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이야기 그 전 49, 이사 준비]
그러므로 당랑권(螳螂拳)은 날카롭고 재빨리 몸을 움직이므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당랑권(螳螂拳) 이기려고 마음을 먹고 따라서 하다보면 그보다 더 빠른 것을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잡으려고 더 빠르게 움직이다보면 허점이 노출되게 마련이다.
허점이 노출됨은 당연히 약(弱)한 것이다.
이럴 땐 움직이는 것 보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이기는 것이 현명하다.
곧 움직이지 않음이 강(强)한 것이 되는 이치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정은 동을 제어한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다행히 호권(虎拳)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가 상대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응하는 권법이며, 호조(虎爪)는 날아가는 새도 잡아챌 만큼 강력한 조공(爪功)이지만 이것도 기본적으로 기다림의 기술이다.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상대가 움직일 곳에 위치하여 있을 뿐으로 상대가 움직여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염천의 무더위에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골방에 앉아 몸의 주위를 맴도는 파리 한 마리를 낚아채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정용은 이런 김 교수의 설명에 호권과 함께 호조의 위력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정용은 김 교수가 그 수법(手法)을 가르쳐 줄 때는 그냥 따라 하기만 하면 익힐 수 있는 무공처럼 느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호조를 펼칠 시기와 방법이 자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며 정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수한 시연(試演)을 넘어선 깨우침이었다.
또한 호권과 호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용이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서석구란 녀석이 자신을 걷어차려 했을 때, 자신은 그냥 호권을 시연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놈은 오른쪽 정강이 뼈가 산산조각이 나버릴 정도의 복합 골절을 입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오늘 말한 김 교수의 설명과 똑같은 이치였던 것이었다.
그 때도 정용이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 놈이 움직여 오는 힘을 이용하여 그는 단지 손을 뻗어 내리치기만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정강이 뼈가 다 부서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것은 고요함(靜)이 움직임(動)을 제어하는 놀라운 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호조(虎爪)의 활용법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정용은 머릿속에 호조의 사용 수법이 저절로 떠올랐다.
당랑권(螳螂拳)이나 혹은 응조공(鷹爪功)으로 자신의 상반부나 팔, 어깨 등을 공격해 온다면, 공격해 오는 순간을 충분히 기다려 반격의 수법으로 일거에 짓쳐 들어가면 당랑권은 여지없이 파쇄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여기에서 만약의 경우, 어깨 한 쪽을 내어 주고서라도 그의 심장(心臟)을 취할 수 있다면 바로 그 길을 택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러나 그건 서로의 생명을 상해할 수도 있기에 여간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조를 끊임없이 단련하여 누구와 싸우더라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준까지 이르는 것이 필수였다.
게다가 호보(虎步)는 근본적으로 뛰어 다니거나 발을 잽싸게 놀리는 보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닌다고 봐야 옳을 정도로 객관적인 움직임은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한 순간 몸을 날릴 땐 둔중한 범이 서너장(丈)의 거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 올라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몸의 움직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순간적 순발력은 그 어느 보법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정용은 김 교수로부터 이런 설명을 듣고 다시 한 번 보법을 펼쳐 보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정용은 김 교수와의 연구실에서의 만남이 얼마나 유익한 것이었는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어두운 기색이 엿보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부천 둔덕산 퀀셋 막사 도장의 천정에 숨겨진 ‘헌원심법’의 책자가 무사한지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오늘 김 교수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헌원심법의 책자를 자신이 어디 숨겨놨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게 방치해 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고 있는 퀀셋막사 도장(道場)에 누가 올 리도 없으므로 무관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김 일범 교수는 호보와 호권에 관한 책자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호시탐탐 노리는 작자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했다.
공연히 그곳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걱정은 정혜 엄마와 정아가 무사한 것인지의 생각으로 번져 나갔다.
정용은 갑자기 엄마인 정혜를 생각하자 마음속에 그는 아릿한 연모의 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다 기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아버지의 행방불명은 이 책자와 모종의 관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란 확신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버지는 아마 자기 집안의 구석구석까지 빤히 알고 있는 김 상사 때문에 그 책자를 둔덕산 헬기장에 숨겨 두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퀀셋 막사 천정은 마치 드럼통을 펴서 이어 만든 것으로 보일 정도로 투박한 것이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철이 서로 겹쳐져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얼핏 보면 그런 부분은 어두워서 전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곳에 편지를 숨겨 두었는지 모른다.
아마 엄마가 아버지에게 쓴 연애편지도 거의 같은 이유로 그런 곳에 숨겨 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용은 여기까지의 생각이 미치자 정용은 아직 퀀셋 막사의 구석진 틈바구니까지 누가 눈독을 들이고 도둑질해 갈 염려는 적어 보였다.
그러나 신속하게 그곳으로 내려가 단속하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여동생 정아가 중학교 입학을 위해 짐을 정리하러 내려가야 할 형편이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내려가 정리하고 먼저 올라오는 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정용은 성균관 김 교수 연구실에서 삼청동 집으로 내려가 마나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여동생 정아의 중학교 입학을 위한 이사를 하기 위해 잠시 부천집에 내려갔다 온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마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충분한 상의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는 정용을 보며 속으로는 야속해 하였다.
그래도 잰, 천상 남자는 남자야!
남자는 한 번 마음에 먹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니까!
마나님은 등에 간단한 배낭만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정용의 뒷모습을 보며 임신으로 인해 이미 엄청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만졌다.
마나님은 요즘 들어 부쩍 정용과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했다.
마나님은 정용과의 잠자리에서의 정사(情事)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자신의 머리를 만져주고, 젖가슴을 만져주며, 아랫배를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몸은 충분히 만족하여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옆에 있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공연히 몸이 근질근질하고 누가 좀 만져줬으면 하는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삼청동 마나님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기대감을 품은 여인이 하나 또 있었다.
바로 부천집에 있는 정용의 친엄마인 정혜였다.
그녀는 아들 정용이 서울로 떠나자 그날 밤 혼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영 쓸쓸한 것이 이상하고 속상했다.
물론 곁에는 딸내미인 정아가 잠을 자지만, 그건 자기 잠자리에서 혼자 잠이 드는 것이지, 같은 잠자리에서 몸을 맞대고 잠이 드는 것이 아니잖는가?
같이 한 방에서 자는 것일 뿐, 그걸 잠자리를 같이 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정혜는 아직도 팽팽하게 젊은 자기 몸의 육체적 욕망을 확 불 싸지르고 떠나간 아들이 그리웠다.
아니 오히려 미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들을 서울로 보내는 것이 아닌데! 자기 품에 안고 영원히 천년만년 살고지고 할텐데!’ 하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그러면 안되지!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이 귀한 아들, 이 잘난 아들을 내 품에 품고만 있으면 이 아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가 큰일을 할 수 있겠어?
당연히 서울로 보내야지!! 서울로 가서 큰 공부하고, 미국도 가고, 유럽도 보내어 세상에 널리 큰일을 하는 위대한 일꾼으로 만들려면 내 작은 욕망은 참아야 하지 않겠어!’
정혜는 이렇게 올바른 생각하다가도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면 몸을 비틀고 ‘아아 -- ’하며 작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혜의 딸내미인 정아는 그렇게 매일 밤마다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 들면 비록 같은 이불을 덮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옆의 엄마의 이불 안에서는 앓는 듯한 작은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땐 작은 소녀인 정아의 몸도 뜨거워지면서 보지가 꼼질꼼질 거리는 것이 거기서 뭔가가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정아는 요즘 부쩍 젖무덤이 자꾸 커지고 있어 수시로 그걸 만지게 되었다.
그녀의 보지 부근에도 이젠 잘잘한 작은 털들이 거뭇거뭇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이젠 스스로도 그곳을 만지면 작은 털들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중학생이 되는 정아도 이젠 섹스가 뭔지 충분히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엄마가 밤이면 작은 앓는 소리를 내는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정혜는 아침이 되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자세로 씩씩하게 일어나 출근을 하곤 하였다.
암만 그래도 그녀는 생각하기에 ‘이젠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아가 중학교를 가면 아무래도 서울에서 두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 주지 않으면 영영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울에도 직장이 있으면 정기적으로 출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난번 김 상사에게 받은 돈 오맥만원을 헐어서 서울에 집을 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번에 아들 용이가 집에 오면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정용은 부랴부랴 서울역으로 향했다. 시내버스 타는 것도 귀찮고, 기차를 타는 것도 더디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이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헌원심법 책자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그 책자가 나쁜 놈들에게 들어가 잘못 사용되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그는 소사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듯 둔덕산 쪽으로 내달렸다.
예전에 그는 이 길을 버스도 타지 않고 다니던 길이었다.
아침에 삼청동에서 나와 성균관 연구실을 들러 곧바로 서울역으로 왔으니 시간은 아직 오전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일각이 여삼추였다.
그는 다시 기차를 타고 왔던 길을 조금이나마 되돌아가는 것이 매우 싫었다.
그래서 아예 산언덕을 넘어가기로 작정하였다.
사실 산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 약간 빠르기는 하지만 실상 큰 길로 가는 것과 시간적인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조급하여진 마음이 그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사실 그가 아침에 배운 ‘정중동(靜中動)’의 원칙과 어긋났다.
한낮이지만 아직 겨울산은 인적이 드물었다.
더욱이 서울 부근의 명산(名山)도 아니고 경기도와 서울 경계의 야산은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산이었다.
그러나 정용은 온 힘을 다해 뛰어서 내달렸다.
아예 석왕사 쪽에서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 내리닫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아 그렇게 움직였다.
정용이 이 야산에서 달리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산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는 그는 마치 평지를 내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땀이 났다.
그렇게 한 달음 달리고 나자 정용은 그제서야 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침 내내 그를 괴롭혔던 헌원심법에 대한 마음으미 부담은 힘껏 달리면서 자동적으로 해소되었다.
이 길은 그가 새벽에 운동하면서 다니던 길로서 그의 집은 당연히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면서 위치하는 셈이다.
그가 내쳐 달리자 정말 얼마 못 미쳐 집 부근에 이르게 되었다.
보통 집에 올 땐 큰 길에서 걸어 올라오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석왕사 쪽에서 산등성이를 동쪽으로 넘어 오는 길이므로 자연히 그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쪽에 그의 집이 위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용은 무의식 적으로 눈 밑으로 집이 보았는데, 집 부근에는 그가 못보던 찦차가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혹시 김 상사란 놈이 온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자 “그 놈이 뭐하러 우리 집엘 다 왔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용은 찦차를 타고 온 놈은 김 상사란 놈 같았다.
그가 아니면 정용의 집에 찦차를 타고 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용은 어딘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용은 집 부근의 나무 숲 그늘에 숨어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바위 덩어리 하나까지 잘 알고 있는 그는 자기 집을 잘 보면서도 자신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옴을 숨기고 방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오는 기색이 보였다.
젊은 남자가 몇 명이 보였고, 엄마 정혜의 모습과 정아의 모습이 보였다.
젊은 남자 몇 명은 이삿짐을 싼 것 같이 보따리를 주섬주섬 마루 위로 내 놓았다.
그러면서 인사를 하고 떠난다.
“아주머니 그럼 우리 내일 또 올께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젊은 남자들은 엄마가 부대에서 부른 사람들 같았다.
정용은 슬며시 젊은 남자들을 피해 퀀셋 막사로 만든 도장으로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스며들었다.
물론 도장(道場)은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지만, 열쇠는 항상 입구 큰 돌멩이 아래에 숨겨져 있으니 도장 문은 잠그나마나한 것이었다.
슬쩍 열고 들어가자 ‘삐이꺽’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용은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도장 전체를 훑어 보았다.
도장 전체의 면적은 모두 백 평 가량이나 된다. 엄청 넓은 면적이다.
도장의 맨 마지막 구석엔 뜀틀 같은 것이 포개져 있었다.
익숙한대로 그는 입구의 안쪽에 마련된 작은 나무 책상 위로 올라갔다.
항상 거기에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이 있어서 가죽 포대기같은 것으로 둘둘 감은 심법 책자와 엄마의 오래된 연애편지 등이 감추어져 있었다.
의례 있을 줄 알고 손을 넣어본 정용은 그곳이 휑댕그레하게 비어있는 것만 발견하곤 등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정용은 혹시나 싶어서 책상위에 나무 의자를 올려 놓고 다시 한 번 책자며 서류 뭉치를 넣어 두던 작은 양철 포켓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다시피 하여 뒤져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넣어 두었던 양피지 뭉치며 연애편지 뭉치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부대에서 온 젊은 놈들이 뒤져서 찾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앞이 캄캄했다.
정용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슬며시 뒤로 돌아 집으로 나갔다.
마침 젊은 군인 녀석들은 다 간 모양이다.
엄마와 정아는 부엌에 있는 모양이어서 “으흠”하고 기침으로 자기가 온 것을 알리며 부엌으로 향하자 정혜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나오다시피 하며 그를 반긴다.
“얘, 웬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정혜가 아들에게 안부를 묻는데, 아들은 엄마의 안부 묻는 것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부대에서 온 사람들은 누구냐고 궁금한 것부터 묻는다.
“예, 그런데 저놈들은 누구예요?”
그러자 정혜는 아들의 질문에 먼저 대답한다.
“응, 내가 부대에서 일꾼들을 불렀었는데 -- 글쎄 , ---- ”
그러면서 잠시 말을 멈춘다.
“글쎄라니요 -- ”
정용은 갑갑해서 묻는다.
“글쎄, 김 상사가 자기네 부대원을 보냈잖아 --- ”
정혜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시시콜콜 아들에게 말한다.
“난, 우리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탁했거든 -- 그런데 어디서 알았는지, 김 상사가 무슨 은혜를 갚는다고 자기네 부대원들을 데려다가 이삿짐을 실으라고 -- 그리고 차도 내 준다고 --- ”
정용은 자기가 의심했던 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했다.
“그래서요 -- ”
정혜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그런데 얘 네들은 짐을 싸 줄 생각은 없는지 -- 뭘 자꾸 뒤지는 눈치드라구 --- ”
“우리집에 숨길 건 없지만 혹시 -- 싶어서 도장에 네가 -- 뭘 숨긴 게 있을지 몰라서 --- ”
그러자 옆에 있던 정아가 나서면서 말한다.
“오빠 -- 도장에 엄마 편지랑 있던 거 -- 내가 꺼내서 따로 숨겨놨어 -- ”
정용은 그 순간 마음이 “후-- ”하고 놓였다.
그러면서 엄마를 꼭 끌어 안았다.
“아마, 김 상사 패거리는 그걸 찾으러 왔었던 걸 거예요 -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 ”
정용은 엄마를 끌어 안은 채 정아를 손짓하며 부르고 두 여자를 두 손으로 함께 안으면서 말했다.
두 여자는 정용의 품에 안기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약속한 날보다 하루 먼저 온 것이 -- 참 잘했네요 -- ”
그는 마당에 선 채로 두 여자에게 아침에 벌어진 김 교수와의 간단한 대화 내용을 소개하였다.
“아마, 김 상사는 그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거예요 -- 혹시나 싶어서 부하들을 보내 뒤져보라고 하고서는 만약에 발견하면 갖고 오라고 했겠지요 -- ”
“그가 이 책의 존재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수중에 넣으려고 했을 거예요 -- ”
정혜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자 소름이 끼쳤다.
“난, 니 아빠가 거기에 연애편지 뭉텅이를 놔둔다는 걸 알았지만 -- 그걸 없앨 생각은 없었거든 -- 그런데 거길 뒤져보니 무슨 이상한 책자가 있길래 정아한테 물어보니 네가 보는 책이라더구나 --- ”
정아는 이미 지난번 청소를 하면서 그런 책과 함께 엄마의 연애편지도 다 읽은 터였다.
그래서 그 책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았는데, 그보다 엄마의 편지가 그런 남자들이 뒤져서 나온다면 그런게 뭐 좋을 게 있겠나 싶어 그런 것은 뒤져 자기 책가방에 싸두었다고 말한다.
정용은 두 여자들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정혜는 아들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가 아예 서울로 이사를 하는 게 어떠니?”
정용도 이번 기회에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새삼 크고 자란 이 집이 그리울 것 같아 팔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는 어떻게 하구요 -- ”
정혜는 이미 준비가 되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식당하는 아줌마 중 한 사람이 맡아서 살라고 하면 얼싸 좋다하고 살아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
요는 집을 그냥 비우는 것은 좀 그렇고 -- 식당 아줌마 중 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집을 관리도 하고 세도 약간 받으면서 얼마든지 관리가 된다고 한다.
정용도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 같았다.
이런 결정은 나중에 이 부근이 역곡역이 들어서고, 가톨릭대학 등으로 개발되면서 땅값이 엄청 뛰면서 정용의 집에는 엄청 좋은 일이 변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서울에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건 삼청동 마나님에게 부탁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정용은 엄마의 입장 때문에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그러나 그런 일은 마나님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마나님이 나중에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정용은 엄마에게 자기에게 다 맡기라고 큰소릴 쳐두었다.
정아도 아예 서울로 이사를 간다니 좋다고 한다.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교 다니면 그건 그것으로 좋은 일이다.
“이젠 정아, 쟤 방도 마련해 주어야 되지 않겠니?”
그러자 정아는 좋으면서도 공연히 괜찮다고 말한다.
“옴마, 난 옴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 ”
“얘, 너도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어? 그러려면 네 방이 있어야지 --- 물론 오빠 방도 마련하구 -- ”
그러자 정아가 말한다.
“그럼, 엄마 방도 있어야 되잖아 --- ”
그렇게 이야기가 나와 방이 세 칸 있는 단독 주택을 사기로 하였다.
학교와 가까운 곳이 좋으니깐 되도록 명륜동이나 혜화동, 아니면 청운동쪽까지 알아보기로 했다.
당시 삼십 평짜리 단독주택은 종로를 나오기만 하면 백오십 정도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종로 한 복판이냐 아니냐가 문제인데, 화동, 재동, 가회동이나 삼청동 지역은 그래도 값이 비쌌고, 명륜동이나 혜화동은 그보다 조금 값이 쌌지만 그곳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부암동은 말할 것도 없지만 청운동 지역으로만 넘어가도 같은 종로인안데도 그곳은 서대문 쪽에 가까워 값이 좀 떨어졌다.
하여튼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먼저 서울에서 살아 본 정용이 삼청동 마나님과 의논하는 것으로 하고 일단락 지었다.
방에 들어서니 이삿짐을 다 싸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 엄마와 정아가 며칠을 꼼꼼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정용은 엄마에게 저녁을 나가서 먹고 들어오는 것이 어떠냐고 의견을 낸다.
그러자 정아는 무조건 좋다고 한다.
정혜도 짐을 다 싸놓고 있으니 어딘가 어수선하여 집에서 밥해먹기가 마땅치 않은지 아들이 나가자고 하는 말에 얼른 동의한다.
둔덕산 기슭은 중국집에서 시켜다 먹을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부근에 음식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식을 하려면 소사역이 있는 부천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
세 식구는 옷을 갈아입고 음식점이 있는 시내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였다.
어느새 이른 봄의 햇살이 산 머리에 걸렸다.
빨리 먹고 들어와도 들어 올 때면 완전히 어두워질 것 같았다.
별로 외출 준비할 것이 없는 정용과 정아는 둘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엄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정용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오는 엄마의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아를 잡고 셋이 나란히 저녁 식사를 위한 외출을 하였다.
이들 셋이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정혜가 정용의 귀에 속닥거리는 말로 은밀하게 말한다.
“난, 말이야 -- 이 집에서 제일 서운한 게 -- 지난 번 만든 욕실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그러자 정아도 한 마디 한다.
“맞아 -- 오빠가 그거 만드느라고 엄청 고생 했는데 --- ”
정용은 두 여자들의 말을 받아들여 마치 가장처럼 말한다.
“그래서 난 이번에 우리가 살 집을 구하는데 우선적으로 욕실이 있는 집을 구하든지, 아니면 보일러를 설치하여 욕실을 만들든지 할 거야”
사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가정집에 보일러를 설치하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냥 온돌에 연탄 백장이면 겨울을 난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겨울에 추운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난방과 온수를 함께 쓸 수 있는 연탄온수 보일러가 1960년대 초반에 개발되면서 돈 많은 가정에서는 이 연탄온수 보일러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온수 보일러는 1950년대 미군과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방열기를 사용하는 온수 보일러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모두 미제였고, 국산은 1960년대 초 종로구 관철동의 일신기계에서 만든 ‘로케트 보일러’가 당시 인기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1962년에 설립된 신생 보일러에서 만든 ‘로켓트 보일러’는 살아남고, 일신 기계의 ‘로케트 보일러’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신생 보일러의 ‘로켓트 보일라’는 보일러의 경고음이 마치 귀뚜라미 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나중에 ‘귀뚜라미 보일러’로 변하여 지금까지 잘 팔리는 보일러 회사가 되었는데, 먼저 인기를 끌었던 로케트 보일러는 망해버려 나중에 ‘로켓트가 로케트를 잡아먹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당시 난방용 보일러 설치 업체는 관철동에 있던 일신 기계 이외에도 동대문구 신설동의 동아기계, 용산구의 동광기계 등에서 보일러를 만들어 서울 시민들에게 설치해 주었다.
정용은 두 여자와 함께 저녁을 먹고 둔덕산 기슭의 집으로 올라갔다.
아마 지금의 저녁이 이 집에서 자는 마지막 잠이 될지도 몰랐다.
이들은 우선 내일 가지고 갈 짐은 간추려 놓고 나머지는 작은 트럭을 한 대 빌려 서울에서 집을 구한 뒤 본격적인 이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장롱이며, 이불이며 묵은 짐이 있기 때문에 정아의 중학교 입학을 위한 작은 짐은 작은 짐대로 싸고 큰 이삿짐은 따로 시간을 내어 이사하기로 하였다.
세 식구가 이렇게 저렇게 의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먼저 피곤한 정용이 잠을 자겠다고 나서자 두 여자도 같이 동조하고 이부자리를 펴고 잠에 든다.
정용은 정용대로, 정혜는 정혜대로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썼기 때문에 밥을 먹고 집에 들어오자 이삿 방향을 의논하면서도 피곤한지 선 하품을 하면서 이야기가 겉돌았는 데다가 이부자리를 펴니 쉽게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큰일을 하지 않은 정아만 마음이 설레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정아는 오랜만에 집에 온 오빠의 품에 안겨 잠을 이루고픈 생각이 많아 슬쩍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보통 땐 엄마가 가운데 이불을 펴는데, 오늘은 오빠가 피곤하여 먼저 가운데 떡 하니 자리를 펴는 바람에 양쪽 옆으로 창쪽으로는 정아가 문쪽으로는 엄마가 자리를 펴고 잠에 들었다.
결국 보통 때와 다른 점은 엄마와 오빠의 잠자리만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정아로서는 오빠의 품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는 잠옷을 입은 채 정용의 이부자리로 파고 들었다.
곧 따뜻한 오빠의 품에 안겨 달콤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