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13 =========================================================================
13
엘킨 다이브가 '노예상'을 쫓는다.
앨리자베스 아카인이 첫사랑인 '산'에게 찾아간다.
지온에서 나오는 노예마차를 신성한 숲으로 끌어들이는 대규모 주문이 펼쳐졌다.
‘펼쳐졌다, 하지만 실패했다. 꼬리는 잡히지 않는다.’
다시 아카인 후작은 어떻게 파멸했는가로 돌아가보면, 그것은 그가, 셀리안 크레이누가 박멸시키고 싶어했던 어떤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력은 노예 매매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무역이나 상업은 현재 아카인 후작 대에서 시작한 거다. 상업과는 관계없던 귀족이 사업에 뛰어든 만큼 단시간에 커지려면 어둠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카인 후작은 신중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후작은 조심한다. 결국 셀리안의 작전은 실패하고 셀리안이 그 세력과 아카인 후작의 관계를 잡는 건 몇 년 후다. 이 해에는, 앨리자베스가 산을 찾아가는 이 해에 아카인 후작의 마차는 잡지 못한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자신의 마법이 실패했기에 이 사건을 잊었어.’
그것은 확실히 ‘존재하는 사실’이었지만 실패했기에 별것도 아니었고 나도 몰랐다.
다른 점은 ‘내’가 아카인 영애의 인생에 끼어든 것이다.
아카인 영애는 자기 가문에서 사용하는 노예마차를 부른다. 그녀는 사랑에는 눈이 멀어있지만, 머리가 좋고 단 하나뿐인 아카인의 외동딸이었다. 모른 척하고 있지만 집안의 어둠 정도는 알고 있다. 후작이 알게 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조심했어야 했지만,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분노와 질투에 눈이 먼다. 어린 것도 있다. 똑똑한 아가씨지만 고작 10대였다.
그래서, 셀리안의, 실패했어야 할 덫에 걸려든다.
‘역사가 바뀌었어.’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골몰한 나를 물끄러미 황금색 눈이 쳐다보고 있다. 그저 빤히 바라본다. 그렇게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마나가 적거나 없거나 막혀 있거나 그런 애들은 모르겠지만 마법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어.”
“장황해.”
“응, 자세한 게 좋잖아. 아까 그 친구 있지, 걔가 나는 말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너도 화났고.”
“말이 부족해서 화난 게...”
왠지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입을 다물면 그는 혼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웬만큼 마나가 있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쪼잔스러운 감시진을 지온에 펼쳐놨던 거야.”
“...”
“딱히 아카인의 노인네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겠지. 하루드의 꼬리를 잡기 위해, 아무나 외국과 거래가 활발한 녀석들에게 주문을 건 것에 가까워. 마력은 남아도는 놈이니까.”
그것도 맞는 이야기.
슬슬 눈앞의 미친놈이 어떤 놈인지 의심스럽기 시작한다. 게다가.
“하루드...”
“응? 왜?”
“아니야.”
하루드는 아카인후작이 관계 되어있던 세력의 이름이다. 무슨 무슨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사람처럼- 워낙 어둠의 세계에서 가장 큰 세력이라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기도 하지만 알아도 입에 내지 않는다.
그걸 무슨 구멍가게 이름처럼 부르는 남자를 새삼 바라본다.
‘얘는 대체 뭐지.’
셀리안의 미세한 마법을 알아내고, 전후 사정을 거의 사실에 가깝게 추리해내며 하루드를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남자.
“그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남자가 만든 숲, 그곳으로 끌어들여지는 게 느껴지는데, 정말- 가까워질수록 너무 불쾌해서.”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한다.
“황제가 싫어?”
나도 모르게 툭 내뱉는다. 말을 걸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에 섞인 감정에 나도 모르게 이야기한다.
“응.”
단호한 대답이었다. 무심한 눈길에 미미하게 감정이 깃든다. 이제 저 감정이 뭔지 알겠다. 살기다.
“...그래.”
뭐 나랑은 관계 없지만.
어쨌든 그는 셀리안이 펼친 감시망에 이미 마차가 걸려 있는 줄 알았고, 곧 구원이 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돕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노예상에게 압박 당할 때의 끔찍함이 떠오르긴 하지만, 사실 철창도 막혀 있었고... 내가 느낀 막연한, ‘이 남자는 강할 거야’라는 근거 외에 그가 날 실제로 도울 힘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지만, 더 원망하기도 귀찮다고 내 안에서 타협을 볼 즈음 남자가 사족을 덧붙였다.
“손 하나 까딱 하기 싫더라구, 하하. 나는 기분 나쁘면 움직이기가 싫어서.”
어?
“그러니까, 도와줄 수 없었어.”
*
“그러니까, 도와줄 수 없었어.”
침착하자. 이 남자는 말을 잘 못하니까. 아니 제정신이 아니니까. 내가 정리하자.
“...어차피 황제의 군대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안 도와줬다는 거지?”
“응. 그 날 오든, 다음날 오든 올 거고. 어차피 마차는 그 숲에서 멈춰 있을 거니까.”
그래, 그렇구나. ...뭐?
“다음날?”
“그야 언제 올 건지 따위야 난 모르지. 보니까 엘킨 다이브... 그 남자도 황제의 명령으로 온 것 같긴 하지만, 계획 외로 달려온 것 같던데?”
“...”
“황제 자식, 더 꼬리를 잡으려면 지켜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 걸까. 그따위 함정에 빠진 마차에 여지를 남겨둘 정도로 소아성애자 자식은 멍청하지 않은데.”
“그럼 나는...”
“그래, 너. 네가 너무 비명을 질러대니까, 기사님이 견딜 수 없었나 보지.”
“...”
“정말, 넌 대단해. ‘너’라는 존재 덕분에 ‘나’는 불쾌한데도 그 마차를 숲까지 그냥 끌려가게 했고, 엘킨 다이브는 ‘한동안 지켜보라’고 했을 게 뻔한 마차에 한달음에 달려오...윽.”
발로 남자의 안면을 가격한다.
“...다음날 왔다면, 결국 나는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거잖아?”
“...그 마차에서 ‘살아서’ 벗어날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귓가에서 들리던 숨소리, 밀착된 불쾌감, 치마가 벗겨질 때의 절망스러움, 성노 취급 받을 때 쏟아지던 경멸과 동정의 시선.
“도움? ... 아...”
“...”
“확실히, 그런 게 붙으면 기분 나쁘긴 하겠지. 나도 내 몸에 누가 닿는 건 싫으니까.”
그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건 이해하지만 그때는 기분 나빴다니까, 움직이기 싫었어.”
“정말 기분 나빴다는 이유로...”
돕지 않았다고?
그래, 안 도울 수도 있다. 꼭 그가 날 도우란 법은 없다. 없지만.
그는 흥미롭게 날 쳐다봤다. 절망적으로 주문을 외는 나를, 핀트가 어긋나는 위로까지 했다.
“도울 수 있는데도...”
“그야 뭐... 죽는 것도 아니잖아?”
“...”
“아...역시 그것 때문에 화났네, 미안 미안. 그치만... 음...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
“친구가?”
“응? 응. 아. 그래, 싫은 것 뿐이지 닳는 것도 아니잖아?”
*
뭔가 한 것도 없는데, 배로 지친 느낌이다.
혐오감, 원망, 당혹스러움.
그 다음부터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미친놈하고는 상종하지 않는 게 약이다, 싶어 입을 다물고 외면하고 있었다. 류, 라는 남자하고는 얽히지 않는 게 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뭔가 웅얼웅얼 대다가 흥미를 잃은 듯 가버린 게 몇 분 전. 등 뒤로 툭 하는 소리가 났고, 확인하면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바람도 안 부는데 커튼이 날리는 걸 보면 아마도 창문으로 나간 것 같았다.
그 마차에서처럼, 이야기하다가 질린 듯 멀어진 것이다.
‘당분간은 안 나타나겠지.’
확신 없이 소망한다. 그 불길하고 짜증나는 남자라면 또다시 생각난 듯 다시 다가올 걸 예감하기에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도, 다가오게 하는 것도, 돕게 하는 것도 내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내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성가신 놈에게 걸린 느낌이 든다.
현대라면 경찰에 달려가 접근 금지 같은 걸 부탁하겠지만.
‘...현대라고 해도, 왠지.’
그 남자에 한해서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
“일단, 나도 움직여 볼까.”
슬슬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졌다. 모르는 방이다. 병원 같기는 한데, 독방이라서 더 이상하다. 구출된 사람들이 보호된 단체실도 아니고.
마음을 먹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뼈마디가 욱씬거린다. 비틀비틀 걸어가 류가 나간 창밖을 바라보면 5층 정도는 되어보였다.
여기로 어떻게 나간거야, 싶었지만 별로 놀랍지 않다는 게 당황스럽다.
‘신경쓰지 말자.’
한숨을 쉬며 일어난 본 목적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번화한 거리가 펼쳐져 있다. 이 건물 자체는 한적한 장소에 세워진 것 같지만, 전망이 좋다. 번화한 거리가 한눈에 보인다. 특히 멀찍이 광장으로 보이는 장소에 선 커다란 동상이 한눈에 보인다.
동상-
‘수도구나.’
키오스의 수도, ‘휴론’의 상징인 10층 높이의 동상- 광장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수대가 있고, 분수대 앞으로는 키오스의 초대 황제,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이 선 것은 500년 전인가로, 크레이누 왕조에서 처음으로 마력이 전혀 없는 왕자가 태어난 해였다. ‘불길한 일’이었다고 한다. 대대로 적자에게는 엄청난 마력이, 그 외에도 황제의 직계에게는 웬만큼 마력이 깃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마력이 하나도 없는 왕자가 태어나다니. 지금이야, 크레이누 왕조에서도 마력이 사라지는 게 어느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긴 했지만, 그때는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는 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그때 기원의 의미로 세운 것이 크레이누 왕조를 연 에피룬 황제의 동상이다. 살아 있는 신, 인간으로 강림한 신의 화신, 희대의 마법왕- 동상 자체는 전부 청금석. 현대에서는 라피스라줄리라고 불리는 보석인데, 이게 또 이 세계에서는 가장 마력을 많이 담고 있는 보석이었다. 그래서 저 동상만 해도 나라의 한해 예산 정도.
미신에 기한 돈지랄이라고 하겠다.
“정말 크네...번쩍번쩍하고.”
셀리안은 저 동상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니까 역으로 보는 맛이 대단하다. 제대로 보는 건 처음 같다. 꿈에서도 보지 않았던 동상이었다.
에피룬 크레이누- 사자의 갈기 같이 아무렇게나 뻗은 머리카락과 단단한 몸. 오똑하게 솟은 코와 사납게 치켜올라간 눈매. 굉장히 잘생긴, 조각같은-실제로 저건 조각이지만- 미남인 건 확실하지만 마법사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법사라기보다는, 그래, 그리스신인 아폴론과 아레스를 섞은, 전쟁의 신에 가까운 모습.
‘셀리안 크레이누’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역사가 에피룬에 대해 지나친 미화, 혹은 왜곡을 한다고 수군거렸다. 확실히 엄청나게 오래 전의 왕이다. 그것도 마법사왕.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마법사들은 대부분 학자 스타일의 호리호리한 체격이 많았고 현대가 그렇듯 과거 사람은 현대인보다 키가 크지 않다. 그러니까 저렇게 잘생기고 저렇게 사자처럼 맹수처럼 단단하고 큰 스타일이 고대의 마법왕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도 셀리안 크레이누가 태어나, 자랄수록-
“흐음.”
슬슬 셀리안의 영향인지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참아야지.’
관광지에 놀러온 기분으로 유심히, 고집스럽게 동상을 바라본다. 셀리안의 감정에 휩쓸리기 싫은 오기로 더욱. 엘킨에게 두근거려서 그런지 더 반발심이 난다.
후에 셀리안은 저 동상을 부수니까 볼 기회도 별로 없으리라.
그 때, 문이 열렸다.
*
방으로 들어온 건 검은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녹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몸에 딱 달라붙는 푸른색 군복을 입고 있다. 칼미온의 군복이었다. 상당히 미인이었지만, 기가 세보이는 인상이었다.
“일어났네요.”
목소리는 언뜻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기색을 띠고 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글 웃는다. 안심하라는 듯한, 배려가 묻어났다.
“걱정했어요. 갑자기 쓰러져서. 엘킨 대장은 꽤 섬세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남자라 신경쓰지 못한 게 있으면 어떡하냐고 하더라구요.”
의외로 소심해요, 라고 이야기하며 가볍게 웃는다. 웃을 때 눈가가 어색하게 떨린다. 그녀는 웃음에 약한 사람 같았다. 수줍은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히아신스.”
“에?”
들어온 여자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나도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실수다. 윤하영은 여자의 이름따위 몰라야 하는데.
절로 창문으로 시선을 준다. 동상은 아직 서 있다. 무너지는 건 훗날.
저 동상이 아직 서 있다는 건.
셀리안 크레이누가 죽도록 방치했던 약혼자, 히아신스 에이나도 살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 작품 후기 ============================
월요일입니다.;; 리코멘은 다음화에서 하겠습니다.
남주는 정해둔 애는 있는데 얘랑 어떻게 해피가 가능한지 몰라서 고민중입니다;;
행복한 한주로... 만들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