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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와라.”
“?”
노예상 남자가 열린 마차 앞에 서 있다.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고 말이다. 조금 찜찜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면 남자의 눈이 이상하게 번들거린다. 조금 오싹한다.
“어서 나오라니까.”
“...”
번들거리는 것도 한순간 사납게 우그러진 얼굴로, 쉰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명령한다. 그의 눈은 지친것처럼 퀭한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하루 꼬박 마차를 달렸으니.’
하루 꼬박 달려 도착한 게 아셀란 숲이란 게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강화마법은 마약같은 효과도 있다고 하는데 남자는 그저 피곤해보일 뿐이다.
왠지 날카로워보이는,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한 대 맞을 것 같은 기세에 눌려 나는 비틀거리며 마차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읏...”
“쯧-”
참지 못한 노예상은 끌어당기듯 나를 잡아 마차로부터 떨어뜨렸다. 덕분에 무릎도 다쳤고, 가뜩이나 뒤집어 있던 토가 올라와 남모르게 꿀꺽 삼키는 추태까지 생기고 말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올라왔던 위산을 삼키는 건 곤욕스러웠다.
“으... 아?”
곤욕스러움에 신음하며 무릎을 문지르다 땅의 풀이 새삼스러워 고개를 갸웃한다.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감촉이었다.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면 푸른 숲, 따사로운 햇빛에 눈을 깜빡이게 된다.
‘이래서 숲인가.’
어울리지 않지만, 힐링이 된다. 계속되는 흙길 끝이 아셀란 숲인 것도 이해할만하지 않은가.
“흐흐흐.”
“?”
숲에 취해 있으면, 기묘하게 끈적한 노예상의 웃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동시에 창살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새삼 뭔가 하고 쳐다보자 그가 흐흐흐 다시 한 번 웃는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
“흐흐흐.”
고마 쳐웃어-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고 년, 반반하게도 생겼네.”
입맛을 다신다. 스멀스멀 소름이 돋는다. 그는 어째 자신의 바지춤을 치켜올리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
노예는 사람이 아니다. 동물이다. 도구이다. 그렇게 취급된다.
사는 사람에게도, 파는 사람에게도.
노예상이 나를 향해 웃는다. 그 웃음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자 소름이 돋는다.
잡아끄는 남자의 손에 나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남자는 성가시다는 얼굴을 하고 이야기한다.
“뭐, 노예들 보는 앞에서 하는 것도 맛이 있겠네.”
그리고 나에게로 몸을 낮췄다.
“히익-”
낮추자마자 나는 섰다. 다친 무릎이 욱씬거렸지만 있는 힘을 다해 선다. 남자와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이 소란 중에도 마차 안에서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밉살스러운 미친놈하고 눈을 맞추기 싫은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이 계집이, 나랑 장난 치나!”
노예상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가 내 팔을 억지로 당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마어마한 힘에 저항하며 남자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대로 밀쳐져 버린다. 쿵, 하고 철창에 몸이 부딪친다. 얼굴이 철창에 밀리고, 남자가 등뒤로 몸을 밀착시키는 건 순식간이었다.
후욱하고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다. 퀭한 눈의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듯 시선을 보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철창 사이로 시선을 준다. 밉살스럽게 참견해대던 남자는 이 소란 속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도와줘!”
“...”
“도와줘, 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철창이 잠긴 채라 도와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쩐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류라고 하는 남자는 다른 노예들과도 나와도 다르다. 그에게 이런 창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의 황금빛 실눈과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친지도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눈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소리쳤다.
“도와줘!!”
“...”
“도와줘, 류.”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면 그가 조금 웃었다.
“아, 이름 기억해주었네.”
그야, 그렇게 많이 옆에서 이야기했으니까 당연히-
“...그렇네.”
“류-”
“괜찮을 거야.”
라고- 달래듯 이야기하고 창살을 쥔 내 손을 톡톡 친 뒤 눈을 감는다.
고양이 같은 황금빛 눈이 다시 사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거짓말-
“도와줘...! 제발!!”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았지만 달리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제ㅂ...”
“조용히 해, 계집.”
그대로 입이 틀어막혔다. 노예상이 몸을 더 밀착시킨다. 후욱후욱 숨결이 귓가에서 불어넣어진다.
무섭다.
“처음도 아니면서.”
처음이거든!
“몸이나 팔던 계집이 뭘 이렇게 처녀 같이 굴어.”
아니거든, 아니라니까. 퀭한 눈의 사람들이 동정과 경멸을 담고 나를 본다. 이 자식은 앨리자베스의 주장을, 그리고 마차 안 인간들은 이 남자의 말을 믿는 것 같다.
“으읍.”
“흐흐.”
굴욕이다. 지금의 상황도, 저 실눈새끼에게 애원한 것도-
나는 남자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로 아는 주문을 웅얼웅얼 외웠지만 명확한 발음으로도 소용없던 마법이 위기상황에 갑자기 터지는 일은 없었다. 웅얼거리는게 바보 같다.
주문을 외우자 나를 외면했던 황금빛 눈이 다시 흥미롭다는 듯이 이쪽을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도와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흡-흑.”
눈물이 줄줄 난다. 주문도 더 이상 욀 수 없다. 그저 싫다고.
산-
아, 교활하기도 하지.
나는 산에게 호의는 있었지만 사랑하진 않았다.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에게 피해를 입히기 싫은 반면 치정싸움이나 사랑이 성가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산이 보고 싶다.
산-
눈을 질끈 감으면 짭짤한 내 눈물의 맛과 동시에 치마가 벗겨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구원처럼, 절망처럼 등뒤로부터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를 놔주십시오.”
청명하게 울리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자의 목소리-
============================ 작품 후기 ============================
뒤가 더 있긴 한데, 애매해서 끊어요.;ㅎㅎ
리코멘은 그 다음화에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