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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5화 (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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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닭고기, 당근과 향신료, 손에는 장 본 짐이 가득하다. 장도 보고, 마음도 다스렸겠다 식당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더 늦으면, 오늘 하루는 거의 파업이기도 하니까.’

연애 트라우마를 핑계로 가게를 쉰다니, 인간으로서 부끄럽다.

이미 늦은 느낌도 들지만.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는 해를 보자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점심시간 이후 손님들은 산이 다 받았겠지. 그나마 위로라면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온 것이다.

“하아...”

그래도 나쁘지 않은 날이었어. 응. 나쁘지 않았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접시는 깨지지 않았고, 나는 산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미친놈을 만나긴 했지만 무해한 미친놈이었고, 맘대로 느낀 위화감 때문에 친절한 노인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다.

지금부터 달려가면 사람이 제일 많은 저녁 시간은 일할 수 있다.

‘달리자.’

짐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달리기로 한다.

아마 식당에 돌아가면 산이 있겠지. 잘 다녀왔냐고 물으며 손은 괜찮냐고 할 것이다. 그도, 나도 평범하게 서로를 대할 거고, 어쩌면 조금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지도 모른다.

상상하니 무거운 짐도, 께름칙한 하루도, 오랜만의 뜀박질도 견딜만 하다. 정말 상상대로 될 것 같아 즐겁다.

나는 산을 좋아한다. 산이라면 이상한 세계에서 계속 살게 되더라도, 설사 연애 트라우마가 고쳐지지 않아도,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괜찮을 거라고.

“!”

“읏.”

그때였다.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여자의 미약한 신음이 들렸다.

*

“죄송합니다.”

상대는 여자였다. 부딪치자마자 사과를 위해 고개를 숙여 확인하진 못했지만, 신음인데도 미성이라고 할 법한 목소리였고 어쩐지 향긋한 냄새가 났다. 복숭아 냄새일까.

“...”

“...”

대답이 없다.

“...”

“...”

보통 부딪치면 사과를 해도 얼굴을 찡그리고 휙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걸까 싶어 살짝 고개를 든다.

고개를 내렸다 드는 순간 여자에게서 풍기는 복숭아 냄새가 짙어진다.

‘헤에...’

역시 여자였다. 그것도 몹시 예쁜 축에 속하는 여자.  벌꿀 같은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가씨였는데, 얼굴은 잡티하나 없이 하얗고 입술은 막 씻어낸 앵두 같이 촉촉했으며 눈동자는 평범한 갈색이었지만, 생기있게 반짝였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누구지?... 아니 그보다 나 큰일 난 건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귀족 영애라 문제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호위가 눈에 띄었고 그녀가 입고 있는 핑크색 원피스는 매우 고급이었다. 촌스럽기는커녕 그녀의 앳됨과 청순함을 가중시키는 디자인이다.

“...칫.”

언짢은 듯 찌푸리며 물러서는 동작이 귀족 자체라 헛웃음이 나올 것 같다.

‘아까 노인은 특이한 귀족이었는데, 이번 아가씨는 전형적인 귀족이란 느낌이군.’

지온에 거의 없는 귀족을 하루에 두 명씩이나 보다니- 이상한 날이기도 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귀족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에 좀더 정중하게, 언뜻 비굴한 느낌이 들정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그녀의 얼굴이 전혀 풀리지 않고 있어 불안하다.

짐도 많은데 다짜고짜 밀쳐지거나 채찍질을 당하거나 하면 답이 없다.

여자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떡하나, 싶어 눈치를 살피면 그녀의 뒤에 있던 호위가 눈짓한다. 가라는 의미다.

‘다행이다.’

평민하고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타입인걸까. 어찌 되었든 그 말을 그대로 따라, 지나쳐 가려 했다.

“거기, 서.”

청순한 외모에 비해 앙칼진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숨기지 않은 경멸과 혐오가 묻어있다.

“과연 저급한 지온 땅의 계집이네. 귀족에 대한 예의도 모르나. 누가 가도 된다고 했지?”

당신 호위가요.

라는 느낌으로 시선을 주면 호위는 모른 척 굳어 있다. 그러나 언뜻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자신의 아가씨가 이렇게 반응해 당황하는 모습이다.

“음...”

이 경우 이거다.

나는 당장 무릎을 굽히고 이마를 땅에 댄다. 짐은 옆으로 밀어두었다. 쓸데없는 분쟁은 피하고 싶었다.

지온에서는 귀족을 만날 일이 드문데다가, 셀리온 크레이누 치세 이후 귀족의 횡포는 표면적으로 자제되고 있는 터라 잊고 있었지만 고루한 귀족들일수록 자존심을 중시한다.

아예 납작 엎드리기로 한다.

“죄송합니다. 미천한 계집이라 예의를 몰랐습니다.”

“...”

침묵이 흐른다. 마음 속으로 초를 센다. 하나, 둘...

일어나라고 해, 그리고 대충 집에 가게 해줘.

슬슬 땅에 있는 모래알을 새는 것도 지루해질 무렵, 머리 위에서 팽팽하게 무언가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여자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다. 방금 전까지 호위의 허리에 붙어 있던 것이다.

“옷이 더러워졌어.”

“...”

“당분간 여기 머물 건데 처음부터 자비를 베푸는 건 보기에 안 좋은 것 같아.”

들으라는 듯한 말투이긴 한데, 대상이 누군지 모르겠다. 그녀 말대로 귀족으로서 본보기를 보이는 걸까. 하지만 그것치고는 ‘나’에 대한 개인적인 적의가 담겨 있어 이상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종족은 고통에 강하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그녀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단호하게 내려쳐지는 채찍질 속에서 아픔과 함께 위화감을 느낀다.

복숭아 냄새, 백금발- 조금 낯이 익은 위화감-

나를 향한 적대감, 하지만 ‘윤하영’은 복숭아 냄새의 귀족 영애 따윈 모른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지인...일까, 했지만 생각도 나지 않고, 그래봤자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일단, 너무 아프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깔린다.

결국 식당에는 돌아가지 못했다.

*

이 세계에서 오고 5등에는 들 최악의 날이다.

난 한동안 얼굴만 청순한 마녀에게 고개를 숙인 채 정신없이 매질을 당했고 짐은 전부 쏟아졌다. 옆에 치워둔 짐에 그녀는 일부러 채찍질을 했다.

‘지독하다-’

최악이었다. 최악.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근처 가게에 앉아 있었다.

여자가 떠나자 알고 지내던 단골 식품점의 아주머니가 달려와 나를 부축해 치료를 해준 것이다. 피범벅이었던 등에 붕대를 감아 주고 찢어진 옷 대신 아주머니의 원피스를 빌려 줬다. 역시 평상시 덕은 쌓고 볼 일이다.

“중앙의 귀족들이 그렇게 성격이 고약할 줄은 몰랐어.”

“그러네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녀의 눈에는 죄책감과 안쓰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지온에는 귀족이 없었지만 핍박 받은 역사가 길었고. 그들은 적어도 지온 이외의 지역에서 온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그녀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원망하는 게 이상하다.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피해를 봤다면 더 최악의 날이었을 거예요.”

“착한 것.”

그녀는 나를 한 번 꼭 껴안았다 통증에 내가 눈을 찌푸리자 미안한 얼굴로 떨어졌다.

“아, 산에게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어?”

“걱정 할...”

“하영!!”

“...그럴 수야 없지.”

산이 집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처음으로 원망스럽게 아주머니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흐믓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영-”

내 모습을 본 그의 눈이 찌푸려진다. 붕대를 감긴 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아 옷에 베어들어어가고 있었다.

당혹해서 숨기듯 움츠리면 그의 표정이 아침보다 더, 죽을 것처럼 구겨졌다.

“하영...”

그가 다가온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내 이름만 안타깝게 읊는다.

“...미안해요, 산. 식료품 다 쏟아서.”

그런 산을 향해 어떻게든 분위기를 완화 시키고자 입을 열었다.

“아, 식당 일도 내팽겨치고, 진짜 못난 직원인데요, 나...미안ㅎ...”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산의 목소리가 내 말을 막았다. 아침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있었다.

“산?”

“...무슨 이야기를 하는...”

나는 당혹했다. 남자가 우는 건 처음 봤다. 원래 세계에선 물론, 전생에도 본 적이 없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우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엘킨 다이브도. 그가 셀리안 앞에서 울 일은 없었다. 운다는 건 상대에 의해 감정이 흔들렸다는 건데, 셀리안 때문에 엘킨의 감정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왜 남자가 울어요?”

쭈볏쭈볏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간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역시 같이 갔어야 했어.”

“하하, 그거야 말로 곤란하죠. 그 자리에 산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내 말에 그의 눈이 흔들린다. 나는 점점 더 곤란해져 그의 눈물을 닦는데 전념했다.

“...”

“산?”

그가 문득 내 손을 잡았다.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에?”

“어머나.”

아주머니, 무슨 어머나예요. 나는 오늘 연속으로 마주하는 강한 산의 눈을 보며 당혹했다.

이 눈은 알고 있다. 셀리안에게 와 지온을 구해달라고 했던 산. 지온에서 수도까지, 그리고 황제인 셀리안에게 도달하기까지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눈만은 올곧고 강하게.

그 눈에 추가된 게 있다면-

아 기분 나빠.

그것은 매우 송구스럽게 죄책감이 드는 생각이었다.

“너를 지키고 싶어, 당연히 지킬 수 있는 입장이 되고 싶어.”

*

산은 그 날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서서히 스며들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연정은 그날 갑자기 피크를 쳤고.

그의 눈물과 감정에 기분 나쁨을 느낀 나, 그런 나에 대한 죄책감은 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날은 이 세계에서 온 후 가장 최악의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려요님 /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침에는 한창 덥더니, 꾸물꾸물 흐리다가 결국 비가 왔네요.; 오락가락 하는 날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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