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40화 (40/52)

40화– It is alright to cry.2017.11.17.

“나 왜 울보가 됐지……. 원래 안 그러는데.”

잠들지 못하는 새벽.

누운 채 정한의 품을 파고들며 소현이 중얼거렸다.

정한은 더욱 그녀를 당겨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근한 이불 속 그득한 따스한 온기에 마음까지 차올랐다.

“울보가 뭐가 어때서요.”

자신을 이렇게 믿고 의지하는 소현이 오히려 고마웠다.

왜 모를까. 원래는 눈물에 인색한 여자인 걸.

여태껏 버티고 살아온 세월이 그걸 증명했다. 매일같이 울고 무너졌다면 지금까지 홀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특별함을 정한은 알고 있었다.

씩씩하게 소리치고 환히 웃으며 돌아보던 소현이었다.

그 모습에 반했었다.

진흙탕에 굴러도 지우지 못할 반짝거림이 그녀에게 있었다.

요란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을 다하며 묵묵히 살아내는 생명력이.

순간순간에 모든 걸 쏟아부으며 삶 가득 은은한 빛을 퍼뜨리는 기운이.

활기가, 열정이, 그리고 분노 없는 사랑이 그녀에게 있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바람 한 점에 기뻐하는 마음이 진정 그녀에게 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울지 않는다고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며, 불평하지 않는다고 서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살아내기 위해 꾹꾹 누르고 참아온 세월임을, 정한은 빛 너머 드리워진 그림자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소현의 빛나는 생명력을 사랑하면서도 때로 제 앞에서 무너지기를 바랐다.

울어야 살 수 있으니. 견디기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기에.

그녀가 쉴 품이 오직 자신의 안이기를.

이토록 원했었다.

“좀 울어도 괜찮아요. 안 울고 어떻게 살아요. 아프면 울어야지.”

제게로 와서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모두 쏟아내기를.

이토록 간절하게 원했었다.

안아주고 싶어서. 그 눈물 닦아주고 싶어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리하여 다시 살아낼 힘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욕심으로 눈물을 바랐다.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가짜눈물이 아님을 그가 먼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꾸 울면 진짜 바보 같은데.”

정한은 품에서 그녀를 조금 떨어뜨렸다. 그의 손은 하염없이 소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새벽빛이 배인 눈으로 소중한 보물을 보듯 바라보며.

“울보면 어떻고 바보면 어때요.”

내 앞인데.

내 품인데.

“더 울어요. 울어도 괜찮으니까.”

지금처럼 마음껏,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흠뻑.

그래야 살 수 있어요.

“아……, 정한 씨 진짜…….”

예쁘게 맺힌 눈물을 엄지로 쓸어주는데 소현이 말했다.

“내가 못 살겠다, 정말.”

“…….”

“아니, ……살겠다.”

얼굴을 감추듯 다시 품을 파고들며 그녀가 허리를 꽉 안았다.

“정한 씨 때문에 못 살겠고, 살겠고.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촉촉이 젖은 음성이 간지럽히듯 안겨들었다.

그녀가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한은 투정하듯 중얼거리면서도 바싹 달라붙어 안긴 소현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생명의 온기가 정한에게도 가득히 배었다.

“정한 씨, ……혹시 그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아요? ‘빅 히어로’.”

푸른 새벽이 머금은 따스한 침묵을 가르며 소현이 품속에서 조그맣게 물어왔다. 정한은 그녀를 안고 조용히 대답했다.

“음……, 알긴 하는데 작품은 아직 못 봤어요.”

소현이 고개를 들어 정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베이맥스’라는 로봇이 나와요.”

“로봇이었어요? 포스터에 있는 하얗고 커다란…… 북극곰인 줄 알았는데.”

“네, 맞아요. 북극곰 같고 커다란 풍선 같고 마시멜로 같은 애요.”

뜬금없는 애니메이션 이야기에 정한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눈물의 흔적이 남은 얼굴로 조용히 속삭이듯 소현이 계속 이어 말했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의료 서비스용 로봇이에요.”

“그렇구나.”

“그런데 정한 씨가 꼭 베이맥스 같아요.”

소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물론 비주얼만으로는 전혀 접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베이맥스는 주인공 소년의 형이 만든 로봇이었어요. 그런데 그 형이 사고로 죽고 난 뒤 소년한테 베이맥스가 그러거든요.”

소현이 정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울어도 됩니다. 눈물은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죠.’라고.”

It is alright to cry.

Crying is a natural response to pain.

소현을 위로해주었던 애니메이션인 듯, 그녀가 마음을 담아 떠올리는 대사에 정한의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다.

“좋은 말이네요. 로봇이 그런 말도 해요?”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뿐 아니라, 베이맥스는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로봇이었어요. 완전 힐링 캐릭터였죠.”

베이맥스의 품에 안기는 소년 히로를 보며 그녀도 함께 위로받았었다.

눈물은 나쁜 게 아니라고.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한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존재가 있었다.

“정한 씨가 꼭 그 베이맥스 같아요.”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소현이 하는 말이 얼마나 근사한 칭찬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베이맥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가 다시 꽉 안으며 정한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는 더없이 감사한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음에, 그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음에, 깊이 감사했다.

“정한 씨도 꼭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이렇게 안기고, 울고, 그래야 해요.”

“……난 괜찮아요.”

당신의 나무그늘이, 당신의 ‘라이너스의 담요’가, 당신의 ‘베이맥스’가.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두요, 꼭…….”

소현이 오물거리듯 말하며 품에서 잠이 드는 순간, 정한 역시 그녀의 존재에 위로받았다.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날들.

품이 품을 안는 순간들.

감사한 시간이었다.

◇ ◆ ◇

- 은 실장한테는 전화도 못 해보겠더라.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애주는 마진혜 팀장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간 연락이 없던 마 팀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좀 괜찮아? 여기저기 연락도 많이 받을 것 같아서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걱정이 돼서 내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뭐 이런 일이 다 있니.

“괜찮을 리가 없죠…….”

이렇게 쑥대밭이 되었는데, 하고 생각하며 애주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소현이 새벽에 정한에게 달려가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치 질식사 직전에 숨 쉴 틈을 찾는 사람처럼, 간절하고 처절했었다.

그녀가 안쓰러웠다.

- 아무리 그래도……, 은 실장도 조금만 조심하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겠지만……. 그러게 항상 말조심을 해야…….

“언니가 그런 거 아니에요.”

은근히 소현을 탓하는 말에 애주마저 마음이 상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말했다. 소현이 하태랑의 결혼에 대해 쉽게 떠들어서 일이 생겼다고.

자신이 아는 소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믿었고, 믿고 싶었다. 그 믿음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해본 적은 없었다.

- 그래, 아니겠지. 나도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잖아. 은 실장이 일부러 떠든 게 아니라고 해도, 세상엔 비밀이 없으니까. 어쩌다가 얘기가 퍼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인터넷상에서 처음 돌기 시작한 말부터 그랬다. 증거가 있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문서가 유출이 되었다면 해킹이라도 당했나 의심을 할 텐데, 그게 아니라 순전히 ‘말’뿐이었다.

웨딩플래너가 다른 사람한테 말했다더라. 누가 들었다더라. 어디서 그랬다더라. 그렇다더라. 그렇게 들었다더라. 등등.

그 안에 명확한 건 ‘하태랑의 담당 웨딩플래너’가 ‘하태랑의 결혼’에 대해 떠들었다는 것뿐.

거짓과 진실이 흐릿한 하늘처럼 부옇게 섞여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애주는 지금 통화하고 있는 상대가 어떤 짓을 했는지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상식을 가진 사람이 예측 가능한 범위의 악행이 아니었다.

시선을 모호한 안개 쪽으로 돌려놓고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자의 속내를,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마 팀장은 시종일관 걱정스러운 음성을 이었다.

- 두 사람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잘되어야 하는데, 뭐 이런 일이 다 생기고 그러는지 몰라. 너무 힘들겠다. 근데 애초에 이건 비밀이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 같아. 식 준비하려면 그 사이에 알게 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얘기 한번 돌면 순식간에 퍼지잖아. 어디서 누가 들었는지, 봤는지,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이게 좀 어려워요. 언니는 억울한데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서.”

- 그치. 뭐 최초유포자 같은 게 명확한 것도 아니고.

“일이 참 희한하게 됐어요. 다들 그냥 애매하게 ‘들었다’라고만 하면서 얘기가 점점 보태지니까요. 누가 소문을 내도 잡기 힘든데 더욱이 인터넷이니…….”

- 그럼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네.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어떻게 할 거야. 내용이 뭐 명예훼손이나 모욕도 아니고. 각자 들은 사실을 얘기하는걸. ……에휴, 그러니까 은 실장이 조금만 더 조심했으면 좋았을걸.

“……전화 오네요. 저 이만.”

마 팀장과 얘기가 길어질수록 애주는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오지도 않는 전화를 핑계로 끊으려고 할 만큼.

- 많이 힘들 텐데 그래도 옆에 차 실장 있어서 다행이야. 은 실장 좀 잘 챙겨주고. 그럼 또 전화할게.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고 난 애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리하게 썼던 인터넷이 한순간에 이렇게나 끔찍하게 느껴질지 몰랐다.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검은 손을 보는 기분이었다.

암흑을 방패 삼아 휘두른 칼끝이 누군가의 가슴을 베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속에서 소현은 누구라도 마음 놓고 욕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본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 이런 소릴 듣는 건 당연하다고 모두가 난도질을 합리화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소현이 다시 편안하게 웃을 수 있을까.

애주는 속상한 마음으로 ‘유인엔터’ 사무실에 내려갔다.

하태랑의 예비신랑 마크 윤이 밝혀지고, 그의 옛 애인 손채린까지 등장했으니 일이 복잡해진 상황이다. 류재언은 여전히 수습에 바쁠 것이다. 어느 정도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지 싶어 애주가 기획사가 있는 층으로 갔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던 애주는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걸 어떻게 다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마크 윤 소송 거는 스케일 장난 아닐 텐데.”

애주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얼굴을 가리듯 손을 올렸다. 자신이 소현과 일하는 사람인 줄 알면 그들이 대화를 중단할 것 같아서였다.

역시 애주를 보지 못한 직원들은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으로 와 기다리는 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지, 엄청나겠지. 광고까지 그렇게 다 준 줄은 몰랐네.”

“계약까지 극비였다고 하니까. 마크 윤 세력 진짜 대박이지. 결혼도 안 했는데 그 청바지랑 IT 광고 아시아판까지 미리 땡겨줬으면, 결혼한 다음에는 얼마나 더…….”

“그러니까. 그거 다 마크 윤이 엮어준 건데, 하태랑 좋다 말았겠다.”

“그래도 그런 남자랑 어떻게 결혼해. 차라리 잘됐어. 나중에 알았어봐. 그냥 지금 힘들고 아쉬운 게 낫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맞다, 소송. 마크 윤이 진짜 소송할까?”

“하겠지. 지금 엄청 열 받았을 텐데. 손채린은 인터넷 끼고 선전포고했으니 거긴 건드리기도 애매해지고 이쪽에다가 화풀이 제대로 하지 않겠어?”

애주는 그간의 상황을 토대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크 윤이 힘을 써서 하태랑에게 글로벌 기업들의 아시아판 광고계약에 도움을 주었는데, 결혼 스캔들과 함께 광고 역시 진행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계약조항에는 당연히 마크 윤과의 결혼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광고 콘셉트에 결혼한 톱스타의 이미지를 반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하태랑이 결혼하지 못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광고계약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위약금인데, 아무래도 마크 윤은 하태랑과 ‘유인엔터’에 책임을 물음으로써 금전적인 타격을 입히려는 상황 같았다.

극비로 하려던 결혼사실 유출은 발표를 앞당겨 진행함으로써 수습할 수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마크 윤의 신원이 드러난 것이었다. 결국 그로 인해 하태랑과 마크 윤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흘러갔으니까.

“결국 우리 쪽 책임이 됐잖아.”

“엄연히 말하면 ‘우리’ 책임은 아니지. 웨딩플래너 책임이야. 하태랑 결혼 얘기 턴 거는 몰라도 마크 윤 얘기는 하면 안 됐지. 그것만 안 했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됐잖아. 직원들 대부분도 몰랐을 정도로 극비 중에 극비였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우리 대표님이 그 여자랑 파혼한 이유가 있었네. 그렇게 입 싼 여자랑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 이렇게까지 사고도 치고. 대표님이 진즉에 알아본 거지.”

소현의 탓이 되어버린 상황. 피할 수 없고, 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답답한 마음과 분노, 원망은 반드시 풀어야 했고 누군가를 타깃으로 삼기란 쉬웠다.

적어도 잘못이 ‘확실’하다고 믿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건, 세상 그 어느 일보다도 간단했다. 그 쉬운 일에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지 대부분 몰랐다.

“마크 윤이 소송 걸더라도 그게 엔터 책임은 아니지, 사실.”

“그렇지. 이게 다 그 여자 잘못으로 시작된 건데.”

“설마 류 대표님이 그거 다 막아주려는 건 아니겠지?”

“아우, 대표님 모르냐? 얼마나 칼 같은데 그걸 막아줘? 그것도 전여친인데. 이건 지금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안 돼. 있던 정도 떨어지겠다.”

“하긴, 그 여자 우리 대표님한테 빚도 많이 졌다면서? 지금 위에 사무실도 월세 엄청 적게 내고 있다던데. 다 끝난 사이에도 딱 들러붙어 있더니 어후, 민폐네, 민폐야.”

“거기다 이번 일은 역대급이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직원들은 대화를 계속 나누며 올라탔다. 마침내 그 문이 닫혔을 때, 비로소 애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쉬어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도 이렇게 숨막혀 죽을 것 같은데……. 언닌 어떻게 견디지…….’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세상은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설령 소현이 매장되어도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두고두고 악인으로 기억될 테니.

그렇게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두 발 딛고 서 있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애주는 소현이 가슴에 턱턱 걸렸다.

‘나라면 못 해……. 답답해 죽어버렸을 거야.’

그렇게 죄어오는 심장에 아파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그 안에서 류재언이 나오다가 애주를 보고 잠시 멈추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냐는 듯한 시선이 냉정하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대답을 원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류재언은 말없이 애주를 그대로 지나쳤다.

“저기, 류 대표님.”

애주는 서둘러 그를 뒤따라갔다.

“잠깐만 저랑 얘기 좀.”

“바쁩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잠깐만요.”

그가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하자 문이 자동으로 스르르 열렸다.

류재언이 들어서자 일하던 직원들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애주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따끔따끔 꽂히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애주는 류재언의 사무실 앞까지 따라왔다.

문을 열고 선 류재언이 들어오라는 턱짓을 했다. 냉큼 안으로 들어온 애주가 그제야 또 숨을 몰아쉬었다.

옆에 있다는 이유로 애주 역시 죄인이 되어 소현의 힘든 상황을 간접경험하는 중이다.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건 소현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용건.”

“류 대표님, 마크 윤이라는 그 사람이 정말 소송한대요? 얘기 좀 해주세요.”

아마도 이 얘기는 기사화되지 않을 테니 직접 들어야 했다.

미리 알고 있어야 대비도 할 수 있기에 애주는 마크 윤에 관한 것부터 물었다.

하지만 겉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으며 류재언은 그녀를 말없이 볼 뿐이었다.

애주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재촉해봤자 성질만 자극할 테니까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 앉은 류재언은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수척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애주는 그 앞에 마주 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차애주 씨는 은소현을 꽤 많이 믿나 봅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음성이었다.

저 말의 의미는 뭘까.

혹시 고백하고서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소현에게 상처받았나.

서정한과 만나고 있는 것에 크게 상심한 걸까. 그래서 일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러다 언니한테 더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류 대표와 잘되게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후회까지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억지로 바꿀 수 없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소현의 선택이다. 잠깐 스친 후회는 의미 없었다.

애주는 축 처진 음성으로 말했다.

“믿어요. 류 대표님도 언니 성격 아시잖아요. 오버해서 조심했으면 했지 고의로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 아닌 거. 혹시나 실수로 얘기를 흘렸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지 언니 잘못도 아니구요. 이렇게까지 언니가 괴롭게 감당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언니는 그렇게…….”

구구절절 하는 소리를 끊어내며 류재언이 물었다.

“지금 실수나 잘못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일의 계기보다 중요한 건 그로 인한 결과, 현재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책임.”

“…….”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입니다.”

결국 소현에게 다 책임을 지라고 할 모양이구나 싶어 애주는 그만 아찔해졌다.

「마크 윤 소송 거는 스케일 장난 아닐 텐데.」

직원들의 말대로라면, 감정은 차라리 사치일 정도로 눈앞이 깜깜한 상황이다.

그때, 여전히 딱딱하고 건조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

“접니다.”

그 말에 애주가 놀란 얼굴로 류재언을 쳐다보았다. 뭘 잘못 들었나.

“은소현에게 일을 준 건 나였으니까.”

“…….”

“판단도, 의뢰도, 결정도 모두 내가 했으니까.”

날카롭게만 보이는 눈빛 저편으로,

“책임도 모두 내가 져야 할 일입니다.”

“……류 대표님.”

아득히 쓸쓸함이 차올랐다.

“그러니까 바쁜데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가보세요.”

툭 쳐내는 투로 말하며 그가 돌아섰다.

숨기듯 그저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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