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2화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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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전생을 알고 있었다.

아기였을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아가 성립되고 기억이 있을 때부터 꿈처럼 스며들기 시작한 영상은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상상이나 망상, 이라고 치부해도 되겠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또다른 나’의 기억임을 인지했다.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었다. 내 팔이 당연스럽게 신체일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그런 느낌.

그저 망상이나 환상, 사춘기 시기에 흔히들 겪는 ‘내게는 또다른 내가 잠자고 있어’ 같은 착각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전생의 기억은 사춘기보다도 훨씬 이르게 시작되었고, 더군다나 나는 제법 현실적인 편에 속해 창작물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이기에, 본능 같이 전생이라고 인지한 기억을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내 팔이 분명한 것을 내 팔이라고 받아들이는 고민이란 생각보다 괴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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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안 크레이누- 그것이 전생의 내 이름이다. 민망하지만 사실이니 이야기하자면 그가 사는 곳은 내가 아는 과거도 아니고,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 세상에는 없는 세계였다. 그는 그 세계의 가장 강한 제국을 통치하는 마법사 왕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자애로웠으며 무엇보다도 강했다. 지략이나 전략, 모략이 상관없을 정도로 그의 마법은 절대적이었다. 제국은 그 덕에 부흥했고 세계는 그 아래에서 평화로웠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가진 자가 흔히 범할 실수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공명정대했으며 세계의 누구나 그를 사랑했다.

물론 뒤에서 뒷담을 깠을 수는 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좋다. 전생이든 망상이든 자신이 킹왕짱 센 나라의 킹왕짱 센 왕인 걸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문제는 그가 평생에 사랑했던 사람이...

남자였다는 것이다.

*

“하영씨.”

나와 소위 썸을 타고 있던 남자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쟁업체 사람이었는데 그 회사 역시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기업이었고 남자는 33살에 벌써 과장이었다. 키도 180은 넘는 것 같고 얼굴도 그럭저럭. TV에 나오는 잘생긴 배우 얼굴이 되기 일보직전의 얼굴 정도는 되었다.

나에게 호의를 가진 건 그가 먼저, 우리는 주말에 만나 가끔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주말, 드디어 오랜 썸이 끝나는 날이었다.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항상 매너 있던 그치고는 제법 과감한 일보였다.

“하영씨도 이미 아시겠지만.”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눈이 흔들린다. 긴장과 연정과-

“저는 하영씨를 오래전부터 좋...”

“죄송해요!”

나는 남자의 손을 쳐냈다.

“하영씨?

그리고 그대로 전력질주로 남자로부터 벗어났다.

*

“윤하영! 이 미친!”

내 앞에 있는 건 나의 사랑하는 재수때기 단짝친구, 안수지다. 나에게 BL 소설을 권했던 악의 축이 화를 내고 있다.

나는 어린 날부터 전생의 여파인지 내 생각에 골몰하는 일이 있어서 또래들과, 심지어 어른들과도 미묘하게 벗어나는 일이 많았다. 사교성이 나쁘진 않았지만 진득하게 누군가를 사귀는데는 서툴었다.  그런 나에게, 재수때기라고는 했지만 수지는 털털하고 자상한 친구였다. 지 좋아하는 거 전도할 때 빼고는 약간 무심해서 문제지.

“이 매정한 것! 어떻게 화를 내, 지금의 나에게.”

나는 헤쓱한 얼굴로 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민다. 핸드폰에는 내가 썸남을 찬 다음부터 보낸 카톡 메시지가 가득하다.

“어쩌라고, 니가 차놓고 이게 무슨 청승맞은 카톡이냐.”

봐라, 내 좌절감을 아는데도 냉정한 것. 저것은 카톡 메시지를 한 시간 꼴로 안 보냈다면 이 화제는 넘어갔을 것이다. 나는 위로받고 싶다고.

“찬 거 아냐. 차고 싶었던 게 아냐. 단지.”

“단지...”

“나도 내가 싫어.”

나는 머리를 감쌌다.

나는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내 전생에 대해 별달리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다. 그냥 황당하고 정체성에 혼란도 좀 있고, 너무했다는 생각만 할 뿐이지. 그래도 지렁이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고 킹왕짱 센 왕이었다니 좋은 거 아닌가 하고.

안수지가 보여준 BL소설에 심하게 울렁거리긴 했지만 그야 뭐 BL소설 안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전생에 마법사이긴 했어도 사랑하는 남자, 남자에게 임신 시키는 마법은 없었다.

사건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곧 아이돌이 된다는 킹카 학교 후배가 나에게 고백한 날에 터졌다.

고백하는 후배 바로 앞에서 토한 것이다. 나를 향한, 열정적인 눈동자- 그걸 본 순간 저절로 토삿물이 쏟아졌다.

물론 토를 한 데는 전날 수지와 졸업식 자축 술을 마신 탓도 있었다. 있긴 했지만.

그 후로도 토까지는 아니지만 호의를 갖고 연정을 갖는 남자의 얼굴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생리적인 혐오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친구’로 다가오는, ‘동료’로 다가오는 남자는 괜찮았다. 그런데 연애가 엮이면 문제가 생겼다.

셀리안 크레이누, 내 전생의 미친 왕이 제 기사에게 짓는 표정이 그랬으니까.

그는 백성에게는 자애로웠으나 기본적으로는 냉정하고 무감했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이는 오직 그가 사랑했던 기사, 엘킨 다이브에게뿐이었다.

그는 남자이자 충복인 엘킨 다이브에게는 세상을 다줄 것 같은 연정과 집착, 욕망을 드러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랑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고 덕분에 나는 사랑과 관련해 남자들이 짓는 표정이 싫었다. 정말, 싫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혐오감에 가까웠다.

“연애 하고 싶어.”

“하세요. 누가 말려?”

“정신과 가볼까.”

“갔었잖아.”

“갔었지.”

취업 전에는 문제 생길까봐 꾹 참았다가 취업하자마자 가보았다. 가봤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어떤 심리치료도 통하지 않았다.

“아, 억울해... 좋은 직장에, 예쁜 얼굴에, 이렇게 몸매도 좋은데.”

“미친, 먼저 공주병으로 정신과를 다니는 건 어떨까.”

“객관적인 거거든. 나 고백도 완전 많이 받았어.”

진짜- 다만 빌어먹을 전생의 기억 때문에 고백하는 애는 많았는데 지금도 모쏠이라는 거다. 27인데.

“성격도 좋은데!!”

“성격은 나쁘지”

이 웬수가.

“이게 다!!”

셀리안 크레이누, 그 게이 자식 때문이다.

“이게 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유일한 단짝이지만 내가 그녀에게 셀리안 크레이누니 엘킨 다이브니 그런 이야기를 한 일은 없다. 나 역시 아직 망상인가 싶은 이야기를. 하나 뿐인 친구에게 털어놓고 쌔한 눈을 받을 자신은 없었다.

무엇보다 설명이 궁해진다. 전생에 내가 미친 미저리 스토커 게이왕이어서 연애를 못 하겠다니,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주문해놓은 내 커피를 홀짝 마셔버린다. 그러다가 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너네 부모님 금슬도 좋고 내가 알기로는 네가 남자에게 트라우마 받을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네가 트라우마를 주면 몰라도.”

“죽을래.”

얘는 성격 좋은 나를 너무 곡해한다.

“아.”

“?”

“너...”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

그녀의 눈이 심각하다. 덩달아 긴장해 꿀꺽 침을 삼켰다.

“설마 설마 했는데... 혹시 나 좋아하냐??”

“...”

“유독 나에게만 연애 관련 카톡 보내는 것도 그렇고-”

“...꺼져.”

아 웬수.

*

꿈을 꿨다.

그것은 죽는 순간의 꿈이었다.

은발의 미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에는 청발의 미남자였는데 요정의 피가 섞인 남자의 혈통은 노인이 되어도 머리카락 외에는 그의 외모를 아름답게 유지시켰다. 수명 또한,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인간인 자신과는 달랐다.

“엘킨-”

“...”

“키스해줘, 마지막으로.”

“...”

“안 하는 거야? 명령해야 해?”

“주인의 뜻 대로.”

그의 따뜻한 입술이 나의 차가운 입술에 가볍게 닿는다. 평상시라면 그 머뭇거림에 분해하며 팔을 뻗어 그에게 깊게 키스를 퍼붓겠지만. 지금의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럴 힘따위는 없었다.

일순 떨어지는 남자의 표정은 복잡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감정들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슬픈 것은, 내가 죽은 후 이 나라와 백성들이 맞이할 혼란에 의해서일테고. 후련한 것은, 드디어 지긋지긋한 나의 속박이 끝남에 따른 본능적인 것이었을 테지.

마지막으로 동정은... 아마, 그래도, 수십년 동안 충성을 바친 주군을 향한 거겠지.

그것에 만족해야 할까. 결코, 끝까지 사랑은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 ‘정’이라도 손에 넣은 것에.

하지만, 그는 원래 다정했다. 사람을 미워할 만큼 모질지도 않았고 편집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저 엘킨 다이브라는 인간으로서 슬프게 했고 화나게 했고 좌절하게 했을 뿐이지.

“그래도 사랑해.”

“...”

“그래도, 계속 사랑해.”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나를 보는 청안, 고결하고 청아한 내가 사랑했던 눈동자를 끝으로.

*

눈을 뜨면 내 방이었다.

“...아, 재미없는 꿈.”

방금까지 꾸고 있었던 꿈을 떠올리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재미없는 꿈이었다. 내가, 아니 셀리안 크레이누가 죽는 꿈이었다. 지 죽는 순간에도 꿋꿋하게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어휴 게이새끼.”

중얼, 한숨처럼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근까지 끝낸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잤던 것이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던 탓에 몸이 뻐근하다.

시계를 확인하면, 새벽 3시다. 지금부터 닦고, 다시 자기도 애매한 시간. 현실적인 고민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기지개를 켰고, 별 생각 없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하늘이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죽은 시간도 하늘이 검었다. 검고 검은 하늘- 셀리안 크레이누는 검은 하늘을 힐끔 바라보고 곧 흥미를 잃은 듯 마지막으로 제 사람을 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잊지 않기 위해, 잊게 하기 싫어서.

수지가 보여줬던 BL소설의 폭군왕은 결국 기사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셀리안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사랑받지 못했다. 아니 격렬한 감정의 한조각도 받지 못했다. 차라리 경멸했다면, 차라리 미워했다면.

“병신...”

우직하기 그지없던 그의 기사는 제 주군을 동정했다. 동정하고 안쓰러워하고 ... 그의 사랑을 성가셔했다. 본인이 눈치 채지 못했다 해도.

문득 눈물이 났다.

분하게도,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지만 그가 아니고, 그의 기억을 받았을 뿐, 엘킨 다이브에 대한 사랑조차 알지 못하지만 가끔 눈물이 났다.

새까만 하늘과 엘킨 다이브의 새파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게 너무도 분했다.

결국 기억하는 건 ‘나’ 뿐이리라.

나는 눈을 감는다.

고된 야근과 뻐근한 몸, 다시 시작되는 하루의 성가심과 함께 고작 꿈 때문에 분하고 슬프고... 눈물 나게 지긋지긋한 그런 평범한 날-

눈을 뜨면 윤하영은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어?”

눈을 뜨는 순간 얼굴에 모래가 부딪쳐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바람에 실려 모래바람이 얼굴을 친다.

올려다보면 새까만 하늘- 그 아래 나를 감싸는 바람은 모래를 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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