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8화 (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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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내 아내를 모욕하면 베스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산에 대한 호감도가 올랐다. 인간적인 호감도지만 이제 피크를 친다.

감동스럽고 다행인 이야기. 역시 산은 나에게 구원이다. 아는 사람, 그것도 산에게 ‘창녀에 도둑’으로 보여지고 설마 하는 시선을 받는 건 나라도 참기 힘들다.

그런데도

‘...이상하네.’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불편했다. 불편한 게 이상하다, 그런 나를 용서하기 힘들다. 은혜도 모르고 호의도 모르는 나...

“볼 필요도 없어. 하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평민인 그가 귀족인 베스에게 저런 말투를 구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나를 감싸다가 산이 피해를 입을까봐, 나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걸까.

아니, 아니다. 산을 사랑하는 아카인 영애가 그럴리 없다. 그저 어린 시절 추억이긴 해도 산과 그녀는 생각보다 깊은 인연을 갖고 있을 테니까. 그녀의 사랑은 나따위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깊을 테니까.

‘아, 그렇구나.’

나는 물끄러미 산을 바라본다. 나를 보는 산의 눈은 미안함과 안쓰러움, 사랑스러움이 넘치고, 아카인 영애를 보는 산의 눈에는 계급차 등 현실적인 두려움은 한 점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사랑은 ‘힘’이 된다. 산은 나에게는 약자지만 아카인 영애에게는 강자다.

그리고 나는-

7

어느날 밤, 나는 돈과 옷가지를 챙겨 몰래 집을 나섰다. 산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와 미안함과, 그의 행복과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나오기 전에는 불안했다. 사실이 아니지만, 치욕스러운 공식기록이 생겼고 나는 정말로 갈 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걷다보니 마음이 맑게 개기 시작한다.

밤하늘은 높고 캄캄한데도 맑게만 느껴졌다.

기지개를 켠다.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해본다. 자유 무역 도시 시쿤도 괜찮고, 수도도 괜찮을 것이다. 지온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방법은 생각해뒀다.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 짠 계획이 실제 이루어질지, 내 체력은 따라줄지 여러 가지 고민이지만 일단은-

“안녕, 산.”

*

“알아서 떠날 거라니까!!”

최악이다, 개운한 마음으로 나선지 얼마나 지났다고. 솔직히. 생각해놓은 걸 전혀 실행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변 상점에 가는 수준으로 걷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놓으라니까!!”

나는 드물게 소리를 질렀다. 이 세계에 온 나는, 내 성질을 낸 적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산에게조차 말이다.

나는 나름 내숭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아이와 어른 사이의 소녀, 연고가 없는 불쌍하고 가련하지만 성실한 소녀- 그게 내가 정한 이곳에서의 나.

나는 평온하게 살고 싶었고, 가능하면 온 몸 성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시끄럽네. 천박하긴.”

고개를 올리면, 엘리자베스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소리를 지르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마주 노려보면 그녀가 내 뺨을 때렸다. 작은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을까 싶을 만큼 소리만큼이나 얼얼한 한 방이었다.

“읏”

“창녀 주제에.”

“...그건 네가 만든 거잖아!”

“불길한 검은 머리 천민 계집이 할 게 그 외에 뭐가 있겠어.”

그녀는 코웃음 쳤다. 청순해보이는 얼굴로 표독스럽게 까르르 웃는다. 웃음소리는 표독하게만 들리는데 얼굴은 천사 같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녀 옆에 있던 호위는 무자비하게 나를 붙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다. 그저 재수없이 자기 주인에게 걸린 평민이란 대접이었는데 이제는 무슨 쓰레기 다루듯 한다. 주인이 ‘찾고 있던’ 도둑질을 한 창녀 계집은 쓰레기라 이거지.

“떠난다니까! 날 어쩌려는 거야?”

“떠나, 주제를 아니 좋네.”

그녀는 조금 비틀리게 웃었다.

“하지만, 산을 속인 건 용서할 수 없어.”

“속여?”

“그래, 산을... 산은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아.”

“그야 네가 거짓말...”

퍽, 이번에는 그녀의 하이힐을 신은 발이 내 이마를 찼다.

“아프잖아!”

소리를 지르면 소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용서못해.”

“...”

아픔과 짜증스러움에 화가 났는데 제가 더 쳐맞은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으니 힘이 쭉 빠진다. 성가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이렇게 성가시다.

“...네가 용서 못해도, 난 떠날 거니까. 네 마음대로 설득하면 되잖아.”

사랑에 있어서 그녀는 ‘약자’다. 자신이 더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내내 몰려 있다. 그것은 마치 셀리안 크레이누와도 같았다. 그는 엘킨 다이브를 완벽하게 파멸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 쪽이 썩어 문드러져 파멸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네가 그의 옆에 있을 거잖아.”

내가 왜 얘를 설득하고 자빠졌는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면 아카인 영애는 무감한 어조로 내 말을 막았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

“산은 널... 너 같은 걸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데.”

“...”

“난 봤어. 계속- 산이 ‘그렇게’ 소중히...여기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

“하지만- 네 인성따윈 상관없어!”

씹어뱉는 듯한 말이다.

“너는 ‘산’을 사랑하지 않아. 너는 그가 너에 대해 전전긍긍해도 심드렁한 표정만 지었지.”

“...”

“너는 그의 사랑조차 ‘존중’하지 않아. 그저 비웃을 뿐이지. 네가 뭐라고?”

“!”

우는 듯한 한 마디였다. 멍하니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녀는 나로부터 고개를 돌려 호위에게 신호한다.

호위가 나를 끌고 뒤돌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 뒤에 마차가 대기한 걸 알아냈다.

“자, 잠깐!”

저 마차가 무지하게 불길하다. 뻥 뚫리듯 열린 마차로 사람들이 구석에 모여 퀭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도, 마차 앞에 서 있는 지저분하게 무시무시한 인상의 아저씨도 무섭다.

얼굴로 판단하면 안 된다. 엘리자베스를 봐라, 천사 같은 얼굴로 마녀 같다.

그러니 반대로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근데 마녀가 데려온 사람이니 글른 건 아닐까.

“도둑질 한 계집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나 그냥 떠난다니까... 그리고 나는 ‘나름대로’ 산을...”

소중히 여겼어-

“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마.”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눈짓을 하자 남자가 나를 마차로 밀치듯이 밀었고 인상나쁜 남자가 열린 마차 안으로 나를 던져 넣는다. 반항할 새도 없이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다시는 산의 앞에 나타날 수 없게 해줄게.”

마지막으로 본 소녀의 얼굴은 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

셀리안 크레이누는 유례없는 마법왕이었다. 고대와 미래, 모든 마법을 아우르고 혼자만의 힘으로 한 국가를 전복 시킬 수 없는 천재 마법왕이었다.

마법은 영혼에 새겨진다. 영혼에 이미 마나가 차올라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셀리안과 나의 영혼은 같다.

그런데.

“...안 되네.”

왜 안 될까.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창살을 바라보았다. 기억나는 대로 공격 마법 주문을 외워보았지만 소용없다.

그러고보니, 나는 마나란 것도 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물론 남에게서도 못 느끼겠다.

‘...뭐지, 게이의 기억은 있는데 정작 능력은 없는 환생이야?’

한탄해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현실-’

그렇다, 현실. 나는 지금 엘리자베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중이다.

내 뒤로는 나를 바라보는 퀭한 눈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노예로 팔려가는 중인 것 같다. 중얼거리며 창살에 붙어 있는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보고 있다.

“...”

“...”

특히 그 중에 한 남자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베이지색, 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머리카락 색에 평범한 얼굴을 한 남자로 눈도 참 작다. 저런 걸 실눈이라고 하는구나. 그런 작디 작은 눈으로 뚫을 듯이 나를 보고 있다. 눈만큼이나 체구도 작다. 그런데 그 눈이 독특한 황금색을 띠고 있고 그 독특한 색 눈에 힘이 들어가 있어 쬐금 신경쓰인다.

“...하아.”

이 놈의 미모란...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지금은 썸 탈 때가 아니다. 산한테 미안해서라도 당분간 사양이고, 노예로 팔려가는데 썸은 무슨...

‘노예가 뭐를 하더라.’

제국 키오스는 ‘나’ 님 셀리안이 즉위한 후 좀 덜하지만, 다른 나라는 취급이 최악이라고 들었다. 인간다운 삶은 보장도 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부려진다. 여자는 남자만큼 일하고 게다가 성노로 다뤄진다. 아니다, 이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취향은 다양하니까.

심지어 셀리안도 게이였는데. 물론, 엘킨 한정으로.

“하아.”

다시 한숨.

대체 나는 여기 왜 온 걸까.

한숨을 쉬며 마차의 벽에 기댄다. 눈까지 감으니 얼마 전 엘리자베스에게 채찍질 당한 등과, 어제 맞은 뺨과, 그녀의 호위에 의해 땅에 박혀 찢어진 이마가 욱씬 거린다.

영애가 악의 축이다, 그녀는 내 원수...랄까, 역시 사랑이니 뭐니에 얽매이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무슨, 그냥 우직하게 혼자 사는 걸 목표로 했어야 했다.

[너는 ‘산’을 사랑하지 않아. 너는 그가 너에 대해 전전긍긍해도 심드렁한 표정만 지었지.]

나는 사랑과는 인연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과거의 내 죄도, 산에게 해버린 이기적인 짓도-

‘산- 산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나를 찾을까, 울까. 그나마 편지를 두고 왔으니 조금 안심할까. 그저 미련없이 떠난 것만으로 상처입고 슬퍼할까.

감은 눈의 어둠 속으로 산이 스며든다. 산의 얼굴, 눈동자. 그는 울었다. 다친 나를 보며 울고 울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눈동자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그게 불쾌감이든 기쁨이든-

‘엘킨은 안 그랬을까.’

셀리안 크레이누, ‘내’ 고백에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을까. 그는-

가슴 한 켠이 욱씬욱씬, 새삼스러운 생각이 드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고프다.”

“그렇네.”

“...졸려.”

“그건 자면 되지, 그건 그렇고 아가씨 굉장한데. 어떻게 고대마법을 아는 거야.”

눈을 뜬다. 어느새 내 옆에는 실눈 남자가 앉아 있다.

============================ 작품 후기 ============================

pink0930 // 코멘트 감사합니다!

크림파스타가 먹고 싶은 아침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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