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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찮다고,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거짓도, 허세도 아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이 마음을 채워나간다. 그래, 오늘 같은. 소녀처럼 웃으며, 신도처럼 칭송하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자 조소가 절로 나오는 반면,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하찮군.”
셀리안 크레이누가 서있는 곳은 왕궁의 신전이다. 건물 자체를 녹빛의 에메랄드로 만든, 돈이 무지하게 들었을 것 같은 신전- 초록색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하지만 이래서야 마음만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 자리에 서서 선황제의 묘를 찢어발길 듯이 쳐다보고 있다. 아니, 그 말은 조금 다른가. 무심하게 조용히 분노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 그 기억이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이 꿈은- 이 기억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의 기억이었다.
일단, 꿈의 초반에 그가 하는 고민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하는 생각도 아니고, 먼 과거의, 셀리안 크레이누의 마음인데도 그 감정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쩔어. 삽질.’
세상 모든 것에 자신만만한 황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답답하네.’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선은 이제 선황제의 묘를 빗겨 허공을 보고 있다. 노려보듯이, 무엇이 그렇게 증오스러운가.
그것을 셀리안은 모르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싶기도 하고 그가 알지 말았음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사자의 갈기 같은 적금발과 오만하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남자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깨닫는 건 보고 싶지 않다고.
왜냐하면 그 감정은 ‘슬픔’이니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자와 입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적어도, 저 문은 열리지 않았음 좋겠다.
그의 슬픔을 알려주는 게 엘킨 다이브가 아니었음 좋겠다.
"폐하, 계십니까."
내 바람을 무시하고 문이 열린다. 그곳에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푸른 남자가 서 있었다.
"폐하-"
아직 남자-엘킨 다이브의 눈에는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존경심만이 오롯이 차올라 있다. 지금은 약간의 걱정이.
그걸로 충분했건만.
엘킨 다이브의 시선과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선이 얽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엘킨 다이브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공허를 이해했다.
"..."
"찾게 했군. 나가지."
셀리안 크레이누는 자신의 시간에 침범해온 기사에게 머슥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셀리안 크레이누는 엘킨의 존재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아직은, 아직은 혼자로서 충분했다.
나는 그것에 안심하며 불안하게 엘킨 다이브를 바라보았다.
그의 청명한 푸른 눈이 투명하게 셀리안 크레이누를 보고 있다.
그리고- 기사답게, 우직하게, 고결하게 그 공허에 발을 내딛는다.
"저는 폐하의 기사입니다."
"알고 있다."
"'제가' 지키는 건 폐하입니다."
"..."
"'제가' 지키는 건 '셀리안 크레이누' 폐하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입니다."
그 말에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 상투적이기 그지없는 말에 구원받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셀리안 크레이누로 이해받았다는 것에-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
뽀득뽀득, 설거지가 계속된다.
원래 세계에서는 밖에서 사먹는 일이 많았기에 지온에서 2년간 한 설거지는 지난 27년간 했던 설거지보다 많았다.
그래도 이런 단순노동이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직방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오만한 붉은 눈이 엘킨다이브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마치 구원받은 소년 같은 어린 눈동자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설거지를 계속한다.
내 꿈은 대부분 전생의 기억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꾼 꿈은 내 안에서 최악의 꿈 베스트5 안에 들었으며 셀리안 크레이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엘킨과의 감격의 순간 베스트5에 드는 듯 했다.
"...쉬운 남자 같으니."
이 꿈을 꾼 날에는 기분이 엉망이었고, 그런 날은 꼭 소소하게 별로인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응? 뭐라고?"
"에-"
지금처럼-
지나가던 산이 되묻고, 어찌보면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삐끗해서 접시를 떨어뜨린다.
슬로우 모션으로 떨어지는 접시, 그 접시를 받는 나.
사막 같은 지온에서는 물자가 귀하기에, 접시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으햣."
접시를 받아낸다. 동시에 접시는 무사했고, 내 손은 개수대의 모서리에 찍혔다.
"하영?!"
당황한 산이 급히 나에게로 다가오고, 말릴 틈도 없이 내 손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산-"
"멍이 들었잖아! 정말 그 따위 접시가 뭐라고."
아니, 그 따위 접시가 아니지. 접시 하나를 살려면 하루 손님을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우리 산은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
그는 꼼꼼하게, 역시나 매출은 생각도 안 하고 내 손에 비싼 약을 듬뿍 듬뿍 바르고 있었다.
"괜찮다니까요."
슬슬 그의 재정 감각이 의심스러워 돌려 돌려 거절을 하자 그가 내 눈을 바라본다.
"괜찮지 않아."
라고, 물렁한 그치고는 단호한 말이다. 마치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지온을 구해달라고 했던 때처럼. 약을 바르는 동안 정수리만 보고 있었는데, 정면에서 본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나를 담고, 그의 귓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 점이 분위기를 흐리긴 했지만 어쨌든 단호했다.
새삼 그가 손을 잡은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깨달음은 울렁거림으로 이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산의 입이 달싹인다.
이제는 소름이 돋았다.
산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두근거리는 상황일 텐데,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이 무례한 감정과 생각이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도망가야 할 것 같다.
*
원래 세계에서 나는, 회사에서 승진해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언젠가 트라우마도 고쳐서 결혼도 하고 싶었다.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꿈은 변함이 없다.
기껏 지옥 같은 고3시절을 보내고, 괜찮은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와 아득바득 야근을 하고 상사 비위를 맞추던 게 아깝긴 하지만.
다 좋은 거다. 이 세계가 있다는 건 결국 내, 전생의 기억이 망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정신병도 아니었다는 증명이니까.
‘망상이고 환상이고 정신병이었으면 좋을 텐데.’
장을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댄 나는, 그가 말리거나 따라올 사이도 주지 않고 전력질주로 식당을 나왔다. 당장 장 볼 게 있기도 했으니까 괜찮은 변명이었다.
거리를 저벅저벅 걷는다.
'정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셀리안이 평민 소년 산의 말에 따라 지온 땅을 구원한 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그에게는 확실하게 그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실험대가 필요했고, 그런 고민 중 산이 나타났던 것이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오크족을 몰아낸 뒤 지온을 군사요충지로 만들었다. 덕분에 지온은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다 손익이 계산된 행동이지만, 산은 셀리안 크레이누를 신처럼 숭앙하게 되었다.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만큼 영민하거나 스케일이 크지 않았지만 역시 손익을 따져 그를 이용했다.
그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지만, 그걸로는 살짝 부족했다. 하여 내가 이용한 게 내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은 한 때 이 세계에서 가장 천한 색이었다. 거의 사라진 인식이지만 낙후된 지온에서는 아니었었다. 산에게는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의 여동생이 있었고 그녀는 어린 나이에 과격파의 묻지마 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무시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아직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홀대하는 타국에서 도망쳐온 천민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정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산이 분명히 나를 도와줄 있게 쐐기를 박았다.
그 후에도 일부러 그가 나를 ‘보호해야 할 대상’, 혹은 ‘여동생’으로서 인식하게 행동해왔다.
‘순진한 산.’
그런 그가 결국 나에게 연정을 품어간다. 산의 진갈색 눈동자에 애정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바랐던 그대로 가족 같이 여겨주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기적이었고, 무례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그가 서서히 나를 좋아하게 되길 바랐다. 오늘 같은 돌발행위 없이 서서히, 내가 익숙해지게. 그의 연정이 서서히 자라나듯이 나도 서서히 그 눈빛에 익숙해질 수 있게, 산이 나에게 잘해준 보답으로 산의 감정에 익숙해진 내가 그를 받아드릴 수 있도록-
원래 세계에 돌아가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 내 꿈, 사랑하고 사랑받는 꿈을 그를 통해 이루어도 좋겠다고.
‘역시 이기적이고 무례하네.’
*
바로 상점으로 가지는 않고 주위를 거닐었다. 산이 진정했으면 좋겠고 내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묘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순간 산에 대한 고민도 잊을 만큼 기묘한 장면.
그게 왜 기묘하게 느껴지는지 나조차 모르겠기에 더 기묘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매우 훈훈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
어린애가 울고 있다. 지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의 남자아이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버려진 건 아니다. 지온은 가난해서 때때로 거리나 사막에 아이를 버리는 일이 있다고 하지만 그 아이는 제법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깔끔해봤자 평민이겠지만, 그래도 버림받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 아이를 노신사가 달래고 있다. 정말 다정해보이는, 언뜻 K로 시작되는 치킨 집 앞에 상으로 서있을 것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다른 점이라면 치킨 아저씨보다 수염이 길고, 옷차림이 영국신사 같다고 해야 할까. 검은 승마복에 검은 모자. 그것은 지온에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온... 귀족일까. 드무네.'
멍하니 생각한다. 그저 산책을 계속 하거나 마음을 다잡고 상점에 가는 게 맞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온에는 실상 귀족이 없다. 전부 하층민이나 군인이었으며 이곳을 다스리는 군인 영주가 유일한 귀족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귀족이란 평민에게는 무심하기 마련이었다. 설사 셀리안 크레이누에 의해 계급을 이용한 횡포는 많이 없어졌지만 그게 귀족이 평민에게 다정해야 한다와 통하지는 않았다. 무심한 것만으로도 평민들은 살만하다.
그런데 저 귀족 노인은 울고 있는 평민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다. 여기까지 들린다. 어머니를 잃어버렸니, 어디 사니, 울지 마라. 다정한 음색.
훈훈한 장면이지, 이상한 장면은 아닌데도 나는 위화감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무례할 정도로 오래 봤는지도 모른다. 내 시선을 눈치 챈 듯한 노신사의 얼굴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찰나적으로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그 순간 나는 골목 안으로 끌어당겨졌다.
*
나를 끌어당기는 손은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남자가 마음 먹으면 여자는 저항하기 힘들다는 게 세간의 이야기지만 이건 너무했다 싶을정도의 힘이었다.
"읍-"
거기다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입까지 막고 있다. 이런 개새...
"끼!!!"
골목 깊숙이 나를 끌고 온 남자는 멀리 왔다 싶자 마치 짐짝처럼 나를 내팽겨쳤다. 덕분에 나는 억눌린 욕설의 끝머리를 내뱉으며 주저앉듯 엎어지고 말았다.
"끼?"
생각보다 듣기 좋은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말의 끝머리를 그대로 따라한다.
“개새끼라고.”
“생긴 것과 달리 입이 험한 아가씨네.”
올려다본 남자는 악력으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갖고 있었다. 키는 나보다 약간 큰 정도였지만 남자치고는 작았고 몸도 호리호리해보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자세한 모습이나 생김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쥐색 빛깔의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제 몸보다도 커서 온 몸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구해준건데?"
남자는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밉살스러운 말을 하는 것치고는 느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다. 그게 또 열이 받는다.
"왠 헛소리세요?"
"어떻게 알았어?"
"네?"
"헛소리였거든. 내가 좀 허언증이 있어."
이 새끼, 뭐야.
“그냥 좋은 구경이랄까, 관찰을 네가 망칠 것 같아서.”
“구경?”
“노인네들이 또 기가 막히게 감이 좋아요.”
“무슨 소리예요?”
“신경쓰지마, 나 허언증 있다니까.”
“...”
말이 안 통한다. 대화가 안 된다.
나는 화가 싸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무례한 범죄자라면 응징해야 한다. 그게 맞다. 그러나 미친놈이라면.
피해야 한다.
나는 남자로부터 냅다 피해 골목으로부터 빠져 나갔고 남자는 더이상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려요님// 감사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봐주시는 분들 모두, 건강한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