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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영은, 제법 썸을 잘 타는 여자였다.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애교스럽고(척 하는 거지만). 한창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치고 싶어 했기에 기본 썸 타는 남자는 항상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메스꺼움과 두통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 없이 메스꺼움과 두통이 안 생기는 사람이라면 더 좋았다.(이 경우 그냥 상대도 연애감정이 없는 경우가 많아 망했지만)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아닌,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녀의 취향이고 왕자님이라고.
물론,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트라우마가 고쳐진 뒤에는 다시 검토해야겠지만 최우선 조건이 만족된 적이 없어 논외였다.
그래서인지 자랑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기 스스로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럴 틈이 없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운명의 장난이든. 엘킨 다이브는 윤하영의, 올해로 29살인, 나의 첫사랑이었다.
‘내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태도가 촌스러울 줄은 몰랐지만...’
이건 무슨 중고딩도 아니고.
*
반면. 엘킨 다이브- 하면, 그 이미지상 그가 연애 면에서는 꽤 둔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만.
아니었다.
그는 연애 쪽으로 의외로, 아니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당연히 민감했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남자이고, 황제였기에 차마 그 쪽으로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거지 엘킨 다이브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연정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고백하기 전에도 제법 긴가민가했으리라.
요정의 혼혈로, 푸른 눈동자와 사파이어 같이 빛나는 청발을 가진 아름다운 엘킨 다이브 -거기다가 유능한 기사였고 성품도 다정했다. 완벽한 남자라고 해도 좋았다. 여성의 이상적인 왕자님- 그에게 마음을 품지 않는 여자가 드물었다. 그의 침대에 숨어드는 여자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가 자라서 ‘남자’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많은 프로포즈와 연정의 시선을 받아왔다. 그만큼 사랑을 요구 받으면 아무리 천성이 둔해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가 레시온 공작에게 쫓겨나는 사건이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가 엘킨 다이브에 대한 상사병으로 탑에서 몸을 던진 것’과(죽지 않았다. 가까스로 살아나 파혼하고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또 걸작인 게, 신전으로 떠날 때 한 마지막 인사다. 폐를 끼쳐서, 레시온 공작도 아니고 엘킨 다이브님께 죄송하다고.) 관계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엘킨 다이브 인생의 유일한 여성 관련 추문이었다.
결국 그 이후 엘킨 다이브는 흔히 말해 ‘철벽남’이 되었고 그의 인생에 여성과의 추문이나 더러운 소문은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셀리안 같이 능력과 권력, 집착이 짱센 스토커는 어떻게 못했지만.)
한동안 엘킨 다이브가 고자가 아닐까, 게이가 아닐까 하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실제 남자도 몇 명 그의 침대에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전부 거절당했다 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게이도 아니었지만.
아주 후에는 부인도 맞이했으니까... 고자도 아닐 것이었다.
“...”
하여튼-
나에게... ‘윤하영’에게 이제 엘킨 다이브를 대처하는 64가지니 이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편하게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죽자.’
류한테 나가라고 했던 창문이 매우 유혹적이다.
어리둥절해하는 히아신스나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류와 달리 엘킨 다이브는 새빨갛게 변해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매우 매우 안타깝고 곤란하게, 곤혹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고백했던 많은 여자들에게 보냈던 그런 시선.
나의 첫사랑님은 내 감정을 두 번째 만남에서 눈치챘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손을 내민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예의를 다해. 마치 내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 처럼.
마음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모욕을 주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그렇게는 못하는 그가, 아마도 지금부터 내게 취할 건 나와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
셀리안 크레이누로서, 그가 구애하는 여자들을 어떻게 쳐냈는지 보았기에 안다.
“...”
이제 내가 뭘 안 해도, 칼미온에 들어가도 알아서 엘킨 다이브가 날 피해줄 것이다.
다행인데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
“만나면 만날수록 엘킨 다이브는 소문보다 더 유능한 남자라는 걸 알 수 있더군.”
류는 흥얼거리며 양파를 깎아나간다.
자신을 세류 키스톤이라고 밝힌 그 날부터, 류는 더 자주, 대놓고 내 방에 드나들게 되었다. 이제는 병원 정문으로 당당히 놀러오는데. 왠지 그는 이곳에서 ‘미친놈’취급 받기보다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여자들은 심지어 이 키 작고 평범한 실눈의 귀족 남자를 귀엽다고 수군댔다.
덕분에 나는, 눈총을 받았다. 일하는 척, 가련한 척 해서 결국 왕궁 입성 전에 귀족 남자를 낚았다고 말이다.
왕궁 입성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왜 그 남자 주변에는 꺄악대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과연, 마성의 기사-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를 죽게 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죽지 않았거든요.”
“그래? 친구가 그러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뭔가요.”
“친구의 감상이야. 이게 일반적인 감상이라고 하던데. 그런 걸 마성의 남자라고 하나보지?”
“...키스톤 님은 친구한테 다 보고 하나 보죠?”
빈정거려본다. 친구한테 가서 ‘나 엘킨 다이브 만났다 걔 인기 많더라 뿌우-’하는 류를 상상했다. 마마보이도 아니고, 이건 프렌드 보이? 싸이코패스에 친구성애자다.
“보고 안 해. 좀 상관 안 했음 하는데 말이야. 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봤으면 모른 척이나 하지.”
“친구도 너님 같은 스토커인가 보군요.”
“스토커? ... 그보다 왜 존대야?”
“어찌, 저 같은 천한 자가 귀족인 류님에게 하대를 하나요?”
“...귀족이라. 그럼 오빠라고 부를래?”
“...죽을래?”
최근은 이 새끼랑 농담 따먹기가 많아진데다가 익숙해지는 게 무서워져서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이 새끼 히아신스에게 나쁜 것만 배워서.
"너 10대잖아. 기록으로도 나보다 나이 어린데 무슨 오빠야."
"기록?"
"...어쨌든,헛소리 하지 마라."
“입 한 번 험하구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앞으로도 힘내."
"..."
"오빠라고 부르고 싶으면 상관없지만.”
그는 뭔가 좋은지 빙글 웃으며 빙글빙글 단검을 돌린다. 붉은 손잡이의 단검이 그의 손가락에서 양파 냄새를 풍기며 빙글빙글 돈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섭네. ‘사랑’하니까 쫓고 사랑하니까 죽는 건가. 그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건가.”
다시 엘킨의 이야기다. 그는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친구인가 뭔가한테 레시온 공작과의 이야기를 꽤나 자세히 들었나 보다.
“...죽지 않았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레시온의 약혼녀는 죽지 않았다.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와의 추문. 더러운 소문이 없는 엘킨의 단 하나뿐인 스캔들이자 그가 칼미온에서 쫓겨나 용병으로 떠돈 이유.
15살에 최연소 기사가 되었던 엘킨은 19의 나이에 파문되었다.
그가 파문된 이유는, 레시온 공작의 어린 약혼녀가 그를 사랑하고 거절당한 뒤 자결했기 때문이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탑에서 떨어졌다.
그에게 연정을 품은 여성 중 자결을 선택한 건 공작의 어린 약혼녀가 처음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엘킨 다이브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레시온은 참지 못했다. 그게 어린 약혼녀를 사랑했기 때문인지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엘킨도 상처를 받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게 했다. 이번엔 다행히 죽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연심을 느끼면 피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이 붙어 거의 완벽하게 피하며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이 후 엘킨과 만나지 못했다. 아직 칼미온 입성 전이라 더 완벽에 가깝게 피해졌다. 그냥 안 만나면 되니까!
병원에 그가 왔다고 소문이 도는 날에도 나는 엘킨 머리카락도 못 봤다. 안 만나길 바라고 바랐지만 이건 너무...
“허허허.”
“하하하.”
헛웃음을 흘리며 양파를 마저 깎아 던져 넣으면, 류가 함께 소리내 웃는다.
“뭐야.”
“기쁨은 나누라고 하잖아.”
“...”
입 다물고 다음 양파나 깎기로 한다.
*
“난 잘 모르겠지만, 넌 날 보며 전혀 안 웃는다고 하던데.”
한참을 양파를 깎다 보면 류가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양파를 깎다 또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입을 연다.
“누가? 친구가?"
"응. 방금 같이 웃긴 했지만, 보통은 안 웃는다고 그러더라고?"
" ... 혹시 그 친구가 내가 저번에 물어본 그 미인이야?”
이 세계에도 도촬이 가능한가. 표정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류를 위해 친히 내가 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걸 알려주다니.
“마법...인가. 그럼... 당근냄새가 나는 것까지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럭저럭 얘를 당근 깎게 하는 걸 아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도촬하는 친구- 갑자기 인상이 확 바뀐다. 그 미인이 닳는다느니 마성의 남자니 하는 경박한 소리를 한단 말이지. 뭔가 환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미인?”
“미인- 너 야채 그만 깎게 하라는 미인.”
“아아. 그 녀석-... 아니야. 친구는 따로 있어.”
“그렇구나.”
얘가 친한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건 꽤 놀랍지만, 미인에 대한 내 환상은 지켜졌다. 그래, 확실히 그 미인은 그런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어. 생식활동이나 낡았다니 이상한 이야기를 했지만 경박하고 세속적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였달까.
“응. 친구랑 그녀석은 별개지. 그녀석은 엄마야, 완전.”
그가 투덜대면서도 유쾌한 듯 빙글빙글 웃는다. 동시에 양파를 깎던 붉은 손잡이의 단검을 다시 빙글 돌린다. 빙글빙글, 폼나게 빙글빙글 돌리는데 검도 멋지고 흔남 류도 멋지게 보이긴 하는데...
“우와, 역시 양파냄새. 돌리지 좀 마라.”
“그치, 난 양파가 이렇게 끔찍한 냄새를 자랑할 줄 몰랐어.”
아까와 마찬가지로, 돌리니까 양파냄새가 퍼져나간다. 류가 놀리듯이 큭큭큭 웃는다. 못된 웃음이다.
“...친구가 아니라면, 혹시 그 미인이 그 단검 만든 사람이니?”
“!”
별 생각없이 이야기한 건데 류가 깜짝 놀라 나를 본다. 눈만 깜빡깜빡이다가 다시 생글 웃는다.
“감이 좋구나.”
“아, 맞아?”
“응. 반은. 어쨌든- 친구는 네가 나에게 웃을 수 있게, 호감 살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라고 했는데.”
“왜?”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난 너 싫어."
연애 감정은 아니다. 메슥거리지 않으니까. 그치만 이 미친놈이 날 좋아하는 건 어떤 의미라도 싫다.
"칼미온의 하녀로 들어간다며?”
"...말 좀 들어라."
그는 내 대답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난 번 히아신스가 했던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검술 수련-중이었구나.”
“...”
“그래서, 호감 살 수 있게 조언. 이건 내 생각이고, 친구도 동의했는데... 넌 검에는 재능이 없다고 봐. 일단 연습한 흔적을 보면 총체적 난국이랄까.”
“알아.”
“그러니까, 검 같은 것보다는 말이야. ‘칼미온에 가면 꼭 엘킨님을 덮쳐 첩 자리를 노리도록 해. 재능 있는 쪽으로 해야지. 갈고 닦은 기술 있지?’”
그는 어감없이, 외운 듯한 대사를 읊어댔다. 그쪽이 출세하기 쉽다고 하던데, 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어버린다...”
나는 그의 검과 달리 그냥 식칼인 내 칼을 그에게 들이대었다. 식칼이지만 이 자식 정도는 글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에 그는 이상하게 즐거운 듯 키들키들 웃는다.
“왜? 너 엘킨 다이브를 ‘사랑’하는 거 아냐?”
“뭐?”
“확실하다고 하던데. 이건 그녀석도 동의했어.”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이루어지지 못해 ‘죽음’하고까지 연결 된다면... 이왕 하는 거 성공하는 편이 좋다고 봐.”
“너 나한테 미움 받고 싶냐?”
“아니. 흐음... 왜 화내는 거지? 역시 갈고 닦은 기술 자체가 없어서? 아, 이건 친구가 아니라 그녀석이...”
계속 나불대는 병신같은 멍청이에게 나는 양파를 던졌다.
============================ 작품 후기 ============================
내일이 월요일이라고 합니다. 누가 그짓말이라고 해줘요.
남주는 미정입니다. 근데 연애가 어떻게 하는 거였죠;ㅁ;
에이리얼 님 // 에이리얼 님이 제 취향에 직격!>ㅁ< 코멘트 감사 드립니다. 엘킨 분량을 늘려야 하는데 어떻게 늘릴 지를 모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