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8화 (1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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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을 닮은 것 같아.”

함께 마카롱과 초콜릿 무스케이크, 딸기 쉐이크 등등 칼로리 증가에 공헌할 것 같은 식사를 하고 있으면 히아신스가 기쁜 듯 이야기했다.

“네?”

“후후, 물론 엘킨 대장은 아니야. 엘킨 대장도 너무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히아신스는 어느 순간부터 ‘기사’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는 나에게 해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약혼녀’로서 자신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히아신스와 셀리안의 약혼은 고위귀족만 아는 일이었다. 아직은 기사로서 살고 싶어하는 히아신스를 배려해, 성혼식이 다가올 때까지는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아니, 이 대화에서 아무도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겠지만 나는 방금 히아신스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셀리안 크레이누라고 생각했다.

‘닮았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와는 외모부터, 실제 성격도 다 다르다. 그와의 공통점은 내가 그의 기억을 내 과거의 기억마냥 간직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사실, 외모도 성격도 다른데.”

“그렇죠?”

“응?”

“아니, 그럼 뭐가 닮았다는 건가요?”

“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그게 뭐예요.”

조금 안심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에 더는 캐묻지 않기로 한다.

'...셀리안 크레이누랑 내가?'

어떻게 하면 그녀와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지만 모르겠다. 정식으로 왕실 하녀로 가면 조금 달라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지금 나를 돌본다는 명분으로 이곳에 들르고 있고, 병원도 공공시설이니까 자주 만나고 있지만 정말 왕궁에 들어간다면.

“하영이 칼미온 기사단 소속 하녀가 되면 좋겠어.”

"또 그런 이야기를..."

최근 그녀는 자주 이런 소리도 하게 되었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곳에는 히아신스는 물론 엘킨 다이브도 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어쩌다가 한 두 번 만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다.

“내가 지켜줄 수도 있고, 자주 볼 수도 있고.”

“무리예요.”

“...그럴까?”

절대 무리지, 확인하듯 되뇌이며 잘라 말하자, 시무룩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싫은 걸 떠나 상식적으로 무리다.

아마 히아신스도 무리란 걸 알 것이다.

다만, 연유야 어쨌든 처음으로 동성 여자 친구가 생겨 그녀는 기쁜 것 같았다. 왜 내가 그녀의 첫 동성 친구가 되었는지, 왜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말로 내가 ‘셀리안’을 닮아서, 어쩐지 닮아서 이렇게 호의를 가져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또다.’

히아신스랑 있으면 불쾌할정도로 셀리안 크레이누의 감정을 내 감정이라고 착각하게 되곤 했다. 엘킨을 떠올릴 때의 감정은 의도적으로 배제하곤 했지만 히아신스에 대해서는 그게 조금 어려웠다. 사실 엘킨도 실제로 마주하면 나를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셀리안이 그녀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내게 그녀에 대한 전생의 기억이 별로 빈번하지 않은 것도 경계를 늦추게 되는 원인이겠지만.

“역시 무리일까.”

오늘은 좀 끈질기다, 히아신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이야기한다. 내게 이야기 해봤자 무리라니까.

칼미온의 하녀는 같은 왕실 하녀여도 급이 다르다. 중인 소녀들 중 무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뽑혀나간다.

“무리예요.”

“...”

오늘은 좀 끈질기긴 했지만 그녀도 아는지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아쉬운 듯 나를 보았다.

17

“니 새끼는 일 없냐.”

나는 내 옆에서 양파를 깎고 있는 남자를 째려보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놈은, 처음에는 상종도 안 하고 양파를 깎는 나를 재미없다는 듯이 보았다. 그것은 내심 흐뭇한 일이었다. 경험상 무시하는 것만이 미친놈을 쫓고 내 몸과 정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걸로 흥미를 잃을 줄 알았던 미친놈이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양파를 깎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결국... 매일 같이 내 방에 와 함께 야채를 깎았다.

방문 빈도와 같이 있는 시간이 히아신스를 넘어가고 있었다.

‘도움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양파 등 야채를 무진장 잘 깎았다. 산의 식당에서 일했던 나보다 더... 뭔가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칼 쓰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 건 인정해야 했다.

베이지색 머리카락과 실눈의 미친놈은 오늘도, 품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양파를 깎는다. 검은색 용이 새겨진 붉은색 손잡이의 멋드러진 단검이었다. 나조차도 칼에게 미안해지는 그런 검으로 야채를...

“일?”

“알선 받았잖아?”

검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나 역시 다시 손을 놀리며 되묻는다. 상종을 안 하려고 해도 같이 계속 야채를 깎다 보니 어느새 말을 섞고 있었다. 이걸 노린 건지도 모르겠다.

"알선?"

"...그 마차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고향에 가지 않았다면 일 받은 거 아냐?"

“어? 아~ 난 고향에 돌아갔거든.”

여기가 니 고향이냐.

나는 남자를 경멸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동문서답을 듣자 그가 그날, 그 끔찍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은 게 다시 생각 난다.

“아 씨...”

나는 깐 양파를 통에 던져 넣었다. 주문을 외며 절박해 하는 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남자. 싸이코, 그 싸이코를 피하지도 못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 나. 같이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인정해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

왠지 너무 불쌍하다.

“왜그래? 무슨 일 있어?

“...”

얼굴을 구기고 짜증을 내면 걱정스러운 듯 물어온다. 이런 점도 싫다.

이 새끼도, 몸을 팔았다는 노예상의 말에 나를 다시 본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지금도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 엘킨이나 히아신스랑 같다면 같다. 다만, 색이 다르다. 그 둘이 새하얗다면 이 남자는 새까맣다.

그냥 아무래도 좋은 거다.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성폭행을 당해도, 기분은 나쁘지만 닳는 것도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진심으로 아무 생각이 없다.

더 열받는 건, 아무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가 나에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호의’를 가졌다는 걸, 내가 깨닫고 있다는 거다.

“혹시 아직도 삐쳤어? 내키면 도와줬을지도 몰라.”

"뻥치지마. 도와줘야 한다는 걸 인식이나 할 수 있겠어?”

자주 나를 방문하긴 했지만 류는 내 옆에서 가만히 날 보거나 지금처럼 돕거나 했지, 말이 많지는 않았다. 평범한 외모와 보이지 않는 눈동자 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는 남자. 기본적으로 남에 대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 사물에게 건네는 것 같은 말들. 악의적이었지만 마치 속 빈 강정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이야기들, 시선들.

그런 네가 설사 '도와줄 마음'이 있어도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겠어, 라고.

“울었잖아. 눈물을 흘린 걸 보면 울었다는 거지? 우는 건 기쁘거나 슬플 때 흘리는 거니까, 뭐... 슬펐던 거지? 기분이 나아지면 도와줬을 거야.”

“...”

“네 말대로, 사실 인간의 표정은 잘 모르겠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

싸이코패스의 정의가 뭐더라.

인터넷에서 봤는데.

찌푸린 얼굴과 웃는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 외,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공감능력과 죄책감 결여 되어 낮은 행동 통제력과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거던가.

“하하, 바로 옆에 싸이코패스가 있어요...”

“싸이코패스?”

“너 같은 놈이야.”

“나 같은?”

선천적으로는 전두엽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많다고도 했던가. 응, 문제가 있는 애구나. 이해하자.

나는 어느샌가, 이 이상한 남자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

예절 선생은 멋드러진 콧수염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히아신스 말대로 베테랑다워서, 가르치는 것도 제법 재미있고 쉬웠다. 간간히 나를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캠페인걸, 막으려해도 내 신상은 알 사람은 다 알 것이었다. 이제 슬슬 저런 시선은 일상이 되고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수업 내내 깔보는 얼굴로 이리저리 구두 설명을 한 후, 바로 머리에 책을 이고 문앞까지 가라고 지시했다. 여느 때와 같다. 쉽지만 깔보는 듯한 설명, 그가 프로페셔널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시작하도록.”

고압적인 명령에 나는 시키는 대로 책을 머리에 이고 걷기 시작했다.

‘서커스 같아.’

개인적인 수업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난 이 머리에 책을 인다든지, 항아리를 인다든지 그러고 걷는 게 좀 부끄러웠다. 뭔지는 알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예절선생의 손에 들린 나무막대가 실수 하는 순간 나를 때릴 거라는 건 더 잘 알아서. 부끄럽다고 대충할 수도 없었다.

이건 감인데, 분명 엄청 세게 때릴 것이다.

“음?”

“...”

“음...”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으려 한다. 부끄러움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치트키...가 있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전생으로서 어느정도는, 아니 예의에 한해서는 고급을 훨씬 넘은 수준까지 안다는 거다. 문제는 몸에 익지 않았다는 거지만, 지식은 있다. 지식은.

아는 것은 힘이라고 지식은 의외로 통했다. 끝까지 걸어보이자 그가 여느 때처럼 미간을 찌푸린다. 미심쩍은 듯 나를 본다. 나는 해맑게 웃기로 한다.

“별로였나요?”

별로일리 없지. 수줍게, 부끄러운 듯, 미천한 제가 혹시 실수를 하면 어떡하냐는 얼굴로.

“크.크흠... 괜찮았다.”

그의 얼굴에 조금 홍조가 생긴다. 나는 기쁜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둔다. 그냥 소녀라면 귀여움 받는 걸로 끝이겠지만 창녀 기록이 있는 소녀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건 사양이었다.

“좀 어색하긴 하지만, 솔직히 천민 계집치고는 완벽, 이라고 해도 좋겠지. 다만, 그렇게 걷는 건 남성의 예법이다.”

“...”

‘남성의 예법’이라고 이야기할 때 어쩐지 그의 시선에 경멸 이외에 기묘한 감정이 실렸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 한다.

그래도 왕실에서 붙여준 예절 선생인데.

하고.

*

생각이 씨가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 새끼가 나쁜 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봐서...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 상대가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몰랐던 걸까. 알고 있어봤자 이론이었고 예측해봤자 나는 사실 몰랐던 걸까. 도둑질을 한 창녀 기록이 있는 천민 여자에게 상대가 얼마나 무례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뭘 하시는 건지..."

그것은 어느날의 일이었다.

예절 교육 도중 예절교육 선생이 내 다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눈치도 안 보고 더듬는다. 눈치도 안 보고 손이 치마 안으로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너무 황당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면 그는 흐흐흐 하고 웃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흐흐흐'하고 웃는 걸까.

어제까지 무서운 스파르타 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예비 성폭행범으로만 보인다.

"창녀 짓을 하던 천민계집이라고 해서, 어떤 걸레 같은 여자인가 했는데 꽤 괜찮다 싶어서 말이야."

"..."

"폼에 뵌 예절을 보아하니, 귀족 남자 좀 상대해본 것 같은데-"

"..."

"귀족남자집에서 매춘을 하고 장식품을 훔쳤을 거라는 게 사실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면 남자는 내 손을 잡으려 한다. 아무리 내가 고래심줄보다 더 무심한 면이 있다고 해도 이건 기분이 나쁘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노예상 새끼에게 당할 뻔한 건 매우 최근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뒤로 물러났다.

“도둑질이라니. 천박한 것은 머릿속도 천박한 건가.”

그는 내가 재차 피한 것이 기분 나쁜 건지, 아니면 도둑질하는 행위가 불쾌한 건지 쯧쯧 하고, 다시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누구보다 달콤하고 무례하게 나를 보며 다른 한손으로 제 콧수염을 만지작 거린다.

"하지만, 그 귀족도 너무하군. 창녀가 훔쳐봤자 뭘 그렇게 훔쳤겠다고 신고까지 했을까."

동시에 자신은 다르다고 단언하며 일어선다. 나는 주춤 주춤 물러섰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왕궁하녀라고 해봤자, 귀족 출신 하녀가 아닌 이상 하는 일은 허드렛일이야. 왕궁이라고 해도 설거지나 할까. 예절도 눈 가리고 아웅이지."

"..."

"좋은 남자를 잡으려고 해도 기회도 없을 걸."

차라리 자신이 낫다고, 어마어마한 근자감을 발휘하는 콧수염. 멋드러진다고 생각했던 콧수염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섭다'

이 남자는 그 노예상보다는 가늘다. 그렇지만 웃는 폼이나 흥분하는 기색이 닮아서, 무섭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손을 뻗고 내가 피한다. 그는 불쾌한 듯 내뱉는다.

“처음도 아니면서, 처녀인 척 하기는. 그러면 값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처음이거든, 그리고 처음이 아니어도 너랑은 안 한다. 이런 놈들은 어째 대사가 다 같아?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리면서도 그저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더이상이 무례한 짓을 하면 잘라버리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검은 머리의 기사님이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리코멘은 내일 하겠습니다.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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