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9 =========================================================================
9
마차가 달린다.
쉼없이 마차는 달리고 지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면, 사람들이 모인 구석 쪽으로 돌아간 실눈남과 눈이 맞길 몇 번째. 몇 번째의 눈 마주침 끝에 아예 시선을 주지 않게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에는 기분이 나빠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들리는 고개를 일부러 창살 쪽에 댔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녹다운 되어서 저절로 창살에 기댄 채 고개 들 힘도 없어져 버렸다.
일부러 신경쓰지 않아 좋긴 한데, 실제로 지쳐버린 거라서. 사람을 짐짝처럼 운반하는 마차의 끔찍함을 실감했다.
*
나는 전생을 기억했지만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 삶 속에서도 그날 그날 있었던, 내가 한 일 모두를 기억하기 어렵듯이 셀리안의 기억도 그랬다.
엘킨 다이브에 대해서는 머리카락의 갈라진 정도까지 기억하는 무시무시한 셀리안 크레이누였지만. 그는 자신의 일이나 그 외 주변 일에 대해서는 별달리 기억하질 못했고 그건 나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남들이 칭송하는 어마어마한 정치적 업적도 그에게는 그저 일상이었다. 어제 아침에 먹은 빵이 무슨 빵인지 어떻게 기억하겠냐, 같은.
가끔 그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등을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다지 강렬한 기억은 아니었다. 그의 안에서 엘킨 다이브에 대한 기억만큼 반짝거리는 건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카인 영애를 기억하지 못한다든지,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싶으면 있는 힘껏 기억을 더듬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서- 그런 자기 중심적이고 조각난 기억들은 셀리안 크레이누로서의 자아를 내게 심어주지 못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셀리안 크레이누는 ‘나’이기도 했지만 ‘나’와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때때로 그에게 이입해 그가 슬퍼하거나 괴로울 때는 나도 슬프고 괴로웠지만. 반대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되는 불쾌감마냥, 그가 별개의 존재로 느껴지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사춘기 때나 고민했지, 실상 그와 나는 별개임을 나이가 들수록 깨달아갔다. 극단적인 내용의 BL소설을 읽거나 타인의 연애 감정을 마주하지만 않으면 별달리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그는 내 과거조차 아니었다. 오히려 망상 같은, 지나치게 먼 존재 같기도 했다.
*
“하아-”
깊게 한숨을 쉬며, 이 마차에 타고 처음으로 보는 석양에 시선을 고정한다.
'해가 지는구나.'
아득하다. 도망도 치지 못하고 이게 뭔가 싶다. 게다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쳐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그렇게 느낀다.
마차가 쉬지 않고, 정말로 쉬지 않고 달려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괜찮아?”
그때, 실눈남이 다시 내게 접근해왔다. 처음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와 옆에서 태연하게 말을 건다. 두 번째라 깜짝 놀라지는 않았지만 지긋지긋하다.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또 다가온 것이다.
"..."
힘들어서 시선만, 뭐냐는 얼굴로 바라봐주면 남자는 예의 생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연다.
"피곤해 보여서."
"..."
“점점 얼굴이 퍼래지더니 아예 시선도 못 맞추는 걸 보고 걱정했어.”
피곤한 건 둘째치고 시선을 안 맞춘 건 너새끼랑 상종하기 싫어서거든.
말로는 하지 않는다. 기막힌 이유에 줬던 시선도 거둬 다시 창살에 얼굴을 기댔다. 모래바닥에 바퀴가 긁혀 덜컹거리는 게 보인다. 덜컹거리는 모습을 몸으로 느끼는 것도 괴로운데 시각으로도 확인해야 하다니-
“으윽...”
“괜찮아?”
“...”
대답이 나오지 않는 건 상종하기 싫은 거 반, 힘 들어서 말 못하는 게 반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새삼 지온은 물론 지온 밖으로도 모랫길이 계속되는 걸 깨닫는다. 넓고 긴 모랫바닥- 끝이 없다. 평지는 언제 나오는 걸까.
‘지금 고백이라도 받으면 정말 토할 것 같아.’
졸업식의 흑역사가 괜히 떠오르는 거 보면, 정말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좋아해.”
“으웁.”
재차 입을 손으로 막고 싸한 얼굴로 바라봐주면 괘씸한 남자가 빙글빙글 웃는다.
“왠지 네 옆에 있으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게... 응, 나 이런 거 참 좋아해.”
“죽을래...”
낚시질도 아니고, 알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심히 안 맞는 남자다. 입을 막은 손 사이로 으르렁거리면, 남자는 내 분노를 전혀 못 알아챘는지 제 헛소리를 이어나갔다.
"흐음... 그런데 자꾸 너, 너 하게 되네. 으음... 자기소개나 해볼까."
하아... 이 미친놈.
"그래도 인연이잖아. 잊고 있긴 했지만 두번째 만남이고."
"..."
"'나'를 인식하는 간만의 만남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고 싶어졌어.“
아, 미친놈. 고만 나불대고 가라.
"내 이름은 류. 넌?"
"..."
"...너는?"
칭얼거리기까지 한다. 다른 의미로 쏠린다. 통성명은커녕 이 남자에 대해서는 통째로 기억삭제를 하고 싶어 떨어질 수 있는한 거리를 벌려 창살을 향해 등을 돌린다. 대놓고 사람을 외면하는 형상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
창살 밖으로는 방금까지 뜨겁게 타오르던 석양의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깔려가고 있었다.
마차는 계속해 달린다.
계속, 계속-
‘역시 좀 이상한데.’
다시 하던 생각으로 돌아오면, 역시 뭔가 좀 이상했다. 내가 잡혔던 게 밤, 밤이 지나 날이 밝는 걸 보고 지금은 다시 해가 지고 있다. 그런데도 마차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
'외모 만큼이나 짱 센 노예상 아저씨인가 보네.'
마차에 밀어넣어질 때 봤던 다부지고 사나운 인상의 노예상-
‘아니지, 아무리 짱 세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게 가능한가.’
나의 전생은 현실성과는 백만광년 정도 떨어져 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의 원인을 추측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특히 그 비현실적인 전생의 세계에서는.
'강화 마법 같은 건가.'
모 나라에서는 노예를 한계까지 쓰기 위해, 혹은 전쟁에서 전사들을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종류의 마법을 쓴다고 했다. 비슷한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해본다.
옆에는 여전히 미친 변태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종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여전히 이름을 기다리는 건지, 나를 보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지만 무시한다. 무시하고 생각에 골몰한다. 간간히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래도 좀 멈추자.’
본인은 강화마법의 은총을 받고 계신지 모르지만, 이쪽은 평범한 사람이다. 덜컹거리는 길을 하루 꼬박 마차로 달리고 있으면 속이 메슥거리는 걸 넘어 몸이 망가질 것 같다.
일부러 신경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중 허약해 보이는 몇 명은 이미 구토를 했다. 그것도 창살로 달려오지도 못하고 구석에... 찌는 날씨에 덜컹거리는 마차, 토 냄새까지 나고 태연하게 싱글거리는 눈앞의 미친 변태까지.
“우읍...”
토의 연쇄 작용에 침범당할 것 같은...
“말도 못하게 힘든 모양이네. 이름은 됐어.”
아, 이 편리한 뇌.
”그나마 밖이 바로 앞이니 토는 밖으로 하면 되겠네."
밉살맞은 건 둘째치고 강화마법은 얘도 쓰나. 내 마법주문을 알아듣는 것도 그렇고. 이 마차에서 제일 쌩쌩한 것 같다.
그게 또 억울해서 째려보면 조금은 찔리는지 빙글 거리던 얼굴을 굳히고 자상한 얼굴을 한다. 미친놈의 자상한 얼굴이라니 무섭다.
“정말 많이 아픈가봐. 그렇게 불쌍한 얼굴로 보면 걱정되지.”
“...”
"음... 그럼 기운 날 이야기를 해볼까."
퍽이나.
기대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리면 남자가 다정하게 웃는다.
“이제 곧 다 괜찮아질 거야.”
*
괜찮아지다니, 무슨 근거인지 모르겠다. 하던 대로 헛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고, 뭐가 괜찮아진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어쩐지 남자가 의미하는 게 곧 마차가 멈추고 이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구원받을 거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거다.
‘나, 머리 이상해진 건가.’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가 고민하듯 입을 열고 곧 전매특허인 싱글거림을 가해 이죽였다. 이죽거리며 내가 방금까지 시선을 주고 있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네, 정말 곧이겠네.”
"?"
“정말 대단한데.”
“?!”
순간 오싹-하고 허리 끝까지 짜릿하게 오한이 스몄다. 남자의 눈동자에 기묘한 기운이 스민다. 그 황금빛 눈동자가, 무슨 농담을 해도 감정이 없이 이죽이기만 하던 눈동자에 '감정'이 스민다.
“!”
무섭다-고 생각했다.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맹수처럼 날카롭게 가늘어지는 검은 동공도, 어쩐지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긴장감도.
방금 전까지 자상하다고 생각했던, 나른하기까지 하던 분위기가 사라진다.
남자에게 처음 스민 '감정'- 분노도 증오도 그런 종류의 윤하영이 아는 감정이 아니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무서워 얼어 있으면 그런 나를 보며 그가 킥킥 소리내 웃었다.
"느껴져? 지긋지긋하기도 하지."
"뭐?"
"세상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신 위대한 규격외께서 친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잖아."
"무슨..."
뜬금없이 대단한 악력으로 나를 끌고 갔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 앞에서 남자는 웃으며 동의를 구한다.
동의를 구하며 위로한다.
"그러니까 안심해. 열받기는 해도, 이 마차는 이미 그의 실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이름 모를 재미있는 너- 너도 구원받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말을 잇지도 않고 눈을 감아 버린다.
순간 나는 숨을 토해낸다. 다른 의미로 마음이 놓였다.
얼마 안 가 마차는 계속되던 흙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숲속에서, 멈춰섰다.
*
끝없이 롱런으로 달려나가던 마차가 멈춘 건 어두웠던 하늘이 밝아질 무렵이었다. 어느새 마차만 탄 채 하루가 지난 것이다.
남자가 멈춘다고 했던 뒤라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미 몸도 정신도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었다.
휴식을 위한 것인지 마차가 멈춘 곳은 숲속이다. 멀미와 메슥거림, 덕분에 한 잠도 자지 못해 뻑뻑한 눈으로 창살 틈을 바라보면 지온에서 이어지는 흙길을 벗어나 정말 숲이었다.
‘계속되는 흙길 다음 뜬금없이 숲인가.’
뜬금없는 숲이기에 오히려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창살 사이로 보이는 숲의 에메랄드 빛 바닥에는 어떤 문양의 일부로 보이는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키오스 왕실의 문양이다.
‘아셀란-’
신성한 숲, 아셀란이었다.
‘노예마차가 서기에는 좀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네.’
이거 미스 초이스 아닌가. 뭐, 나에게는 좋은 거지만.
아셀란이라고 하면 키오스의 수도를 감싼 숲이다. 왕궁 경비가 지나갈 수도 있고, 하여튼 탈출이라든가 구원을 얻기 쉬운 장소였다.
힐끔 실눈남 쪽을 보면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어떻게 안 걸까.’
그가 말한 ‘괜찮아질 거야’의 의미가 이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햇살이 부서지듯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파고들고 끝없는 녹음으로 감싸인 숲 ‘아셀란’, 새소리가 들리고 위험한 짐승이나 마수는 침범할 수 없는 숲. 수도를 수호하는 황제의 숲-
셀리안 크레이누가 황제로 즉위할 때 그 손으로 생성해낸 마법의 역작-
황제 즉위시, 셀리안 크레이누가 제국의 국민들에게 보인 왕의 축복이자 타국들에게는 경고가 된 숲.
‘하여튼 먼치킨이네.’
기억 속에만 있는 ‘그 숲’에 있자니 새삼 셀리안 크레이누가 정말 만화같은 왕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때 창살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갑자기 선작이 2배 이상이 되고, 회당 추천도 10개가 되어 힘내서!! 감사합니다.
몇시간 후 한 편 더 올릴 생각입니다./ㅁ/ㅎㅎ
디롱 // 전생에 황제여도, 현재는 그냥 20살인 척 하는 30살 가까운 아가씨...
올로로소 // 올로로소님! 어쩜 제가 행복해할 말을 해주시나요.ㅎㅎ
소시민K씨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선작 관련 화이팅을 두번이나 받아서 괜히 쑥스럽네요/ㅁ/
은빛하늘소리 // 코멘트 감사합니다! 일단, 하영이의 죄는 나이를 속인 죄입니다. 다음편 갈게요!>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