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23 =========================================================================
"곤란하지?"
“...”
물론 곤란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곤란하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멈춘 채로 류를 보았다.
그 황금색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거린다. 내가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대만으로 감정을 채우고 나를 보고 있다. 역시 그는 ‘공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다고 해도, 정말 곤란하다고 해도 공감하지 못하겠지. 그런 남자다. 이제 알 수 있다.
"도와줄게."
"..."
"대신 지난 번 일은 없던 걸로 해줘."
니 도움따윈 필요없다고, 말해도 될 텐데.
아슬아슬하게 해결되거나 흐지부지 되긴 했어도, 당하기만 하던 최근이다. 어떤 의미로는 내 힘으로 이 빌어먹을 액운들에 한 방 먹이는 걸 기대하기도 했다. 계속 치이기만 해서, 뭔가 속 시원하게 스스로 하고 싶다고.
‘이래봬도 전생에 황제였는 걸...’
농담처럼 생각하며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한다.
"좋아. 도와줘."
"그래."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류의 금빛 눈동자가 만족스러운 빛을 띠고, 나는 그것을 미묘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
나는, 류라는 남자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걸 알고 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 얽혀 오겠지. 거리에서 만난 이상한 미인이 말한 대로 그는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도 점점 익숙해진다.
내 옆에서 뭔가 만회라도 하려는 듯 야채를 깎고 자신에 대해 변명하고 이야기하고 호의를 보이고, 내가 준 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내 감정을 이해도 못하는 주제에 얽혀온다. 처음에는 분명 그냥 흥미였던 것 같은데...
‘너도 네가 이럴 줄 몰랐지.’
나도, 몰랐으니까. 내가 이 남자를 용납하고 싶을 줄은.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 미친놈과 어울리는 나를 용납할 명분이 필요했다.
“나를 도와줘.”
“좋아-아! 그 전에 하나 물어도 돼?“
“?”
“이게 도둑질한 게 들켜서 당혹스러운 상황이야, 아니면 오해받아서 당혹스러운 상황이야?"
“...푸핫.”
황당하기 그지없는 물음이 너무 그다워서 웃음이 나온다. 이 정도로 익숙해졌는데 정말 명분이 절실하다.
과연 그가 나를 어떻게 돕는 걸까, 조금 흥미진진하다.
“그건 왜?”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도움의 방법이 달라지니까.”
공감하지도 않고, 딱히 나를 믿는 것도 아니면서도 돕겠단다.
"오해받아서 곤란한 상황이야."
"뻔뻔하긴!!"
웃음기를 참으며 대답하면 리나 테일이 날카롭게 외쳤다.
류는 그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방향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더니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
"그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는 키오스를 도우러온 자가 아니오? 여자에게 홀렸다가 키스톤 가의 이름에, 아니 게트룬 남작의 이름에 오점을 만들 생각인가.”
“여자에게 홀린다고?”
“그렇소. 젊은 나이에 범하기 쉬운 실수지.”
류는 기본적으로 체구도 작고 언뜻 보기에는 별로 강해보이지 않는다. ‘귀족’이기 때문에 리나 테일도 다른 사람들도 긴장했지만 멜튼의 삼남은 얼른 자세를 고치고 고압적으로 이야기했다. 류는 한순간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홀린 건가? 확실히... 누군가를 돕겠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할까요. 일단은...”
“?”
“진- 가서 해결하고 와."
류는 다시 창을 향해 빙글 몸을 돌린 뒤 당근을 깎던 칼을 창밖으로 던졌다.
23
너무 파격적이랄까, 좀 이해가 되지 않아 나도 사람들도 눈을 깜빡였다.
‘역시 이런 미친놈을 믿는 게 아니었나?’
누가 맞았으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에 창으로 달려가면 류는 반대로 창에서 멀어져 사람들한테로 척척 걸어 나갔다. 그리고 멜튼가의 삼남을 보며 웃은 뒤, 그가 가져온 향신료를 하나 들어보인다.
"시쿤의 향신료를 들여오는 상점은 수도에도 하나뿐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창 밑을 쳐다봤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이상한 건 던진 단검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아니, 가게 주인에게 일단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이미 확인했습니다. 사실, 향신료가 없어진 걸 안 것도 꽤 되었습니다. ‘에이나 님’이 신뢰하는 여자를 의심하는데 저희가 신중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무 확인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확인은 이미 과거잖아. 혹시 알아? 지금 갑자기 제대로 안 준 게 생각이 났을지."
그는 가볍게 웃으며 농을 건네듯 이야기했다. 그런 웃음이나 속없는 말이 짜증나는 건 보편적인 감성이었는지 책임자의 얼굴이 구겨진다. 리나 테일이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귀족 나리. 저 도둑계집이랑 무슨 사이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상관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리나 테일은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완벽하게 나를 몰아세웠다는 감정에 취해, 방해꾼인 류가 귀족인 걸 망각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멜튼 삼남은 그런 그녀에게 별 말을 하지 않고 있었고, 류는 류대로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뭐 어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한 번 더 확인하면 다를지도 모...어라라~ 너..."
류는 가벼운 표정으로 그녀를 흘낏 보다가 자세히 살펴보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귀족에 리나 테일이 움찔 몸을 굳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평민이어서, 류가 그녀를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짓밟겠다고 하면 한순간이다. 조금 불안해진 건 나도, 리나테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녀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설마 설마 내가 준 식칼의 첫희생자라든가, 하면 굉장히 기분이 더러울 거라고.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류가 그 다음에 한 말이 좀 황당했다.
"너... 제법 예쁘네."
"뭐, 뭐라고요?"
"그치, 이 정도면 예쁜 축에 속하는 거 맞지?"
동의를 구하듯 청중을 향해 생글 웃는다. 묘하게 야한 느낌이 드는 그 웃음이다. 그걸 느낀 것도 나만은 아닌지 몇몇 여자들의 얼굴이 붉어진다. 리나조차도 말이다.
리나는 솔직히 예쁘다기보다는 수수하고 평범한 편에 속했다. 가장 흔한 밤색머리카락에 밤색눈.
"내 친구 취향이야. 특히 눈이."
"무슨 농을."
"그렇지?"
류는 누군가에게 동의를 구하며 허리춤에 있던 또다른 단검을 하나 꺼냈다. 사람들이 움찔 경계했지만, 잘 보면 장난감 같은 칼이다. 온통 검은 무딘 날의 검. 다만, 장난감과는 다르게 세련된 느낌이 들어서, 예술작품 같기도 하다. 역시 검날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어쩐지. 그 검은 검이 살짝 떨린 느낌이 든 건 착각일까.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듯이.
굳어 있던 사람들 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남자인 멜튼 삼남이었다. 그는 류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와는 별개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내 쪽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장난은 그만 두도록 하죠. 경비병, 얼른 저 도둑을-"
"...저... 정말 죄송합니다만"
“!”
*
머뭇머뭇 사과를 하며 다가온 새로운 등장인물은 낯이 익은 남자였다. 향신료를 샀던 가게의 책임자. 나에게 향신료를 전하고, 나를 피했던 남자다. 그는 어쩐지 새파랗게 질려 있다. 향신료 가게와 병원은 가깝지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오느라 지쳤다기보다는 그저 새파랗게 질려 입술을 새하얗게 깨물고 있을 뿐이다.
"스티브?"
멜튼 삼남이 입을 열어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그저 두려운 듯이 내 방 창문을 보고 있다. 나도 얼른 다시 창을 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그... 향신료는... 제 잘못입니다."
"스티브씨?!"
입을 연 건 리나다. 그녀는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류 때문에 굳어 있던 얼굴이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당혹스럽게 일그러진다.
"제가, 용량을 잘못 알아서..."
그가 슬쩍 리나를 보고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
그 후 그는 부족한 향신료를 다시 병원에 넘겼고 내 혐의를 적극적으로 벗겨주기까지 했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이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 된 것이다.
어이 없는 일이었다.
"뭘 한 거야?"
조금 심각한 내 물음에 류는 빙글 웃는다. 키스톤가와 하루드가 다시 한 번 떠오른다. 그 검을 던진 것도 무슨 신호였을까. 대체 가게 주인에게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짓을 한 걸까.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이런 찜찜한 도움을 원한 건 아니었다.
"물어보는 게 제일 편하잖아. 준 사람한테. 그래서 물어봤지."
"어떻게 물어봤는데?"
“...”
“...”
“쑥스러우니까 비밀.”
이 새끼가.
입을 열려고 하면, 그가 갑작스럽게 내게 얼굴을 들이대왔다. 황금색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거린다.
"하여튼 도운 거지?"
"...그렇긴 하지."
더없이 깔끔하게. 생각도 못한, 뭔지 모를 방법으로 말이다. 미심쩍은 남자다. 용납하기 위해 도움을 받았지만 남자는 그저 더욱 수상해졌다.
"이제 지난 번 건 없던 일로 하기야."
그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그레 웃으며 강요하듯 이야기해온다. 순진하게 기대에 찬 눈동자,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감정, 감정이.
‘나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그럼에도 그 기세에 눌려, 어쩐지 나답지 않게 대답도 하지 못하고 뻐금거리고 있으면-
“너 진짜 나한테 죽고 싶냐?”
창문으로 훌쩍 방으로 넘어온 붉은 머리의 미인이 감자냄새를 풍기며 류의 머리를 발로 찼다.
*
머리를 맞은 류가 엎어진다. 뭔가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 훈훈한 광경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은빛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뭘 그런 눈으로 봐?”
여전히 '초'가 붙어야 하는 미인이 인상을 쓰고 나를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은빛 눈동자에는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가벼운 적의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가죽 구두로 엎어진 류의 머리를 밟고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한 채 으쓱한다. 으쓱하고 내 고민을 풀어주었다.
“걱정 마라. 그 향신료 가게는 이 녀석이 샀으니까.”
“응? 왜?”
류가 고개를 들어 되물으면 미인은 다시 류의 머리를 밟았다. 류는 금시초문이란 얼굴이다.
“새로운 상점주가 진실을 말하라고 하면 할 수밖에 없고, 별 문제 없이 좋은 거잖아?”
“그런 귀찮은... 난 향신료 상점 같은 거 필요 없어. 내가 시킨 건 다른...”
“내가 왜 니 투정까지 니 입맛에 맞춰 해결해야 하는데. 나는 시키는 대로는 하지만, 방법은 내 마음이야.”
“진-”
“세류 키스톤-”
“응?”
“그래... ‘세류 키스톤’으로서 이곳에 체류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어, 더 이상 눈에 띄는 건 네 일에도...아...”
그는 귓가를 파고드는 낮고 깊은 미성으로 가볍게 한숨을 쉰다. 들으면, 일단은 귀를 기울이고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묻고 싶어지는 안타까운 소리였지만 류는 눈만 동글동글 뜨고 있다. 동글동글 뜰 정도로 크지도 않았지만.
“내가 왜 너한테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지? 어차피 듣지도 않을 텐데.”
“그러게. 오늘따라 더 엄마 같네. 진.”
“...”
미인, 아니 진?이 류의 머리를 퍽 쳤다. 퍽 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통쾌함에 흐뭇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명분은 류가 날 도울 때 생기는 게 아니라 지금 생기고 있었다. 난 이제 류를 용납할 수 있을 것 같다.
정기적으로 그가 류를 패준다면.
“다 아가씨 때문이니까.”
“엥?”
“네가 이 녀석 마음에 든 탓에 고생은 내 몫이잖아.”
“...어...음...”
말도 안 되는, 솔직히 여전히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미인, 특히 밉살스러운 싸이코를 패주는 미인에게는 관대해지게 된다.
“고마워요. 진?”
“왜 진에게... 널 도운 건...나.”
“넌 좀 닥치고.”
류가 버둥거렸지만 진은 그의 머리를 퍽퍽 쳤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감자 냄새가 난다. 감자 냄새가 나는 미인은 통성명없이 내 멋대로 진이라고 불러봤는데도 별 상관없는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는 잘 하네. 그 점은 변하지 않았군.”
“...저 아세요? 아니면 셀...아니...음...”
짐작인데 막 이야기해도 되나.
그런데 어쩐지... 지난 번 대화도 그렇고 그는 ‘나’를, ‘내 전생’을 아는 것 같았다. 같았지만, 추측만으로 황제인 셀리안에 대해 막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다.
“몰라.”
“에?”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하고는 모르는 사이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새 일어난 류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진을 보고 있다. 진은 그런 류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우웩.
“이 녀석이 싫어하기도 하고.”
“싫어.”
“알아. 그리고, 너도 너지만... 물론 네가 1순위지만. 아마 셀리안 크레이누도 내가 보자고 하면-”
진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표정이었다.
“아마 아주 끔찍해 할 테니까.”
*
그날 밤은 꿈을 꿨다.
그립고 사랑스럽고 매우매우 오래된 꿈.
아마 눈을 뜨면 기억나지 않을 꿈. 그런 예감을 하며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꿈을 꿨다.
"...바보 같은..."
"울지 좀 마, 미인이 우니까 보기는 좋다만."
"...멍청한 남자."
진은 답지 않게 울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린다.
‘내가 어떻게 진을 아는 거지?’
붉은 머리카락이 눈물에 엉겨붙어 있다. 새하얀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물을 뚝뚝.
이거 참, 두고두고 놀릴 거리군- 윤하영도, 셀리안 크레이누도 아닌 남자가 생각했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포효하듯 외치는 소리에 ‘윤하영’의 자아가 달아난다. 이제 남은 건 ‘나’뿐이다.
"이딴 나라 필요 없어. 젠장, 왜 '네'가 이딴 나라의 미래까지... 아니 인간 따위 알 게 뭐야."
"...나도 인간인데."
"니가 그냥 인간이야?!"
"그럼?"
"......나쁜놈, 배신자, 네가 인간들만의 왕이었냐. 너는... 우리들의 왕이었잖아. 젠장!!"
쾅쾅, 엔실렌, 엔실렌은 괜히 화만 내며 발을 구른다. 신전 바닥 다 파지겠네. 검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이면서도 울지 않고 그저 화만 낸다. 처음 만났을 때였다면 당장 키오스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텐데 인간 따위라고 욕하면서도 꾹 참고 있는 게 보여 괜히 뿌뜻했다.
"...이딴 나라... 젠장, 너 따위... 수명도 짧고 쓸데없이 정 많은 인간 따위를 선택하는 게 아니었어. 제 수명도 안 채우고..."
그는 눈동자만큼이나 칠흑같이 검은 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 쓸어넘겼다.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머리까지 산발이 되니 산적 같다. 분위기도 완화할 겸 놀리자, 금방 휩쓸려 자신이 진보다 미남이라고 버럭대는 게 또 우습다.
그 모습을 눈에 담다가 시선을 돌려 소녀를 본다.
“안나, 가까이 와.”
"..."
안나... 사랑스러운 안나. 안나는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나를 보며 내 손짓을 따라 다가온다.
"안나, 미안해."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겠다고, 사과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널 혼자 두는 건 역시 가슴 아프다.
"안나한테만 미안하냐. 그래, 같은 인간이라 이거지."
"..."
"걱정마. 언젠가 분명히 다시 만날 거야."
"퍽이나, 인간은 환생하면 기억을 다 잊는 족속이잖아."
깐죽거리는 엔실렌을 진이 퍽 친다. 안나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인다. 사려 깊고 상냥한 눈동자.
"언젠가, 사람들이 더이상 마법 없이도, 아니 이 나라가 마법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일어설 때."
"..."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나 또다른 안나와, 변함없는 엔실렌과 진을 만나러 올 거야."
어느새 조용해진다. 엔실렌도, 진도, 안나도 나를 보고 있다.
"안나, 걱정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다시 한 번 너를 찾아낼 테니까."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안나.
사랑스러운 자들, 나와 함께 해준- 인간이 아니면서도 가장 인간다웠던 나의 친구- 진, 엔실렌.
미련이 남는 것 같아 한심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전했다.
이제 됐다. 숨이 가빠진다. 신전의 마력이 나를 옭아매고, 나의 정신은 어둠속으로 빛 속으로 끝없이 침몰한다.
"아니에요."
침몰 속에서 어렴풋이 안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가 기다릴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은 눈물나게 따뜻한 이야기였지만, ‘나’의 의식이 전환됨에 따라 수면으로 올라온 윤하영은 그 목소리가,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되찾을 테니까.”
그마저도 잠에서 깬 순간 잊어버리고 말테지만.
============================ 작품 후기 ============================
질문의 @는 없지만, 대답을 원하시는 것 같아서/ㅁ/ㅎㅎ 다음화에서 얼핏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만 스포합니다. 엘킨은 셀리안이 살아있을 때 결혼했고(용기가상), 셀리안에게 그 여자를 뺏겼습니다(리안이는바이니까). 그리고 셀리안은 그 여자를 버리고(고래사랑에 새우등 터짐)... 이건 무슨 막장. 이 글에 앞으로 막장설정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일단 셀리안이 전생에 엘킨에게 한 짓이 대부분 막장이라.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아요>ㅁ
에이리엘 님 // 성별은 여자고요. 나이는... 그거 아세요. 29살에 소녀로 보이는 하영이의 설정은 제 소망의 반영이라는 거... 제가 그래요, 소녀로 보이고 싶은데 하영이보다 한 살 어리고 하영이와 달리 그냥 제나이로 보이죠. 가끔 제 나이보다도 많이 들어보일까봐 귀여운 옷을 입어보지만 거울을 보고 짜게 식어요.ㅎ o-<-<