깝지 않아서 그렇지 사이는 오히려 좋은 편인데.
생글생글 웃는 마 팀장을 보니, 애주는 좋고 편한 것만 가리는 스스로가 마치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주 묘했다.
“아니에요. 같이 올라가요. 이쪽이에요.”
그래, 사회생활이 마냥 편할 수만 있나. 어려운 사람과 차 한잔할 수도 있는 거지.
애주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미안하게 느껴졌다.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마 팀장과 함께 로비로 들어섰다. 그때 어머니를 보내고 들어오는 류재언과 맞닥뜨렸다.
“차애주 씨.”
살짝 목례만 하고 지나가려던 애주를 불러 세웠다.
“은소현……, 오늘 출근했습니까?”
“네?”
스케줄을 왜 나한테 묻지. 출장 보낸 사람은 본인이면서.
애주는 의아한 얼굴로 류재언을 바라보았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언제 들어온다는 얘기는 있……, 아니, 됐습니다.”
류재언은 물어 뭐하겠냐는 표정으로 짧은 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애주의 옆에 꼭 붙어 있던 마 팀장은 이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다가 사무실에 올라오자마자 입을 뗐다.
“아까 그 사람이 은 실장 예전 약혼자 맞지?”
“아, 네.”
너무 자세히 파고들면 곤란한데, 싶었는데 마 팀장은 다행히 더는 묻지는 않았다. 다만 질문의 방향이 다른 쪽으로 훅 튀었다.
전기포트 스위치를 누르는 애주의 등에 대고 마 팀장은 더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은 실장은 어디 갔나 봐.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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