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7화 (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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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약속을 지키러 왔어.”

엘리자베스 아카인- 아카인 후작가의 외동딸이자 훗날 사교계의 꽃으로 등극하는 아카인 부인.

무역상으로 유명한 아카인 후작, 귀족치고는 활발하게 상업에 손을 뻗었고 꽤 성공했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복숭아 향수를 비롯해, 귀족을 상대로 한 장신구나 화장품의 무역에 주력했다.

고루한 귀족들은 그의 행동을 ‘천하다’고 여겼지만 셀리안 크레이누의 치세 전부터 세계는 변동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 그는 가장 현명하게 가문을 지킨 귀족 중 하나였다.

비록 자기 자신은 ‘파멸’하긴 했지만- 가문만은 그의 딸과 산 아카인에 의해 셀리안 황제가 죽을 때까지(어쩌면 이후에도) 지속되었었다.

가주로서는 훌륭하다 하겠다.

“약속? 너는 누군데?”

“성인이 되면 맞이하겠다고 했잖아.”

평민인 산이 그 유명한 아카인 후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간 건 대단히 회자가 되었다. 역 신데렐라인 것이다.

18살의 산과 만난 이후 셀리안 크레이누는 더 이상 그와 접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어져 몇 년 후, 산은 산 아카인이라는 귀족의 신분으로 수도에 입성한다.

소문에는 후작의 딸이 그에게 단단히 반해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아카인의 영애가 산을 만난 건 14~15살 무렵, 18살의 그가 셀리안과 만나기 위해 제국으로 왔을 때와 겹친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아마 소녀에게는 운명이었던 듯 하다. 뭣도 모르고 평민들의 거리에 ‘홀로’ 가출을 감행했다가 불한당을 만난 그녀를 용감한 소년 산이 구해준 것이다.

귀족영애가 아무리 가출을 시도했어도, 따라붙는 호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호위가 나타나기 전 과감하게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소년의 모습- 그것은 소녀에게 기사처럼 보였으리라.

풋사랑, 첫사랑의 추억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귀족 아가씨는 어린 날의 기억을 살려 성인식이 지나고 산을 맞이했다. 대단한 로맨스고 집착이었다. 여기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의 비틀림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

‘왜 잊고 있었지.’

아니, 잊지는 않았다. 잊지는 않았지만 윤하영에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셀리안은 산이 후작이 된 후 아카인 후작가와는 엄청나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 했지만, 윤하영에게는 지온의 식당 주인인 산이 필요했으니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산, 이제 기억났어?”

엘리자베스 아카인은 수줍은 소녀처럼 자신의 마음과 과거를 풀어낸다.

산이 자신을 구해주고 아카인 후작의 영애를 구한 대가로 며칠 후작가에서 머문 것부터 셀리안을 만나는 자리를 아카인가에 의해 주선받게 된 것까지.

그리고 떠나는 산에게 매달리는 어린 아가씨를 향해 그가 ‘내 나이 즈음 되어도 네가 잊지 않는다면’ 같은 형편 좋은 이야기를 한 것도.

“네가, 그 베스?”

“응.”

애칭이 불려진 것에 여자의 눈이 말갛게 반짝인다.

“네가...”

“산?”

아카인의 영애가 불안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나 때와는 다르게 평민인 산에게 매우 고분고분하다. 사랑에서는 받는 쪽이 갑인가 싶다.

산은 그렇게, 아카인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게 신음하며 나를 보았다. 나를 보고, 곧 단호하고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베스.”

“응?”

"일단 소개 할게. 이쪽은 우리 가족, 윤하영, 내 아내 될 사람이야."

"아내?"

"아내."

거절인지 소개인지 모르지만 산은 단호하게 끄덕였다.

여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뻐끔 거린다.

“하지만-”

“베스... ‘나같은 걸’ 기억해줘서 고마워.”

“산! 산은 ‘같은’ 게!”

“미안해- 약속 못 지키게 되었네.”

“!”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그녀와 결혼해.”

산은 아이를 달래는 투로 이야기했다.

“...”

산의 말에 소녀, 아카인 후작 영애의 눈이 순간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아마 그녀는 나를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럼 일부러인가.’

채찍질을 당할 때, 나에게 쏟아지던 강렬한 적의- 그녀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닌 ‘윤하영’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정도로 집착스럽게, 절실하게 산을 사랑하는 귀족 영애가 그의 주변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자 여자의 질투는 무섭구나 싶다.

‘흐응...’

산이 아카인 후작 영애를 설득하는 동안 난 조금 심드렁해져 버렸다.  심각하게 내 눈치를 살피는 산에게 미안해지는 감정이다.

결혼식,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미루고 좀더 마음을 다 잡을 시간을 준다면. 분위기를 보면 곧 산이 아가씨를 향한 설득을 끝내고 결혼이 진행되겠지만 하여튼 내 마음은 그랬다.

‘그런데, 나랑 산이 결혼하면 아카인 후작가와 셀리안의 관계는 어떻게 되지?’

그냥 그랬던 후작가와 황제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건 아무래도 산이 들어온 직후다. 나랑 상관은 없지만 역사라고 할까 그런 게 뒤틀리는 게 새삼 느껴져 미묘하다.

그때 영애가 입을 열었다. 비장하게, 악의를 담아, 단호하게.

“산은 도둑질이나 하는 창녀와 결혼할 생각이야?”

그 말은 파장이 커서 멍하니 있던 나도 눈을 깜빡였으며 부드럽게 풀려 있던 산의 얼굴도 점점 사나워졌다.

“...말 조심해, 베스-”

산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영애는 움찔했지만 말을 잇는다.

“나 조사했어.”

뭘?

“저 계집은 변경 지역에서 창녀짓을 하던 여자야. 도둑질을 하다가 벌을 받을까봐 지온으로 도망쳐온 거야.”

그녀가 뒤에 선 호위로부터 종이뭉치를 받아 산에게 넘긴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윤하영은 이 이상한 세계에 오자마자 지온이었고 산을 찾아갔다- 그게 사실, 그러니까.

‘저게 무슨 개소리야.’

산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만 산은 아카인 영애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오히려 내 손을 감싸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더이상 내 아내를 모욕하면 베스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증거가 있어, 봐줘.”

그녀는 부탁하는 어투가 된다.

증거라, 흘끔 본 서류뭉치들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위조겠지만, 언뜻 보기엔 그렇게만 보인다.

신원불명의 여자를 귀족이 그 배경을 조작하는 건 생각보다 손쉬운 일이다.

“볼 필요도 없어. 하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산은 여전히 단호했다.

*

그 후 결혼식은 보류되었다.

산은 강행하려 했지만, 아카인 영애가 무슨 손을 썼는지 존 할아버지를 비롯 도와주던 어른들까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산을 설득했다. 아마도 그녀는 산이 거절했던 자료를 마을 유력자들에게 돌린 것 같다.

직접적인 인간관계의 변화는 존 할아버지가 시작이었다.

가게에서 만나는 손님과 서빙아가씨에 불과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랜 인연이다. 그것이 단번에 그의 눈에 동정과... 혐오라는 감정을 덧씌웠다. 오랜 사이니 그나마 동정이라도 있어 다행인건가.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퍼지고 퍼져 상점 아주머니, 식당 손님들, 아니 마음 사람들- 그들이 나에 대해 갖는 감정과 눈빛에 동정, 혐오와, 경계가 섞여들기 시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윤하영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창녀에 범죄자 기록을 갖게 된 것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내 사소한 불쾌함은 둘째치고 곤란한 일이었다.

‘...귀찮아.’

가뜩이나 암담한 이세계 생활인데 이상한 과거까지 붙어버렸으니.

지온에 있는 게 불편해진다.

변하지 않은 건 산뿐, 산은 지치지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 이번 주기가 넘기 전에 꼭 내 명예를 찾아주고 결혼을 하겠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산은 사랑에 빠졌지만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현실은 무겁다.

...도둑질에 매춘을 하던 여자와 결혼한다는 산- 아카인 후작이 될 산

내가 떠나기로 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러요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ㅋ

kamizzang // 채찍을 마구 휘두르는 귀여운 아가씨라는 설정입니다.(<<)

7편만에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야반도주하는 주인공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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