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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이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딱히, 일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교육이 시작된 것도 아닌 채 시간은 텅텅 빈 채로 흘러갔다. 방을 나가 사람들과 부딪치며 나에 대한 시선이나 현 상황을 가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냥 심심해서였던 게 가장 크긴 하지만. 방안에서 멍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빼꼼 문을 열면 조금 긴장이 되었다. ‘왕궁하녀’라는 파격적인 캠페인에 뽑히긴 했지만 그것과 사람들의 시선은 별개였기에. 왕궁에서 잘 지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새로운 내 기록, 내 신분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실감하고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밖에서는 몇몇의 하녀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머나!”
내 모습을 발견하자 누군가가 가볍게 신음하듯 속삭였고, 일제히 힐끔거림이 돌아온다. 그녀들의 시선은 생각대로 곱지만은 않았는데, 호기심이 대부분이었지만,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일단 도와볼까.’
반응도 보고 얼굴도 익힐 겸 청소 무리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시선세례를 받으며 몇 번 마주쳤던, 나이 많은 하녀에게 내 의사를 밝히면, 그녀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걸레를 건네주었다. 나와 얽히기 싫은 눈치였다.
그렇게- 반 억지로 청소를 돕기 시작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솔직히 한 10분도 안 되었을 무렵 날카롭게 생긴 하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하는 건가요?”
라고.
“네?”
“뭐 하냐고요.”
나는 손에 든 걸레와 녹이 슨 장식품을 그녀에게 보인다. 다른 하녀들도 장식품을 구석구석 닦고 있길레 따라 한 건데… 방법이 틀린 걸까.
“뭐가 잘못 되었나요?”
“잘못이라고요? 뭐 하는 건지 대답 못해요?”
“? 청소요.”
“청소라고요?”
여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
“…”
서로 마주보길 다시 수분, 이쪽을 보는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미묘하게 불편하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셀리안 크레이누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송송송 박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나 역시 그럭저럭 쇠수저 정도는 물고 태어났다.
이 이상한 세계에 와서도… 최근을 제외하고는 고생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엔 너무 몰아 해서 문제였지만.
하여튼. 지온에 도착하자마자 산에게 찾아갔고, 산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로서의 기억은 이 세계에선 내게 무기였다. 산은 그에게 엘킨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동생의 일까지도.
마을에서 인망이 있는 산의 지원과 나 자신의 요령, 결국 나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지고도 2년간 평탄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깨닫는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고아에 창녀, 도둑질- 이런 요소가 맞물렸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 지온 사람들의 태도변화나 노예마차에서 실감했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그 물건 내려놔요.”
“…”
초면의 하녀는 내가 이 장식품을 훔치기라도 할 것 처럼 눈을 빛낸다. 그리고 아무도 내 편을 들지 않는다. 심지어 걸레를 건네준 늙은 하녀조차 말이다.
‘역시 그 기록, 알 사람은 다 아는 건가…’
별로 비싸보이지도 않는 장식품을 별 표정 없이 내려놓으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이 하고 싶다면, 방에 있어요. 일을 주도록 할 테니.”
그녀는 그대로 휙 돌아 하녀들 무리 속으로 돌아간다. 여자들이 수군수군대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다음날부터- 내 방에 양파 등의 야채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방에서 조용히 야채나 까라는 거였겠지. 양을 보면 심술 같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걸 나름 성실히 하니까, 장에서 짐 운반 정도까지는 시켜주게 되었지만... 그것도 직접 장을 보는 건 아니고 미리 시켜놓은 것들을 가지러가는 것 정도였다. 품목도 대부분 식재료였고 말이다.
*
'분하지만 그게 정상이겠지.'
내가 새삼 장식품 사건과 최근까지의 나에 대한 대우를 반추한 건 다름이 아니라 히아신스 때문이다.
“이게 요즈음 유행하는 머리끈이에요. 왠지 하영 양에게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녀는 솜사탕을 함께 먹은 이후 나를 친근히 여기고 있었다. 첫날 하녀들과 있었던 일을 생각했을 때 히아신스의 호의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3일에 한 번꼴로 나를 찾아왔다. 아니 3일에 한 번은 양반이었다. 점점 빈도가 늘어나 어제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도 존대와 하대가 기묘하게 섞여 완전히 친한 친구 대하듯 하고 있었다.
‘왜일까.’
히아신스가 특이한 걸까, 아니면 셀리안이나 나나 히아신스의 취향에 부합하는 뭔가가 있는 걸까.
‘나는 셀리안과는 타입이 다른데…’
생각에 골몰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내 머리에 그 하늘하늘한 머리끈이 올라와 있었다.
방심했다.
“정말 잘 어울려!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
“마음에 들어요?”
아니요.
푸른 리본 여러 개가 일렬로 붙은 머리띠는 솔직히 그 솜사탕과 마찬가지로 1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어울릴 만했다. 20살만 되어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미인이라고 자부하곤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미인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마법 같은 동안을 이용해 컨셉을 잘 잡고 애교, 연기, 미소 등으로 남들이 매력있다고 여길 수 있게 조절한 것 뿐이다. 언뜻 보기에 미인이라고 착각하도록. 말하자면 외모보다는 요령이 좋았다.
그런데 히아신스가 제시하는 장식품들은 내 요령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이래서야 그냥 어린애로, 내 외모의 단점이 최악으로 발휘되고 만다.
“…하아.”
남모르게 한숨을 쉬며 히아신스를 본다. 여기서는 이 방법이다.
“히아신스 님께도 어울릴 것 같아요~”
얼른 이 끔찍한 리본을 떼버릴 의도로 권유해본다.
“아니, 나는 이런 건 별로...”
“지난 번 그, 푸른 원피스도 잘 어울리셨잖아요.”
권하자 당황하면서도 얼굴을 붉힌다. 내 취향과는 한 300만 광년 떨어진 리본은 분명 히아신스의 취향.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가져왔다는데 내 거지 같은 기록을 걸 수 있다.
“그럼 한 번 해볼까요?”
“그럼요.”
“...”
“...”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내가 머리를 꾸며주자 아기새마냥 얌전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녹빛 눈에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닌 윤하영이 담기고 있다. 그게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켜 서둘러 정돈을 끝낸다.
“...예쁘네요.”
“거짓말.”
군복과는 미묘하게 매치가 안 되지만 히아신스는 나와 달리 진짜 미인이라 뭐… 뭘까. 아동용 같은 리본이 내게 붙이자 정말 아동용이었는데 그녀에게 붙이자 제법 예쁘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냐.
여자로서 오랜만에 굴욕을 느끼고 있으면 그녀는 내가 건넨 거울을 보며 좋아하는 리본을 단 자신을 멍하니 보고 있다. 참고로 그 거울도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이다. 귀여운 토끼들이 미니어쳐로 주변을 꾸미고 있는 아기자기한 거울. 정말 군인 히아신스 에이나의 취향이 이따위…흠흠, 이렇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
엘킨이 단번에 팟하고 두근거려 급성 심장마비로 날 죽게 할 것 같은 사람이라면 히아신스는 만성이었다. 점점 괴롭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 와서 한 번도 엘킨과는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히아신스 이야기로는 노예마차 일로 엄청나게 바빠져서 실제로 지금은 지온에 가 있다고 했다.
왕궁 하녀가 되면 한 두번은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만날 일이 없었다.
만성과 급성이 겹치면 아마 단명 할 테니 잘 된 일이었다. 게다가 당장 멀어져야 할 히아신스를 내가 떨치질 못하니.
나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히아신스에게 약했다.
히아신스가 자기가 갖고 싶은 소녀 용품을, 내게 주고 싶다는 핑계로 산더미처럼 사온다. 같이 꾸미고 논다. 그녀가 나를 꾸며주면 나는 그녀에게도 권한다. 그녀는 수줍게 웃는다.
히아신스가 자기가 먹고 싶은 스위트를 잔뜩 사온다. 내게 권한다. 나도 권한다. 함께 해치운다. 다행히 기사인 그녀도, 일에 치이는 나도 살은 찌지 않는다.
그러다가 때때로 같이 나가서 논다.
그런 루트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 자체로도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고, 윤하영이 가장 어려워하는 스타일이었다. 필요할 때 외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는 사람. 수지와 비슷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얽매이고 인간적 호감을 느껴도 운명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좋아져도, 친근해져도, 그녀에게 약해도. 나는 정해진 기사의 죽음을 막을 의지도 없었고, 그럴 힘도 없다고.
*
히아신스가 돌아간 뒤 나는 방에서 혼자 양파를 깠다. 히아신스가 내게 친근함을 보인 다음부터, 일 시키는 게 좀 더 는 기분이 든다.
하녀들이 다같이 해야 하는 야채 꾸러미를 산더미처럼 내 방으로 보낸 것만 봐도 그렇다.
‘이것들이 나를 개호구로 아나...’
조금 화가 나긴 하지만 이왕 돕기로 한 거니 일단 해보기로 했다.
왕궁 하녀도 어이없는데 마을에서 은근히 세미영웅으로 존경받는 히아신스 영애와 매일 비싼 장식을 나누며 디저트를 먹고 교류 중이기까지 하니. 내 마음이 어쨌든 그녀들의 심술이 강해지는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호구짓이긴 해도 중립적인(있을까) 누가 봤을 때 이리 열심히 일하면 조금은 점수가 올라가겠지. 오를까.
그때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안녕, 하영.”
오랜만에 미친놈이었다.
============================ 작품 후기 ============================
퇴근하고 왔어요~ ㅎㅎ 날씨가 왜 이렇게 덥나요.ㅜㅜ
일환진우 님 // 그린라이트입니다. 이 소설은 사실 백합물이었습니다...ㅎㅎ 저는 예전부터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같은... 소녀들의 순수하고 덴져러스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상 양치기였습니다.
lokoko 님 // 히아신스 루트 맞아요. 루트 지금 정했어요.(이렇게 저는 양치기의 수렁으로...)
엘류트 님 // 사실, 로맨스 소설에서 친구랑 하하호호 하는 게, 필수 같으면서도 뭔가 뭔가 지루할 수도 있는데 좋아해주셔서 기뻐요.ㅠㅠ 막 안심이 되네요.ㅎㅎ
에이리엘 님 // 그, 그래도 1일 연재 중인데...ㅜㅜ 기대해주세요!
레그린 님 // 리코 맞아요. 저도 자공자수 좋아합니다. 사실 초기 설정은...
라올 님 // 최근 계획했던 산의 재등장 부분을 적고 있어요~ 실제 퇴고하고 정리해서 올리는 건 한참 후가 될 것 같긴 합니다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