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3화 (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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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 아직 멀었어?!”

“네, 갑니다.”

쟁반에는 막 만들어진 양송이 스프와 쇠고기 리조또가 올려져 있다. 본연의 식재가 가진 향과 지온 지방 고유의 독특한 향신료가 어울어져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향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정말 별로였는데.’

먹음직하다는 감각이 새삼 생소하다고 느끼며 나는 나를 부르는 테이블로 달려갔다. 테이블에는 존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늦구만-"

젊은 시절 이름난 군인이었다고 하는 노인은 80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풍채가 좋았으며 목소리 역시 걸걸했다. 지금은 그저 점심은 꼭 우리 가게에서 먹는 살짝 주책기 있는 할아버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마을의 촌장이란 사실은 살짝 접어두기로 한다.)

"기껏 일찍 왔는데 말이야.”

"죄송해요~"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성질 급한 이 노인은 꼭 통상적인 점심시간 한 시간 전, 점원들의 브레이크타임을 빼앗아가며 들리곤 했다.

이 작은 식당의 점원이라고 해봤자 요리사이자 이 식당의 주인인 산과 유일한 웨이트레스인 나 윤하영 정도지만.

‘결론은 내게 폐란 말이지.’

나는 최대한 애교스럽게 미소지으며 그가 앉은 테이블 위로 쟁반을 올려놓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래, 정말 오래 기다렸다- 대체, 2년이 다 되가는데도 여전해. 내년이면 스물인 혼기 꽉 찬 처녀치고는 시집가기도 힘들겠어.”

“아하하-”

현대이면 고소감인 성희롱 비슷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내심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꽤 동안이었지만 이곳에서 나는 훨씬 동안으로 취급당했다.

실상 곧 30을 1년 남겼는데 20살이라는 뻥이 무리없이 통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아무도 내 나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서른...이곳에서 서른을 맞이하는 건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새삼 내 나이를 반추했다.

내가 이 이상한 세계에 온지 2년이 지났다.

*

나는 창작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비단 BL소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지어낸 이야기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영화 같은 창작물도 썸탈 때만.

그런 것보다는 쇼핑을 하거나 승진 생각을 하거나, 헬스장에 가는 게 나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내 전생의 기억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던 것이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이라는 황당한 요소만으로도 이미 포화상태인 내 비현실 게이지를 주욱 올리는 일을 당한 것이 2년 전.

“에휴.”

뽀득뽀득, 설거지를 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창밖으로는 모래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가 차라리 사우디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대사관으로 달려가서 부모님께 연락을 해, 어떻게든 집에 돌아갔을 텐데. 이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돌아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눈을 감는 순간 불어오던 모래바람,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면 내 방일까 싶었지만 2년 내내 눈을 깜빡여도 소용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창 BL에 빠졌던 시기 수지가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던 레퍼토리인 트립, 차원이동을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왕이 남자 기사에게 임신 시키는 소설만큼이나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눈을 뜨니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니고, 무슨무슨 웜홀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납치를 당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체 왜 내가 여기있는 거냐고.'

다 닦은 접시를 깨지지 않을 정도만 힘을 주어 내려놓는다. 산이 모르게 쪼잔한 성질을 부려보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뽀드득, 다음으로 집은 접시에 묻은 얼룩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부조리라도 되는 것처럼 힘을 줘서 지워나갔다.

*

“하영은 정말 일을 잘 한다니까.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아.”

설거지를 마치고 홀로 나가면 가게의 주인이자 내 은인인 산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존 할아버지는 항상 화내시는 걸요.”

“그 분은 깐깐하니까. 사실은- 하영이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더 자주 오시는 거야.”

“산의 요리가 맛있어서 그렇죠.”

“아니... 정말 하영이 오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오는 가게였어."

그가 예쁜 말을 하며 서글서글하게 미소짓는다.

"산-"

"하영이처럼 예쁘고 싹싹한 사람이 일해줘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더 예뻐, 나는 내가 고른 은인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산은 좋은 사람이고, 나도 산을 좋아했지만 그에 의해 구해진 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우연히 주인공 보정-이것도 수지에 의해 배운 말이다-에 의해 연고도 없는 세계에서 지지자를 얻게 될 만큼 나는 운이 좋지는 않았다.

신분증명도 안 되는 연고 하나 없는 여자가, 모르는 세계에서, 그것도 한없이 중세에 가까운 사고방식의 이상한 세계에서 ‘좋은 사람’인 산을 만나 자리를 잡은 건- 인정하긴 싫지만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셀리안은 태생이 왕이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를 개척해나간 왕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 '연고 없는 여자'가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의 리스트 정도는 전생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라도 새겨져 있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척박한 땅 지온에서는 산이 그런 사람이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제국, 키오스의 서쪽, 그 끝에 버려졌던 땅 지온. 붉은 모래바람이 불고, 두 개의 달이 보이지 않는 땅. 그저 새까만 하늘이 계속 되는 땅.

모래바람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자연스럽게 이곳이 전생에 셀리안 크레이누가 다스리던 세계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엘킨 다이브와의 연애사에 편중 되어 있는 전생의 기억을 자의로 떠올리고 떠올려 이 땅이 셀리안 크레이누가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오크족에게서 되찾은 땅이라는 걸 생각해냈다. 그리고 산을-

[지온을, 제 고향을 구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던 소년을 기억해냈다. 황제 셀리안에게 이 척박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을 구해달라고- 멀고 먼 제국의 수도까지 찾아왔던 패기 넘치는 소년.

그는 셀리안에 의해 평화를 찾은 제 고향 지온에서 결혼 전까지는 어머니의 식당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혹시나 찾아간 기억의 장소에는 정말로 산의 식당이 있었고, 그 가게에서, 윤하영과는 접점이 없는, 셀리안의 기억 속 남자를 본 순간- 망상이었던 전생은 현실이 되어 다가온 것이다.

기억 그대로, 산은 우직하고 의리 있으며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친여동생처럼 대했다. (그가 나보다 3살은 어린 건 비밀이다. 아무리 초절정 귀여운 나라도, 30이 가깝다고 하면 남자란 족속은 지금만큼 다정하지는 않으리라고. 물론 산은 한결 같을지도 모르지만 도박은 하지 않는 주의다.)

“...”

만감이 교차해 그를 보고 있자면 산의 귓가가 조금 붉다.

“...왜, 그렇게 봐.”

"하하-"

"웃기는."

덩치에 맞지 않는 호의 어린 수줍음에 나는 방금 전까지의 흐뭇함과는 반대로 약간 울렁거림을 느꼈다. 아직 완벽하게 연애감정은 아니고 여동생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산은 최근 나를 '여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트라우마는 그런 상대의 감정에 민감했고 산이 그런 마음을 가진 후부터는 생리적인 거북함이 스물스물 나를 괴롭히는 일이 많아졌다.

'곤란해라.'

나는 산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시금 모래바람이 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러요님 // 나 같지만 나 아닌 것 같은 나를 향한 호칭~♬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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