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5 =========================================================================
5
엘킨이 나를 보고 있다. 그의 눈에는 경악이 담겨 있다. 당혹스러움과 경악.
나는 조금 웃었다. 그가 나에게 감정을, 충성 외의 감정을 느끼는다는 데 만족했다. 가슴 한켠이 아팠지만,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랑하고 있다.”
엘킨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고결한 기사 엘킨. 엘킨 다이브. 사랑으로 고귀한 자를 파멸시키고 고귀한 자에게 파멸될 남자- 그런 예언을 받은 남자.
그래도 나는 고백한다.
엘킨 다이브, 나는 너에 의해 파멸하지 않는다, 네가 나의 구원이니까.
너는 파멸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킬 테니까.
*
결혼식 전날 꾸기에는 너무 최악이라 나는 꿈속의 엘킨 다이브처럼 힘껏 미간을 찌푸렸다.
지온의 전통 혼례복은 척박한 지온 땅에서 여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차려입는 옷이었고 때문에 아름답고 호화스러웠다. 산의 어머니가 입었다는 옷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거울이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죽이게 예뻤지만, 거울 속의 나는 답지 않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산이 이런 얼굴을 보면 안 되는데.’
급작스럽지만 당연한 수순이다. 나도, 산도, 어쩌면 마을 사람들조차 예언하던 결말이 조금 빨리 온 것 뿐이다.
나는 산에게 제법 호감이 있었고 이곳에 계속 있게 된다면 내가 잡을 수 있는 미래는 이 정도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신원불명의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30살 가까운 계집이 가질 수 있는 엔딩치고는 최고다. 오히려 산이 아깝다.
그가 워낙 덩치가 좋고 어른스러워서 잊곤 하지만 그는 연하였다.
산은 나보다 8살이 어리다. 셀리안을 찾았을 무렵, 그는 18살이었고-
‘...그 마녀같은 귀족 계집애도 18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게 왠지 걸린다. 결정적인 걸 잊고 있는 듯한 느낌. 전생의 기억에 있는 ‘그때’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중요할 기억- 동시에, 지금까지 결정적으로 의식하지 않았던, 지금이 셀리안 치세라는 걸 되새겨본다.
새삼스럽지만 이상하다.
이런 변방의 계집이 제국의 황제를 만날 일은 없겠지만 이 세계에는 전생의 ‘내’가 있다.
‘대체 뭐가 뭔지.’
결혼을 앞둔 여자는 생각이 많아진다더니. 처음 산을 찾아내 조금 생각하다가 만 지금 존재하는 ‘셀리안 크레이누’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제 가게가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 있는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니 딴 생각은 그만 하기로 하자.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고. 세뇌하듯 되새겼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남자인 걸.’
게다가 나를 무지하게 좋아해준다. 그날 피크를 친 그의 연정은 점점 커져서, 이제 그의 눈만 봐도 나는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게 사랑해주는 눈빛은 윤하영은 처음이었다. 그의 연정은 이제 제법 셀리안 크레이누가 엘킨 다이브에게 품는 감정과 비등해졌다.
반려에게 그 정도로 사랑받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
그때 툭하고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힐끗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산이 멍한 얼굴로 문이 입구에서 날 보고 있었다.
“산?”
“...예뻐.”
산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행복한 신랑의 웃음, 만족스러운 웃음이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거듭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끄덕이는 찰나, 산의 뒤로 희미하게 금발이 찰랑 거렸다.
“찾았다, 산.”
그리고 가녀린 손이 그의 허리를 껴안았고, 나는 드디어 떠오른 기억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 밖에 없었다.
*
“찾았다, 산.”
앙칼지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게 울린다. 그 목소리에는 연정이 담겨 있다. 나에게 향하는 연정에 대해 극도의 기분 나쁨을 느끼는 만큼, 나는 그 감정에 민감했다.
산의 허리를 감싼 손은 눈에 익다. 표독스럽게 채찍을 쥐고 나를 매질했었다.
“으앗.”
내 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산이 등 뒤의 그녀를 떼어내고 당황해서 나를 본다.
“당신 누구? 아, 하영! 아니야, 난 이런 여자 몰라!”
“!”
여자는 산의 말에 조금 억울하게, 슬프게 산을 바라보다가 곧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곧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산을 재차 바라본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녹아버리게 달콤한 표정이 된다.
저 얼굴, 저 눈.
‘아-’
나를 보았던, 표독스러운 표정의 그녀가 너무나 다른 인상이라 기억하지 못했다.
실제로 셀리안 크레이누와 그녀는 실질적으로 접점이 없었으니까.
“산, 약속을 지키러 왔어.”
“약속? 너는 누군데?”
산의 눈이 놀란 듯 둥그래졌다.
여자는 산의 말에 상처 받은 듯 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성인이 되면 맞이하겠다고 했잖아.”
그녀가 꽃처럼 웃었다.
엘리자베스 아카인, 훗날 산 아카인이 되는 아카인 후작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 작품 후기 ============================
려요 / 산은 연애, 하영은 나이 차서 맞선에 끌려나와 어느새 결혼까지 골인하는 기분이네요.ㅎㅎ
아침에 부랴부랴 올렸는데 짧습니다.; 부족하지만, 봐주시고 선추코 보시는 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